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씨가 너무 좋아 집 안에서 빈둥거리기로 마음 먹었다. 몇
달만에 Sidsel Endresen을 꺼내 듣는다.
"So I write/about the world/and only rarely come close/to
saying this/so we can share this/it's just black marks/on
white paper/and me/wanting another blank page/and yet
another/so I write/thinking I'm constructing a bridge/but I
get lost/on the way across/and I stumble/on implications/
associations/ synonyms/combinations/of the perfect words/so
I write/and I get lost/in black marks/on the white paper/and
still/it is this/this......"
(* So I Write라는 노래의 가사)
* *
날씨가 너무 좋아 집에서 빈둥거리다니, 내 생에 이런 날이
있으리라 누가 예상을 했겠는가! 이런 날에 아리따운 처자와 덕
수궁 돌담길이나 걸어야 하거늘, 오늘 난 습기 먹은 음반들을 꺼
내 조심스럽게 닦곤 음악을 듣고 있다니! 젠장, 왜 이리도 '사
랑'을 노래한 음악은 많은 것인가!
* *
용산 데이콤 앞에서 버스를 탄 허름하고 초췌한 차림의 중년
사내는 버스가 한강대교 중간 지점까지 갈 때까지 동전을 찾지
못하며 당황하고 있었다. 그 때 앞좌석에 앉아 있던, 정확히 말
해 버스 운전석 바로 뒷 좌석, 그 중년의, 깔끔한 외출복에 연한
화장을 한 여인이 핸드백에서 토권 하나를 꺼내 중년 사내에게
건네준다. 그 때 그들은 서로를 쳐다보았다. 사내는 그것을 받고
황급히 시선을 거두곤 버스 뒤로 들어갔다. 버스는 한강대교 끄
트머리에서 빨간 신호등에 걸렸고, 토권은 운전석 옆 네모난 공
간 속으로 굴러 떨어지고 있었다. 그리고, 앞좌석에 앉은 그 중
년의 여인은 연신 뒤를 쳐다보았고, 그 중년 사내는 그 시선을
피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었다. 그리고 몇 정거장 가지 않곤 그
사내는 무언가에 쫓기듯 버스에서 내렸다. 잠시 후 여인은 핸드
백에서 손수건을 꺼내 눈가에 맺힌 눈물을 닦았다.
가끔 젊은 한때 맹렬하게 사랑했던 이를, 그러나 그 사랑을
이루지 못했던 이를 아주 우연스럽게 만나기도 한다. 비 오는 날
이나 지금 같이 지내고 있는 이를 사랑하지 않음이 느끼는 순간
마다 떠오르는 사람을 아주 우연히 스치기도 하는 법이다.
이 세상엔 무수한 사랑들이 존재하며, 그것들에는 남자와 남
자와의 사랑, 여자와 여자와의 사랑, 섹스로만 연결된 사랑, 고
등학생과 중년 사내나, 중년의 여자 사이의 사랑도 있을 수 있으
며, 한 사람은 때리고 한 사람은 맞으며, 그러면서 사랑을 확인
하는 관계도 가능한 법이다.
하지만, 그것이 사랑인지 사랑이 아닌지를 결론내릴 수 있는
사람은 오직 자기자신 밖에 없다. 그것을 사랑이 지나간 지 수십
년이 지난 후에 깨닫게 되더라도.
* *
난 '사랑'이라고 표현된 것들을 믿지 않는다. 왜냐면, '사랑'
만큼 사람 뒷통수 잘 때리는 것도 드물기 때문에. 여하튼 오늘은
너무 날씨가 좋다. 이런 날이 오면 어떻게 할 것인지를 정해놓지
않았기 때문에, 집에서 빈둥거리고 있다. 앞으로 계속 빈둥거릴
것같다. 오! 가엾은 내 젊은 날이여. 오! 투명한 초가을의 내 생
이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