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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아란 영혼

책들의 우주/문학 +237


그저 좋은 사람 (원제: Unaccustomed Earth 길들여지지 않는 땅) 

줌파 라히리Jhumpa Lahiri (박상미 옮김), 마음산책 





출처: http://www.telegraph.co.uk/culture/books/10304137/The-Lowland-by-Jhumpa-Lahiri-review.html



코스모폴리탄(Cosmopolitan)이란 단어가 등장한 것이 헬레니즘(Hellenism) 시대였으니, 이 시기는 고향을 떠나 바다 건너 도시로, 전 세계가 고향이 되거나 고향이 사라진 때였다. '사랑하면서 동시에 미워한다'는 이율배반적 싯구가 역사 최초 등장한 시기였으며, 전쟁으로, 혹은 폭정으로 몰락하는 도시를 뒤로 하고 새로운 도시를 향해 떠나던 시기였다. 젊은 알렉산드로스 3세가 길을 떠나 돌아오지 않았고 사랑은 없고 사랑하는 나만 있었던 시대였다. 어디서 왔는지 묻지도 말고 사랑하냐고 좋아하냐고 묻지 말고 그저 하룻밤을 보내던 연인들의 시대였는지도 모른다. 그런데 그런 시대가 다시 도래했으니, 바로 20세기 후반 이후의 우리 시대다. 


줌파 라히리(Jhumpa Lahiri), 익히기도 어려운 이름을 가진 그녀의 소설을 읽었다. 그녀는 미국인인가, 영국인인가, 인도인인가? 아니면 그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 건가? 깨진 도자기 파편이든지 집터의 흔적이든, 역사적 기록이 가능한 이래, 한 번도 코스모폴리탄을 경험한 적이 없었던 한국 사람들은, 한국 독자들은 줌파 라히리가 던지는 메시지를 알기나 할까? 


나는 이 소설집을 아주 길게, 혹은 띄엄띄엄, 이미 지쳐버린 사무실의 텅빈 점심 시간에, 하루에 꼭 두 번씩 정지했으면 하고 바라는 지하철 안에서, 외로워 마시는 술 한 잔이 목을, 위를, 온 몸을 적실 때마다 더 외로워지는 술자리에서, 나와 피부색이 다른, 아빠나 엄마 한 쪽이 동남아나 아프리카계인 소년, 혹은 소녀가 소설가가 되어 문단의 화려한 조명을 받는 그 순간을 떠올렸다. 그 순간은 언제쯤 올 것인가. 많은 독자들이 열광하며 따르는 시대는 올 것인가. 


가끔 이런 생각을 하면, 한국은 참 절망적인 곳이다. 


줌파 라히리의 소설들은 단정하고 예의 바르며 사람에 대한 신뢰를 잃지 않는다. 어쩌면 모든 위대한 소설이 다 그러할 것이다. 읽으면 아프지만, 다 읽고 나면 '그래, 우리 삶이, 내 삶이 이렇지', 되뇌이게 된다. 


이 단편집은 미국에서 살아가는 인도 이민자들의 삶을 다룬다. 그런데 '이민(immigration)에 대한 이야기는 나오지도 않는다. 인도 출신이라는 사실이 빠진다면, 평범한 미국인들의 가정 이야기다. 그렇다. 어디에서나 살아가는 건 똑같다. 줌파 라히리는 이렇게 보편성을 끄집어 내며, 독자들의 공감을 불러일으킨다. 


사랑하지만, 사랑에 대해서 이야기하지 않는다. 헤어짐은 있으나, 언제든지 만날 수 있는 이별이거나 좋은 추억으로 남는다. 최선을 다해 서로를 아낀다. 각자의 방식이 다르겠지만, 다르다는 건 축복이다. 갈등이 있고 오해가 있고 사건이 있을 수 있지만, 그건 지나가는 바람일 뿐, 서로 마주 잡은 손을 놓치지는 법은 없다. 어찌되었건 우리는 같은 땅 위를 살아가고 있으니까. 영원히 길들여지지 않을 그런 땅 위를 말이다.


오랜만에 참 좋은 소설을 읽었다. 이런 소설을 쓰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그런데 나는 글을 쓰는 고통을 이겨내지 못했다. 계속 노력했다면 그 고통을 이겨낼 수 있었을까. 그래, 용기가 없었다. 어쩌면 내 인생이나 네 인생이나 똑같아라는 말을 하기 싫었던 것일지도 모르겠다.  줌파 라히리의 인터뷰는 글을 쓰는 이들에게 많은 것들을 다시 한 번 더 깨닫게 해준다. 




출처: http://blog.naver.com/lesliepak/220067661295 (번역해주신 에게해님께 감사하며)



그저 좋은 사람

줌파 라히리저 | 박상미역 | 마음산책 | 2009.09.05

출처 : 반디앤루니스 http://www.bandinluni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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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베이에서 파는 75센트하는 중고책 구입해서 읽고 있는데요..첫번째 이야기부터 예사롭지 않네요. 첫소설로 퓰리처상 받았다는게 이해가 됩니다.

    • 아, 이베이! 이베이에서도 중고책을 파는군요(당연한 이야기지만). 영어로 읽으면 더 좋을 것같아요. 뭐랄까 편한 영어를 사용할 것같아요. 이창래의 소설을 영어로 읽으려다 포기한 경험이 있는 저로선. ㅜㅜ;;;
      줌파 라히리의 다른 소설도 읽을 계획인데, 밀린 책들이 너무 많아서 아마 내년 여름은 되어야 할 것같아요. ㅡ_ㅡ;;


멈춰서서 

이우환 시집, 성혜경 옮김, 현대문학 




이우환 Lee Ufan, 대화(Dialogue), 2011 

 



그의 작품들이 좋아서일까, 이 시집은 그의 회화, 조각, 설치 작품을 보다 정확하게 이해할 수 있게 해주는, 작고 단단한 설명서처럼 읽혀진다. 내가 알기로, 예술가들 중에서 이우환만큼 명징(明澄)한 글을 쓰는 사람도 드물 것이다. 이는 문화예술계 전반으로 옮겨도 다르지 않다. 그는 일본 모노하의 대표적인 작가이자 이론가이며, 현대 철학과 현대 예술에 대한 깊은 이해와 탁월한 실천력으로 현대 일본 미술의 한 장면을 연출했다. 일본 국어 교과서엔 이미 그의 글이 실려있고, 일본어라는 걸 제외하면, 그는 검증 받은 글쟁이이다. 



이우환 Lee Ufan, 대화 Dialogue (2008) 

(사진 출처: artobserved.com)



젊은 시절 일본으로 건너간 이우환은 일본과 유럽에 먼저 알려졌고 그런 다음 한국에서 그 명성을 얻기 시작했다. 가끔 한국이 대단한 나라인양 떠드는 사람을 보면, 부끄러움을 느끼는데, 이러한 태도 밑에 숨은 자신의 부족함이나 태만, 불성실을 감추려는 불순함이 보이기 때문이다. 이들은 심지어 잘못된 관행, 정치적 낙후성 등마저도 옹호하려고 한다. 


해외에서 유명해져 국내로 들어오는 경우, 한국 내의 텃세는 만만치 않다. 이는 문화예술계는 더 심해서, 그들의 부족함을 상대의 몰이해, 또는 지역의 차이로 환원시킨다. 그래서 한국에서 이우환에 대한 관심은 국내 미술 시장의 급격한 팽창과 함께 한다(이우환 스스로도 그 곤혹스러움을 토로한 바 있다). 그 전까지 이해하기 어려운 일본계 한국 작가였을 뿐이다. 아마 적지 않은 사람들이 앞으로도 그렇게 느낄 것이다. 그들에게 이우환이 구겐하임과 베르사이유 궁에서 전시한 것은 이미 전세계적으로 인정받았음을 이야기해도 그들의 닫힌 귀와 닫힌 마음은 절대 열리지 않을 것이다.


이우환의 많은 책들이 번역되어 나왔지만, 식자들에 의해 거론되는 경우을 보지 못했다. 가끔 월간 현대문학에 실렸던 책 소개를 제외하곤. 이와 비슷하게, 무수한 번역된 소설들이 나오지만, 정작 한국의 비평가들이 번역 소설들을 평론하는 경우를 자주 보지 못했다. 문체나 문장을 떠나 어떤 세계관과 태도, 인물과 사건의 구성, 언어 등을 다룰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 시집을 짧지만, 울림이 크다. 또한 이우환의 작품을 좋아하는 이들에겐 그의 작품 세계를 이루는 언어로 안내하고 이해할 수 있도록 할 것이다. 예전에도 옮긴 바 있지만, 가령 이런 시 말이다. 





진폭 



자코메티가 모델에게 육박해가면, 동시에 모델 또한 자코메티에게 닥쳐온다. 자코메티는 자꾸자꾸 내쳐가 이윽고 모델 너머까지 나아간다. 그때 모델 또한 점점 돌진해서, 자코메티를 지나 훨씬 이쪽으로까지 전진해버린다. 도전해가는 힘과 덤벼오는 힘이 세차게 겹쳐지는 가운데, 두 개의 대상은 깎여나가, 마침내 하나의 뼈가 되어 남겨진다. 이렇게 해서 생긴 대립의 축은, 자코메티를 넘고 모델을 넘어서 -. 그것은 끊임없이 커다란 진폭을 불러일으키고, 스스로를 공간의 펼쳐짐 속에 숨겨 지운다. 자코메티는 이것을 거리의 절대성이라 일컫었다. 이러한 시선에 따른다면, 본다는 것은 대상과 자신의 치열한 사랑의 운동이 겹치어, 드디어 투명한 여백이 된다는 것인가. 




이우환 Lee Ufan, 대화 Dialogue (2013)

(사진 출처: artobserved.com)



다행히 현대문학에서는 꾸준히 이우환의 책들을 찍어 내고 있다. 이우환의 다른 책들도 읽어보면 좋으리라. 하지만 아직까지도 내가 십 수년 전 삼성미술관에서 열린 이우환 전을 잊지 못하듯, 그의 진수는 작품들일 것이다.  그리고 베르사이유에서의 이번 전시는 아, 내 처지를 후회하게 만들었다. 정말 느끼고 싶은 전시였는데. 기하학적으로 올려진 정원을 걸어가다가 무심코 마주하는 '조응'이라 ... 


 



멈춰서서

이우환저 | 성혜경역 | 현대문학 | 2004.11.19

출처 : 반디앤루니스 http://www.bandinluni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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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폭 



자코메티가 모델에게 육박해가면, 동시에 모델 또한 자코메티에게 닥쳐온다. 자코메티는 자꾸자꾸 내쳐 가 이윽고 모델 너머까지 나아간다. 그때 모델 또한 점점 돌진해서, 자코메티를 지나 훨씬 이쪽으로까지 전진해 버린다. 도전해가는 힘과 덤벼오는 힘이 세차게 겹쳐지는 가운데, 두 개의 대상은 깎여나가, 마침내 하나의 뼈가 되어남겨진다. 이렇게 해서 생긴 대립의 축은, 자코메티를 넘고 모델을 넘어서 -. 그것은 끊임없이 커다란 진폭을 불러일으키고, 스스로를 공간의 펼쳐짐 속에 숨겨 지운다. 자코메티는 이것을 거리의 절대성이라 일컬었다. 이러한 시선을 따른다면, 본다는 것은 대상과 자신의 치열한 사랑의 운동이 겹치어, 드디어 투명한 여백이 된다는 것인가. 



- 이우환, 시집 <멈춰서서> 중에서 




자코메티, Three Men Walking

출처: http://elogedelart.canalblog.com/archives/2009/05/31/13912856.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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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에노스 아이레스의 열기

보르헤스(지음), 우석균(옮김), 민음사 




그의 소설들을 떠올린다면, 보르헤스의 시도 딱딱하고 건조하지 않을까 생각하게 된다. 너무 지적이고 형이상학적이며 수수께끼처럼 펼쳐지지 않을까 추측한다. 하지만 전혀 그렇지 않다. 도리어 소설가 보르헤스는 잊고 시인 보르헤스만 기억에 담아두게 될 터이다. 


그렇게 몇 주 보르헤스의 시집을 읽었고 몇몇 시 구절들을 기억하게 된다. 


시집 읽는 사람이 드문 어느 여름날, 세상은 저주스럽고 슬픔은 가시질 않는다. 행동이 필요한 지금, 어쩔 수 없이 반성부터 하게 되는 현실을, 미래보다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자신을 탓하게 되는 상황 앞에서 보르헤스가 아르헨티나 사람이라는 것이 새삼스럽기만 하다. (...) 






부에노스 아이레스의 거리들은

어느덧 내 영혼의 고갱이라네.

분주함과 황망함에 넌덜머리 나는

격정의 거리들이 아니라

나무와 석양으로 온화해진

아라발의 감미로운 거리,

불후의 광대무변에 질려

대평원 그리고 참으로 광활한 하늘이 자아내는

가없는 경관으로 감히 치닫지 못하는

소박한 집들이 있는,

자애로운 나무들마저 무심한 한층 외곽의 거리들.

이런 모든 거리들은 영혼을 탐하는 이들에겐

행복의 약속이라네.

숱한 삶이 집안에만 은거하길 거부하며

거리의 보호 아래 형제애를 나누고 

우리네 희망이 부풀려진 영웅적 의지로

거리를 떠다니기에

깃발처럼 거리가 

사방으로 펼쳐지네

우뚝 솟은 내 시에서

그 깃발이 하늘을 펄럭이기를.

- <거리> 전문 







본질은 언제나 상실되는 것.

영감을 지배하는 절대적인 법칙이지.

달과의 내 오랜 실랑이에 대한

다음 요약은 피할 수 없을.


나는 달은 어디서 처음 봤는지 모르네.

앞서의 그리스인이 말한 하늘에서였는지,

우물과 무화과나무의

정원으로 기우는 오후에서였는지


유전하는 이 삶은

어찌 되었든 무척 아름다울 수도 있지.

그런 순간에 우리 모두 너를 바라보던

오후가 있었네. 아, 모든 이의 달이여. 

- <달> 중에서. 






부에노스 아이레스의 열기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저 | 우석균역 | 민음사 | 2014.03.20

출처 : 반디앤루니스 http://www.bandinluni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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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요나라 갱들이여 [개정판]

다카하시 겐이치로저 | 이상준역 | 향연 | 2011.11.08

출처 : 반디앤루니스 http://www.bandinlunis.com


















<우아하고 감상적인 일본야구>의 다카하시 겐이치로다! 하지만 십수년만에 읽는 그의 소설은 ... 아, 이런 표현은 심하다고 여겨지긴 하지만, 어쩔 수 없다. 읽는 건 시간낭비다. 전혀 유머스럽지 않다. 작명에 대한 이야기이면서 죽음에 대한 이야기이고 이 세계에 대한 반체제적인 알레고리라고 여겨지지만, 그래서 뭘? 


너무 쉽게 읽히고 깊이감이 없다. 두서 없고 이야기는 흩어지고 등장인물은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일본어로 읽었을 때는 어떤지 모르겠다. 현재 일본 문학계 내에서 그의 위치를 알지 못하고 그의 일본어 문장이 어떤지 모르는 탓에, 내 평가절하가 조심스럽기도 하다. 적어도 나는 그의 <우아하고 감상적인 일본 야구>를 최고의 소설로 치며, 많은 사람들에게 읽으라고 했으니 말이다. 


그러나 지금 나는 <사요나라 갱들이여>를 추천하지 않는다. 하긴 소설을 추천하는 경우가 드물어지는 요즘이다. 최근 들어 읽은 소설도 거의 없지만, 추천할 만한 것도 없었다. 






우아하고감상적인일본야구-개정판

다카하시겐이치로저 | 박혜성역 | 웅진씽크빅 | 2005.07.07

출처 : 반디앤루니스 http://www.bandinlunis.com













1999년에 읽고 리뷰를 적었나? 그 전에 읽은 것같은데 말이다. 



1999/02/05 - [책들의 우주/문학] - 우아하고 감상적인 일본야구, 다카하시 겐이치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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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울한 고양이(靑猫)




이 아름다운 도시를 사랑하는 것은 좋은 것이다.

이 아름다운 도시의 건축을 사랑하는 것은 좋은 것이다. 

모든 상냥한 여성을 찾기 위해

모든 고귀한 생활을 찾기 위해

이 도시에 와서 번화한 거리를 지나가는 것은 좋은 것이다.

거리를 따라 서 있는 벚나무 가로수

거기에도 무수한 참새들이 지저귀고 있는 것이 아닌가


아아 이 거대한 도시의 밤에 잠들 수 있는 것은

오직 한 마리의 우울한 고양이 그림자다

슬픈 인류의 역사를 이야기하는 고양이 그림자다

우리가 찾기를 그치지 않는 행복의 우울한 그림자다.

어떤 그림자를 찾기에

진눈깨비 내리는 날에도 우리는 도쿄(東京)를 그립다고 생각해

그곳 뒷골목 벽에 차갑게 기대어 있는

이 사람과 같은 거지는 무슨 꿈을 꾸고 있는 것인가. 


- 하기와라 사쿠타로(1886 ~ 1942) (서재곤 역) 






점심 식사 대신 우울한 고양이를 만난다. 아, 어느 새 나는 술 취하고 싶은 한 마리 고양이 꿈을 꾸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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셰익스피어의 기억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지음), 황병하(옮김), 민음사 





나이가 든다는 것, 그건 보이지 않는 것, 가려진 것, 지금 없지만 다가오는 공포에 신경쓰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이 지상에서의 시간을 쌓아갈수록 갑작스레 부는 바람에서 계절의 수상함을 알고, 사랑하는 여인의 뜬금 없는 키스의 따스함 속에 깃든 슬픈 이별의 메세지를 읽으며, 길을 지나는 이름없는 행인의 무표정한 얼굴 아래로 차마 말할 수 없는 인생의 고단함을 느끼게 된다. 그렇게 나도 나이를 먹고 있었다. 


민음사에서 나온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전집 중 마지막 권인 <셰익스피어의 기억>을 읽었다. <모래의 책El Libro de arena>(1975)<셰익스피어의 기억La memoria de Shakespeare>(1983)을 묶어 번역한 이 책은 짧지만 보르헤스의 세계를 충분히 느낄 수 있는 소설집이다. 


나에게 보르헤스는, 내가 그를 알고 지낸 지난 20여년간 포스트모더니즘, 현대 소설가의 최고봉, 알레고리, 무수한 현대소설가에게 영향을 준 이, 백과사전, 자기반영성 등으로 알려져 있었다. 하지만 그는 나이가 드는 것, 죽는 것, 의미 없음의 공포를, 그리고 사랑의 위대함과 버려야만 완성되는 어떤 예술을 알고 있는 소설가였다. 


그의 문장은 짧고 딱딱했지만, 그 딱딱함은 거친 세월의 때가 묻은 낡은 나무 문짝의 것이었다. 알레고리와 은유로 끊임없이 새로워지면서도, 결국에는 우리가 잃어버린 사랑, 추억, 자기 자신을, 그리고 우리가 시작했던 문명의 시작을 되새기고 있었다.


대학 시절 읽었던 보르헤스는 없었고, 이제서야 보르헤스를 제대로 읽게 된 것이다. 며칠 전 번역되었으나, 아직 읽지 못한 보르헤스의 책 수 권을 주문해 읽기 시작했다. 





 







셰익스피어의 기억 - 보르헤스 전집 5

보르헤스저 | 민음사 | 2007.05.15

출처 : 반디앤루니스 http://www.bandinluni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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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아름다운 정원

심윤경(지음), 한겨레출판





언제 이 책을 샀던 걸까. 그리고 하필이면 이 소설이었을까. 몇 명 등장하지도 않는, 굳이 분류하자면 '성장소설' 쯤으로 이야기될 수 있는 이 소설은 두 명이 죽는다. 한 명은 그냥 사라지고 한 명은 죽고 ... 차라리 일종의 알레고리이거나 은유라면 좋을 텐데, 그렇진 않고 참 슬프다는 생각만 들게 하니, 눈물샘을 자극하는 순정 소설(만화가 아니라)같다고 할까. 


우리들의 성장은 과연 그랬던가. 누군가가 죽고 사라지고 정든 집을 떠나야만 성장할 수 있었던 걸까. 소년 화자인 '동구'는 몇 해 살지 못하고 죽을 여동생 '영주'의 탄생과 함께 소설의 시작을 알린다. 그리고 '영주'가 읽는다는 사실을 알게 되는 순간, 담임 선생님으로부터 읽기를 배우고 어두웠던 80년대 초 세상을 잠시 엿본다. 하지만 그 선생님도 사라지고, 할머니 - 어머니 - 아버지로 이어지는 가족의 갈등은 너무 일상적이어서 심각해보이지 않고 도리어 흔한 풍경처럼 보이기까지 한다. 정신병원에 입원한 어머니를 만나고 오는 '동구' 앞에서 '우리는 가족이다'라고 강변하는 아버지의 모습은 낯설게까지 여겨지는 건 내가 이상한 것일까.  


문장은 좋고 서술에 힘이 있어, 이야기를 쉬지 않고 앞으로 간다. 그래서 더 아쉬운 걸까. 아니면 우리들, 1970년대에 태어난 동구와 같은 세대인 나에게 이런 성장소설은 뭔가 맥이 빠지고 애처로움만 자아낸다. 


하지만 소설은 참 좋기만 하니, ... 그래도, 이야기는 이야기이고 작품성이나 예술성은 이야기의 완성 뒤에 오는 어떤 것이다. 이 소설은 이야기하는 방식은 빼어나지만, 딱 거기에서 멈춘다. 그래서 이야기에 몰입되지만, 이야기가 끝난 다음 알 수 있는 건 아무 것도 없다. 그저 이렇게 성장한 어떤 소년이 있었다는 정도. 그게 나는 아쉽다.  





 




나의 아름다운 정원[개정판]

심윤경저 | 한겨레출판 | 2013.12.13

출처 : 반디앤루니스 http://www.bandinluni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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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룡 둘리에 대한 슬픈 오마주 

최규석 (글, 그림), 길찾기 







짧지만 강렬하다. 어떤 만화가 우리를 흔드는 힘은 형편없어지는 요즘 소설들보다 낫다. 최규석의 만화에 대해서는 이미 들은 바 있지만, 그 실체를 확인하진 못했다. 그리고 이 책을 통해 메시지를 가지는 만화의 힘을 확인할 수 있다. 


혹자는 둘리에 대한 비관적 해석이 불편할 지도 모르겠지만, 이 '불편함'이야말로 이 만화가 우리 모습의 반영임을 긍정하는 것이다. 


최규석의 초기 단편들로 엮여진 이 만화책은 어떤 젊은 작가의 등장을 알리는 선언이며, 만화가 현실에 대해, 우리의 진짜 모습에 대해 이야기했을 때 어떤 파장을 불러일으키는가를 여실히 보여준다. 


최근 그는 네이버에 웹툰을 연재하기 시작했는데, 추천한다. '송곳'이다. 


http://comic.naver.com/webtoon/list.nhn?titleId=602922 






공룡 둘리에 대한 슬픈 오마주[개정증보판]

최규석저 | 길찾기 | 2004.04.09

출처 : 반디앤루니스 http://www.bandinluni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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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오 초. 영원히 이어지며 슬픔이 없을까. 

계속 십오 초만 있고 십오 초가 지나 다시 십오 초가 오고 십오 초로 채워지며 

어떤 계절이 가고 오고 생과 사가 돌며 슬픔은 없을까. 

십오 초로 슬픔은 없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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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송어 낚시Trout Fishing in America

리처드 브라우티건Richard Brautigan(지음), 김성곤(올김), 비채 




‘미국의 송어 낚시’氏를 만나는 것이 쉬워진 탓에, 읽기는 맥주 캔 마시기와 비슷해졌다,고 빨간 말보루 담배를 피우던 그녀가 더듬, 더듬거리며 말했다.


티브이에 나오는 걸 그룹 아이돌이 꿈인 그녀는, 반드시 예능토크쇼에 나가 칼 마르크스의 <공산당선언>에 대해 발언할 것이라고, 다시 나에게 말을 더듬, 더듬, 더듬거리며 말했다. 나는 건전하고 낙천적이어서 그녀가 좋다. 


그녀의 꿈과 행동, 그리고 현실에 심각한 오류가 있듯이, ‘미국의 송어 낚시’氏도 그와 그를 둘러싼 소설, 혹은 이야기가 가진 치명적 결함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나는, 예의가 바르다는 이유로 그 사실을 말하지 않았다. ‘미국의 송어 낚시’氏는 점심 시간의 조용한 사무실에서, 거친 공기와 피곤하고 증오스런 지하철 안에서, 읽히지 않은 책들이 될 나무로 둘러쳐진 숲 속에서, 숲 속은 아니라고 ‘미국의 송어 낚시’氏는 나에게 지적했다, 숲 속에서가 아니라 아파트 사각형 공간 구석 방 책들 사이에서, 그가 겪었던 미국을 이야기해주었다. 


그것이 어디든, 국가라는 틀 속에서 살아간다는 건 적당한 수준에서 정신의 줄을 놓는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생각해,라고 그녀에게 말했다. 그녀는 최근 심각할 정도로, 도전적인 다이어트를 해서 제작년 미국 여행에서 사온 미니스커트가 잘 들어간다며, ‘미국의 송어 낚시’氏와 감사의 섹스를 했다. 


갑작스런 극적인 사랑 표현을 받은 ‘미국의 송어 낚시’氏는 화끈거리며 달아오르며 자기 속의 몇 페이지를 태워버렸다. 하지만 나는 그것이 그 섹스 탓이 아니라 거대한 50센트짜리 동전 때문임을 잘 알고 있었다. 


“나는 낚시를 싫어해요”라고 고백했다. 그녀가 더듬, 더듬거리며 날 쳐다보았다. 나는 그녀의 시선을 외면했다. 말과 행동 사이에는 그 어떤 연관 관계도 맺어서는 안 된다. 그것은 평론가의 몫이고, 고결한 우리는 그들의 입과 위장을 보호해 주어야 했다. 예의가 바르다는 이유로. 


‘미국의 송어 낚시’氏는 미국에서 송어 낚시를 하게 됨을 좋아하지도 싫어하지도 않고, 그저 안타까워 했다. ‘미국의 송어 낚시’氏는 그들의 대가족이 이런 저런 이유로 흩어지고 사라졌다며, 나에게 낡고 먼저 냄새 나는, 이미 죽은 송어로 발효시킨 술을 권했다. 실은 그 사실을 오래 전부터 알고 있었지만, 아는 것과 행동하는 것, 그리고 말하는 것은 전혀 다른 우주의 일임을 ‘미국의 송어 낚시’氏에게 이해시켰다. 


지금에 와서 솔직하게 이야기하건대, 이미 프린트된 채 여행하던 그에게 이를 이해시키는 동안 나는 여러 차례 그를 죽이고 싶었다. 그리고 한참 시간이 지난 후, 서점들이 사라지고, 취미/레저/낚시 코너에서 ‘미국의 송어 낚시’氏가 함께 사라져간다고 롱스커트를 입은 그녀에게 슬픈 목소리로 이야기했다. 장사가 되지 않던 어두운 술집 구석에 앉아 있던 그녀는 다시 더듬, 더듬, 더듬거리며 무언가 꿈을 이룬다는 건 자신을 파는 것이라고 이야기했다. 그녀는 오늘 밤에도 자신의 모든 걸 팔 준비가 되었는데, 아직 예능토크쇼는커녕, 걸 그룹 아이돌이 되기 위해 5년 동안 아르바이트를 하며 번 돈으로 연예기획사를 차렸다가 세무 조사를 받았다며 분개했다. 하지만 그녀는 꿈을 이루기 위해서는 우리 스스로가 자신의 적, 원수가 되어야 한다며, 나의 연약함을 욕했다. 


나는 최근 들어 ‘미국의 송어 낚시’氏를 만나지 못했다. 아마 그는 공항 한 구석에서 취해 쓰러져 자고 있을 것이다. 미국행 비행기 표를 구하지 못한 채. 어제 밤 아메리카 사람으로 보였던 리처드가 알려 주었다. 



리처드 브라우티건





미국의 송어낚시[개정판]

리처드 브라우티건저 | 김성곤역 | 비채 | 2013.10.04

출처 : 반디앤루니스 http://www.bandinluni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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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양은 누군가가 석유를 붓고 성냥으로 불을 붙인 다음, "신문 가져올 동안 좀 들고 있어"하며 내 손에 놓고 가서는 돌아오지 않아 불타고 있는 거대한 50센트 짜리 동전 같았다. (23쪽) 


가을은, 마치 육식 식물 속으로 질주해 내려가는 롤러 코스터처럼, 포트 와인과 그 진하고 달콤한 와인을 마셨던, 나를 제외하고는 모두의 기억에서 오래 전에 사라진 사람들을 데리고 찾아왔다. (39쪽) 


나는 그녀와 섹스를 했다. 

그것은 막 1분이 되기 전의 영원한 59초와도 같았고, 아주 수줍게 느껴졌다. (52쪽) 


- 리처드 브라우티건, <미국의 송어 낚시> 중에서 



출처: http://www.pasunautre.com/ 



리처드 브라우티건을 읽으면 왠지 우울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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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이 세상에 없는 계절이다

김경주 (지음), 문학과 지성사 







시인 김경주의 소문을 듣고 이 시집을 산 지도 꽤 시간이 흘렀고, 이제서야 끝 페이지까지 읽었다. 실은 무수히 이 시집을 읽었고 그 때마다 첫 몇 페이지를 읽곤 숨이 턱턱 막혀와 더 이상 읽지 못했다. 그의 시적 상상력와 언어 구사는 탁월했다, 적어도 내 눈에는. 그런 이유로 다 읽지 않았지만, 그 동안 많은 이들에게 이 시집을 추천했다. 젊은 시인들 중에서(최근에 시집을 많이 읽은 건 아니지만) 가장 뛰어난 시적 재능을 가진 것으로 평가받았고, 내가 읽은 바 그의 첫 시집은 독창적인 시적 세계와 울림을 보여주고 있으니. 


그래서 그런 걸까. 그의 시는 친절하지 않다. 그는 여러 겹의 은유들로 자신의 세계를 꾸미고 있었다. 한 쪽에서는 음악으로, 한 쪽에서는 이국적인 풍경으로, 한 쪽에서는 성적이고 육체적인 내밀함으로. 이 세 방향은 서로 어우러져 서로를 떼어낼 수 없다. 딱딱하기도 했고 물렁하기도 했다. 슬프고 우울하기도 했지만, 그 슬픔과 우울은 정상적인 형태가 아니어서 눈물을 흘리고 울어도 풀리지 않는 마음의 오래된 상처같았다. 


그렇게 시는 얇은 꽃잎같은 성벽에 둘러싸인 채,  때이르게 찾아온 초여름 더위 속에서 만발한 꽃들의 향기 속으로 독자를 초대하고, 금세 내 오감은 시에 취해 흔들거렸지만, 때로(혹은 자주) 시를 읽는 내 마음과는 만나지 못했다. 어쩌면 그는 이 세상에 없는 계절이고 계절의 향기만 가득한 것일지도. 


그래도 이 시집은 참 좋다. 세상과 참 멀리 있는 듯한 풍경을 언어로 수놓고 있는 탓에, 여행가는 듯한 기분을 우리에게 전해주며, 서가에 꽂아두고 오래 읽을 수 있는 몇 되지 않는 시집이다.  


시집을 읽으면서 메모 해둔 몇몇 구절을 옮긴다. 




외로움이라는 인간의 표정 하나를 배우기 위해 산양은 그토록 많은 별자리를 기억하고 있는지 모른다 바바게스트 하우스 창턱에 걸터앉은 젊은 붓다가 비린 손가락을 물고 검은 물 안을 내려다 보는 밤, 내 몸의 이역(異域)들은 울음들이었다고 쓰고 싶어지는 생이 있다 눈물은 눈 속에서 가늘게 떨고 있는 한 점 열이었다 

- <내 워크맨 속 갠지스> 중에서



무명(無名)의 별에서 별 한 채가 날아옵니다 그 빛의 세월이 내 눈까지 날아오는 데 걸리는 음악의 생은 또한 얼마나 고독해야 하는가요 외로운 사람은 눈을 감고 걷고, 눈이 외로운 사람은 강심(江心)에 그 눈의 음(音)을 숨겨야 하는 밤입니다

- <아우라지> 중에서



속으로 뜨겁게 뒤집었던 시간을 열어보이며

몸의 열을 다 비우고 나서야

말라가는 생이 있다

봄날은 방에서 혼자 끓고 있는

밥물의 희미한 쪽이다

- <눈 내리는 내재율> 중에서  





나는 이 세상에 없는 계절이다

김경주저 | 문학과지성사 | 2012.1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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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도 일기 Journal de deuil 

롤랑 바르트(지음), 김진영(옮김), 이순 




이 책은 바르트의 어머니인 앙리에트 벵제(Henriette Binger)가 죽은 다음부터 씌여진 메모 묶음이다. 그의 어머니가 1977년 10월 25일 사망하고, 그 다음날 10월 26일 이 메모들은 씌어져 1979년 9월 15일에 끝난다. 그리고 1980년 2월 25일 작은 트럭에 부딪히는 사고를 당한 롤랑 바르트는 한 달 뒤인 3월 26일 사망한다. 그리고 그 해 쇠이유 출판사를 통해 이 책이 나온다.


롤랑 바르트 팬에게 권할 만한 이 책은 두서 없는 단상들의 모음이다. 어머니를 잃은 슬픔으로 씌어지는 이 책은 짧고 인상적이다. 롤랑 바르트 특유의 문장들을 만날 수 있고 그의 슬픔에 대한 인상, 분석, 인용들을 읽을 수 있다. 


하지만 깊이 있는 분석이 있거나 설명이 있지 않으니, 독자들에겐 친절하지 못한 책이다. 문학비평가이자 이론가, 혹은 철학자로 알려진 롤랑 바르트가 궁금해서 이 책을 읽는 것도 적절하지 않으니, 이 책은 롤랑 바르트의 책 몇 권을 이미 읽은, 그리고 롤랑 바르트를 사랑하는 이들에게 추천할 만하다. 실은 아직도 사람들이 롤랑 바르트를 읽고 있는지 모르겠지만. 


책을 읽으면서, 나는 꽤 오랜 기간 동안 롤랑 바르트를 읽지 못했음을 알고 꽤 슬펐다. 내가 읽었던 몇 권의 책, '롤랑바르트가 쓴 롤랑 바르트', '텍스트의 즐거움', '사랑의 단상', '작은 사건들', '이미지와 글쓰기', '카메라 루시다(밝은 방)', ... 그러고 보니, 이 책들을 아직도 내가 가지고 있는지 조차 모르겠으니, 나는 참 오래 떠나 있었다. 


이 책은 그가 죽기 전 발간된 책인 '카메라 루시다'에 대한 배경을 알 수 있는 책이기도 하다. 역자는 후기에서 푼크툼을 이야기하며, 이 책 - 애도일기 - 에 대해 설명하고 있으니, 아직 '카메라 루시다'를 읽지 않았다면, '애도일기'와 함께 읽으면 좋다. 


(아래 사진들은 애도일기의 표지들이다.) 











애도 일기

롤랑 바르트저 | 김진영역 | 이순 | 2012.1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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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전부터 롤랑 바르트의 <<애도일기Journal de deuil>>를 읽고 있다. 뒤라스, 바르트, 끌레지오, 모디아노, ... 읽지 못한 지 꽤 되었구나. 올해는 그리운 이들을 만나야겠다. 




1977년 11월 21일, 롤랑 바르트. 


절망, 갈 곳 없는 마음, 무기력: 그래도 여전히 맥박을 멈추지 않게 하는 건 단 하나 글쓰기에 대한 생각. "그 어떤 즐거운 것". 피난처, "축복", 미래의 계획으로서의 글쓰기, 한 마디로 말해서 "사랑"으로서, 기쁨으로서의 글쓰기. "신"을 향하는 경건함으로 가득한 어느 여인의 가슴 벅찬 감동들 또한 다른 것이 아니리라. 



(새해를 의욕적으로 시작해야 되나, 작년의 영향권 아래서 꽤 힘든 하루하루가 이어지고 있다. 여하튼, 일본에서 나온 책 표지 디자인은 너무 깔끔하다! 사고 싶다. 그러고 보니, 일본에 사는 재일한국인 화가 친구에게 안부 메일을 보내야겠다.) 









애도 일기

롤랑 바르트저 | 김진영역 | 이순 | 2012.1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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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묵의 시간 Tiempo de Silencio 

루이스 마르틴 산토스Luis Martine-Santos(지음), 박채연(옮김), 책세상 



스페인 원서. 주인공 페드로는 실험쥐를 통해 암을 연구한다. 실은 페드로가 현실 세계 속의 실험쥐였음을 암시하는 것이기도 하다.




먼저 이 책을 번역한 박채연 교수(서울디지털대학교)의 노고에 대해 감사를 보낸다. 그녀의 번역이 정확한지에 대해 알지 못하지만, 적어도 이 소설을 번역하겠다는 생각, 그리고 번역을 했고 출판까지 이룬 것에 대해 독자로서 찬사를 보내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현대 스페인 소설의 기원’이라는 찬사를 받는 소설이지만, 실은 한국 독자에게 동시대 스페인 소설가는 낯설기만 하다. 소설은 현대적 서술 기법들이 망라되었으며, 게으른 독자를 쉽게 무시하고(그런 독자라면 이 소설을 읽지도 않겠지만), 종종 문장 하나는 너무 길어져 독자의 집중을 요하기까지 하니(아니 번역된 소설이 이래서야!), 이런 소설을 읽는 독자는 드물 것이다.


하지만 바라건대, 이 소설은 반드시 읽혀야 한다. 산토스의 ‘침묵의 시간’은 크게 두 가지 측면에서 시사점을 가진다. 


첫째는 소설 기법의 측면에서 현대 소설이 가져야 하는 여러 가지 미덕을 한 눈에 보여준다고 할까. 산토스 스스로도 제임스 조이스의 ‘율리시스’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고는 하지만, 실은 ‘의식의 흐름’ 뿐만 아니다. 서술의 강약이 적절하게 조절되어 있어, 어느 경우에는 장황하다 싶을 정도의 서술과 묘사가 이어지는가 하면, 어느 문장들은 짧게 끊어지며 소설 속 인물의 심리를 드러낸다. 자주 화자가 바뀌지만, 어색하지 않고 독자는 인물들의 심리를 자신의 마음처럼 읽고 지나가며 사건이 아닌 실재하는 사람들을 만나고 돌아오는 듯한 기분을 들게 한다. 


두 번째 시사점은 서사적 측면에서의 시사점이다. 루이스 마르틴 산토스는 여러 번의 투옥 경험을 가지고 있을 정도로 현실 참여적인 작가였고, 이 소설 또한 대놓고 박제화된 지식인-주인공 페드로-에 대한 동정심을 불러일으키며, 그의 현실적 무능함을 극대화시킨다. 결국 아무런 것도 성취하지 못하는 주인공을 통해 현대 스페인이 처한 현실을 보여주며 지식인 사회의 변화를 역설한다고 할까. 페드로는 아무런 잘못도 하지 않았으나, 그는 너무 현실 세계를 쉽게 보았고, 자신의 의지대로 행동하였으나, 그 행동이 잘못 되었을 경우를 고려하지 않는 유아적인 태도, 그리고 심지어 모든 것으로부터 도망가려고만 하는 그의 행위들은, 눈 앞에서 벌어지는 비합리적이고 폭력적인 현실을 모른 체 하고 그것에 대해 그 어떤 개입이나 참여를 하지 않고 용기 없고 무책임한 지식인의 전형을 보여준다. 


이렇게 볼 때, 이 소설은 형식적 측면에서도 전위적이며, 서사적 측면에서도 전위적인 셈이다. 



1986년 스페인에서 영화로도 제작되기도 했다.




그러나 소설은 참 슬프다. 페드로는 암 연구를 하는 젊은 의학 연구자일 뿐이다. 그가 우연히 휘말린 어떤 사건은 그의 인생을 정반대로 이끈다. 그의 의지와는 무관한 외부 세계는 그와 적대적이었으나, 심지어 그는 그가 외부 세계와 적대적인 관계에 놓여있다는 사실마저도 모른다. 너무 선량해서 어리석고 무능하며 심지어 자신을 사랑하는 아름다운 여자까지도 잃어버린다. 그래서 문장은 종종 감상적으로 변하기도 하지만, 그 밑바닥에는 추악한 현실에 대한 냉정한 인식과 그것에 대한 적절한 행동을 취하지 못하는 인물에 대한 동정과 비아냥거림이 숨겨져 있다. 어쩌면 산토스 스스로는 자신이 버리고 싶은 자신의 모습을 투영시켰는지도 모를 일이다. 


이번 겨울, 진짜 소설에 도전해보고 싶다면, 이 소설을 추천한다. 적어도 현대 소설이라는 게 어떤 것인지 제대로 알 순 있을 테니까 말이다. 






침묵의시간

루이스마르틴산토스저 | 박채연역 | 책세상 | 2005.1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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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사람 여관

이병률저 | 문학과지성사 | 2013.09.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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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사람 여관

이병률 시집, 문학과 지성 시인선 434 




최근에는 일 년에 시집 한 권 읽는 듯 싶다. 그리고 시집 리뷰는 건성, 건성으로 쓰는 듯하고. 일상의 대부분이 사무실에서 산더미와 같은 업무와 스트레스로 시달리는 지금, 시집은 ... 참 멀리 있기만 하다. 이병률. 그의 글은 시보다 산문으로 먼저 알게 되었다. 그것도 여행기. 하지만 이것도 건성, 건성 읽었으니, 이번에 읽은 그의 시집, <눈사람 여관>이 처음 읽는 것이라고 해도 무방할 것이다. 


시집을 다 읽고 노트에 짧게 감상을 적었는데, 그가 읽는다면, 불편해 하거나 불쾌해 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했다. 시는 소설과 달라, 드물지 않게 시를 읽으며 시 속의 시인을 만난다. 그리고 독자는 그것이 맞든 틀리든 지레짐작으로 어떤 이겠구나 여긴다. 이 시집에 대한 내 감상은 그렇게 시작해 끝난다. 


* * 


그는 손을 내밀지 않는다. 물끄러미 바라보고 견디고 걸어간다. 그 걸음걸이는 무겁지도 가볍지도 않다. 바람따라 걸어갈 뿐이다. 가끔 가슴 설레기도 하고 사랑에 빠지기도 하며 수줍은 고백을 할 터이지만, 세상 풍경은 어제나 오늘이나 별반 달라지지 않는다. 이병률은 그것을 안다. 


그는 아무 것도 하지 않는다. 이기적이다. 혼자 있기 위해서는 대단한 용기가 필요한 일이지만, 동시에 비겁한 일이기도 하다. 이기적이지만, 종종 아름답기도 하고 쓸쓸하기도 하다. 그건 스스로를 늘 들여다보기 때문이고, 들여다보면서도 아무 것도 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저 바람따라 걸어가며 글을 쓸 뿐이다. 다행인 것은 그는 스스로를 내려놓거나 자책하거나 도망가진 않는다. 그저 스스로를 훔쳐볼 뿐. 





낙화



                                                    이병률



그대가 일하는 곳 멀리 자전거를 세우고

그대를 훔쳐보는 일처럼


반쪽의 반쪽밖에 안 되는 나는

비겁이라는 꽃 이파리 머리에 꽂고

시시덕 시시덕 오늘도 얼마나 비겁했던가요


당신이 자전거 쪽으로 다가와

우산을 버리고 돌아설 때에도

나는 비겁을 뒤집어쓰고 몸을 돌려 서 있습니다

그 자리에 당신 그늘이 생깁니다


천 년에 한 번 사랑을 해서 그런 거라고

그게 아니라면 머릿속에 그토록 많은 꽃술이 매달릴 수가

천 년에 한 번 죽게 될 테니 그렇게 된 거라고 

아니면 그토록 한 사람의 독으로 서서히 죽어갈 수야 


혼자인 것은 비겁하지 않은데

당신을 훔쳐보는 일은

당신 하는 일 앞에서 비겁한 일이어서


십 년을 백 년처럼 

당신을 보러 이곳에 오고

당신은 어느 바다로 흘러가지도 않으며

무슨 일이 있는지도 모릅니다


아무도 주차할 수 없는 구역에

단독 주차하는 나를 위해

마냥 봄처럼 십 년을 당신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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헝가리 식당 



                                                                  이영주 




헝가리 식당에 앉아 있다. 내 목을 만져보면서. 침묵에는 아무 맛도 나지 않는다는 것을 ... ... 이런 기후는 맛없이 천천히 간다. 


아무런 이상 징후가 없는. 아름다운 철창 밑에 있다. 원래의 언어로 돌아가는 것인가. 조용히 있다 보면 감각은 끔찍해진다.


수염까지 붉게 물든 남자는 접시에 혀를 대고 있다. 오도카니 앉아서. 철창을 두드리며 바람이 들어온다. 


동쪽에 있는 식당. 맛없는 내가 앉아서 오래된 폐허를 헤집으며 속을 파고 있을 때.


무섭고 겁이 날 때. 수염 달린 남자는 창문을 연다. 향수병에 걸린 감각은 바람 따라 흐른다. 웅웅웅 울림소리를 낸다. 동쪽은 은신처가 아니지. 수염 사이로 붉은 침이 뚝뚝 떨어진다. 우리는 혼자서 밥을 먹는다. 


많이 다쳤을 때는 밥을 먹어야지, 그래야 기운을 내지, 이 식당에 오면 죽은 할머니의 목소리가 가득하다. 그럴 때면 세상이 맛없게 천천히 간다고 생각했다. 


침묵을 먹으면 알 수 있다. 어떤 슬픈 이야기도 죽지 않고 그릇 안에 담겨 있다. 




<<문학과 사회>> 2013년 가을호. 



도서관 열람실에 앉아 잠시 계간지에 시를 읽는다. 왜 '헝가리 식당'일까, 잠시 생각해본다. 창 밖은 이미 짙은 어둠으로 채워져 있고 사람들은 말 없이 책을 읽고 있다. 그리고 말 없이 작은 도서관 건물을 나갔다. 


말 없이 있어도 용서되는 도서관이 나는 좋다. 말 없어도 이야기로 가득 차는 공간. 말 없어도 말들로 넘쳐나는 공간. 말 없지만 책장 넘기는 소리, 책을 향해 걸어가는 소리, ... 그리고 그녀가 하얀 손으로 긴 머리칼을 귀 위로 넘기며 가는 목으로 가 닿는 소리,들이 내 살갗에 닿을 때의 느낌이 좋다. 


몇 년만에 도서관에 그렇게 길게 앉아 시를 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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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

박민규(지음), 예담 





연애의 기억일까, 아니면 사랑의 기억일까. 딱 세 명만 나오는 이 소설은 일종의 연애 편지이며, 나머지 등장인물들은 배경 삽화에 머물고 그저 흘러갈 뿐이다. 말줄임표가 유독 많은 이 소설을 다 읽고 난 다음, 나는 뭐라 할 말을 찾지 못하고 있었다. 연애라고 할 만한 기억이 떠오르지 않았고, 쓸쓸함만이 가득했다. 결국 모든 것은 죽어 사라지고, 흔적을 남기지 않는다. 그리고 그, 혹은 그녀가 남긴 흔적이라는 건 우리 마음의 위로를 위한 변명거리일 뿐이다. 


소설은 못 생긴 여자를 향한 사랑을 담고 있다지만, 실제로 그녀를 만나지 못한 나는 그녀가 못 생겼는지 알지 못한다. 도리어 내 경험 상 못 생긴 여자가 클래식 음악과 미술에 조예 깊은 경우를 보지 못했다. 반대로 문화적 깊이를 가진 이들 모두 예쁜 여자가 아닐까 하는 편견을 가졌는지도 모르겠지만, 적어도 이 소설에 나온 그녀는 못 생기지 않았다고 보는 편이 더 적절해 보인다. 


그러므로 이 소설은 못 생긴 여자에 대한 내용이 아니다. 그렇다면 무엇일까. 


실은 나도 잘 모르겠다. 오랜만에 읽은 소설이라서 그런 걸까. 아니면 너무 진지한 소설만 읽은 탓일까. 독자들은 이런 소설을 읽을 것이고 소설가들은 이런 소설을 쓸 것이다. 나의 문제다. 세상은 시간이 갈수록 형편없어지고 사랑도 피폐해져 진심어린 사랑 따윈 부서진 개집에 들어가 나오지 않는 요즘, 사랑 이야기가 뭘까 싶다. 나의 문제다. 사랑은 없고 현실만 남은 내 문제다. 아마 살아남은 그들에게도 사랑은 사라지고 현실만 남게 될 것이지만, 소설가는 그 이야기를 하지 않는다. 실은 그도 잘 모르기 때문이다. 아, 거친 현실 속에서 지쳐 죽어갈 때쯤 사람들은 이렇게 말할 지도 모른다. ‘현실 속에서 남는 건 사랑’뿐이더라고. 


이 소설을 선뜻 권할 마음은 없다. 몇 년 전 내가 이 책을 서점에서 구입한 것은 대학 선배의 소설이면서 책 뒤에 시디가 달려 있었기 때문이었다. 시디는 수 백장 시디 더미 속에서 길을 잃었고 나는 현실 속에서 길을 잃어버렸으니, 거참. 


박민규의 다른 소설을 읽은 바 없으니, 소설에 대해서 평하기도 그렇다. 다만 연애 소설을 원하는 이들에게 이 책은 산뜻한 선물이 될 것이다. 어느 정도는 해피엔딩이니까.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

박민규저 | 예담 | 2009.07.20

출처 : 반디앤루니스 http://www.bandinluni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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늑대와 함께 달리는 여인들 Women Who Run With the Wolves 

클라리사 에스테스(지음), 손영미(옮김), 이루 















이 책을 꺼내 들었을 때, 나는 피아니스트 엘렌 그리모(Helene Grimaud)가 떠올랐다. 그녀는 현재 늑대 보호 운동을 하고 있다. 미모의 피아니스트와 늑대, 어울린다는 생각을 한 것은 우연은 아니었던 모양이다. <<늑대와 함께 달리는 여인들>>라는 책을 통해 나는 여성과 늑대 사이의 공통점, 그리고 여성의 잃어버린 야성, 숨겨진 본성을 알게 되었으니, 엘렌 그리모가 늑대에게 끌렸던 것은 사소한 동정심이 아닌 그 이상의 의미를 가지고 있을 지도 모르겠다. 


엘렌 그리모



시인이자 융 심리분석 전문가인 클라리사 에스테스의 <<늑대와 함께 달리는 여인들>>은 내가 최근에 읽은 책들 중 가장 흥미진진한 이야기를 담고 있었다. 초판이 1992년이 나왔지만, 이미 여성 심리학에 있어 고전으로 자리 잡은 이 책은, 여성 심리에 대한 신화적 분석이면서, 여성의 마음을 자극하고 여걸이라고 이름 붙여진 숨겨진 야성을 찾게 도와주며 전 세계의 신화, 민담, 설화 등 오래된 이야기들에서 여성 마음의 원형을 읽어내면서, 현대를 살아가는 여성의 잠재력을 깨우친다. 그리고 저자는 여성의 모습을 늑대와 비교하면서, 잃어버린 야성을 찾기를 호소한다.  



건강한 늑대와 여성은 심리적으로 많은 공통점이 있다. 둘 다 예민하고, 장난스럽고, 희생정신이 강하다. 천성적으로 남들과 가까워지기를 원하고, 호기심이 강하며, 엄청난 힘과 지구력이 있다. 또 매우 직관적이고, 자식과 배우자 등 가족이 끔찍이도 아낀다. 끊임없이 변화하는 주변 환경에 잘 적응할 뿐 아니라, 매우 씩씩하고 용감하다. 

- 저자 서문 중에서, 10쪽 



하지만 저자는 ‘여성의 잠재의식이 파괴되었다’고 말한다. 그녀는 ‘우리는 모두 야성을 원하지만 우리 문화의 테두리 안에서 이 갈망을 충족시킬 수 있는 길은 극히 제한되어 있다. 지금껏 우리는 그런 욕망을 수치스럽게 생각하며 긴 머리카락으로 감추고 살아왔다. 그러나 여걸의 그림자는 밤낮으로 우리 뒤를 어슬렁거리고 있다. 우리가 무엇이든, 우리 뒤에 걸어오는 그림자는 분명 네 발 달린 짐승이다’라고 말한다. 


여걸(wild woman)에 대한 이해는 종교가 아니라 실천이고, 진정한 의미의 심리학이다. 여걸은 영혼 자체이고, 혹은 영혼에 대한 지식이다. 여걸이 없는 여성은 자신의 영혼에 대한 이야기나 내면의 리듬을 인식할 능력이 없고, 어떤 시커먼 손이 내면의 귀를 막아버린다. 그 결과 권태와 헛된 생각에 사로잡혀 반쯤 마비된 상태로 시간만 허비하게 된다. 

- 17쪽 


원형으로서의 여걸은 인간에 대한 무수한 개념과 이미지와 특징을 말해주는, 아무나 흉내 내지 못할 엄청난 힘이다. 

- 48쪽 



책은 각 챕터마다 각기 다른 설화, 민담, 전설 등의 이야기들부터 시작된다. 그리고 그 이야기들은 각기 다른 숨겨진 내용을 담고 있다. 가령 책 초반에 나오는, ‘여자를 밝히는 거인, 푸른 수염 이야기’는 순진한 여성이 자주 겪게 되는 성장의 모험을 담고 있는가 하면, 책 후반의 ‘손 없는 아가씨의 파란만장한 모험’은 여성의 인내가 가지는 가치, 한 번 하강할 때마다 상실과 희생과 깨달음의 과정을 거치면서 경험하는 야성의 재생을 보여준다. 이들 각각의 이야기들은 서로 다른 방향을 향하고 있는 듯하지만, 실은 현대 여성들이 스스로를 알아가는 과정을 도와주며, 야성을 회복한 여성에 대한 은유이고 모자이크화인 셈이다. 그리고 독자 - 여성이라면 특히! - 는 이 책을 읽어나가면서 스스로의 마음을 들여다보고 자신의 삶을 반추하게 될 것이다. 


이야기의 가장 중요한 기능은 심리적 열쇠에 있다. 그것은 자기 자신과 가족, 그리고 일과 삶 전반에 대해 다양한 질문을 제기할 수 있는 능력을 준다. 그런 질문을 던진 여성은 킁킁거리며 냄새를 맡고 이리저리 둘러보며 진짜 정체를 알아내는 늑대처럼 가장 깊고 어두운 문제들을 해결할 수 있게 된다. 자신을 괴롭혀온 힘을 반대로 자신을 위해 쓸 수 있는 것이다. 그런 여성이 바로 여걸이다. 

- 88쪽





‘미운 오리 새끼’는 지역의 문화적 배경이나 이야기꾼의 입담에 따라 내용이 조금씩 바뀌어 세계적으로 전해지고 있다. 그러나 요점은 미운 오리 새끼가 야성의 상징이라는 것이다. 야성은 어떤 어려운 상황에 처해 있어도 본능적으로 그것을 견뎌내는 힘이다. 야성적인 여성이 지닌 최고의 장점 중 하나가 바로 이 지구력이다.

- 189쪽



가령 ‘미운 오리 새끼’는 이 책에 등장하는 많은 이야기들 중의 하나이다. 우리에게 너무 익숙한 이 이야기는, 하지만 여성에 대한 풍부한 상징과 은유로 가득차 있었다. 이렇듯 이 책을 가득채우고 있는 이 이야기들이 가진 힘은 대단한 것이어서, 어떤 이야기는 며칠이 지나도록 머리 속을 빙빙 맴돌며 나를 자극했다. 그리고 그 속에 담긴 은유와 교훈은 우리의 공감을 불러일으켰고, 심지어 요즘 사람들이 자주 읽게 되는 자기계발 서적들보다 도리어 더 현실적이며, 실천적이며, 감동적이었다.

(남성 독자인 나에게도 이 책은 충분한 독서의 의미를 가져다 주었는데, 여성 독자가 읽는다면 그 가치는 배가 될 것이다)



몸매로 사람을 판단하는 사회에서는 모든 여성이 자신을 숨기고 위장된 삶을 살게 된다. 

-213쪽 



저자는 자신 속에 숨겨진 여걸을 찾으라고 이야기하며, 그것은 이 사회가 여성에게 가르치는 것과는 다른 것임을 분명히 말한다. 어쩌면서 너무 교훈적이라는 점에서 이 책은 다소 식상해질 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여걸을 되찾고 싶거든 덫을 피하라. 균형 잡힌 삶을 살 수 있도록 본능을 단련하고, 마음껏 뛰고, 소리치고, 원하는 것을 차지하라. 또 그것에 대해 모든 걸 알아내고, 눈으로 마음을 표현하고, 모든 걸 들여다보고, 관찰하고, 빨간 신을 신고 춤을 추라. 단, 그 빨간 신은 반드시 직접 만든 신발이어야 한다. 

- 250쪽 



몇 주에 걸쳐 이 책을 다 읽은 결론을 말하자면, 남성 독자에게는 이 책은 여성의 심리를 알게 해주는 부분적인 안내자이며(그러나 너무 재미있는), 여성 독자에게는 반드시 읽어야 하는 필독서였다. 엄격하게 따지자면, 이 책은 인문학으로 분류될 수 있겠지만, 그 분류가 무색할 정도로 여성 독자들에게는 매우 실천적이며 호소력 있는 내용으로 채워져 있다. 그러니, 외국의 어느 여성 독자는 'Woman's Bible'이라는 표현을 사용했을 것이다. 


시간만 버리기 일쑤인 자기계발서들 - 특히 여성독자들을 타겟으로 하는 - 을 읽는 것보다 이 책을 읽기를 추천한다. 충분한 가치를 발휘할 것이다. 더구나 내용마저 흥미진진하지 않은가. 






늑대와 함께 달리는 여인들

클라리사 P. 에스테스저 | 손영미역 | 이루 | 2013.09.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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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강변 



                                           이병률 




나는 가을이 좋다고 말했습니다


나는 길을 잃고 

청춘으로 돌아가자고 하려다 그만두었습니다 


한밤중의 이 나비 떼는

남쪽에서 온 무리겠지만 

서둘러 수면으로 내려앉은 모습을 보면서

무조건 이해하자 하였습니다


당신 마당에서 자꾸 감이 떨어진다고 했습니다.

팔월의 비를 맞느라 할 말이 많은 감이었을 겁니다.

할 수 있는 대로 감을 따서 한쪽에 쌓아두었더니

나무의 키가 훌쩍 높아졌다며 

팽팽하게 당신이 웃었습니다


길은 막히고 

당신을 사랑한 지 이틀째입니다. 



- <<눈사람 여관>> 중에서 

*** 



선릉역 지하 개찰구를 나와 지상으로 올라오는 계단 중간 즈음, 하얀 보푸라기가 날리듯 흩어지는 눈송이들을 보았다. 잠깐. 지하 전철역에서 인근한 빌딩 3층으로 가는 동안. 그리고 세 시간이 걸린 지리하고 불편하기만 했던 회의가 끝나자, 어둠이 왔고 눈은 사라졌다. 앞으로 눈은 계속 내릴테지만, 나에겐 시간은 없고, 없는 시간은 새로 만들어지는 법 없이 돌이킬 수 없는 방향으로 흘러가기만 한다. 


지난 주말, 스산한 마음과 안타까움에 책을 읽었다. 오래만에 든 시집이었다. 그리고 '시집을 좋아하냐'고 묻고 싶었다. 하지만 그러지 못했다. 


모든 일이 잘 돌아가지 않을 때는 가장 좋은 것은 누군가를 핑계거리 삼는 것이다. 그리고 핑계거리가 사라지면, 자기 자신이 핑계거리가 되거나 새로운 핑계를 찾기 위해서 방랑할 것이다. 스스로 핑계거리를 내세우지 않으려고, 그리고 스스로가 핑계거리가 되지 않으려고 노력했지만, 뜻대로 되지 않는 어느 늦가을, 불편한 눈송이들은 쌓이지 않고 거리 위로 물기로 스며들었다. 그렇게 내 마음도 스며들고 얼어붙는다. 


마음 막히는 밤이 왔고 술 생각이 간절해지는 추위가 사무실을 에워싼다. 피부는 건조해지고 손가락 끄트머리에 이름 모를 풀 한 포기 자라나다가 금방 마른다. 길을 잃고 청춘으로 돌아가자고 말하는 어느 11월, ... 길도 막히고 마음도 막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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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전 서가에 '아침 꽃을 저녁에 줍다'을 보았다. 여기서 '보았다'는 그 책의 존재를 확인했다는 의미이지, 그 책을 다시 읽었다는 건 아니다. 반가웠다. 대학 시절 한 번 읽었고, 직장을 다니면서 또 한 번 읽었다. 이번 가을 다시 읽고 싶은 책이다. 루쉰(노신)의 마음도 요즘 내 마음 같았을까. 대학시절 '아큐정전'을 읽었으면, 그 짧은 소설이 가진 거대한 힘 앞에서 나는 절대 이런 소설은 쓰지 못할 것이라 생각했다. 동시에 우리 시대는 루쉰의 시대가 아니므로, 그런 소설을 쓸 생각도 하지 않겠다고 여겼다. 


하지만 세상은 돌고 도는 법. 우리 시대가 다시 이렇게 어두워지리라 누가 생각했을까. 잘못된 것일지라도 과거는 흐릿해지며 아름다워지기 마련이고, 그 과거 화려했던 이들은 다시 한 번 누군가에겐 끔찍했고 비합리적이었으며 심지어 절망적으로 죽음을 불렀던 그 때 그 시절을 다시 불러들이고 있다. 그리고 말없고 무관심하고 심지어 자신의 일로 닥칠 어떤 일에 대해서도 지금 당장은 자신의 일이 아니라며 손사레를 치는 대중은 오직 돈벌이에만 혈안이 된 요즘, 루쉰(노신)은 다시 읽을 만한 작가가 되는 셈이다. 





*** 

2005년 1월 15일 메모한 글. 



노신의 여러 글들을 모아 옮긴 『아침꽃을 저녁에 줍다』(이욱연 편역, 도서출판 창)를 읽었다. 노신의 글들을 벗 삼아 세상을 살아가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대학 시절 중문학을 전공하신 백원담 교수에게 강의를 들은 이후, 노신에 대해 생각해보지 않다가 최근 홍대 앞 헌책방에서 이 책이 눈에 띄어 구입하여 읽게 되었는데, 대학 때나 지금이나 역시 거장이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는 현실을 끌어안고 앞으로 나가는 이다. 페어플레이도 그만한 상대에게나 어울리는 것이지, 그렇지 않은 상대에게는 어울리지 않는다고 지적한다.

 

추근(秋槿: 중화민국의 여성혁명가)여사가 바로 밀고로 죽었다. 혁명 후 잠시 <여걸>이라고 불리더니, 지금은 입에 올리는 사람도 거의 없다. 혁명이 일어나고, 그녀의 고향에 도독(都督: 군사 책임자)이 부임했는데, 그녀의 동지인 왕금발(王金發)이란 사람이었다. 그는 그녀를 살해한 주모자를 체포하고, 밀고 서류를 수집?조사하여 복수를 하려하였다. 그러나 결국은 그 주모자를 석방하였다. 듣자니, 이미 민국이 된 마당에 구원(舊怨)을 새삼스레 다시 들춰내 무엇하겠느냐는 이유에서였다. 그런데 2차 혁명이 실패한 뒤, 그 왕금발은 원세개의 앞잡이에게 총살을 당하였다. 여기에 힘을 도운 자는 바로 그가 석방해주었던 사람, 추근을 살해한 그 주모자였다.

그 자는 천수를 누리다 죽었다. 그러나 그 곳에 여전히 출몰하고 있는 자들 역시 그와 같은 부류의 인간들이다.

- <페어플레이는 아직 이르다>중에서, 143쪽


혹자는 문학은 궁할 때 탄생한다고도 하지만 꼭 그렇지만도 않습니다. 오히려 궁할 때는 문학이 탄생하지 못합니다. 제가 북경에 있을 때만 해도 곤궁해지면 사방으로 돈 구하러 다니느라 글이라곤 한 자도 쓸 수 없었습니다. 월급을 받게 된 다음에야 책상에 앉아 글도 쓸 수 있었습니다. 바쁠 때 역시 문학은 나오지 않습니다. 짐을 진 사람은 짐을 내리고서야 글을 쓸 수 있고, 인력거꾼은 인력거를 놓고서야 글을 쓸 수 있습니다.

- <혁명시대의 문학>중에서, 213쪽


여기서 조금만 말하고자 합니다. 첫째, 생계를 도모해야 합니다. 그리고 생계를 위해서는 수단을 가리지 말아야 합니다. 요즘 <목적을 위해서는 수단을 가리지 않는다>는 것이 공산당의 특기라고 떠드는 자들이 있는데, 이것은 큰 착오입니다. 세상의 많은 사람들이 실제로는 이것을 실행하고 있으면서도 단지 입 밖에 내지 않을 뿐입니다. 둘째, 애인을 위로해 주십시오. 그런 것은 혁명으로의 길과는 정반대라는 게 세상의 여론인 듯하나, 이는 개의할 바가 못 됩니다.

- <미래를 지나치게 밝게 본 잘못>중에서, 176쪽


                                       *                                         *

 

노신을 읽고 느낀 바를 조금 적어보려다가 그만 둔다. 차라리 노신의 산문집을 한 번 더 읽는 게 낫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가족을 먹여살리지 못하는 소설가를 이웃과 그의 주변 사람들은 쉬지 않고 욕을 해대다가 어떻게 운 좋게 그 소설가가 베스트셀러라도 만들면 '그러게 그럴 줄 알았어'하면서 칭찬해대는 게 사람들이니. 그러면 그 소설가가 대단한 걸까? 나는 그를 대단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이 점에서 나는 확실하게 고전주의자이다. 먹여살려야 할 가족이 있다면 그는 돈을 벌어야한다. 어떻게든. 예술은 그 다음 문제다.

 

사람들은 다 빈치의 <모나리자>가 위대하다고들 말한다. 그렇다면 어느 독재자가 한 사람을 죽일까, 아니면 <모나리자>를 태울까 할 때, 전자를 선택해야 하는 것이지 <모나리자>를 선택하면 안 된다는 이야기다.

 

나이가 들고 보니, 만 년 전 세상이나 지금 세상이나 크게 변한 게 없다는 생각이 든다. 어차피 죽게 될 것을 조금씩만 양보하고 배려하면서 산다면 이 세상은 분명 좋은 세상이 될 터인데.

 

희망을 만드는 것은 현실의 고통 때문이지, 미래에 대한 낙관 때문이 아니다. 애초부터 미래란 없어도 무방한 종류의 것이었다.



아침 꽃 저녁에 줍다 - 루쉰문고 6

루쉰저 | 김하림역 | 그린비 | 2011.07.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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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자리에 들기 전 서가에서 낡은 시집 한 권을 꺼내 소리내어 읽는다. 




어떤 영혼들은 ...... 

1920년 2월 8일 



     어떤 영혼들은 

푸른 별들을 갖고 있다.

시간의 갈피에 

끼워놓은 아침들을,

그리고 꿈과

노스탤지어의 옛 도란거림

이 있는

정결한 구석들을.


      또 다른 영혼들은

열정의 환영(幻影)들

로 괴로워한다. 벌레 먹은

과일들. 그림자의

흐름과도 같이

멀리서

오는 

타버린 목소리의

메아리. 슬픔이 없는 

기억들.

키스의 부스러기들.


       내 영혼은

오래 익어왔다; 그건 시든다,

불가사의로 어두운 채.

환각에 침식당한

어린 돌들은

내 생각의 

물 위에 떨어진다.

모든 돌은 말한다: 

"신(神)은 멀리 계시다!" 


- 로르카, <강의 백일몽>, 정현종 옮김, 민음사, 2003년. 





이 밤, 로르카 시집이 있다는 건 정말 큰 위안이다. 





강의백일몽 [개정]

로르카저 | 정현종역 | 민음사 | 2003.03.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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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련님 - 8점
나쓰메 소세키 지음, 육후연 옮김/인디북(인디아이)
 


도련님
나쓰메 소세키(지음), 육후연(옮김), 인디북 


- 이 소설에 대해 간단한 평을 쓰려고 인터넷서점을 검색해보았더니, 나쓰메 소세키 전집이 나오고 있었다. 그 전집을 보고 있으니, 이젠 구경조차 할 수 없는 오에 겐자부로 소설 전집이 떠오른다. 그 때 그, 오에 전집을 다 사둘 걸, 후회하고 있다. 하지만 나쓰메 소세키 전집을 살 생각은 없다. 이미 소세키의 소설 다수를 구입한 터라, 소세키를 읽을 때마다 사서 읽는 편이 좋을 게다. 


이 책은 소세키의 소설들 중 가장 대중적인 책으로 알려져 있다. 실제로도 꽤 유쾌하고 작은 소극을 읽는 듯한 느낌을 준다. 반대로 소세키의 다른 소설들에서 보여주었던 바, 지식인의 고뇌, 현대적 삶의 쓸쓸함, 정적인 서술과 표현 속에 담긴 감정의 섬세한 포착 등은 보여지지 않는다. 이 점에서 이 소설은 전혀 소세키스럽지 않다.  

집중해 읽으면 두 세 시간 안에 다 읽을 수 있는 소설이다. 그냥 재미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비합리적이며 억지스러운 선생들의 사회에 대한 비판적인 시선이 있으나, 나는 도리어 '도쿄와 지방 사이의 차별'을 드러낸 것은 아닌가 생각했다. (이러한 지역 차별에 대해서는 패트릭 스미스의 '일본의 재구성'을 보면 알 수 있다.)

그리고 우리에게 독서의 시간은 한정되어 있고 그 한정된 시간 안에 나쓰메 소세키를 경험하고 싶다면, 이 소설을 추천하진 않겠다. 




* 나쓰메 소세키의 다른 소설들에 대한 리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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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다림 망각 - 10점
모리스 블랑쇼 지음, 박준상 옮김/그린비



기다림 망각 L'attente L'oubli 
모리스 블랑쇼(지음), 박준상(옮김), 그린비 



장르가 불분명한 이 책은 모리스 블랑쇼의 일종의 에세이다. 일종의 연애담으로 읽어도 될 것이며, 문학론으로 읽어도 되고, 인생에 대한 태도로 읽어도 무방하다. 어차피 모리스 블랑쇼 연구자가 될 턱 만무하고 어려운 철학 용어나 문예 이론을 들이민다고 해서 이해될 리도 없다. 이 책 속의 그도 그녀를 향해 끊임없이 이야기하지만, 그녀는 그의 바람대로 움직여주지 않는다. 

모든 것은 죽고 사라져야만 비로소 의미가 드러나는 법이다. 망각. 
그리고 그 드러나는 의미를 기다리는 것. 그것이 언어이거나 문학이거나 예술이 될 것이다. 

이 책은 그와 그녀를 통해, 모리스 블랑쇼가 마주 했던 언어와 문학에 대한 일종의 고백이자, 연애담, 그리고 이론적 방향에 대한 개요이다. 그래서 연구자에겐 꽤나 흥미로운 텍스트가 될 것이고 일반 독자에게는 흥미로운 문장들로 이루어진 연애 아포리즘이 될 수 있다. 

책은 읽기 편하고 내용은 어렵지 않다. 연구자에겐 어려울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모리스 블랑쇼가 궁금했던 이들에게 추천할 만한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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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의 1년 만에 시집을 샀다. 실은 1년이 더 되었는지 모를 일이다. 


대학을 졸업한 이후 한참동안 글을 썼고 아주 가끔 신춘문예에 응모하기도 했으나, 


이것도 십 수년 전 일이니, 시집은 나로부터 참 멀리있는 존재가 되었다. 


그리고 오늘 사무실에서 이병률의 시집을 펼친다. ... 참 어울리지 않는 짓이다. 





나도 건달이고 싶다, 철없이 로맨틱하기만 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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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다를 수 없는 나라 
크리스토프 바타이유, 문학동네 




아직도 갈리마르에서 일하고 있는 지 모르겠다. 이 책이 나오고 난 다음 문학동네 초청으로 한국에 잠시 들른 적이 있었던 크리스토프 바타이유. 소문을 듣고 이 책을 읽던 독자들은 어디로 갔을까. 이런 류의 소설을 쓸 수 있는 이도 얼마 되지 않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소설가들에게 있어 최고의 영광은 최고의 데뷰작을 쓰는 것이 아닐까. 꼭 르 클레지오가 <<조서>>로 데뷰했듯이. 이 소설을 안 읽었다면 서점 가서 사서 꼭 읽어보길. (2005년 11월)



--


원제 "Annam"은 베트남의 옛 이름이다. 베트남은 한 때 프랑스 식민지였고, 그 때의 명칭이 '안남'이다. 실은 중국이 베트남을 부를 때, '안남'이라고 하는데, 이를 프랑스가 그대로 사용한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우리가 동남아시아에서 나는 쌀을 '안남미'라고 하는데, 여기서 유래한다. 


마르그리트 뒤라스가 식민지 베트남 출신이고, 알베르 까뮈나 자끄 데리다의 고향이 식민지 알제리 출신이라는 것은 늘 흥미를 끈다. 


이 소설은 그런 식민지 풍경을 그린다. 문장은 서정적이다 못해, 부드러운 꿈결 같고 동남아시아 특유의 하늘과 대기가 소설 속에 녹아든 듯하다. 이 짧은 소설이 주는 여운은 꽤 길어서, 이 책을 읽은 지 10년이 지난 지금도 잊혀지지 않는다. 



-- 



크리스토프 바타이유다. 오래 전 한국에 방문한 적이 있었다. 


김정란 교수와의 인터뷰다. 현재 그라세의 편집자로 일하고 있다. 그라세는 갈리마르 출판 그룹의 계열사로 알고 있다.  http://blog.aladin.co.kr/urblue/529249 





다다를 수 없는 나라

크리스토프 바타유저 | 김화영역 | 문학동네 | 2006.09.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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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것도 쓸 수 없다. 다만 이 견딜 수 없는 초조감을 적어 잊어버리고 싶다. 지금 나는 바위에 쇠사슬로 묶여 있다. 아무것도 할 수 없다. 모든 걱정, 앙심, 초조, 강박관념이 나를 긁고 할퀴고, 되풀이해서 덮치도록 내맡겨져 있다. 이런 날에는 산책을 해도 안 되고, 일을 해도 안 된다. 어떤 책을 읽어도 내가 쓰고 싶은 주제의 일부가 내 마음 속에 부글거리고 일어난다. 서섹스 전체에서 나만큼 불행한 사람은 다시 없을 것이다. 또는 내 안에, 그것을 사용할 수만 있다면 사물을 즐길 수 있는 무한한 능력을 비축하고 있다는 사실을 나만큼 강하게 의식하고 있는 사람도 없다. 

- 1921년 8월 18일 목요일 


어느 책에선가 예술가의 자살율을 살펴보았더니, 소설가들의 자살율이 최고였다고 전했다. 화가와 음악가의 자살율은 기억나지 않는다. 언어를 다룬다는 건 그만큼 어렵고 고된 일이다. 


작년말부터 읽기 시작한 책은 아직도 이 백페이지를 넘기지 못했다. 워낙 이 책 저 책 오가며 읽는 터이기도 하지만, 비밀스러운 일기가 출판되리라고 그녀는 상상하지 못했을 것이고, 그녀가 죽은 후 수십 년이 지난 후 더구나 동양의 작은 나라의 중년 남자가 읽는다는 건 ... ... 


버지니아 울프의 소설은 고등학교 때 읽은 후, ... ... 아직 없다. 다만 그녀의 비평, 수필은 여러 번 읽었고 이제 그녀의 일기다. 등대로... 델러웨이 부인 ... 은 번역서만 가지고 있을 뿐, 읽어야지 할 뿐이다. 


여름을 재촉하는 비가 내리는 서울엔 이미 어둠이 내렸고 긴 새벽을 위로할 술 한 잔이 그리워진다. 버지니아 울프였다면 무슨 생각을 했을까. 문장에 대한 그리움이 사라진 2013년, 버지니아 울프를 읽는 건 참 낯설고 쓸쓸한 일이다. 지독히도 쓸쓸한. 


"지금 내게 필요한 건 시다. 그래서 나는 술집 앞의 술 취한 수병처럼 후회하고 있다." 

- 1924년 8월 15일 금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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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어 - 6점
김경주 지음, 전소연 사진/문학동네



밀어 密語 
김경주(지음), 문학동네 





육체는 선으로 이루어진 풍경이다. 詩가 가장 부적절한 순간에 언어에게서 태어나는 하나의 육체라면, 뛰어난 散文은 그 육체를 감싸며 겉도는 하나의 선이다. 몸의 선은 그 자체로 숨 쉬는 비율이며 튀어오르는 정밀한 뼈들을 감추고 있는 이미지다. 쇄골은 육체가 기적적으로 이루어낸 선線의 풍경이다. 



오래 이 책을 읽었다. 기대되었다. 김경주 시인의 산문. 그것도 몸의 은밀함에 대한 글이라니. 그리고 그가 좋아하는 책들과 작가들이 인용되고 동양과 서양을 오가며 그의 산문은 깊이를 더하는 듯했다. 

하지만 내 독서는 금세 실망으로 바뀌고 두서없는 그의 상념들은 그의 우아한 언어를 갉아먹고 있었다. 그의 시적 감각은 질서없이 흩어지는 봄날 벚꽃처럼 내 눈 앞에서 반짝이며 나타났다가 사라졌다. 몇몇 문장들과 인용구, 상념의 편린들은 좋았지만, 책은 전체적으로 내 기대에 비해 실망스러웠다. 

여러 잡지에서 만났던 그의 산문이 무척 좋았던 탓에, 요즘 젊은 시인들 중에서 탁월한 시 세계를 보여주었던 시인이었던 탓에, 이 책에 대한 내 평점은 낮다. 이는 이 책에 대한 의도적 깎아내리기가 아니라, 이 책보다는 그의 시집을 읽기를 바라는 마음의 표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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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철수의 생각 - 8점
안철수 지음, 제정임 엮음/김영사




안철수의 생각
안철수(지음), 제정임(엮음), 김영사 




게으르게 읽었다. 책의 내용은 대부분 일반적이고 상식적인 의견 표명들이었다. 이야기하는 주제나 소재에 대해 상세한 부분들(원인과 정책 방향 등)까지 언급하였다면, 이런 형태의 책은 나오지 않았을 것이다. 실은 그렇게 접근했다면, 이렇게 팔리지도 않았을 것이다. 인터뷰 형태의, 적당한 수준에서 합리적인 문제 접근과 해결 방향 정도를 표명했다는 점에서 이 책은 매우 안전적인 방법을 택하고 있었다. 하지만 사람들이 정치인을 택할 때는 그가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느냐로 선택하지 않는다. 이 점에서 나는 한국 정치를 둘러싼 국민들의 태도에 대해 매우 비관적이다. 

정치인 안철수에 대해 관심 없는 사람들은 그의 생각에 대해 궁금해 하지 않을 것이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사람들은 정치인이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는가에 대해 궁금하지 않다. 사람들은 이 나라의 미래를 걱정하면서 정치인들에게 소신이나 세계관, 국가관 따위를 묻지 않는다. 나아가 사람들은 정치에 대해 아무런 관심도 없다고 생각한다. 관심을 가지고 있다고 하더라도, 그저 방송 뉴스나 신문에 나오는 짧은 언급을 흘려듣는 수준이지, 그 이상은 아니다. 사람들은 그들의 무관심으로 인해 이 나라의 미래가 어두워져가고 있음에 대해 결국 책임지지 않을 것이며, 방관할 것이고 변명할 것이다. 그들의 무책임한 행위로 인해 젊은 세대의 고통이 늘어날 것이지만, 그들은 그것을 젊은 세대들 탓으로 돌릴 것이다. 자신이 지내온 과거 이야기하면서 말이다. 

이런 환경 속에서 이 책은 참 슬프다. 깊이 있는 내용이 나오는 것도 아니고, 어느 정도 식견을 가진 이라면 아무나 말할 수 있는 수준의 내용이었다. 그렇다고 더 깊이 있는 이야기가 이 책에서 전개되기를 바란다는 것도 참 어려운 일이다. 왜냐면 독자들 대부분은 그것에 관심 없기 때문이다. 세상을 보고 읽는 눈이 더욱 비관적으로 변해간다는 사실은 참 슬픈 일이고, 안철수의 진지한 고민이 이 나라에 호소력 있게 다가가기엔 우리들은 아주 기본적 것들부터 되어 있지 않다. 가령, 타인의 말에 귀 기울여 듣기, 배려하기, 서로를 이해하면서 토론하기, 서로 같은 목적지를 향해간다는 동반자적 태도... 뭐, 이런 식으로 나열하면 끝도 없겠지. 

정치인 안철수에게 관심 있는 독자에게 이 책은 매우 중요한 책이다. 또는 거의 책을 읽지 않는 독자로서, 우리 사회의 여러 문제점들을 한 번 일람하고 싶다면, 이 책은 제법 괜찮은 지침서가 될 수도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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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 +2

  • 그래도 전 다음세대에게 조심스럽게 희망을 걸어 보네요. 예전보다는 우리의 힘으로 사회를 조금이나마 바꿀수 있다는 생각이 제 주변에도 퍼지고 있다는걸 느끼고 있거든요. 뭐 다 시간이 지나면 사회가 차근차근 성숙해 지겠죠 ㅎㅎ

    • 그렇게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 제 주위도 이젠 기성세대가 되어, 꿈보다는 현실에, 미래보다는 현재를 중요하게 생각하는 모습을 보이고 저 또한 그렇게 변해가고 있음을 느끼는 요즘입니다. 그럴 때일수록 우리는 꿈에 자극받고 미래를 향해 달려갈 수 있는 열정이 필요한데 말이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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