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 227

어떤 불투명함

뿌연 하늘 사이로 비가 내렸다, 한겨울을 시샘하듯. 저 멀리 솟은 빌딩의 불빛이나 지하철에서 나와 나에게 뛰어오는 연인을 분간하기 어려운 안개가 걷혔다. 세상에는 두 가지 종류의 불투명함이 있다. 찬란하게 맑은 세상을 흐리게 하는 불투명함. 거칠고 불쾌한 불투명함. 또는 어둡고 신비로우며 불길한 흐릿함. 산을 집어삼키고 마을을 집어삼키고 강과 바다 위로 드리워지는 불투명함이다. 반대로 바깥 세상에는 무관심해지며 자기에게로 향하게 하는 불투명함. 외부와의 단절을 끊임없이 일으키기에 결국엔 자신만 남게 만드는 불투명함이다. 나를 향하며, 내가 속한 시간과 공간의 테두리를 가늠하게 하고 그 곳을 공유했던 존재들과 사물들을 떠올리게 하는 불투명함, 종종 어떤 향기나 그립고 아련한 흔적으로 마음을 따스하게 하지만..

MISC.

그냥 이래저래 우울하다. 좋은 일도 있지만, 스트레스 받는 일만 가득한 프로젝트 사무실도 있다. 살아갈 수록 세상은 잘 모르겠고 사람들은 무섭다. 악의 없는 사람들의 실수들이 모여 거대한 비극을 만들기도 한다. 그 실수들을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서 누군가는 악인이 되어야 하는 세상이다. 내 한계를 뚜렷하게 알게 되자, 별안간 지쳐버렸다. 한계 돌파의 법칙 같은 건 없다. 한계 돌파란 스스로를 파괴하는 짓이다. 내 스스로 나를 파괴하기엔 이미 너무 지났다. 가을이 가자, 겨울이 왔다. 비가 내린 후 해가 떴고 눈이 내린 후 세상이 하얗게 번졌다. 가을에 여행을 많이 가지 못했다. 이번 겨울엔 여행을 자주 가고 싶으나, 과연 얼마나 갈 수 있을 지 모르겠다. 그나마 올해 잘 한 건 성당에 꼬박꼬박 나간 것, ..

토요일 출근

지하 1층의 공기는 무겁고 차갑고 쓸쓸하다. 텅빈 주말의 프로젝트룸은 예전과 같지 않다. 불과 몇 년 전만 해도 납기일을 맞추기 위해 주말 출근도 마다하지 않던 이들도 이젠 주말에 출근하지 않는다. 한 두 명씩 주말 출근을 하지 않기 시작하면서, 주말 출근하는 이들만 호구처럼 보이던 과도기를 거쳐 지금은 관리자나 성실한 정규직 직원만 가끔 주말 출근을 한다. 어쩌다 보니, 몇 년째 여의도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계속 여의도 쪽 프로젝트만 하게 되었다. 원래 업무가 프로젝트 관리가 아닌데, 누군가 잘못하면 내가 가서 책임을 지게 되었다. 나라고 해서 모든 걸 잘 할 수 없기에, 늘 피곤하고 스트레스로 둘러쌓인 환경에 놓여져 있다. 꿈은 멀리 사라지고, 그 멀어진 거리만큼 내 피부는 건조해지고 푸석푸석해졌..

가을,잡생각,들

쫓기듯 급하게 휴가를 냈다. 그냥 쉬고 싶기도 했고, 아이의 성당 숙제를 도와주어야 하고, 부동산 계약 건도 있다. 치과에도 가야 하며 공부도 해야 하고 저녁에는 성당에도 가야 한다(과연 하루만에 다 할 수 있을까). 직장에 있는 시간을 제외하고 나머지 시간들 대부분은 아이와 함께 한다. 이렇게 될 것이라고 이십년 전의 나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심지어 성당에 나가게 될 줄. 이럴 줄 알았다면, 이럴 줄 알았다면, ... 나이가 들면 자연스레 후회와 연민이 쌓인다. 며칠 전 출근길에 소방차들 수 대가 이차선 이면도로로 싸이렌을 울리며 올라갔다. 어디로 가는가 했더니, 아래쪽 동네 어느 빌라에서 불이 난 것이다. 내가 탄 마을버스는 앞으로 가지 못했고 연기가 도로에 가득했다. 사람들이 버스에서 내려 다들..

구름 위로

길을 가다 문득 하늘을 보니, 구름이 입체적으로 펼쳐져 있었다. 핸드폰을 들어 사진을 찍었다. 고대인들의 상상을 떠올렸다. 나이가 들수록 세상은 더 알지 못하는 것으로 변하여 이젠 신비로울 지경이다. 그 도저한 신비 앞에서 내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곤 조심스럽게 기도를 하는 것. 내가 이 동네로 왔을 때만 해도 아파트가 이 정도로 많진 않았는데, 이제 아파트가 하나 둘 늘어나고 있다. 오래된 낮은 아파트와 빌라들이, 그 낮은 건물들 사이로 더 낮았던 양옥 주택들이 사라지고 그 자리에 고층 아파트가 들어섰다. 그 사이 집값도 올라 서울에 사는 것이 사치스러운 일이 된 요즘, 내일을 위해 살지만 내일은 더 불투명해지고 있었다. 문득 내가 행복했던 때가 언제였나 떠올려보니, 참으로 암울해서 내일을 생각하지 않았..

봄이 지나고 여름이 오고 비가 내리고

서구의 어느 기상학자는 한반도는 4계절이 아니라 5계절이라고 말한다. 봄, 장마(우기), 여름, 가을, 겨울. 우리는 4계절이라고 하지만, 누군가의 시선에는 우리가 정의내리지 않는 어떤 계절을 지금 지나고 있다. 다행이다. 비가 내려서. 그래서 내륙의 가뭄이 사라지길 기원한다. 봄이 지나자 더위가 밀려들었다. 더위의 위세로 인해 사람들은 기가 죽고 짜증만 낸다. 나도, 아내도, 아이도, 짜증의 바다를 지나며 서로에게 불평을 쏟아내며 빨리 지친다. 프로젝트 상황이 난감해진 지금, 어떻게든 풀어내려고 노력 중이다. 어제부터 읽기 시작한 책에서 '리추얼ritual'을 항상 규칙적으로 행하는 의식같은 활동이라고 정의내리고 있었다. 독일의 한병철은 리추얼이 끝났다고 말하지만, 한 쪽에서는 리추얼의 부활을 말한다...

금요일 오후의 캠핑

한 일이 년 열심히 캠핑을 다니다가 요즘 뜸해졌다. 그 사이 우리 가족 모두가 바빠졌다. 더구나 올해는 아이가 성당 첫 영성체 반에 들어가면서. 나 또한 아이와 함께 일요일 오전 시간을 비워야만 한다. 일요일을 끼고 갈 수 없어 결국 금요일 오후 캠핑을 가기로 했다. 아내는 직장과 학업으로 모든 것에 열외된 상태라, 나와 아이 단 둘이 가는 캠핑이었다. 아빠와 아들, 하긴 단 둘이 여행을 자주 다녔던 터라 별 이상할 것도 없다. 오후 일찍 출발한다는 것이 이것저것 챙기다 보니, 늦게 출발하여 어두워질 무렵에서야 도착했다. 텐트를 치고 식사를 먹으려고 보니, 밤이다. 피곤했던 탓인지, 집에서 먹다 남긴 와인 반 병과 맥주 몇 캔을 마시고 보니, 취했다. 실은 내가 취한 지도 몰랐다. 나는 아이에게 이제 자..

코로나가 만들어내는 풍경

며칠 재택 근무를 했다. 이제 원격 근무가 가능해진 상태라 업무를 수행하는데 아무런 지장이 없었다. Zoom이나 구글 Meet으로 회의를 할 수 있으며, 크롬 원격데스크탑이나 대부분의 회사에서 사용한 그룹웨어에는 원격 접속이 가능한 기능들이 탑재되어 있다. 사무실 PC에 원격으로 붙어서 작업하는데, 조금 속도가 느릴 뿐, 불편함은 없었다. 아이는 Zoom으로 수업을 듣고 있었고 아내는 코로나 확진으로 방 안에서 나오지 않았다. 나와 아이는 계속 음성이 나오다가 결국 아이까지 양성이 나왔다. 이제 내가 걸리는 건 시간 문제다. 그런데 나는 아직 걸리지 않았다. 오늘 내일 걸리겠지 한 게 벌써 1주일이 다 되어 간다. 결국 걸리지 않는 건가. 재택은 쉽지 않다. 의외로 시간이 없고 일을 많이 하게 된다. 사..

어느 2월의 화요일

월요일 출근길, 몸이 무거웠다. 미세먼지로 가득찬 일요일을 보내고 난 다음날 아침, 일어나기 조차 힘들었다. 약 두 시간 정도의 운전, 약 삼심분 정도의 대기 시간 끝에 만난 도너츠 위의 말똥, 기름지고 맛있었으나, 살짝 비린내가 올라왔던 방어회, 소주 반 병, ... 일요일 저녁 일찍 잠자리에 들었다. 그런데 왜 월요일 아침 피곤한 것일까. 소주 반 병 탓일까, 아니면 날 것들을 제대로 소화시키지 못했던 것일까. 월요일 오전 회의 하나를 끝내고 휴가를 내어 바로 집에 들어와 누웠다. 계속 누워있었다. 잠이 오지 않았지만, 누워있었다. 그리고 계속 누워있으면 허리가 아프다. 계속 누워있을 수도 없다. (운동을 해야 하는데, 코로나 이후 가끔 가던 피트니스 센터도 끊은 상태라...) 잠은 오지 않고 딴 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