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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아란 영혼


내가 수줍게 사랑하고 좋아했던 배우이자, 극작가이며, 소설가였던 샘 쉐퍼드Sam Shepard가 73세의 나이로, 수다스러우면서도 지독히 쓸쓸했던 이 세상과 헤어졌다. 

나는 그가 부러웠다. 그의 재능이며, 그의 언어가, 그의 표정이. 

나이가 든다는 것은 그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은 채, 정말 좋아하고 사랑하며 혼자 숨겨두었던 존재들이 나에겐 알려주지 않고 마음대로 이 세상을 떠나 저 세상으로 사라진다는 것이다. 

모나드에서 모나드로 연결고리는 없겠지만, 모나드 바깥에선 단절된 모나드들을 볼 수 있으리라 한 때 생각했지만, 태어남-죽음은 하나의, 일체의 모나드임을. 

우리 각자는 그 속에 웅크리고 앉아 정해진 궤도를 돌아다가 사라진다. 하지만 그 궤도가 얼마나 우아해질 수 있는지, 한 번 보여주자. 샘 쉐퍼드를 떠올리면서, 천천히 그의 부고 기사를 읽으며. (아. 젊었던 그가 나왔던 테렌스 멜릭의 <<천국의 나날들Days of Heaven>>은!! 혹은 줄리 델피와 함께 나왔던 <<Voyage>>는 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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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Knight, Death and Devil  기사, 죽음 그리고 악마

Albrecht Dürer 알브레히트 뒤러 

1513, Copperplate 동판화

 

 

기사 옆으로 죽음과 악마가 그가 가는 길을 방해한다. 이 명료한 동판화는 르네상스 시기의 신념을 보여준다고 할까. 인간이 가는 길을 과거의 유물들 - 죽음, 악마 - 이 훼방 놓으며 가지 못하게 한다. 알브레히트 뒤러는 종종 후기 고딕적 양식을 보여주기도 하지만, 그의 사상 만큼은 근대적이다.  


여기에 등장하는 기사는 도상학적으로 진리를 수호하는 자로 해석된다. 과거 종교인이 가졌던 역할을 이제 기사가 가지게 된 것이다. 이 극적인 변화는 르네상스 시기를 문예부흥의 놀랍고도 아름다운 시기가 아니라, 급속하게 변화하는 혼돈기였음을 짐작케한다. 결국 고딕적 신앙이 뒤로 물러나고 기하학적 이성이 그 자리를 차지한다. 본격적으로 서구의 근대(modern)이 시작되고, 그 이후 거친 풍랑 속에서도 이성을 버리지 않는다. 


거의 1세기 후에야 철학에서 근대적 이성을 이야기하게 된다는 점을 비추어 볼 때, 예술에서의 이러한 선취(先取)는 놀랍기만 하다. 이는 예술의 역사를 통해 자주 있는 일이기도 하다. 그래서 내가 예술사에 빠진 이유이기도 하지만, 동시대 예술을 유심히 살펴보다 보면, 앞으로 펼쳐질 세계를 짐작하고 예견할 수 있다. 


까뮈의 <이방인>이 나왔을 때, 그 충격은 대단했다. 심지어 프랑스에선 이 소설을 도덕 교과서로 읽히곤 한다. 이유없는 살인은 용서될 수 없다고. 하지만 우리는 이유없는 살인을 너무 자주 목격하고 있지 않은가. 아마 까뮈도 자신의 '뫼르소'가 그토록 많이, 현실 속에 등장하리라 생각하지 않았을 테지만. 


양식(style) 상, 뒤러의 모든 작품들이 근대적이진 않다. 그는 양식적으로는 후기 고딕과 하이 르네상스(르네상스 고전주의) 사이를 오간다. 하지만 그가 외부 세계와 마주했던 태도는 르네상스 시기 그 어느 예술가들보다도 근대적이고 이성적이었다. 뒤러가 끊임없이 연구되며 후대의 사람들을 감동시키는 이유도 여기에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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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 28일 늦은 밤. 





25층 아파트 옥상으로 맨 발의 여자가 눈이 풀린 채 올라갔다는 이야기를 치킨 배달원한테서 전해들었다. 

... ... 

그리고 우리에겐 아무런 해결책이 없다는 걸 알았다. 

여기저기 전화를 하고 ... ... 

그리고 결국 나도 올라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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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요일 저녁, 레비나스에 대한 리뷰를 읽다가 레비나스의 문장을 옮겨적는다. 아련한 느낌이 든다.




주체가 어떠한 가능성도 거머쥘 수 없는 죽음의 상황으로부터 타자가 함께 하는 실존이라는 또 다른 특성을 끌어낼 가능성이 있다. (... ...) 미래는 손에 거머쥘 수 없는 것이며, 우리에게로 떨어져서 우리를 엄습하고 사로잡는 것이다. 미래, 그것은 타자이다. 미래와의 관계, 그것은 타자와의 관계 그 자체이다. 오로지 홀로 있는 주체 안에서 시간을 이야기한다는 것, 순수하게 개인적인 지속에 관해서 이야기한다는 것은 우리에게 불가능해 보인다. 

- <<시간과 타자>> 




죽음이 확실함일 수 있다는 것은 확실하지 않으며, 또 죽음이 무화의 의미를 가진다는 것도 확실하지 않다. (... ...) 현존보다 더 영향을 미치는 파열, 선험성보다 더 선험적인 선험성, 죽을 수 밖에 없음, 이것은 예측으로 환원할 수 없는 시간의 양상이며, 비록 수동적이지만 경험으로, 무의 이해로 환원될 수 없는 시간의 양상이다.

- <<신, 죽음 그리고 시간>> 




 나이가 들수록 '현 미래는 적대적이다'라는 생각을 떨치지 못한다. 나만 그런 것일까. 어제 하루 종일 컨디션이 좋지 못했다. 기분이 좋지 않았고 울적하기만 했다. 


그리고 사무실에서 거의 마지막으로 퇴근하고 난 뒤, 집에 오자마자 식사를 하고 바로 뻗었다. 하긴 그 시간도 오후 10시를 넘겼더라. 시간은 속절없이 흐르기만 하고, 내 인생의 열차는 끝도 없는 어두운 터널로 들어가는 듯하기만 하다. 


이번 겨울, 레비나스의 책 몇 권을 읽어야 겠다. 




시간과 타자

엠마누엘레비나스저 | 문예출판사 | 1996.01.30

출처 : 반디앤루니스 http://www.bandinluni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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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의 기억 속에 남아 있고 싶어. 아버지는 죽지 않으려면 누군가의 기억 속에 살아 있어야 한다고 가르쳤잖아." 
- '서쪽부두' (베르나르 마리 콜테스의 희곡)의 샤를르의 대사


속절없이 시간은 흘러, 이제 내년이면 나도 마흔이 된다. 서른부터 마흔까지 너무 길었다. 스물부터 서른까지는 무척 짧았다는 생각이 든다. 태어나서 스물까지는 기억 나지 않는다. 나이가 들수록 슬픈 플라톤보다 현실적인 헤라클레이토스가 부럽다는 생각이 드는 왜일까.


베르나르 마리 콜테스. 현대 프랑스 최고의 희곡 작가. 찾아서 읽어볼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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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든 남자만큼 안타깝고 슬프고 절망스러운 사람도 없을 것이다. 종종 우리들은 성직자들에게서 ‘철 들었다’는 느낌을 받기도 한다. ‘철들다’의 사전적 의미는 ‘사리를 분별하여 판단하는 힘이 생기다’이니, 성직자들에게는 종교적 관점에서 사리를 분별하고 판단하는 힘이 있기도 하다. 하지만 여기에서 문제는 ‘종교적 관점’이 될 것이다. 성직자들은 신앙을 향한 ‘철없는 열정’을 숨기고 있다. (즉, 모든 열정은 철없음의 소산이다!) 마음 속에서는 늘 자신들이 믿는 신을 향한 끝없는 신앙심을 숨겨져 있는 탓에, 그들은 자신의 생을 이어나갈 수 있는 것이다.

가끔 철든 남자를 만나기도 한다. 그러나 그건 병상 위의 남자다. 죽음을 향해 가는 남자. 자신의 생명력이 부질없음을 깨닫는 그 순간, 남자는 갑자기 철이 든다.

그리고 사리를 분별하여 판단하며, 그것을 병상 주위에 몰려든 사람들에게 이야기하곤 한다(가끔 이 때까지도 철이 들지 않는 남자가 있기도 한데, 이 경우에는 이미 사라져가는 생명력을 철없음으로 인위적으로 포장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건강이 다시 좋아져, 병상을 벗어나는 순간, 그 남자를 둘러싸고 있던 ‘철 들었다’라는 동사는 마치 사막의 신기루처럼 사라질 것이다.

결국 (여성의 입장에서) 철 든 남자란 없고, 남자가 철이 든 순간 남자로서의 존재 의의를 상실하게 될 것이다.

여성의 입장에서 다소 위안이 될 수 있는 것은, ‘철 들었다’는 것에 대한 기준점이 있다면, 남자의 건강 상태와는 무관하게, 세상의 거친 풍파와 여성의 사랑, 또는 잔인한 훈육을 통해 어떤 남자는 그 기준점에 가까이 다가가기도 하고, 멀어지기도 한다.

다행히 나는 아직 철이 들지 않았다. 다만 철 들었다는 기준점(만약 존재한다면)에 10년 전보다 가까이 다가갔을 뿐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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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소현님의 페이스북/트윗 보시고 쓰신 글 같아서 냅다.. 주소를 업어갑니다.ㅋ
    남자랑 여자랑 같은 인간인데도 왜이리 다른 점이 많은지..ㅎㅎ
    항상 꾸준히 잘 읽고 있습니다.
    -미니 드림^^-

    • '철든다'라는 단어에 강박증을 가지고 있지 않나 싶습니다. 모든 면에 철들 순 없거든요. 그런데 모든 것에 철들기 바라는 시선이 있는 것같아요.. ^^~



이런 생각을 해보면 어떨까. 과연 이 세상은 어떤 방식으로 구성되어 있는 걸까? 그리고 새로운 것을 알게 되었을 때 우리 인간은 맨 먼저 무엇을 할까?

새로운 것을 알게 되면 우리 인간은 그 새로운 것에 대해 이름을 붙이고 그것을 설명한다. 그러다가 그 설명하기에서 막히면 새로운 단어와 표현을 만들어 붙인다. 즉 이 세상은 우리의 언어와 같이 보이고 표현되고 구성되어 있다. 이 세계는 언어처럼 구조화되어 있다. (이것이 비트겐슈타인을 위시한 현대 철학자들의 생각이다.)
 
그런데 정말 그렇지 않은가. 우리는 우리가 보고 경험한 세계를 언어로 표현하고 옮긴다. 딱 우리가 알고 있는 언어만큼만 옮긴다! 언어로 표현할 수 없는 세계는 없는 세계이다. 종종 있지만, 표현하지 못하는 세계가 있다. 가령 누군가가 오백년 전에 '아파트'와 같은 주거 시설을 생각했을 수 있다. 그 때는 '아파트'라는 단어가 없었으므로, 아마 그런 사람이 있다면 자신의 생각을 그림으로 그리고 이에 설명을 붙였을 것이다. 한 마디로 표현하지 못했지만, 그래도 표현할 수 있는 세계였던 셈이다. 그리고 이러한 새로운 단어나 개념, 표현의 창시는 주로 예술가의 몫이다. 그들의 주도로 이 세상은 풍성해지고 다채로워진다. 또는 이런 식으로 설명할 수도 있겠다. 우리에게는 푸른 색도 있고 푸르딩딩한 색도, 푸르스름한 색도 있지만, 이런 단어가 없는 나라에서는 없는 색이다. 이와 반대로 그 나라에는 있지만, 우리 나라에는 없는 것이 있다.
 
하나의 언어를 안다는 것은 하나의 새로운 세계를 안다는 것이다. 따라서 한 나라 말에서 다른 말로의 완벽한 번역이란 존재할 수 없다. 다른 언어를 사용하기에 다른 문화를, 다른 삶의 태도를, 다른 가치관을 가진다. 그리고 다르게 세상을 보고 살아간다. 심지어 동물 울음소리도 다르게 듣고 다르게 표현하지 않는가.

각각의 언어마다 그 언어에 대응하는 하나의 세계가 있다. 그리고 그 세계 속에는 다른 나라와 겹치지 않는 특별한 영역이 존재한다. 그 영역은 우리 인류가 확장할 수 있었던 세계 인식의 한 극점을 이루고 있다. 사용하고 있는 언어만큼만 세계를 바라보고 그렇게 살아간다. 

고유한 언어의 중요성은 여기에 있는 것이다. 사라지는 언어를 보존해야 하고 그 언어를 계속 사용하고, 뛰어난 예술가들이 나와서 그 언어로 새롭고 창조적인 언어적 구조물을 만들어내야 한다. 

하지만 세상은 단일 언어로 향해 가는 듯 싶다. 그러면서 우리 인류는 전체적으로 한 발 한 발 뒤로 퇴보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한다. 그리고 이 순간에서 우리는 한 때 알고 만지고 느낄 수 있던, 경험했던 어떤 세계를, 어떤 영역을 잃어버리고 있다. 

딸기님의 <기후 변화로 언어가 사라진다>는 그 단편적인 예에 불과하지만, 그런 예는 역사적으로 무수하게 많았다. 이에 도움이 될 만한 책으로는 <언어의 죽음>이 있다. 이 외에 언어의 생성, 소멸에 대한 책들은 여러 권 나와있다.


언어의 죽음
데이비드 크리스털 저/권루시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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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언어의 죽음 쌓아두고 못 보고 있어요... ㅠ.ㅠ
    <사라져가는 목소리들>인가, 그 책도 아주 좋아요.

    • <사라져가는 목소리들>도 한 번 찾아봐야겠군요. 저도 쌓여있는 책들.. ㅜㅜ.. ...

      <사라져가는 목소리들>은 이미 절판되었네요. 쩝... 거참, 절판된 책 reprint하는 서비스나 ebook 재판매 서비스가 필요할 때입니다.



지난 주에 얼마나 스트레스를 받았는지, 가만히 있어도 목 둘레와 어깨가 아프다. 해야 일은 많고 내 마음은 나를 도와주지 않는다. 80년대 후반, 성음레코드에서 나온 팻 매쓰니의 레코드를 낡은 파이오니아 턴테이블에 올려놓고 작고 네모난 창으로 밀려드는 6월의 축축하고 선선한 바람이 내 피부에 와 닿는 느낌에 아파한다. 잠시 감기에 걸릴 지도 모른다는 공포를 느꼈다.

혼자 있으면서 아픈 것 만큼 무서운 것도 없다. 아주 가끔, 이 방 안에서 내가 죽으면, 나는 분명 며칠이 지난 후에 발견될 것이다. 그래서 더 무서운 것일까.

르 끌레지오의 젊은 날에 발표한 소설 '침묵'은 자신이 죽은 후의 독백으로 이루어져 있다. 김현의 번역을 좋아했는데, 복사해놓은 종이는 잃어버렸고 김화영의 번역본은 어디에 있는지 서재 안에서 사라져버렸다.

하긴 죽음을 이야기할 수 있다는 것만큼 삶에 대한 열망도 비례하는 것일 테다. 일요일 오후, 이리저리 서성거리는 마음을 어쩌지 못하고, 고작 육체의 고통에만 예민해져 있었다.

대학 다닐 때, 한창 문학을 공부할 때, 기형도를 좋아하지 않았다. 그런데 나이 들고 보니, 기형도만이 내 위안으로 남아있었다. 죽은 자의 힘인가. 마치 소설가 유미리가 그녀의 사춘기를 견디게 한 힘처럼.



대학 시절

                                      기형도
   

나무의자 밑에는 버려진 책들이 가득하였다. 
은백양의 숲은 깊고 아름다웠지만 
그곳에는 나뭇잎조차 무기로 사용되었다. 
그 아름다운 숲에 이르면 청년들은 각오한 듯 
눈을 감고 지나갔다, 돌층계 위에서 
나는 플라톤을 읽었다, 그 때마다 총성이 울렸다. 
목련철이 오면 친구들은 감옥과 군대로 흩어졌고 
시를 쓰던 후배는 자신이 기관원이라고 털어놓았다. 
존경하는 교수가 있었으나 그분은 원체 말이 없었다. 
몇 번의 겨울이 지나자 나는 외토리가 되었다. 
그리고 졸업이었다, 대학을 떠나기가 두려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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캠브리지 로빈슨 칼리지에서 역사와 미술사를 공부한 마크 퀸Marc Quinn은 세계적으로 유명한 조각가이나, 그의 작품은 시대를 초월한, 대단한 작품성을 가지고 있다고 여겨지지는 않다(도리어 현대 예술이 어쩌다가 이 지경에까지 이르렀나 싶을 정도다). 하지만 그의 질문 제기를 한 번 귀담아 들어보는 것도 현대 미술을 이해하는 데 많은 도움이 될 것이다.  




마크 퀸의 'Self'라는 작품이다. 무엇으로 만들어졌을까? 색깔을 보고 무언가를 상상했다면, 그 상상했던 그 무엇이 맞다. 4.5 리터의, 약 5달 동안 모은 자신의 피를 얼려 만들었다(첫 작품 제작 기간임). 먼저 자신의 얼굴을 석고로 뜬 다음(casting), 자신의 피를 넣어 얼려서 만들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크기는 어느 정도 될까?


Marc Quinn, Self
82" by 25" by 25"
blood/stainless steel, Perspex, refrigeration equipment, 1991
이미지 출처: http://www.maryboonegallery.com/artist_info/pages/quinn/detail1.html 


82인치에 25인치라, 대략 계산해보면 높이만 무려 2미터다. 더 놀라운 것은 세계적인 콜렉터이자, 현대 영국 미술을 세계적으로 유명하게 만드는데 일조한 찰스 사치는 이 작품을 1991년도 만삼천 파운드에 구입했다는 것이다.
(요즘 수준으로 따지면 얼마 정도나 할까? 뭐, 별로 궁금하지도 않지만. 아참, 아라리오 김창일 회장도 한 점 가지고 있다고 한다. 현재까지 총 4점이 제작된 상태다. 얼마 전 한국에 방문했던 마크 퀸은 약 6주에 한 번씩 헌혈을 해 약 5년 정도를 모아야, 한 점 정도를 만들 수 있다고 했다.)

도대체 이런 작품을 만드는 이유는 뭘까?

Marc Quinn, Kate Moss(Endless Column)
178x54x51cm, Painted bronze
2007

얼마 전 평창동 가나아트에서 전시된 케이트 모스(Kate Moss) 시리즈들 중 하나다(국내에서 처음 있었던 마크 퀸의 전시였는데, 조용히 지나갔다).  저 이상야릇한 포즈는 요가(Yoga) 에서 가지고 온 것이다. 케이트 모스와 요가와 무슨 관련이 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요가의 본래적 의미, 명상이나 영적 단련을 떠올리기 보다는 (내가 이상한 것인지 잘 모르겠지만) 성적인 자극만 주는 작품이다.

마크 퀸은 BBC와의 인터뷰에서 이상적인 아름다움을 떠올렸고 그래서 이 작품들을 하게 되었다고 했지만, 이상적인 아름다움(ideal beauty)라고 하기에는 다소 ... ㅡ_ㅡ;;
(실제 마크 퀸은 케이트 모스와 개인적인 친분이 있으며 그녀를 가장 아름다운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이미지출처: http://theworldsbestever.com/2008/01/24/kate-moss-thursday-2 

Alison Lapper Pregnant
이미지 출처: http://mocoloco.com/art/archives/001480.php 

위 작품 '임신한 앨리슨 래퍼'는 마크 퀸의 대표작이며, 그에게 세계적인 명성을 안겨준 작품이다. 정상과 비정상, 아름다움과 추함, 그 어느 사이 쯤 위치해 있는 듯한 이 작품은 우리에게 정상과 비정상의 구분과 정의에 대해 묻고 임신한 앨리슨 래퍼, 즉 엄마, 생명잉태에 대한 경외감까지 불러일으키기까지 한다. 즉 육체란 무엇인가라고 묻으며, 인간 존재에 대해 탐구한다.  

하지만, 과연 그럴까? 

Marc Quinn, Innoscience
10" by 27" by 13"
medical milk formula/synthetic, polymer wax
2004

실은 생명에 대한 경외감보다는, 생명의 신비보다는, 반대로 '이따위 생명으로 왜 살아가는 걸까', '혹은 살아가야만 할까'를 떠올리게 되는, 내 삐딱한 시선 때문일까? 이미 죽어 박제가 된 듯한 저 어린 아이의 모습에서 살아가면서도 이미 죽은 상태, 어쩌지 못하는 삶의 노예가 된 현대인의 자화상을 떠올리는 건 왜일까?


Meditation on Illusion, 81.5x43.5x64.5cm, Painted bronze, 2007
이미지출처: http://www.ganaart.com/exhibitions/2008-07-11_marc-quinn/#


위에서 볼 수 있었던 마크 퀸의 작품들은 실은 '삶과 죽음에 대한 알레고리'를 담고 있다. (이는 데미안 허스트도 마찬가지다.) 해골은 서양미술사에서 '바니타스vanitas'를 상징하는 소재로 널리 사용되었다. 인생의 허무함을 넘어서기 위해 제목은 '명상'? 그런데 '환각 속의 명상'?

Golden Meditation, Bronze, 2008 
(* 파리 Fiac 2008에서 찍은 사진임) 

이번엔 '황금빛 명상'? 자, 그렇다고 케이트 모스가 빠질 수야 없지.

이미지 출처: http://www.canadianart.ca/art/books/index1.html


피악에서 마크 퀸의 '황금빛 명상'을 보았을 때, 무척 흥미로웠다. 설마 'Self'의 그 마크 퀸이라는 생각은 전혀 하지 못한 채 말이다. 

재미있는 것은 YBAs의 예술가들 대부분이 현대적인 관점에서 우리가 벗어날 수 있는 추상적이고 의미있는 질문을 매우 잘 던진다는 것이다. 우리가 그냥 지나가는 말로, '우리 왜 사는 걸까?', 혹은 '왜 살고 왜 죽는거지?'라고 했을 때, 아무런 주목을 받지 못하지만, YBAs의 예술가들은, 인류의 문명이 시작할 때부터 던져온 어떤 질문, 그리고 그 질문에 대해 그 누구도 속 시원히 답하지 못한, 오직 창조주 신만이 아는  질문을, 언론과 대중의 주목을 받을 수 있는 방식으로 던진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마크 퀸이 해답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다. 단지 그것을 환기시킬 뿐이다. 자극적인 것들만 찾아해매는 전 세계의 기자들과 천박한 호기심으로 무장한 세속 사람들에게 '우리에게 삶과 죽음이란 무엇인가'라고 질문 던지기를 하는 셈이다. 내가 보기엔 전혀 먹히지도 않는 질문 제기이긴 하지만.




* 위 작품 이미지의 저작권은 다른 이들에게 있습니다. 여기저기서 퍼온 것이며, 문제가 될 경우에는 삭제하도록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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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잘보고 갑니다.
    행복하세요 ^^*

  • 2008.11.28 18:53

    비밀댓글입니다

  • 예술에 대해 조금 보수적이시군요..예술 역사의 한 시대마다 뛰어난 작품들은 그시대를 반영했기에 언제나 질타가 있었죠 지금은 우리에게 너무도 익숙한 로댕이나 브랑쿠시 자코메티 등등도 그랬었죠...조각의 역사에서 옛시대의 미켈란젤로도 끊임없는 논란의 대상이었구요 언제나 문제는 과거 조각의 인습적 형상과 철학을발전 계승하면서도 새로운 형식과 시대를 반영하는 리얼리즘과 사이의 논쟁이었으니...

    • 좀 보수적이라는 생각을 하고 있어요. 실은 마크 퀸의 모든 작품들에 '정서적 공감'을 하지 못한다는 표현이 맞을 것같네요. 'golden meditation'은 무척 마음에 들었으나, 다른 작품들은 좀 떨어진다고 해야 하나. 소재나 주제를 잡는 감각은 좋은데, 딱 거기서만 멈춰있다는 느낌이 들어요. 뭐, 현대 미술이 개념적인 방향으로 경도되어 있긴 하지만서도.... 다양한 현대 작품들을 보고 이해하고 받아들이려고 노력하고 있어요. 그래서 마크 퀸도 한 번 정리해보았습니다. 댓글 감사합니다. ^^


떠남 혹은 없어짐 - 죽음의 철학적 의미
유호종(지음), 책세상, 2006년 초판 4쇄



공자는 이렇게 말한다. “생도 모르는데, 죽음을 어떻게 알 수 있느냐.” 맞는 말이다. 하지만 이 책은 죽음에 대해 이야기한다. 현대 사회에서 죽음이 가지는 철학적 의미, 법적, 의학적 정의에 대해서 논하며, 이것이 가지는 어려움에 대해서 설명한다.

우리 사회 사람들은 자기가 살고 있는 집 근처에 화장터가 들어오는 것을 극도로 꺼려한다. 그런데 문제는 전국의 화장장의 수는 47개이며, 이 중 인구의 절반 가까이 살고 있는 수도권에는 불과 4곳에 불과하다. 그런데 사람들은 화장터를 강하게 반대한다. 이로 인해 많은 사회적, 경제적 문제점들이 발생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사용자 삽입 이미지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07/05/24/2007052400042.html (조선일보 관련 기사)

즉, 죽음의 흔적은 꼴도 보기 싫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는 톨스토이나 비트겐슈타인의 생각대로 사람들이 ‘죽음을 두려워하는 것은 삶을 잘못 살고 있’다는 것일까. 아니면 ‘건강과 젊음, 생명 연장에 대한 우리 사회 사람들의 강한 집착은 하이데거가 지적했듯이 죽음에서 느끼는 허무감과 두려움에서 도망치려는 내적 동기의 표현’일까.

어느 날 테레사 수녀에게 한 여인이 찾아왔다. 소중한 사람을 죽음으로 잃은 그녀는 ‘그 사람이 하늘나라로 가버렸어요’라고 비통한 심정으로 호소했다. 이 때 테레사 수녀는 사람들이 흔히 하듯 같이 슬퍼하며 위로하는 대신 너무나 단순명쾌하게 말했다고 한다. “오, 하늘나라, 행복한 곳이지요.”

하지만 우리 사회 사람들이 그렇게 생각할까. 어쩌면 우리 사회에 진정으로 필요한 것은 ‘죽음학’일 지도 모르겠다. 죽음과 자연스럽게 같이 하면서(화장터나 공원 묘지, 납골당을 지역 사회의 공원으로 만든다거나, 죽음에 대한 교육을 강화하는 방식으로) 우리 사회는 조금의 여유를 찾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보게 된다.

하지만 죽음이 가지는 문제는 다른 곳에도 있다. 생명 윤리의 측면에서 발생한 죽음의 정의가 바로 그것이다. 1950년대 초반 인공호흡기가 발명되었다. 어떤 사람이 두뇌를 다쳐 두뇌가 불가역적으로 정지해서 호흡조절 역할을 하지 못할 때, 인공호흡기를 달아줌으로써 호흡이 계속 유지되고 그리하여 심장도 계속 뛸 수 있게 된 것이다. 이것이 뇌사상태이다.

뇌사상태 환자는 대개 며칠 이나 몇 주 안에 폐나 심장에 합병증이 생겨 심폐사한다(3일 이내 약 50%, 10일 이내 약 90%). 그리고 뇌사상태는 자발 호흡이 불가능하고 회복 가능성이 전혀 없다는 점에서, 자발 호흡이 가능하고 회복 가능성이 남아있는 식물 인간 상태와는 구별된다. 이렇게 인간들이 전통적으로 알고 있던 산 자와도 다르고 죽은 자와도 다른 뇌사 상태라는 것이 새로 발생함에 따라 이 상태를 죽은 것으로 볼 것인가 말 것인가에 대한 입장 차이가 나타난 것이다. 그리고 모든 이들이 수긍하는 공감대가 형성되지 못하고 있다.

이 책은 적은 분량에 다양한 관점에서의 죽음에 대한 논의를 정리하고 있다. 죽음 이후가 어떻게 될 것인가에 대해서는 칸트의 비판적 관점-논리적으로는 맞으나, 심정적으로는 다소 어정쩡한-을 재 수용하였고, 죽음이 나쁜 것으로 인식되는 것에 대해서는 박탈이론(deprivation theory)를 통해 ‘자신으로부터 좋음(좋은 것들)을 박탈하기 때문이’라고 하면서도 이에 대해서도 유보적인 입장을 취한다. 이 책은 결론을 내리기 보다는 자주 유보적이며, 비판적인 관점을 잃지 않으면서 ‘죽음학’이라는 학문이 가능하다면, 그것의 입문적 성격을 취하려고 노력한다.

그래서 책을 다 읽고 난 뒤, 시원함보다는 독자에게 많은 의문을 제기한다는 점에서 다소 실망스러울 수도 있다. 하지만 독자에게 현대의 죽음이 가지는 여러 논의를 깔끔하게 전달한다는 점에서 한 번은 읽어볼 만한 책이다. 그리고 이 책의 저자가 독자에게 ‘죽음학’에 대한 본격적인 책을 보여주었으면 하는 바람을 해보게 된다.


떠남 혹은 없어짐 - 죽음의 철학적 의미
유호종 지음/책세상


죽음에 관한 재미있는 책들은 위 책 외에도 많다. 내가 읽은 것으로는 아래 두 권이 있다.

춤추는 죽음 1
진중권 지음/세종서적
춤추는 죽음 2
진중권 지음/세종서적

필립 아리에스의 '죽음 앞의 인간'이라는 책을 바탕으로 서양 미술의 여러 작품들을 설명하고 있는 이 책은 진중권 특유의 박식함이 돋보이는 책이다. 여기에서 한 발 더 나아가 필립 아리에스의 책도 읽으면 좋을 것이다.

죽음 앞의 인간
필립 아리에스 지음, 고선일 옮김/새물결
죽음의 역사
필리프 아리에스 지음, 이종민 옮김/동문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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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 +2

  • GD학생 2007.07.16 01:07 신고

    죽음에 대해선 나이를 불문하고 누구나 한번쯤 심각하게 생각해 본 적이 있을거라고 생각해요.저 또한 마찬가지구요.
    그런데, 늘 무엇에 대해 생각하다 삼천포로 빠지는 경향이 있는 제가, 이 주제에 대해서도 예외가 아니였는데 말이죠. 그 삼천포라함은, 종교에선 사람은 죽으면 생을 어찌 살았나에 따라, 천당과 지옥으로 나뉜다는데, 그렇다면, 동물은 어떻게 될까 하는 거였어요.기독교에선, 아무리 착한 사람도 예수를 믿지 않으면 지옥에 간다고 하잖아요. 그럼 모든 동물들은 지옥에 갈까요? 아니면, 지옥이나 천당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이 그냥 영원한 미궁으로 사라질까요? 아님, 살았던 동안의 행적(?)에 의해 지옥과 천국으로 나뉠까요?

    이게 제가 죽음에 대해 생각하다가 더이상 생각을 진행시킬수없게 되버린 삼천포였답니다.지하련님은 어떻게 생각하세요? 네. 제가 좀 한 삼천포 합니다.

    우연히 이 싸이트를 알게 되었네요.그러다 링크에 걸린 싸이트들을 가보다가 완전 심봤다!의 심정으로 이런 대박을 선사하신 지하련님께 인사도 안 하고 걍 사라지는게 죄송해서리, 올리신 본문과 전혀 상관없는 삼천포 댓글로 걍 감사한 제 맘을 대신합니다. 복받으세요~~

    • 중세 유럽 사람들은 어차피 죽을 것이고, 신을 따르고 섬긴다면 천당에 갈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그러니 현세에서의 삶은 아무래도 뒤로 밀리겠죠. 인도사람들은 윤회를 철저하게 믿기 때문에, 하층 계급으로 태어나더라도 별 불만이 없었습니다. 죽음에 대한 생각은 너무 다양하고 많습니다. 종교마다 틀리고 지역마다 틀립니다. 그리고 이런 다양한 태도들은 그 종교, 그 지역의 성격을 좌우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저도 죽음에 대해서는 어렸을 때부터 생각했는데, 기본적인 건 바뀌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폭넓게 생각하게 되었죠. 아,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구나 .. 하는 식으로.

      GD학생님께서는 삼천포에 빠질 때, 확실하게 빠지면 좋을 것같습니다. 숀 펜이 감독한 영화 '인디언런너'는 인디언이 사냥을 하는 것으로 시작합니다. 그리고 사슴 한 마리를 잡죠. 인디언은 쓰러져 숨을 할딱거리는 사슴 머리채를 잡고 자신의 얼굴을 사슴 얼굴로 갖다대며 숨을 들이마십니다. 사슴의 영혼이 빠져나가기 전에 자신의 몸으로 삼키기 위해서라도 하더군요. 아마 사슴의 영혼이 그냥 떠나버려 구천을 떠돌다 자신을 저주할 지도 모른다는 생각에서 그랬던 것이 아닌가 싶어요. 여하튼 무척 흥미로운 장면이었죠.

      즉 삼천포로 빠질 때는 책이나 연관되는 것들을 한 번 찾아보는 것도 재미있을 것같아요. 그러면 다음에는 목포나 울산 쪽으로 빠질지도 몰라요. 그러면서 지식이 늘어나게 될 테니깐..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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