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가위 4

화양연화 In the Mood for Love

밀물처럼 밀려왔다가 사라져가는 시간의 여울 사이로 떠오르는 한줌 알갱이들. 정체모를. 아름다운 시절들은 다들 노랫말 속으로 잠기고 고통은 리듬으로 남아 바람 속에 실리기도 하고 햇살에 숨기도 하는데, 하나의 계절이 가면 어김없이 하나의 계절이 오고 계절풍이 불고 나무들은 빛깔을 잃어버리기 시작하는데, 조수의 리듬에 영혼을 밀어넣고 흔들흔들, 노래를 부른다. *** 위 글은 2002년 10월 27일에 쓴 것이네. 그 사이 화양연화 OST는 줄기차게 들었는데, 이 영화를 다시 보지 않은 건 상당히 지난 듯싶어. 상당히 쓸쓸할 듯 싶은 이 봄, 이 영화를 다시 봐야지. (다시 보면 어떨까. 살짝, 아주 살짝 ... )

화양연화와 겹쳐지는 내 일상

눈 앞에 펼쳐지는 색들이 변했다. 조금 투명해지고, 조금 분명해지고, 다소 차갑고 냉정해졌으며, 약간 쓸쓸해졌고, 그리고, 그리고, 지난 더위에 지친 표정으로 흔들거리며 색채가 퍼지며 사라졌다. 온도가 내려갔고 바람이 불었고 사람들은 숨길 수 없는 불안을 숨기며 웃었다. 아니, 울었다. 실은 그게 웃음인지 울음인지 나는 알지 못했다. 말을 하고 싶었으나, 단어가 떠오르지 않았고 문장이 만들어지지 않았고 내 존재의 집은 나에게 아무 말도 없고 내 곁을 떠났다. 화양연화를 떠올리며 십 수년 전, 화양연화를 혼자, 극장에서 보고 난 다음 월간지 기자와 술자리에 티격태격했던 걸 추억했다. 그 땐 '사랑의 현실에 타협한 왕가위'를 비난했으나, 내가 그 나이가 되어보니 왕가위가 옳았음을 알게 된다, 되었다. 간밤 ..

아비정전, 혹은 그 해의 슬픔

오전 회의를 끝내고 내 스타일, 즉 상대방의 말을 귀담아 듣고 난 다음 판단하려는 이들은 단단한 마음을 가져야 한다는 사실을, 5월의, 낯선 여름 같은 대기 속에 느꼈다, 강남 차병원 사거리에서 교보생명 사거리로 걸어가면서. 하루 종일 전화 통화를 했고 읍소를 했다. 상대방이 잘못하지 않은 상황에서, 강압적으로 대화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하지만 어떤 일은 급하게 처리되어야만 하고, 내가 하지 못하는 일이니, 읍소를 할 수 밖에 없었다. 다수의 외주사를 끼고 프로젝트를 수행하는 내가. 5시 반, 외주 업체 담당자, '내가 IT 개발자 출신인가'하고 묻는다. 차라리 '작업하는가'라는 물음이 나에게 더 어울린다고 여기는 터인데. (* 여기에서 '작업'이란 '예술 창작'을 의미함) 그리고 오늘 '멘탈붕괴'라는..

동사서독, 혹은 '잊으려고 노력할수록 더욱 선명하게 기억난다'

아직도 '시나리오'를 쓰고 싶다(시나리오보다 소설이 먼저겠지만). 아주 짧게 끊어지는 화면들과 아주 길게 이어지는 화면들로 구성되는, 지루하고 깊고 이해하기 어려운 대화가 오가는, 하지만 너무 슬프고 후회스럽고 아픈 스토리의. 네이버 블로그를 정리하다가(예전에 썼던 글을 티스토리로 옮기는), '동사서독'을 떠올렸다. 몇 번을 보았는지 모르겠다. 한국에 공개된 '동사서독'과 영화제에 출품된 '동사서독'이 다르고, 몇 년이 지난 후 '디렉터컷'이 새로 나왔다는 이야기도 들었다. 나에게 아직 영화에 대한 열정이나 호기심이 남아있는지 잘 모르겠지만, 아마 이야기와 화면(공간구성, 혹은 미장센), 운동과 시간에 대한 열정이나 호기심은 남아있을 듯... 이 영화, 꽤 슬픈 사랑이야기다. 아니, 아주 많이 슬픈. 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