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문학 23

어떤 푸른 이야기, 장 미셸 몰푸아

어떤 푸른 이야기(une histoire de bleu) 장 미셸 몰푸아(Jean-Michel Maulpoix) 지음, 정선아 옮김, 글빛(이화여대출판부) 늦가을, 잔잔히 비 내릴 때, 하늘의 흐느낌을 듣고 있다고 상상해보는 것은 기분 좋은 일이다. 그럴 때 글을 쓴다는 것은 그 착잡한 눈물을 슬레이트 지붕과 아연 홈통을 두드리는 맑디맑은 빗물에 보태는 일이다. 글을 쓴다는 것은 매우 부드러운, 거의 평온해진 동작이다. 이 시각, 이 계절에, 우리는 언어를 뒤흔들지 않고, 거기에 우리 자신을 내맡긴다. 이번만큼은 그 적절함이 빗줄기의 속삭임과 유리창의 어둠에 정말 잘 어울린다고 확신하며. 그 순간, 뜻이 확실치 않아 오래 전부터 밀쳐두었던 책 몇 장을 다시 읽어보고 싶으리라. 이번에는 그 감동을 되찾고 ..

새로운 소설을 찾아서, 미셸 뷔토르

새로운 소설을 찾아서 (Essais sur le roman) 미셸 뷔토르 Michel Butor(지음), 김치수(옮김), 문학과 지성사 문체에 관한 노력이 있을 때마다 작시법이 있다. - 말라르메 소설가란 아무 것도 헛된 것이 없는 어떤 사람입니다.- 헨리 제임스 소설 쓰기를 포기한 채, 소설론에만 관심이 갔다. 이야기에는 관심이 없고 형식에만 관심 있었다. 소설 속 사건은 이미 신문의 사회면, 자극적인 인터넷 기사, 혹은 막장 드라마에 밀린지 오래다. 사건에 대한 평면적 전달 속에서는 사건의 특이함만이 시선을 끌게 된다. 현대 소설가들 대부분은 사건의 입체적 전달을 고민해 왔다. 프랑스의 누보 로망도 여기에 속한다. 소설가를 꿈꾼다면 이 책 읽기를 권한다. 하지만 이 책을 읽는 것과 베스트셀러 작가가 ..

애도 일기, 롤랑 바르트

애도 일기 Journal de deuil 롤랑 바르트(지음), 김진영(옮김), 이순 이 책은 바르트의 어머니인 앙리에트 벵제(Henriette Binger)가 죽은 다음부터 씌여진 메모 묶음이다. 그의 어머니가 1977년 10월 25일 사망하고, 그 다음날 10월 26일 이 메모들은 씌어져 1979년 9월 15일에 끝난다. 그리고 1980년 2월 25일 작은 트럭에 부딪히는 사고를 당한 롤랑 바르트는 한 달 뒤인 3월 26일 사망한다. 그리고 그 해 쇠이유 출판사를 통해 이 책이 나온다. 롤랑 바르트 팬에게 권할 만한 이 책은 두서 없는 단상들의 모음이다. 어머니를 잃은 슬픔으로 씌어지는 이 책은 짧고 인상적이다. 롤랑 바르트 특유의 문장들을 만날 수 있고 그의 슬픔에 대한 인상, 분석, 인용들을 읽을 ..

롤랑 바르트와 애도일기

며칠 전부터 롤랑 바르트의 를 읽고 있다. 뒤라스, 바르트, 끌레지오, 모디아노, ... 읽지 못한 지 꽤 되었구나. 올해는 그리운 이들을 만나야겠다. 1977년 11월 21일, 롤랑 바르트. 절망, 갈 곳 없는 마음, 무기력: 그래도 여전히 맥박을 멈추지 않게 하는 건 단 하나 글쓰기에 대한 생각. "그 어떤 즐거운 것". 피난처, "축복", 미래의 계획으로서의 글쓰기, 한 마디로 말해서 "사랑"으로서, 기쁨으로서의 글쓰기. "신"을 향하는 경건함으로 가득한 어느 여인의 가슴 벅찬 감동들 또한 다른 것이 아니리라. (새해를 의욕적으로 시작해야 되나, 작년의 영향권 아래서 꽤 힘든 하루하루가 이어지고 있다. 여하튼, 일본에서 나온 책 표지 디자인은 너무 깔끔하다! 사고 싶다. 그러고 보니, 일본에 사는 ..

기다림 망각, 모리스 블랑쇼

기다림 망각 - 모리스 블랑쇼 지음, 박준상 옮김/그린비 기다림 망각 L'attente L'oubli 모리스 블랑쇼(지음), 박준상(옮김), 그린비 장르가 불분명한 이 책은 모리스 블랑쇼의 일종의 에세이다. 일종의 연애담으로 읽어도 될 것이며, 문학론으로 읽어도 되고, 인생에 대한 태도로 읽어도 무방하다. 어차피 모리스 블랑쇼 연구자가 될 턱 만무하고 어려운 철학 용어나 문예 이론을 들이민다고 해서 이해될 리도 없다. 이 책 속의 그도 그녀를 향해 끊임없이 이야기하지만, 그녀는 그의 바람대로 움직여주지 않는다. 모든 것은 죽고 사라져야만 비로소 의미가 드러나는 법이다. 망각. 그리고 그 드러나는 의미를 기다리는 것. 그것이 언어이거나 문학이거나 예술이 될 것이다. 이 책은 그와 그녀를 통해, 모리스 블랑..

구토 La Nausee, 장 폴 사르트르

구토 - 장 폴 사르트르 지음, 방곤 옮김/문예출판사 구토 La Nause'e 장 폴 사르트르 Jean-Paul Sartre 이휘영(옮김), 삼성출판사, 1982년(현재 구할 수 있는 번역본으로는 문예출판사 번역본이 좋을 듯싶다.) 그냥 우연히 책을 집어 들었다. 이휘영 교수의 번역으로 수십 년 전 출판된 세계문학전집의 한 권이다. 헌책방에서 외국 문학들만 집중적으로 수집했던 적이 있었고, 그 때 사두었던 낡은 책이다. 요즘에도 좋은 소설들이 번역되지만, 과거에도 그랬다. 단지 요즘 사람들의 관심이 없을 뿐. 그래서 과거에 번역되었으나, 지금은 구할 수 없는 소설들도 꽤 존재한다. 장 폴 사르트르다! 그는 20세기 최대의 프랑스 철학자들 중의 한 명이다. 실은 앙리 베르그송이 아니었다면, 그는 최고가 되..

흡혈귀의 비상, 미셸 투르니에

흡혈귀의 비상 - 미셸 투르니에 지음, 이은주 옮김/현대문학 흡혈귀의 비상, 미셸 투르니에(지음), 이은주(옮김), 현대문학 '독서노트'라는 부제가 붙은 이 책이 한국적 상황 속에서 온전한 의미의 '독서노트'로 읽혔으면 좋겠지만, 사정은 그렇지 못하다. 한국의 문학평론가들이 써대고 있는 비평문들이 미셸 투르니에의 독서노트 수준이라도 되었으면 하고 바라지만, 최근 내 기억에 그런 평론은 없었다. 도리어 난삽하고 정의되지 않는 개념어들의 나열이고 시덥잖은 작가의 작품을 띄워주기 위한 정치적 의도가 다분했다. (젊은 평론가일 수록 이런 경향 더 심해지니 어찌할 노릇인지.) 이 책을 읽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특히 한국 독자에겐 이 책은 어렵고 지루하며 도통 모르는 작가들과 작품들로만 채워져 있다. 그러..

여행의 기술, 알랭 드 보통

여행의 기술 - 알랭 드 보통 지음, 정영목 옮김/이레 여행의 기술 알랭 드 보통(지음), 정영목(옮김), 이레 첫 페이지는 좋았지만, 채 열 페이지를 읽지 못한 채 덮었다. 초반부를 띄엄띄엄 읽다가 중반 이후 열심히 읽었다. 이 책을 통해 여행에 대한 뭔가 대단한 통찰을 얻는다거나, 대단한 여행 기술이나, 2006년 겨울 서울의 직장인들에게 대단한 위안이 될 수 있으리라 생각하는 건 큰 오산이다. 책을 읽으면서 내내 알랭 드 보통이 쉽게 여행을 떠날 수 있는 어떤 환경이 부러웠으며 여행지에 대한 이런 저런 정보들을 읽어 정리할 시간을 가졌다는 것이 부러웠으며 정처 없이 생각하고 정처 없이 떠돌아다니는 삶을 부러워했다. 나는 여행을 거의 가지 않는다. 누군가와 같이 가지도 않을 뿐더러, 그나마 간 것도 ..

계절풍 속의 마르그리뜨 뒤라스

사무실을 나가기 전에 오늘 쉴새없이 불었던 가을바람을 떠올린다. "계절풍의 어슴푸레한 빛 속에서" 마르그리뜨 뒤라스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가을이나 겨울에 부는 바람은 늘 그녀를 떠오르게 한다. 한 때 뒤라스의 소설만 읽었다. 지금은 사람들에게 읽히지 않는가 보다. 그녀의 책을 서점에서 본 적이 오래 되었고 그녀를 이야기하는 이를 보지 못했다. 하긴 그녀는 사랑 속에서 죽었으니. 이라는 영화가 나왔을 때, 그리고 그 이후 몇 년 동안 잠시 ... 내가 그녀의 소설을 마지막으로 읽었던 게 벌써 6년이나 지났구나. ... 뒤라스. 1998년 겨울. 그 겨울. ... 난 얼마나 많은 것들을 잃어버렸는가. 얼마나 많은 것들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