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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아란 영혼

지하련의 우주/Jazz Life +799




기다리는 것, 즉 기다림을 하나의 중성적 행위로 만드는 것에 주의하는 것, 

자기에게 감겨서, 가장 내부의 것과 가장 외부의 것이 일치하는 

그러한 원들 사이에 끼여서, 예기치 않은 것으로 다시 향하는, 

기다림 속에서의 부주의한 주의, 어떠한 것도 

기다리기를 거부하는 기다림, 발걸음마다 펼쳐지는 고요의 자리


- 모리스 블랑쇼, '기다림 망각(L'attente L'oubli)'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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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이신문을 구독한 지 몇 달이 되었다. 그 전에는 모바일 포털사이트나  Social Media, 특히 페이스북을 통한 소비가 대부분이었다. 이럴 경우 미디어 편식이 발생한다. 또한 예전이라면 스포츠신문을 읽어야만 볼 수 있는 기사만 읽게 되는 경향이 있었다. 


지금처럼 디지털 매체가 발달하지 않았을 때, 나는 스포츠신문을 읽는 경우가 거의 없었다. 그런데 지금은 디지털을 통해선 그냥 스포츠신문만 읽는 느낌이다. 그만큼 엉망이 되었다. 더구나 제대로 된 기사문을 읽을 일이 줄어든 셈이다. 


다시 종이신문을 읽기 시작하자 여러 모로 장점들이 많아졌다. 다소 느리지만, 깊이있는 칼럼들을 읽게 되었다고 할까. 하지만 디지털 세대의 여론과는 다소 무관해 보인다. 미디어 환경의 변화는 장기적으로 정치적 무관심을 지나 대중 일반의 정치적 이해와 판단능력을 마비시킬 것으로 보인다. 


아무래도 여기 블로그에 대학생들이 많이 들어오는 듯하여, 아래 칼럼 읽기를 권한다. 지금 20대 이하 세대는 정말 힘든 시기를 살아나가야 한다. 그런데 그걸 아는지 모르는지, 장기적 관점에서의 정치를 바라보고 적극적으로 정부 정책 방향에 대해 관여해야 하는데, ... 너무 걱정스럽다. 


송호근 칼럼 - 한국 청년 잔혹사 (중앙일보) 

http://news.joins.com/article/204191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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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대학생 2016.08.31 22:59 신고

    종이신문에 관해서 과제를 쓰려하는 학생입니다만, 2026년에는 한국에서 종이신문을 보기 힘들꺼라는 통계도 있길래 여기에 질문드려봅니다.
    종이신문이 없어질꺼라고 보시나요? 안없어진다면 그 이유가 뭘까요?
    종이신문이 살아남는 방법이 무엇이라고 생각하시나요?
    궁금한게 워낙많은데 질문드려봅니다 ㅎㅎ;

    • 너무 어려운 질문입니다. 심지어 학자들이나 전문가들까지도 서로 논쟁을 벌이고 있는 주제예요. 그걸 덜컥, 저에게 물어보시면.. ㅜㅜ.

      아마 관련 자료를 찾으면 너무 많이 나올 겁니다. 하지만 어떤 주제는 너무 많은 자료 때문에 힘들고, 어떤 주제는 자료가 너무 적기 때문에 힘들죠. 그런데 이런 경우는 공부를 하던지, 직장 생활을 하던지, 반드시 겪게 되는 문제예요.

      몇 가지의 키워드를 가지고 검색해서 관련 자료를 찾아 읽어보세요. 그럼 나름대로의 해답을 구하실 수 있을 겁니다.

      riss.kr 이라는 웹사이트에서는 학위논문들을 검색할 수 있으니, 이와 관련된 석사나 박사학위 논문을 읽을 수 있을 겁니다. 해당 주제에 대한 논문을 찾을 수 있을 겁니다.

      종이판을 내던 뉴스위크지는 아예 종이 주간지를 없애버렸습니다. 뉴욕타임즈의 경우, 디지털화에 대해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지만, 아마존의 제프 베조스가 인수한 위싱턴 포스트에 밀리는 인상을 주고 있죠. 영국의 가디언지도 디지털화에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으며 한국의 중앙일보도 여기에 속한다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영국 모노클 같은 잡지는 종이잡지로 수지타산을 맞추고 있어요. 국내에는 B 매거진이 대표적인 경우죠. 뭐, 신문은 아니지만요.

      너무 어려운 질문은 너무 쉽게 하셨습니다. 그런 질문은 마치 '왜 살아야 하나요?'와 비슷한 류입니다. 다만 '왜 살아야 하나요?'라는 질문에 무한한 답이 있어 우리를 곤혹스럽게 하지만, '종이신문에 대한 질문'의 답은 몇 가지로 정해져 있고 여기에 대한 답은 자료를 찾아 읽어보시면 쉽게 구하실 수 있을 겁니다. ~ 그럼.



도심 한 가운데 호텔 입구의 새벽 3시는 고요하기만 했다. 술에 취해 비틀거리며 호텔 안으로 들어가거나 밖으로 나오는 사람들이 있는 풍경이 연상되는 것은, 호텔이라고 하면, 놀러오는 곳이라는 인상이 깔려있어서다. 


떠.나.고.싶.다.

모.든.것.을.버.리.고.

저.끝.없.는.우.주.여.행.을. 


호텔은 해마다 한 두 번씩 돌아오는 낯선 우주다. 호텔의 하룻밤은 아늑하고 감미로우며 여유롭지만, 그와 비례해 시간은 쉽게 사라진다. 



새벽 3시. 여의도 콘래드 호텔 바로 옆 빌딩에서 며칠 째 새벽까지 일을 했다. 예상치 못한 일이었고 원하지도 않았으며 끌려다녔다. 이런 식이라면 그만 두는 게 상책이나, 관계란 앞으로 어떻게 될 지 모를 일이다. 


관계는 우리는 견디게 하고 지치게 하며 상처 입히고 미소짓게 만든다. 관계의 해석이란 애초에 불가능하고 그저 지금/여기에서만 유효한 어떤 정의가 있을 뿐이다. 그래서 실재론자들에겐 시간은 무의미하고 운동이란 없는 것이다. 


사랑은 영원하고 그녀/그는 언제나 내 옆에 있다,고 말한다. 경험 상 그것이 거짓임을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상처입지 않기 위해, 상처입었음에도 그 사실을 인정하기 싫어 마음 깊숙한 곳으로 사랑을 끌어당겨 마음의 문을 닫는다. 


거의 2주 가까운 시간 동안 제대로 된 여유를 가지지 못한 채, 일에 쫓겨 살았다. 미술 평론 하나 써서 내기로 한 약속도 깨졌고 지금 하는 일에 대한 금전적 대가도 제대로 받지 못하지 않을까 하는 걱정을 한다. 


꿈꾸는 중년이란 애초에 불가능한 표현이다. 하지만 미성년적 자아를 가졌다. 내가 아는 대부분의 중년들은 죄다 미성년이다. 꿈을 꾼다. 도망가거나 회피하거나 쫓기거나. 하지만 그것을 드러내지 않을 뿐. 사회가, 시스템이 강제하는 어떤 역할을 충실히 수행하고 마음의 문을 닫는다. 


그리곤 어느 순간 깨달을 것이다. 


'내가 잘못 살았구나' 


이 여름이 가고 또 다른 가을이 오면, 이브 몽땅의 고엽을 들으며 술을 마셔야지. 에디뜨 피아프와 자끄 브렐까지. 술을 마시면서 떠나간 옛사랑과 우리 아이의 미래와 내 절망과 우리를 배신하지 않는 술의 운명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누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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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 오는 토요일, 거칠고 가느다랗게 물이 내려가 커피에 닿는 순간, 참 오랜만이다,라고 속삭였다, 스스로. 내가 나에게 낯설어져 가는 40대구나.



실은 나이가 든다는 것에 대한 지각은 없고 누군가가 나이가 들어가는구나를 보며, 내 나이를 되새기게 된다. 아침에 내린 커피를 다음날 새벽까지 마시고 있다. 집중하기 어려운 환경은 마음까지 어수선하게 만든다. 미하일 길렌의 음반을 꺼내 듣는다. 베토벤이다. 베토벤도 참 오래만이다. 


그동안 어떻게 살고 있었던 걸까, 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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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호선을 타고 김포공항에서, 다시 공항철도를 타고 인천공항으로, 그리고 다시 자기부상열차를 타고 용유역으로 가면 바다를 볼 수 있다. 큰 건물의 회센터가 있고 파도소리를 들을 수 있고 작은 배들을 떠있는 얕은 바다와 마주할 수 있다. 


그냥 전철 타고 가서 회 한 접시 먹고 와도 좋을 것이다. 바로 옆엔 네스트호텔이 있으니, 하루 밤 보내고 와도 될 것이다. 


아무런 계획 없이 훌쩍 떠나고 싶은 요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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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한 기사를 접했다. 그 기사 제목은 <클린턴 외교 핵심 캠벨 “한국군에 전작권 전환 반대”>이다. 일견 당연한 이야기이긴 하지만, 미 민주당 인사에서 나왔다는 것에서 내가 순진했던 건 아닐까 하는 생각에까지 미쳤다. 이미 '주한 미군 문제'라든가 '세계 경찰국가로서의 미국'에 대해선 이상돈 교수의 <<공부하는 보수>>라는 책에서 잠시 엿본 바 있었지만, 나는 두 개의 미국-공화당 정권의 미국과 민주당 정권의 미국-이 있다면, 이 둘이 확연히 다를 것이라는 건 내 일방적인 견해였다. 적어도 미국 내부의 문제에 대해선 서로 다를 수 있겠으나, 미국 외부의 문제에 대해선 그들은 하나의 목소리를 가지고 이거나 서로 다른 척 할 뿐이다. 이에 짧게 내 생각을 정리해보았다. 좀 비관적이긴 하지만. 


* * 


상식적인 미국 정치인이나 행정가이라면 당연히 미국의 국익을 우선시할 것이고, 한반도에서 만일 전쟁이 발발한다면, 한국 정부가 전시 작전권을 가지는 것에 반대할 것이다. 또한 주한 미군이 철수하는 것에 대해서도 반대하고. 다만 트럼프와 같이 주한 미군 철수를 주장하는 미국 내 보수주의자들이 있다. 하지만 이들의 의도는 주한 미군 철수가 미국의 국익에 반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으나, 미국 내부의 문제를 우선시하고 있을 뿐이며, 운이 좋을 경우에는 한국의 방위비 분담액을 더 받아낼 수 있다는 것을 고려하고 있을 지도 모를 일이다.


(다 아는 사실일테지만) 그들이 전시 작전권 양도나 주한 미군 철수에 대해 반대하는 이유는 그만큼 한국의 지정학적 위치는 중요하기 때문이다. 한반도는 여러모로 정치적 쓸모가 많은 땅이고 한국도 그런 나라다. 지극히 상식적인 애국주의자들인 그들은 한국이 군사적으로나 정치적으로 자주적인 발언권이나 행동을 하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 그들의 눈에 노무현 전 대통령은 얼마나 보기 싫었겠는가. 참여정부의 딜레마는 적절한 수준에서의 그 전 정권과는 다른, 주권국가 한국의 입장에서는 지극히 당연한 발언이나 행동을 해야겠지만, 이 발언이나 행동이 미국의 입장에서는 얼마나, 당돌을 넘어 황당해 보였을까. 이런저런 고려 속에서 한국군 파병과 같은 일들을 도모했지만, 당장 눈 앞의 것들에만 신경 쓰는 국내 진보(?) 언론과 인사들은 무조건 반대만 하고 있었다,는 걸 지금은 알까. (알겠지만 후회하진 않을 게다, 아마.)


만일 전쟁이 나면, 한국은 버리는 패다. 시간을 벌 수 있고 전 세계 여론에 호소하기 아주 좋은 나라다. 인구 밀도가 매우 높으며 사상자 수는 그 이전 전쟁들과는 비교되지 않을 것이다. 또한 경제 시설들이 파괴될 것이고, 심지어 원자력 발전소들까지 있으니, 그 파급효과는 이루 말할 수 없다. 그러니 전쟁 나면 이 땅은 그냥 사람이 살지 못하는 땅이 된다.


그리고 전쟁을 수행하는 입장에선 한국은 그냥 버리고 일본에서 다음 일을 도모하면 된다. 한국이 전쟁터가 된 상황 속에서 앞으로의 정치적 협상을 진행하면 그 뿐이다. 최악의 경우를 가정한 것이지만, 언제나 최악을 가정하고 모든 정치나 행정이 이루어져야 한다.


그러나 미국의 입장에서 일본은 얼마나 좋은 친구인가. 적어도 한국보다 일본이 더 믿을 만한 친구다. 역사적으로나 경제적으로. 또한 일본 스스로도 중국과 한국보다는 미국과 친구가 되는 편이 낫다고 믿는다. 그들은 아시아 지향적이 아니라 탈 아시아를 원한다. 동시에 아시아의 맹주가 되고 싶어하지만, 역사적으로도 경제, 정치적으로 그것이 이루어질 수 없다는 걸 잘 알고 있다. 그러니 그들은 아시아를 넘어서 아시아 속으로 들어오고 싶어한다.


더 불행한 일은 한국의 보수적인 정치가들, 행정가들과 군인들도 전시 작전권을 회수하는 것에 대해, 주한미군이 철수하는 것에 대해 반대한다. 그들은 그들의 정체와 실력이 탄로나는 것을 두려워한다. 그들은 그들 스스로 전쟁을 수행할 능력도, 전쟁을 책임질 능력도, 전쟁을 책임질 생각도 없다. 어차피 분단국가 한국은 유엔 사령부 밑에 전쟁이 일시 중단된 상태이니, 전쟁에 대해선 유엔이 책임질 일이라고 여긴다. 유엔사무총장이 한국인인 것과도 아무 관련 없다. 어차피 유엔사무총장은 얼굴 마담이라는 걸 잘 알고 있으니까. 


독자적인 전쟁 수행 능력이 없기 때문에 독자적인 전쟁 수행 능력을 키우면 되지 않겠느냐고 생각할 수 있지만, 이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한국 군대는 유엔 사령부 아래에서 미군 주도로 수립된 전쟁 작전 아래에서 움직이는 것으로 수십 년 동안 훈련해왔다. 이게 전시 작전권을 가지고 온다고 해서 바로 될 것이라 믿을 만큼 순진한 사람들이 아니다. 그러니 전시 작전권 환수에 대해 반대하는 것이다. 전쟁 수행 능력이 하루 아침에 만들어지는 것도 아니고 그걸 위해 우리는 얼마나 많은 인적, 물적 투자를 해야 하는지 잘 알고 있으니, 사서 고생하지 말자는 것이다.


더구나 독자적인 전쟁 수행 능력은 미국도 원하지 않는 일이다. 그 동안 정치적으로 약점을 가진 정권들은 미국의 요구대로 독자적인 수행 능력을 가지지 않았고 노력하지도 않았다. 어차피 미군이 가진 핵무기만으로 한국군의 독자적인 전쟁 수행 능력 따윈 필요 없으니까. 박정희 대통령 시절 핵무기 개발에 욕심을 낸 이유도 여기에 있을 것이다. 그냥 한 번에 이런저런 고민을 다 해결해줄 수 있는 녀석이니까. 하지만 다들 알다시피 실패하지 않았는가. 그 이후 한국 정부는 독자 전쟁 수행 능력을 키우기 보다는 낙후된 산업 시설이나 경제를 살리는 것이 정치적으로 더 중요한 사안이 되었다. 독자적인 전쟁 수행 능력은 원한다고 해서 될 일도 아니고(미군의 반대로), 그리고 하루 아침에 이루어질 일도 아니니, 다른 것에 집중하는 것이 나은 일이었다. 


그렇게 시간이 흐른다. 전시 작전권에 대해선 정권이 여러 번 바뀌고 나서야 검토된다. 우리가 귀가 닳도록 들었던 ‘자주 국방’이라는 것이 말로만 아니라 실제로 가능한가에 대한 검토가 이루어진 것이다. 그런데 이 듣기 좋은 ‘자주 국방’을 하기 위해 군대는 정말 많은 부분이 바뀌어야 한다. 그런데 하고 싶을까? 거의 모든 걸 바꾸어야 하는데, 그냥 그대로 놔두어도 아무 문제가 없는데. 미군이 있는 상황에서는 기본적으로 전쟁 억지력이 생기고 미군이 시키는 대로만 해도 전쟁에서 이걸 것이 뻔한데.


자주 국방을 위한 독자 전쟁 수행 능력을 가지기 위해 얼마나 많은 물적, 인적 투자를 해야 하는데. 그리고 한창 투자가 진행 중인 상태에서 만일 주한 미군이 철수한다면, 그리고 전쟁이 나면? 말로는 자주국방을 외치지만, 실제로 한국의 보수주의자들은 자주국방엔 별 관심이 없다. 도리어 자주국방 대신 미군의 영향권 안에 있는 것이 더 안전하다고 믿는다. (사드 배치 결정은 이러한 배경 아래 결정된 것에 다름 아니다) 


사드를 배치하겠다는 기사에 대해 대부분의 사람들이 반대하고(아니면 관심에 없거나) 주변국가들까지 나서서 반대하는 상황에서도 그 고집을 꺾지 못하는 이유는 미군의 영향권 아래 계속 머무는 것이 가장 안전하고 한국의 국익에 부합된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과연 그럴까? 단기적으론 그럴 지도 모른다. 이 단기적 고려가 중장기적 관점에서 한국이라는 나라, 한국이라는 나라가 걸어온 반만년의 역사와는 어떤 관련을 맺고 미래에 어떤 영향을 끼칠 것인가에 대한 고려는 아예 없다. 하긴 그런 생각을 했다면 저런 결정도 내리지 않았을 것이다. 


지금의 한국 정부나 군대는 군사적인 측면에서는 확실하게 한 나라를 책임지고 이끌 생각이 전혀 없다. 아예 그렇게까지 해야 하나 여길 지도 모른다. 실은 그렇게 해야 한다고 생각하지도 않았고, 도리어 왜 그렇게 해야 하는지 여길지도 모른다. 적어도 군사적인 측면에서 말이다. 어차피 자주 국방이 안 되고 앞으로 하지 않을 것라면, 그들의 입장에서 '사드 배치'는 실보단 득이 많은 수다. 그러니 마다할 이유가 어디 있는가. 그리고 미국한테 밉보여서 뭐 좋은 게 있다고. (과연 그러할까? 중국의 경제 제재, 러시아의 군사적 조치들은 미국을 위험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한국을 위험하게 할 것이다. 앞으로 하나 두 개 어떻게 실현되는가를 가슴 아프지만, 지켜볼 수 밖에)


나는 이 상황 속에서, 이런 생각을 하는 정치인, 행정가, 군인들, 그리고 이들로 이루어진 정치집단을 지지하는 한국 국민들이 이해되지 않는다. 그들은 한국을 책임지지도, 이끌지도 않을 작정으로 한국의 정치와 경제의 주도권을 쥐고, 군대를 통솔하고 있다. 그런데 사람들은 그들을 이해하고 지지하고 동정까지 한다. (아마 다음 선거에서도 가면을 갈아끼운 골통 보수주의자들에게 투표할 것이다. 그는 그녀와 다르다면서.)


변화보다는 안정이 낫다. 못 살더라도 안정적이고 일관되게 못 살면 미래는 예측가능해진다. 신분제와 노예제가 수천 년 이상 지속된 것도 여기에서 연유한다. 서민들은 이렇게 여기게 되었으며, 상류층도 안정된 체제가 좋다. 분단 상태도 그냥 이대로 지속되는 것이 좋다. 개성 공단이 작살나더라도 상관없다. 분단 체제가 지속되고 이러한 불안정하긴 하나 일시적 균형 상태를 계속 지속시키는 편이 다른 것들보다 낫다. 그리고 밝혀지지 않은 과거사 따윈 그냥 덮인 채로 있는 게 낫다. 이미 일은 벌어져 끝났으니까. 그리고 대다수의 사람들은 관심도 없거나 관심이 멀어지도록 만들면 된다. 잘못된 일도 덮으면 그 뿐이다. 가끔 마음에 들지 않은 이들이 있으면 교육 차원에서 한 번, 정해진 각본대로 밝히면 된다. 하나 두 개 각본 없이 진실이 드러나기 시작하면 기득권 전체가 위험해진다. 정말 위험해진다.


그러니 얼마나 노무현 대통령과 참여 정부 인사들이 미웠을까. 그들은 적극적으로 분단 체제 해소와 보다 나은 상태의 국가가 될 수 있다는 걸 보여주기 위해 실제적인 일들을 단행했으니까. 과거사도 다시 짚었고 뭔가 잘못된 것이 있으면 바로 잡으려고 했으니까. 그리고 그걸 한 번 경험한 사람들은 알게 될 테니, 그걸 어떻게든 막아야 된다. 그리고 막아냈다. 그리고 앞으로도 막아야 되니까, 종편 방송 만들고 언론부터 잡고 이젠 국정 교과서까지 가는 것이다. 다 예측 가능한 시나리오다. 어렵게 기득권이 된 이들(소위 개천에서 난 용)에겐 감투를 주면서 괜히 휩쓸리지 말라고 단도리를 한다.


그리고 계속 이 상태로 지속되면 아무 문제 없다. 모든 것들은 예측 가능해진다. 가난하고 힘없는 이들은 계속 가난하고 힘 없을 것이며, 부유하고 힘있는 이들은 앞으로 계속 부유하고 힘있을 것이다. 가끔 딴 짓 하는 이들만 가끔 본보기로 잡으면 된다. 정치란 이런 것이고 국가 경영이란 것도 이런 것이다.


어차피 대다수의 국민들은 이런 것에 관심도 없다. 먹고 살기 바쁜데, 이런 것 따윈 사회에서 도움도 안 되는 괜한 이상주의자들에게서나 나올 법한 것이니, ‘쟤들은 원래 저래’로 몰고 가면 된다. 그러면 잠시 동요하던 국민들도, 아, 원래 저런 애들이었구나 하고 거리를 두게 될 것이다. 그리고 세월호사건에서 보듯, 그렇게 거리를 두게 된다. 


이만큼 온 것도 기적이니, 이제 안정된 일상, 안정된 사회, 안정된 국가를 만들자고 말한다. 더구나 민주화까지 되지 않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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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년 전이었다. 당시 취재기자가 그에게 복기에 대해 물었다. 

"바둑 끝나면 이기든 지든 복기를 하잖아요. 그 과정이 고통스럽지 않나요? 진 것도 화나는데 졌다는 것을 한 번 더 확인한다는 게 ..." 

"아닙니다. 오히려 어떻게 졌는지 모르는 게 더 답답하죠. 어떻게 이겼는지는 별로 중요하지 않아요. 하지만 어떻게 졌는지는 반드시 알아야 합니다."

"오답노트 정리와 비슷한 개념인가요?"

"그럴 수도 있지만 좀 다른 느낌이죠. 바둑이 스포츠가 됐지만, 저는 바둑이 하나의 예술 작품이라 생각합니다. 도자기를 구울 때 뭐가 잘못됐는지 알아야 다음에 좋은 것을 만들 듯, 바둑 기사는 더 훌륭한 예술 작품을 위해 복기를 하는 겁니다."

- '복기 또 복기, 승부사 이세돌', 권혁재 기자, 중앙일보 6월 4일자 


바둑만 이럴까. 세상 모든 일을 이렇게 접근한다면, 안 될 일이 어디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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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달 간의 흔적이 숨겨져 있는 책상 바로 위로, 지치지도 않고 차가운 에어콘 바람은 평평한 사각형으로 떨어져 내린다. 


우리는 어쩔 수 없이 나이가 들면서, 어떤 구조 속에 스스로 자신을 내몰기 마련이다. 그리고 자신을 내몰지 않으면 안 된다. 자의든 타의든 자신의 삶 전체를 내몰지 않은 사람들에겐 철없고 사회성이 떨어지며 무책임하고 제멋대로 인간임을 인정하라며 세상은 강요한다. 하지만 세상은 나를, 우리를, 어떤 시스템 속으로 자신을 내몬 이들을 책임져 주지 않는다. 책임질 생각도 없다. 강요하면서도 그 강요로 인한 결정로 생긴 좌절, 절망, 슬픔에 대해선, 네 잘못이라며 개인의 탓으로 돌린다. 


결국 세계는 피해자들로만 넘쳐난다. 승자는 없고 패자만 있다. 모든 이들은 각자 다른 이유로 떠밀려 지금 이 자리에 서서 걱정하고 슬퍼하고 아파한다. 쉴새없이 아파하면서 스스로 내가 아닌, 누군가에게 똑같이 강요한다. 


애초 세상은 잘못 만들어진 곳이다. 그러니 플라톤은 애초부터 '저 세상의 이데아'를 슬프게 노래한 것이다. (하지만 이런 식의 태도만큼 잘못된 것도 없으니)


뫼르소도 조현병 환자였을까? 사람들은 '원인-결과'라는 인과율의 노예다. 자연과학에서 원인-결과의 인과율과 사회에서의 인과율은 전적으로 다르다. 하지만 자연과학을 대하듯 사회를, 사람을 대한다. 그렇다고 원인을 해결하지도, 해결할 의지도 없다. (더 불행한 건 지금 정권은 해결할 머리조차 없다.) 


영국의 EU탈퇴는 예견된 불확실성이다. 그러니 충분히 준비할 수 있고 대응할 수 있다. 그런데 이 호들갑은 무엇인가. 저 멀리 떨어진 유럽 대륙의 일이다. 직접적인 영향은 일부이고 대부분 간접적인 것들이다. 마치 스스로 무능하지 않다는 걸 증명하기 위해서 끊임없이 이야기하면서 자신의 무능력함을 드러내 보인다고 할까.

 

아, 그러면 나도, 그런 건 아닐까. 기분 좋게 술 마실 일이 없다. 날 기분 좋게 할 사람 만날 일도 없다. 보링거는 적대적 세계에서는 추상이, 우호적 세계에선 감정이입의 경향이 나타난다고 말했다. 어쩌면 나는 지금 추상의 거친 계절을 보내고 있는 셈이다. 


원래 얼마 전 마신 와인 사진 한 장 올리려고 시작했는데, 이상한 방향으로 주절주절 글이 씌어진다.




얄리다. 칠레 와인이다. 가성비가 좋은 와인으로 알려져 있지만, ... 기대했던 것엔 미치지 못했다. 카르메네르여서 그런가. 그동안 카베르네 쇼비뇽만 마셨으니까. 마트에서 손 쉽게 구할 수 있으면서 가성비가 좋은 칠레 와인으로는 에라주리스, 디아블로, 얄리가 유명하다. 




술 마실 일도 줄었고 술 마시기도 겁 난다. 나이가 든 탓인지, 술 마신 다음 날이면 어김없이 마음까지 무너진다. 세상이 슬프다거나 절망적이라든가 하는 식의 우울함이 아니라, 그냥 엄청 우울해지고 무기력해진다. 마약을 한 다음에 나타나는 무기력이 이런 걸까.


그래서 아주 무기력하게 술을 마시고 싶다. 술을 마시는 중간중간, 말러를 듣다가 밥 말리를 들으면 무기력해졌다가 잠시 유쾌해질 수 있을 것이다. 풀바디한 스페인 와인을 마시다가, 살짝 크리스탈 와인잔을 바닥에 떨어뜨리면, 유리 조각은 얇고 무겁게 바닥에 깔리며 빛이 나고, 붉은 색 와인은 옆 테이블에 혼자 앉은 여인의 가느다란 손가락 끄트머리에 가 부딪히면 좋을 일이다. 아마 베네치아의 카사노바가 이런 마음이지 않았을까. 


무기력해지지 않기 위해 일을 하고 사람을 만나고, 술을 마시고 취하면서 누군가를 알게 되고, 그렇게 다음 날 다시 무기력해지고 우울해지고 ... ... 인생의 목적은 역시 먹고 마시는 데 있는 것이다. 자연이 진공을 싫어하듯 우리 몸과 마음은 어떤 것들로 채워져야만 한다. 붉고 무거운 것들로 채워지면서 삶은 한껏 가볍고 우아해질 수 있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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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 06. 10 



오늘도 기다림은 이어진다. 그리움은 늘 그자리에 우두커니 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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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심을 간단하게 햄버거로 처리하고 도로를 걸었다. 작은 분수와 가로등에 달라붙은 채 갓 핀 꽃을 보여주고 있는 화분들을 보면서 참 비현실적이라고 생각했다. 점심 시간 길가로 쏟아져 나왔다가 다시 사무실로 향하는 사람들 얼굴엔 웃음이 가득했지만, 그 웃음도 참 비현실적이었다.


모두, 우리들의 비극적 상황을 알고 있지만, 모른 척하고 있었다. 그리고 계속 모른 척할 것이고, 모른 척 하던 사람들이 다 죽고 도시는 폐허가 될 것이다.

이런 도시는 유라시아 대륙을 가로지르는 실크로드를 따라가다 보면 많이 만날 수 있다. 이젠 성채만 남아 부서지는...


과거가 미래의 발목을 잡고 있지만, 과거는 과거의 기준으로만 세상을 바라본다. 변화를 거부한다. 세상은 변하지 않고 정지해있다. 그들은 마치 파르메니데스의 후예들 같다. 아직도 자리가 사람을 만든다고 믿고 있다. 자리는 고정된 것이고 사람은 변하는 것이니, 고정된 자리에 사람을 끼워맞추면 된다.


하지만 한국이 이토록 엉망이 된 것은 자리가 사람을 만든다고 굳게 믿고 있기 때문이다. 실은 정 반대다. 자리에 맞는 사람을 만들 수 있는 교육(훈련) 시스템을 만들어야 하고, 그런 사람들을 선택할 수 있는 안목을 길러야 한다.


그러나 나는 비관적으로 바라본다. 이런 국가가 되기 위해선 몇 백년이 걸릴 것이고 그 사이 이름만 남은 국가가 될 것이라고 ... ..





커피향은 은은하지만,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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낮고 두터운 바람이 어깨를 스치고 지났다. 비가 올 듯 구름들이 몰려들었지만, 더위는 여전했다. 병원 바로 옆에 도서관이 있었다. 서울에서 가지고 온 자료들을 가지고 도서관 안으로 들어갔다. 낯설었다. 서울에선 나이와 상관없이 도서관 열람실을 오고갔는데, 여긴 학생들만 보일 뿐이다. 


오전 10시. 


서울이라면 자리가 없었을 시간인데, 여긴 여유롭다. 하긴 도서관이 걸어다닐 수 있는 거리마다 있으니까. 책들도 제법 있고 실내도 깔끔하다. 


대도시 생활이 익숙해지니, 견디기 어렵다. 떠나보니, 이 곳이 살기 좋은 곳임을 알겠다. 주말 내내 창원에 있다가 서울로 올라왔다. 올 한 해 자주 이 생활을 반복할 것같다. 한 때 이 도시에서 내가 알던 이들도 이젠 중년이 되었겠구나. 그도, 그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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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 06. 01.



이럴 때 어색하지, 그다지 좋지 못한 형편인데도 불구하고 주위 풍경이 참 여유로워 보일 땐, 슬프지, 가진 게 없는데 모든 걸 가진 듯한 풍경 속에 있을 땐 참 슬프지, 너무 슬프지. 


하나의 직선 양 쪽 끝에 서서 서로의 이름을 부르지,만, 흘러가는 세월 속에 다 부질없어, 목소리는 잠겨 나오지 않아, 이젠 말라 흘릴 눈물마저 없어, 그럴 때 별안간 나타난 여유롭게 행복한 사각의 공간은 너무 어색해, 어색해, 찡그린 채 웃고 말지. 


텅 빈 도로를 지나치는 바람이 반가워 손을 내밀지만, 그는 잡히지 않아, 바람이지. 모니터 속 그녀는 나를 향해 웃고 나도 그녀를 향해 웃지만, 우리의 웃음은 만나는 법이 없지. 그래서 그녀는 언제나 그녀지. 


어느날 아이가 우주여행을 가겠다며 여행가방을 쌀 때, 나는 이미 어제 밤 꿈에 우주를 갔다 왔단다 라고 말하고 싶었지. 나는 언제나 바람을 타고 계속 웃는 그녀와 함께 우주 여행 중이지, 꿈 속에서. 


참, 어색하고 슬프지. 내가 한없이 낯설어지는 풍경 속에 익명의 사물이 될 때, 그렇게 있지만 없는 이가 될 때, 너무 슬프지, 그렇게 슬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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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을 특정짓는 것이 짙은 녹음과 뜨거운 열기라면, 이미 여름은 왔다. 그렇다면 사랑을 특정짓는 것은 무엇일까, 혹은 이별?, 아니면, 나는? 


세월은 너무 흘렀다. 나만 제외하고 모든 이들이 다 아는 사실 하나, 내가 나이 들었다,는 것. 


평일 창원엘 갔다. 연휴나 명절이 아닌 날 내려간 건, 거의 이십년 만인가. 지방 중소 도시에선 쉽게 마주할 수 있는 풍경도 서울에선 참 낯선 풍경임을 새삼 느꼈다. 그만큼 서울 생활이 익숙해진 건가, 아니면 지친 건가.  





올해 초 새로 생긴 경상대학교 병원 앞에 이런 하천이 있었다. 조금만 가꾸면 사람들이 다닐 수 있을 것같은데, 여기 사람들은 별 관심 없을 것이다. 여기저기 공원이다 보니.  





핸드폰 카메라로 찍은 몇 장의 창원 풍경이다. 버스를 타고 이동했는데, 지난 기억이 떠올라 가슴 아팠다. 내가 어쩌지 못하는 어떤 삶 앞에서 문학에 대한 깊은 회의를 느꼈던 시절, 그 이후 나는 술이 늘었고 주사가 생겼으며 마음을 닫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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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산길을 올라가면서 이렇게 생각했다. 

이지(理智)에 치우치면 모가 난다. 감정에 말려들면 낙오하게 된다. 고집을 부리면 외로워진다. 아무튼 인간 세상은 살기 어렵다. 

 살기 어려운 것이 심해지면, 살기 쉬운 곳으로 옮기고 싶어진다. 어디로 이사를 해도 살기가 쉽지 않다고 깨달았을 때, 시가 생겨나고 그림이 태어난다. 

 인간 세상을 만든 것은 신도 아니고 귀신도 아니다. 역시 보통 사람이고 이웃끼리 오고 가는 단지 그런 사람이다. 보통 사람이 만든 인간 세상이 살기 어렵다고 해도 옮겨 갈 나라는 없다. 있다고 한다면 사람답지 못한 나라로 갈 수 밖에 없다. 사람답지 못한 나라는 인간 세상보다 더 살기가 어려울 것이다. 

 옮겨 살 수도 없는 세상이 살기가 어렵다면, 살기 어려운 곳을 어느 정도 편하게 만들어서 짧은 생명을, 한 동안만이라도 살기 좋게 만들지 않으면 안 된다. 여기에서 시인이라는 천직이 생기고, 화가라는 사명이 내려진다. 예술을 하는 모든 사람들은 인간 세상을 느긋하게 만들고, 사람의 마음을 풍성하게 해주는 까닭에 소중하다. 

 살기 어려운 세상에서 살기 어렵게 하는 번뇌를 뽑아내고, 고마운 세계를 직접 묘사해내는 것이 시고 그림이다. 혹은 음악이고 조각이다. 자세히 말한다면 묘사해내지 않아도 좋다. 그저 직접 보기만 하면 거기에서 시도 생기고, 노래도 샘솟는다. 착상을 종이에 옮기지 않아도 보옥이나 금속이 부딪쳐서 나는 소리는 가슴속에 일어난다. 

- 나쓰메 소세키, <<풀베개>>, 7쪽~ 8쪽(오석윤 옮김, 책세상)



나쓰메 소세키는 무슨 이야기를 하려고, 소설의 첫 문장들을 이렇게 구성했을까. 나는 몇 주째 이 문장들을 지나 앞으로 가지 못하고 있었다. 


그리고 마그네슘 부족인지 왼쪽 눈 부근 근육들이 파르르 떨리기를 반복하고, 잇몸은 수시로 붓는다. 어깨가 결리고 입안은 헐었다. 내일에 대한 불안 때문일까, 아니면, ... 


현암사에서 나오는 나쓰메 소세키 전집을 장만하고 싶으나, 그의 소설을 읽을 시간마저 없는 이에게 전집은 사치라는 생각에 ... ... 


비 오는 대체공휴일, 사무실에 나와 일을 했다, 하지만 일은 손에 잡히지 않고,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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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 밖으로 불상들이 보였다. 파란색 카디건 안에 숨죽이고 있던 땀이 올라왔다. 아이스 아메리카노 주세요. 차가운 목소리를 가진 커피숍 아가씨가 내 대답을 받아주었다. 한남동이다. 나에게 조금 익숙한 신동빌딩이 있고 그 빌딩 일층엔 언제나 가고 싶은 와인샵이, 그 옆으론 BMW도이치모터스 한남전시장, 그리고 할리데이비슨 코리아가 있었다. 


봄이라고들 말하지만, 봄은 중년 사내의 마음 속으로 들어오지 못한 채 겉돌고 있기만 하다. 하긴 어느 해의 봄인들, 지쳐가는 중년을 즐거이 맞이할까. 봄은 화려한 사랑을 꿈꾸는 처녀들과 언제나 승리로 끝나는 모험과 도전만 있다고 믿는 청년들만 반길 뿐이다. 


테이블 위로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가져다 주었다. 그 사이, 나는 책을 떨어뜨렸다. 고요하던 커피숍 안으로 떨어지는 책과 그 추락을 가로막은 시멘트 바닥의 저지가 울렸다. 그러나 아무도 나를 쳐다보지 않았고 카페 안엔 단 두 명만 있었다. 중년의 사내는 카페 안 인원에서 제외하고. 


결혼 이후 혼자 있는 시간이 드물어졌다. 거의 없어졌다. 결혼 전엔 혼자 있는 시간을 종종 견디지 못했는데, 지금은 혼자 있는 시간이 그립기만 하다. 아내의 강권으로 아버지 수업을 들으러 가던 길이었다. 그리고 수업을 들었다. 


아이가 일곱 살이 될 때까진 아이와 많은 시간을 보내라, 아이가 아빠를 불렀을 때, 하던 일을 멈추고 아이에게 집중해라, 아빠와의 많은 교류가 아이의 인생을 좌우한다고 강사가 말했다. 그러는 동안, 나는 할아버지에 대해 생각했다. 아버지께선 할아버지를 보지 못하셨다. 아빠와 놀던 경험은 대를 이어 내려올 테지만, 나에게도 그 기억이 없는 걸 보면, 할아버지의 부재는 우리 집의 경제적 상황뿐만 아니라 정서적 상황에도 많은 영향을 미쳤구나 하는 생각을 처음 했다. 


 



커피를 급하게 마셨다. 집에서 한남동까지, 한남동에 도착한 시간과 수업이 시작하는 시간 사이의 여분은 약 이십 분 정도였으니까. 요즘 자주 왼쪽 눈꺼풀이 얇게 떨린다. 마그네슘 부족이거나 스트레스 탓이다. 갑작스레 다가온 봄 탓이다. 나는 계절의 변화가 싫고 얇아지는 옷만큼이나 불안해지는 마음이 싫다. 


책을 읽는다. 마이클 더다의 고전읽기의 즐거움은 도서관에서 빌려 읽다가, 결국 사게 된 책이다. 사고 난 다음, 사길 잘했다는 위안을 안겨주었다. 분명 이 책으로 인해 나는 수십 권의 책을 죽을 때까지 사게 될 테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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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 생활에서 영어를 쓸 일이 없다보니, 영어 실력은 늘 제 자리 걸음이다. 방통대 영문과도 휴학 상태이고. 겨우 영문을 읽는 속도만 조금 빨라진 것같다. 이제서야 영어 표현의 중요성을 깨달았으니. 그 동안 시간 허비를 한 셈이다. 아니면 이 정도의 시간이 걸려야만 깨달을 수 있는 것이든가. 


요즘 잠시 쉬는 틈을 활용에 하루에 1시간 이상 영어 공부를 하고 있는데, 영어를 공부할 수 있는 환경이 너무 좋아졌더라. 


외국어는 무조건 많이 들어야 하는데, 예전에는 들을 수 없었다. 고작 AFKN(주한미군방송)이었는데, 이것도 주파수가 잡히는 지역에서나 가능한 일, 나머지는 그저 어학 테잎만 주구장천 들어야만 했다.  


그런데 지금은 인터넷엔 들어가면 온통 다 영어다. 커뮤니티에 들어가 영어로 댓글을 달거나 게시물을 올릴 수도 있다. 영어 채팅도 가능하고. 특히 Radio Station이나 Podcast는 그 활용도가 매우 높다. 특정 Podcast의 경우에는 홈페이지에서 원고도 제공해준다. 


내가 요즘 거의 끼고 사는 APP은 Public Radio & Podcast라는 앱이다. 영어 공부를 위해 웹 방송국을 찾는 경우에는 해당 방송국 App을 설치한다. 하지만 일일이 찾아 설치할 수 없는 노릇이다. 방송국 리스트가 있다면 좋을 텐데. 


Public Radio & Podcast은 수백개 이상의 웹 방송국 목록을 카테고리별로 제공해준다. BBC나 CBC는 별도 카테고리로 구분되어 있고, 그 외 클래식음악, 재즈/블루스, 뉴스와 좌담, 락, 그 외 카테고리로 구분하여 방송국을 찾아 들을 수 있다. 아니면 자신이 직접 해당 방송국을 등록할 수도 있다. 


Podcast의 경우에는 분야별로 제공해주고 있다. Art&Life, Books, Business&Economy, Careers, Education, Food, Health, History, Kids&Family, Literature, Music, ... ... 등등. 


이 어플리케이션 하나면 거의 대부분의 라디오방송과 포드캐스팅을 커버할 수 있을 것이다. 




   




내 경우에는 NPR를 주로 듣다가 요즘에는 CBS의 Radio One과 클래식 음악 전문 라디오를 즐겨 듣고 있다. 영어 공부용이기 때문에, 출퇴근 시간에는 CBS를 듣고 휴식을 취하거나 책을 읽거나 할 경우에는 클래식 전문 라디오를 듣는다. Capital Public Radio의 Classical 채널은 선곡이 무척 좋다. 그리고 말도 없이 음악만 계속 나온다. (누가 미국 라디오에는 음악 중간 짜르고 광고 나온다고 했던가!!) 클래식 음악 팬들에게 강력하게 추천한다. 포크락을 좋아하는 이들에겐 WFDD - Wake Forest's Music이 좋다. 


나도 모든 채널을 듣지 못했기 때문에 직접 서핑하듯 들어보고 결정해보길. ~ 






다운로드 : https://play.google.com/store/apps/details?id=com.nprpodcastplayer.app (google play) 



* * 


리뷰를 올리고 관련 APP 리뷰들을 찾아보니, 역시 이 APP이 최고임을 다시 느끼게 된다. 지금 듣고 있는 채널은 KPBS - Classical San Diego다. 샌디에고에 위치한 방송국으로 웹사이트를 통해 방송 중인 내용을 알려준다. 클래식 음악을 듣다가 작곡가나 연주자, 작품명을 알고 싶은 경우가 종종 있는데, 꽤 유용하다. 


KPBS http://www.kpbs.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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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 04. 08 



어느 아침. 여긴 멀구나, 집에서, 그대에게서, 우주에서, 마음에서,
풀잎소리에서, 미소에서, 저 아름다웠던 시절로부터 여긴 참 멀구
나, 너무 멀리 왔구나, 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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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주(禁酒)가 금주(琴酒, 거문고와 술)이었으면 얼마나 좋을까. 그러고 보니, 한달 이상 술을 마시지 않은 게, 그 때 이후로 처음인 것같다. 나 혼자만의 사랑에 빠져, 나 혼자 발광하다가 차였을 때. 그리고 한참 후 그 때 그 소녀를 다시 만났는데, 그 땐 왜 계속 만나지 않았을까. 지금 돌이켜보면, 그 때 그 소녀 참 좋아했는데 말이다. 그러나 나, 잘난 척하지만, 내 깊숙한 곳엔 어떤 컴플렉스가. 결국 그런 문제와 부딪힌다, 그러니, <<하나비>>같은 영화만 좋아하는 것이다. 막판에 가서 폭발하곤 끝장내는. (하긴 컴플렉스 없는 현대인이 어디 있을까. 거대 도시에서의 삶, 자본주의 아래에서의 강력한 경쟁을 경험한 지 이제 고작 150년 정도 되었는데, 저 오래된 농경생활에서 벗어나...)  


침묵의 끝은 폭발과 함께 오는 정지. 


한 달 정도를 쉬고, 다시 일을 시작했다. 이번 일은 3달 정도로 예상하고 있는데, 이런 직업적 불안정함이 나는 이제 싫다. 몇 군데 이력서를 내고 면접을 볼 예정이다. 사업을 꿈꾸지만, 지난 일 년 간 경험을 돌이켜볼 때, 나는 아직 사업을 감당할 능력이 되지 못한다,고 결정내렸다,고 여긴다. 


그 사이 책 읽는 눈과 글을 쓰는 손, 그대를 만나러가는 발, 화사한 색을 마주 하는 가슴,들이 먼지로 뒤덮여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한때 먼지를 치워주던 이들이 어디론가 사라진 21세기. 


불가피한 이유로 한 달 반 이상 술을 마시지 않고 있는 지금, 술 생각이 전혀 떠오르지 않는 나를 보며, 스스로 신기한 듯, 묻곤 한다. 정말 술 생각이 없는 거야? 


실은 도망치고 싶은 거다. 어쩌면 모든 이들이 지금 여기에서 도망치고 싶은 거다. 다원주의는 개인주의를 바탕으로 하고 개인주의는, 결국 힘없고 어리석은 개인에게 거창한 자유(결국엔 전혀 자유롭지 않았던)와 감당하기 어려운 책임(자신과 무관한 사건들에 대해서까지)을 묻는다. 결국 자유를 누리고 책임을 다하려면, ... 글쎄, 의외로 어렵고, 화가 나고, 불공평하고, 뭔가 저질러야만 할 것같은 느낌에 휩싸인다. 결국 자유도 버리고, 책임도 버린다. 그냥 시키는 대로 사는 거다. 


하지만 나는 무뇌아가 아니다. 


비 속 바람에 우산이 날렸고 나는 없는 힘마저 꺼내 우산을 잡았다, 그렇게 그 때 사랑을 잡았다면, 그렇게 기회를 잡았다면, 그렇게 탁월한 선택을 했다면, 그 아름다운 우산은 날아가지 않았을 텐데, ... 어느 사월 월요일, 비가 왔고 바람이 불었다. 


그리고 비가 그치고, 바람이 멈추고, 어둠이 내려오고, 동화책을 읽어달라던 아이가 잠에 들고, 의미 없는 잔소리를 하던 아내가 아이 옆에 눕는다. 


아, 그런데, 이 노래, 너무 좋기만 하다. 금주琴酒를 하지 못하고 금주禁酒를 하는 중년에게, 이런 애잔한 노래가 어울리는 법이다. 더 늦기 전에 춤도 배우고, 악기도 배우고, 사랑도 배워야겠다. 더 늦기 전에, 사랑을 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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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처를 드러낼 때, 사람은 아름다워진다. 그제서야 상처는 아물기 시작한다. 


상처 없는 사람 없고 상처로 아파하고 고통받지 않는 사람 없다. 상처는 영광이자 추억이고, 회한이며 깊은 후회다. 상처는 반성이며 아물어가며 미래를 구상하고 펼쳐나간다. 상처 안에서 우리는 단단해지며, 성장하고, 한 발 한 발 걸어나간다. 


떠나가는 이의 뒷모습은 아프지만, 언젠가는 아련하게 아름다워진다, 처절하게 그리워지기도 하며, 눈물겹도록, 상처,들 속에서 나는 너를 알고 이해하고 받아들이며, 내 속에 너를, 타자를 키우게 된다, 같이 살게 된다. 


그렇게 타자들이 쌓여 상처는 너에 대한 예의가 되고 세상에 대한 공감과 배려가 된다. 한때 우리 젊은 날을 물들였던 절망과 분노는 상처 속에서 더 깊어지다가, 끝내 상처로 인해 사랑으로, 희망으로, 용기로 거듭난다. 


나는 어제도 상처 입었고, 오늘도 상처 입으며, 내일도 상처 입겠지만, 상처는 끝내 아물 것이고 오늘의 고통이 내일 나를 만들 것이다. 그러니 상처, 나는 너이고 너는 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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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 죽이지 말아요. 난 지금 사랑에 빠졌거든요.

Don't Kill Me, I'm In Love



그러게, 사랑에 빠진 이를 죽이는 건 아닌 것같다. 하지만 그것이 불륜이라면. 레이몽 라디게의 소설 <<육체의 악마>>가 끊임없이 우리를 매혹하는 이유는, 위험한 사랑만큼 진실해보이는 것도 없기 때문이다. 로미오와 줄리엣이 위험한 사랑을 했듯, 젊은 날 우리는 모두 금기된 사랑을 꿈꾸었는지도 모른다. 




감수성 예민하던 시절이 지나고 벚꽃이 피고 가늘기만 한, 얇은 봄바람에도 그녀의 손톱 만한 분홍 꽃이파리가 나부끼는 거리를 걸어가면서도 나는 애상에 잠기지 않, 아닌 못한다. 생계의 위협이란 이런 것이다. 


새장 속의 새를 아들은 한참이나 바라보더니, 새 한 마리 사서 친구들에게 보여주고 싶다고 했다. 아직 초등학교도 들어가지 않은 아들마저도 남에 자랑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은 거다. 




나라고 해서 자랑하고 싶은 마음이 없겠냐만은, 사는 게 그런 게 아니다. 사는 게 그런 게 아니다, 라고 중얼거리지만, 그런 게 아니면 도대체 무언가. 인류가 신을 만들고 종교를 만든 것에는 다 이유가 있지만, 그것이 새로운 종류의 악행들의 시작이 될 것이라곤 생각하지 않았을 것이다. 인간은 지구의 지배자가 되기엔 어리석기만 하다. 다행인 것은 어리석다는 사실을 현대의 이론가들은 희미하게 깨닫기 시작했으니. 


새장을 보면, 늘 막스 베버가 떠오르고 구조주의자들이나 비트겐슈타인을 생각하게 되는 건, ... 내가 너무 세상을 어둡게 바라보는 걸까. 


아니면 새장 속의 자유마저도 부럽게 느끼는 걸까.


지난 봄날, 그 하늘거렸던 사랑은 어디로 사라진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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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많던 프로젝트를 끝내고 잠시 쉬고 있다. 마흔이 지난 후, 일만 한 듯 싶다. 한 때 미술계에 발 담근 기억이 아련하기만 하다. 전시를 보러 가는 횟수도 줄었고 미술계 사람을 만나는 일도 드물다. 


과정이 어떻든 간에, 결과가 좋지 않으면 잘못된 것이다. 돌이켜보니, 내 잘못도 많은 듯하여 마음이 아프다. 지난 1년 간 대형 SI프로젝트 내 단위시스템 PM 역할을 수행하면서 수평적 커뮤니케이션, 전체 프로젝트 관점에서의 단위 시스템에의 접근, 협업을 위한 커뮤니케이션 전략, PM으로서 인력 채용과 관리 등 많은 부분에서 그동안 내 장점으로 부각되었던 것들이 단점으로 드러나 더욱 힘들었다. 


잠시 쉬면서 지난 1년을 되새기고 있는데, 쉽지만은 않다. 나이가 들어서도 계속 배워야한다는 건 늘 힘들다. 스스로 채찍질하며 끊임없이 변화할 수 밖에 없고, 과거의 나를 부정해야 한다. 미래라고 해봤자 불과 몇 십년인데, 계속 변화시켜야만 한다. 현대란 유동적인 것이라고 했던가. 하긴 지그문트 바우만은 아예 '액체근대'라고 했으니. 


1년 만에 이력서를 업데이트하면서, 과연 나를 채용하기 위한 의사결정에 도움이 될만한 이력서인가 돌이켜보았다. 늘 채용이 결정되고 난 다음 이력서를 냈다. 단 한 번도 이력서를 먼저 제출하고 입사한 적이 없다. 이것도 재주라면 재주인데, 그러기엔 나이도 많고 경력도 많다. 


이래저래 고민 많은 3월이다. 잠시 쉬고 있던 영어 공부를 하는 중인데, 언어는 참 부단히 배워야 한다는 걸 새삼 느끼고 있다. 여유가 된다면 몇 달 영어 연수나 갔다 오면 좋겠다. 



거의 반 년만에 교외로 나들이를 했다. 아직 서해 바다 바람은 차기만 했다. 중고차라도 하나 구입해야 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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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 온 뒤 땅은 단단해진다고 말한다. 하지만 비의 종류에 따라 달라질 게다. 그냥 조용히 반 나절 정도 내리다가 그치는 비라면, 곧이어 햇살이 비친다면, 그 위로 이름 모를 들짐승이 다니고 초록빛 풀들이 자라난다면, 분명 땅은 단단해질 것이다. 


하지만 며칠째 쉬지 않고 폭우가 내린다면, 땅은 단단해지는 대신, 패이고 상처 입고 무너질 것이다. 


일도 그렇다. 어떤 종류의 일들은 자신을 성장시키지만, 어떤 종류의 일들은 포기하도록 만든다. 바쁜 일들이 어느 정도 마무리되고 있는 중인데, 마무리도 너무 어렵기만 하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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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기억해둘 만한 해가 되었다. 2016년, 아직 프로젝트는 끝나지 않았고 주말에 쉰 적이 없다. 스트레스로 인한 폭음 뒤, 몸져 누워 나가지 않은 때를 제외하곤. WLB(Work & Life Balance)라는 단어를 이야기했던 때가 부끄러워졌다. 


일요일 출근 전, 르 클레지오를 짧게 읽었다. 불과 1년 만에 이렇게 동떨어진 일상이 되었다는 사실이 놀랍기만 하다. 스물 여덟 무렵, 자신만만하게 젊은 날의 르 클레지오를 사랑한다고 이야기했는데, 그의 놀라웠던 데뷔작, <<조서>>, 그 이후의 슬프고 감미로웠던 <<홍수>>, <<사랑하는 대지>>, <<물질적 황홀>> ... 십 수년이 지나고 노년의 르 클레지오는 서울에 와서 살기도 하고 노벨 문학상을 받았는데, 이제 르 클레지오는 내 일상 밖으로 물러나 있었다.


내 탓도, 세상 탓도 아니다. 애초에 이렇게 설계되어 있었다. 거대한 인과율 속에 우리는 잠겨 있고, 그 체계가 실재하는 것이든, 상상적인 것이든 상관없다. 꿈 속에 있으면 그것이 실재라고 믿듯, 우리는 새장을 벗어날 수 없고 언어를 버릴 수 없다. 쓸쓸한 1월이고 슬픈 겨울이다.  



모든 것은 자리를 바꾸고 움직이고 서로 침투하며 수정된다. 그러나 모든 것은 존재하며 모든 것은 명백하다. 만약 죽음이 한 인간이기를 그치는 것을 뜻한다면 세계의 이 모든 광경은 죽음의 광경이다. 사실적이며, 실제로 있는, 효과적 죽음, 지울 수 없고 단단하고 정확한 죽음, 저항할 수 없고 바꿀 수 없으며 떼어낼 수 없는 죽음의 광경, 바라보는 수백만 개의 눈, 무한히 많은 눈들의 비전이요, 또 그 눈들을 보지 못하는 우리들의 시선인 죽음의 광경이다. 

- 르 끌레지오, '침묵' 중에서 (김화영 옮김, 세계사)




J.M.G. Le Clézio, portraits (1963 à gauche, 2011 à droite). Sourcing images : "L'Express", 1963. "Le Monde", 2011 (archives Vert et Plume) 

출처: www.the-plumebook-cafe.com/jusqua-la-fin-du-monde-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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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휴일.퇴근길.여의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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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월 1일, 흔적


새해 아침 게으른 커피 한 잔 손열음의 쇼팽 이안 맥퀸의 속죄 도널드 바셀미와 몇 개의 펜 낡은 다이어리 그리고 견디기 힘든 일상의 스트레스, 하지만 올해에는 내 삶을 사랑해보기로 하자. 






1월 2일, 출근 






1월 2일, 퇴근 





어떤 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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쓸쓸하고 가여운 아침의 풍경, 

모두들 행복하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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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를 쓰진 못했지만, 가을과 겨울 사이 몇 권의 소설들을 읽었다. 루이지 피란델로의 <<나는 고 마티아 파스칼이오>>, 미셸 우엘벡의 <<지도와 영토>>, 조나선 사프란포어의 <<엄청나게 시끄럽고 믿을 수 없게 가까운>>, 모신 하미드의 <<주저하는 근본주의자>>, 김연수의 <<7번 국도>>.  이 밖에도 몇 권의 책을 읽었고 짧게나마 리뷰를 올리기도 했다.


하지만 글은 형편 없고 독서의 질은 끝 모를 바닥으로 떨어졌지만, 책을 읽긴 했다. 의미과 무의미 사이에서 길을 잃어버린 독서였다. 왜 나는 갑자기 이렇게 소설책들을 많이 읽게 된 것일까. 


원하지 않는 일들이 연거푸 초가을부터 초겨울 사이 일어났다. 주말 없이 사무실에 나가고, 밤 늦게 퇴근하는 생활이 반복되었고 욕 먹으면서 일을 했다. 협력업체 직원들은 급여가 밀렸고, 그들과 함께 일하는 나는, 그들의 불성실함 대신 출근하지 않는 불상사를 염려했다. 실은 이때 반대로 움직여야만 했는데, 그러질 못했고 그럴 형편도 되지 않았다.


내가, 우리 팀이 맡은 부분은 종속적 시스템인지라 타 시스템이 끝나야만 처리되는 일이었지만, 다른 시스템들은 우리와 무관하게 미궁으로 빨려들어가고 있는 중이었다. 그러는 사이 아버지께서 입원하셨다. 고향에서 서울로, 다소 생소한 병명으로 송파구에 있는 큰 병원으로 와서 수술 준비에 들어갔다. 그리고 나는 일을 그만둔다고 했다. 여의도 사무실과 서울 동쪽 끄트머리 병원을 오가는 생활을 몇 주간 했다. 그 사이 회사에선 나를 대신할 사람을 찾았다. 


그러나 일을 그만두지 못했고 대신할 사람은 나타나지 않았다. 그나마 다행스럽게 수술은 잘 끝나, 아버지께선 다소 고통스러우나, 약간의 희망을 얻을 수 있는 방사선 항암치료를 받고 계신다. 


그렇게 가을이 지나 겨울이 왔다. 미궁으로 빨려들어가던 주 시스템 개발은 제자리로 돌아왔고 프로젝트는 내가 맡은 부분만 남는 상황이 되었다. 스트레스와 부담감은 끝없이 치솟았고 마지막까지 남아있던 이들마저 그만 두겠다고 나에게 이야기했다. 이런 상황 속에서 내가 선택할 수 있는 카드는 거의 없(었)다. 그냥, 계속 해왔던 것처럼 욕 먹으면서 일 하는 것. 


이전 회사들을 다니면서 WLB(Work-Life Balance)를 이야기하곤 했는데, IT 프로젝트들 중에서도 최악이라고 알려진 금융권 차세대 프로젝트에선 '일과 일상 사이의 조화'란 불가능하다, 불가능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이 이상한 상황 속에서 '다들 원래 이래', 그러면서 그걸 묵묵히 견디며 일을 하고 있었다. 어쩌면 다들 SM인 걸까. 얼마나 험난한 일을 거쳐왔는가를 자랑스럽게 여길 수 있는 날을 기대하는 걸까. 그런 고난 거쳐 성공했다고. 뭔가 이상하지만, 나 또한 그러고 있(었)다. 


우리들의 목표, 우리들의 지향점은 어디일까? 


나도 잘 모르겠다. 스무살 때는 뭔가 변화를 일으킬 수 있으리라 여겼는데, 지금은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는 생각만 든다. 대단하다고 여겼으나, 다들 평범했고 똑똑하고 영특하다고 여겼으나, 현실적 영향력은 없었다. 그저 다들 별 볼 일 없었다. 


그렇게 나는, 조금 늦었지만, 지금 사무실로 나가 저녁에 돌아올 듯 싶다. 26일도, 27일도. 그나마 다행스러운 건 1월 안에 내가 맡은 이 일들이 끝나게 될 지도 모른다는 희망을 가지게 된 것이다. 그 이후로 뭘 하게 될 지 모르겠지만. 


프로젝트가 끝날 때까지 술을 마시지 않기로 했다. 스트레스로 인해 술을 마시면 폭음을 하게 되고 내 일상을 망가뜨렸다. 내년 2월, 편안한 마음으로 술을 마실 수 있기를 기대해보기로 하자. 전시도 좀 보고 여행도 다니고 ... 그게 가능할련지 모르겠지만... 


마지막으로 계절 사이에서 내가 읽었던 소설들의 짧은 느낌을 덧붙인다. 


피란델로의 <<나는 고 마티아 파스칼이오>>에선 주인공 파스칼은 다른 사람의 인생을 살다 다시 제 자리로 돌아간다. 사랑은 잃어버렸지만, 자신을 고통스럽게 하던 과거의 인생과는 결별할 수 있었다. 하나의 상처는 또 다른 상처로 해소된다. 우엘벡의 <<지도와 영토>>는 현대 예술에 대한 코메디이고, 사프란포어는 특유의 형식 속에 상처를 치유해나가는 어린 소년의 이야기가 담겨 있었다. 나는 마지막 부분에 가서 울컥하기도 했다. 모신 하미드의 <<주저하는 근본주의자>>는 저널의 찬사와 달리 약간 맥이 풀리는 느낌이랄까. 그만큼 이슬람의 문제가 우리에게 중요하지 않아서일지도 모르겠다. 김연수의 <<7번 국도>>는, ... 아직도 출판되고 있다느 것이 의아스러웠다. 이십대 중반 김연수가 쓴 소설이고 형편없었다. 실은 내가 이 소설을 잘못 구입한 것이다. 


좋은 일이 뜸하다. 기쁜 일이 많아졌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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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간다는 것에 대해 순간순간 묻지만, 답은 없다. 하지만 몸과 마음은 움직이고, 움직여야만 한다. 설령 그게 잘못된 방향일지라도. 그게 삶이다. 자신이 원하는 것, 노력하는 것, 정성을 쏟는 것과 무관한 게 삶이다. 하지만 원하고 노력하고 정성을 쏟는다. 이게 또한 삶이다. 그러면 나는, 우리는 뭘 해야 하는 걸까?


술이나 마셔야 하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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뜻밖의 많은 눈 속의 내키지 않은 출근길. 작고 낡은 검정 타이어를 끼운 초록 빛깔 마을버스가, 빠르게 떨어져 쌓이는 눈송이들을 아주 느리고 무겁게 밟으며 힘겹게 경사진 도로를 올라왔다. 누군가가 바쁜 출근길에 왜 이렇게 마을버스는 안 오는거야라고 말했지만, 정류소에 있던 다른 이들의 입술, 목, 눈꼬리, 머리, 다리는 반응하지 않았다, 못했다, 숨을 헉학대며 버스가 왔다. 계속 눈이 내렸다. 출근은 시작되었지만, 변하는 건 없었고 우리들 모두 내일이 있는지 확신하지 못했다. 어쩌면 오늘 모두 다 죽을 지도 모를 일이다, 그렇게 꿈꾸고 있을 지도 모를 일이다, 이건 사랑하던, 했던 그녀도, 한때 믿는다고 착각했던 하나님도 모를 일이다. 그런데 왜 사람들은 뭔가 문제가 생기면 우리를, 나를 찾는 걸까, 정말 모를 일이다. 나이가 들수록 이 세상, 사람들을 모르겠다, 모른다고 믿기 시작했다, 그렇게 생각할 수 밖에 없다, 없었다. 그렇게 실패하며 나는, 우리는 늙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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걱정은 태산같고 시간은 쏜살같다. 몇 달 사이 너무 많은 일들이 있었고 그 일들은 지금도 진행 중이다. 쓸쓸하기만 초겨울, 눈발이 날리는 강변 도로를 택시 안에서 잠시 졸았다. 나는 아주 잠깐, 졸면서 기적과도 같이 행복한 꿈을 꾸고 싶었다. 


며칠 전 가로수를 찍었다. 무심하게 계절을 보내는 은행나무의 노란 빛깔은 어두워지는 하늘과 차가워진 대기와 묘한 대비를 이루며 시선을 끌어당겼다. 그 가로수 밑에선 누군가를 기다리는 듯한 얇은 몸매의 미니스커트를 입은 처녀가 연신 핸드폰을 쳐다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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