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 229

담배 피우는 우리들의 피터팬

보건복지부에서 만든 금연 캠페인 홍보물이다. 하나는 백설공주가 나쁜 마녀한테서 사과 대신 담배를 건네 받는 그림이고 하나는 피터팬이 담배를 피우다 할아버지가 된 그림이다. 그런데 피터팬 그림은 이래저래 심금을 울린다. 그건 담배 때문이 아니라, 세상이 얼마나 안 좋아졌으면 피터팬으로 하여금 담배를 피우게 만들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담배를 피우다가 늙은 것이 아니라 세상이 이미 피터팬에 많은 상처와 고통을 주었고 늙지 않는다는 피터팬도 천천히 늙어버린 것이다. 그리고 그는 결국 담배를 피우면서 신세한탄조의 표정으로 물끄러미 먼 산을 쳐다본다. 그러고 보면 힘든 세상, 벗이 되는 건 술과 담배 뿐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 너무 위험한 생각인가. 크) - 2005년 8월 19일 토요일 아침 커..

Summer Clouds, Summer Rain

간밤에 잠을 설쳤다. 일요일 오후에 낮잠을 잤고 밤 늦게 푸짐한 저녁 식사를 한 탓이다. 집 근처 홈플러스 마트에 갔더니, 프랑스산 삼겹살 1KG을 9,800원에 팔고 있어서, 이를 소주, 맥주와 함께 먹었는데, 12시간이 지난 지금까지 소화를 못 시키고 있는 듯한 느낌이다. 냉동 삼겹살이라 고기는 다소 질겼다. 먹지 못할 수준은 아니었지만, 싼 가격을 감수해야 했다. (그건 그렇고, 삼겹살 가격은 떨어지지 않을 것인가?) 오전에 사무실에 도착해 두 번의 회의를 했더니, 오전 시간은 다 지나가버렸고, 수면 시간이 채 3시간이 되지 않는 터라 점심식사 대신 낮잠을 택했다. 의자에 기대어 잠시 눈을 부치는 수준이었으나, 한결 나아졌다. 투명한 유리창으로 밀려드는 햇살의 두께와 밀도, 밝기는 한 여름날의 그것..

미지의 칠월

어두컴컴한 하늘 너머, 마치 어떤 이가 황금빛 바가지 가득 물을 담아 아래로 붓는 듯, 세차게 긴 비가 내렸다. 2011년, 미지의 칠월이다. 끝없이 모래의 대지가 펼쳐진 서남아시아에서 넘어와, 어떤 우여곡절 끝에 검고 딱딱하게 변한 아스팔트는 단단했고 중국 어느 공장에서 만들어져 서울까지 운반된 우산은 튼튼했다. 방송통신대학에서 영문학을 공부하고 있지만, 공부란 늘 그렇듯 끊김 없는 시간과 여유로운 집중을 요하는 것이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직장인 내가 이것이라도 하고 있음이리라. (하지만 내 기대와 달리, 객관적인 기준으로 볼 때, 과연 내가 공부를 하고 있는 것일까 하는 의구심을 떨쳐낼 수 없다.) 세차게 비가 내렸다. 남청 색 신발이 빗물에 젖었다. 빗소리에 가려, 차소리, 걸음소리, 숨소리, ..

책상 위 화분

내가 식물을 기르기 시작한 것이 언제였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아마 최초는 여러 번의 실패를 거듭했을 것이고 몇 번은 아파했을 것이다. 그러다가 어느 날, 말 없는 식물이 침묵과 쓸쓸함 속에서 잘 자라주었고, 그렇게 몇 년이 지났을 것이다. 사무실 책상 한 켠에 화분을 놓아두고 그 옆엔 낡은, 자신의 노년을 겨우 지탱해나가는 캔우드 리시버 앰프를 놓아두었다. 화분은 소란스럽고 건조한 사무실을 잘 견디었고, 오래된 캔우드 리시버 앰프는 몇 명의 주인을 거쳐간 다음, 나에게 왔지만, 가끔 자신의 처지를 슬프하는 듯한 날카로운 소리를 내기도 했다. 오늘은 화분을 들고 건물 옥상에 올라가 얇게 내리는 비와 계절과 계절 사이의 바람 속에 놓아 두었다. 비와 바람은 옛날 이야기를 내 귀에 속삭였지만, 모던 사회에..

흐린 물가에서의 워크샵

월요일부터 화요일까지 상반기 회사 워크샵을 갔다왔다. 몇 가지의 프로그램을 진행했고 여느 회사와 같이 힘들어하는 직원들의 이야기를 들었고 그간 쌓인 스트레스를 이야기 했다. 오랜만에 술에 취했고 마지막은 기억이 나질 않았다. 새벽 세 시 넘게 술을 마셨으니... 언젠가 읽은 신문 기사에 산소가 많은 숲 속에서는 빨리 피로가 풀린다고 했다. 그래서 도시를 벗어난 숲 속에서는 술을 많이 마시더라도 술이 일찍 깨고 피로함을 덜 느낀다고. 그래서 그런 걸까. 몇 주 나를 힘들게 하던 현기증이 사라졌다,고 믿었다.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 그 현기증이 다시 오긴 했지만) 춘천시 인근 한강 옆이라 운치 있었지만, 발을 헛딛어 삐고 말았다. 발목이 퉁퉁 부었다. 급기야 오늘 아침 출근길에 한의원에 들려 침을 맞고..

현기증의 하루.들.

매일 팀원들과 하루 일과를 담은 보고서를 작성한다. 이름하여 일일보고서. 그런데 그 보고서를 마지막으로 쓴 게 2주 전이었다. 그 사이 나는 매일 야근을 했고 주말에도 사무실에 나가 일을 했다. 상당량의 스트레스가 육체를 자극했고 적당한 고립감과 쓸쓸함이 내 사무실 책상 위를 훑고 지나갔다. 그러는 동안 2주는 순식간에 지나갔다. 대형 IT 프로젝트의 제안서를 거의 혼자서 썼고, 어제서야 비로소 제안 발표를 했다. 아직도 400명 앞에서 벌벌 떨며 했던 발표가 기억에 선한데, 지금은 제안 발표 때 긴장하지 않는다. 그런데 긴장하지 않는다는 건 내 착각일지도 모르겠다. 지난 주초부터 침대에 누우면 현기증이 심하게 일었다. 마치 먼 바다에서 밀려오는 파도 위에 몸을 실은 듯이. 노년의 의사에게 들은 바로는,..

어느 일기

1. 화요일이었나, 아니면 월요일이었나... 봄비가 내리는 서울역 맞은편 카페에 잠시 앉아 있었다. 어수선한 거리 분위기와 달리 카페 안은 조용했다. 창 밖 우산의 색이 밝고 화사하게 보여, 불투명한 우리 삶과는 대비되어 보이는 오후였다. 지난 십년 간의 시간이 주마등처럼 스치고 지나갔다. 끊임없이 부족함을 느꼈던 삼십대였고, 그건 지금도 마찬가지다. 책을 읽고 글을 쓰지만, 그건 내 주업이 아니고 그림을 보고 글을 쓰지만, 그것도 이젠 주업이 아니다. 내가 하고 싶은 일이란, 책을 읽고 그림을 보고 글을 쓰는 것일까, 아니면 내가 원하는 대로 뭔가 가치 있는, 특히 예술계에세 기여할 수 있는 어떤 사업일까. 아직도 잘 모르겠다. 하긴 하고 싶은 대로 살았으나, 정작 하고 싶은 일은 하지 못한 느낌이 들..

걸어가면서 슈베르트의 피아노 소리가 듣고 싶었다.

대출 기한을 넘긴 책을 도서관에 반납했다. 반납하는 내 손에서 먼지 냄새가 났다. 발바닥에 굳은 살이 일어났다. 마치 지구 밑바닥을 흐른다는, 내가 태어나서 한 번도 직접 보지 못한 용암을 향한 뜨거운 사랑을 표하듯, 2011년의 봄이 오는 속도로 굳은 살들이 허옇게 올라왔다. 나는 무인 대출반납기에 서서 책 한 권을 반납했다. 여러 차례 버스를 갈아타고 여러 차례 햇살이 비치는 곳과 그늘 진 곳을 번갈아가며 낡고 오래된 갈색 구두 굽이 보도블럭에 닿는 소리를 들으며 걸었다. 구두굽은 보도블럭을 사랑하는가 보다. 그 소리가 그렇게 상쾌하게 들릴 수가. 회사 일 때문에 요 며칠 한남동으로 출퇴근을 하고 있다. 오늘은 이태원에서 내려 한남동으로 걸어갔다. 가는 길에 커피 몇 잔을 사 들고 걸어갔다. 걸어가면..

어느 토요일의 일상

이번 경우는 이렇게 씌어 있었어도 괜찮았을 지 모르겠다. "나는 여러분 속의 한 사람, 한 알의 씨앗이다. 여러분 중 한 사람인 것이다. ... ... 빛나고 ... ... 진동하고 ... ... 작열하는 씨악이다......" 어느 날 나는 국립도서관에 있었는데, 쉰 안팎의 토끼털 모자를 쓴 부인이 내가 있던 책상 앞으로 다가와선 다음과 같이 말하며 쭈뼛쭈뼛 손을 내밀었다. - 르 끌레지오, '사랑하는 대지' 중에서 낡고 오래된 책을 꺼내 기억하는 몇 문장을 되새겨본다. 그리고 이 일상도 거대한 지구의 운동 앞에서 그 어떤 가치도 없다는 것을 깨닫는다. 지난 토요일의 일상을 오늘에서야 정리할 수 있었다. 회사에서의 일이 갑자기 많아졌고 이를 헤쳐나가기가 어려울 지경에 이르렀다. 그러자 몸에 이상이 왔다...

목요일 새벽의 단상

아무 것도 서술할 수 없기 때문에 칸트의 물 자체는 라깡의 현실적인 것처럼 상징화에 저항하는 암호이고, 신(그에 관해서는 우리는 일정한 속성들을 서술할 수 있다)보다도 더 수수께끼적인 것이고, 한갓 부재의 기호이다. - 테리 이글턴, '미학사상' 중에서 약간의 스트레스, 부자연스러움 속에서 일상을 보내고 있다. 책읽기는 예전만 못하고, 글쓰기 또한 마찬가지다. 문장은 헛된 상상에 미끄러지고 발걸음은 무거워지고 있다. 상상의 나래란, 마치 닿을 수 없는 흰 구름과 같아서, 이 세계 전체가 하나의 거대한 감옥처럼 여겨지기도 한다. 다행스러운 것은 변화라는 것이 적당한 자극이 되어, 하루하루가 모험이 되고 있다. 아침에 일어나 테리 이글턴의 책을 펼쳐보다, 위 문장을 되새겨 읽었다. '물 자체 = 부재의 기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