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 43

과연 그것이 미술일까?, 신시아 프리랜드

과연 그것이 미술일까?신시아 프리랜드(지음), 전승보(옮김), 아트북스, 2002 이 책은 현대 미술, 그리고 현대 미술에 대한 여러 이론들에 대해서 간단하게 요약하면서도 자신의 입장을 잃지 않는다는 점에서 일독을 권할만한 책이다. 종종 나는 신시아 프리랜드의 입장과는 다른 입장에서 이야기하기도 하지만, 그녀와 다르게 해석할 수 있다는 점을 보여주고 싶었을 뿐이다. 이 글은 각 챕터별로 중요한 점만 이야기하는 방식을 선택했다. 더 중요한 이야기도 있을 수도 있다. 이 점에서 이 글은 매우 편파적이다. 빌 비올라라는 미디어 아티스트가 있다. 비디오 아트를 이야기할 때, 백남준과 함께 가장 많이 이야기되는 예술가이다. 몇 해 전 국제 화랑에서 전시를 한 바 있는 그의 작품은 맨 마지막 챕터에 있지만, 이 책..

팬데믹 패닉, 슬라보예 지젝

팬데믹 패닉슬라보예 지젝(지음), 강우성(옮김), 북하우스 매번 읽는 책들이 출판된 지 한참 지난 책들이라, 이번에는 상당히 시사적인 책을 읽고 싶었다. 뭔가 시대에 뒤쳐지는 느낌이 있었다고 할까. 세상에 대해 관심이 없는 것도 아닌데, 관심 없는 구닥다리가 되는 듯 싶었다. 그래서 구입한 책이다. 책은 얇고 쉽게 읽힌다. 다만 현 시절에 대한 탁월한 통찰력이 있는가에 대해선 고민해볼 여지가 있다. 대단한 찬사를 거듭할 책은 아니다. 도리어 지젝이 인용한 브뤼노 라투르의 견해에 더 이끌렸다. 바이러스의 확산을 이해하려면 우리는 식습관 같은 인간의 문화적 선택, 경제와 세계무역, 복잡한 국제관계 네트워크, 공포와 공황 상태의 이데올로기적 메커니즘 같은 변수들을 고려해야 한다. 이 연관성을 제대로 파악하기 ..

2020.05.21. 드가와 함께 당구장에서

Billiard Room at Menil-Hubert, Edgar Degas, 1892, 오르세미술관 사는 게 쉽지 않다. 하루 24시간 중 가장 좋은 시간은 잠을 잘 때. 나머지는 조금 힘들거나 많이 힘들거나, 아니면 힘들었던 것들에 대한 걱정, 두려움, 후회같은 것으로 얼룩져 있다. 아주 짧게 그렇지 않은 순간이 있기도 하는데, 그건 사랑에 빠졌거나 사랑을 꿈꾸거나, 사랑에 빠진 듯한 봄바람, 봄햇살, 봄날을 수놓는 나무 잎사귀 아래 있을 때다. 그러나 이런 순간은 극히 드물어서 기억되는 법이 없다, 없었다. 원근법적 세계에 대한 그리움. 인상주의자들에게 원근법은 고민거리였다. 르네상스 시기부터 이어져온 어떤 원근법을 벗어났지만, 그렇다고 해서 다른 원근법을 무시할 순 없었다. 그건 우리가 보는 방식..

발견의 시대, 이언 골딘, 크리스 쿠타나

발견의 시대 Age of Discovery 이언 골딘, 크리스 쿠타나(지음), 김지연(옮김), 21세기북스 "현 시대는 신르네상스다. 폭발하는 천재성과 번성하는 위험성이 대립하는 시대다." 나는 자주 현대를, 로마가 흔들리기 시작하던 헬레니즘 시대와 비교했다. 헬레니즘은 로마 시대의 정점이면서 동시에 그림자가 깃드는 시기다. 팍스 로마나의 시대이지만, 그 평화 사이로 새로운 이민족들이 끊임없이 들어오고 문화와 종교가 뒤섞이고 더 이상 확장하기엔 한계에 이르는 어떤 제국으로 변해간다. 그리고 그 다음은 (다들 알고 있듯이) 로마 말기, 혹은 중세 초기가 시작된다. 문명의 노을이 깃드는 시기다. 르네상스와 비교한 적은 거의 없다. 살짝 현대와 비슷하다는 생각을 할 순 있으나, 엄밀히 말해 순수한 르네상스는 ..

뒤샹 딕셔너리, 토마스 기르스트

뒤샹 딕셔너리 토마스 기르스트(지음), 주은정(옮김), 디자인하우스 지난 주 마르셀 뒤샹 전에 대한 리뷰를 올리면서 잠시 참고했던 책이었다. 말 그대로 '뒤샹 사전'이다. 마르셀 뒤샹(또는 현대 미술 이론)에 관심 있는 이들에겐 무척 유용하지만, 그저 현대 미술에 대해 일반적 이해만 가진 이들에겐 다소 쓸모가 떨어지는 책이라고 할 수 있다. 더구나 뒤샹을 이해하기 위한 다양한 키워드가 등장하지만, 이와 연관된 도판 이미지는 없다는 점은 일반 독자에게 어필할 수 있는 요소가 거의 없음을 드러낸다고 할까. 하지만 나는 이 책을 통해 뒤샹에 대한 여러 가지 사실을 새로 알게 되었으니, 사전의 유용성이 없진 않았다. 어쩌면 탁월할 지도 모른다. 뒤샹과 연관된 대부분의 키워드들을 담고 있을 테니, 뒤샹에 대해 알..

인생의 발견, 시어도어 젤딘

인생의 발견 The Hidden Pleasures Of Life 시어도어 젤딘 Theodore Zeldin (지음), 문희경(옮김), 어크로스 전혀 기대하지 않았던 책이다. 시어도어 젤딘이라는 학자를 알지 못했으며, 이 정도로 수준 높은 인문학 서적일 지 예상하지 못했다. 시어도어 젤딘은 자신의 생각을 이야기하기 위해 다양한 인물들과 저서들, 그리고 관련된 인용과 이야기들로 책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동서양을 가리지 않았으며, 고대와 현대, 중세를 오갔다. 지역과 세대를 넘나들며 독자들로 하여금 사고의 틀을 깨고 범위를 넓힐 수 있도록 해주었다. 특히 '1866년 벵골에서 태어난 하이마바티 센Haimabati Sen의 기록'은 무척 흥미로웠으며, 뿐만 아니라 에이젠슈타인, 메버릭, 심복, 린네 등 각각의..

바니타스 Vanitas

제프 쿤스도 그렇고 데미안 허스트도 그렇고 현대 미술에서 잘 나가는 스타 예술가들을 보면, 진지함보다는 번뜩이는 재치와 탁월한 유머와 놀라운 비즈니스 감각과 만나게 된다. 더 놀라운 것은 풍부한 비평적 언어와 적절한 우호 관계를 맺을 수 있는 소재/주제를 제시하고 어느 공간에서나 어울리면서 그 중심에 예술 작품이 위치할 수 있도록 만든다. 보는 이들로 하여금 흥미를 불러일으키며 궁금하게 한다. 예술작품 앞에선 한 마디도 하지 않을 사람이 무조건 한 두 마디를 말하게끔 만드는 것이다. 데미안 허스트는 실패하지 않는 작가가 된다. 다른, 심각하고 진지한 예술가 앞에 서서 현대 미술을 주도하는 예술가가 되는 셈이다. 현대를 가벼움으로 만드는 것은 아마 현대의 공기일 것이다. 느린 속도는 태도의 진지함을 부르고..

미술의 역사를 통해 배우는 현대미술감상법

미술사 책을 읽기는 하나, 그건 일 년에 한 권 될까 말까이다. 한때 책을 내기도 했고 강의도 하기도 했지만, 그건 십 수년 전 일이고, 마지막 잡지 기고를 한 것도 꽤 지나 기억이 가물가물하다. 그러다 우연히 강의 제의가 들어왔다. 요즘 아내의 일로 커뮤니티 자치 활동을 잠시 도와주고 있는데, 그 곳에 계신 분의 제안으로 한 차례 강의를 하기로 한 것이다. 그리고 아래는 간단한 강의 개요다. 막상 적기는 쉽게 적었으나, ... 도판 찾는 게 일일 듯 싶다. 요즘은 워낙 온라인 아카이브가 잘 되어 있어 쉽게 도판을 찾을 수 있으나, 정확하고 적절한 도판을 제시하는 것도 중요한 일인지라, 꽤 시간이 걸릴 듯 싶다. 동네에서의 반응이 좋으면 나중에 공개적인 장소, 가령 북까페 같은 곳에서 한 번 더 하면 좋..

단편적인 것의 사회학, 기시 마사히코

단편적인 것의 사회학기시 마사히코(지음), 김경원(옮김), 이마, 2016 현대적인 삶은, 어쩌면 우리가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조각나고 파편화되어, 이해불가능하거나 수용하기 어려운 에피소드들로 이루어져 있는 지도. 그래서 그 조각이나 파편들을 이어붙여 우리가 이해가능하거나 수용가능한 형태로 만들고자 하는 학문적/이론적 시도는 애체로 불가능할 지도 모를 일이다. 그래서 이러한 삶이나 그 삶 속의 사람들, 사건들, 이야기들을 분석하고 체계화하려는 모든 시도들은 실패로 돌아가고 결국 손에 쥘 수 있는 것은 그 조작과 파편들의 일부이거나, 그 일부를 묘사한 글이나 풍경이 전부이지 않을까. 그리고 기시 마사히코의 이 책, 은 그렇게 시작되었을 지도 모를 일이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단편적인 에피소드를 주욱 늘어..

유감이다, 조지수

유감이다조지수(지음), 지혜정원 어쩌면 나도, 이 책도, 이 세상도 유감일지도 모르겠구나. 다행스럽게도 책읽기는, 늘 그렇듯이 지루하지 않고 정신없이 이리저리 밀리는 일상을 견디게 하는 약이 되었다. 하지만 책 읽는 사람들은 줄어들고 나는 이제 책 읽는 사람들을 만날 일 조차 없이 사무실과 집만 오간다. 주말이면 의무적으로 가족나들이를 하고 온전하게 나를 위한 시간 따위는 거의 존재하지 않았다. 어쩌다가 이렇게 되었을까 한참 고민하다가 이젠 그런 고민마저 사치스럽다고 여기게 되는 건 그만큼 미래가 불안하고 현재가 아픈 탓이다. 근대는 "주체적 인간"이라는 이념으로 중세를 벗어났다. 현대는 "가면의 인간"에 의해 근대를 극복한다. 우리의 새로운 삶은 가면에 의해 운명의 노예라는 비극을 극복한다. 가면이 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