수필 27

벽 - 건축으로의 여행, 에블린 페레 크리스탱

벽 - 에블린 페레 크리스탱 지음, 김진화 옮김/눌와 벽 - 건축으로의 여행에블린 페레 크리스탱(지음), 김진화(옮김), 눌와 벽에 대한 짧은 에세이다. 건축가인 저자는 건축물로서, 우리가 마주 보며 살아가는 공간으로서의 벽에 대한 여행과 생각을 조용히 들려준다. 그 목소리가 매력적인 이유는 그녀가 '벽'을 사랑하기 때문이다. 좋은 수필의 밑바닥에는 늘 '사랑'이 깔려있다. 신체적 접촉을 통해서 얻게 되는 벽에 대한 지각은 차라리 감각적으로 느끼는 기쁨이라고 할 수 있다. 햇볕으로 따뜻하게 데워진 벽에 어깨를 기대고 있으면 우리를 받쳐주고 있는 벽의 든든함과 온기를 느낄 수 있다. 동시에 곧게 서 있는 벽, 견고하게 자리하고 있는 벽을 지각할 수 있다. 휴식을 취한다는 것이 꼭 침대나 땅 위에 길게 누웠..

노년의 즐거움, 김열규

노년의 즐거움 - 김열규 지음/비아북 '한국학의 석학이자 지식의 거장인 김열규 교수!', '한국의 키케로' 김열규 교수의 노당익장老當益壯 분투기! 하지만 책 표지에 있는 이 수사에 비해, 책의 내용은 다소 실망스러웠다. 더구나 군데군데 잘못된 정보도 있었다. 가령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자화상이라고 알려진 스케치가 실제 다 빈치의 자화상이 아니라는 사실은 미술사에 식견이 있는 이에게만 알려진 사실이라고 치자. 하지만 자끄 플레베르의 '아침식사'를 일부만 옮겨놓고 이렇게 적는 건 무책임한 일이다. 이 지루하고 답답하면서도 얄궂은 시는 프랑스의 현대 시인 자크 프레베르의 작품이다. 이는 빈 커피잔과 함께 남겨진 아내가 투덜대는 것이지, 시가 아니다. 잘해야 구시렁댐이고 잘못하면 이혼 사유서 같은 것이다. 할 ..

끔찍하게 민감한 마음, 버지니아 울프

, 버지니아 울프(지음), 정덕애(옮김), 솔, 1996년 문학비평가들이 쓴 문학에세이들 대부분이 그들이 가진 편협한 이론적 시야에 갇혀 일방적인 해석의 늪 속에서 빠져 나오지 못한 채, 잘못된 방식으로 해석하고 왜곡시키는 경우가 많은 반면, 작가들이 쓰는 에세이는 적어도 작품이나 작가를 진실된 눈으로 바라보고 이해하려고 노력한다는 점에서 때로 더 뛰어난다. 버지니아 울프의 이 산문집 또한 그러하다. 19세기, 20세기 영국 문학에 대해 아는 바가 거의 없어도 그녀의 문장은 독자를 배려하며 독자의 눈길 앞에 순결한 그 하얀 살결을 드러내며 초봄의 햇살 같은 미소를 지어 보인다. 고도로 문명화된 사회에서는 위장(僞裝)이 너무나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고 공손함이 너무나 필수적이기 때문에 전통과 의식을 던져 버..

기싱과 커피

교보문고에서 폰 카메라로 찍음. 안방에 나란히 붙은 베란다에, 작은 화분들을 일렬로 내다 놓는다. 3월 햇살 속으로, 광합성 유영. 그리고 대기 속으로 날아오르는 식물들의 숨소리. 하루가 가고. 하루가 가고. 어느새 월요일. 몇 주째 '기싱의 고백'을 읽고 있다. 이 수필을 쓰기 위해 아파했을 기싱을 떠올리면, 뭉클해진다. 희망이 없다거나 미래가 없다거나 하는 말을 하기 위해 시골 구석으로 물러나 생을 마무리하는 어느 소설가. 노년의 쓸쓸함을 알리기 위해 아름다운 문장을 만든다는 건 참 감동적이다. 아마 19세기 이후부터였을까. '이 세상은 살아갈 만한 가치란 전혀 없다'는 걸 알리기 위해 성실하게 살아죽어가는 이들이 늘어나기 시작한 건. 과연 현대적인 것이란 무엇일까. 분명한 것은 Modernity는 ..

내 마음의 무늬, 오정희

오정희(지음), , 황금부엉이, 초판3쇄 산문집을 출판한 뒤, 보름 만에 3쇄를 찍은 이 산문집을 보면서 책 읽는 사람이 없다는 게 꼭 거짓말처럼 느껴진다. 도리어 읽을 책이 없는 것은 아닐까. 신뢰할 만한 작가가 없는 것은 아닐까. 이런 저런 생각이 머리를 휙 돌고 나오고 나온다. 일간지에 실린 광고 생각부터 오정희가 가지는 개인브랜드까지. 얼마 전 어느 신문 기사에 한국 문단은 정부가 먹여 살린다는 짤막한 시평이 실렸다. 소설 써서 정부 지원금 받고 재단 지원금 받고 하면 연봉이 한 이 천 만원 정도 된다는 웃지 못할 글이 신문에 실린 것이다. 진짜 밥벌이용 소설인 셈이다. 소설가는 소설을 출판해 독자를 만나는 것이 아니라 지원금 신청에 사용하고 독자는 독자 나름대로 책을 고르기도, 서점에 가서 책을..

역주 이옥 전집

...... 아침도 아름다웠고 저녁도 아름다웠으며, 맑아도 아름답고 흐려도 아름다웠다. 산도 아름다웠고 물도 아름다웠고, 단풍도 아름다웠고 바위도 아름다웠다. 멀리 보이는 풍경이 아름다웠고 가까운 경치도 아름다웠다. 부처도 아름다웠고 스님들도 아름다웠다. 좋은 안주 비록 없어도 막걸리 또한 아름다웠고 어여쁜 창기 없어도 꼴 베는 노래가 아름다웠다. 요약하면, 그윽하여 아름다운 것이 있었고 상쾌하여 아름다운 것이 있었으며, 훤히 트여 아름다운 것이 있었는가 하면 높이 솟구쳐 아름다운 것도 있었다. 담담하여 아름다운 것이 있었고 화려하여 아름다운 것이 있었으며, 그윽하여 아름다운 것이 있었고 적막하여 아름다운 것이 있었다. 어딜 가도 아름답지 않은 것이 없었으며 누구와 함께 해도 아름답지 않은 이가 없었다...

탁자 위의 세계, 리아 코헨

탁자 위의 세계 (Glass, Paper, Beans) 리아 코헨 지음, 하유진 옮김, 지호 잔뜩 달아오른 아스팔트 거리 위에 한바탕 빗줄기가 밀고 지나간다. 난 그 소리를 들으면서 이 책을 다 읽었다. 책을 처음 손에 들었을 때의 그 상쾌함은 어디론가 사라지고 이거 너무 오랜 시간 동안 잡고 있는 건 아닌가하는 생각에 마지막 부분은 건성으로 책장만 넘기고 말았다. 이 책을 쓴 이에게나 옮긴이에게는 매우 좋지 않은 일이지만. 이 책은 유리, 종이, 커피에 대한 책이며 유리를 만드는 사람, 종이를 만드는 사람, 커피를 만드는 사람에 대한 책이기도 하다. 많은 이야기가 여러 층을 나누어 전개되어 있다. 가령 종이가 생산되는 방식에서부터 종이가 역사적으로 어떤 변천이 겪어왔으며 현재에는 어떻게 소비되고 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