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하련의 우주 1051

모카 커피

점심을 먹고 근처 공원에서 잠시 앉아, 바람의 속도, 그러니까 오랜 비가 지나가고 가을이 온다는 시절의, 사랑하는, 하지만 상대방은 그것을 모르는 한 대상에게 손을 뻗어 어떤 접촉을 시도할 때의 속도와 비슷한 ... ... 사무실로 들어오는 길에 모카커피를 하나 사 들고 사뿐한 걸음으로 걸어보려 노력한다. 사뿐한 인생. 사뿐한 인생. 사뿐한 인생. 그러나 오지 않을.

에밀 시오랑

"모든 것이 근거와 본질을 결하고 있다"라는 말을 되뇌일 때마다 나는 행복감 비슷한 그 무엇을 느끼곤 한다. 하지만 곤라한 건 내가 그 말을 되뇌이지 못하는 순간들이 많다는 것이다. 작가에게 있어서, 초탈과 해탈을 향한 진전은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재앙이다. 그는 누구보다도 자신의 결점을 필요로 하는 존재인 것이다. 그 결점을 이겨낼 때 그는 끝장이다. 그러므로 그는 보다 나은 존재가 되기 위해 노력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할 일이다. 왜냐하면 그렇게 된다면 그것을 지독히 후회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 '태어남의 잘못에 대하여'라는 책에서 옮긴다. 이 사람... 평생 독신으로 파리 구석 다락방에서 모국어를 버리고 불어로 글을 썼다는... ... 국내에는 별로 유명하지 않지만, 프랑..

6시

6시에 눈을 떴다. 일이 있어 한 시간 안으로 일을 끝내 메일로 보내줘야 한다. 그렇게 오래 걸리진 않을 것이다. 그러고 보면 '일을 한다'는 건 어떤 부가가치를 만들어내는 것인데, 막상 따지고 보면 그렇지 않은 일들도 많다. (그런데 왜 부가가치를 만들어내어야 하는 걸까?) 벌써 30분이 지났다. 커피 한 잔을 마셨다. 머리를 감고 노트북을 켜 일을 할 것이다. 끝내고 책을 좀 읽다 종로로 나가야한다. 지금 하고 있는 프로젝트 고객사에 가서 status를 체크해야만 한다.

멍멍이

멍멍이를 먹고 난 다음 창 밖을 보니, 비가 내리고 있었다. 하늘은 낮고 소리는 세밀해진다. 비에 거추장스러운 인생이 젖는다. 젖은 인생을 창 틀에다 걸어 말리면서 음악 하나 허공으로 던져 여름 바람의 활으로 연주되는 풍경을 듣고 싶지만, ... 그렇다, 여기는 도시다. 도시에선 멍멍이를 먹고 나 다음, 할 일이라곤 주섬주섬 몇 단어 엮어 몸을 흔들어 뛰어갈 수 밖에 없다. 비에 젖지 않기 위해서.

수요일 오전

비가 내리는 수요일에는 빨간 장미를 선물한다고 했던가. 그러고 보면 사람들의 청승맞음에도 여러 가지 단계가 있나 보다. 빨간 장미에 하늘에서 떨어지는 물로, 수분을 공급하게 만들고 자신의 몸을 적시는 그 물을 하늘의 눈물이라 여기고, ... 그러면서 가끔은 손에 든 빨간 장미가 짤려진 상태라는 걸 잊듯이 자신의 영혼도 불구라는 사실을 잊어버리곤 한다. 장미야 짤려진 몸뚱아리 흙과 공기과 물기가 있는 어느 곳에 심으면 자기 힘으로 살아 다음 계절에 꽃을 피우지만, 영혼의 불구는 그렇게 되지 못하나 보다. 오전 내내 고객사에 가서 프로젝트 현황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누었고 회사로 돌아오는 좌석 버스 안에서 땀을 흘리며 잠시 졸았다. 어느 여름 폭우 쏟아지는 수요일, 내 영혼의 장미꽃 한 다발을 위해, ... ..

하루

가 십 년 내지 십만년 정도로 느껴질 때가 있다. 너무 많은 일들이 일어난 건 아니다. 아주 작은 일이 여러 개, 혹은 조금 큰 일이 하나 정도... ... 꼭 가을에 낙엽 하나가 떨어졌는데, 그 낙엽 모양새가 이미 떠나간 여자의 손을 닮았다든가 아니면 자살한 친구의 머리 모양을 닮았다든가 뭐 그런 것이다. 오늘 그랬다. 어느 여자에게 '난 사랑을 믿지 않아요'라고 메세지를 남겼고 어느 여자에게는 아주 무뚝뚝하게, 아주 이기적인 태도를 남겼다. 언제나 나에게 진실이 존재하지 않았듯이 모든 게 진실이었다. 나에게 하나의 확신도 없었기 때문에 모든 것들이 확신이었으면 좋았다. 그러고 보면 쓰잘데 없는 인생에 너무 많은 고민을 하고 사는 건지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