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 229

어느 일요일의 닫힌 마음

일요일의 평온함이 사라졌다는 사실을 오늘에서야 깨달았다. 지난 연말부터 시작된 내 마음의 무너짐은 거침없이, 일상을 불규칙한 감정의 소용돌이 속으로 몰아넣었고, 자주 불투명한 인식과 판단, 혼란과 착오, 표현력의 빈곤과 부딪히게 만들었다. 생각이 사라지는 법이 없었지만, 그렇다고 내 존재가 드러나는 것은 아니었다. 데카르트의 잘못은 아니다. 우리 삶이 한 번도 명증한 확실성 위에 있었던 적이 없었고 그저 그렇다고 여겼을(인식했을) 뿐이고, 데카르트도 그랬을 뿐이다. 플라톤의 번역서 한 권을 사러 나갔다. 광화문으로. 근처 흥국생명 빌딩으로 향했다. 망치질 하는 사람이 눈에 들어왔다. 세계적인 설치 미술이자 공공미술(public art)이다. 이 작품이 설치되어 있는 것만으로도 유명세를 치를 만 하지만, ..

어느 월요일 새벽

일본의 어느 공장에서 나온 지 30년은 더 되었을 파이오니아 턴테이블은 잘만 돌아가는데, 중국의 어느 공장에서 나온 지 불과 10년 남짓 지난 티악 시디플레이어는 요즘 들어 자주 지친 기색을 드러내었다. 하긴 나도 요즘 너무 지쳐버렸다. 너무 힘들어서 쓰러지고 싶지만, 쓰러지지 않는 걸 보면 나이를 괜히 먹은 것 같지 않다. 작은 회사에 들어와서, 기획에, 홍보마케팅에, PM에, 경영 관리에, 인사에, 영업에, … 내가 도대체 무슨 일을 하는 사람인지 모를 정도로 바쁘게 지내왔다. 그런데 요즘 문득 내 자리가 과연 어디인지 궁금해졌고 끝없는 자괴감에 빠져들었다. 고객사를 2배로 늘렸지만, 온전히 내 성과로 보기 어렵다. 문서 작성이야 도가 텄지만, 과연 문서가 비즈니스의 성패를 좌우하는가에 대해서도 이젠..

내 마음의 이파리

4월의 투명하고 쾌적한 햇살이 푸석푸석하게 말라 거칠어진 내 볼에 부딪쳐 흩어졌다. 하지만 햇살 닿은 곳마다 어둡게 부식되어갔다. 내 마음이. 대기가 밝아지는 만큼, 딱 그 만큼 내 마음의 어둠은 깊어졌다. 봄이 싫은 이유다. 태어나 꽃을 꺾어 본 적이 손가락으로 꼽을 만큼 적지만, 선량한 꽃들은 나를 피하며 저주했다. 어둠은 깊어지며, 눈물을 흘렸고, 달아오른 고통은 고여있는 물기를 발갛게 데우며 온 몸을 축축하게 젖게 만들었다. 변하는 계절이 싫은 이유다. 변하는 마음이 싫고 늙어가는 생이 싫다. 싫어하는 것들이 늘어날수록, 딱 그 만큼 세상은 밝아지고 투명해지며 높아져 간다. 아니 높아져갔다. 이미 죽은 이들의 글을 좋아하는 이유다. 살아있는 이들의 글에서 풍기는 생명력이 가지는 밝음은 마치 끝없는..

요리와 일상

요리사가 되고 싶은 생각은 없지만, 내 작은 소망 리스트들 중 하나는 일요일 오전 가족보다 먼저 일어나 주말 아침 식사를 준비하는 것이다. 신선한 과일과 야채로 샐러드를 만들고 부담스럽지 않으면서 든든한 일요일 아침 식사로, 행복한 일요일을 보낼 수 있는 육체의 준비. 그러나 21세기 초 서울, 나는 그 무수한 나 홀로 집안들 중의 하나로, 이젠 혼자 밥 지어 먹는 것마저도 힘들어 굶거나 식당에서 아무렇게나 먹기 일쑤다. 나를 위해서 요리하는 것만큼 궁상맞은 짓도 없다. 요리란 참 근사하고 아름다우며 행복한 행위인데, 나를 위해 뭔가 만들고 있노라면 참 서글픈 생각이 앞선다. 나에게 그런 요리의 기회가 자주 찾아오길 기대할 뿐이다. 몇 장의 사진을 올린다. 테터앤미디어에서 명함을 보내주었다. 근사한 명함..

논리와 현실, 그리고 우리 삶의 불투명성.

기분을 상하게 하는 일이 있었고, 마음을 불편하게 하는 일도 있었다. 그리고 문득 내 나이를 떠올리게 되는 일이 많아졌다. 그러자 아팠다. "상이한 두 개의 세계에서 일했습니다. 국영은행 시절 나는 국가의 돈을 가지고 화폐와 대출정책을 실행했습니다. 내가 결정을 내려야 할 때 최우선 순위는 다음과 같았어요. 첫째, 이 정책이 국가와 사회를 위해 어떻게 기여할 수 있을까? 둘째, 이 정책은 기업과 노동을 위해서도 유익할까? 그리고 세 번째 순위에 가서야 이 정책이 은행에도 유익할 것인가를 따졌습니다. 사적 자본을 위해 일할 때에는 우선 순위가 전도되었어요. 이 정책이 은행에 유익할까에 대한 질문이 우선이었지요." - 에드가 모스트(동독 출신의 경제학자), 자서전 '자본을 위해 봉사한 50년' 중에서 인용...

저주받은 성, 파블로 네루다.

저주받은 城 파블로 네루다 지금 (추원훈 옮김) 내가 걷고 있는 동안 보도블럭은 내 다리를 두들겨 패고 있고, 별들의 찬란한 빛은 내 눈을 부숴뜨리고 있다. 창백한 그루터기만 남은 밭에 자욱을 남기고 비틀거리며 가는 마차에서 밀알이 떨어지듯 갑작스레 내게도 어떤 생각이 떠오른다. 오오 누구도 결코 챙겨 놓지 않은 길 잃은 생각들, 말이 내뱉어졌다면, 느낌은 내부에 남아있는 법. 여물지 않은 이삭, 악마는 그것을 공간에서 발견할 테지, 나는 망가진 눈으로 그걸 찾으려 들지도 발견하지도 못하리라. 나는 망가진 눈을 하고 끝없는 길을 쉬임없이 간다… … 왜 생각의 길을, 왜 헛된 삶의 길을? 바이올린이 부서지면 음악이 죽어 버리듯 내가 손을 움직이지 못할 때면 내 노래도 감동을 주지 못하리라. 내 가슴 깊은 ..

2월 26일: 구로디지털단지, 어느 스타벅스 안에서.

쓸쓸하고 우울한 따뜻함으로 채워진 대기가 건조한 빛깔의 벽과 푸른 하늘의 흰 구름을 둔탁하고 어두운 표정으로 반사하는 유리로 지어진 빌딩 사이로 내려앉고 있었다. 봄이라고 하기엔 아직 이른 날씨지만, 이름 없는 행인들의 표정은 잔뜩 상기되어 있었다. 마치 불확실한 미래에 대한 딱딱한 염려가 섭씨 10도를 넘나드는 대기의 온도로 녹아 사라질 거라 믿는 듯 보였다. 신도림에서 미팅을 끝내고 구로디지털단지로 왔다. 노트와 펜을 샀다. 이동 중에, 아무렇게나 들른 가게에서 노트와 펜을 살 때면, 어김없이 여행을 떠나기 전의 기형도가 떠오른다. 이젠 시간이 많이 흘러, ‘세월’이라는 표현이 적당할 법한 과거의 인물이 되어버렸고, 기형도가 파고다 극장에서 그의 조용한 생을 마감할 때보다 더 나이가 든 나에게, 세상..

어수선한 마음의 일요일 아침의 말러Mahler

어제 밤에 전 직장에서 사용하던 HP 노트북의 OS를 새로 깔았다. 무려 세 시간이 넘게 걸렸다. 그 사이 아무 짓도 못했다. 스트레스가 의외로 심했다. 그 탓일까. 일요일 아침 쉬이 기분이 펴지지 않는다. 나쓰메 소세키의 '그후'에 대해 글을 써보려고 했으나, 되지 않았고 얼마 전에 끝난 조안 미첼의 전시를 떠올리며 뉴욕타임즈 웹사이트에서 구한 그녀 작품에 대한 몇몇 기사를 읽었다. 그 중에서 기억하는 문구. an orgiastic battlefield, 주신제의 전쟁터, 술 마시며 난리를 피우는 전투장, ... 어쩌면 미 추상표현주의가 orgiastic battlefield가 아닐까. .. 어쩌면 모든 예술 작품이, 우리 마음이, 우리 사랑이. 낡은 파이오니아 턴테이블에 카라얀의 베를린 필이 연주한 ..

11월 29일 토요일

다이스케는 잠시 이야기를 멈추고 우메코의 어깨 너머 커튼 사이로 맑은 하늘을 기웃거리며 보고 있었다. 멀리 커다란 나무 한 그루가 시야에 들어왔다. 옅은 갈색의 새 잎이 돋아나고 부드러운 나뭇가지 끝이 하늘과 맞닿은 곳은 이슬비에 젖은 것처럼 뿌옇게 흐려 있었다. - 나쓰메 소세키의 ‘그 후’(민음사), 48쪽~49쪽  그는 지난 주 내내 전날의 피로의 채 가시지 않은 직장인들이 빼곡히 들어찬 출근길 지하철 객차 안에서 서서 읽은 나쓰메 소세키의 소설 한 문단을 떠올렸다. 한 때 문장을 지어 사람들에게 읽히는 것이 꿈이었으나, 누군가의 삶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적는다는 것이 주제넘은 일이라는 생각에 그만 두었다. 하지만 형편없는 글을 소설이라고 발표해대는 요즘 작가들의 글을 읽곤 암담해지는 기분은 어쩌질..

어느 목요일 밤...

목요일 저녁 7시, 도시의 가을, 차가운 바람 사이로 익숙한 어둠이 밀려들었다. 그 어둠 사이로 보이지도 않는 자그마한 동굴을 파고 숨어 들어간 내 마음을 찾을 길 없어, 잠시 거리를 걸었다. 삼성동에서 논현동까지. 마음이 지치기도 전에 육체가 먼저 지쳐버리는 10월의 나날들이 이어지고 있다. 나이 탓이라고 변명해보지만, 그러기엔 난 아직 너무 어린 마음을 가지고 있다. 너무 어린 마음이 늙은 육체를 가졌을 때의 그 비릿한 인생의 냄새를 가지고 있다. 그 냄새를 숨기기 위해 하루하루 노력하고 있었다. 하지만 요즘 어떻게 된 일인지, 어린 마음이 지치기도 전에 육체가 먼저 지쳐버렸다. 이 세상이 익숙해진 육체에겐 그다지 어려운 일도 아닐 텐데. 요 며칠 하늘은 정말 푸르고 높았지만, 그건 고개 돌린 외면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