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하련의 우주/Jazz Life 993

봄비, 술, 몇 가지 생각

어제 소리 없는 내리는 봄비 모습이 좋았고 오늘 창 틈으로 밀려든 봄날 스산함이 좋았다. 몇 가지 더 좋은 일이 봄바람을 타고 밀려들었으면 더 좋겠다. 모든 일들이 내 뜻대로 된다면 얼마나 좋을까. 문장은 빈약해져가고 내 영혼은 가난함으로 물들어있다. 오랜 만에 턴테이블로 음악을 들었고 시디 케이스의 먼지를 닦았다. 밀린 신문을 읽으며 일을 했고 커피를 마셨고 담배를 피웠다. 힘든 생활의 연속이지만, 잘 되거라 믿는다. 주중에는 시간을 내어 전시를 볼 것이고 몇몇 사람들에게 전화를 걸어 안부를 물을 생각이고 책도 읽고 음악도 들을 것이다. 그리고 착한 사람을 만나 이야기를 하면서 저녁을 같이 하면, 더욱 좋을 것이다. Little Jack Melody의 'The Ballad Of The Ladies' M..

Y Tu Que Has Hecho?

벌써 4년이 지났다. 이 노래를 들었던, 그 때. 그 사이, 나는 더 황폐해진 걸까. 아니면 더 우아해진 걸까. 혹은 변하지 않은 걸까. 뜻하지 않은 과거로의 상념은 사람을 참 서글프게 만든다. 거의 열흘 만에 헬스를 했다. 몸을 움직이면 그 때만은 살아있다는 느낌이 든다. 요즘 담배를 자주 피고 스트레스를 받고 정장을 입고 다닌다. 예전에 깔끔해보였던 정장 차림이, 요샌 부쩍 나이 들어 보인다. 나이가 들긴 했지만. Y Tu Que Has Hecho? - by BuenaVistaSocialClub En el tronco de un arbol una nina Grabo su nombre henchida de placer Y el arbol conmovido alla en su seno A la nina ..

쓸쓸한 봄 바람

긴장된 하루하루가 지나간다. 일은 계속 밀리고 한 달의 끝이 다가올수록 불안함은 증가한다. 미켈란젤리의 피아노 소리가 내 거친 볼 위를 지나간다. 그 위로 봄날의 쓸쓸한 바람, 거리의 먼지 향기, 돋아나는 나무 이파리들의 소곤거림도 함께 지나친다. 내 영혼의 위안을 위해 꺼내든 것은 미켈란젤리. Michelangeli play Brahms Ballad op 10 no 2 at Lugano in 1982

3월 저녁의 스산함

앙리 마티스의 젊은 시절, 지붕 밑 아틀리에를 그린 작품이다. 마티스는 이 그림을 그리면서 무슨 생각을 했을까. 작품 속의 아틀리에 안은 창 밖 밝은 세계와 대비되어, 어둡고 쓸쓸하며 심지어 절망적이기까지 하다. 색깔들이 어우러지면서 그토록 많은 슬프고 우울한 감정을 보는 이로 하여금 자아내게 만든다는 사실은 놀랍고 경이로운 일이지만, 이 색깔들이 자신의 인생 한 복판에서 어우러진다면 기분이 어떨까. 아직 서울에서 봄이 오는 풍경을 보지 못했고 그저 봄 바람이 전해주고 간 저녁 공기의 스산함만을 느꼈을 뿐이다. 그런데 우스운 것은 아무렇게 집어든 클래식 시디에서 귓가에 와닿아 마음을 흔드는 노래 한 곡의 제목이 '봄의 신앙'(Fruhlingsglaube, Faith in Spring)이라니. 봄이 오기는..

갈색 먼지의 목감기

갈색 먼지로 뒤범벅이 된 레코드자켓에서 타다만 낙엽 끄트머리 색깔과 닮은 레코드를 꺼내 일본의 어느 전자 공장에서 나온 지 족히 20년은 넘긴 파이오니아 턴테이블 위에 올린다. 그리고 잠시 후 남자들의 목소리가 흘러나온다. 낡은 목소리들이다. 그 목소리들 사이로 문학을 이야기하고 예술을 이야기하던 그 때 그 시절의 고통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듯 하다. 하긴 그 때나 지금이나 내 보이지 않는 세계의 영혼은 변한 건 별로 없는데. 그러나, 결정적으로 보이는 세계의 영혼은 너무 많이 변해버렸다. 어제 낮에 세탁기를 돌리기 시작했는데, 오늘 오전까지 계속 돌아가고 있다. 잠시 세탁기로 흘러나오던 물이 끊어진 탓이다. 그리고 나는 세탁기의 삶은 존중해주기로 마음 먹은 적은 없지만, 대신 내 삶의 피곤에 지쳐 금방..

볶음국수

(출처: http://onokinegrindz.typepad.com/ono_kine_grindz/ ) 종종 혼자 밥을 먹어야할 때가 있다. 아니면 나처럼 매일 혼자 먹어야 하는 사람도 있다. 그리고 매일 혼자 시켜서 먹는 사람도 있다. 아주 드물게 베란다에 밭을 만들어놓고 혼자 상추에 밥 싸먹는 사람이 있기도 하다. 가끔은 혼자 밥을 먹는다는 행위가 꽤 철학적이라는 생각이 든다. 혼자 있다는 것을 일상에서 가장 절실하게 느낄 때가 바로 혼자 밥을 먹을 때이다. 그것도 혼자 생활하기 시작한 지 7년 정도 지난 후, 겨울이 끝나가고 봄이 막 두터운 외투를 벗으려고 하는 느즈막한 일요일 오후, 창틈으로 뿌연 햇살이 밀려들어오지만, 누구에게도 연락할 곳이, 솔직히 연락할 자신이 없을 때, 그 때 혼자 오래된 김..

아침

조금의 집중력이라도 남아있으면 좋을 텐데 말이다. 결국 책상 앞에 앉아만 있을 뿐, 아무 짓도 못했다. 어차피 내 인생이라는 게, 시도만 좋을 뿐, 결과는 참혹했으니까. 하지만 구름 뒤에서 끊임없이 구름을 태우는 태양처럼, 나도 그렇게 참혹한 결과를 밀어내어야 할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내가 먼저 태워질 테니. 결국 '발악'인 셈이다. 베르디의 '레퀴엠'을 듣고 있다. 새벽에 일어났으나, 조금만 더 잘까 하는 안일함으로 늦잠을 자고 말았다. 영어학원 강사가 속으로 얼마나 욕을 할까. 다음 주 수요일 독일 프랑크푸르트로 간다. 프랑크푸르트 근처의 칼스루헤에서 열리는 국제 아트페어에 참가하기 위해서. 규모도 꽤 되고 유럽의 신생 아트페어들 중에서 높은 평가를 받고 있는 아트페어로 알려져 있다. 어제는 작품 ..

월요일 아침의 우울

생을 휘감고 도는 불안이 내 방안에 가득했다. 그것들을 밀어내기 위한 나의 사투는 애처로울 정도였으나, 결국 역부족이었다. 거친 입술이 얇게 떨렸다. 한 겨울밤의 적막. 견디는 것도 능력이라는 생각을 했지만, 과연 이렇게 견디는 것이 의미 있는 것인가 하는 생각도 동시에 들었다. 야누스와 같은 동시성은 가끔 사람을 극한으로 몰아부치기도 한다. 까뮈를 읽었다. 밀란 쿤데라를 읽었다. 김기림과 염상섭을 읽었다. 실은 거짓말이다. 까뮈를 읽었지만, 밀란 쿤데라는 읽다가 말았지만, 김기림과 염상섭은 사놓기만 했다. 윤동주의 서시를 외우고 있었는데, 이제 첫 구절 마저도 버벅인다는 걸 깨달았다. 불안함에 대한 각성. 커피 한 잔과 담배로 늦겨울, 쓸쓸한 추위를 견디고 있다. 말없는 금붕어 세 마리는 가끔씩 물 위..

남겨진 술 한 잔의 쓸쓸함

무슨 다른 생각을 하자. 눈을 감자 숨쉬듯 흐르는 몇 줄기 긴 선이 떠오른다. 사구에서 움직이는 바람 무늬다. 반나절을 줄곧 보고 있었으니, 망막에 각인되고 말았다. 그 모래의 흐름이 과거, 번영했던 도시와 대제국마저 멸망시키고 삼켜버린 적이 있다. 로마 제국의, 사브라타였던가…… 그리고, 주성(酒聖) 오마르 카이얌이 노래한, 뭐라고 하는 마을도...… 거기에는 옷가게가 있었고 정육점이 있었고 잡화점이 있었고, 그런 건물들 사이로 절대로 움직이지 않는 길이 그물망처럼 얽혀 있었고, 그 길을 하나 바꾸려면 관청을 둘러싸고 몇 년에 걸친 투쟁을 벌이지 않으면 안 되었다…… 어느 누구 하나, 그 부동을 의심조차 하지 않았던, 역사 깊은 마을…… 그러나 그런 모든 것들도 직경 1/8mm의 유동하는 모래의 법칙을..

좌표를 찾아 떠도는 향유고래

아무런 좌표 없이 떠도는 편이 더 낫았을 텐데, 나는 뭔가 좌표를 찾고 싶어 했다. 하지만 끝내 좌표를 찾지 못했다. 결국 찾지 못한 좌표 탓만 하는 나를 만나게 되었다. 끔찍한 기분이 들었다. 너무 끔찍해서 견딜 수 없었다. 좌표를 찾아 떠도는 향유고래. 한때 찬란하게 민감했던 내 청춘의 감각이 서서히 사라져가고 있다. 지금의 나는 사라져가는 그 감각을 뒤에서 물끄러미 바라만 볼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