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들의 우주/문학 356

소설가의 각오, 마루야마 겐지

소설가의 각오 - 마루야마 겐지 지음, 김난주 옮김/문학동네 소설가의 각오, 마루야마 겐지(지음), 김난주(옮김), 문학동네 소설가 중에 그럴싸한 얼굴을 하고 있는 자나 그렇다고 믿고 있는 자는 많아도, 세상에 있는 많은 불행을 혼자 짊어질 수 있을 만큼 그릇이 큰 인간은 단 한 명도 없다. 딱히 없어도 상관은 없다. 소설은 소설이지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니까. 또 소설가가 책을 선전하는 이외의 목적으로 자기 작품 앞으로 나설 때에는 빈틈없는 주의를 기울이거나, 아니면 단호하게 소설가이기를 포기하는 편이 좋을 것이다. 그렇게 생각한다. (36쪽) 고독을 이길 힘이 없다면 문학을 목표로 할 자격이 없다. (207쪽) 내가 이 오래된 책을 다시 꺼내 읽게 된 이유는, 어느 잡지를 보다가 '하루키와 달리기'에..

노년의 즐거움, 김열규

노년의 즐거움 - 김열규 지음/비아북 '한국학의 석학이자 지식의 거장인 김열규 교수!', '한국의 키케로' 김열규 교수의 노당익장老當益壯 분투기! 하지만 책 표지에 있는 이 수사에 비해, 책의 내용은 다소 실망스러웠다. 더구나 군데군데 잘못된 정보도 있었다. 가령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자화상이라고 알려진 스케치가 실제 다 빈치의 자화상이 아니라는 사실은 미술사에 식견이 있는 이에게만 알려진 사실이라고 치자. 하지만 자끄 플레베르의 '아침식사'를 일부만 옮겨놓고 이렇게 적는 건 무책임한 일이다. 이 지루하고 답답하면서도 얄궂은 시는 프랑스의 현대 시인 자크 프레베르의 작품이다. 이는 빈 커피잔과 함께 남겨진 아내가 투덜대는 것이지, 시가 아니다. 잘해야 구시렁댐이고 잘못하면 이혼 사유서 같은 것이다. 할 ..

이름 없는 주드 (Jude the Obsure), 토마스 하디

이름 없는 주드 1 - 토마스 하디 지음, 정종화 옮김/민음사 이름 없는 주드 2 - 토마스 하디 지음, 정종화 옮김/민음사 소년이여, 꿈 꾸지 마라. 그리고 자신의 처지에 만족해라. 자신이 태어난 고향을, 자신이 자란 마을을, 그대의 부모와 가문을. 만일 가족으로부터 버림받았더라도 그것을 겸허하게 받아들여라. 그리고 절대로 자신의 고통스런 가난을 저주하지 말며, 타인들의 삶과 비교하지도 말 것이며, 자주 견디기 힘들고 쓸쓸할 지라도 그 일상을 소중하게 여겨야만 할 것이다. 하지만 우리의 주드는 늘 다른 곳을 향해 고개를 돌리고 있었다. 그는 자신이 바라는 어떤 미래를 향해 서 있었다. 그는 꿈을 꾸고 있었다. 크라이스트민스터에서의 평온한 삶을, 공부하는 학생으로서의 일상을 꿈꾸었으며, 사촌인 수와의 사..

빠스꾸알 두아르떼의 가정, 카밀로 호세 셀라

빠스꾸알 두아르떼의 가정 카밀로 호세 셀라(Camilo Jose Cela) 지음, 김충식 옮김, 예지각, 1989년 초판. 어떤 일이 뜻대로 되지 않을 때, 아무리 최선을 다해도 나만 유독 되지 않는다는 기분이, 그런 경험이 계속 쌓여져갈 때, 그래서 나 자신에 대한 실망과 세상에 대한 불만과 증오가 쌓여져갈 때, 그것을 ‘운명’ 탓으로, ‘팔자’ 탓으로 돌릴 수 있다면 그건 얼마나 축복받을 일인가. 이제 ‘운명’대로, ‘팔자’대로 살면 그 뿐이다. 헛된 희망을 꾸지 말고 그저 원래 나는 불행하게 태어났으며 되는 일이란 없으니, 그저 그렇게 살면 그 뿐이다. 그리고 저 멀리서 ‘운명’와 ‘팔자’를 다스리고 있다는 초월적 실체에 대한 경배를 시작하면 된다. 점쟁이 집에 자주 가고 부적 붙이고 굿도 하고 안..

허난설헌, 김성남(지음)

허난설헌 - 김성남 지음/동문선 많은 기대를 하고 펼친 책이지만, 안타깝게도 이 책의 완성도는 너무 떨어졌다. 여기저기 쓴 논문들을 수정없이 모은 듯 보이는 이 책은 똑같은 내용이 책에 앞에 등장하기도 하고 뒤에 다시 등장하기도 한다. 결국엔 책의 내용까지 의구심이 들게 한다. 처음에는 규방시인이 아니었다고 하다가, 뒤에는 규방시인 허난설헌이라고 표현하기도 한다. 그렇다고 해서 허난설헌의 천재성이나 독창성을 무시할 생각은 전혀 없다. 그녀, 허균의 누이면서 조선 시대 최고의 여류 시인이면서, 유선시(遊仙詩)의 대가였다. 그녀는 시간와 공간을 잘못 타고 태어났으며, 그래서 그녀는 시간과 공간을 벗어난 신선의 세계를 그리워했다. 박복한 운명의 주인공이었으며, 서른이 되기 전에 생을 마친 비운의 여인이었다. ..

고도를 기다리며, 사무엘 베케트

고도를 기다리며 - 사무엘 베케트 지음, 오증자 옮김/민음사 직장 생활을 하면서 공부를 한다는 건 꽤 큰 도전이다. 지금 그 도전을 하고 있다. 지난 주 내내 사무엘 베케트의 '고도를 기다리며'를 읽었다. 이번 읽는 것이 몇 번째인지 모르겠다. 매번 읽을 때마다 시선이 가는 문장이 다르고 연극을 다르게 해석한다. 다음에 읽을 땐, 또 어떤 느낌일까. 과제물로 제출한 간단한 페이퍼를 올린다. 조금 형편없이 쓴 글이긴 하지만. **** 1막의 뽀조와 2막의 뽀조는 서로 대비되면서 마치 눈을 가린 현자, 혹은 운명의 여신처럼 보인다. 명령을 내리듯 말하고 모든 걸 아는 듯 단언적이다. 럭키는 이런 뽀조 옆에서 혼자서는 아무런 행동도 하지 못하고, 뽀조의 명령 체계 속에서 정해진 대로 움직일 뿐이다. 뽀조와 럭..

햄릿, 세익스피어

햄릿 윌리엄 셰익스피어(지음), 김재남(옮김), 하서 시청률의 노예가 되고 하나의 광고라도 더 받아야 하는, 처량한 TV 드라마의 시대에, 몇 세기가 지난 영국 작가의 희곡을 읽는 건, 참으로 터무니없어 보인다. 우리의 일상은 셰익스피어를 읽을 만큼, 고상하지도 않고 더구나 여유롭거나 한가롭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셰익스피어를 읽어야 한다면, 그건 무슨 이유 때문일까. 끝까지 살아남아 이 비극의 전말을 후세에 남기게 될 호레이쇼에 대해 햄릿은 이렇게 이야기한다. 햄릿 여보게 호레이쇼, 나는 스스로 영혼 속에 분별력이 생겨서 인간의 선과 악을 가릴 줄 알게 된 때부터 자네를 영혼의 벗으로 꼭 정해놓고 있네. 자네만은 인생의 갖은 고생을 겪으면서도 흔들리지 않을 뿐더러, 운명의 신의 상과 벌을 똑같이 감..

강철군화, 잭 런던

강철군화 - 잭 런던 지음, 곽영미 옮김/궁리 세계는 앞으로 가는 것일까? 아니면 정지해 있는 것일까? 혹은 뒤로 가는 것일까? 아마 사람들은 앞으로 간다고 믿고 싶겠지만, 실은 '앞으로 간다'라는 진보(혹은 진화)의 개념이 우리의 사고 속에 명확하게 떠오른 것은 18세기 이후부터였다. 그리고 그것이 확실하게 자리잡게 되는 것은 찰스 다윈의 '진화론' 이후였다. 이 점에서 소설 '강철군화'는 미래를 향해 나아가는 일군의 사람들에 대해 적고 있다. 언젠가 평화로운 시위대를 폭도로 만드는, 아주 단순한 방법을 누군가에게 이야기한 적이 있었다. 그 방법인 즉슨, 시위대 속의, 눈에 잘 띄는 젊은 여자(이쁘고 연약하게 보이면 보일수록 좋다)에게 아주 짧은 시간, 집중적으로 폭력을 가하면 된다. 그러면 그 젊은 ..

무인도를 위하여

서가에서 오래된 시집 한 권을 꺼내 소리내어 읽는다. 박꽃 신대철 박꽃이 하얗게 필 동안 밤은 세 걸음 이상 물러나지 않는다 벌떼 같은 사람은 잠들고 침을 감춘 채 뜬소문도 잠들고 담비들은 제 집으로 돌아와 있다 박꽃이 핀다 물소리가 물소리로 들린다 소리 내는 사이사이로 생의 거친 바람과 서늘한 도시 풍경이 밀려온다. 일주일 내내 목 염증으로 고생하고 있다. 이젠 두통까지 생기는 느낌이다. 몸은 너무 피곤하고 음악 소리는 귀 안으로 들어오지 않는다. 햇살은 부드럽지만, 늘 그렇듯, 자신의 속내를 드러내지 않는다. 늘 따로따로 움직일 뿐, 서로를 간섭하지 않는다. 대학시절, 신대철의 시를 끼고 살았다. 딱 한 권만 나와있던 그의 시집. 몇 년 전에 새로 시집이 나왔으나, 읽히진 않았다. 첫 시집 내고 두 ..

인 콜드 블러드, 트루먼 카포티

인 콜드 블러드 - 트루먼 카포티 지음, 박현주 옮김/시공사 1. 주기적으로, 떠올리기조차 싫은 끔찍한 살인사건들이 있었다. 그리고 방송과 신문들은 그 사건을 연일 다룬다. 사람들의 궁금함을 풀어주기 위함이지만, 실은 자신들의 수익모델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을 뿐이다. 각 분야의 전문가들이 나와, 자신들의 전문적인 시각에서 바라본 그 사건의 의미와 해석을 쏟아낸다. 실은 사건의 직접적인 당사자와 피해자, 혹은 그들의 가족에는 아무런 위로도 되지 못하며, 아무런 예방 효과도 가지지 못하는 이야기만 떠들어댈 뿐이다. 먼 훗날, 사람들은 그런 사건들을 기억할까? 아마 정신이 나간 몇몇 보수주의자들은, 전쟁 땐 더 많은 사람들이 죽어나간다며, 애써 그런 사건들의 의미를 축소시킬 지도 모른다. 그런데 이런 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