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들의 우주/문학 345

눈물은 왜 짠가, 함민복

눈물은 왜 짠가 함민복 산문집, 이레 열어놓은 창으로 차가운 새벽 공기만 들어오는 것이 아니라, 초가을 모기까지 들어와 날 괴롭힌다. 제 철이라 핀 코스모스는 바람의 상쾌한 노래 소리에 몸을 흔들지만, 그걸 곱게 봐 줄 사람 없는 도로 한 복판에 피어 지나는 이의 마음을 아프게 했다. 모기에게 물린 발등의 자국은 어느새 사라졌지만, 모기 소리는 계속 내 귓가를 맴돌며 흘러 다닌다. 이 모든 것들은 가을이 만들어내는 풍경이다. 그것도 오염된 가을이. 오염된 몇 번의 가을을 거치자, 나도 오염되었다. 이제 매우 불순한 상태로 오염된 내가 몇 달 동안 읽은 함민복 산문집. 처음은 좋았으나, 중간은 피곤했으며 끝은 알 턱 없이 슬펐다. 나는 함민복 씨를 만나본 적 없고 그가 어떤 사람인지 알지도 못한다. 그의 ..

새들은 페루에 가서 죽다, 로맹 가리(에밀 아자르)

새들은 페루에 가서 죽다 - 로맹 가리 지음, 김남주 옮김/문학동네 새들은 페루에 가서 죽다, 로맹 가리(지음), 김남주(옮김), 문학동네, 2001 세상에 이렇게 비극적이며 냉소적인 소설가가 또 어디에 있을까. 그리고 결국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 로맹 가리, 또는 에밀 아자르의 ‘자기 앞의 생’ 또한 세상에 대한 끝없는 냉소로 일관하듯이 이 소설집 또한 그러하다. 군데군데 등장하는 유머러스함마저도 로맹 가리의 냉소적인 시선을 배가시킬 뿐이다. 그의 냉소는 어디에서 시작한 것일까. 하긴 우리는 늘 어딘가에 속고 산다. 어린 시절 읽었던 위인전으로부터, 교과서로부터, 하이틴로맨스로부터 속고 청년 시절 사랑스럽던 그녀‘들’에게서 속고 장년 시절 남편에게서, 아내에게서, 직장 상사에게서, 동료에게서 속임을 당..

내가 아직 아이였을 때, 김연수

내가 아직 아이였을 때, 김연수(지음), 문학동네, 2002 손에 잡으면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는 소설 읽기. 하지만 언제나 오랜 시간이 걸리는 소설 읽기. 얼마 만인가. 국내 소설가가 쓴 소설을 읽은 게. 매일 아침, 사무실 앞에 누군가 읽어주길 기다리며, 던져져 있는 중앙일보. 가끔 그 신문 모퉁이에 소설가 김연수의 칼럼이 실리곤 한다. 70년대산 소설가의 칼럼. 그 곳에 칼럼을 싣는 이들 중 가장 가난하리라 예상되는 이의 칼럼. 2006년에 익숙하지 않는 풍경이다. 번역 소설이 인기를 얻고 있는 시절, 젊은 국내 소설가의 작품집은 늘 멀리 있다. 바쁜 일상 속에서 성공이니, 재테크니, 웰빙이니 하는 것들 중에서 젊은 소설가의 작품집은 황당한 것에 가깝다. 내 인생만큼이나. 어깨를 돌려 그의 데..

끔찍하게 민감한 마음, 버지니아 울프

, 버지니아 울프(지음), 정덕애(옮김), 솔, 1996년 문학비평가들이 쓴 문학에세이들 대부분이 그들이 가진 편협한 이론적 시야에 갇혀 일방적인 해석의 늪 속에서 빠져 나오지 못한 채, 잘못된 방식으로 해석하고 왜곡시키는 경우가 많은 반면, 작가들이 쓰는 에세이는 적어도 작품이나 작가를 진실된 눈으로 바라보고 이해하려고 노력한다는 점에서 때로 더 뛰어난다. 버지니아 울프의 이 산문집 또한 그러하다. 19세기, 20세기 영국 문학에 대해 아는 바가 거의 없어도 그녀의 문장은 독자를 배려하며 독자의 눈길 앞에 순결한 그 하얀 살결을 드러내며 초봄의 햇살 같은 미소를 지어 보인다. 고도로 문명화된 사회에서는 위장(僞裝)이 너무나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고 공손함이 너무나 필수적이기 때문에 전통과 의식을 던져 버..

미소는, 어디로 가시려는가

3월의 어슴푸레 번지는 저녁의 물컹한 검정이 손가락 끝에 닿자, 기다렸다는 듯 온 몸이 검게 물든다. 오래된 잉크를 순식간에 빨아들이는, 허기에 찬 만년필처럼. 34년 살아온 나와 하루하루 일과에 치여 순간순간 변하는 나 사이의 거리는 지구와 안드로메다은하 사이처럼 멀기만 하다. 오랜만에 책상에 앉아 시집을 펼쳐 활자와 활자 사이에 숨어있는 시인의 마음을 잡아낸다. 다행히도 그는 그 자리에 그대로 있으니, 얼마나 기쁜 일인가. 시인이 된다는 것, 얼마나 감사하고 축복받을 일인가. 그러니 웃고 즐거워하고 마냥 행복해야 할 것이 시인의 운명이거늘, 예전의 그나 지금의 그나 그렇질 못하니, 그저 변하지 않았고 변하지 않으려는 것에 만족할 뿐이다. 미소는, 어디로 가시려는가 장석남 저 새로 난 꽃과 잎들 사이 ..

내 마음의 무늬, 오정희

오정희(지음), , 황금부엉이, 초판3쇄 산문집을 출판한 뒤, 보름 만에 3쇄를 찍은 이 산문집을 보면서 책 읽는 사람이 없다는 게 꼭 거짓말처럼 느껴진다. 도리어 읽을 책이 없는 것은 아닐까. 신뢰할 만한 작가가 없는 것은 아닐까. 이런 저런 생각이 머리를 휙 돌고 나오고 나온다. 일간지에 실린 광고 생각부터 오정희가 가지는 개인브랜드까지. 얼마 전 어느 신문 기사에 한국 문단은 정부가 먹여 살린다는 짤막한 시평이 실렸다. 소설 써서 정부 지원금 받고 재단 지원금 받고 하면 연봉이 한 이 천 만원 정도 된다는 웃지 못할 글이 신문에 실린 것이다. 진짜 밥벌이용 소설인 셈이다. 소설가는 소설을 출판해 독자를 만나는 것이 아니라 지원금 신청에 사용하고 독자는 독자 나름대로 책을 고르기도, 서점에 가서 책을..

카사노바의 베네치아, 로타 뮐러

로타 뮐러(지음), 이용숙(옮김), , 열린책들, 2004 베네치아의 모든 사람들은 무대를 가로질러 가듯이 지나간다. (중략). 그러면서 언제나 오로지 그 장면에서만 존재의 의미를 갖는 연극배우들처럼 보인다. 극은 오직 그 곳에서만 이루어지며 그 이전의 현실에 대해서 역시 어떤 원인도 제공하지 못하고, 그 이후의 현실에 대해서 역시 어떤 영향도 미치지 않는다. (중략) 베네치아는 모험의 이중적인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다. 뽑혀 바다에 떠 있는 꽃처럼 인생에서 뿌리 없이 유영하는 모험 말이다. 베네치아는 모험의 고전이었으며 현재도 그런 존재로 남아 있고, 온갖 모험의 총체가 갖는 최후의 운명을 구체화한 도시다. 이 도시는 결코 우리 영혼의 고향이 될 수 없으며, 다만 하나의 모험으로 존재할 수 있을 뿐이다...

개인적 체험, 혹은 늙어간다는 것, 무디어져간다는 것

개인적인 체험 - 오에 겐자부로 지음, 서은혜 옮김/을유문화사(고려원에서 오에 겐자부로 전집이 나왔으나, 이제는 헌책방에서조차 구하기 어려운 귀한 전집이 되었다. 일본 문학사에서 보기 드문 문학적 업적을 이룬 오에 겐자부로에 대한 이해가 한국에서도 깊어졌으면 하는 바람을 가진다.) 새로 홈페이지를 단장하면서 이전에 쓴 글을 추스리고 있다. 그리고 눈에 들어오는 한 글. 히미코를 따라 소리내어 있다가 보니, 나도 모르게 울컥인다. 내가 소설을 쓴다면 저런 대화를 만들어 낼 수 있을까. 히미코에겐 내 사랑을 받아달라는 간절한 메시지로 기능하고, 버드에겐 장애를 가진 아이가 소중하다는 메시지로 기능하는, 그래서 세상은 평온 속에서 이어나가고 상처와 방황은 눈물로 스스로 아물어가는. 손가락으로 세어보니, 스물 ..

파이트 클럽, 척 팔라닉

파이트 클럽Fight Club, 척 팔라닉(Chuck Palahniuk) 지음, 최필원 옮김, 책세상, 2002년 말라가 밖으로 나가기가 무섭게 타일러가 다시 나타난다. 마치 마술을 부리듯. 우리 부모님도 이런 기술을 무려 오 년 동안 서로에게 썼었는데. - 87쪽 이 문장은 매우 신기했다. 하지만 금방 속고 만다. 어떤 트릭이 숨겨져 있음을 알고 있었지만, 그의 부모님도 그랬다고 하니, 혹시 사랑에 대한, 작가의 남다른 분석이나 의미 부여를 위한 상황 설정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다. 그러나 이는 대단한 착각이었다. 정신병자들이 가지는 소설적 매혹은 대단하다. 이와 동시에 그 한계 또한 명확하다. 그리고 매우 ‘손쉬운’ 방법이다. 대부분의 독자들이 충격을 받았을 끝의 반전은, 실은 의도된 것으로서 소설..

흉터와 무늬, 최영미

흉터와 무늬 - 최영미 지음/랜덤하우스코리아 흉터와 무늬, 최영미 지음, 램덤하우스중앙, 2005년 도대체 ‘나’는 무슨 이야기를 하고 싶었던 걸까. 아버지 이야기? 어머니 이야기? 죽은 언니 이야기? 아니면 그걸 뒤죽박죽 섞어놓은 가족 이야기? 굴곡진 한국 현대사 속에서 살아남은 가족 이야기? 그럼 그런 이야기를 해서 무슨 소용이 있는 걸까? 그런 이야기를 독자에게 들려주어 독자들이 무엇을 알아주었으면 좋을까? 그런 가족이 있었다고? “지난 4년은 시인이었던 과거의 나와 소설가가 되려는 내가 서로 투쟁하던 기간이었습니다. 천매가 넘는 분량을 써내기가 정말 힘들었어요.” - 한겨레신문 2005년 5월 11일자 이 소설은 하나의 소실점으로 뭉치지 못하고 흩어진다. 그저 가족이야기라고 하면 되겠지만, 그러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