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하련의 우주 1048

rain

아직 비의 사랑은 끝나지 않았다. 꼭 변심한 애인을 찾아나선 사내 의 발걸음같이 내리는 저 비는 무슨 사연이 저리도 깊어서 또 다시 내 리는 것일까? 아직 그는 변심한 애인을 찾지 못했나 보다. 여러번 기습적인 비로 인해, "비의 포옹"을 당했다. 오늘도 우산을 가지고 나가지 않았는데, 무거워지는 하늘을 보고선 다시 집으로 들어 왔다. 그리고, 이렇게 지금 비가 내린다. 번개와 천둥도 함께. 새 소설을 구상하고 있다. 소설의 제목은 "매혹당한 자들의 죽음" 이다. 시작이 반이라고 했으니, 난 소설의 반을 이미 끝낸 셈이다. 기 쁘다. 오늘 밤엔 기념으로 술이나 마셔야 겠다.

호모 파베르

"기다란 블론드 머리를 한 아가씨를 내가 처음 본 것은 배가 출항한 지 얼마 안 되어서였다. 우리는 식당 테이블 좌석을 정하기 위해서 식당에 모여야 했다." - 막스 프리쉬, 『호모 파베르』 중의 한 문장. 아버지와 딸의 첫 만남. 폴커 쉘렌도르프의 영화 『Voyager』(국내 번역 제목: 사랑과 슬픔의 여로)의 원작 소설. Stanley Myers의 영화 음악을 들으면서 지축을 울리며 추락하는 비 속의 감상에 빠지고 말았 다(* 참고로, 이 영화 속의 쥴리 델피는 정말로 이뻤다). * * 또다시 비가 내린다. 저 비는 무슨 생각을 하면서 아래로 떨어지는 걸까? 혹시 사랑하는 이가 이 지상 어딘가에 있는 건 아닐까. 그래서, 그(혹은 그녀)를 찾기 위해서. * * 몸 밖의 그대 1 채호기 1. 그대와 마..

여름 이야기

검은 레코드판 위에 핀 푸른 곰팡이들 같은 날씨가 계속되고 있다. 덥고, 짜증나고, 사람을 지치게 하는 날씨 말이다. 안개에 휩싸인 도 시의 풍경이 꼭 폭격으로 인해 뿌연 연기로 뒤덮인 것같았다. 우리를 살아가게 만드는 힘은 무엇일까? 저주스런 생활을 견디게 하는 그 힘 말이다. 혹시 그건 죽음이 아닐까? 사랑이나 희망 같은 눈부시고 아름 답다고 칭송되는 것이 아니라, 어둡고 축축하며 무거운 죽음이 우리의 삶을 지탱시키는 건 아닐까? 이런 뜬금없는 생각을 하는 건, 우리는 우리 자신들을 행복하게 만 들기 위해 엄청난 노력을 하지만, 정작 우리들 중 '정말로 행복하다' 고 느끼는 이는 극히 드물다는 데에 있다. 너무 변덕이 심해서 그런 것일까? 데카르트는 모든 것을 의심하고 난 다음 의심할 수 없는 그것을..

불면증

전등 불빛에 부딪혀 하얗게 부서지는 거미줄 끄트머리에서 여름밤 바람은 찰라를 머물다 지난다. 그 머무는 풍경을 바라보았다. 그 속삭 이는 풍경을. 거미줄 한가운데 어린아이 손톱 크기만한 거미가 앉아있 었다. 그는 외롭지 않을 것이다. 끊어질 듯한 세계지만, 그 세계 속으 로 무수한 것들이 스치고 지나감으로. 불면증이다. 잠이 오지 않는다. 이런 날 억지로 잠을 청하다 종종 가위에 눌려 새벽에 놀라 깨기도 한다. 이런 날 자장가를 불러줄 여인 이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다. 그래서 난 그 여인 대신 턴테이블이 나 시디 데크에 음반을 올려놓고 잠을 청한다. 그러나, 음반이 끝날 때까지 잠을 이루지 못하고 꼭 다시 일어나 한 번 더 바늘을 올려놓든 지, 플레이버튼을 누르지만. TELDEC에서 "바흐전집"을 ..

순간은 이렇게 아름다운 것이다.

01. 오후와 저녁 사이에 난 경부고속도로 위에 있었다. 그리고, 새벽과 아침 사이 난 중부고속도로 위에 있었다. 시간과 시간 사이를 난 달렸 다. 그러나 내가 달리지 않더라도 시간과 시간 사이는 물결처럼 흐른 다. 하지만 난 달렸다. 희망과 절망 사이를. 글을 쓴다는 것이 얼마나 사치스러운 것인가를 알게 된 순간, 그것 이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이라는 것을 동시에 알게 되었다. 그리 고, 이때까지 그 유일한 일을 난 희망이라 여겼다. 그러나, 그것은 그 림자일 뿐이다. 희망의 그림자. 난, 아니 프롤레타리아로서의 우리는 절대로 희망을 가질 수 없다. 이 세계의 본질은 '절망'이다. 그 절망을 만든 것은 우리들 옆에 바쁘게 움직이고 있는 우리들이다. 이 세상 어디에도 희망은 없다. 단 지 희망의 그..

자유롭지 못한 영혼을 위해

자유롭지 못한 영혼 하나 또 이렇게 으로 날아와 보잘 것 없는 절망의 흔적을 남긴다 "누가 우리를 위해 증언해 줄 것인가? 우리의 작품인가, 아니면 대체 무엇인가, 단지 ...... 우리를 사랑하는 사람들만이 ...... 그러나 사랑은 침묵이다. 우리는 모두 남모르게 죽어간다." - 알베르 까뮈 몇 달만에 벗에게서 전화가 왔다. 그는 모델이다. 그는 티브이에 나오기도 했으며, 곧잘 패션쇼에 서기도 했다. 그러나, 그의 꿈은 자유였다. 그는 그 자유를 위해 자신의 젊음을 망가뜨리기로 했다. 그러나, 자본주의 아래에서 망가짐이란, '자본으로 온 몸에 떡칠하기'다. 일 년 전쯤, 그와 함께 강남의 술집과 호텔 나이트를 전전했으며, 새벽이면 이태원으로 나갔다. 지금 그는 술과 여자로 젊음을 탕진하고 있다. 오늘..

萬感이 교차하는 시간들.

해바라기의 碑銘 - 청년 화가 L을 위하여 나의 무덤 앞에서는 그 차거운 碑ㅅ돌을 세우지 마라. 나의 무덤 주위에는 그 노오란 해바라기를 심어 달라. 그리고 해바라기의 긴 줄거리 사이로 끝없는 보리밭을 보여 달라. 노오란 해바라기는 늘 태양같이 하던 화려한 나의 사랑이라고 생각 하라. 푸른 보리밭 사이로 하늘을 쏘는 노고지리가 있거든 아직 날아 오르 는 나의 꿈이라고 생각하라. - 함형수咸亨洙. 창간호. 1936. 길을 가다 해바라기로 둘러쳐진 무덤을 본다면, 그대의 무덤인 줄 알고 고개 숙여 그대를 그리워하겠나이다. 그리고, 파아란 허공 속을 나는 노고지리가 있거든, 저는 아직 꺼지지 않은 그대 꿈을 쫓아 산으 로, 들로, 바다로 뛰어다니겠나이다. 하지만, 내가 다니는 길은 갈색 보도블록으로, 뚝뚝 부..

김영하.식민지지식인들.뒤샹.플라톤

파드릭 모디아노의 (김화영 역, 책세상)라는 소설을 읽다보면, "세상에는 두 부류의 사람들이 있지. 한 부류는 책을 쓰는 사람들이고, 나머지 한 부류는 책과 같은 인생을 살아감으로 해서,책을 읽을 필요가 없는 사람들이야. 자네는 어디에 속할 것같나?" 라는 문장을 만난다. 한때 이 둘을 혼동했었다. 책과 같은 인생을 살아야만 책을 쓸 수 있으리라 생각했었다. 그러나, 그건 단지 책과 같은 인생일 뿐, 책은 아니다. 나도 김영하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그의 매력적인 단편 , 를 읽고 '제법이다'라고 생각했지만, 결정적으로 (문학동네)을 읽고 망가졌다. 송경아도 이 부류이다. 조경란은 그녀의 등단작 을 텍스트로 문장연습을 한 경험이 있어, 전혀 신뢰가 가지 않는다. 그녀의 단편은 살아남지 못했다. 온통 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