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터데스크 관리자

도움말
닫기
적용하기   첫페이지 만들기

태터데스크 메시지

저장하였습니다.

파아란 영혼

art +32


안규철 - 안 보이는 사랑의 나라 Ahn Kyuchul - Invisible Land of Love 

국립현대미술관 현대차 시리즈 2015

2015.09.15 - 2016.5.22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 전시실 5 



고립과 격리는 <안 보이는 사랑의 나라>에서 공간의 중심적 특성이 된다. 입구의 금붕어들은 고립된 자신만의 공간에서 맴돌고, 필경사의 방은 참가자를 위한 격리실(Klausur), 예배실 또는 일종의 감옥이 되며, 64개의 방은 자발적인 고립과 실종을 위한 미로가 된다. 침묵의 방에 이르러 이러한 격리는 물리적 경계를 넘어 끝없는 우주적 공허, 아무 것도 없음, '지금 여기'가 없는 상태의 경험으로 이어진다. 일상공간으로부터의 단절, 타인들로부터의 격리, 홀로 남은 자의 고독은 '안 보이는 사랑의 나라'로 가는 여정, 피할 수 없는 항해의 과정이다. 스님들의 묵언수행, 기도하는 사람들의 합장과 눈감기, 우리가 학교에서 보내는 그 긴 침묵의 시간들은 모두 같은 길을 향하고 있다. 

- 전시 브로셔에서. 




기억을 더듬는다. 전시에 대한 기억. 안규철 그리고 마종기. 몇 개의 이미지. 문장들. 참여와 경험. 현대미술은 이제 이미지를 넘어 참여, 실천, 경험을 향한다. 20세기적 비전은 사라지고 21세기는 고대적 이상을 불러 일으킨다. 빠르게 발달하는 인쇄, 미디어 기술은 예술의 범위를 확장시킬 것이라고 여겨졌지만, 도리어 예술는 더 폐쇄적으로 변한다. 그래서 같은 공간에서의 직접적이고 감각적인 체험과 공유만이 진정 예술을 즐길 수 있는 어떤 것이라 말한다. 


그래서 안규철의 작업은 사람들과 함께 만들어지고 구성되면서 앞으로 나아가 사라진다. 


기억의 벽, 2015 


그래서 현대미술은 종종 자기의 공간을 한정시키고 단절시키면서 동시에 참여자의 경험을 극대화시키려고 한다. 일종의 반-일상적 공간과 사건을 제공하면서 일상에 숨겨진, 진정한 의미를 상기시키려는 듯하다. 그것이 성공하든지, 실패하든지 상관하지 않고, 앞으로도 계속. 


결국 현대미술를 사랑한다면, 미술관이나 갤러리를 계속 돌아다니며 볼 수 밖에 없다. 







Comment +0


래디컬 뮤지엄 - 동시대 미술관에서 무엇이 '동시대적'인가? 

클래어 비숍 Claire Bishop (지음), 구정연 외 (옮김), 현실문화 

(저자의  website: http://clairebishopresearch.blogspot.kr/)



지난 가을, 키아프(Korea International Art Fair)를 갔고 거의 비슷한 시기에 과천 국립현대미술관의 <<달은, 차고, 이지러진다>> 전을 관람했다. 이 두 이벤트의 묘한 대비는 무척 흥미로웠고 나에게 고민거리를 던져주었지만, 그 뿐이었다. 키아프만 간 사람들과 국립현대미술관에만 간 사람들 사이의, 두 경향의 현대미술전시가 보여주는 간극이 메워지지 않을 듯 느껴졌다면, 심한 비약일까. 아트페어와 미술관의 전시는 전적으로 다른 것이다. 여기에서 같은 미술관 공간이라도 비엔날레같은 행사라면, 또 달라진다. 


이를테면 조르조 아감벤은 동시대를 시간적 파열temporal rupture에 근거한 상태로 상정하고, 이렇게 쓰고 있다. 동시대적임contemporariness은 "시차와 시대착오를 통해 시대에 들러붙음으로써 시대와 맺는 관계이다." 그리고 이같은 시기창조나 '시간의 차이'에 의해서만 자신이 사는 시대를 진정하게 응시할 수 있다. 그는 동시대적임을 "시대의 어둠에 시선을 고정하고" "펑크낼 수 밖에 없는 약속시간을 지키는 것"으로 묘사했다. 시대착오는 또한 이 문제와 씨름하는 몇 안 되는 미술사가 중의 한 명인 테리 스미스의 독해에도 스며들어 있다. 그는 동시대를 모더니즘과 포스트모더니즘 담론 모두의 반대편에 놓아야 한다고 설득력 있게 주장해 왔는데, 동시대가 이율배반과 비동시성의 특징을 띠고 있기 때문이다. 즉 전 지구적 통신 시스템의 확산과 소위 시장 논리의 보편성에도 불구하고, 동시적이고 양립할 수 없는 상이한 근대성의 공존, 여전히 진행 중인 사회적 불평등과 차이가 지속하고 있는 현상이 그것이라는 것이다.(30쪽 ~ 31쪽)



클레어 비숍은 동시대 미술이라는 단어에 주목하면서 '동시대성'이라는 개념에 대해 설명한다. 그리고 동시대 미술을 전시하는 공간으로서의 미술관을 이야기하고 그 역할에 주목한다. 


그들은 1퍼센트의 이름으로 말하는 게 아니라 (현재 혹은 과거에) 주변화되고 열외로 취급되고 억압받은 구성원들의 관심사와 역사를 대변하고자 한다. [물론] 이 미술관들이 예술을 역사 일반에 예속시킨다는 의미는 아니다. 그보다는 시각생산물의 세계를 동원하여 예술이 역사의 바른 편에 서야 하는 필연성을 이끌어내고자 한다는 것이다. (11쪽) 


그리고 세 개의 미술관을 소개한다. 네덜란드 에이트호번의 반 아베 미술관, 마드리드의 레이나소피아 미술관, 슬로베니아 류블랴나의 메텔코바 동시대 미술관. 


이처럼 역사를 현재 지향적으로 접근하는 일은, 미래를 보는 시선으로 오늘을 이해하게 해주고, 국가적 자부심 또는 헤게모니가 아닌, 창조적인 질문과 문제 제기의 이름으로 말하는 능동적이고 역사적인 행위자로서 미술관을 다시 상상하게 한다. (...) 결과적으로 이 제안은 예술작품과 다큐멘터리 자료, 사본, 복원물을 끊임없이 병치함으로써 오브제를 탈물신화한다. 동시대적인 것은 시대구분이나 담론의 문제가 아니라 모든 역사 시기에 적용할 수 있는 방법 혹은 실천이 된다. (97쪽) 


미술이론 전문서적인 탓에 일반 독자에게 권할 성격의 책은 아니다. 하지만 지금 시점에서 우리는 미술관의 존재와 위상, 그리고 그 가치와 필요성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해봐야 하지 않을까 싶다. 대부분 공적 기금을 통해 운영되는 미술관들은 자주 논란에 휩싸인다. 최근 국립현대미술관이나 서울시립미술관이 그 예가 될 수 있겠다. 그리고 그 반대편의 리움미술관이나 일민미술관, 혹은 아트선재센터 등과 같이 기업들이 후원하는 미술관을 보면, 우리는 많은 것들을 고민해야만 할 것이다. 


실은 지방의 국공립미술관의 상황은 더 열악하다고 해야 한다. 이 점에서 열악하다는 말은 여러 뜻을 포함하고 있는데, 전시 기획도 어려울 뿐더러 막상 오픈하면 관람객들도 많지 않다. 아마 국공립미술관에 대한 예산 삭감 문제는 비단 우리나라 뿐 아니라 많은 서방 국가에서도 마찬가지다. 이 점에서 클레어 비숍의 책은 동시대성이라는 관점에서 미술관에 대해 묻고 있지만, 이 질문은 거기에서 멈추지 않지 않고 지금 여기에서의 미술관에 대해 전반적으로 다시 묻게 된다. 


미술관계자에겐 일독을 권한다.  (그런데 현대미술이론 서적은 다 왜 이렇게 단어들을 어렵게 사용하는 것인지 모르겠다. 철학책보다 더 어렵다고 느끼는 건 나만 그런 걸까) 





Comment +0



이불 LEE BUL 

국립현대미술관 현대차 시리즈 2014 

2014.9.30 – 2015.3.1 

(현대자동차 http://brand.hyundai.com/ko/main.do)





그 공간에 서면, 작품 한 가운데 서면, ‘여긴 어디지’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리고 빨리 나가거나 계속 머무르거나. <태양의 도시 II>에서. 


2014년 이불은 현대자동차의 지원을 받아 국립현대미술관에 2개의 작품을 전시한다. <태양의 도시II>와 <새벽의 노래II>. 둘 다 기계적 초현실주의, 혹은 실험주의라고 할까. 미술에서 초현실주의나 실험주의라고 하면, 반-기계적으로 생각하기 쉬우나, 그렇지 않다. 이탈리아의 F.T.마리네티Marinetti는 미래주의를 주장하면서 기계적 특징들을 적극적으로 수용하였다. 하지만 그 흐름은 그리 오래 가지 않았고 금세 반-기계주의로 기울었지만.


내가 이불의 작품 앞에서 이런 이야기를 하는 이유는 그녀의 이번 작품이 기계적 형태를 띄면서도 반-현실적인 유토피아를 향하고 있다고 할까. 




태양의 도시 II, 2014

폴리카보네이트, 아크릴 거울, LED 조명, 전선, 330 x 3325 x 1850 cm

사진: 전병철, 사진제공: 국립현대미술관 

출처 http://brand.hyundai.com/ko/art/with-mmca/mmca-hyundai-motor-series-2014-leebul.do



한 편으로 건축적이면서 반-건축적이기도 하다. 건축이란 사람이 지낼 수 있는 공간, 사람과 호흡하는 공간을 향하지만, 이불의 작품 속에서 사람이 기댈 곳은 없었다. 작품 속을 걸어갈 수 있으나, 그것은 참여가 아니라 바라봄일 뿐이다. 



태양의 도시 II, 2014

폴리카보네이트, 아크릴 거울, LED 조명, 전선, 330 x 3325 x 1850 cm

사진: 서지연 아트인포스트 제공

출처 http://brand.hyundai.com/ko/art/with-mmca/mmca-hyundai-motor-series-2014-leebul.do




이불은 인류의 자유와 해방을 목표로 한 근대 기획의 모든 서사들을 유토피아에 대한 열망으로 보고 이에 대해 물음을 제기한다. 과거부터 현재까지 우리를 사로잡고 있는 ‘완벽’에 대한 환상에 대해 언급한다. 완벽에의 헛된 열망과 그 적나라한 실체를 마주하게 함으로써 어쩌면 외면하고자 하는 현실을 거침없이 드러낸다. 이불의 작품 세계는 삶과 죽음, 추와 미, 세속과 신성, 실재와 꿈이 무수히 교차하는 현실 속으로 차갑고도 뜨겁게 그 근원 혹은 경계를 찾아 나아간다. (전시 팜플릿 중에서) 



현대 예술은 종종 질문을 던진다. 이불은 낯선 공간을 보여주면서 관객을 자극한다. 낯선 공간 속에 관객을 밀어넣고 다소 신기하면서도 차갑고 두터운 경험을 선사하면서 작품 속 공간과 작품 밖 공간을 대비시킨다. 그리고 원시적이며 무섭고, 그러면서 기계적이라는 느낌을 가지게 한다. 흥미롭게도 국립현대미술관은 더 기계적인 공간임에도 불구하고. 



새벽의 노래 III, 2014

알루미늄, 폴리카보네이트, 메탈라이즈드 필름, LED 조명, 전선, 스테인리스 스틸, 포그 머신, 가변 설치

사진: 전병철, 사진제공: 국립현대미술관



일반 관람객들에겐 이 정도의 경험도 무척 값질 것이다. 하지만 너무 스펙터클에만 집중한 건 아닐까. 다가갈 수 없는 공간에 대한 두려움, 경외감은 이미 자연 속에서 경험할 수 있는 것이다. 나는 작품이 조금 어렵게 느껴졌다. 그 공간이 익숙하지 않았고 너무 멀었다. 


2014년 전시 감상문을 지금이라도 정리해두는 이유는 이불은 그만큼 중요한 작가이기 때문이다. 1997년 뉴욕 현대미술관에서의 전시 작품은 정말 대단했다. 





화엄 Majestic Splendor

1997

stills from original installation

Courtesy: Studio Lee Bul

Photo: Robert Puglisi

출처 http://www.mori.art.museum/korean/contents/leebul/introduction/03.html



아래와 같이 죽은 물고기를 전시 했다. 보는 것만으로도 대단한 시각적 효과를 가졌을 텐데, 전시 기간동안 물고기는 썩어갔다. 썩어가면서 다양한 향을 내품었다. 결국 관람객들의 항의로 인해 철수되었지만, 이 때 이불은 전세계 미술계에 강력한 인상을 남긴다. 이 얼마나 대단한 접근인가. 미술관 공간에 대한 질문부터 니네들도 이렇게 냄새 풍기며 썩을 거라고 경고까지 날리니까. 그리고 그 썩어가는 과정에 대해 경외감을 가진 제목이라니. 







Comment +0



양혜규. 2010년 아트선재센터의 전시는 꽤 충격적이었다. 즉물적이면서 날카로운 느낌을 자아내면서 동시에 토테미즘적인 분위기는 나에겐 매우 낯선 작품들이었다. 그 세계는 근대적 현실에 기초하고 있으나 근대적 삶을 도려내고 근대의 맨 얼굴을 드러내며 파괴한다. 그리고 그 세계의 복원을 주술적 방식으로 모색하고 있다고 할까. 이번 전시도 이러한 경향을 연장선상에 있다고 해야할 것이다. 



하지만 올해 맡은 프로젝트로 인해 나는 거의 전시를 보지 못했고, 얼마 전 리움에 열린 양혜규의 개인전도 가지 못했다. 뒤늦은 후회를 만회하고자, 양혜규의 몇몇 문장과 이미지를 저장한다. 


*   * 


"몇 년 동안 블라인드에 빠져있었다. 블라인드 사이로 조명이 진하게 지나가는 날카로운 선은 성적인 쾌감에 비교할 수 있을 만큼 멋있게 보였다. 솔 르윗의 '세 개의 탑이 있는 구조물'은 원래 선으로만 이루어진 작품이었는데, 그것을 모두 블라인드 면으로 대체해서 표현해 봤다. 그러니까 원래 작품이 가지고 있던 여러 속성이 달라졌다. 원본을 뒤집고 새롭게 해석한다는 의미다. 사실 블라인드 자체는 미약한 존재다. 반면 성(城)은 공동체의 구역을 배타적으로 구획하는 견고한 것이다. 허약한 블라인드로 된 '성채'는 이러한 배타적인 '공동체에 도전'하기 위한 작품이다." 

- 양혜규, 2015년 4월, <중앙선데이>와의 인터뷰 중에서. 








Sonic Crescent Moon - Medium Regular #4

2014

Steel frame, metal grid, powder coating, nickel plated bells, metal rings

173 x 54 x 54 cm (H x W x D), 23.2 kg






Series of Vulnerable Arrangements - Voice and Wind, 2009 




Haegue Yang, Shooting the Elephant 象 Thinking the Elephant, installation view. Courtesy Leeum, Samsung Museum of Art.




Haegue Yang, Yearning Melancholy Red, 2008 



"빛, 움직임, 소리는 공간의 역학 안에 있으면서 '추상'을 조명해주고, 단 하나의 이미지만을 시사하는 관습적인 서사를 잠재운다. 나는 최근 들어 다양한 기능을 부여받은 무빙라이트를 사용하기 시작했다. 손을 만지는 것처럼, 빛은 천천히 공간을 가로질러 움직이며 다양한 표면을 어루만진다. 나는 이를 투명하지만 실재하는 공기와 관계가 있다고 본다. 조명은 또한 그림자를 만드는 기능적인 기계이다. 쉴 새 없이 움직이는 무빙라이트의 빛 세례는 다양한 길이와 선명도로 그림자를 드리우며, 자신의 개별적인 시점에서 바라보는 관찰자에 대한 관념을 담고 있다. 빛은 자율적인 형식이다. 물리적 경계를 갖지 않기 때문이다. 설치에는 첨단 극장 조명 장비의 움직이는 빛 세례와 정적인 적외선 히터의 붉은 광열 등 다양한 조명이 사용되었다. 둘 다 광원이면서 서로 다른 효과와 감정을 불러일으킨다. 설치에는 각 히터는 선풍기와 짝지어져 있어 서로 상반되는 힘을 가한다. 짝지은 두 장비 사이에는 서로를 향한 일종의 열망과도 같은 대화, 바람과 열이 서로를 맹렬하게 부정하는 역설적인 재앙이 발생한다. 서로를 파멸시킬 것처럼 작용하며 이는 나에게 사랑과 혁명의 법칙을 증거한다. 그들의 존재는 이러한 가능한 파괴에서 온 것이며 강점적 에너지를 남용한다. 나는 이를 전복적인 행위로 본다. 이는 절박하고, 근본적으로 비능률적이다." 

- 양혜규, 2008년, 래드캣미술관과의 인터뷰 중에서. (<셋을 위한 목소리> 에서 재인용)




셋을 위한 목소리 - 10점
양혜규 지음/현실문화
 



Comment +0




도서관에서 미술잡지를 보다, 오랜만에 선무에 대한 기사를 읽었다. 주말 사무실 출근 전 건성건성 읽곤 집에 와서 그의 전시 기사들을 챙기며 메모해둔다. 의외로 선무에 대한 글이 검색되지 않는다. 국내에서보다 국외에서 더 주목받는 듯하다. 하지만 그의 삶이 가지는 드라마틱한 요소, 30년 북에서 살다 의도하지 않은 상태에서 탈북하여 한국에서 들어온 사내, 새터민 화가, 홍대 미대 졸업, 그리고 이젠 두 아이의 아빠. 그런 그가 보여주는 흥미로운 작품 세계는 충분히 주목받을 만하고 높이 평가받을 만하다. 




선무, 들어라!, 캔버스에 유채, 116×91cm, 2009



특히 그가 배웠던 방식의 작품 스타일(일명 주체미술!)을 그대로 유지하면서 명확한 메시지를 무겁지 않은 화법으로 드러낸다는 점은 보는 이들을 자연스럽게 분단환경을 환기시키면서 작가의 의도를 분명히 전달한다. 



선무, 열다, 캔버스에 유채, 72×60cm, 2009



선무, 선무의 노래, C 프린트, 2014


선무, 창밖의 낯익음, C 프린트, 2014



최근의 작품들에서 그가 적극적으로 서구 현대 미술의 방식을 받아들이고 있음을 알게 해준다. 



선무, 엄마 여기 서울이야, 캔버스에 유채, 91×72cm, 2010



몇몇 작품들은 아프고 슬픈 분단 현실을 드러내지만, 우리들은 그걸 외면하고 있는 지도 모를 일이다. 최근의 한국 예술가들 중에 누가 분단 현실에 대해서 탐구하고 조명하면서 이야기하는가? 비극적인 현실에 대해서 너무 둔감해진 건 아닐까. 이제 분단예술 따윈 없고, 이미 과거형이 되었다.  


이런 상황 속에서 선무의 존재는 더욱 두드러진다. 



선무, 조선의예수2, 캔버스에 유채, 91×91cm, 2010



한국현대미술에서 선무는 매우 중요한 작가이다. 그는 미래형이다. 탈북자 가족들 중에서 소설가나 시인이 나올 것이며 다문화가정이라는 배경을 가진 예술가들이 나와, 한국 사회의 현재를 조명하고 비판하게 될 것이다. 나는 정말 그것이 기대된다. 우리에게 참으로 많이 아픈 이야기를 들려줄 테지만, 그러는 동안 한국 사회는 성장하게 될 것이다. 



선무, 꽃보라 Piece of flower, 캔버스에 유채, 190×130cm, 2013



* 선무 / SUNMU / 線無   http://sunmu.kr

* 인터뷰기사 -  [RFA 초대석] 뉴욕에서 개인전 연 탈북화가 선무 

(선무의 인터뷰 기사 실린 '자유아시아방송(영어: Radio Free Asia, 약칭 RFA)은 1994년 미국 의회가 입법한 국제 방송법(International Broadcasting Act)에 의해, 1996년에 미국 의회의 출자에 의해 설립된 국제 방송국'이다. 홈페이지 상단의 언어들을 클릭하면, 해당 언어별로 다른 컨텐츠로 나온다.미국 연방 정부 기금에서 지원을 받아 독립적으로 운영되고 있다.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드는 웹사이트이다.)





Comment +2



나의 조선미술 순례 
서경식(지음), 최재혁(옮김), 반비 




현대 미술을 전공하는 친구가 있다면, 그/그녀와 이야기하는 게 어려울까? 그렇지 않을 게다. 그렇다면 그/그녀가 만들고 보여주는 미술 작품은? 정녕 모른다면 친구에게 물어보면 될 것이고, 바로 고개를 끄덕이게 될 것이다. 동시대 미술(우리에겐 현대미술)을 보고 감상하지 못한다면, 그건 미술에 대한 전문 지식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자기 자신에게 솔직하지 못하고 우리 시대에 대한 관심이 없기 때문이다. 즉 자신을 돌보지 못하고 주위를 돌아볼 겨를 조차 없이 무언가에 쫓겨 살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런 내 생각이 옳은지에 대한 확신은 없다. 다만 많은 사람들이 자주 전시장을 찾고 자기 자신에 대해 보다 솔직해지고(심지어 자신의 아픔, 상처와 대면하면서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자신의 주위를 둘러보는 여유를 가진다면, 현대 미술은 감상하기 어려운 분야가 아니라는 점을 알려주고 싶다. 마치 이 책의 저자, 서경식 교수처럼. 그는 태생적 아픔으로부터 두 형의 구속 등 그의 인생 자체가 바로 한반도의 비극을 고스란히 담고 있지만, 그는 이로부터 도망치지 않는다. 어쩌면 이것이 그의 미술 순례 시리즈의 시작점이었을 지도. 

서경식은 미술에 대한 폭넓은 이해와 공감을 가지고 있으나, 전문적인 식견으로 파고 들어 분석하는 이가 아니다. 그리고 그걸 원하지도 않는다. 그는 현대 미술 작가들과의 대화를 바탕으로 그들의 작업과 작품에 대해 소개하면서도 어렵거나 지루하지 않고 도리어 감동적이고 내가 우리 미술에 대해 아직도 모르는 것이 많구나 하는 부끄러움을 느끼게 만들 수 있었던 것이다. 

미술에 대한 이야기는 감동이 먼저 선행되어야 한다. 마음을 울리는 작품 앞에서, 그 작품과 그 작품을 만든 작가와의 이야기가 가능하다고 믿는다. 하지만 감동은 커녕, 위선과 위악으로 가득찬 작품 도판을 책에 실고 갖가지 이론을 들이미는 책들을 보면서, 나는 '예술 작품의 감동 앞에선 그 어떤 이론도 무용지물인데'라고 중얼거리곤 한다.(아, 이 중얼거림이란!) 

이 책에서도 다소 어려운 단어들이 등장하기도 한다. 가령 윤석남에 대한 챕터에서 길게 '페미니즘' 관련 이야기가 나온다든지 ..., 하지만 페미니즘은 그저 시류처럼 흘러 지나가고 여성 작가로서의 윤석남에 대하여, 윤석남이 만드는 작품에 대한 이야기 속에서 그것을 보다 풍성하게 해주는 곁다리 이야기였을 뿐이다. 

현재 작품활동을 하고 있는 신경호, 정연두, 윤석남, 미희, 홍성담, 송현숙, 그리고 월북작가 이쾌대, 조선 시대의 신윤복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는 이 책은 쉽게 읽히나 가볍지 않고, 진지하고 심각하지만 울거나 감정에 호소하지 않는다. 마치 그런 일들이 있었나 할 정도로 담담하게 서술되고 있다. 아마 그건 이 책의 저자도 이미 굴곡진 한국 현대사의 피해자였으며, 이 책에 등장하는 모든 작가들이 바로 그런 현대를 살아온 이들이기 때문이 아닐까. 

이미 여러 예술 서적으로 탁월한 에세이스트으로서의 면모를 보여준 서경식의 신작 <<나의 조선미술 순례>>도 기대를 벗어나지 않는다. 도리어 작가들의 생생한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서 더 좋았다. 2015년, 이 책으로 시작해도 나쁘지 않으리라. 


**
책을 읽으면서 인상적인 부분을 짧게 메모해보았다. 이 책의 제목에 대해 그는 '한국'이라는 단어 대신 '조선'이라는 단어를 사용한 것은 '한국'은 그 범위가 작아 자기 같은 재일한국인이나 미희와 같은 해외입양아 등 우리 민족 전체를 보여주기에는 적당하지 않은 단어라 생각했으며, 동시에 '조선'이라는 단어 속에는 우리 근현대사의 아픔이 고스란히 남아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신경호, 넋이라도 있고 없고: 초혼 1980, 1980 


집에서 그렸을 거예요. 광주항쟁이 거의 끝나갈 무렵에 그렸던 그림이죠. 광주 상황이 끝나고 나니까 거지와 넝마주이, 구두닦이가 하나도 안 보이는 거예요. 그 기간에 다 사라져버렸죠. 그들은 대부분 고아였거든요. 찾거나 신고하는 사람도 없었고 아무도 기억하지 못합니다. 그래도 그들이 언젠가는 광주로 돌아올 텐데 하는 마음으로 그렸던 그림입니다. - 신경호 (63쪽) 



**


정연두는 피사체가 되는 일반 시민들과 대화를 나누고 커뮤니케이션을 하면서 작품을 만든다. (84쪽) 

정연두, 상록타워 Evergreen Tower55×80×32,  사진, 2001



정연두, 상록타워 Evergreen Tower55×80×32, 사진, 2001



예술가는 사회적인 리더도, 세상에 대한 비전을 제시하는 사람도 아니고 어려운 사람들을 이끌어주는 사람도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어떻게 보면 관찰자에 가까운 존재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제가 사람들과 대화를 나눈다기보다 예술 자체가 하나의 좋은 매개체가 되는 것 같아요. 이해하기 힘들어도 "아아, 이건 예술이니까, 아트 프로젝트니까 ... ..." 라면서 관대히 봐주시는 것 같습니다. - 정연두(85쪽

**

신윤복, 미인도, 114.2cm * 45.7cm, 비단에 채색, 간송미술관 



바로 이런 인상이다. 나 역시 '미인도'에서 같은 인상을 받았다. 남성이 지닌 시선의 폭력에 갇혀 긴장하는 모습도 없고, 거꾸로 거기에 아양 떨며 자신을 상품화하려는 생각도 없이, 정녕 '자연체'인 것이다. 한 마디로 '미인도'의 여성은 '기호'가 아니다. 자신을 그리고 있는 화가가 동성인 여성이거나, 혹은 어쩌면 자기 자신이기에 가능한 자연스러움을 보여준다. (282쪽) 

**

최근 디아스포라라는 말이 널리 쓰이고 있다고 생각되지만, 저는 단지 외국에 살고 있다는 이유만으로 디아스포라라고 부르고 싶지는 않습니다. 디아스포라가 된 배경에는 어떤 식으로든 강제성이 중요한 요소가 됩니다. 경제건, 전쟁이건, 혹은 입양 제도건 본인의 의사에 반하여 억지로 갈라지고 헤어진 경험이 바로 디아스포라의 체험이라고 생각합니다. - 미희(325쪽) 


**


홍성담, 욕조: 어머니 고향의 푸른 바다가 보여요, 1999 



섬에서 자란 인간이라서 제게 물은 생산의 이미지입니다. (중략) 힘들 때마다 고향의 푸른 바다를 떠올리면 힘이 났습니다. 

그런데 남산에 있는 안기부 지하실에서 그 생산과 생명의 물, 생업으로서의 물, 나의 희망으로서의 물이 하필이면 나를 고문하는 도구가 될 줄 어떻게 예상했겠습니까? 안기부 놈들이 이른바 나를 물과 맞서게 했고, 결국 그 물에게 지도록 만들었습니다. 그들이 날조한 대로 저는 북한에도 두 번이나 왕래한 간첩이 되어버린 거죠. 

감옥에서 나왔지만 그 후로는 물을 보는 것만으로도 고통이 되살아나서 완전히 폐인처럼 살았습니다. 밥을 먹고 나서도 물을 마실 수 없었습니다. 

물에 대한 공포를 계속 껴안고 살아갈 것인가? 세계를 이루는 원초적 개념 중 하나인 물에 공포를 가진 채로 살아간다면 앞으로 내가 어떻게 예술가가 될 수 있을 것인가? 하는 고민 끝에 물과 정면대결하자고 생각했어요. - 홍성담 (333쪽)







나의 조선미술 순례 - 10점
서경식 지음, 최재혁 옮김/반비


Comment +0



정연두, '영웅', 1998.



서경식 교수의 <<나의 조선미술 순례>>를 읽고 있다. 여기에 실린 정연두와의 인터뷰는, 그동안 무심코 보아온 그의 작품들에 대해 다시 생각케 했다. 정연두의 스쳐가는 이미지들 사이로, 그의 작가적 개입과 실천을 보지 못한 셈이다.


"유학을 마치고 돌아오니 분당의 풍경이 완전히 변해 있었어요. 같은 규격의 아파트가 장대하게 늘어서서 마치 분당이라는 지명이 사라지고 아파트 동호수만 보이는 느낌이었죠. 어느 날 거기서 교통사고를 목격했어요. 작은 오토바이가 충돌해서 운전하던 아이가 다쳤습니다. 소년은 아픔을 참으며 달려온 사람들에게 괜찮아요, 괜찮아요 하고 대답했어요. 짜장면을 배달하러 가는 참이었나 봐요. 그 후에 그 아이가 입원한 병원을 찾아갔고 회복한 다음에 이 작품을 찍었습니다." - 정연두 

(서경식, <<나의 조선미술 순례>>, 반비, 115쪽에서 재인용)



Comment +0


제자리에서 떠나는 상상의 유목 - 경지연 전 

Portray Magic, Kyung Ji Yeon - 7th Solo Exhibition. 

인천아트플랫폼, 11.1.-11.12.2014. 




정사각형 캔버스에 담겨진 풍경들은 사방으로 뻗어나갈 수 있으면서도 자족적인 완결 감을 가진다. 1m*1m 크기의 같은 규격과 형식을 가지는 단자적 세계들은 확장 가능성이 있다. 세상 사람들의 희망 사항을 그런 식으로 다 모은다면 밤하늘에 뿌려진 별처럼 많아지리라. 현실이 절망적일수록 멀리 있는 희망의 빛은 더욱 빛날 것이다. 설치형식으로 건 그림들 앞에서 관객은 여기에 머물다가 저쪽으로 옮겨갈 수 있으며, 장면전환은 신속하다.구글에서 검색한 무채색 톤의 자료는 지도와 풍경, 실제와 상상의 중간 단계로 재탄생한다. 칙칙한 현실은 원색과 야광 색을 비롯한 비현실적이고 화려한 색채로 거듭난다. 전시장은 고화질의 총천연색 꿈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진 듯하다. 풍경의 참조대상인 지도는 모노톤이지만, 형형색색의 젤리나 사탕같이 반짝거리는 미디움으로 변형시킨다. 현실이 씁쓸한 만큼 환상은 달콤할 것이다. 현실이 밋밋한 만큼 환상은 강렬할 것이다. 바람 빠진 풍선 같은 현실은 상상의 바람에 의해 부풀어 오른다. 작가는 상상으로 충전된 기구를 타고 세계 곳곳을 넘나든다. 

- 이선영(미술평론가), 전시 설명 중에서. 






전시를 보러 가기 위해 인천까지 가는 경우는 매우 드문 일이긴 했지만, 짧지만 모처럼 기분 좋은 외출이 되었다. 


1930-40년대 지어진 물류 창고 건물을 새로 꾸며 복합 문화 공연 전시 공간인 인천아트플랫폼은 그 시설이나 운영 프로그램 등의 여러 측면에서 부러움을 자아내는 곳이었다. 




경지연의 7번째 전시는 인천아트플랫폼 G1에서 열리고 있다. 


우리의 삶은 여러 개의 층위로 구성되어 있다. 나도 마찬가지다. 직장인으로서의 나와 글을 읽고 쓰는 사람으로서의 나, 아빠로서의 나와 술을 마시는 나, ... 무수한 나들은 서로 경쟁하며 다투고 헤어지기도 하다가 때론 어루만지기도 하면서 나라는 존재를 구성한다. 



경지연, work1. 로마에서의 기적+콜로세움, 캔버스에 혼합재료, 아크릴채색, 100×100cm, 2014



갤러리 한 쪽 벽에는 작가가 모티브를 얻은 구글의 위성 사진들이 프린트되어 있고 이 사진들이 어떻게 조형적으로 구성되고 창조되었는가는 알 수 있다. 그리고 캔버스 위에 물감들이 보여주는 물질감은 장식적이고 화려하며 기분을 좋게 한다. 종종 예술은 꿈을 꾸고 꿈으로의 통로를 마련한다. 




꿈은 현실을 위해 존재하고 현실 속에서 태어나 자라난다. 그러나 꿈은 꿈이고 현실은 현실이다. 꿈과 현실 사이에 예술이 있고 예술가의 작업, 노동이 존재한다. 경지연의 이번 작품들은 그 사이에서, 때로 삶이 우아할 수 있음을 보여준다. 


실은 나도 그런 걸까. 작품들은 매끈하면서 리듬감이 있으며 다채롭고 즐겁다. 우리 삶이 그렇지 못하더라도 말이다. 


 

경지연, work4. 쓸모없는 노력의 박물관+타임스퀘어_캔버스에 혼합재료, 아크릴채색, 100×100cm, 2014




경지연, work6. 꿈을 빌려드립니다+괌, 캔버스에 혼합재료, 아크릴채색, 100×100cm, 2014


실제 작품에서는 물감 덩어리가 가지는 느낌, 그것이 캔버스 위에서 요동치는 듯한 분위기, 색채와 형태, 물성의 어루어짐을 느낄 수 있지만, 역시 사진 이미지로는 알기 어렵다. 


전시는 이번 주 수요일까지이니, 오늘이 적기일 것이다. 그리고 인천아트플랫폼, 충분히 가볼 만한 공간이다. 아주 매력적이다. 바로 옆에서는 인천 차이나타운이 있으니 ... 






Comment +0


로니 혼 Roni Horn 

5.20 - 6. 22. 2014

국제갤러리 Kukje Gallery 





늦은 봄, 관람했던 전시에 대한 소개를 지금 올리는 건 너무 태만한 짓인가. 실은 글을 쓸 시간이 없다. 몸도 피곤하다. 해야할 일들이 얼마나 많은지. 


로니 혼Roni Horn. 기억이 나지 않는다. 하나하나 작품을 기억하기가 이렇게 어려워졌다는 건, 그만큼 관심사에 멀어졌다는 이야기다. 


형편없어진 '이미지에 대한 기억'력. (현대는 원하지 않는, 그러나 범람하는 이미지들로 인해 스트레스를 너무 많이 받고 있는 건 아닐까.) 



로니 혼은 작가 특유의 공간에 대한 감성으로 시간, 기억 그리고 지각이라는 주제들을 탐색하며 강력하고, 절묘할 만큼 아름다운 시각적 명상 속으로 관객들의 시선을 부드럽지만 힘있게 이끌고 나간다. 작가는 몇 초 간격으로 촬영한 사진 이미지들을 쌍을 이루거나 중복시키는 등 익숙하지 않은 방식으로 활용함으로써 이번 전시의 근간을 관통하는 동일성과 상이성의 본질에 대해 질문한다.  (전시 설명 중에서)





Installation view, 'Roni Horn. Well and Truly', Kunsthaus Bregenz, Austria, 2010

Photo: Stefan Altenburger Photography Zürich

출처: http://www.hauserwirth.com/artists/14/roni-horn/images-clips/20/  



K3에는 본 전시의 주요 작품인 유리 주조 조각들이 소개된다. 이 유리 조각 작품들은 작가의 날카로운 인식론적 문제 의식을 담아낼 뿐 아니라, 관객 개개인이 이 유색의 눈동자 형태 조각들을 유심히 들여다보게끔 유도한다. 전작들에 비해 규모적으로 더욱 확대된 이러한 작품들은 빛을 포획하는 동시에 갑자기 움직임을 멈춘 거대한 물의 덩어리인 듯한 착각을 불러 일으킴으로써, 전시 공각 전체를 압도하는 육중함을 지니게 된다. 이들이 띠고 있는 흔치 않은 연두색 계통의 색채는 독특한 빛의 분사를 유발시키는 것은 물론 대지와 바다를 연상시키며 관객들을 사로 잡는다. 조화롭게 설치된 이러한 일련의 유리 조각들은 친밀하고도 팽팽한 긴장감이 감도는 공간적 환경을 창조해낸다. (전시 설명 중에서) 





Opposite of White V.1, 2006

출처: http://www.theguardian.com/artanddesign/gallery/2009/feb/25/roni-horn-tate-modern 




국제갤러리에서의 전시는 고요했다. 길게 전시 설명을 옮기는 이유는, 2009년 테이트 모던에서 대규모 회고전을 가졌던 로니 혼에 대한 일반적인 평가를 볼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는 잘 모르겠다. 확실히 대형 유리 주조 작품은, 사진으로 보여지는 것과 달리, 매우 흥미로운 작품이다. 만지고 싶고 한참을 들여다 보게 된다. 사진 작업들도 흥미로웠으나, 탁월하진 않았다. 실은 내가 좋아할 만한 작품이 아니라는 뜻일 게다.  

 



"Untitled (Weather)" - 2011 - Inkjet / pigment print on paper: 5 COLOR PRINTS, mounted on sintra - 31,11 x 26,03 cm each 

출처 http://www.galleriaraffaellacortese.com/artists/view/24/roni-horn




모더니즘에서 포스트모더니즘 사이로, 텅 빈 캔버스 위에 거울을 올려놓고 싶은 건지도 모른다. 하지만 거울을 올려놓을 순 없는 일. 그래서 응시하는 타인이나 자아. 혹은 마주 보는 타인이나 자아를 거울 대신 배치시킨다. 시선의 가리워진 폭력성, 그리고 철학적 질문 - 타자와 동일성. 


하지만 이는 너무 평범하지 않은가. 나에게 로니 혼은 평범했다. (하긴 이 평범함에도 오지 못하는 작가들이 부지기수이지만) 






Comment +0


서양미술사 철학으로 읽기

조중걸저 | 한권의책 | 2013.03.04

출처 : 반디앤루니스 http://www.bandinlunis.com


















몬드리안의 <구성>은 이러한 이념의 회화적 대응물이다. 거기에는 어떠한 종류의 재현적 요소도 없다. 그것은 서로 단지 네모들의 집합일 뿐이다. 세계는 결국 그와 같은 것이었다. 그것은 우리의 추상적 창조물 외에 아무 것도 아니다. 이렇게 되어 모방으로써의 예술은 완전히 종말을 고한다. 이제 창조로써의 예술만이 남게 되었다.(307쪽) 



이렇게, 묵시록적으로 끝나는 이 책은 단순히 서양미술사에 대한 소개나 이해로만 머물지 않는다. 하나의 양식, 하나의 작품 속에는 우리가 미처 몰랐던 많은 것들이 숨겨져 있다. 그리고 그것은 도상학적 해석으로만 이해되지 않는다. 예술(혹은 예술 작품)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 우리는 온전히 그 시대로 돌아갈 필요가 있고, 그 시대의 생각, 사고, 감정, 웃음과 눈물을 편견없이 받아들여야만 한다. 이 책이 때로 어렵게 느껴지는 이유는 우리가 그 시대로 제대로 돌아가지 못하기 때문이고, 그 시대의 마음을 받아들이지 못하기 때문이다.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 대부분이 스스로의 마음을 어루만지지도 못하는데, 어찌 과거로 돌아가 그 시대 사람의 마음이 될 수 있을 것인가. 예술은 그렇게, 옛날이나 지금이나 우리와는 다소 떨어진 어느 자리 쯤에 위치해 있고 지금의 예술가들이 변방에 있듯이(혹은 소수의 지지 속에서) 옛날에도 그랬을 것이다. 그래서 예술은 나와는, 우리와는 참 멀리 있는 듯 느끼기도 한다.


이런 측면에서 이 책은 서양 미술의 역사에 대한 폭넓고 깊이 있는 이해를 줄 수 있는 몇 되지 않는 책들 중의 한 권이 될 것이다. 그것도 한국을 떠나, 세계적으로.


이 책에 대한 서평은 굳이 필요없다. 그냥 사서 읽으면 된다. 비단 예술에 관심있는 이뿐만 아니라 인문학에 관심있는 이들 모두에게 추천한다.



함수의 도입과 바로크baroque 예술의 발생은 필연적인 관계를 맺는다. 함수는 이제 근대 세계에 있어서 중시되기 시작한 운동법칙, 곧 인과율의 수학적 표현이었다. 바로크 예술가들은 이러한 함수를 시각적으로 표현하고자 노력한 것이다. 따라서 바로크 예술의 역동성과 X축의 독립변수의 연속적 변화에 따른 종속변수의 운동법칙은 같은 것이다. 이것은 카라바조Caravaggio의 그림 몇 점만 보아도 금방 확인되는 사실이다. 

형이상학적 해명이 없는 예술사는 도상학이나 도상학적 연대기밖에는 되지 않는다. 필자는 인간의 정신이 그 이상을 할 수 있다고 믿는다. 형이상학적 해명은 필자의 신념이다. 고딕은 단지 건축적 기법의 문제가 아니며, 다위니즘Dawinism은 하나의 생물학적 가설의 문제만은 아니다. 어떤 심미적이거나 학구적인 업적도 동시대의 세계관에서 자유롭지 않다. 오히려 그것들은 동시대 이념의 선구이거나 반영이다. (서문에서) 



 




Comment +0


오늘의 미술

브랜든 테일러 지음, 송기매 옮김, 예경, 2002

 


 

1970년대 이후의 현대 미술에 대한 책이다. 하지만 너무 많은 화가가 나오고 너무 많은 용어가 나온다. 당연, 이 책의 결론은 "혼란스러움"이다. 그러나 이를 '혼란'으로 볼 수도, '모색'으로 볼 수도 있다. 

 

모더니즘의 대안, 회화와 정치, 형식의 도난, 미술관 속의 미술, 정체성 이야기 등으로 구성된 이 책은 현대 예술가들의 다양한 실험과 고민들을 설명하려고 노력하고 있다. 편견없는 시각에서 서술하고자 하는 저자의 이러한 노력은 이 책이 다소 밋밋하게 읽히는 데에 일조를 하고 있다.

 

2004년 문학동네 겨울호에서 가라타니 고진이 '문학'에 대해 다소 고전적인 발언을 한 강연 원고가 실려 지식인들의 관심을 끌었다. 그의 말, 문학은 실천적이어야 한다는 것은 너무 당연한 것이지만, 그것이 이상하고 낯선 말처럼 느껴지는 데에는 환상을 자극하고 현실을 뒤로 숨기려는 대중 매체의 영향이 큰 듯 보인다. 그런 점에서 문학은 현대 미술에 비해 한참 뒤쳐져 있다. (가라타니 고진의 언급은 별도의 책으로 번역, 출판되었다.)

 

다니엘 뷔렝은 1971년 뉴욕 구겐하임 미술관 중앙에 두 조각으로 이루어진 줄 무늬 그림(아크릴,천)을 걸어놓았다. 그리고 전시 도중 미술관 측에 의해 철거당했다. 뷔렝은 '미술관 중앙에 걸려 있는 작품은 자기 도취적인 건축물 속에 모든 것을 종속시키려는, 건물 속에 감춰진 은밀한 기능을 여지없이 폭로한다'라고 말했다.



다니엘 뷔렌, <내부(구겐하임 미술관 중앙)>, 1971, 천에 아크릴


 

미술관이라는 공간이 억압적인 기구로서 작용한다는 것을 보여주면서 1970년대는 시작한다. 후기산업사회라는 시대 속에서. 그리고 이 책은 정체성의 문제를 마지막 챕터로 소개한다. 1992년 에이즈로 죽은 데이비드 보냐로비치는 동성애에 일련의 작품들을 제작한다. 

 



Fuck You Faggot Fucker

David Wojnarowicz, 1984.

Black-and-white photographs, acrylic, and collage on masonite

48” x 48”.

Collection of Barry Blinderman, Normal, Illinois.



Untitled

David Wojnarowicz, 1992

실버 프린트에 실크스크린

4개의 에디션, 96.5*66cm 



책에 실려 있는 <무제>(1992년도 작)라는 작품은 실버 프린트에 실크스크린으로 제작되었으며 작품에는 이런 문장이 적혀 있다. "때로 나는 사람들이 내가 어디에 있는지 볼 수 없다는 이유로 사람들을 미워하게 된다. 나는 텅 비어서, 완전하게 비어버렸다. 그래서 사람들이 보는 것은 모두 시각적 형태, 나의 팔과 다리, 내 얼굴, 내 키와 내 자세, 그리고 내 목구멍에서 올라오는 목소리이다. 그러나 나는 너무 심하게 비어 있다. 정확히 1년 전의 나의 모습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이 작품을 발표한 그 해 그는 에이즈로 죽는다.

 

이 책에 실린 대부분의 작품들은 '정치적'이다. 어딘가 뒤틀려있고 불만이 많으며 호소할 대상이 사라진 시대의 호소의 몸짓들을 보여준다. 실린 작품들을 보기 위해서라도 이 책을 구입할 필요가 있겠지만, 책을 읽고 얼마나 공감하게 될 것인가는 전적으로 독자의 몫이다. 


* * 


2014년에 이 책을 다시 꺼내 살펴본다는 것은 참 흥미롭다. 가령 이런 작품. 



Boyd Webb

<Nourish>, 1984

1.5 * 1.2m, 단색사진, 사우스 햄프턴 미술관 


보이드 웹의 이 사진은 고래의 젖꼭지를 빨고 있는 남자를 보여주고 있다. 책의 설명에는 '고래의 피부는 낡은 고무로 된 모형이고 젖꼭지는 인디언 채소(?)이다'라고 서술되어 있다. 



* * 


그리고 에이즈가 지금도 사회문제임에도 불구하고 언론에서, 지면에서 사라지자 마치 그 문제가 사라진 것처럼 여겨진다는 점은 흥미롭기만 하다. 


데이비드 보냐로비치의 작품은 아래 주소에서 볼 수 있다. 

https://www.visualaids.org/artists/detail/david-wojnarowicz



* 본 리뷰는 2004년 이 책을 읽고 쓴 글에다, 2014년에 덧붙였다. 그 때 당시에는 도판들을 인터넷으로 구할 수 없었는데, 이번에 찾아보니 상당히 많이 나온다. 이럴 때 격세지감이라는 단어를 사용해야 되는가 싶다. 




오늘의미술

브랜든테일러저 | 송기매역 | 예경 | 2002.01.30

출처 : 반디앤루니스 http://www.bandinlunis.com


Comment +2

  • 흥미로운책이네요!^^

    • 1990년대까지만 나와 약간 아쉽긴 하지만, 그리고 모르는 작가들 이름이 수두룩한 탓에 다소 진도가 느리긴 하지만, 옆에 태블릿 PC나 노트북 놔두고 검색해가면서 흥미로운 작가들이 나왔을 때, 구글에서 관련 작품들 보며 읽으면 좋습니다. ~

그림부자들

오진희(지음), 머니플러스 




제목이 꽤 역설적이다. 그림으로 정신적 부자가 될 순 있겠으나, 물질적 부자는 글쎄다. 하지만 책의 제목과 상관없이 미술 시장과 관련된 책이 많이 출판되고 많이 읽혀지는 게 미술 시장 전체를 위해서 좋은 일이다. 


<<그림부자들>>은 현재 경제신문 기자가 미술 시장을 취재하고 체험하고 공부하면서 정리한 것이다. 따라서 미술 시장에 대해서 궁금한 이들, 그리고 미술을 감상의 측면이 아닌 투자의 측면에서 바라보고자 하는 이들에게 이 책은 적절하다. 그러나 딱 그 지점까지이다. 


도리어 이 책은 좀 더 좋은 책이 될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지점에서 멈춰버린 느낌이다. 더 많은 컬렉터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더 좋은 작가들과의 인터뷰를 하며 한국 미술 시장과 관계된 여러 사람들을 만났다면 이 책은 좀 더 좋은 책이 되었을 것이다. 


미술 관계자들에겐 이 책을 권하진 않는다. 





그림부자들

오진희저 | 머니플러스 | 2013.03.22

출처 : 반디앤루니스 http://www.bandinlunis.com


Comment +0

2011년 3월 6일자 중앙선데이에 난 이우환의 인터뷰 기사 중 일부를 옮긴다. 몇 년 전 그의 기사를 읽고 노트해둔 것이다. 작품이 좋으면, 그의 글도 좋고 그의 마음도 좋다,고 여긴다. 이 때 좋다는 건, 근사하다는 것과 비슷한 의미다. 그가 쓴 저서들도 몇 권 번역되어 나왔으니, 읽어보면 좋겠다. 


 

이미지 출처:http://commons.wikimedia.org 




“예술도 경쟁입니다. 싸워서 이겨야 합니다.”


“‘모노하'란 자기 생각을 절반 정도로만 한정하고 나머지는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바깥과 안쪽을 연결하려는 시도입니다. 돌맹이를 그냥 던져놓는 것 같아도 개념, 장소, 시간 등을 따져 보이지 않는 것을 보여주자는 것이었죠.“


“게다가 한국에서는 일본 사람이라고 하고, 일본에서는 조선 사람이라고 하고, 유럽에서는 동양인이라고 하고, 추천을 받아도 명단에서 빠지고 ... 항상 경계인이고 외톨이였죠.” 






-작업은 얼마나 자주 하시나요?

“매일 합니다. 손이 굳으면 안 돼요. 손은 외부와의 가장 중요한 접촉점이자 세계를 알려주는 척도거든요. 신체는 생각보다 훨씬 큽니다. 세계와 맞닿아 있기 때문이죠. 가장 예민한 접촉 부분이 손이고 눈입니다. 그래서 항상 훈련시켜 놓아야 합니다. 물감을 개거나 글씨를 쓰거나 하는 식으로라도. 

눈도 마찬가지죠. 의식적으로 사물의 구도와 질서를 바라보는 훈련이 필요합니다. 그래야 사물을 뚫고 깊고 멀리 바라볼 수 있는 힘이 생겨요.”


- 젊은 작가들에게 해주고 싶은 말이 있다면?

“손재주나 살짝 떠오른 아이디어 정도로는 안 됩니다. 세계에서 싸울 수 없어요. 어떻게 지탱하고 발전할지 고민해야 합니다. 공부를 많이 해야 합니다. 추사나 겸재도 사실은 대단한 이론가들이었습니다. 손재주만 갖고 크게 된 작가는 없어요.” 



이미지 출처: http://londonkoreanlinks.net 



Comment +0



미의 기준은 바뀌고 미의 대상도 바뀐다. 미소년에 대한 염모는, 어쩌면 현재 진행형일지도 모른다. 18세기 후반, 시대는 로코코로 향하고 티에폴로는 바로크적 몸짓 속에 로코코적 염원을 담아낸다. 동성애적 갈망이 화폭에 담긴다. 칼로카가티아(Kalokagathia), 즉 선미의식은 이런 것이 아닐까. 선한 것이 아름다운 것. 그래서 고대에는 여성의 아름다움보다 남성의 아름다움이 더 추앙받았으며, 이는 근대에까지 이어진다.  



(요즘은 미술에 대해 관심을 가질 시간이 없는데, 예전 싸이월드에 올린 글들을 이렇게 옮긴다. 업무용으로 네이트온을 사용하다 보니, 쪽지로 예전에 올린 글들을 알려주고, 이를 다시 블로그에 올린다.) 





2003년 12월 3일에 쓰다.






The Death of Hyacinth

1752-53

Oil on canvas, 287 x 235 cm

Thyssen-Bornemisza Collection, Madrid



18세기 중엽의 지오바니 바티스타 티에폴로의 작품이다. 시기적으로 로코코 시대에 속해 있으나, 프랑스 지역을 제외한 다른 지역에서는 후기 바로크로 분류될 수 있겠다. 뭐, 후기 바로크가 로코코이기도 하니. 이 구분은 좀 애매한 감이 없지 않다. 


여하튼 이 작품은 아폴로와 히야신스의 사랑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아폴로와 아름다운 소년인 히야신스가 원반 놀이를 하다가 히야신스가 그만 원반에 맞아 그 생명을 잃어버리는 장면을 그려내고 있는데, 저 누워있는 히야신스의 몸짓이 예사롭지 않다. 


'에로틱'이라는 표현보다 '농염하다'라는 표현이 더 와닿는 듯하다. 얼마 전에 르누와르의 <Young Boy with a Cat>을 올렸는데, 다들 미소년에 대한 관심들이 있는 듯해, 미소년 시리즈로 작품을 하나 더 올린다. 


요즘에도 미소년에 대한 관심은 여전하다. 일명 '동성애' 그러니 과거의 일은 아닌 셈이다. 




Comment +0


르느와르의 초기 작품들은 정말 매력적이다. 그가 배워왔던 페인팅과 앞으로 나아갈 페인팅이 서로 섞이고, 작품을 통해 성취하고 하는 젊은 열망들이 색채로 뿜어져 나온다고 할까. 한 때 '젊음'에 대한 평문을 쓰고 싶었는데, ... 지금이라면 가능할까. 오랜만에 르느와르 작품들을 찾아 봐야겠다. 





-- 

2003년 11월 28일에 쓴 글. 






Young Boy with a Cat

1868-69

Oil on canvas

43 3/4 x 26 1/4 in (124 x 67 cm)

Musee d'Orsay, Paris 



이 그림을 보면서 하루키의 <해변의 카프카>를 떠올린 이유는 뭘까. 약간 신비스러워 보이는 이 작품은 르누와르의 초기 작품으로 고양이를 스다듬는 소년의 뒷모습을 담고 있다. 앞의 꽃무늬 천이나 고양이의 처리는 무척 마음에 든다. 그리고 소년의 누드는 무척 이국적이면서 애로틱하다. 






Comment +2

  • 아름답네요..카프카라니,.. 공감입니다. 뭔가호밀밭의파수꾼이 되기전모습이랄까요?^^

    • 그 때 하루키의 <해변의 카프카>를 읽고 있었을 겁니다. 그리고 잡지에 글 하나를 썼고요. 그 이후로 하루키를 손에 든 적은 없네요. ㅋ. ~ 호밀밭의 파수꾼은 ... 뭔가 사고 치는 이미지가 떠올라요. 파수꾼 되기 전이라면 ... ㅎㅎ 그럴지도 모르겠네요.

David Hockney 

Bigger Trees Near Warter

2013. 9. 3 - 2014. 2. 28 

데이비드 호크니: 와터 근처의 더 큰 나무들

과천 국립 현대미술관 




(각 나라의 국립미술관끼리는 소장 작품을 무료로 대여해주는 협정이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무료인지 확실하진 않지만, 작품을 전시하는 비용보다 작품 운송/전시 과정에 들어가는 보험료가 더 비싸 한국의 국립 미술관들은 이런 협정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괜찮은 전시를 열지 못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그리고 보험료를 내기 위해 국립 미술관의 예산을 늘여야 된다고 이야기하면 아마 난리가 나겠지. 상황이 이렇다보니, 문화예술 관련 예산은 턱없이 모자라기만 하고, 결국 공공을 위해 존재하는 국공립 예술 기관들이 수익 사업을 하는 것이다. 그러나 공익 목적의 과도한 수익 사업은 그 기관의 공익성을 해치는 부메랑으로 돌아오게 되고. 하긴 예술 기관들의 재정적 위축은 비단 우리나라 뿐만 아닐 것이다. 다만 국공립 예술 기관에 대한, 대중의 관심이 더 늘어났으면 하는 바람을 가질 뿐이다. 여하튼 그래서 영국 테이트 미술관에 있는 이 작품이 과천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전시할 수 있게 된 것이다.)


--- 



데이비드 호크니의 풍경화는 2008년 파리 피악Fiac에 최초로 봤다. 세계 3대 아트페어 중 하나이니, 당연 놀라운 감동적인 작품들로만 가득찼을 그 곳에서 내 눈을 사로 잡은 몇 개 되지 않는 작품들 중 최고가 바로 데이비드 호크니의 어떤 풍경화였다. 피악에 나오는 갤러리나 그 갤러리가 가지고 나오는 작품들은 일반적으로(한국의 여느 갤러리에서) 만나기 어려운 작품들이라는 걸 감안하면, 데이비드 호크니의 독보성은 놀랍기만 했다.


그리고 그가 최근 몰두하고 있는 풍경화들 중의 한 작품이, 그것도 50개의 캔버스로 이루어진 거대한 작품이 한국에 왔다는 사실만으로도 가슴 설레는 일이다. 


(그러나, 아, 아래 이미지로는 이 작품의 실체를 알 수 없다. 아니 아주 작은 일부도 느낄 수 없다.) 


출처: 국립현대미술관 홈페이지  




부디 부탁하건대, 과천 국립 현대미술관에 가서 데이비드 호크니를 만나고 오길 바란다. 그가 왜 현존하는 작가들 중 최고인지 느낄 수 있을 테니. 



--- 


<와터 근처의 더 큰 나무들>은 데이비드 호크니의 근작 중 가장 규모가 큰 작품이다. 높이가 4.5m, 길이가 약 12m에 달하는 이 작품은 총 50개의 캔버스가 모여 하나의 전체를 이룬다. 호크니가 자신의 고향 요크셔로 돌아왔을 때 크게 감동을 받은 풍경으로 브리들링턴 서쪽, 와터 근처의 봄이 오기 직전, 나무에 새순이 솟아나는 그 때의 풍경을 표현한 것이다. 그림의 전경에는 키가 큰 나무들과 만개한 수선화들이 피어 있는 모습이 자리하고 있고 화면 구성 상 중심에는 가지를 뻗은 거대한 플라타너스가 있다. 전경의 잡목림 뒤쪽으로는 분홍빛이 도는 또 다른 작은 관목숲이 배경으로 있다. 화면의 왼쪽에는 곡선을 그리며 멀어져가는 열린 길이 있고 오른 쪽에는 사람이 거주하는 듯한 집 두 채가 있다. 그림의 상단부는 나무의 크고 작은수많은 가지들이 얽히고 설킨 형상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 작품은 그 규모로 인해 앞에 가까이 다가서는 순간, 마치 실제 나무 숲에 들어선 듯한 느낌을 준다. 보는 이들은 이제 호크니가 말하는 “자연의 무한한 다양성” 그 한복판에 자리하게 되는 것이다. 

- 전시 설명 중에서 



호크니가 작업하고 있는 모습 




데이비드 호크니와 관련된 이전 포스팅. 


2012/07/10 - [예술의 우주/예술가] - 데이비드 호크니의 풍경화

2008/10/30 - [예술의 우주/예술마케팅] - 파리의 미술축제, FIAC에 가다.

2006/06/02 - [예술의 우주/예술가] - 'Peter Getting Out of Nick's Pool' by David Hockney 데이빗 호크니




Comment +0


1.

Contemporary Art를 '동시대 미술'로 옮겨야 하나? 이전에는 현대 미술로 옮겼는데, 이 잡지에 실린 정형탁 편집장의 글을 읽고 난 다음, 고민에 빠졌다. 


아서 단토A.Danto가 정의한 '예술의 종말' 이후 생긴 '컨템포러리'는 이제 더 이상 미술작품은 어떠해야 한다는 특수한 존재방식에 방점을 찍은 거다. 예술이 미학의 집으로 편입되었을 때 이미 이런 현상은 예견되었는지 모르겠다. 팝아트의 등장으로 미술의 고유한 가치를 찾으려는 목표는 허망한 것이 되었고 삶과 예술의 경계를 허무는 노력들이 생겨났다. (정형탁, '자살, 자본의 메타모프로시스' 중에서, 65쪽) 


(솔직히 정이 가지 않는) 미술 이론가 아서 단토를 인용하며, 그는 컨템포러리의 의미를 구한다. 굳이 저토록 진지해질 필요는 없어 보이지만 말이다. 다시 이야기해서 동시대 미술의 예술의 진지함, 심각함, 이론에의 집중을 벗어나고자 다양한 노력을 하는 것과 반대로 평론가들은 더 진지해지고 있는 건 아닌지 모르겠다. 그리고 이 글은 '컨템포러리'의 의미를 구하고 있고, 도리어 '모든 게 예술이고 모두가 예술가다. 그런데 과연 그럴 수 있는가? 현실은 여전히 공고하게 시스템의 언어 속에서 작동한다'고 지적하며 자본주의가 요구하는 바 '특수한 존재방식'이 있음에 저항해야 된다는 것이 이 글의 요지이긴 하다. 


그가 인용하는 알랭 바디우는 '다문화주의란, "화폐만을 통해 보편화되는 세계를 유지하기 위한 문화주의 이데올로기에 불과한 것"이라고 비판'했다고 한다. 결국 돈이 문제인가? 


2.

이 잡지 - Contemporary Art Journal 2011년 Vol.7'도 거의 2년만에 읽었다. 올해 읽은 책 수를 세어보니 잡지를 포함해도 20권이 되지 않았다. 일상이 바빠지니, 독서나 전시 관람에 쏟는 시간이 해가 갈수록 줄어든다. 그런데 이 줄어드는 시간만큼 내 관심사는 더 넓어지니, 이를 어쩌면 좋으랴. 


3. 

근데 사실 '스칼라 마인드Scholar mind'와 '크리틱 마인드Critic mind'는 구별된다고 보거든요. 스칼라 마인드는 가치 중립이거든요. 크리틱 마인드가 되려면 어떤 것을 그래도 선호해야 됩니다.자기가 보는 전형이 있어야 되거든요. 지금 생각하면 그 당시 그것 때문에 많이 고민했어요. 그 당시에도 고민했고. 지금에서야 어떠냐 하면은 둘 다 있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 김복영, 대담 중에서, 15쪽 


4. 

이러한 논리에 따른다면, 한국 사회에서 자살률이 높은 이유는 크게 두 가지로 나누어진다. 한국 사회에 존재하는 외부의 충격이 한국 사람들이 견디어 내기 힘들만큼 크거나, 아니면 외부의 충격이 크지는 않지만 한국 사람들의 내부가 취약하거나 이다. 그리고 한국 사회에서 자살률이 빠르게 증가하는 이유 역시 크게 두 가지로 볼 수 있다. 한국 사회에 존재하는 외부의 충격이 점점 더 강해지거나, 한국 사람들의 내부가 점점 더 취약하거나 이다. 

- 이홍균, '자살의 사회적 원인' 중에서, 41쪽 


5. 

이제는 화가도 필요 없다. 작가도 필요 없다. 음악가도 필요 없다. 조각가도 필요 없다. 종교도 필요 없다. 공화당도 필요없다. 왕당파도 필요 없다. 제국주의도 필요 없다. 무정부주의자도 필요 없다. 사회주의자도 필요 없다. 볼셰비키도 필요 없다. 정치가도 필요 없다. 프롤레타리아도 필요 없다. 민주주의자도 필요 없다. 군대도 필요 없다. 경찰도 필요 없다. 민족도 필요 없다. 이 모든 천치들은 필요 없다. 더 이상 아무 것도 필요 없다. 아무 것도. 아무 것도. 그리하여 새로움이라는 것도 결국엔, 지금 우리가 원치 않는 그 모든 것들, 똑같은 것으로 변하겠지만, 우리는 다만 그것이 덜 썩어 빠진 것이 되기를 바라며, 너무 빨리 '그로테스크한' 것으로 변하지 않기를 바란다. 

- 루이 아라공Louis Aragon, 1920년 2월 5일, 다다 제 2선언. (정형탁의 글 중에서 재인용, 66쪽) 


6. 

1917년 뒤샹이 변기를 출품한 앙데팡당전에 강사로 초빙받은 시인이자 미술평론가였던 아르튀르 크라방Arthur Cravant은 예술적 제스처로 스스로 자살을 선택하기도 했다.

- 정형탁, '자살, 자본의 메타모르포시스' 중에서, 67쪽 


7.

장 - 루이 뿌아트뱅의 '자살: 불가능한 매뉴얼'이라는 아티클은 주의 깊게 읽어볼만 했으나, 한편으로는 끔찍하기도 했다. 자살을 직접적으로 예술 작품의 소재나 주제, 더 나아가 퍼포먼스의 일환으로 다룬 여러 사례가 등장하기 때문이다. 어차피 이 잡지야 전문가들이 읽을 터이지만, 이 공개된 공간에서 인용하기에는 끔찍하기만 하다. 몇 사례는 너무 끔찍한 탓에, 크리스 버든 Chris Burden의 초기 작품인 Shoot은 애교스러울 정도이다. 






이와 같은 자살에 관한 접근 중 가장 의미 있는 예시들은 60년대 말 비엔나 출신의 2명의 예술가, 귄터 브루스Gunter Brus와 루돌프 슈바르츠코글러Rudolph Schwarzkogler에 의해 주도된 활동들에서 찾아볼 수 있다. (...) 당시 슈바르츠코글러는 공개적으로 퍼포먼스를 펼친 것이 아니라 단지 사진 시리즈를 위해서만 퍼포먼스를 한 유일한 아티스트였다. (...) 실제로 그는 29살의 나이에 창문에서 뛰어내림으로서 다른 인생, 앙토닌 아르토Antonin Artaud가 주목한 '익명의 삶과 우주에 연결된 신체', 그리고 질 들뢰즈Gilles Deleuze가 명명한 '기관 없는 신체le corps sans organe'에 대한 사색의 행위와 통찰을 끝내버렸다. 

- 82쪽


자살은 도덕이나 재현과 관련된 존재의 경계만을 밝히는 미학의 주제에 한정된 것이 아니라 내밀한 결합, 내면과 심리, 상상 속에 판타즘과 실천 가능한 행동의 주제가 되었다. 

- 82쪽


자살을 예술과 삶의 영역에서 다룰 때 야기되는 한계는 항상 같은 것이다. : 우리는 자살을 보여줄 수 없고, 단지 이것에 대한 준비와 결과만을 보여줄 수 있다. 아직 어떤 작가도 자신의 자살을 연출하거나 사진, 비디오로 촬영하지는 않았다. 

- 83쪽 



9. 

그 외 읽을만한 글이 많았다. 이제 작업을 하는 이들과 술 한 잔 할 여유마저도 사라져 버렸지만, 가끔 읽는 이런 잡지도 사소한 위안을 구하곤 한다. 









Comment +2

  • 예술가들은 자살조차도 예술의 눈으로 바라볼 수 있겠지요. 그런데 자살할만큼 힘들어 하는 사람과 자살로 인해 고통받는 남은 사람들을 보면 어디까지가 한계인가하는 질문이 생길 것 같아요. 아니면 그 질문조차 의미없는 것일까요?

    • 위의 사례로 등장한 것은 자살을 직접적으로 드러내어 자살이라는 극단적인 지점으로 몰린 우리의 모습을 가감없이 드러내어 심리적 해소를 기대하고 있다고 할까. 하지만 대부분의 예술가들은 자살에 이르는 어떤 감정이나 태도에 대해 위로하고 치유하려는 것에 더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자살에 몰린 사람들을 위한 예술 참여 치료가 좀 더 활성화되어야 할 것 같고요. ... 뭐랄까, ... 위 내용과는 무관한 것이지만, 저는 한국 사회, 한국 사람들 스스로가 자신들을 자살로 몰고 가는 것같아요. 끊임없이 남과 비교하고 비난하면서, 동시에 자신을, 자신의 가족을 채찍질하고 ... 안 되면 남 탓, 사회 탓을 하고는 결국 극단적인 시도를 하는 ... 뭔가 나라 전체적으로 잘못되어 있다고 할까 그런 생각을 요즘 자주 하게 됩니다. ㅜㅜ;;

오랜만에 읽은 미술 잡지에서 우리의 현재에 대해서 다시 고민하고 되새겨볼 만한 문장들을 읽었다. 그리고 아래와 같이 옮겼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자발적이며 능동적이고 탈식민화된 예술적 실천이다. 그런데 나도, 우리도 그걸 자주 잊는다. 다시 이 블로그가 거기에 기여할 수 있는 방안을 고민해봐야 겠다. 





우리 사회의 현실을 이해하는 것으로부터 시작하는 게 현명하다. 이 때 현실이란 혼종성, 디아스포라, 그리고 상호교환적인 네트워크가 점차 강해지는 상황이 영속화되고 있는 것을 말한다. 전체 구조를 바꾸는 것은 힘든 일이고, 그럴 필요도 없다. 우리가 자기 자신과 사회, 현실을 위해 무언가를 창조하는 게 더 중요하다. 이를 위해서는 다양한 경쟁력 있는 기관을 설립해야 하고, 가치 중심적 시스템 하에 더 많은 지식인들을 양성해야 한다. 나아가 억측하기를 그만 두고 우리 현실과 관련된 증거들을 생산해야 한다. 이 증거들은 강력하고 새로운 시나리오를 가져올 것이다. 

- 슈시 술라이만 (말레이시아 12Art Space 디렉터) (경향 아티클, 2013년 4월호에서 인용) 




Playing for Dying Mother, 2009

After Puvis de Chavannes’ “Jean Cavalier jouant le choral de Luther devant sa mere mourante,” 1851

Wong Hoy Cheong



The Charity Lady, 2009

After Jean-Baptiste Greuze’s “La Dame de Charite,” 1775

Wong Hoy Cheong






앨버트 허쉬만의 '반동의 수사학'에서 빌어 와 말하자면, 그것은 개선할 수 있는 가치에 대해 말하는 것이 아니라, 가치를 흉내내는 것일 뿐이다. 이것은 반동의 미사여구를 기만적인 것으로 만든다. 가치 밑바닥에 숨어 개선을 방해하는 요인으로 작용한다. 만약 당신이 그런 수사적인 논쟁을 하게 된다면, 당신의 결론은 '무반응'일 것이다. 당신은 어떤 개선 가능한 행동들을 할 필요도 없고 해서도 안 된다고 생각할 것이다. 왜냐하면 그 어떤 행동도 효과가 없으며 오히려 역효과를 낳거나 혹은 성취된 것들을 파괴하는 행위일 뿐이기 때문이다. 이런 반동의 수사학은 여러 분야에서 우리의 삶을 점유하고 있다. 경제적인 인플레이션과 핵무기, 노동자 착취, 도시 개발, 우리 사회에 만연한 정치적 거짓말 등. 만약 아시아 예술가들이 아직도 그들의 가치를 증명하는 데 서구의 시선에 의존하고 있다면, 그것은 혁신적인 게 아닌 자기 식민화일 뿐이다. 당신이 스스로 원하는 바대로 할 지, 아니면 남들이 무얼 하라고 얘기해주길 기다리고 있는지, 당신이 선택하기 나름이라고 난 믿는다. 

- 우 따건 (대만 콴두 미술관 수석 큐레이터) (경향 아티클, 2013년 4월호에서 인용) 








Tu Wei-Cheng

Happy Valentine’s Day

installation

http://collabcubed.com/2012/08/27/tu-wei-cheng-happy-valentines-day/ 






Comment +2

  • peepthestyle 2013.06.18 14:36 신고

    '만약 아시아 예술가들이 아직도 그들의 가치를 증명하는 데 서구의 시선에 의존하고 있다면, 그것은 혁신적인 게 아닌 자기 식민화일 뿐이다'
    멋집니다.

    제가 작년에 국내 모 예술제에 다녀왔는데 엄청나게 실망하고 왔다죠.
    솔직히 한국작가들이 창조해 낸 거라면
    그래도 작품속에 타국의 작가들과 구별되는 한국적인 느낌이 담겨있을 줄 알았는데..

    팔기위한 작품을 내놓는 자리의 성격이 강해서인지...
    그 예술제를 한국전체의 작가들의 작품에 확대해석하는 것은 좀 무리일 수도 있겠습니다만,
    거의 70%는 서구사회에 대한 동경만 담고 있더군요.
    (다행이 30%정도는 한국의 미가 물씬 느껴져서 너무 좋았습니다. 굳이 한국적인 모티프를 사용하지 않았어도 말입니다.)
    게다가... 앤디워홀 모작은 왜 그리도 많던지,,

    여튼 그 이후로 음악이나, 옷이나 주변에 모든 것들을 접할 때마다,
    서구사회와는 구분되는, 그리도 중국과 일본과는 구분된 한국적인 특성이 드러난 것을 발견하려
    부단히 노력하고 있습니다.
    물론 전 이 분야의 전공자가 아니기 때문에
    제 편협한 시야로는 많은 시간이 걸리겠지만요.

    발행하신 포스팅 잘 읽고 갑니다.^^

    • 정체성identity가 중요한데, 우리 사회가 자신의 정체성 찾기에는 소극적인 듯 합니다. 그리고 타인들과 뚜렷하게 두른 '개성적인 자기'를 드러내면 도리어 소외를 당하게 되는 건 아닌가 하고요. 미술 사회(일종의 장 champ)도 마찬가지인 듯합니다. 그 곳도 한국 사회의 일부인지라... 막상 부딪혀보니, 쉬운 일은 아니더라고요. 개성적인 작품을 그린 것도, 그 작품으로 인정 받는 것도 ... 우리 모두가 머리를 맞대고 헤쳐나가야 되는데, ... 여튼 대중의 관심이 많이 필요한 부분이 순수 미술 분야인 듯합니다. ~.. ^^
      댓글 감사합니다.!!



올해의 작가상 Korea Artist Prize 2012 

국립현대미술관(과천)

2012. 8. 31 - 2012. 11. 11 




* 아래 전시 설명에 사용된 작품 이미지는 국립현대미술관(http://www.moca.go.kr)에서 가지고 온 것입니다. 






오랜만에 간 과천 국립현대미술관이었다. 완연한 가을 하늘이 펼쳐졌고 도심이 벗어난 것만으로도 기분 좋은 일이었다. 


전시를 챙기는 것이 예전만 못하다. 직접적인 돈벌이와 관련없는 일이 된 지 오래 되었다. 가끔 있는 원고 청탁으로 전시를 보긴 하지만, 매우 드문 일이 되었다. 내가 좋아하는 일이라고 하지만, 일상에 지장을 주면서까지 전시를 챙기기엔 내 사정이 여유롭지 못하다. 그러다 보니, 전시 보러 가는 것이 연례행사처럼 되었고, 더구나 꼬박꼬박 기록하던 전시 리뷰나 메모도 이젠 사라진 지 오래다. 책을 읽고 리뷰 쓰는 것도 밀리기 일쑤이고, 글쓰기에 그만큼 시간을 투자하지 못하다보니, 글의 완성도도 예전만 하지 못하다는 생각이 들 때마다 부끄러워지기만 한다. 


시간 투자와 완성도는 비례한다. 작품을 보고 머리로 이해하고 가슴으로 받아들이는 과정에는 무조건 시간이 걸린다. 미술 관련 책을 수 권을 읽고 강의를 들어도 마찬가지다. 실은 작품을 만드는 과정도 마찬가지다. 시간이 걸린다. 하루만에 뛰어난 작품을 완성할 수 있지만, 그 하루에는 긴 시간 동안 쌓여져 온 고민과 치열했던 내적 투쟁이 반영되어 있기 마련이다. 


이 점에서 이번 전시도 그런 고민들이 여과없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지는 전시라고 해야할 것이다. 정치적인 테마에서부터 예술 지향적인 시선까지. 보는 이들에게는 현대 예술이 가지는 '바라봄에 대한 불편함'을 느끼게 하면서도 관람객의 참여를 유도하고, 어떤 작품은 몽환적인 감미로움으로 빠지게도 하고, 어떤 작품은 메타적인 관점에서의 끈질긴 접근을 요구하며 예술을 묻기도 했다. 그러면서 사람들은 현대 한국 미술에 한 발짝 다가갈 수 있었을 테지만, 이 작가들의 작품을 도심의 상업 갤러리에서 만나기엔 한국 미술계는 너무 어렵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수경 - 쌍둥이 성좌 Constellation Gemini 



'번역된 도자기' 작품들만 보다가, 이번 전시에 소개된 작품을 보면서 작가의 새로운 면을 보게 된 것같이 기분이 좋아졌다. 순수함과 여성성을 드러내며, 몽환적이면서도 숨겨진 자아에 대한 탐구가 이어졌다. 내 설명보다 전시 소개글을 그대로 옮기는 것이 (다소 어렵게 여겨지겠지만) 작품에 대한 보다 정확한 이해를 도울 수 있을 듯 싶다. 



한편, 이수경은 양손을 이용하여 좌우가 완벽하게 대칭되는 회화를 제작하는 자신의 작품 제작 특질에 주목하여 "대칭"을 전시 주제로 선택하였다. 개인적인 작품 제작 방식에서 출발한 이 개념은 개인적인 특질을 넘어 좌우 대칭의 교방춤, 족자 작업 및 설치로 이어진다. 같으면서도 다른, 나이면서도 내가 아닌, 하나이면서 동시에 둘인 대칭 이미지는 전시장을 메우며 깨진 상처나 파편화된 수많은 나와 타인들 사이의 간극을 메운다. 이러한 작업은 내 안의 나 아닌 존재, 즉 내 속의 타인과 타인 속의 나를 발견하는 것이자 나와 타자의 같음을 발견하고 타자의 존재를 인정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 전시 소개 중에서 



문경원, 전준호 - 공동의 진술 Voice of Metanoia 




이 흥미로운 프로젝트 작품들은 나에겐 무척 의미심장했다. 이들은 오랜 기간 동안 예술에 대해 묻고 인터뷰하고 공동 작업을 해왔던 것이다. 예술에 대한 인터뷰들을 수집하고 정리하고 이것이 투영된 설치 작업들, 드로잉 등은 서로 겹치고 교차하고 이어지면서 예술에 대해서 되묻고 되묻는다. 실은 결론이 나는 질문이라기보다는 정답 없는 질문의 연속을 통해서 정의내릴 수 없는 예술에 가까이 가는 것을 작가들 스스로, 혹은 관람객들이 체험할 수 있도록 한다고 할까. 개인적으로는 이 전시가 4개의 전시 중 최고였다. 



전시장에 놓인 설치, 드로잉, 영상을 아우르는 통합 작업은 우리 시대 예술의 형태를 드러내는 것이라 할 수 있는데, 작가들은 시각언어보다는 개념 언어가 난무하는 우리시대에 예술이 유지해야 할 범주를 유명 전시 포스터에서 기인한 색상과 설치작업을 통해 제시한다. 하지만 이러한 작업을 통해 문경원과 전준호는 예술의 본질과 역할을 규정하기 보다는 예술이 인간 인식의 지평을 변화시키는 역할을 담당하였다는 역사적 사실만을 담담히 제공한다. 

- 전시 소개 중에서 


 


임민욱 - 절반의 가능성 The Possibility of Half 






임민욱은 북한의 김정일 주석과 남한의 박정희 대통령 장례식에 참석한 오열하는 주민들 모습에서 영감받아 제작한 '절반의 가능성'을 출품하였다. 슬픔에 가득찬 주민들의 모습에서 국토 전체가 마치 커다란 연극무대가 된 것같은 아이러니함을 느낀 작가는 그러한 연극적 풍광을 조장하는 이데올리기와 미디어의 역할에 주목한다. 

- 전시 소개 중에서



정치적 메시지를 교묘하게 섞어 현대 미디어의 속성을 탐구한 임민욱의 작품은 다소 생소하고 거칠게 느껴졌다. 혼자 전시를 보러 갔더라면 열심히 보았을 텐데, 아이와 함께 간 터라 그의 진지하고 도발적인 메시지가 다소 부담스럽게 여겨지기도 했다. 



김홍석 - 사람 객관적 - 나쁜 해석 People Objective - Wrong Interpretations 





김홍석은 이번 전시를 위해 '사람 객관적 - 나쁜 해석'이라는 제목으로 세 개의 방을 마련하고 각각의 방을 '노동의 방', '은유의 방', '태도의 방'이라 이름 붙였다. 동일한 작품으로 이루어진 이 세 개의 방에 대해 작가는 노동, 은유, 태도라는 세 개의 키워드를 가지고 작품과 관련된 서로 다른 이야기를 제공한다. 이 이야기들은 퍼포머에 의한 전시가이드(도슨트)의 형태로 관객에게 제공된다. 

이를 통해 김홍석은 미술에 대해 가지고 있는 선입견에 도전하고 동시대의 미술을 미술로 인식하게 만드는 사회적 합의에 대해 재고할 기회를 제공한다. 

- 전시 소개 중에서



작가의 의도가 그대로 실현되어 성공하였을까? 참여(도슨트의 설명 듣기)로 완성되는 작품의 목적은 분명하지만, 전시 공간의 한계는 곧바로 작품의 한계로 이어진다. 



4개의 전시는 각기 다른 주제와 접근을 보여주어, 보는 이들마다 선호가 분명히 갈릴 듯 싶다. 나 또한 그랬으니. 하지만 2012년 한국 미술의 현재를 보기 위해 이 전시만큼 좋은 전시가 어디 있을까. 


이번 '오늘의 작가상' 2012 전시는 이번 주까지 이어진다. 이제 가을도 얼마 남지 않았다. 이번 주말 과천국립현대미술관으로의 외출은 어떨까? 





Comment +0


제 7회 서울국제미디어아트비엔날레 Mediacity Seoul 2012 

너에게 주문을 건다. 

9.11. Tue - 11. 4. Sun

서울시립미술관, 디지털미디어시티 홍보관(DMC Gallery) 




2년에 한 번씩, 우리는 서울에서 세계 미디어아트 트렌드를 한 눈에 확인할 수 있다. 서울국제미디어아트비엔날레는 놓치기 어려운 미술 전시임에 분명하다. 이번에도 많은 작가들의 작품들을 볼 수 있고, 무수한 작품들 속에 마음에 드는 작품 한 두 점 이상을 만나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닐 것이다. 


각각 작가와 작품들에 대해서 나열하자면, 끝도 없을 것이니, 내 눈에 들었던 작가와 작품 몇 점을 소개한다. 특히 틸 노박은 1980년 생으로 앞으로 작업들이 궁금해졌다. 


아래 원고는 서울시립미술관의 전시 웹사이트에서 가지고 온 것이며, 사진은 출처를 밝혔다. http://www.mediacityseoul.kr/ 







출처: http://www.mediacityseoul.kr/ 



제니 홀저 Jenny Holzer - 정치에 관하여

(텍스트: 비스와바 쉼보르스카의 < 모래알이 있는 풍경> 중 ‘우리 시대의 아이들’에서 발췌)

2008

흑백 피그먼트 프린트, 152.4 x 190.5 cm / 60 x 75 inch



미국 오하이오 출신인 제니 홀저는 1970년대 후반 뉴욕으로 거취를 옮긴 시점부터 추상회화와 판화에서 텍스트를 사용한 개념 미술로 전향했다. 이후 그녀는 자신이 써낸 짧은 경구 모음인 < 트루이즘>, < 생존> 등과 같은 텍스트 시리즈뿐 아니라 다른 문인들로부터 인용한 텍스트를 LED나 라이트 프로젝션과 같은 가장 동시대적이면서도 상업적인 매체로 표시하면서 커다란 반향을 일으켰다. 언어는 작품의 형식적 요소이면서 동시에 의미의 전달을 통해 강력한 효과를 생산한다. 뉴욕 시내의 타임스퀘어 광고판에 자신의 작업을 선보이면서부터 홀저의 작업은 우리가 일상적으로 마주치는 광고, 뉴스와 예술작품과의 구분을 모호하게 하였다. 심지어 LED 전광판을 조각적 매체로 변환시키는 작업은 건축적 공간의 경계를 해체하면서 장소와 관람자의 관계 역시 모호하게 한다.

 

프로젝션에 사용된 텍스트들을 대부분 작가가 만들어낸 13개의 텍스트 시리즈(1977-2001)에서 가져오기도 하지만 다른 문인들의 시나 작품에서 차용되기도 한다. 작가는 2004년 뉴욕에서의 프로젝션 작업을 기점으로 폴란드 출신 시인이자 노벨 문학상 수상자인 비스와바 쉼보르스카의 작품을 텍스트에 적용하기 시작한다. 이번 전시에서 소개된 두 개의 프린트 가운데 하나는 런던 시청 위에 쉼보르스카의 < 우리 시대의 아이들>을 프로젝션 한 < 정치에 관하여>이고, 다른 하나는 이라크의 시인 파딜 알-앗자위의 < 야수의 계곡>과 미국 시인 제임스 쉴러의 < 프릭으로 돌아오다. 날씨>를 뉴욕의 건물들에 프로젝션 한 2006년 작 < 당신을 죽일 것이다/나는 막강한다>이다. 홀처의 이 작품들은 차용된 텍스트들이 도시의 공간 및 건축물에 개입하면서 어떻게 새로운 정치적, 미학적 맥락들을 파생시키는지를 보여주고 있다.




출처: http://www.transmediale.de/node/20704


틸 노박 Till Nowak - 원심력 체험

2011

필름/비디오 - 3분


틸 노박의 디지털 창조물들은 놀이공원의 기구들에 대한 어린 시절의 매혹들을 재생시킨다. < 원심력 체험>은 일곱 개의 비디오 클립 및 드로잉으로 이루어진 작업으로, 장난감처럼 장식된 거대 로봇 공학적 기계들이 중력에 반하는 경험을 만들어내는 것을 보여준다. 디지털 매체로 다시 태어난 이 놀이 기구들은 현실로부터의 탈출, 그리고 행복과 자유의 탐색을 상징한다. 작품의 원제목이자 ‘원심력’을 뜻하는 독일어 단어 ‘Fliehkraft’는 탈출을 의미하는 ‘Flieh’와 힘을 의미하는 ‘Kraft’의 합성어이다. 한편 이 기계들은 재미와 즐거움을 주기도 하지만, 또한 시각 미디어의 아이러니컬한 입지를 재현한다. 노박은 단순한 아마추어용 카메라로 녹화한 영상을 디지털 기술로써 조작 및 증강한다. 마찬가지로 각각의 영상에 대응하는 일곱 개의 건축 도면들은 실제적인 기술 정보를 보여주지 않는다. 도리어 이 드로잉들은 현실이 무엇인지 반문하고, 나아가 우리 문명에 대한 패러디를 제공한다.



(* 아래 영상은 틸 노박의 다른 영상물임. 다소 스타일이 다르긴 하지만..) 




출처:http://www.mediacityseoul.kr/ 


정연두 -  식스 포인츠

 2010

 28분 44초,  싱글채널 HD 비디오, 사운드



정연두의 이미지들은 대부분 실사로 이루어진 연출사진들이다. 이 이미지들은 사람들의 판타지, 꿈, 희망이나 연극적인 상상들에 기반하고 있다. 사진이 지니고 있는 ‘증거’로서의 특성은 이러한 비현실적 생각들이 일단 사진으로 번역되었을 경우 마치 실제로 실현된 것처럼 느끼게 한다. 그러나 이러한 구현장치로서의 사진에 작가는 눈에 보이는 무대장치들을 삽입함으로써 ‘증거’ 대신 ‘드라마’에 훨씬 주목하도록 한다.

Six Points는 정연두의 사진들 가운데 처음으로 컴퓨터 합성을 시도한 작품이다. 일정한 간격으로 촬영한 뉴욕의 거리 사진을 길게 이어 붙여 천천히 패닝하는 동영상 카메라의 움직임을 재현해 낸 것이다. 이 동영상에는 이전의 < 수공기억>에서 인터뷰를 다루었던 것처럼 어떤 인물들의 목소리가 더빙되어 있다. 즉 뉴욕의 소수민들이 거주하는 6개의 구역들(잭슨 하이츠의 인도마을, 멀베리 & 켄모어의 리틀 이탤리, 모트 스트리트의 차이나 타운, 32번가 코리아 타운, 루즈벨트 에비뉴의 남미마을, 브라이튼 해변가의 러시아 공동체) 각각에 살고 있는 불특정한 인물들의 독백이 그것이다. 이 인물들은 자신들이 떠나온 고국과 타지에서의 삶이 주는 긴장감, 두려움, 희망 등에 대해 토로한다. 연극의 대사처럼 다루어진 이 독백들로 인해 영상의 흐름은 수없이 많은 이야기들이 내재하고 있는 공간들을 암시하는 것처럼 보인다.



출처: 직접 찍음 


로미 아키투브 Romy Achituv - 크라프의 마지막 테이프

2012, 뉴미디어 설치 작품

크기 : 가변 크기

 


<크라프의 마지막 테이프>는 부조리한 희곡의 부조리한 제목이다. 상상해보라. 거의 장님에 잘 듣지도 못하는 쇠약한 노인이 반쯤 술에 취한 채 너저분한 방에 홀로 쭈그리고 앉아서 바나나로 끼니를 때우며 자신의 목소리가 녹음된 옛날 테이프들을 틀고 있는 모습을, 그것도 녹음의 상당부분이 그 이전의 테이프들에 대해 언급하는 테이프를. <로버트 해치>

 

베케트의 단막극 <크라프의 마지막 테이프>의 비디오 퍼포먼스를 한 줄기의 꿀로 ‘코드전환’을 한 이 설치작업에서 약 3미터 높이에서 흘러내리는 ‘꿀줄기’는 연극의 내러티브에 반응하며 지진계가 진동하듯 흔들린다. 그리고 바닥에 있는 꿀 웅덩이의 표면에 덧없는 흔적을 남긴다. 이 작품은 퍼포먼스의 모든 순간과 그에 동반하는 소리들뿐만 아니라 밀도 있게 채워진 침묵과 멈춤에도 촉감 가능한 형태를 부여한다. 이 물리적인 인코딩은 베케트가 현존을 통해서 “말하는” 것만큼이나 부재를 통해도 “말하는” 방식을 강조함으로써 연극의 구조적 역동성을 부각시킨다.

꿀이 흘러내려 투명한 통 안에서 서서히 뒤섞이는 과정에서 꿀을 담는 용기는 ‘데이터 옮겨 적기‘를 하듯 침전물의 층을 축적하면서 퍼포먼스를 구체화하게 된다. 그러나 꿀은 작품의 “지질학적 데이터 지도”를 만들기 보다는 용기 속에서 뒤섞이고 어우러지면서 분리 불가능한 덩어리라는 볼륨으로 재구성된다.

이 “해석된 데이터”는 꿀이 움직이지 않는 상태로 되돌아감에 따라 시각적인 동시에 상징적으로 그것의 물리적인 운반자인 꿀로 다시 환원된다. 그리고 모든 해석의 전략은 다시 열린 채로 남게 된다.






Comment +0


밀린 신문들을 읽다가 앤서니 곰리(Anthony Gormley)의 인터뷰 기사를 읽었다. 흥미롭게도 그는 고고학과 인류학 전공자이다. 성공한 CEO들 중에 경영학을 전공한 이들이 많지 않듯이, 뛰어난 예술가들 중에는 예술을 전공하지 않는 이들도 꽤 있다. 하지만 한국은 너무 '전공 편향주의'가 심한 듯하다. 미술을 전공하지 않고 순수 미술 분야에서 이름을 떨친 이를 보기 드물고, 학연은 여전히 심하기만 하다. 


이는 미술 뿐만 아닌 것같다. 솔직히 학부 시절 **전공을 이수했다고 해서 그 분야에 대해 아무 것도 모르는 경우가 태반인데도 불구하고 말이다. 내 경험을 이야기하자면 대학원 석사 학위를 받아도 해당 전공 분야 뿐만 아니라 인문학 전반에 대해 무식한 경우를 너무 봐왔기 때문에 ... 사정이 이렇다보니, 해당 전공에 대해서 무지한데, 나머지 분야에 대해선 어떻겠는가! (결국엔 전공자를 찾게 되는 악순환이 생기는 것이다) 


그러니 앤소니 곰리 같은 예술가가 나오리라는 기대를 한국에서는 애초부터 접어야 하는 것일까... 하는 씁쓸한 생각에까지 미친다.





출처: http://en.wikipedia.org/wiki/Antony_Gormley



뛰어난 예술가들 상당수는 생각이 깊고 언변이 좋다. 심지어 글까지 잘 쓰기도 한다. 또한 현대 예술가라면 의당 그래야 한다. 칸딘스키가 미술이론가가 되어야 하는 것은 현대 예술에서는 당연한 일이다. 이우환이 여러 권의 책을 낸 것도 여기에 속한다. 앤서니 곰리의 인터뷰를 옮기는 이유는 현대 예술이 고민하는 한 지점을 여실히 보여주기 때문이다. 인간, 의사소통, 공유에 대한 탐구, 육체와 정신, 라이브 캐스팅, 종교 등에 대한 그의 생각들은 현대 예술가들 대부분이 고민하고 있는 분야이기도 하다. 



“인형이나 장난감만 한 크기의 조각을 만드는 것은 매우 재미있고 특이한 경험이다. 문득 전체를 볼 수 있게 되기 때문이다. 내가 지금 당신과 대화를 나누고 있는 이 순간, 나는 당신의 눈동자나 입술의 표현에 집중하지만 이는 전체적인 몸의 표현이 아닌 부분적인 표현일 뿐이지 않나. 아무튼 나는 신체를 27개의 블록으로 구성하면서 단순화하고자 했다. 그러고 나서 인간의 여러 심리를 전체적인 몸짓들로 표현할 수 있을지 보고 싶었다. 인간의 감정을 뼈와 근육과 피부를 표현하는 블록을 이용해 통역한다는 작업 자체가 매우 흥미로웠다. 블록들이 상호 관계를 맺으면서 어떻게 결합하느냐는 인간 감정을 표현하는 가장 본질적인 요소가 된다. 예를 들어 이 도록에서 서 있는 세 가지 조각은 언뜻 같아 보이지만 블록의 결합이 미미하게 다르다. 그럼으로써 이들은 각각 감사·간절함·자기방어라는 미묘한 감정을 다르게 표현하고 있다. 이러한 몸짓을 우리는 의도하지 않는다. 저절로 그렇게 될 뿐이다.” 



“육체의 자유를 제한할 때 우리의 정신은 더 멀리 나아간다. 이것은 인간이 가진 커다란 패러독스다. ‘명상’의 기본 원칙이기도 하다. 라이브 캐스트를 통해 움직임의 반경과 자유로운 표현 능력을 의도적으로 제한하고 모든 육체의 컨트롤을 기꺼이 포기함으로써 한층 더 자유로운 공간으로 이동하게 되는 경험을 하게 된다.” 



“종교는 어린 시절 중요한 부분이기는 했지만 나는 결국 종교를 믿지 않는다. 종교는 천국과 지옥, 죄와 벌, 도덕적인 명령 등 매우 파워풀하면서 중요한 교리를 전파하지만 동시에 이는 위험한 사상이 될 수 있으며 현대사회에서 종교는 더 이상 좋은 역할을 하고 있는 것 같지 않다. 불교는 종교를 뛰어넘어 인생의 철학이라고 생각한다. 우리의 인생을 있는 그대로 살아갈 것을 가르치며, 물질세계 속에서 우리의 정신·육체·생각·의식이 삶과 어떻게 관계를 맺는지를 가르친다.” 

- 중앙선데이, 2011년 5월 15일자 

http://sunday.joins.com/article/view.asp?aid=21699







춮처: http://www.pablogt.com/artists/antony-gormley/


(라이브캐스팅 작품이다. 라이브캐스팅이란 실제 사람 위에 석고를 입혀 틀을 짜는 것을 뜻한다. 포스트 모던 조각가인 조지 시걸도 라이브 캐스팅을 통해 현대인의 정신적 쓸쓸함을 드러내기도 했다.)




출처: http://mocoloco.com/art/archives/001040.php


(위 인터뷰에서 인형이나 장난감 크기로 만든 조각이 이 작품이다. 전시장에 인형 크기의 작품들이 빼곡히 들어가 있다.)

 



Comment +0



출처: http://en.wikipedia.org/wiki/Andy_Warhol






20세기 후반 미술계에서 대중적으로 가장 유명한 이를 꼽으라면 단연코 ‘앤디 워홀’(Andy Warhol)이 될 것이다. 심지어 미술 시장(Art Market)의 측면에서도 앤디 워홀 이전과 이후로 나눌 수 있을 정도로, 그의 영향력은 대단한 것이다. 아마 대부분의 사람들은 앤디 워홀을 대중적인 팝 아티스트로 여기겠지만, 실은 그는 팝 아트(Pop Art)를 넘어서 현대 미술 뿐만 아니라 현대 대중문화가 가지는 숨겨진 의미를 온 몸으로 보여주며, 끊임없이 우리들에게 환기시켜 주었다.


스타에 대한 열광과 매혹, 아우라(Aura)와 복제, 현대적 바니타스(Vanitas)와 죽음, 차용과 반복, 가면과 진실. 앤디 워홀과 그의 예술에 대해 이야기하자면 여러 주제들을 거쳐 가야만 하고, 심지어 현대 미학(Aesthetics)의 근본적인 의문과도 마주할 수 있다. 그 의문이란 ‘도대체 예술 작품이란 무엇인가?’


이 글은 짧지만, 앤디 워홀의 작품 세계를 이해하기 위한 작은 지도로서의 역할을 수행하게 될 것이다.



출처: http://www.hometowninvasion.com/photo/wisconsin/brillo-box-by-andy-warhol




「브릴로 상자」에 담긴 철학


아서 단토(Arthur C. Danto)는 『예술의 종말 이후After The End of Art』에서 ‘「브릴로 상자」가 예술임을 확신했으며, 나를 흥분시킨 물음, 진정으로 심원한 물음은 워홀의 「브릴로 상자」와 수퍼마켓의 저장실에 있는 브릴로 상자 사이의 어떠한 (지각적인) 차이도 사물과 예술 사이의 차이를 설명할 수 없다고 할 때, 양자 사이의 차이는 과연 어디에 있는가 하는 것이다’라고 적는다.


그렇다면 예술 작품인가 아닌가를 결정짓는 것은 무엇일까? 여기에 대해 단토는 이제 작품의 외형이나 표현 양식이 아니라 작품이 지향하고 묻는 의미가, 그 작품이 예술 작품인가 아닌가를 결정짓는다고 단언한다. 그래서 슈퍼마켓에 있는 브릴로 상자를 갤러리 공간에 옮겨놓는 행위만으로도 그 상자는 예술 작품이 될 수 있다고 말한다.


그런데 이런 철학적 접근은 우리에겐 매우 난처하게 다가온다. 우리가 예술 작품이라고 하면, 어떤 예술가가 고통스러운 창작의 과정을 거쳐, 노련한 솜씨로 만든 어떤 물질적인 대상을 뜻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앤디 워홀은 가게에 있는 비누 박스를 가지고 와서 갤러리에 예술 작품으로 전시하고, 더구나 이를 비싼 가격에 컬렉터에게 팔기까지 했다. 그리고 지금도 전 세계 갤러리들과 컬렉터들 사이에서 이 비누 박스-브릴로 상자-는 놀라운 가격으로 거래되고 있으니, 도대체 예술 작품이란 무엇일까? 우리가 믿는 그 예술 작품은 이제 없어진 것일까? 작품 외형만으로는 그것이 예술인지 아닌지 판단내리지 못한다면, 우리는 일일이 작품의 철학적 의미를 탐구하고 난 뒤에야 ‘이것은 예술 작품이다’라고 판단할 수 있는 것일까?


하지만 너무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말자. 이 유쾌한 「브릴로 상자」는 기존 예술계를 향해 앤디 워홀은 던진 수수께끼이면서 냉소적인 반어법 이상의 의미를 가지진 않으니까. 그리고 단토의 의견대로 철학적 의미로만 작품 감상을 한다면, 이미 (현대) 미술은 끝났을 것이다.



the velvet underground & nico  1967
the velvet underground & nico 1967 by oddsock 저작자 표시



스타가 되고 싶었던 앤디 워홀


앤디 워홀의 꿈은 언제나 스타였다(그 스스로 고백한 적 없지만, 누구도 그 사실을 의심하지 않았다). 그것도 순수 미술계의 스타. 모든 이들이 자신을 알아봐주길 원했다. 그리고 그는 스타가 되었고 스타들의 친구가 되었다. 앤디 워홀의 ‘팩토리(Factory, 공장)’는 그의 작업실 이전에, 뉴욕 예술계의 사교 공간이었고 그 곳에서 앤디 워홀은 자신의 명성을 쌓아갔다. 모든 이들이 자신을 알고, 자신에 대해 궁금해 하며, 자신을 추종한다는 것은 얼마나 흥분되는 일인가!


하지만 클라우스 호네프(Klaus Honnef)의 지적대로 ‘가면은 보호를 의미’한다(『Andy Warhol』, TASCHEN). 앤디 워홀은 자신이 만든 가면-앤디 워홀은 스스로 자신을 꾸미고 포장하며 끊임없이 그에 대한 새로운 스토리를 만들었다-뒤로 숨었다. 그는 “나는 미스테리로 남기를 바란다. 나는 결코 나의 배경이 노출되는 것을 원하지 않으며, 그래서 나는 질문을 받을 때마다 서로 다른 답변을 한다”, “만약 당신이 앤디 워홀에 대해 알고 싶다면 나의 그림의 표면과 영화, 그리고 나를 보기만 하면 된다. 거기에 내가 있다. 그 배후엔 아무 것도 없다”라고 이야기하며 진짜 자신을 숨긴다(실은 ‘진짜 자신’이라는 것도 모호하기 이를 데 없지만).


앤디 워홀에게 있어 ‘진짜 나’란 없는 것이고, 끝까지 숨겨야 하는 것이거나 미스테리한 것으로 남기고 싶은 어떤 것이다. 마치 ‘나는 내가 존재하지 않는 곳에서 생각한다, 고로 나는 내가 생각하지 않는 곳에서 존재한다’고 말한 자끄 라캉(Jacques Lacan)처럼, 우리 자신에 대해서 가장 잘 아는 것은 우리 자신이 아니라 우리를 바라보는 누군가이듯, 앤디 워홀은 한껏 꾸며진 스타의 본질을 제대로 이해하고 있었다. 타인의 눈에 비친 나, 미디어에 담긴 나, 그리고 작품이 전부다. 내가 만날 수 있고 온전히 이해할 수 있는 나란 이 세상에 없다. 그리고 앤디 워홀은 이 사실을 매우 자연스럽게 받아들였다. 앤디 워홀은 그의 작품을 생산해내듯, 그의 언어, 패션, 몸짓, 이야기를 생산해냈다.


NYC - MoMA: Andy Warhol's Double Elvis
NYC - MoMA: Andy Warhol's Double Elvis by wallyg 저작자 표시비영리변경 금지




반복과 복제, 새로운 아우라


현대 미술에 끼친 앤디 워홀의 영향은 치명적이었다. 실은 앤디 워홀에 와서 제대로 된 미국 미술이 시작되었다. 미국 미술이라고 이야기하면 잭슨 폴록(Jackson Pollock)의 추상 표현주의(Abstract Expressionism)을 떠올리기 쉽지만, 이는 유럽적 기원을 가진다. 인상주의 미술에서 시작된 평면에 대한 탐구, 칸딘스키의 음악적 추상 미술 등은 잭슨 폴록 작품의 기원을 형성하는 것들 중 일부다(폴록 이전의 미국 회화도 마찬가지로 유럽에서 기원한 것이다). 그러나 앤디 워홀의 작품은 의식적으로 추상 표현주의와는 다른 방향을 향했고, 더구나 이는 그에게 무척 자연스러운 일이기도 했다.


전후 미국 사회를 특징지었던 대중 문화의 요소를 끄집어내어 작품에 활용하였고, 탁월한 비즈니스적 감각으로 자신을, 그리고 자신의 작품을 꾸미고 포장하였다. 시의적절한 이슈와 이야기를 만들었고, 언제나 화제를 몰고 다니며, 상업 미술뿐만 아니라 순수 미술계의 촉망받는 스타로 올라서기 시작했다.


앤디 워홀은 기존 미술과는 확실한 차별성을 위해 대중 문화(Pop Culture)에 바탕을 두고, 반복과 복제를 자신의 창작 방법으로 삼았다. 기존 미디어에서 활용되었던 이미지를 그대로 가지고 와선 이 이미지를 그만의 방식으로 복제하였으며, 다양하게 반복하였다. 그는 소비 사회의 특징을 자신만의 방식으로 은유화하였으며, 소비할 수 없는 것은 그의 관심사가 아니었다. 따라서 예술 작품의 유일성은 무시되었고, 작품의 아우라는 거듭된 복제-생산 뒤에도 사라지지 않았다. 즉 유일한 작품에만 아우라가 있는 것이 아니라 (한정된 수로) 복제된 작품에도 아우라가 있음을 앤디 워홀은 보여주었고 현대 미술계와 시장은 열광했다.


하지만 편집증적이고 과도하고 반복된 소비 행위 뒤에 어떤 불안이 숨겨져 있듯, 반복과 복제의 테마는 앤디 워홀이 가졌던, 삶과 죽음에 대한 양면성을 드러내는 것이기도 했다.



NYC - MoMA: Andy Warhol's Campbell's Soup Cans
NYC - MoMA: Andy Warhol's Campbell's Soup Cans by wallyg 저작자 표시비영리변경 금지




현대적 바니타스(Vanitas)와 초상화


마를린 몬로(Marilyn Monroe)가 죽은 며칠 후, 앤디 워홀은 몬로가 나온 광고 사진 이미지로 작업을 하기 시작한다. “나는 몬로와 엘리자베스 테일러를 우리 시대의 섹스 심벌로 재현하려 하지 않았다. 나는 그들을 평범한 인물로 보았으며, 몬로 그림은, 죽은 사람을 다른 방식으로 다룬 죽음 시리즈의 일부다.”, “내가 하고 있는 모든 것들은 ‘죽음’일 수밖에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고 이야기하는 앤디 워홀.


후대의 미술사가들은 앤디 워홀을 팝아티스트가 아닌 20세기 최고의 초상화가로 기억할 지도 모른다. 초상화가 순수 미술의 부수적인 장르로 치부되던 20세기 후반, 그는 일련의 초상화를 선보였고, 한결같이 17세기 바로크의 바니타스 정물화처럼, 긴장된 화려함 속에 죽음을 향한 숙명 같은 것을 심어놓는다. 그래서 그의 최고 걸작은 「금빛 마를린 몬로(Gold Marilyn Monroe)」일지도 모른다.




Gold Marilyn Monroe
Gold Marilyn Monroe by IslesPunkFan 저작자 표시비영리





현대 예술의 이콘(Ikon), 앤디 워홀


내가 살아있다는 것, 내가 지금 여기에 있다는 것을, 나에게 알려줄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 앤디 워홀은 그 자신의 이미지를 스스로 창조해 내며, 대중의 시선 속에 자기 자신을 위치시킨다. 사각의 프레임 안에 언제나 앤디 워홀 자신이 있다. 그가 생전 마지막으로 만들었던 작품들이 자화상 연작이라는 점은 흥미롭다. 대중 스타들이 영원한 현재를 살 듯, 앤디 워홀도 스타로서의 그런 삶을, 끊임없이 대중 앞에 꾸며진 자신의 모습을 드러내며, 자신의 모습을 담은 작품들을 스스로 만들었다.


하지만 그 속엔 언제나 죽음이 있다. 포장되고 꾸며진 자신 위로 포장되기 전의, 꾸며지기 전의 자신의, 진짜 나의 죽음. 그래서 워홀에게 과거란 없는 것이며, 오직 꾸며진 현재만 의미를 가질 뿐이었다. 「금빛 마를린 몬로」는 비잔틴 양식의 이콘화(Ikon)를 떠올리게 하지만, 금빛 배경의 중앙에는 세속적이면서, 환하게 웃고 있는, 이미 죽은 몬로가 있듯.





이 글은 북릿에 기고한 글입니다


http://booklet-app.tistory.com/notice/36 







Comment +0



 

1959년, 무명의 젊은 미술가 로버트 라우셴버그Robert Rauschenberg는 윌렘 데 쿠닝Willem de Kooning에게 어떤 미술 프로젝트에 참여해달라고 요청했다. 당시 데 쿠닝은 라우셴버그보다 나이가 많고 훨씬 유명했을 뿐 아니라 작품값도 상당히 비쌌지만 그 프로젝트에 기꺼이 동참했다. 그는 이를 위해 자신이 중요하게 여겼던 그림 한 점을 라우셴버그에게 주었다. 크레용과 유성연필, 잉크, 흑연 등으로 그려진 그림이었다. 라우셴버그는 그 그림을 가지고 한 달을 씨름했다. 그림을 완전히 지운 것이다. 이어서 그는 그 지운 그림을 금박 액자에 끼우고, “지워진 데 쿠닝의 그림, 1953년(Erased de Kooning Drawing, 1953)“이라고 제목과 날짜를 직접 써 넣었다. 라우셴버그는 데 쿠닝의 그림을 지웠을 뿐 아니라, 그 ‘지움’을 자기 작품으로 전시도 했다. 라우셴버그는 작품을 창조한 것인가, 파괴한 것인가? 아니면 둘 다 인가?
- ‘예술이 궁금하다’, 마거릿 P. 배틴 외 지음, 윤자정 옮김(현실문화연구, 2004년), 59쪽에서 인용


Erased de Kooning drawing, 1953
Robert Rauschenberg
출처: http://secretforts.blogspot.com/2011/02/erased-de-kooning-drawing-1953.html 


일종의 해프닝Happening이다. 창작(연출) 과정이 예술이 되고 그 과정의 결과물도 예술이 된다. 드 쿠닝도 예술 창작자이고 라우셴버그도 예술 창작자가 된다. 하지만 그 과정의 기획자이자 완결자는 라우셴버그임으로 그가 작품의 서명자가 된 셈이겠지. 이 작품은 20세기 후반 미술 현대 미술의 흥미로운 한 장면을 연출했다. 또한 ‘예술 작품이란 어떤 과정을 통해 창조되는가?’라는 꽤나 미학적으로 유쾌한 질문을 던졌다.

오늘 서가에서 꺼내, 다시 읽고 있는 <<예술이 궁금하다>> 1장 ‘예술과 예술작품’의 한 사례로 등장한 로버트 라우셴버그의  “지워진 데 쿠닝의 그림, 1953년(Erased de Kooning Drawing, 1953)“은 현대 예술가들이 가지고 있는 예술 작품, 또는 예술 작품 창작 과정에 대한 태도를 엿볼 수 있게 해준다. 여기에서 조금 더 나가면 개념 미술Conceptual Art과 만나게 된다.

라우셴버그의 작품 이미지를 찾다가, 마이크 비들로(Mike Bidlo)가 최근에 발표한 'Not Robert Rauschenberg: Erased de Kooning Drawing, 2005'을 보며 웃었다. 마이크 비들로는 'Not Warhol(Brillo Boxes, 1964)', 1991이라는 작품으로 국내에 알려져 있는데(엔디 워홀의 작품을 현대적으로 따라하기를 해서 유명해진 것이지만), 이번에는 라우셴버그의 해프닝을 따라했다(이것도 현대 예술가들의 무시하지 못할 전략 중의 하나다).


Mike Bidlo Not Robert Rauschenberg: Erased de Kooning Drawing, 2005. Traces of graphite on paper, mat and label in gold leaf frame. 22-3/8 x 20-7/8 inches. Courtesy of Francis M. Naumann Fine Art, New York.
출처: http://www.artlurker.com/2009/01/objects-of-value-at-miami-art-museum/ 

라우셴버그의 인터뷰 - '지워진 드 쿠닝의 그림'에 대하여





Comment +0


MY WAY - 장 미셸 오토니엘Jean-Michel Othoniel

플라토(로댕갤러리), 2011.09.08 - 11.27  




40대 후반의 프랑스 작가를 만나러 가는 길은 조금 낯설다. 삼성문화재단의 지원을 받는 로댕갤러리가 문을 닫자, 다수의 미술 애호가들은 실망했다. 이는 종종 순수미술이 상업 권력과 나란히 갈 수 밖에 없는 이유이기도 하다. 하지만 이 역설은 어쩔 수 없는 일일까? 

몇 해 전,  '행복한 눈물'이라는 작품과 연관된 삼성 그룹의 비자금 의혹으로 인해 로댕갤러리는 휴관에 들어가게 되고, 리움미술관도 한동안 기획전시를 열지 않게 되자, 한국에서 보기 드문 세계적인 작가의 대형 전시를 열 수 있는 기획력과 재력을 갖춘 두 전시 공간의 휴관을 못내 아쉬워한 것이다.


그리고 몇 년이 지나, 리움미술관은 작년부터 기획전시를 하기 시작했고 로댕갤러리는 올해 플라토(Plateau)이라는 새로운 이름으로 새로 문을 열었다. 현재 하고 있는 전시는 장 미셸 오토니엘(Jean-Michel Othoniel)의 'MY WAY'라는 회고전이다. (중간점검전(?)라고 해야 할 정도로 장 미셸 오토니엘은 젊고 급작스럽게 유명해진 케이스라, 회고전이라는 단어가 다소 어색한 것도 사실이지만.)

오는 11월 27일까지 계속되는 이번 전시는 파리 퐁피두 이후 두 번째로 열리는 전시이며, 이 전시가 끝나면 일본, 미국 뉴욕으로 이어지게 된다. 작가는 이번 전시를 준비하면서 스스로 자신의 작품 세계를 한 번 되돌아 볼 수 있었을 것이고, 우리는 장 미셸 오토니엘의 작품 세계 전반을 한 눈에 볼 수 있다는 점에서, 작가에게나 관람객에게나 무척 소중한 기회가 될 것이다.


"내 작업은 유혹과 혐오의 개념을 가지고 유희한다. 그것이 바로 내 작업 세계에 들어오기는 쉽지만, 나의 강박관념의 실체를 마주했을 때 쉽게 벗어나지 못하는 이유다." - 전시 도록에서 인용


작가는 동성애자이다. 성적 정체성, 타인과 나의 구별, 사랑하는 이의 죽음으로 시작된 그의 작품 세계는 모호한 성적 세계를 표현하는 것으로 시작된다. 이 점에서 (동)성애적인 문제를 현대 예술가들은 어떻게 표현하고 해석하는가를 엿볼 수 있는 작품들이 전시되고 있다. (성Sex는 현대 예술가에 무척 중요한 주제/소재이고 이를 거치지 않고 현대 미술을 이야기하기란 어렵다. 그래서 아이들과 함께 간 현대미술 전시에서 종종 낯 뜨거운 작품을 만날 수도 있다.)

"나는 1980년대에 미국에 자주 여행했기 때문에 성정치학 문제에 관심을 가지는 예술가 세대의 출현을 목격할 수 있었다. 나의 작품은 이러한 주제를 논의하는데 있어 좀 더 관능적이고 덜 분명하며, 좀 더 에로틱한 대신 덜 비판적인, 그리고 좀 더 개인적인 방식으로 접근했다. 그것은 좀 더 모호하고 추상적이며, 분열적이어서 때로는 폭력적이기도 한 프랑스적 방식으로 읽혀질 수 있다. 자웅동체는 전혀 다른 존재의 상징이며 특정한 성별에 의해 드러나지 않는다. 유두, 구멍, 입술 혹은 눈과 같이 양면성을 지닌 신체의 모든 부분들이 나의 관심을 끌었다". - 전시 도록에서 인용





하지만 우리의 눈을 끌어당기는 것은 2000년대 이후 작업한 작품들이다. 파리 루브르박물관 역 입구에 있는 '야행자들을 위한 키오스크'를 시작으로 작가는 유리 구슬을 통한 다양한 작품을 선보이기 시작한다. 그는 유리로 만들어진 조형물(조각)의 투명성/불투명성/반영성을 흥미롭게 조화시키면서, 보는 이로 하여금 어린 시절의 순수함을 떠올리게 한다든지, 아무런 목적성이 보이지 않는 유리 구슬들의 조형적 아름다움을 감상하게 한다든지, 또는 겹쳐져 올라가는 유리구슬들이 가지는 주술적 의미를 찾게 하기도 한다. (유리 구슬 목걸이는 목에 걸렸을 때와 달리 세워져 있거나 나무에 걸려 있거나 매듭이 지어져 있을 때의 느낌은 확연히 다르다는 점을 작가는 이용한다)





"우리는 많은 규범들이 무너져 내리는, 진실로 비극적인 순간을 살아가고 있다. 예술가로서 나는 세상에 다시 마법을 걸고 싶다. 그렇다고 해서 내가 가상의 예술가는 아니다. 나의 세계와 조각은 분명 실재하지만, 여러분이 나의 작품을 바라봤을 때 또 다른 현실을 마주하게 되길 바라는 것이다. 나는 자연의 아름다움, 재료의 경이로움 혹은 감정의 진실함과 같은 매우 근본적인 것들을 신뢰한다. 이것은 순진한 시각이 아니라 생존자의 통찰력이다." - 전시도록에서 인용함



하지만 장 미셸 오토니엘의 작품들 앞에서 심각한 표정을 지을 필요는 없다. 그는 심각해지기 위해 작품을 만들지 않았으며, 어떤 예술적이거나 현실적인 실천을 강용하지도 않으며, 자신의 성적 정체성을 이해해 달라고 하지도 않는다.  이 세상의 아름다움, 경이로움 속에서 우리는 만나고 헤어지며, 서로의 소중함을 깨달으면 된다는 것이다.



전시는 전반적으로 흥미롭고 아름답다. 연인끼리 가기도 좋고 가족끼리 가기도 나쁘지 않을 것이다. 단지 초반이 성적인 메타포가 담긴 작품들 앞에선 조금 난감해질 수도 있지만. 그리고 갤러리 안 오귀스트 로댕의 작품은 언제나 봐도 대단하다.



- 입장료는 5,000원(성인 기준)이며, 전시 설명 시간에 맞추어 가면 더욱 좋을 것이다.
- 홈페이지: www.plateau.or.kr 




올댓 주말미술여행 출시
미술 전시 정보/리뷰, 미술 서적 및 미술 관련 칼럼 등으로 이루어진 '올댓 주말미술여행'이라는 어플을 출시하였습니다. 이 어플은 SKT의 지원을 받아 TNM에서 제작한 콘텐츠 어플입니다. 매주 업데이트를 할 예정으로 있으며, 금요일이나 토요일, 이 어플로 주말에 가볼 만한 전시 정보를 확인하실 수 있도록 할 것입니다. 많은 이용 바라며, 주위에도 많이 추천해주세요~.

QR코드: 안드로이드마켓에서 다운받아 설치하기


QR코드: T스토어에서 다운받아 설치하기




Comment +0




이 지구 상에는 얼마나 많은 예술가들과 예술 작품들이 있을까? … 그런 생각을 하다 보면, 아찔해진다. 내가 읽었고 보았던 작품은 극히 일부였고, 그 일부만으로도 내 삶은 변화되었고 내 마음은 감동받았으니, 나는 내가 변할 수 있고 감동받을 수 있는 무수한 기회를 알고 있으면서도 그 기회를 활용하지 못하니 말이다.

서가에 쌓여있던 종이 뭉치들을 정리하다가 2008년에 있었던 쥴리앙 슈나벨(Julian Schnabel) 아시아 순회전 전시 소개 프린트물을 발견했다. 바스키아의 친구로 더 유명한 슈나벨은 1980년대 미국 New Painting의 대표 작가였다. 지금은 영화감독으로 더 유명해졌지만. (역시 영화는 대중적인 매체다. 네이버에서 검색해보니, 감독 슈나벨로 나오는 것이 더 많구나)

갤러리 현대에서 작성한 전시 소개 글을 옮기면서, 줄리앙 슈나벨의 작품들에 대해 되새겨 본다.

1980년대 미국 뉴 페인팅(New Painting)의 대표주자 줄리앙 슈나벨(Julian Schnabel)의 최초의 아시아 순회 회고전이 열린다. 이번 전시는 9월 베이징(Beijing World Art Museum, 9월 12일 ~ 10월 19일)을 시작으로 홍콩(10 Chancery Lane Gallery, 11월 6일 ~ 11월 27일), 상하이(Shanghai Zendai Museum of Modern Art, 2008년 1월 19일 ~ 2월 18일)를 거쳐 3월 서울(Gallery HYUNDAI, 3월 19일 ~ 4월 6일)에서 전시된다. 이번 전시는 1980년대 전세계인의 이목을 주목시켰던 접시 회화(Plate Painting), 블랙페인팅(Black Painting)을 비롯하여 현재까지 왕성한 활동을 펼치고 있는 그의 대표작 30여 점이 소개된다.

슈나벨은 현재 55세로, 1980년대 미국 뉴 페인팅을 선도하였다. 그는 캔버스 대신 도자기가 붙어 있는 표면, 동물가죽, 벨벳, 타르를 칠한 천 등의 특별한 질감을 가진 바탕에 화려한 색채의 공격적이고 과감한 스타일로 명성을 얻었다. 그의 대형 사이즈의 작품과 매체에 대한 주목이 그를 동시대 미술 시장에서 확고히 자리를 잡게 하였다. 1979년 뉴욕 최고의 화랑 메리 분 갤러리(Mary Boone Gallery)에서의 개인전을 시작으로 국제 미술계에 발을 내딛은 슈나벨의 작품은 전세계 미술관과 주요 컬렉터들에게 소장되어 있다.

슈나벨은 화가로서뿐만 아니라 영화 감독으로서도 명성을 얻었다. 그는 동료 작가 바스키아의 인생을 그린 <바스키아Basquiat>를 연출해 주목을 받았으며, 최근 2007 칸느 영화제에서 <잠수 종과 나비 The Diving Bell and the Butterfly>로 감독상을 수상했다.

이번 아시아 순회전은 서울의 갤러리 현대와 뉴욕의 아트 컨설팅업체인 포춘 쿠기 프로젝트(Fortune Cookie Project)가 공동 기획했으며 슈나벨 작가 스튜디오의 협조로 모든 전시되는 작품은 작가 컬렉션이다.


슈나벨의 작품은 아래 페이지에서 볼 수 있다.

- 갤러리 현대의 쥴리앙 슈나벨 전시 관련 웹페이지
http://www.galleryhyundai.com/kor/exhibitions/introduction.asp?SiteNum=1&ArtistsPK=&ExhibitionsPK=21&iExhibitKind=P 

- 쥴리앙 슈나벨 웹사이트 내 Painting 작품 페이지
http://www.julianschnabel.com/category/paintings 





Comment +0



조엘 킹 Joel King

Intervals
2011. 5. 4 - 17
Grimson Gallery




번잡스러운 인사동 길을 지나가다가 수도약국 골목으로 조금 올라가면 그림손 갤러리가 있습니다. 신기하게도 이 골목길에는 사람들이 지나다니지 않습니다.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이 파고다 공원에서부터 안국동 방향으로만 갈 뿐입니다.

하지만 잠시 알 수 없는 골목길로 한 번 걸어 들어가 보면, 작고 아담한 까페라든가, 도심 한 가운데의 고요한 갤러리를 만날 수 있는 곳이 바로 인사동입니다. 아주 잠시, 짧은 거리의 모험으로 우리가 알지 못하는 도심의 근사한 침묵과 만날 수 있습니다. 그런 침묵처럼 조엘 킹의 작품은 우리 앞에 나타났습니다.

단색조의 회화를 ‘모노크롬(Monochrome)’이라고 합니다. 이 회화 양식은 1960년대 미국에서 등장했고, 등장과 함께 많은 비평가들의 지지와 함께 전 세계적인 트렌드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아직도 많은 예술가들이 단색 회화에 심취해 각기 다른 작품들을 창조하고 있습니다.

아마 사람들은 사각의 캔버스에 하나의 색으로만 칠해놓은 작품들을 각기 다른 작가들이 그리고 있는지 이해하기 어려울 지도 모르겠네요. 실은 그냥 하나의 색들이거든요. 심지어 이건 나도 그릴 수 있겠다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그릴 수 있을까요?

이 글을 보시는 분이시라면, 이제부터 미술관이나 갤러리에 가서 단색 회화를 보면, 정말 한 가지 색으로만 구성했는지, 유화물감으로만 그렸는지, 캔버스에다 그렸는지, 하나하나 따져보시면 흥미로운 경험을 하게 될 것입니다.

이렇게 보면 똑같이 흰색 작품인데, 가까이서 자세히 보면 물감으로 구할 수 있는 흰 색이 아니고, 캔버스에 그린 것도 아니며, 흰색 물감을 위주로 다른 색을 섞은 것 같기도 하고, 두터운 느낌을 주기 위해 다른 물질을 섞은 것 같기도 하다는 생각을 하게 될 것입니다. (이런 생각이 들 때, 옆에 있는 작가나 큐레이터에게 이 색을 어떻게 만들었냐고 물어보세요. 그러면 아주 흥미로운 대답을 듣게 될 지도 모릅니다.)

조엘 킹의 작품도 그렇습니다. 그의 작품 밑에 그는 ‘mixed media on wood’라고 적었습니다. 나무 판 위에 여러 매체를 사용한 것입니다. 마치 하이델베르그의 ‘불확정성의 원리’를 마주하는 느낌입니다. 하이델베르그는 자연과학에서 이야기하는 법칙이라는 것은 인공적인 실험 조건이나 수학적 가정 속에서만 법칙이지, 실제 자연 속에서, 이 세계에서는 이루어질 수 없는 법칙이라고 말합니다. 즉 실제로는 실험 조건이 이 자연 속에서 구성되기는 불가능하기에 자연 법칙은 불확정된 것이라고 합니다.


이는 색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완전하게 흰 색이란 없습니다. 그렇다면 완전하게 흰 색을 찾아보자는 시도가 있겠죠. 그 다음에는 색 자체에 대한 탐구와 모험이 이어집니다. 색조의 회화는 이렇게 시작되었습니다. 조엘 킹의 작품들도 이런 미술사적 위치에 서 있는 것입니다.

약간 어려운 부분으로 들어갔네요. 하지만 작품을 보는 데 이런 생각까지 하게 된다면 머리가 아플 것입니다. 이것은 좋은 감상자의 태도가 아닙니다. 미술 작품은 느끼고 감동받는 것이지, 분석하고 연구하는 것은 그 다음의 일입니다.

여하튼 조엘 킹은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내 그림은 색칠을 한 평면 여러 개를 연작으로 엮거나 하나의 화폭에 여러 차례 덧칠을 해서 색을 포개는 과정을 통해 만들어진다. 그 결과 책으로 채워진 캔버스는 하나의 이미지를 보여주지만, 그 안에는 미묘하고, 서로 연관돼 있고 또 조응하며 겹겹이 쌓여진 의미와 해석들이 자연스레 녹아 있게 된다.”

작가의 말이 어렵지만, 그의 의도는 이해될 것입니다.

전시장은 조용하고 감상하게 좋습니다. 혹시 오늘 인사동에 나갈 일이 있다면, 그림손 갤러리에 가서 전시를 보는 것은 어떨까요? 그리고 색이 주는 느낌이나 분위기를 한 번 경험해보세요.


* 이미지를 구하지 못해 도록의 일부를 옮깁니다.


Comment +0



전시를 보러 가지 못한 지 2주가 지났다. 이쯤 되면 몸이 근질근질해진다. 바쁜 회사 생활 속에서 그나마 내가 숨을 쉬고 있구나 하고 느낄 때가 근사한 미술 작품을 만날 때이다. 오늘 아침 출근을 해서 월 회의를 끝내고 잠시 쉬는 동안 페이스북을 훑어보고 있을 때였다. 뉴욕 메트로폴리탄박물관 페이스북 페이지에 소장품 소개 정보가 업데이트되어 있었다. 그 작품이 바로 아래의 작품이다.

The Great Statue of Amida Buddha at Kamakura, Known as the Daibutsu, from the Priest's Garden


1886년 일본 여행에서 돌아온 뒤, 존 라 파지(John La Farge)가 1887년 완성한 수채화다. 푸른 잎들과 대비되어 드러나는 부처의 모습이 인상적인 작품이다. 부처 앞을 가리고 있는 구조물도 꽤 흥미롭다. 어수선한 분위기 속에서 현장감이랄까, 생생함이랄까.

일본에 있는 저 불상의 실제 모습이 궁금해져, 한 번 찾아보았다.

http://www.panoramio.com/photo/14115988


백 년 수채화와 지금 불상의 모습은 별반 달라지 않았다.

존 라 파지(John La Farge, 1835 - 1910)은 19세기 미국 화가로, 당시 미국에서는 보기 드문 화풍을 선보였다. 유화, 수채화, 잡지나 책의 일러스트, 벽화, 스태인드 글라스 제작자 등을 활동하였으며, 심지어 예술과 여행에 대한 책까지 쓴 다재다능한 예술가로 알려져 있다. 세계적인 명성을 가지고 있지는 않지만, 미국 근현대 미술사에 있어 뚜렷한 흔적을 남긴 한 사람으로 기억되고 있다.

그의 또 다른 작품을 보자.


Portrait of Faase, the Taupo of the Fagaloa Bay, Samoa
1881

위의 작품에서도 느껴지듯, 그의 색채는 순박하다. 얇게 깔리는 터치는 부드럽고 순수하며, 보는 이로 하여금 편안한 위안이 된다. 부처가 그랬고, 사모아 제도의 원주민이 또한 그렇다. 온라인을 통해서도 가끔 좋은 작품을 만나기도 한다. 그런데, 실제로 보면 어떤 기분이 들까. 미술 작품은 무조건 실제로 봐야 하는 것인데 말이다.  ('순박하다'는 단어를 사용했는데, 시간이 지날 수록 이 단어 말고 다른 단어가 필요할 것같은데... 잘 떠오르지 않는다) 
 

Comment +2

  • 지나가는사람 2011.06.01 04:23 신고

    옛날에 티비로 <마리온 이야기>라는 다큐를 봤어요 마리온은 주인공 육지거북이의 이름이에요 섬에 혼자 살고요 슬픈사연을 가진앤데.. 걔가 걸음마하면서 풀 뜯어먹고있는 장면이 제 마음에 박혔어요 ㅋㅋ 제 기억속 그 화면의 분위기가 마치 아랫그림이랑 비슷해요 ㅎ_ㅎ...


김잔디, 윤상윤, 조문기
2011. 1. 20 - 2. 17
GYM Project (청담동 네이처포엠 빌딩)



별 생각 없이 들린 작은 갤러리에서 눈이 환해지는 작품들을 만날 때만큼 기분 좋아지는 일도 없다. 네이처포엠이 있는 작은 갤러리, GYM Project는 젊은 작가들을 소개하기 위한 갤러리로 그 진지한 활동을 이어나가고 있다.

이번에 내가 본 전시는 김잔디, 윤상윤, 조문기의 작품을 전시하고 있었다. 전시설명문에 담긴 작가 소개는 아래와 같다.

- 김잔디는 장소에 관한 특정한 경험에 자신의 상상을 더하여 그 장소를 황량하고 외로운 분위기를 만들어낸다. 이 ‘장소’는 사회적 경험에서 나온 작가 개인의 기억이다. 이처럼 작가가 갖는 장소에 대한 애착은 장소의 근원적인 성격에 대한 탐구로 진행되었고, ‘집’이라는 장소로 귀결되었다.

- 윤상윤의 작품은 시각적으로 인지할 수 있는 실제의 공간과 무의식 속에서 채워지는 상상의 공간이 혼재되어 있다. 그의 작품에 존재하는 많은 사람들은 함께 있지만, ‘혼자’ 있는 것처럼 보인다.

- 조문기는 사회적 위치와 시선으로 억눌려 있는 인간의 욕망을 유머러스하게 표출한다. 그에게 있어서 ‘내숭떨지 않는 솔직함’은 작품을 생산해낼 수 있는 주된 원동력이다.



김잔디, PS-8, 캔버스에 유채, 36×26cm, 2008

김잔디, 학교, 리넨에 유채, 20×40cm, 2009


"집에 대한 탐구는 결국 노스탤지어와 결부된다. 최초의 집, 자궁의 메타포, 귀환에의 욕망과 그 원천적 불가능성은 런던작업에서의 주된 관심사였다."  - 2009년 전시에서 작가의 말.


그러고 보면, 김잔디의 말대로, 공간이란 향수(노스탤지어)이며, 추억이고 기억이며 흘러간 시간들을 향한 입구와도 같다. 그리고 김잔디의 작품은 작가의 추억, 혹은 내면에의 입구이며, 보는 이로 하여금 잊혀져 가는 장소/공간에 대한 환기를 불러일으킨다. 현대 회화가 심리적인 면을 가지는 것도 여기에 있을 것이다.


윤상윤, Protem 2, 캔버스에 유채, 135×160cm, 2009


윤상윤의 작품은 풍부한 색채와 율동감으로 보는 이의 시선을 잡아끈다. 하지만 윤상윤의 작품은 쓸쓸하다. 많은 사람들이 등장하지만, 각각의 인물들은 각기 다른 세계를 가지고 서로 만나지 않는다. 같은 공간이지만, 서로 이질적인 영혼을 가지고 있듯이. 어쩌면 작품 바닥을 채우는 표면은 서로 만나기 위한 몸짓일 지도 모른다.


조문기, 전구갈기, 116.8 * 80 cm, Oil on canvas. 2010



조문기, 돌림병, 캔버스에 아크릴채색, 60.6×72.7cm, 2010


조문기의 작품은 유머러스하다. 하지만 그 유머는 우리가 만나는 일상 속에서 약간만 삐딱하게 바라보면 나오는 풍경이기도 하다. 조문기의 작품 속에서는 우리 모습이 숨겨져 있고, 그 속에서 우리들의 기묘하고 낯설음과 마주하게 된다. 


전시는 이미 끝났지만, 이 세 명의 작가를 기억해두고 유심히 살펴보는 것은 의미 있는 일이 될 것이다.




* 작품 이미지는 neolook.com 및 기타 인터넷 사이트에서 가져온 것입니다. 작품 이미지에 대한 저작권은 작가에게 있으며, 본 글은 작가와 작품을 소개하기 위한 것입니다.


Comment +0


미술의 빅뱅 - 10점
이진숙 지음/민음사


미술 작품에 대해 이야기하고 글을 쓸 때는 언제나 조심스러워야 한다. 그런데 조심스러워만 한다면 제대로 이야기를 하지 못할 것이고 정직한 글도 쓰지 못할 것이다. 여기에 글쓰기의 딜레마가 있다. 어쩌면 현대 미술 작품이나 현대 작가에 대한 글들이 대부분 어렵게 읽히는 것도 이 딜레마 때문일까.



이진숙의 ‘미술의 빅뱅’(민음사, 2010)은 이 점에서 무척 좋은 책에 속한다. 저자는 자신을 내세우지 않고 작가를 드러내기 위해 노력한다. 작가와 작품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는 것. 누구나 하고 싶어 하지만, 뜻대로 되지 않는, 꽤나 어려운 접근 방식. 그래서 이 책은 전문적인 미술 비평서도, 그렇다고 대중의 눈높이만 무작정 고려한 미술에세이집도 아니다. 저자는 자신의 목소리를 작가의 마음과 작품가 어우러지게 하기 위해 노력하며, 이것이 내가 이 책을 권하는 가장 큰 이유다. 


저자는 작가의 마음을 이해하고 작품 의도를 파악하기 위해, 이 책에 소개한 작가들과 인터뷰를 하였으며 자료를 모았고 작품들을 보고 읽었다. 저자는 이렇게 적는다.

예술이란 사회의 가장 예민한 감각 기관이다. 평범한 사람들은 느끼지 못하는 미묘한 변화를 예술가들은 특유의 감수성으로 재빨리 알아차려서 발설한다. 그래서 나는 예술가들을 ‘세상의 비밀과 통음하는 사람들’이라고 부른다. 예술가들은 확실히 새로운 변화를 가장 먼저 감지할 뿐만 아니라 새로운 변화를 능동적으로 창조하고 긍정한다.


그리고 그녀가 선택한 작가는 아래와 같으며, 그 작가들의 작품들이 원색 도판으로 실렸다.

1. 이승애, 슬픔 항전기
2. 김아타, 인달라 속으로 사라진 세상
3. 김혜련, 정물에서 풍경으로
4. 이동기, 팝아트에 대한 팝아트
5. 서도호, 카르마 저글러의 옮겨 다니는 집
6. 김정욱, 상처의 역사
7. 정연두, 핸드메이드 라이프
8. 홍경택, 연옥에 울려 퍼지는 훵케스트라
9. 권오상, 조각에 대한 365장의 진술서
10. 김남표, 촉감으로 그리는 세상
11. 남경민, 그림의, 그림에 의한, 그림을 위한 그림
12. 오형근, 미디어 덮어쓰기와 뻥사진의 진실
13. 최우람, 일렉트릭 애니미즘
14. 정수진, 추상화되기 퍼포먼스
15. 박민준, 세상의 비밀을 보는 예술가
16. 천성명, 줄무늬 씨의 끝나지 않는 연극



이 책은 한국의 젊은 작가들이 어떤 고민을, 어떤 작품을 제작하고 있는가를 한 눈에 볼 수 있도록 한다. 일독을 권한다.



tip. 책읽기 가이드

미술 초심자로 읽을 수 있을 정도로 평이하게 서술된 책이라고 여기지만, 미술에 대한 관심과 미술에 대한 독서는 별개다. 읽고 어렵다고 여겨진다면, 먼저 도판부터 감상해보도록 하자. 그리고 소개된 작가들의 이름을 기억해두자. 이 작가들의 작품을 실제로 보고 이 책을 다시 꺼내 읽으면 이 책이 새롭게 읽히게 될 것이다.





Comment +0

현대미술 - 8점
이자벨 드 메종 루주 지음, 최애리 옮김/웅진지식하우스(웅진닷컴)



현대미술
이자벨 드 메종 루주(지음), 최애리(옮김), 웅진지식하우스




현대미술에 대해서는 온갖 논의가 있어왔고 개중에는 상반된 것도 많다. 현대미술은 이렇다, 현대미술은 저렇다 하는 식의 주장은 끝이 없다. 예컨대 현대미술은 이해할 수 없다, 현대미술은 볼 것이 없다, 현대미술은 유파가 하도 많아 정신이 없다, 현대미술은 모든 사람을 위한 것이다, 현대미술은 엘리트의 전유물이다, 현대미술은 참여적이다, 현대미술은 정치적이다, 현대미술은 의미를 배제한다, 현대미술은 해괴하다, 현대미술은 공격적이다, 현대미술은 추하다, 현대미술은 아름답다, 현대미술은 기쁨을 준다, 현대미술은 거슬린다, 현대미술은 부당한 보조금을 받는다, 현대미술은 쓸데없다, 현대미술은 사색적이다, 현대미술은 영향력 있는 화상(畵商)들과 수집가들의 것이다. 현대미술은 일반 대중과의 접촉점을 상실했다, 현대미술은 관람자의 적극적 참여를 요구한다. ... .... 이런 나열은 얼마든지 더 계속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 모든 주장이 서로 모순되면서도 나름대로 일리가 있다. 다시 말해 현대미술은 어느 한 가지 스타일, 어느 한 가지 명칭으로 요약하기란 불가능하다.
본질상 현대미술, 즉 동시대미술은 시대와 함께 변해가므로, 규정된 상태로 머물 수 없으며 항시 유동적이고 현대진행형이다. (11쪽에서 12쪽)



이 책은 현대미술에 대한 해설서이다. 그런데 이 책을 일반 독자에게 권하기엔 다소 무리가 있다. 차라리 과천 국립현대미술관의 해외미술 상설전이나 지금 시립미술관에서 전시되고 있는 '프랑스 국립 퐁피두센터 특별전' 나아 보인다. 이런 전시를 보았다고 하더라도 그래도, 이 책은 무리다.

많은 사람들이 다이제스트판을 선호하지만, 다이제스트판이 좋은 것만도 아니다. 가령 현대미술에 대한 이 책은 요약, 정리라는 측면에서 보자면, 탁월한 책이다. 그리고 딱히 리뷰할 필요도 없다. 요약, 정리된 책이니, 그저 목차만 알려줘도 될 판이다. 솔직히 말하자면, 이런 종류의 요약된 책들은 일반 독자를 위하는 척 하면서, 은근히 일반 독자를 무시하는 책이다. 아마 이 책에 등장하는 대부분의 예술가들을 난생 처음 들을 것이며, 이들의 작품이 무엇인지도 잘 모를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일종의 주문처럼 책은 읽힐 것이고, '역시 현대 미술은 어렵군'이라고 생각할 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나는 이 책을 읽으면서 도리어 이 책을 같이 읽으면서 현대미술을 공부하기 위한 텍스트로는 매우 좋을 것이라는 생각을 했다. 즉 이 책을 기본 텍스트로 하고 이 책에 인용된 예술가의 이름을 알고 작품들만 봐도 현대 미술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아주 느린 독서가 되겠지만, 현대미술가이드북으로는 손색없다.

챕터 하나하나마다 현대 미술에서 이슈가 되는 주장이 잘 요약 정리되어 있다. 하지만 일반 독자에게 실질적인 도움은 안 될 듯 싶다. 일반 독자들이 이런 종류의 책을 읽는 이유는 미술관에 가서 현대 미술 작품을 보면서 좀 제대로 이해하고 싶은 욕구가 더 크기 때문인데, 막상 이 책이 딱히 큰 도움이 될 것 같지는 않다.

현대 미술은 제대로 이해하려면 현대 미술에 대한 책을 읽는 것보다 미술관에 발 닳도록 다니는 길 밖에 없다. 그리고 동시대 양질의 세계 문학, 현대 음악이 도리어 도움이 될 것이다.

뜻맞는 사람들끼리 이 책을 천천히 같이 읽어 볼까. 하긴 내 바쁜 게으름으로 인해 잘 될련지 모르겠다.

Comment +0

보르헤스 씨의 정원

일러스트: 메테오 페리코니 보르헤스 씨의 정원 부에노스 아이레스, 레꼴레타 인근의 어느 집에는 이중의 특권을 가진 창문이 있다. 그 창문에서는 한 눈에 하늘이 들어오고, 이웃한.....

보이지 않는 용, 데이브 하키

보이지 않는 용 The Invisible Dragon: Essays on Beauty 데이브 하키(지음), 박대정(옮김), 마음산책, 2011년 몇 번 읽다가 만 책이다. 구.....

2017년, 책 읽기의 기억

2017년, 책 읽기의 기억 1. 책 읽는 병든, 그러나 고귀한 우리들 책을 읽는 여인(안지오의 소녀) 이탈리아 안지오Anzio에서 나온 그리스 조각 복제본(대리석)으로 기원.....

보들레르의 수첩, 보들레르

보들레르의 수첩 샤를 보들레르(지음), 이건수(옮김), 문학과지성사, 2011년 1846년 산문과 1863년 산문이 함께 실려있고 죽은 후 나온 수첩까지 실린 이 책은 기억해.....

메시Messy, 팀 하포드

메시Messy - 혼돈에서 탄생하는 극적인 결과 팀 하포드(지음), 윤영삼(옮김), 위즈덤하우스 이 책은 확실히 기존 통념을 깨뜨린다. Messy라는 제목 그대로, 무질서와 혼.....

단테:세속을 노래한 시인, 에리히 아우어바흐

단테 - 세속을 노래한 시인 에리히 아우어바흐(Erich Auerbach) 지음, 이종인 옮김, 연암서가 좋은 책이다. 간결한 문장으로 핵심을 찌른다. 이종인 선생의 번역도 .....

칠드런 액트, 이언 매큐언

칠드런 액트 The Children Act 이언 매큐언 Iwan McEwan(지음), 민은영(옮김), 한겨레출판 살만 루시디(Salman Rushdie)가 추천한 이언 매큐언.....

맑스주의와 형식, 프레드릭 제임슨

변증법적 문학이론의 전개 (개정판: 맑스주의와 형식, 원제: Marxism and Form) 프레드릭 제임슨 Fredric Jameson (지음), 여홍상, 김영희(옮김), .....

까르띠에 현대미술재단 소장품 기획전
까르띠에 현대미술재단 소장품 기획전
까르띠에 현대미술재단 소장품 기획전
까르띠에 현대미술재단 소장품 기획전
일요일 오후 사무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