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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아란 영혼


오래된 메모를 다시 한 번 살펴보다가 아래 문장을 읽었다. 유럽도 미국과 비슷하다. 아마 서구 선진국들은 다들 비슷한 문화를 가지고 있는 듯 싶다. 


“내가 미국에 40년 넘게 있었어요. 그런데 보면 볼수록 미국은 오묘한 힘이 있는 나라야. 한국 사람들 일 많이 한다고 하지만 미국 투자은행IB에 근무하는 사람들 보면 1주일 동안 100시간, 110시간 넘게 일해요. 최고의 로펌 회사에 근무하는 사람들도 100시간 이상 일하는 게 당연하게 여겨져요. 미국의 엘리트들을 보면 미국을 평가절하가더나 과소평가해선 안 된다는 생각이 들 때가 많아요.”


“사람들의 마인드도 중요합니다. 내가 미국과 한국 양쪽에서 학생들을 가르쳐보면 한국은 에너지 리스크가 커요. 서로 경쟁하다가 정작 꼭 달성해야 하는 목표에 쏟는 에너지를 뺏기는 거지. 자기 목표를 가지고 거기에 에너지를 쏟아야 합니다. 이를 위한 시스템이 갖춰져야 하고 사람들이 규범을 준수해야 해요. 그런 측면에서 나는 중국의 경제적 파워도 어느 순간에는 한계에 부딪힐 거라고 봐요. 정신적 선진화는 돈을 많이 가지고 있는 것보다 더 중요한 요소입니다.” 

- 박윤식 조지워싱턴대 금융공학 교수(KRX 2013년 8월호 중에서) 



*월간 <KRX>는 한국증권거래소에 발간하던 잡지였는데, 지금은 폐간되었다. 계속 나왔으면 좋았을 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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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각 시절에는 직장의 중요성을 잘 몰랐다. 받는 돈이 적거나 없어도 하고 싶은 일은 언제나 있었다. 하지만 결혼을 하자, 하고 싶은 일이 아니라 (돈을 벌 수 있는) 일을 해야만 했다. 그제서야 경영의 가치나 기업의 중요성을 알게 되었다.


대체로 경영진의 잘못된 의사 결정의 피해는 불행하게도 회사 구성원들이 진다. 그러나 작은 회사의 경우에는 (약간 달라서) 경영진이 책임지고 아예 집안이 망하는 경우도 많다.


그런데 기업 경영과 연관된, 잘못된 정치적 관행(뇌물 같은 것들)에 대한 책임은 이상하게도 기업가들만 진다. 정치가나 행정가들은 교묘하게 기업가들의 마음을 움직여 금전적 이익을 취하고, 그러다가 일이 잘못되면 그 책임 대부분은 기업가나 기업, 더 나아가 그 기업이 있는 지역사회가 진다(대우조선처럼).


정치과 기업의 밀착 관계를 끊어야 하고, 정부나 정치가들은 기업가들이 올바른 경영을 할 수 있는 인프라를 제시해주어야 한다,고 교과서에선 말하지만, 한국은 아직 한참 멀었다.


고성장 시대를 살아온 노인네들은 저성장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의 삶을 이해하지 못한다. 그들 상당수는 우연히 사놓은 땅이나 가게로 돈을 벌었다. 특히 서울이나 수도권은 이런 경우가 너무 많다. 그들에게 노년은 행복한 일상의 연속이며 그들이 소유한 부동산의 가격만 떨어지지 않으면 된다(그래서 그들 대부분은 모두, 한결같이 박근혜를 지지했다. 이는 정치적 의견이라든가 나라의 미래, 젊은 세대들의 삶과는 무관한 결정이다).


그러나 절약해서 모은 돈으로 기업체를 차린 사람들 대부분은 망해, 흔적도 없다.(일부는 성공하여 큰 기업체를 일구었을 테지만, 아마 문어발 확장을 하거나 노동자의 삶과는 무관한 경영을 할 것이다) 즉 노동의 댓가는 실패이거나 해고이고, 부동산 투자의 대가는 여유로운 일상과 이익이다(그래서 노인 빈곤층은 부동산을 사지 않았던 노동자이거나(땅에 투자하는 것은 어리석다고 믿는 이들), 사업을 하다 쫄닥 망한 이거나, 그 외 사회시스템이 커버하지 못했던 어떤 비극을 당했거나 그런 환경 속에서 나고 자란 이들이다).


잘못된 것인 줄 알지만, 우리 세대 사람들은 결국 실패하거나 해고당할 것이라는 생각에, 돈을 모아 아파트나 빌라를 구입하고 만다. 부동산의 시대가 끝날 것이라는 우울한 전망 앞에서(왜 부동산을 사는가에 대해 원인 분석 없이 맨날 부동산 대책만 낸다. 마치 왜 젊은 부부들이 아이를 낳지 않는가에 대한 원인 분석 없이 출산 대책만 내는 것처럼).


좋은 경영자가 살아남고 승승장구하여 좋은 일자리를 끊임없이 만들어내는 나라가 되었으면 하고 바라지만, ... 쉽지 않고, 쉽지 않을 것이다. 저성장 시대의 우리 삶을 그나마 지탱하게 해줄 것은 좋은 경영자가 아닌 훌륭한 정치가일 테지만, 훌륭한 정치가가 살아남기엔 이 나라는 너무 개판이다. 멍. 멍. 멍.


포스코가 인수하여 망가뜨린 회사에 대한 책임은 포스코가 아니라 그 구성원이 진다. 하긴 경영이란 어려운 일이다. 그리고 경영 실패의 댓가는 가혹하기만 하다. 그러니, 올바른 정치가 선행되어야 하는 것이다. 혁신은 실패로부터 시작된다고 하지만, 이래저래 실패는 가난한 기업가나 기업체에 다녔던 직장인들이 지고 말기 때문이다.


왜 사업을 했냐고? 왜 그런 회사를 다녔냐고? 평생 직장이 사라진 지금, 왜 노력을 게을리 했냐고? 웃긴 개소리다. 멍. 멍. 멍. 그건 시스템이 잘못되어 모든 실패의 책임을 개인에게 지우기 때문이다. 시스템의 문제이고, 시스템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건 정치다. 경제를 살리는 것도 결국 정치다. 좋은 정치가가 필요한 시대지만, 나이든 이들은 얼마남지 않은 그들의 삶을 걱정할 뿐, 미래 세대들의 삶이나 그들이 살아가야 할 사회를 걱정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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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이신문을 구독한 지 몇 달이 되었다. 그 전에는 모바일 포털사이트나  Social Media, 특히 페이스북을 통한 소비가 대부분이었다. 이럴 경우 미디어 편식이 발생한다. 또한 예전이라면 스포츠신문을 읽어야만 볼 수 있는 기사만 읽게 되는 경향이 있었다. 


지금처럼 디지털 매체가 발달하지 않았을 때, 나는 스포츠신문을 읽는 경우가 거의 없었다. 그런데 지금은 디지털을 통해선 그냥 스포츠신문만 읽는 느낌이다. 그만큼 엉망이 되었다. 더구나 제대로 된 기사문을 읽을 일이 줄어든 셈이다. 


다시 종이신문을 읽기 시작하자 여러 모로 장점들이 많아졌다. 다소 느리지만, 깊이있는 칼럼들을 읽게 되었다고 할까. 하지만 디지털 세대의 여론과는 다소 무관해 보인다. 미디어 환경의 변화는 장기적으로 정치적 무관심을 지나 대중 일반의 정치적 이해와 판단능력을 마비시킬 것으로 보인다. 


아무래도 여기 블로그에 대학생들이 많이 들어오는 듯하여, 아래 칼럼 읽기를 권한다. 지금 20대 이하 세대는 정말 힘든 시기를 살아나가야 한다. 그런데 그걸 아는지 모르는지, 장기적 관점에서의 정치를 바라보고 적극적으로 정부 정책 방향에 대해 관여해야 하는데, ... 너무 걱정스럽다. 


송호근 칼럼 - 한국 청년 잔혹사 (중앙일보) 

http://news.joins.com/article/204191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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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대학생 2016.08.31 22:59 신고

    종이신문에 관해서 과제를 쓰려하는 학생입니다만, 2026년에는 한국에서 종이신문을 보기 힘들꺼라는 통계도 있길래 여기에 질문드려봅니다.
    종이신문이 없어질꺼라고 보시나요? 안없어진다면 그 이유가 뭘까요?
    종이신문이 살아남는 방법이 무엇이라고 생각하시나요?
    궁금한게 워낙많은데 질문드려봅니다 ㅎㅎ;

    • 너무 어려운 질문입니다. 심지어 학자들이나 전문가들까지도 서로 논쟁을 벌이고 있는 주제예요. 그걸 덜컥, 저에게 물어보시면.. ㅜㅜ.

      아마 관련 자료를 찾으면 너무 많이 나올 겁니다. 하지만 어떤 주제는 너무 많은 자료 때문에 힘들고, 어떤 주제는 자료가 너무 적기 때문에 힘들죠. 그런데 이런 경우는 공부를 하던지, 직장 생활을 하던지, 반드시 겪게 되는 문제예요.

      몇 가지의 키워드를 가지고 검색해서 관련 자료를 찾아 읽어보세요. 그럼 나름대로의 해답을 구하실 수 있을 겁니다.

      riss.kr 이라는 웹사이트에서는 학위논문들을 검색할 수 있으니, 이와 관련된 석사나 박사학위 논문을 읽을 수 있을 겁니다. 해당 주제에 대한 논문을 찾을 수 있을 겁니다.

      종이판을 내던 뉴스위크지는 아예 종이 주간지를 없애버렸습니다. 뉴욕타임즈의 경우, 디지털화에 대해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지만, 아마존의 제프 베조스가 인수한 위싱턴 포스트에 밀리는 인상을 주고 있죠. 영국의 가디언지도 디지털화에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으며 한국의 중앙일보도 여기에 속한다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영국 모노클 같은 잡지는 종이잡지로 수지타산을 맞추고 있어요. 국내에는 B 매거진이 대표적인 경우죠. 뭐, 신문은 아니지만요.

      너무 어려운 질문은 너무 쉽게 하셨습니다. 그런 질문은 마치 '왜 살아야 하나요?'와 비슷한 류입니다. 다만 '왜 살아야 하나요?'라는 질문에 무한한 답이 있어 우리를 곤혹스럽게 하지만, '종이신문에 대한 질문'의 답은 몇 가지로 정해져 있고 여기에 대한 답은 자료를 찾아 읽어보시면 쉽게 구하실 수 있을 겁니다. ~ 그럼.



얼마 전 한 기사를 접했다. 그 기사 제목은 <클린턴 외교 핵심 캠벨 “한국군에 전작권 전환 반대”>이다. 일견 당연한 이야기이긴 하지만, 미 민주당 인사에서 나왔다는 것에서 내가 순진했던 건 아닐까 하는 생각에까지 미쳤다. 이미 '주한 미군 문제'라든가 '세계 경찰국가로서의 미국'에 대해선 이상돈 교수의 <<공부하는 보수>>라는 책에서 잠시 엿본 바 있었지만, 나는 두 개의 미국-공화당 정권의 미국과 민주당 정권의 미국-이 있다면, 이 둘이 확연히 다를 것이라는 건 내 일방적인 견해였다. 적어도 미국 내부의 문제에 대해선 서로 다를 수 있겠으나, 미국 외부의 문제에 대해선 그들은 하나의 목소리를 가지고 이거나 서로 다른 척 할 뿐이다. 이에 짧게 내 생각을 정리해보았다. 좀 비관적이긴 하지만. 


* * 


상식적인 미국 정치인이나 행정가이라면 당연히 미국의 국익을 우선시할 것이고, 한반도에서 만일 전쟁이 발발한다면, 한국 정부가 전시 작전권을 가지는 것에 반대할 것이다. 또한 주한 미군이 철수하는 것에 대해서도 반대하고. 다만 트럼프와 같이 주한 미군 철수를 주장하는 미국 내 보수주의자들이 있다. 하지만 이들의 의도는 주한 미군 철수가 미국의 국익에 반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으나, 미국 내부의 문제를 우선시하고 있을 뿐이며, 운이 좋을 경우에는 한국의 방위비 분담액을 더 받아낼 수 있다는 것을 고려하고 있을 지도 모를 일이다.


(다 아는 사실일테지만) 그들이 전시 작전권 양도나 주한 미군 철수에 대해 반대하는 이유는 그만큼 한국의 지정학적 위치는 중요하기 때문이다. 한반도는 여러모로 정치적 쓸모가 많은 땅이고 한국도 그런 나라다. 지극히 상식적인 애국주의자들인 그들은 한국이 군사적으로나 정치적으로 자주적인 발언권이나 행동을 하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 그들의 눈에 노무현 전 대통령은 얼마나 보기 싫었겠는가. 참여정부의 딜레마는 적절한 수준에서의 그 전 정권과는 다른, 주권국가 한국의 입장에서는 지극히 당연한 발언이나 행동을 해야겠지만, 이 발언이나 행동이 미국의 입장에서는 얼마나, 당돌을 넘어 황당해 보였을까. 이런저런 고려 속에서 한국군 파병과 같은 일들을 도모했지만, 당장 눈 앞의 것들에만 신경 쓰는 국내 진보(?) 언론과 인사들은 무조건 반대만 하고 있었다,는 걸 지금은 알까. (알겠지만 후회하진 않을 게다, 아마.)


만일 전쟁이 나면, 한국은 버리는 패다. 시간을 벌 수 있고 전 세계 여론에 호소하기 아주 좋은 나라다. 인구 밀도가 매우 높으며 사상자 수는 그 이전 전쟁들과는 비교되지 않을 것이다. 또한 경제 시설들이 파괴될 것이고, 심지어 원자력 발전소들까지 있으니, 그 파급효과는 이루 말할 수 없다. 그러니 전쟁 나면 이 땅은 그냥 사람이 살지 못하는 땅이 된다.


그리고 전쟁을 수행하는 입장에선 한국은 그냥 버리고 일본에서 다음 일을 도모하면 된다. 한국이 전쟁터가 된 상황 속에서 앞으로의 정치적 협상을 진행하면 그 뿐이다. 최악의 경우를 가정한 것이지만, 언제나 최악을 가정하고 모든 정치나 행정이 이루어져야 한다.


그러나 미국의 입장에서 일본은 얼마나 좋은 친구인가. 적어도 한국보다 일본이 더 믿을 만한 친구다. 역사적으로나 경제적으로. 또한 일본 스스로도 중국과 한국보다는 미국과 친구가 되는 편이 낫다고 믿는다. 그들은 아시아 지향적이 아니라 탈 아시아를 원한다. 동시에 아시아의 맹주가 되고 싶어하지만, 역사적으로도 경제, 정치적으로 그것이 이루어질 수 없다는 걸 잘 알고 있다. 그러니 그들은 아시아를 넘어서 아시아 속으로 들어오고 싶어한다.


더 불행한 일은 한국의 보수적인 정치가들, 행정가들과 군인들도 전시 작전권을 회수하는 것에 대해, 주한미군이 철수하는 것에 대해 반대한다. 그들은 그들의 정체와 실력이 탄로나는 것을 두려워한다. 그들은 그들 스스로 전쟁을 수행할 능력도, 전쟁을 책임질 능력도, 전쟁을 책임질 생각도 없다. 어차피 분단국가 한국은 유엔 사령부 밑에 전쟁이 일시 중단된 상태이니, 전쟁에 대해선 유엔이 책임질 일이라고 여긴다. 유엔사무총장이 한국인인 것과도 아무 관련 없다. 어차피 유엔사무총장은 얼굴 마담이라는 걸 잘 알고 있으니까. 


독자적인 전쟁 수행 능력이 없기 때문에 독자적인 전쟁 수행 능력을 키우면 되지 않겠느냐고 생각할 수 있지만, 이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한국 군대는 유엔 사령부 아래에서 미군 주도로 수립된 전쟁 작전 아래에서 움직이는 것으로 수십 년 동안 훈련해왔다. 이게 전시 작전권을 가지고 온다고 해서 바로 될 것이라 믿을 만큼 순진한 사람들이 아니다. 그러니 전시 작전권 환수에 대해 반대하는 것이다. 전쟁 수행 능력이 하루 아침에 만들어지는 것도 아니고 그걸 위해 우리는 얼마나 많은 인적, 물적 투자를 해야 하는지 잘 알고 있으니, 사서 고생하지 말자는 것이다.


더구나 독자적인 전쟁 수행 능력은 미국도 원하지 않는 일이다. 그 동안 정치적으로 약점을 가진 정권들은 미국의 요구대로 독자적인 수행 능력을 가지지 않았고 노력하지도 않았다. 어차피 미군이 가진 핵무기만으로 한국군의 독자적인 전쟁 수행 능력 따윈 필요 없으니까. 박정희 대통령 시절 핵무기 개발에 욕심을 낸 이유도 여기에 있을 것이다. 그냥 한 번에 이런저런 고민을 다 해결해줄 수 있는 녀석이니까. 하지만 다들 알다시피 실패하지 않았는가. 그 이후 한국 정부는 독자 전쟁 수행 능력을 키우기 보다는 낙후된 산업 시설이나 경제를 살리는 것이 정치적으로 더 중요한 사안이 되었다. 독자적인 전쟁 수행 능력은 원한다고 해서 될 일도 아니고(미군의 반대로), 그리고 하루 아침에 이루어질 일도 아니니, 다른 것에 집중하는 것이 나은 일이었다. 


그렇게 시간이 흐른다. 전시 작전권에 대해선 정권이 여러 번 바뀌고 나서야 검토된다. 우리가 귀가 닳도록 들었던 ‘자주 국방’이라는 것이 말로만 아니라 실제로 가능한가에 대한 검토가 이루어진 것이다. 그런데 이 듣기 좋은 ‘자주 국방’을 하기 위해 군대는 정말 많은 부분이 바뀌어야 한다. 그런데 하고 싶을까? 거의 모든 걸 바꾸어야 하는데, 그냥 그대로 놔두어도 아무 문제가 없는데. 미군이 있는 상황에서는 기본적으로 전쟁 억지력이 생기고 미군이 시키는 대로만 해도 전쟁에서 이걸 것이 뻔한데.


자주 국방을 위한 독자 전쟁 수행 능력을 가지기 위해 얼마나 많은 물적, 인적 투자를 해야 하는데. 그리고 한창 투자가 진행 중인 상태에서 만일 주한 미군이 철수한다면, 그리고 전쟁이 나면? 말로는 자주국방을 외치지만, 실제로 한국의 보수주의자들은 자주국방엔 별 관심이 없다. 도리어 자주국방 대신 미군의 영향권 안에 있는 것이 더 안전하다고 믿는다. (사드 배치 결정은 이러한 배경 아래 결정된 것에 다름 아니다) 


사드를 배치하겠다는 기사에 대해 대부분의 사람들이 반대하고(아니면 관심에 없거나) 주변국가들까지 나서서 반대하는 상황에서도 그 고집을 꺾지 못하는 이유는 미군의 영향권 아래 계속 머무는 것이 가장 안전하고 한국의 국익에 부합된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과연 그럴까? 단기적으론 그럴 지도 모른다. 이 단기적 고려가 중장기적 관점에서 한국이라는 나라, 한국이라는 나라가 걸어온 반만년의 역사와는 어떤 관련을 맺고 미래에 어떤 영향을 끼칠 것인가에 대한 고려는 아예 없다. 하긴 그런 생각을 했다면 저런 결정도 내리지 않았을 것이다. 


지금의 한국 정부나 군대는 군사적인 측면에서는 확실하게 한 나라를 책임지고 이끌 생각이 전혀 없다. 아예 그렇게까지 해야 하나 여길 지도 모른다. 실은 그렇게 해야 한다고 생각하지도 않았고, 도리어 왜 그렇게 해야 하는지 여길지도 모른다. 적어도 군사적인 측면에서 말이다. 어차피 자주 국방이 안 되고 앞으로 하지 않을 것라면, 그들의 입장에서 '사드 배치'는 실보단 득이 많은 수다. 그러니 마다할 이유가 어디 있는가. 그리고 미국한테 밉보여서 뭐 좋은 게 있다고. (과연 그러할까? 중국의 경제 제재, 러시아의 군사적 조치들은 미국을 위험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한국을 위험하게 할 것이다. 앞으로 하나 두 개 어떻게 실현되는가를 가슴 아프지만, 지켜볼 수 밖에)


나는 이 상황 속에서, 이런 생각을 하는 정치인, 행정가, 군인들, 그리고 이들로 이루어진 정치집단을 지지하는 한국 국민들이 이해되지 않는다. 그들은 한국을 책임지지도, 이끌지도 않을 작정으로 한국의 정치와 경제의 주도권을 쥐고, 군대를 통솔하고 있다. 그런데 사람들은 그들을 이해하고 지지하고 동정까지 한다. (아마 다음 선거에서도 가면을 갈아끼운 골통 보수주의자들에게 투표할 것이다. 그는 그녀와 다르다면서.)


변화보다는 안정이 낫다. 못 살더라도 안정적이고 일관되게 못 살면 미래는 예측가능해진다. 신분제와 노예제가 수천 년 이상 지속된 것도 여기에서 연유한다. 서민들은 이렇게 여기게 되었으며, 상류층도 안정된 체제가 좋다. 분단 상태도 그냥 이대로 지속되는 것이 좋다. 개성 공단이 작살나더라도 상관없다. 분단 체제가 지속되고 이러한 불안정하긴 하나 일시적 균형 상태를 계속 지속시키는 편이 다른 것들보다 낫다. 그리고 밝혀지지 않은 과거사 따윈 그냥 덮인 채로 있는 게 낫다. 이미 일은 벌어져 끝났으니까. 그리고 대다수의 사람들은 관심도 없거나 관심이 멀어지도록 만들면 된다. 잘못된 일도 덮으면 그 뿐이다. 가끔 마음에 들지 않은 이들이 있으면 교육 차원에서 한 번, 정해진 각본대로 밝히면 된다. 하나 두 개 각본 없이 진실이 드러나기 시작하면 기득권 전체가 위험해진다. 정말 위험해진다.


그러니 얼마나 노무현 대통령과 참여 정부 인사들이 미웠을까. 그들은 적극적으로 분단 체제 해소와 보다 나은 상태의 국가가 될 수 있다는 걸 보여주기 위해 실제적인 일들을 단행했으니까. 과거사도 다시 짚었고 뭔가 잘못된 것이 있으면 바로 잡으려고 했으니까. 그리고 그걸 한 번 경험한 사람들은 알게 될 테니, 그걸 어떻게든 막아야 된다. 그리고 막아냈다. 그리고 앞으로도 막아야 되니까, 종편 방송 만들고 언론부터 잡고 이젠 국정 교과서까지 가는 것이다. 다 예측 가능한 시나리오다. 어렵게 기득권이 된 이들(소위 개천에서 난 용)에겐 감투를 주면서 괜히 휩쓸리지 말라고 단도리를 한다.


그리고 계속 이 상태로 지속되면 아무 문제 없다. 모든 것들은 예측 가능해진다. 가난하고 힘없는 이들은 계속 가난하고 힘 없을 것이며, 부유하고 힘있는 이들은 앞으로 계속 부유하고 힘있을 것이다. 가끔 딴 짓 하는 이들만 가끔 본보기로 잡으면 된다. 정치란 이런 것이고 국가 경영이란 것도 이런 것이다.


어차피 대다수의 국민들은 이런 것에 관심도 없다. 먹고 살기 바쁜데, 이런 것 따윈 사회에서 도움도 안 되는 괜한 이상주의자들에게서나 나올 법한 것이니, ‘쟤들은 원래 저래’로 몰고 가면 된다. 그러면 잠시 동요하던 국민들도, 아, 원래 저런 애들이었구나 하고 거리를 두게 될 것이다. 그리고 세월호사건에서 보듯, 그렇게 거리를 두게 된다. 


이만큼 온 것도 기적이니, 이제 안정된 일상, 안정된 사회, 안정된 국가를 만들자고 말한다. 더구나 민주화까지 되지 않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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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말 내내 출근을 했고 일은 손에 잡히지 않았다. 시간을 홍수 난 강물처럼 흘러갔고 바람은 여름을 버리고 가을을 택했다.  끝내 프로젝트 사무실에서 내 허무를 견디지 못하고, 빌딩 근처 커피숍에서 한 시간 정도 책을 읽었다. 토니 주트의 책. 내가 앉은 네모나고 긴 테이블 주위, 둥글거나 네모나거나 가볍거나 무겁거나 따뜻하거나 차겁거나, 모든 테이블에는 다들 연인이 흔들리는 커피잔을 들고 있었다. 그러나 아름답게 보이진 않았다. 나는 끝내 사랑을 믿지 못할 나이가 된 것이다. 마르케스라면 노년의 사랑도 가능하다고 말하겠지만, 그건 사랑을 잃어버린 후이거나 사랑을 믿는 경우에만 해당된다. 그러니 사랑을 믿다가 끝내 사랑하지 못한 이에게는 차라리 사랑은 없다고 믿는 편이 살아가는 데 더 용이할 것이다. 마치 사랑은 자동차 같은 거라든가, 아니면 강아지 같은 거라든가... 즉물적이거나 동물적인 것.  





어느새 월요일 정오가 되었다. 아름답던 기억은 술에 취한 박제가 되었고 술자리에서 일찍 떠난 이는 그 자리로 돌아오지 않았다. 향기롭던 청춘의 의미가 사라지자 시간은 정지되었고 색들은 그 다채로움을 잃어버렸다. 도톰한 입술에서 저주스런 비린내가 가득했다. 2015년 한국 서울. 나는 그가 아니고 그녀는 없었다. 


가끔 견딜 수 있을까 하는 걱정과 불안감에 휩싸이지만, 나는 어느 새 그 곳을 지나쳐가고 있었고, 지나갈 수 있을 것이다. (과연 그럴까)






하지만 어느 월요일, 나는 그 무시무시한 터널을 지나고 있었다. 



(결국 나는 화요일에 이 글을 공개모드로 바꾸어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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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이 바빠서 - 이것도 핑계일 지 모르겠지만 - 시간을 할애하지 못하다 보니, 책읽기, 글쓰기가 형편 없어졌다. 며칠 사이로 좋은 인터뷰 기사를 읽었는데, 시사하는 바가 컸다. 다음에 링크를 달아 블로그에 올려야겠다. 페이스북을 하다보니, 정리되지 않은 단상을 올리고 그것으로 끝을 내는 경우가 많아졌다. 글의 길이가 짧아지고 깊이는 얕아졌다. 여튼 그런 단상들 중 일부를 아래와 같이 옮긴다. 여유가 된다면 관련된 책들도 몇 권 읽고 길게 정리하고 싶지만, ... 늘 생각에만 머물 뿐이다. 


*  *  


정치에 대한 글을 적었다. 야당의 모습을 보면서 한심해서 적은 글이다. 몇 주 전에 적은 글이라 시의성이 떨어진다. 얼마 전 원내대표가 된 이종걸 의원은 한순간 언론에서 자신이 사라졌다고 했다. 그건 (너무 불행하고 슬펐던) 장자연 사건으로 모 신문사 대표를 공격하자 그 신문사에서 명예훼손으로 고소를 하면서 시작되었다고. 그 이후 자신의 기사는 그 어느 신문사에서도 보도되지 않았다고.


언론에서 다루어지지 않으면 우리는 누가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 모른다. 특히 정치인들에게 언론은 중요하다. 하지만 언론을 믿을 수 없다. 언론 기사들을 분석해 문재인 의원과 김무성 의원에 대한 우호적/부정적 기사를 나열해보면 재미있을 것 같다. 이와 똑같이 여당과 야당도. 


사람들은 언론을 믿는다. 나같은 사람이 기본적으로 언론을 믿지 않고 아주 비판적으로 접근하지만, .... 이런 식의 태도를 가진 사람이 한국 사회에 극히 희박하다는 사실을 심정적으로 동의하게 되자, 절망적으로 변했다. ㅜ_ㅜ 


아래 글을 페이스북에 올린 글 전문이다. 

 

*    * 


정당 정치 시스템이라는 게 있을 지 모르지만, 새누리당과 새정치민주연합의 경쟁력은 10:1인 듯 싶다. 새누리당은 일 잘 하는 사람도 많고 컨셉도 잘 잡는다. 전략도 잘 세운다. 확실히 목적 지향적이다. 다만 그 목적이 국민 대다수를 위한 것이 아니라 그들, 혹은 소수의 이들만을 위한다는 점. 보수를 표방하지만 전혀 보수스럽지 못하다는 점.\

 

새정치민주연합은 당나라 군대같다. 다양한 계파들이 존재하고 이들 간의 불협화음이 끊임없이 나온다. 끊임없이 친노가 공격 대상이 된다. 결국 대통령 탄핵 때로 거슬러 올라가야 되나. 열린우리당까지 가야 되나. 결국 형식적으로는 뭉쳤으나, 나머지 부분에선 뭉치지 못한 것이다. 


더 큰 문제는 이들에게는 시스템이라는 게 없다. 일 잘하는 젊은이들을 끌어당길 동력도 없고 새로운 컨셉도 제시하지 못한다. 더구나 너무 오만하다. 비난할 줄만 알지, 문제 해결에 대해선 빵점이다. 여당과 동의하면 비난하고 동의하지 않으면 결정내리지 못한다고 내부에서 비판한다. 문재인 대표가 오만한 게 아니라, 정부와 여당이 최악의 행정과 정치를 하고 있으니, 무조건 이긴다고 믿고 있는 정치인들로만 모여 있고, 이런 정치인들의 모임의 대표가 문재인이니, 그도 오만한 사람이 된다. 


결국 차기 대선주자 1위를 공격해 끊임없이 끌어내리기를 하고 있다. 정말 한심한 정당이다. 내가 보기엔 새정치민주연합에 있는 그 어떤 이보다 문재인의 살아온 행적이 나아보인다. 중도를 표방하지만, 보수스럽고 종종 과격한 발언까지 나온다는 점에서 정치적 컨셉을 찾기 어렵다. 부산의 모 의원은 과격 보수처럼 여겨진다. 결국 권한을 얻고 돈만 벌면 된다는 식이다. 늘 국민을 위하는 척하지만, 실은 말 뿐이다. 말이라도 해야, 능력 없다는 사실이 드러나지 않기 때문이다. 


새누리당은 능력 있지만 국민을 위해 쓰지 않고 새정치민주연합은 국민을 위한다고 하지만 능력이 없다. 더 큰 일은 새누리당은 끊임없이 젊은이들이 끌어당기지만(이준석이나 손수조), 새정치민주연합은 아직도 동교동계 이야기가 나온다. 헐~ 도대체 이들의 평균 나이는 몇 살인가?


개인적인 의견이지만, 대선 승리를 위해, 대선주자를 중심으로 헤쳐 모여야 된다. 강력한 리더십과 정당 시스템을 마련해야 된다. 결국 키는 문재인 대표일텐데, 그는 신중하나 결단력이 없고 쓸모없는 말을 하진 않으나, 모든 이들이 원하는 정치적 제스추어에는 약하다. 그리고 옆에서 코칭해줄 만한 능력자도 새정치민주연합에는 없거나, 아니면 도리어 너무 많은 것이다.


*  *  


정치적 제스추어에 있어선 이재명 성남시장이 단연코 최고다. 그의 정치적 감각은 탁월하다. 야당에 이런 감각을 가진 이가 2-3명만 더 있어도 기대해 보겠건만. 박원순 서울시장과 이재명 성남 시장을 비교해보면 확연히 드러난다. 


정치 바깥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은 열심히 투표하지만, 실제 제대로 된 정치가 이루어질 때 그 정치의 실질적 혜택을 보게 될 이들은 투표를 하지 않는다. 젊은 층의 정치에 대한 무관심은 그들의 문제를 해결하기 보다는 더욱 악화시킬 것이다. 세계는 조각나고 조각난 세계들은 서로의 세계에 무관심해질 것이기에. 


*  * 

인문학자들의 무책임함은 그들 특유의 비현실성에서 기인한다. 그래서 그들은 최신이론의 수입자 혹은 해석자로만 있을 뿐 지금 여기 우리들의 문제에 대해서 한 마디도 못하거나 할 생각이 없거나 하더라도 형편없는 글로 비난의 대상이 된다. 


한때 탈정치화를 이야기하던 일군의 학자들이 있었다. 탈정치화가 불러올 현실적 파장에 대한 고려는 전혀 없이 학문수입상으로서의 입장만 고수했다. 그들은 그 때도 대학교수이고 지금도 대학교수다. 그 때 나도 그런 류의 논문과 책들을 읽었다. 하지만 그들은 그 자리에서 앞으로 한 발짝도 전진하지 못하더라. 그 이후 대단한 연구서가 나온 것도 아니고 세계적으로 유명해진 학자가 생긴 것도 아니다. 그들은 지금도 학문 수입상으로서의 역할에 충실하다. 그리고 학생들을 닥달하고 자신의 무식함을 최신 수입 이론으로 가린다. 그들은 젊음 옆에 서서 젊음을 갉아먹는다. 그리고 인문학을 죽인다. 죽어가는 인문학은 인문학의 문제가 아니라 인문학 교수들의 문제이고 그들이 가르치는 학생들의 문제다. 인문학은 우리에게 닥힌 삶의 문제이지, 이론의 문제가 아니다. 하지만 그들은 그것을 알지도, 알 필요도 없다. 


최근에는 언론도 마찬가지다. 대부분의 언론인들은 생계를 핑계로 무책임한 기사들을 쓰고 있다. 이 사회를 나락으로 빠뜨리는 이들이 언론이 되고 있다. 한 때 나락에 빠진 한국 사회를 제대로 굴러가게 하기 위해 언론인들이 발 벗고 나선 적이 있었는데, 지금은 그 반대가 되었으니 ... .... 


실은 모든 이들이 월급을 핑계로 사소하지만 거대하게 무책임한 일들을 저지르고 있다. 그게 모여서 많은 문제를 일으키고 있다. 대표적으로 무책임한 투표 탓에 우리는 한국 사회가 전형적인 후진국적 사건사고에 휩쓸리는 모습을 보고 있다. 


무언가에 대해 책임 지기 위해서는 그것에 대해 알아야 한다. 알아야 그것이 잘못되었을 때 대처할 수 있다. 즉 모르니 대처할 수 없고, 그러니 책임지지 않으려 한다. 그 파장이 큰 것일수록 리더가 책임을 져야 한다. 하물며 작은 회사의 팀장이 지는 책임, 대표가 지는 책임의 무게도 가볍지 않은데, 한국은 큰 조직의 리더가 될수록 무책임해지고 무식해진다. 이것이 한국의 미래를 갉아먹고 있다. 



요즘 한국 사회도 이렇고 나도 이렇구나. 어두운 터널을 지나는 기분... 언제쯤 끝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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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모주도권싸움 2015.06.05 09:11 신고

    모 주도권싸움이죠. 서로간의 앙금이 있는 상태에서도 정권교체를 위해 뭉친거라서...
    문재인은 대권을 잡을수 있는 두번의 기회를 날려버린거죠. 당대표를 박지원에게 양보안한것
    선거에 진후 바로 사퇴안한것 두가지를 모두 거부하고 호남여론이 나빠진다는걸 예측못했다면 정말 정치력이 없다는 증거고 예측하고도 그리했다면 대권보다는 친노의공천이중요하다고 생각한거죠
    현재 문재인 지지율은 계속 하락중이고 끝났다고 봐요
    이재명 안철수 박원순 반기문 손학규정도가 대권후보인데 총선은 망할게 확실시 돼고 일말의 희망이 있는게 대권인데 정말 희박하네요
    어차피 이리된거 차라리 분당하는것도 야권쪽에서는 나쁘지 않다고 봐요. 정책연대나 대권연대만 하면돼지 굳이 같은 당에서 니꺼니 내꺼니 싸울 필요가 없죠

    • 정치력 부재가 큰 일인 듯합니다. 정치력이 부족하면 서로 대화를 해서 풀어나가는 지혜라도 있으면 좋겠지만, 그것도 없고요. 저도 차라리 분당해라는 쪽으로 기울더군요. ~..댓글 감사합니다.

작년부터였나, 아니면 그 이전이었나. 정치가 우리 삶에 미치는 영향이 커다는 사실을 알고 난 다음부터 제대로 된 공부를 하고 싶었는데, 아직도 시작하지 못했다. 마음 속의 분노와 절망은 너무 커져 폭발하기 직전이다. 오늘 광화문을 지나는데, 나도 모르게 눈물이 났다. 그리고 아무렇지 않는 듯 사는 내가 미워졌다. 우리 사회의 문제는 이미 오래 전부터 시작되었고 이젠 치료하기 어려운 지경에 이르는 건 아닌가 싶다. 조 단위로 해먹은 전직 대통령을 불러 조사하지도 못하고 빠르게 성장하는 인도네시아에서, 일본과 중국이 그간의 갈등을 끊고 악수하는 자리에 한국 대통령은 없고 도리어 고산병을 극복하며 열정적으로 남미 외교를 하고 있다는 기사는, 대놓고 국민들을 무시하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은 정부와 여당을 지지하고 한때 자신들을 재정적으로 지원했던 정치인이었던 기업인이 억울해하며 자살을 해도, 그 지지는 쉽사리 누그러질 생각을 하지 않는다. 도대체 이런 나라에 미래가 있기라도 한 걸까. 


* *  


세상사에 무지하고 관심 없는 백성들을 올바른 길로 인도할 성군 따윈 없다. 아니 그런 성군이 있다 한들 그 성군 앞에 놓인 길은 가시밭길일 테니, 그가 성공할 가능성은 전무하다. 그러니 백성들이 알아서 세상사를 알아야 한다.


하지만 지금 한국은 무지한 백성들로 가득 차 있는 듯하여 안타깝기만 하다. 티브이에서 나오는 이야기를 진짜라 믿고, 듣기 좋은 거짓말을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인다. 누군가를 향한 유언비어를 그대로 믿고 잘못된 소문이 진짜인 양 그대로 따라 하기 일쑤다.


동네 곳곳에 도서관이 생기고 인터넷으로 원하는 정보를 찾을 수 있는 시대가 되었지만, 백성들은 도리어 더 무지해지고 있다.


모든 시대, 모든 국가에서 벌어졌듯이, 그 나라 백성들 수준에 맞추어 그 나라 정치도 이루어지는 법이다. 전제군주정에는 그 정치체제에 맞는 백성들이 있고 민주주의에는 민주주의에 맞는 백성들이 있다. 그런데 지금 한국은 마치 전제군주정을 보는 듯하다. 이에 일부 사람들은 황당해하고 일부 사람들은 거리로 나서기도 하지만, 대다수는 수수방관이다. 수수방관하면서 TV를 보며, 아무 일 없는 척한다. 당연히 그들이 보는 TV 채널은 고정되어 있다.

 

내가 살아가면서 내일이 어제보다 나아질 것이라고 확신하지는 않았지만, 적어도 어제보다 못하리라곤 생각하지 않았다. 하지만 한국은 퇴보 중이다. 더 큰 문제는 퇴보하고 있다는 사실에 사람들은 관심 없다는 것이다. 


문제를 안다고 해서, 그 문제에 대한 해답을 알고 있다고 해서, 해결할 수 있다고 믿는 걸까? 문제는 경제가 아니라, 정치다. 한국 사회는 정치적 문제가 경제의 발목을 잡을 만큼 체계적으로 변했다. 1970년대가 아니라 2010년대다. 연일 국가부채, 가계부채 이야기가 나오지만, 정부는 어떻게든 돈을 빌려가서라도 경기 부양을 할 태세다. 의도적으로라도 자산 인플레이션을 만들고 싶을 게다. 집값 오르면 부자가 된 양, 돈을 많이 쓰지 않을까 내심 기대를 한다.

 

사람들은 자신들이 어디에 서 있고 왜 세상이 갈수록 야박해지고 일상이 힘들어지고 있는가에 대한 근원적인 질문을 던지지 않고, 이젠 던지지도 못하는 시대가 되었다. 이미 우리는 세상사의 무지함으로 인한 반쯤 노예 상태가 되었다. 그런데 이 노예들은 자신들의 처지와 무관하게 언젠간 배탈 나게 할 음식을 내어놓으면 좋아라 하고, 배탈나지 않는 법 같은 걸 이야기하면 화를 내고 ‘너 이상한 생각을 하는 놈이구나’라며 인신공격을 해댄다. 

 

이제 우리의 적은 저들이 아니라 우리들 속의 무지다. 스스로 무지하다고 여기는 사람들은 채널이 고정된 TV를 보면서 세상을 잘못 읽고 바라본다. 그리고 스스로 무지하지 않다고 확신하는 이들은 스스로의 얼굴을 보지 못한다. 이 나라에 미래가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흥분하고 열을 내지만, 미래는 정해져 있고 위로 올라가는 계단은 사라졌다. 


왜 사라졌냐고? 그건 제대로 된 정치 지도자를 선택할 눈도, 안목도 가지지 못한 우리들 탓이다. 어쩌면 이것이 바로 민주주의의 폐해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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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맘이 아파요…
    우리가 꿈꾸면서 싸워 성취한 세상이
    이런 모습이어선 안되겠단 생각이
    참 많이 드는 요즘이에요

    • 가끔 제가 알던 한국이 맞나 하는 생각이 들어요. 아니면 제가 한국을 너무 몰랐던 것이기도 하고요. ㅜㅜ



"but to-day the struggle." ...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시 구절이라는 생각에 한글로 옮겼다. 역시 영시는 한글로 옮길 수 없구나하는 생각을 했다. 뜻을 통하게 옮길 수 있지만, 영어 고유의 맛을 옮길 순 없었다. 옮긴다면 아예 새로 창작한다는 기분으로 옮겨야 하고, 이럴 땐 번역이 아니다. 


아는 지 모르겠지만, 스페인은 20세기 대부분은 프랑코 독재 정권의 시대였고, 20세기 초반 무수한 유럽 지식인들이 '국제 여단Brigadas Internacionales)'이라는 이름으로 스페인 내전에 참전하게 된다. 소설가이자 프랑스 초대 문화부 장관인 앙드레 말로도 이 전쟁에 참여하였고, 오든(W.H.Auden)은 구구절절하게 스페인 내전 참전을 독려하는 시를 적었는데, 바로 아래 <스페인 1937>라는 시다. 


2014년, 한국, 서울 속에서 살면서, 개인적으로도 참 많은 일들이 있었고 힘들었고 견디기 어려웠지만, 사회적으로는, 차마 내 개인적 삶이 엉망이 되었어요,라고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참혹했다. 


그런데 조용하기만 하다. 

이 기묘한 침묵은 무엇일까?


오든은 이야기한다. '오늘은 투쟁이라네(to-day the struggle)' 

내일은 2015년, 나에게, 혹은 우리에게 필요한 건 바로 struggle일 것이다. 

분명한 목적이 있고 가치가 있는, 그리고 그것을 향한 전력투구!  



** 




Spain 1937 



                   - W.H.Auden



Yesterday all the past. The language of size

Spreading to China along the trade-routes; the diffusion

Of the counting-frame and the cromlech;

Yesterday the shadow-reckoning in the sunny climates. 


모든 과거가 있었던 어제. 크기를 나타내는 언어는

무역로를 따라 중국으로 퍼져나가고; 확산되는

주판 계산기와 고인돌. 

어제 태양이 비치는 세월 속에 간접계산법이 있었네.



Yesterday the assessment of insurance by cards

The divination of water; yesterday the invention

Of cart-wheels and clocks, the taming of 

Horses. Yesterday the bustling world of the navigators.


어제 서류를 통한 보험이 있었고 

해로를 예측하고; 어제 발명되었네

수레바퀴들과 시계, 길들인

말들. 어제 항해자들로 북적거렸던 세계가 있었지.



Yesterday the abolition of fairies and giants,

The fortress like a motionless eagle eyeing the valley.

The chapel built in the forest; 

Yesterday the carving of angels and alarming gargoyles.


어제 요정들과 거인들이 사라졌고

그 요새는 마치 계곡을 향한 독수리의 움직이지 않는 눈짓 같았지. 

숲 속에 지어진 성당; 

어제 천사들의 조각들과 불안하게 만들던 괴물석상들이 있었네



The trial of heretics among the columns of stones;

Yesterday the theological feuds in the taverns 

And the miraculous cure at the fountain;

Yesterday the Sabbath of witches; but to-day the struggle. 


이단자들의 재판이 돌기둥 가운데서 열리고;

어제 선술집에서 신학에 대한 논쟁이 있었네.

그리고 수원지(水源地)에서의 기적적인 치료

어제 마녀들의 연회가 있었지; 그러나 오늘은 투쟁이라네. 



Yesterday the installation of dynmos and turbines,

The construction of railways in the colonial desert;

Yesterday the classic lecture 

On the origin of Mankind. But to-day the struggle. 


어제 발전기와 터빈의 설치가 있었고,

식민지의 사막에 철도 공사가 있었네; 

어제 그 최고의 강의에선

인류의 기원에 대해 이야기했지; 그러나 오늘은 투쟁이라네.



Yesterday the belief in the absolute value of Greek,

The fall of the curtain upon the death of a hero;

Yesterday the prayer to the sunset,

And the adoration of madmen. But to-day the struggle.


어제 그리스의 고귀한 가치에 대한 믿음이 있었지.

영웅의 죽음 위로 내려오는 커튼. 

어제 일몰에 대한 기도가 있었네

그리고 미친 자들의 찬미. 그러나 오늘은 투쟁이라네. 



As the poet whispers, startled among the pines,

Or, where the loose waterfall sings, compact, or upright 

On the crag by the leaning tower; 

“Oh my vision. O send me the luck of the sailor.” 


시인이 속삭일 때, 소나무들 사이에서 깜짝 놀라,  

또는, 한가한 폭포가 노래하는 곳에서, 긴장해서, 또는 서서 

기울어지는 탑 옆 바위 위에

오 나의 비전이여, 오 나에게 선원의 운명을 다오 



And the investigator peers through his instruments

At the inhuman provinces, the virile bacillus

Or enormous Jupiter finished 

“But the lives of my friends. I inquire. I inquire.”


그리고 탐구자는 그의 기구를 들여다 보며

인간 밖의 영역에서, 강력한 세균, 

또는 이미 탐구가 끝난 거대한 목성 

“그러나 내 벗들의 삶들. 나는 묻는다, 나는 묻는다.”



And the poor in their fireless lodgings, dropping the sheets

Of the evening paper: “Our day is our loss, O show us 

History the operator, the 

Organiser, Time the refreshing river.” 


그리고 가난한 이들은 한 점 불도 없는 셋방에서, 종이 한 장을 떨어뜨리네

석간 신문 속에서: “우리의 날은 우리의 상실, 오, 우리에게 보여주시오 

역사라는 운행자여, 

조직자여, 강물을 끊임없이 정화시키는 시간이여.” 



And the nations combine each cry, invoking the life

That shapes the individual belly and orders

The private nocturnal terror; 

“Did you not found the city state of the sponge,


그리고 민중들은 그들 각자의 비명을 하나로 묶고, 그들의 생명을 불러일으키며 

각자의 배를 만들며 행하네.

한밤 중의 은밀한 테러를

“생명이여, 그대는 해면동물의 도시 국가를 찾았는가?  



Raise the vast military empires of the shark 

And the tiger, establish the robin’s plucky canton?

Intervene. O descend as a dove or 

A furious papa or a mild engineer, but descend.” 


거대한 군사 제국을 성장시켰는가? 상어와 

호랑이의. 세웠는가? 울새의 용기 있는 작은 지역을 

개입하라. 오 비둘기 한 마리처럼 내려가라, 또는

화가 난 교황, 또는 온화한 기술자처럼, 그러나 내려가라.”



And the life, if it answers at all, replies from the heart

And the eyes and the lungs, from the shops and the squares of the city:

"O no, I am not the Mover;

Not to-day; not to you. To you, I'm the


그리고 생명이여, 만약 대답한다면, 대답하거라, 심장으로부터

그리고 눈동자와 허파로부터, 가게들과 그 도시의 광장으로부터: 

“오, 아니구나. 나는 원동력이 아니다;

오늘도 아니고, 네겐 아니다. 너에게, 나는 그저 



Yes-man, the bar-companion, the easily-duped;

I am whatever you do. I am your vow to be

Good, your humorous story.

I am your business voice. I am your marriage.


예스맨이고, 술집 친구이고 쉽게 속는 사람이라네. 

나는 그대가 무엇을 하던지, 나는 당신의 맹세입니다,

좋게 되기 위한. 당신의 유머러스한 이야기입니다.

나는 당신의 사업 목소리이며 당신의 배우자입니다.  



What's your proposal? To build the Just City? I will.

I agree. Or is it the suicide pact, the romantic

Death? Very well, I accept, for

I am your choice, your decision. Yes, I am Spain." 

 

당신의 제안은 무엇인가요? 정의로운 도시를 세우는 것인가요? 나는 할 것입니다.

나는 동의합니다. 또는 동반자살을 하실 건가요? 그 낭만적인

죽음? 정말 그럼, 저는 동의 합니다. 왜냐면

나는 당신의 선택이며, 당신의 결정입니다. 그래요. 저는 스페인입니다.” 



Many have heard it on remote peninsulas,

On sleepy plains, in the aberrant fisherman's islands,

Or the corrupt heart of the city,

Have heard and migrated like gulls or the seeds of a flower.


많은 이들이 머나먼 반도에서 그것을 들었네. 

나른한 평원 위에서, 비정상적인 선원들의 섬나라에서, 

또는 도시의 타락한 심장부에서

갈매기떼나 꽃씨들과 같이 듣고 이주해오는구나. 



They clung like burr to the long expresses that lurch

Through the unjust lands, through the night, through the alpine tunnel;

They floated over the oceans;

They walked the passes. They came to present their lives.


그들은 가시 달린 열매들처럼 달라붙어 있구나, 기나긴 급행열차에 달라붙어 휘청거리며,

정의롭지 못한 땅을 지나며, 밤을 통과하며, 알프스 산맥의 터널을 지나며; 

그들은 대양들을 떠다녔다

그들은 산길을 걸어갔다. 그들은 그들의 생명을 보여주며 갔다. 



On that arid square, that fragment nipped off from hot

Africa, soldered so crudely to inventive Europe,

On that tableland scored by rivers,

Our fever’s menacing shapes are precise and alive.


그 불모의 사각형 위에, 뜨거운 아프리카에서 떼어낸 조각, 

납땜질된, 창의적인 유럽에 대강 납땜질되어 붙은

강줄기에 의해 금이 그인 대지 위에 

우리들의 열병의 위협적인 형체들은 명확하고 생생하다.



To-morrow, perhaps, the future; the research on fatigue

And the movements of packers; the gradual exploring of all the

Octaves of radiation;

To-morrow the enlarging of consciousness by diet and breathing.


내일은, 아마도, 미래가 있겠지; 피곤에 대한 연구가 있고 

짐 꾸린 사람들의 움직임들이 있고; 

빛의 모든 옥타브에 대한 점증적인 탐험이 있고 

내일은 식이요법과 호흡작용에 의한 의식의 확장이 있을 것이네. 



To-morrow the rediscovery of romantic love,

The photographing of ravens; all the fun under

Liberty's masterful shadow;

To-morrow the hour of the pageant-master and the musician,


내일은 낭만적 사랑의 재발견이 있고 

까마귀 떼의 사진촬영이 있고; 모든 즐거운 것들이 

자유의 거대한 그림자 아래 있을 것이라네 

내일은 화려한 무대의 연출자와 음악가의 시간이 있을 것이네. 



To-morrow for the young the poets exploding like bombs,

The walks by the lake, the winter of perfect communion;

To-morrow the bicycle races

Through the suburbs on summer evenings: But to-day the struggle.


내일은 젊은 시인들이 폭탄처럼 터져 시를 쓸 것이라네.

호수를 따라 걸으며, 완전한 결합을 이룬 겨울, 

내일은 자전거 경주가 

여름 저녁 교외를 따라 있을 것이네; 그러나 오늘은 투쟁이라네. 



To-day the inevitable increase in the chances of death;

The conscious acceptance of guilt in the necessary murder;

To-day the expending of powers

On the flat ephemeral pamphlet and the boring meeting.


오늘은 피할 수 없는 죽음의 확률이 증가하고 있다네.

살인의 필요함, 그 범죄를 알면서 받아들여야 하지.

오늘, 우리의 힘은 빠지고 있지.

맥없고 덧없는 팜플렛과 지루한 회합 위에서



To-day the makeshift consolations: the shared cigarette;

The cards in the candle-lit barn, and the scraping concert,

The masculine jokes; today the

Fumbled and unsatisfactory embrace before hurting.


오늘 일시적인 위안들이 있지; 나누어 피는 담배;

촛불로 밝힌 곳간에서의 카드놀이, 그리고 삐걱대는 음악회,

사내들의 걸쭉한 농담; 오늘은 

전투 앞의 서투르고 불만족스러운 포옹이 있네



The stars are dead; the animals will not look:

We are left alone with our day, and the time is short and

History to the defeated

May say Alas but cannot help nor pardon.


별들은 죽었네; 동물들은 쳐다보지 않겠지.

우리들은 우리들의 시대에 홀로 남겨졌지, 시간은 짧고

역사는 패배한 자들에게 

유감이라곤 하진 않겠지만, 도움도 용서도 없을 테지. 




** 




W. H. Auden(1907~1973)의 시 <Spain 1937>의 번역으로 원문은 아래와 같다. 원시는 1937년 <Spain>으로 발표하였으나, 1940년 Auden이 출판한 <<Another Time>>에서 <Spain 1937>로 제목을 바꾸고 일부 내용을 삭제하고 수정하여 실었다. 위키피디아의 <Spain(Auden)> 항목에 따르면, 후에 그는 작품 선집(his collected editions)에서는 이 작품을, 결코 믿지 않았던(never believed) 정치적 견해가, 그의 생각에는 수사적으로 효과적으로 표현된 “정직하지 못한”(dishonest) 시로 여겨 거부했다고 한다. 


이 시의 원문은 한국방송통신대학(Korea National Open University) 영어영문학과 4학년 전공수업교재인 <<영미시 British and American poetry>>(김문수, 이두진, 이철 공저)에서 옮겼으며, 번역은 교재의 주석, 김문수 교수님의 수업 내용을 참고하여 번역하였다. 



W.H. Auden

by Cecil Beaton

vintage bromide print on white card mount, 1930

9 1/2 in. x 7 5/8 in. (240 mm x 195 mm)

Given by Cecil Beaton, 1968

http://www.npg.org.uk/collections/search/portrait/mw18383/WH-Aud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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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 10시 반 현관벨 소리에 나가 보니, 단감 1박스가 놓여있다. 택배 기사 아저씨가 놔두고 간 것이다. ... 마음이 아프다. 오늘같이 이렇게 추운 날, 그는 이 한 박스를 배달해서 버는 돈은 2012년 기준으로 325원, 올해 택배 시장이 조금 나아졌다고는 하나 채 400원이 되지 않을 것이다. 


낮에 점심 식사를 하면서 앞으로 한국은 10년 이상 최악 환경을 맞이할 것이라며 흘러가는 말로 중얼거렸다. 그와 함께 나도 최악을 향해가고 있는 건 아닐까? 바람 소리가 아파트 창을 두드리는 수능 바로 전 날, 학력고사를 치러 서울로 올라왔던 그 때가 무심코 떠오른다. 그 땐, 이렇게 춥지 않았지.


내일, 좋은 일만 가득해보길 기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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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이스북에 올라온 사진을 옮긴다. 어제 아침 CNN에 올라온 기사라고 한다. 하지만 대다수의 한국 언론, TV에서는 다루어지지 않는다. 날이 멀다하고 국정원 대선 개입 사건에 대해 시국선언을 하고 있지만, 침묵하고 있다. 


언론과 관련된 교과서에는 '비판 기능'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다. 그런데 현재 한국은 그런 언론을 찾기 어렵다. 


이 나라의 미래는 이렇게 어두워지는 것이다. 그리고 그 책임의 화살은 지금 침묵하는 언론들에게, 그 침묵을 강요하는 정부와 여당으로, 그 옆 무능력하기 이를 데 없는 야당에게까지 돌려야 할 것이다. 마지막으로 그런 정치적 지형에 대해 알 생각도, 알아도 침묵하는 국민들에게 돌려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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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전에 결과를 쉽게 알 수 있는 선거에, 무능력하다고 소문난 온갖 후보들이 출마한다고 상상해봐라. 모든 선거가 자칭 민주적인 방식으로 진행되지만, 실은 광대극에 불과한 것이다." 

- 바츨라프 하벨 Vaclav Havel, 'A Table for Tyrants', NYTimes, 2009, 5,11. 

(체코 전 대통령)



한국에서의 선거란, 민주적인 방식으로 진행되었지만, 실은 광대극에 불과하며, 광대극으로 만든 이들은 예전엔 정치인들이었고 지금은 이상한 편견을 가진 대중들이 합류하고 있다. 그러다 보니, 아래와 같은 발언이 가능한 것이다. 



이번 두 당선자의 경우는 해당되지 않는다. 더욱 중요한 것은 유권자들이 그 사안을 알고도 당선시켰다는 점이다. 유권자의 심판을 받은 것으로 간주할 수 있다는 얘기다. 이번 경우는 국민에 의해 '선출된 사람(the elected)'을 '임명직에 있는 사람(appointee)'이 가타부타하는 격이다.

- 김대중 칼럼, '기사회생에 기고만장한 새누리당', 조선일보, 2012, 4, 16.



확실히 이 나라는 이상한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다. 그것도 매우 황당한 방향으로(김대중 칼럼은 도대체 상식적으로 납득이 가지 않는 내용을 논리적 궤변으로 풀어내고 있으니). 그러고 보면, 야당은 이미 결정난 선거라고 생각했던 것일까. 


(요즘 부쩍 정치 이야기를 자주 올리게 된다. 거참.. ㅡ_ㅡ;;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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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4월 중순, 4.19와 관련된 TV 다큐멘터리를 보면서, 문득 당시 시위에 참가했던 이들의 인터뷰는 나오는데, 왜 당시 경찰이었던 이의 인터뷰나, 자유당의 입장에서 투표를 독려했던 공무원이나 학교 선생들의 인터뷰는 왜 나오지 않을까 의아스러웠다. 그리고 생각은 한 발 더 나아가, 현대 한국에서는 단 한 번도 지배와 피지배가 바뀐 적이 없었던 것은 아닐까에 이르렀다.

 

피지배의 위치에서 서서 시위를 하던 상당수가 물질적 여유, 그리고 그것이 가져다 주는 정신적 평온함으로 인해 스스로 지배의 위치에 서게 되었다는 착각을 가지며, 자신이 언제 피지배였냐고 반문하게 되는 과정이 반복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즉 지배의 계층은 별도로 존재하며(어쩌면 이것은 지배의 관념, 혹은 이데올로기일지도 모르겠다), 피지배들끼리 자리 바꿈과 이기적 갈등과 경쟁이 반복적이고 주기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은 아닐까.

 

나도 명확한 답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고, 그저 그런 생각이 들었을 뿐이다.

 

불행하고 안타까웠던 천안함 사고가 터지고, 북은 금강산의 여러 시설들을 동결 조치하였다. 나는 이러한 일들이 지난 정권에서 일어났다면 한국인들(!)이 어떤 반응을 보였을까 매우 궁금하다. 지난 정부와 현재 정부, 그리고 그 때를 살던 한국 사람들을 비교해보면 너무 흥미롭다. (정말 슬프고 안타까운 일이긴 하지만)

 

만일 천안함의 침몰이 북의 소행이라면, 과연 누구의 책임일까? 지난 정부의 책임일까? 평화의 시기는 지나고 대결의 시기로 만드는 것은 옳은 정책 판단일까? 안보 불안을 느낀다고 해서 일련의 군사적 조치를 취하는 것이 옳은 것일까? 그래서 우리는 만일의 사태가 필연적으로 일어난다고 가정하고 그것을 위해 준비하는 것이 맞는 것일까?

 

그런데 반대의 경우도 있지 않은가! 우리가 바라는 만일의 사태 평화 무드가 계속 지속되어 결국 어떤 형태로든 통일이 된다는 가 필연적으로 일어났을 때의 가정은 하지 않는 것일까?

 

다양한 시나리오가 있고 방향이 있다. 어떤 길로 갈 수 있다면, 다른 길로도 갈 수 있다. 그 국민의 한계가 그 나라 정부의 한계다. 그 점에선 미국이든, 프랑스든, 일본이든, 중국이든 별반 다르지 않겠다는 점이 그나마 다행스럽다고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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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라가 이상하게 돌아가기 시작했다. 온라인와 오프라인은 전혀 다른 세상처럼 느껴진다. '좌파'라는 이름으로 네티즌들과 젊은이들을 궁지로 몰고 있다. 나는 남은 4년이 걱정스럽지 않다. 도리어 10년 후가 더 걱정스럽다. 온라인에 익숙한 젊은 세대들이 주류가 되었을 때, 그들은 어떤 기억을 가지고 있을까?

지금 나이 들었지만, 흑백으로 구분할 수 없는 모호하기 그지없는 이 세상을 무조건 흑백으로 가르려고 하는 무식한 어른들 앞에서, 그들은 반대의 흑백논리로 가르려고 하지 않을까.

'우파'도 아니면서 우파인 척하는 이들이 '좌파'도 아닌 사람들을 좌파로 몰면서 궁지에 몰아넣으려고 하는 것처럼, 똑같이 '좌파'도 아닌 어떤 사람들이 그 때 당한 경험을 밑천삼아 '우파'라고 말하는 이들을 소수로 만들어 더한 궁지로 몰아넣는 세상이 오는 것은 아닐까.

제대로 과거를 청산하지도 못한 사람들이, 과거에 발목 잡힌 채, 미래를 어지럽히는 모양을 보고 있잖니, 마음이 어수선해진다. 이는 과거 정권도 별반 다르지 않았지만, 이번 정권은 다소 비상식적인 수준까지 진행되고 있는 듯 싶다.

어제 애국 기동단 뉴스나 PD수첩 PD들을 잡기 위해 약혼자 집까지 수색했다는 말을 듣고 보니, 이 나라의 10년 후, 20년 후가 걱정스러워진다. 현 정부의 사람들이나 정치인들은 요즘 젊은 세대들 생각이 어느 정도까지 앞에 나아가 있는지 알지 못하는 듯 싶다.

요즘 젊은 사람들의 눈은 한국에 머물러 있지 않다. 북미나 유럽 사람들과 비슷한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려고 노력하고 있는데, 현 정부 사람들이나 정치인들은 아직까지 옛날 한국의 눈으로 이 나라를 바라보고 가르치려고 하고 있다.

솔직히 남은 4년은 어떻게 견뎌보겠는데, 그 이후 이어질 세월, 또다른 편가르기가 진행된다면, 과연 우리는, 나는 어떤 선택을 할 수 있을까. 편가르기가 일종의 패턴화되어서 싸우는 나라가 된다면?

과거 정부들도 별반 다르지 않지만, 이번 정부는 확실하게 보여주는 듯 싶다. 도리어 지난 정부에서는 이런 비판들이 너무 자유로웠고, 그래서 시끄러웠다면, 현 정부는 너무 이질적이여서 무섭다.

김태동 교수의 아고라 글은 우리에게 많은 것들을 느끼게 해 준다. 
http://bbs1.agora.media.daum.net/gaia/do/debate/read?bbsId=D115&articleId=6005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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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재구성 - 10점
패트릭 스미스 지음, 노시내 옮김/마티



일본의 재구성
패트릭 스미스(지음), 노시내(옮김), 마티, 2008




1. 일본과 한국, 그 닮음에 대해


이 책을 읽고 있는, 그리고 읽었던 일본인은 이 책에 대해 어떤 생각을 가질까? 하긴 나도 박노자의 책을 읽고 우리 한국인들, 우리들의 가치관, 그리고 우리들의 민주주의에 대해서 뜨끔했다. 한국인 스스로 이야기하지 못하는 것들을 박노자는 자신이 살아왔던 서양 세계의 가치관대로, 객관적으로 분석하고 비판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패트릭 스미스의 이 책은 박노자가 한국, 한국인에 대해 묻는 것 이상으로 일본과 일본인에 대해 분석하고 따져 묻는다. 그리고 많은 문헌들과 인터뷰를 통해 이 책은 그 동안 나왔던 일본학이 얼마나 허구적이며 오리엔탈리즘에 젖어있었는가를 드러낸다.

나는 이 책을 읽는 내내 매우 불편했고 아팠다. 그리고 가끔은 일본 속에 숨어있는 한국과 만나기도 했다. 가령,

모든 것이 공산주의 견제라는 이름 아래 희생당했다. 우익 국가주의자의 제거가 중단되었고 미국의 국익에 위협이 된다고 판단되는 자들은 밀려나기 시작했다. 아시아 대륙 침략을 후원하고 전쟁 물자를 공급했던 족벌 경영 체제의 재벌을 해체하려던 계획도 무산되었다. 1948년이 채 끝나기도 전에 전전戰前 일본의 재벌 세력은 모두 제자리로 복귀했고 구시대의 정치엘리트 세력들이 다시금 일본을 다스리기 시작했다.(35쪽)


한국의 상황과 꽤 유사하지 않은가. 한국에서도 똑같이 일제 식민지의 순사가 바로 한국 정부의 경찰이 되었던 시기였다. 그러는 동안, 김구가 암살당하고 임시정부에 속해있던 중도 민족주의 지도자들이 소외되었다. 그리고 최근에는 “임시정부는 국제적 승인에 바탕을 둔 독립국가를 대표한 것이 아니었다”면서 “현실 공간에서 대한민국을 건국한 공로는 1948년 8월 정부수립에 참여했던 인물들의 몫으로 돌리는 것이 마땅하다”고 주장하는 책자가 나오기도 했다. 하지만 이것도 다른 시각에서 보자면, 광복 대신 건국에 방점을 찍는 순간 시작된 일의 사소한 과정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여기에 대해선 할 말도 많고 종종 화가 나기도 하지만, 이 책과는 대체로 무관한 내용이다.

최근 정치적 상황이나 정부와 여당의 정책 방향은 도를 지나쳐, 잘못되었다고 평가받고 있는 과거와 소란스럽긴 하지만 나름대로 악전고투하고 있는 현재 사이의 갈등을 비정상적인 것으로 만들어 잘못된 과거로 돌아가길 염원하는 듯하다. 그리고 많은 이들이 그러한 과거로 돌아가길 원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자, 다수의 법들과 다양한 제재 장치들을 만들고 있는 중이다.

그리고 잘못된 과거 속에서는 이 책에서 언급하는 근대 일본의 유산과 전통도 포함되어 있다. 전쟁 전 식민지 세대들 중 일부는 일본어로 황국신민교육을 받고 자라났으며, 그들 극히 일부는 광복 한국을 아주 부정적으로 보았을 것이고, 일본어로 생각하고 쓰고 읽는 것이 더 편했을 것이며(http://intempus.tistory.com/790), 이 나라의 주인은 국민이 아니라 천황이라고 여겼을 것이다. 그리고 이들은 그들 후손들에게 그런 생각의 일부는 남겨놓은 것은 아닐까? 그리고 은연 중에 이어져 오는 것은 아닐까? 내 생각이 매우 위험한 가설에 지나지 않겠지만서도.

현대 일본이 그들만의 독자적인 과거사를 정립하지 못하고 과거사에 있어서는 중국과 한국에 대해 열등감을, 근대 이후에는 서양 국가에 대한 열등감을 숨기지 못하는 것은, 근대 이후 일본이 한 번도 있는 그대로의 자신이 되어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이 점에 있어서 한국은 조금 유리한 입장에 서 있는 것처럼 보인다. 어쨋든 악전고투 끝에 민주주의를 이루었으니까. 하지만 최근 정부와 여당의 여러 정책들은 다소(혹은 매우) 위험해 보일 정도로 과거 회귀적임을, 더구나 대다수의 역사학자들까지 반대하는 역사 교과서 수정 문제나 한국 정부의 정통성 부분 등, 일본의 정치가들이 그랬듯이 한국의 정치가들도 그렇게 새롭게 채색된 한국의 가면을 만드려고 하는 것은 아닐까 하는 걱정이 앞선다.
 

2. 일본의 근대(Modern), 그리고 근대적 자아

현대
일본은 이러한 과정 속에도 다수의 학자들은 서양의 근대를 배우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해 왔다. 한국에 번역 소개되는 무수한 서양 번역서들 대부분이 일차적으로 일본에서 수입되었고 최근까지도 국역본 대부분은 먼저 번역된 일본 번역본에 의존했음을 떠올린다면 이해하기 쉬울 것이다. ‘근대의 초극’이라는 표현을 20세기 초반에 사용하기도 했으며, 가라타니 고진같은 비평가는 세계적인 지명도가 가지고 있으며, 한국에서도 스타급 대우를 받고 있지 않은가. 하지만 이런 상황 속에서 아래의 인용문은 낯설다.

일본인은 루소나 존 스튜어트 밀 같은 무수한 계몽시대 사상가들의 저서를 읽으며 근대를 시작했다. 그러고는 읽은 책과 그 속에 담긴 사상을 한쪽으로 제쳐두었다. 근대 경제는 이룩했으나 (여러 측면으로 미루어 보건데) 근대사회는 이룩하지 못했고, 패전 후 황국신민이 아닌 시민이 되었으나 참여할 만한 시민사회는 형성하지 못했고, 민주주의의 조직은 갖추었으나 민주주의는 이루지 못했다. 포스트모더니즘을 뭐라고 정의하든 간에 일본은 절대로 포스트모던이라 할 수 없다. 고도의 테크놀로지와 미래에 대한 환상을 제외한 나머지는 대체로 포스트모던이 아니라 프리pre-모던, 즉 전근대이다. (313쪽~314쪽)


우리가 알고 있는 일본과 실제 일본은 엄연히 다르다. 우리가 아는 일본은 책이나 잡지, 혹은 만화나 영화로 만나는 가면으로서의 일본(수출용 일본), 또는 서구의 오리엔탈리즘으로 탈색된, 혹은 변장된 일본일 지도 모른다. 여기에는 19세기 일본의 정치가들이 먼저 시작했으며, 패전 이후에는 미국의 주도적인 역할과 많은 역사학자들이 관여했고, 그러다가 무라카미 하루키, 요시모토 바나나 세대의 포스트모던으로 넘어가버렸다. 재일한국인과 같은 외국인(백인이 아닌), 일본 내의 부락민, 그리고 얼마 전까지만 해도 독립국가였던 오키나와 등 자신들 내부에 많은 차별을 만들어놓고 있으면서 이를 해결하지 못하고 있으며, 일본인 스스로도 이를 정면에서 바라보고 해결하려는 노력이 전반적으로 일어나지 못하고 있다.

그런데 실은 일본인 스스로는 '자기 자신의 정체성'(주체성, 또는 근대적 자아)이 가장 거대한 문제일 지도 모른다.

외국인이 제일 빨리 깨닫는 일본인의 특징은 남에게나 자신에게 진심을 숨기는 습관이 있다는 점이다. 일본인은 전부 가면을 쓰고 있고 각자 가면 쓰는 법을 배운다. 이 가면을 통해일본인은 남들과 가까이 살면서도 떨어져 사는 방법을 배운다. 일본이 이상하게 속이 텅 비고 모호하여 표면은 잔잔하고 변화가 없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 밑으로는 갈등과 긴장, 역류와 불안감이 잔뜩 존재하고 있다. 새로운 현상이 아니라 늘 그래왔다. 단지 최근에 와서 마치 뚜껑이 열린 듯 가면의 일부가 벗겨진 듯, 그 현상이 좀더 뚜렷해졌을 뿐이다.
(74쪽)


일본인에게 자기 자신이 된다는 건 일종의 모험이다. 자기 주장이 강하고 사랑 표현을 쉽게 하는 한국인이 낯선 것도 바로 이 지점이다. 그러나 일본인이 원래 그랬던 것은 아니다. 오키나와 사람들이 그렇지 않고 일본 내의 부락민 운동하는 이들도 그렇지 않다고 패트릭 스미스는 말한다. 가면을 쓰지 않고는 살아가지 못하는 사회로 일본인들 스스로도 자각하지 못한 채 와버린 셈이다.


개인이라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도 알지 못했다. 가장 자유주의적인 사람들조차 개인을 민족국가 개념에 끌어다 붙였다. 후쿠자와의 실수, 즉 “한 개인이 된다는 것은 일본인이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라고 보는 실수는 이후에도 여러 번 되풀이되었다. (112쪽)


그리고 개인으로서의 자기 자신이 아닌 채, 정치적으로 과장되고 의도되어진 일본인은 경제 발전에 몸을 내던지는 근대 무사의 모습에서, 전쟁 중의 일본 군인, 그리고 현대 기업의 직장인의 모습 등으로 변화하지만,  어느 것 속에서도 '스스로의 나 자신'은 없었다. 나쓰메 소세키의 인물들이 한결같이 외롭고 쓸쓸한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 나 혼자, 나 혼자만의 생각과 감정으로 느끼고 생각하고 움직인다는 것, 그것은 외롭고 쓸쓸한 일상을 견딘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소세키는 다채롭게 살았던 경험에서 얻은 통찰을 뒤로하고 도망가지 않겠다는 신념이 있었다. 세상이 시골과 도시, 전통과 근대, 외국과 일본, 하는 식으로 우열로 나뉘는 집단들의 집합체라는 일반적인 시각을 그는 거부했다. ‘자기다워진다’는 것, 즉 스스로를 돌아보는 것만큼이나 불투명한 과제가 없을 것이다. 안타깝게도 소세키 이후 그의 신념을 공유하는 일본인은 거의 없었다. 현대에 와서야 비로소 일본은 소세키가 제시했던 ‘진실’에 걸맞게 살아갈 준비가 된 것처럼 보인다.(376쪽 - 377쪽)


그리고 이러는 동안 일본인들은, '지금도 일본인들은 소속감이라는 그물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욕망과 그 그물망 안에 들어가기를 바라는 상반된 감정을 동시에 느낀다.'(121쪽) 하지만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을 뿐이다.

20세기 초반에 어느 일본 작가가 요염하고 매혹적인 것을 뜻하는 ‘비타이’라는 일본인 특유의 미적 감각을 지적했다. 그에 따르면, 일본은 기대하며 기다리는 상태를 선호하며, 욕망의 대상과 가능한 거리를 좁히되 목적을 달성하지 않은 채 가까이에서 최대한 목적 실현의 가능성을 음미하는 것이 ‘비타이’에서 얻는 쾌감의 진수라는 것이다. 완성은 존재하지 않는다. 타자는 영원히 타자이다. 꿈꾸는 상태가 실현되는 것보다 나은 모양이다. (21쪽)


그래서 어떤 사건이 터지고 나서야 비로소 일본인들은 스스로의 기분을 만끽한다. 꼭 히로히토 천황의 연설 전과 연설 후의 모습이 판이하게 달라지는 것도, 일본인 스스로 자기 자신의 생각이나 감정에 충실하게 행동하기를 꺼리기 때문이다(어쩌면 역사적으로 두려워하게끔 만든 것일 수도).

영화감독 구로사와 아키라의 자서전은 일본이 항복한 날을 다음과 같이 놀랍게 묘사한다. 그날 구로사와는 스튜디오로 와서 히로히토의 항복연설을 들으라는 연락을 받았다. 스튜디오로 가는 길에 도쿄 시내를 걸어서 통과하던 구로사와의 눈에는 온 국민이 고귀한 일본정신인 국체와 덴노의 명예를 위해 금방이라도 죽을 각오인 것처럼 보였다. 다들 “경황이 없었다. 일본도를 빼들고 앉아 칼날을 망연자실 내려다보는 상점주인도 있었다.” 젊은 구로사와는 라디오방송에서 흘러나오는 히로히토의 연설을 들었다. 그를 포함한 7,000만 명의 일본인은 히로히토의 목소리를 그날 생전 처음 들었다. 그리고 구로사와는 일어나 밖으로 나갔다."집에 돌아갈 때는 거리 분위기가 일변해 있었다. 상점가 사람들은 마치 다음날 있을 축제라도 준비하는 사람들처럼 들뜬 표정으로 소란스러웠다." (303쪽 ~ 304쪽)



3. 진짜 일본을 찾아가는 일본 현대 문학


하지만 그대로 머물러 있지만은 않았다.

오에가 말했다. “저는 작가로서 보통사람들이 사는 주변부에 관심이 있습니다. 주변부에서 살아가는 일본인의 내면적 자아에 대해 쓰고 싶습니다. 주변부야말로 진정한 일본 문화가 그렇지 않은 것과 함께 변천해가는 곳이지요.” (392쪽)


오에 겐자부로의 저 말처럼, 한국인들이 냉전과 독재 속에서 악전고투하여 민주주의를 얻어내었다면, 똑같이 일본인들도 스스로의 힘으로 뭔가를 만들어내기 위해 노력하고 있으니까 말이다. 그것이 아직 소수에 지나지 않더라도. 하지만 한국에서도 진짜 일본을 그려보여주었던 오에 겐자부로 대신 무라카미 하루키를 선택했듯이, 일본도 그런 것은 아닌까 걱정스럽다.

오에 겐자부로의 1994년 노벨문학상 수상은, 드디어 전 세계가 일본과 일본인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게 되었음을 시사한다. (중략) 그러나 일본 국내에서는 변한 게 없었다. 오에의 소설이 선명하게 보여주듯 오에 세대와 나머지 일본인들 간의 간극은 넓어지기만 했다. 오에가 스톡홀름으로 향할 즈음에는 오에나 아베 코보(1993년 사망)는 일본 문학계에서 멸종된 공룡에 속했다. 노벨상 수상 이후 미처 거장을 알아보지 못한 실수를 만회하려는 듯 아키히토는 서둘러 오에에게 덴노상을 수여하고자 했다. 그러나 덴노상은 자기 작품 속에서 극복의 대상이 되는 문화를 상징했으므로 오에는 이를 거부했다. 아키히토가 괜히 어색한 원조를 시도했다가 자국 최고의 작가들을 소외시키는 은밀한 현상을 드러내버린 꼴이었다.  (394쪽)


작품성으로나 문학적 위상으로나 오에 겐자부로와 무라카미 하루키는 애초부터 비교의 대상이 될 수 없다. 오에 겐자부로가 어른이라면, 무라카미 하루키는 갓 유치원을 졸업한 초등학생 저학년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상업적인 성공이라는 간판은 무시하지 못하는 것이어서, 무라카미 하루키는 위대한 소설가로 올려주는 국내의 모 문학잡지나 평론가들을 보면 솔직히 할 말이 없다.
(실은 그들의 형편없는 상업주의와 감식안을 탓해야 할 것이다 나도 무라카미 하루키에 대해선 몇 년 전에 작은 평문을 쓴 적이 있었다. 하루키 문학은 본격 문학이라기 보다는 상업 문학에 가깝고, 이 점을 인정한 후 그나마 있는 가치에 대해서 적으려고 노력했던 글이다. 하루키, 또는 현대적 삶 - http://intempus.tistory.com/135)

그렇다면 패트릭 스미스는 무라카미 하루키에 대해서 어떻게 이야기하고 있을까.

포스트모던 작품에 공통된 맥락은 ‘의도적 무지’이다. 무라카미 하루키는 스스로를 “오리지널”이라 일컫는다. “내가 내 소설을 위해 완전히 독자적으로 새로운 일본어를 창조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꼭 그렇게 선언되어야 진정한 독창성인가?  (중략) 등장인물이 생활하는 환경에 관한 묘사를 거부하고, 일본에 대해 쓴다고 하면서 일본에 대한 진솔한 묘사를 작품에서 실종시키는 작가 입에서 나올 말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398쪽)

그에게 과거란 무관했다. 스스로를 돌아보고 모방이나 죽은 전통에서 탈피하라는 과제에 대한 무라카미의 해답은, 자신이 일본인이라는 사실에서 아예 통째로 탈피하는 것이었다. 그는 무엇보다도 일본이라는 문제 많은 사회와 일정한 거리를 두고 싶어했다. 일본을 외국인처럼 바라보고 싶었던 것이다. “나는 일본 바깥에서 일본사회에 대해 쓰고 싶다”고 그가 말했다. “지나치게 ‘일본적’인 부분을 하나씩 전부 던져버린 후에도 남아있는 것이 일본인의 본성이 아닐는지요.” 말도 안 되고 근거도 없는 역설이다. 지나치게 일본적인 부분? 뿌리 깊은 열등감이 또 한 차례 등장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이러다 무라카미도 십 년 후에는 감상적인 국가주의자로 변모해버리는 게 아닐까. (397쪽)


패트릭 스미스는 '나쓰메 소세키 - 아베 코보 - 오에 겐자부로'를 분명히 한다. 나도 여기에 대해서 100% 동의한다. 이 세 명의 소설가는 일본 근현대 문학의 최정수이다(반드시 읽어야 하는 소설가들이다). 그리고 여기에 속하지는 않지만, 그 옆에 슬픈 소설가 두 명 있다면 '설국'의 가와바타 야스나리와 '금각사'의 미시마 유키오다. 

 

미시마 유키오가 자살하기 몇 해 전인 1960년대 후반, 프랑스 텔레비전 방송국의 외국인 특파원이 취재차 도쿄 남쪽 해변에 위치한 미시마의 집을 방문했다. 미시마가 사는 집을 보고 얼마나 놀랐는지 그 특파원이 털어놓았다. 당시 골수 국수주의자였던 미시마의 집은 번지르르한 서양 저택이었다. 프랑스식 문에, 연철로 만들어진 발코니에, 정원에는 오르페우스 조각상이 서 있었다. “온 집안을 둘러봐도 특별히 일본적인 물건을 찾아볼 수 없네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특파원이 미시마에게 물었다.
“눈에 보이는 것만 빼면 전부 일제예요.” 미시마의 대답이었다.(292쪽)

일본인들이 과거라는 감옥을 만들어 그 안에 스스로를 가두었다는 점, 그리고 일본정신이란 관념이 바로 그 감옥에서 비롯된다는 점을 미시마는 잘 알고 있었다.(293쪽)

“실패한 비극배우라 함은 바로 나를 두고 하는 말이 아닐까? 나는 열심히 사람들을 울리려고 무대에 나가는데 사람들은 모두 박장대소하는군.” (384쪽에서 재인용)

과거가 현대에 대한 보호막이기를 원하던 그 꿈은 미시마, 가와바타와 함께 죽어버렸다. 이제 앞으로 그들과 같은 작가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이루지 못한 꿈’이 하나 더 있다. 침묵하는 과거와 불협화음 가득한 현재가 뒤섞인 일본을 그저 있는 그대로 묘사하고 싶은 꿈 말이다. 과연 이 꿈을 이룰 수 있을까? 일본 소설가들이 재능은 있어도 탁월한 정상급 작가가 되지 못하는 이유는 바로 이런 문제를 제기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384쪽)


문득 '위대한 전통은 과거에 있는 것이 아니라 미래에 있다'는 표현이 떠오른다. 예전 미술사 수업 시간에 선생님께서 하셨던 말이다. 문제 많은 일본 옆에 문제 많은 상태에서 문제 더 만들고 있는 한국. 흥미로운 조합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일본의 미래에 대해서 낙관할 수 있을까. 페트릭 스미스는 적어도 그렇다라고 말한다. 하지만 과거를 돌이켜보건데, 쉽게 그렇게 되지는 않을 것이다. 일본의 리더들이 바뀌지 않는 이상 말이다.(이는 한국도 별반 다르지 않다) 


4. 숨겨진 일본

도카이도는 근대 일본을 둘로 나누는 경계이다. 태평양과 도카이도 사이에 놓인 지역이 ‘오모테니혼’ 즉 일본의 얼굴이고, 나머지 지역이 일본의 등에 해당하는 ‘우라니혼’이다. 메이지유신이 이런 구분을 새로 탄생시킨 것은 아니다. 오히려 기존의 지리적 구분에 격변을 일으켰다고 보는 편이 옳다. 중국에서 문물을 수용하던 수세기 동안 일본의 앞면은 거꾸로 동해 쪽이고 태평양 쪽이 뒷면이었다. 그러다 일본이 19세기에 서구로 눈을 돌리면서 앞뒤가 바뀐 것이다. 도카이도의 한쪽이 근대화되는 동안 다른 한쪽은 과거에 멈춰야 했다.
요즘 ‘우라니혼’은 약간 실례되는 말이다. (중략) ‘숨겨진 일본’이라고 번역하는 게 차라리 나을지 모른다. 우라니혼은 시골이다. 대나무 수, 계단식 논, 단선철로, 반딧불, 지푸라기 냄새, 가열처리 안 한 곡주가 있는 곳이며 근대 일본인이 있는 힘을 다해 벗어나려 노력했던 곳이다. (254쪽)  


'오모테니혼'과 '우라니혼'의 대비. 다소 낯설지만, 근대화 과정 속에서 필연적으로 뒤따르게 되는 도시과 농촌 사이의 갈등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실상은 전혀 다르다.

그러나 ‘근대적 일본’이 ‘전근대적 일본’에 돈을 주어가며 진보를 막는 모습을 보면 그런 행태가 얼마나 잔인한 짓인지 알 수 있다. 시골을 박물관으로 만들고 시골사람들을 전시물의 일부로 삼아 자신이 옛날 그대로 순수한 존재라는 환상을 조작하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264쪽)


그런데 한국도 이렇게 변해버리는 것은 아닐까. 아니면 벌써 이렇게 변한 것은 아닐까. 우라니혼은 오모테니혼의 입장에서 보자면, 일종의 타자인 셈이다. 그리고 일본 안에는 많은 타자들이 존재하고 있다.


초등학교 6학년 때 서울에서 열린 피아노콩쿠르에 참가하기 위해 어머니와 함께 처음으로 한국에 갔습니다. 그때 3주 정도 한국에 머물렀는데, 사람 사는 후텁지근한 냄새가 나던 것과 빨리 일본에 돌아오고 싶던 것이 기억납니다. 두 번째로 한국에 갔을 때는 1980년 대학교 1학년 봄방학 때였습니다. 진정한 내 조국은 한국이라는 생각으로 한국에 갔는데 오히려 제 자신이 얼마나 일본적인지 강렬하게 느낄 수 밖에 없었습니다. (416쪽~417쪽에서 재인용) 


1981년 22세의 나이로 지문날인을 거부한 이후 내내 일본 법정을 들락거린 최선애의 법정 진술의 일부다. 꼭 소설가 유미리의 목소리를 듣는 기분이다. 그런데 한국도 이제 이 문제에 대해서 자유로울 수 없다. 일본이 타자에 대해서 배타적이라면, 한국 사회는 그보다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는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여하튼 일본 사람들은 느리지만, 한발한발 앞으로 나가고 있는 듯 보인다. 책의 결말은 일본과 미국을 향해 있다. 있는 그대로의 일본, 일본인을 보라는 것이다. 그 다음은 전적으로 일본인들의 책임이다. 하긴 이는 한국도 마찬가지다.

이 글을 쓰고 다듬다 보니, 어느새 2009년이 되어버렸다. 지금 여의도와 종로에서는 새로운 해를 맞이하는 무수한 인파들 속에서 촛불을 든 이들이 있을 것이다. 흥미롭다. 어째서 정치인들은 19세기나 20세기나, 일본이나 한국이나 이토록 변한 것이 없는 것일까.

*      *  

책은 매우 두껍고 방대하며 많은 문헌 자료와 인터뷰를 바탕으로 하고 있다. 실은 리뷰를 이렇게 길게 적을 생각은 없었다. 글이 길어지면 초점이 흐려지고 지루해진다. 따라서 위 글도 그러하리라 싶다. 그만큼 재미있고 흥미진진했으며 한국, 한국사회, 한국인에게도 시사하는 바가 컸던 책이라 여겨진다. 또한 일본인에 대해서도 많은 것들을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 그런데 늘 일본인을 만날 때나 볼 때 뭔가 애잔한 느낌을 지울 수 없었는데, 이 책으로 인해 더 심해졌다. 내년에는 반드시 일본 여행을 갈 생각이다.

그리고 이 두꺼운 책을 번역하신 noi님에도 감사를. noi님은 이 불성실한 독자를 위해 기꺼이 번역한 책을 보내주셨다. 2009년 최초의 포스팅은 noi님께서 번역하신 책의 리뷰가 되었다. : )  2009년 속을 살아갈 한국과 일본의 모든 개인들이여, 파이팅Fight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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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크롬차 2009.01.01 19:13 신고

    글 잘 읽었습니다~(__) 특히 고도의 테크놀로지와 미래에 대한 환상을 제외한 나머지는 대체로 포스트모던이 아니라 프리pre-모던, 즉 전근대이다~라는 말이 의미 심장하게 느껴지네요...쩝, 저도 일본은 한번쯤 가봐야겠다고 생각하지만 엔고로 인해서 고민이 많이 되네요 ㅎㅎ 가본곳이라고는 네팔이나 방글라데시 혹은 태국 밖에 없으니~자주 들리겠습니다~!!

    • 감사합니다. : )
      엔고 정말 걱정입니다. ㅡ_ㅡ;; 2009년에는 환율 문제 제발 해결되었으면 좋겠는데 말이죠.

  • 2009.01.03 12:39

    비밀댓글입니다

  • 일본의 재구성을 읽는다 읽는다 하면서도 계속 밀쳐두고 망설이기만 했었는데 오늘에야 주문을 했네요. 이렇게 상세하게 감상기를 올리셔서 읽는 데 많은 참고가 될 것 같아요. 정말 번드르르하기만 하고 어렵기만 한 일본학 서적보다 훨씬 더 사람의 마음을 울릴 것 같군요. 좋은 글 감사합니다. 원래 무라카미 하루키를 싫어했는데, 역시 저자도 저와 비슷한 생각을 갖고 있었던 것 같아요...

    • 무척 좋은 책입니다. 한국, 그리고 한국사람들에 대해서도 이런 책이 있었으면 하는 바람을 가져보네요. 패스츄리님의 댓글 덕분에 저도 이 책에 대해서 다시 한 번 되새기게 되었네요. 감사합니다. ^^~

우연찮게 웹 서핑을 하다 두 사람을 알게 되었다. 한 명은 러시아에서 한국으로 입양되어 온 사춘기 소녀이고 한 명은 한국에서 네덜란드로 입양되었다가, 지독한 사춘기를 보내고 난 뒤 한국으로 영구 귀국한 처녀다. 두 사람의 표정이 대비되면서, 인생이란 뭘까 하는 생각을 잠시 해보게 된다.

<사람들> 러시아서 입양온 장수인양 

네덜란드 입양 26년만에 영구 귀국한 윤주희의 ‘다녀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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