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 43

어느 사적인 일요일

안개가 자욱하게 시야를 가린다. 겨우 일어났다. 거울을 보니, 얼굴이 퉁퉁 부어 있었다. 발바닥이 아팠다. 얼마 전 인터넷으로 주문한, 드립용으로 잘게 부서진 브라질 산토스 원두로 드립 커피를 내린다. 물 끓는 소리, 위로 향하는 수증기, 떨리는 손, 돌보는 이 없는 듯 무심하게 흘러나오는 음악 소리가 뒤엉켜 어느 일요일 아침을 구성하였다. 요즘 힘겹게 읽고 있는 책의 한 구절. 본래 ‘박탈된’이라는 의미를 가지는 ‘사적인’이라는 용어는 공론 영역의 이러한 다양한 의미와 관련되어 있다. 완전히 사적인 생활을 한다는 것은 우선 진정한 인간에게 필수적인 것이 박탈되었음을 의미한다. 타인이 보고 들음으로써 생기는 현실성의 박탈, 공동의 사물세계의 중재를 통해 타인과 관계를 맺거나 분리됨으로써 형성되는 타인과의..

정의란 무엇인가, 혹은 낯설고 기묘한 베스트셀러

정의란 무엇인가 - 마이클 샌델 지음, 이창신 옮김/김영사 정의란 무엇인가 마이클 샌델(지음), 이창신(옮김), 김영사 이 기묘하고 낯선 책은 무엇인가? 21세기형 출판 마케팅의 승리인가? 아니면 정의(justice)에 굶주린 한국 사회의 단면을 드러내는 상징인가? 아니면 이도 저도 아닌 그저 우연한 유행인가? 이 황당한 베스트셀러는 너무 낯설고 이해되지 않는 것 투성이다. 일반인들이 이름만 들어도 머리 아파할 벤담, 칸트, 롤즈, 아리스토텔레스라는 이름이 나오지만, 우스운 것은 그것에 대한 불만은 어디에도 찾아볼 수 없다. 세상에 한국에 이토록 많은 고급 독자들이 존재하고 있었다니! 아니면 나는 그동안 이렇게 많았던 고급 독자들을 무시해왔던 것인가! 하버드 대학 교수 마이클 샌델은 실제의 다양한 사례(..

플라톤에서 비트겐슈타인까지, 조중걸

플라톤에서 비트겐슈타인까지 - 조중걸 지음/베아르피 플라톤에서 비트겐슈타인까지 조중걸(지음), 베아르피, 2009. '마술과 의미를 동시에 잃어'버린 세계, 사막이 되어버린 세계. '우리는 거울만을 보도록 운명 지어져 있고, 우리의 운명은 사슬을 벗어날' 수 없다는 비트겐슈타인. 철학의 오랜 역사는 현대의 비트겐슈타인에서 머물러 있고, 그는 거짓된 말보다 진실된 침묵을 택한다. 이 얼마나 아찔한 귀결인가. 책은 짧고 문장은 단순하다. '철학은 관념적 독단과 유물론적 회의주의를 양 끝으로는 하는 스펙트럼'이고, 우리 '인간은 관념론자가 되거나 유물론자가 된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런 생각을 품지 않는다. 아니 이는 배운 사람들(대학이나 대학원에서 인문학을 전공한 이들)도 마찬가지다. 자신이 관념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