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들의 우주/문학 345

로마의 테라스, 파스칼 키냐르

로마의 테라스 파스칼 키냐르 지음, 송의경 옮김, 문학과 지성사 '은밀한 생' 이후 읽는 키냐르의 두 번째 소설이다. 전체가 거의 다 하얗게 보이는 드라이포인트. 빛에 잠식된 난간의 받침살들 뒤로 한 형상이 보인다. 나이 든 남자의 모습이다. 지그시 감은 두 눈, 흰 턱수염, 다리 사이에 들어가 있는 손, 테라스 위, 로마, 황혼녘, 하루 중 제 3의 시간, 저무는 태양의 황금빛 광휘에 휩싸여, 그는 자유로움과 살아있다는 행복에 흠뻑 취해 있다. 포도주의 몽상 사이에. (78쪽) 기대한 만큼 감동적이지 않고 프랑스 내에서 화제가 되었다는 점이 의아스럽기까지 하다. 역자의 말에 따르면 그가 바로크 시대를 염두에 두고 이 소설을 썼다고 하지만, 그의 소설은 전혀 바로크적이지 않다. 극중 주인공의 판화 속에서..

꿈의 노벨레, 아르투어 슈니틀러

꿈의 노벨레 아르투어 슈니틀러, 자유출판사 “내 생각에는 우리가 그 모든 모험에서 무사히 벗어날 수 있게 한 - 실제와 그리고 꿈 속의 모험에서 - 운명에 감사해야 될 것 같아요.” 라고 알베르티네는 말하지만, 그로부터 100여년이 지난 지금, 알베르티네나 프리돌린 같은 인물은 존재하지 않는다. 라는 SF영화를 만들고 있는 워쇼츠키 형제가 키아누 리버스라는 배우에게 장 보드리야르의 을 읽게 했다는 사실은 이 소설 속의 주인공이 경험하게 되는 모험이나 꿈에 대해 우리가 갖게 되는 태도의 변화를 알 수 있게 해준다. 슈니틀러의 매혹적인 문장 속에서 세기말의 사랑과 성에 대한 이중적 태도는 이 평범한 부부의 삶 속에서 고스란히 드러난다. 알베르티네가 낯선 남자에게서 느끼는 성적인 매혹과 프리돌린이 벌이는 흥미..

벌거벗은 내 마음, 샤를 보들레르

벌거벗은 내 마음 - 샤를 보들레르/문학과지성사 , 샤를 보들레르 이건수 옮김, 문학과 지성사 종종 살아간다는 것에 대한 의미를 구한다. 이럴 때는 우리 인생이 우리 뜻대로 되지 않고 모순으로 가득차있다고 느껴질 때가 대부분이다. 사랑하는 아내의 키스를 받고 나선 사내의 트럭이 얼마 가지 못한 채 갑자기 튀어나온 자동차나 사람과 부딪히거나 몇 년 동안 준비해온 사업이 사소한 법률 조항 하나 때문이거나 어떤 이의 꾐에 의해 모든 걸 날려버리게 될 때 우리는 살아간다는 것에 대한 의미를 구하기 마련이다. 과연 살아간다는 건 무엇일까. 이런 물음에 이 책은 현명한 답을 주지 못한다. 예술은 무엇인가, 문학은 무엇이고 사랑은 무엇인가 따위의 물음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고작 이 책의 저자는, “세상은 오해에 의..

생도 퇴를레스의 혼란, 로베르토 무질

생도 퇴를레스의 혼란 로베르토 무질 지음, 박종대 옮김, 울력. ‘지난 시대의 교육 정책에 대한 역사적 기록물’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는 일련의 소설들, 1891년의 프랑크 베데킨트Frank Wedekind의 , 에밀 슈트라우스 Emil Strauß의 (1902), 그리고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헤르만 헤세의 여러 소설들과 함께 무질의 이 소설 또한 그 시기에 유행했던 소설들 중의 하나이다.(1) 하지만 나이가 너무 든 탓일까. 아니면 그 때의 학교와 지금의 학교가 틀리기 때문일까. 안타깝게도 퇴를레스, 바이네베르크, 라이팅, 바지니, 이렇게 네 명의 소년들이 펼치는 흥미로운 학교 모험담은, 나에게는 무척 낯선 것이었다. 무질은 이 소설을 통해 영혼의 성장을 이야기하고 싶었던 것일까. 쉽게 말해 나이를 어..

스페이드의 여왕, 푸슈킨

스페이드의 여왕 푸슈킨, 문학과지성사 ‘도스토예프스키와 톨스토이, 그리고 투르계네프의 문학에 대한 세계의 반향이 아무리 크고 높다 할지라도, 러시아인과 러시아 작가들의 사랑과 숭배에 있어 그들은 결코 푸슈킨을 능가하지 못한다’라는 책 첫머리 에 적힌 문장만으로도 푸슈킨이 어떤 위치에 있는 작가인가를 알 수 있다. 하지만 푸슈킨은 아직 일반 독자에게는 낯설다. 나의 경우 푸슈킨의 시를 먼저 읽었고 소설은 이번이 처음이다. 꽤 오래 전부터 이 책을 추천받아왔는데, 이제서야 읽게 된 것이다. 읽고 난 다음, 쉽게 푸슈킨의 세계 속으로 빨려 들어가지 못했다. 푸슈킨의 낭만적 세계 속으로. 푸슈킨은 러시아의 위대한 산문 작가임에 분명하다. 그의 정신은 소설과 시가 만나는 낭만주의의 정점에 서있다. 독일 낭만주의나..

예감, 흔적

예감 - 김화영 엮음/큰나(시와시학사) 흔적 - 김화영 엮음/큰나(시와시학사) 김화영 엮음, 시와시학사. 시집을 꼬박꼬박 챙겨 읽지 않은 지도 벌써 몇 해가 지났는지 가물가물하다. 대학시절엔 점심을 굶고 그 돈으로 시집 한 권 사면 배는 자연스럽게 부르고 가슴이 따뜻해졌는데. 얼마 전 종로 정독도서관에서 시집을 복사하는 대학생쯤으로 보이는 여학생을 보았다. 그 모습이 대학시절 날 떠올리게 했지만, 그녀가 복사한 시집이, 허수경의 시집들 중 가장 최악인, 최근의 시집이라는 점은 나의 마음을 아프게 했다. 나도 오래 전에 시집을 복사한 적이 있었다. 아주 오래 전에 번역된 이브 본느프와의 시집이었다. 지학사에서 나왔던 책으로 기억되는데, 그 때에도 절판된 지 몇 년이 지난 책이라 복사를 할 수 밖에 없었다...

모래의 여자, 아베 코보

, 아베 코보(지음), 김난주(옮김), 민음사 세계문학전집55 그는 소설이 끝나고 그 모래의 세계 속에서 탈출할 수 있었을까. 그 속을 벗어날 수 있었을까. 그런데 벗어나지 못했다면, 그래서 그 속에서 그가 늙어죽고 그녀가 늙어죽고 그들이 살던 집이 모래로 뒤덮이는 것을 아베 코보가 보여주었다면 독자들은 무슨 말을 할까. 혹시 그녀처럼 ‘무슨 상관이에요. 그런, 남의 일이야 어떻게 되든!’라고 말하는 건 아닐까. 그렇게 감동적이지도 않고 그렇게 슬프지도 않다. 그저 쓸쓸할 뿐이다. 모래의 세계 속이나 낮고 높은 건물로 둘러쳐진 도시 속이나 갇혀있기는 마찬가지다. 소설은 육체의 고립을 극대화했을 뿐이지, 소설 밖 우리들의 의식은 이미, 오래 전부터 어딘가에 갇혀있었다. 아베 코보는 갇혀있는 우리들의 한 면..

내 생일날의 고독, 에밀 시오랑

(원제 : 태어남의 잘못에 대하여) 에밀 시오랑 지음, 전성자 옮김, 에디터 루마니아에서 태어나 젊은 시절, 루마니아어를 버리고 평생을 미혼으로 남은 채 파리 어느 다락방에서 프랑스어로 글을 썼다는 것만으로도 현대적이면서도 신비한 분위기에 휩싸인 어떤 매력을 풍긴다. 또한 그의 프랑스어는 어느 잡지의 설문 조사에 따르면 지난 세기 프랑스인들에게 가장 아름다운 프랑스 문장들 중 하나로 기억되고 있다. 하지만 이 매력, 그의 문장만으로 그를 좋아할 수는 없다. 문제는 그가 가지는 인생에 대한 태도에 있다. 가령 이런 문장들, “젊은 사람들에게 가르쳐야 할 유일한 사항은 생에 기대할 게 아무 것도 없다는 것이다”, “우리는 죽음을 향해 달려가고 있는 게 아니라 태어났다는 재앙을 피해 달아나고 있다. 그 재앙에..

양화소록, 강희안

양화소록 - 강희안 지음, 서윤희 외 옮김, 김태정 사진.감수/눌와 양화소록(養花小錄) 강희안 지음 (서윤희/이경록 옮김, 김태정 사진/감수), 눌와, 1999 작년 여름 붉은 꽃이 피어있는 서양난 하나를 구해 기르게 된 적이 있었다. 처음 꽃을 기르게 되었다는 반가움도 잠시, 얼마 지나지 않아 푸른 빛깔의 잎이 누렇게 변하기 시작하더니 꽃도 떨어지고 채 몇 주 지나지 않아 그대로 죽어버렸다. 다시 꽃을 사서 기르리라 생각 했지만, 바쁜 직장 생활 와중에 그런 생각은 가끔 말라죽어있는 난을 볼 때뿐이었고 그 사이 해가 바뀌어 버렸다. 해가 바뀌는 동안 나는 강희안(姜希顔:1418-1465)의 을 읽게 되었다. 나에게는 라는 그림으로 알려진 조선 초의 선비 화가로만 알려져 있었는데, 그림에만 뛰어났던 것이..

불멸, 밀란 쿤데라

불멸 - 밀란 쿤데라 지음/청년사 밀란 쿤데라, 청년사 오랜만에 뛰어난 현대 문학의 수준을 한 눈에 가늠할 수 있는 소설을 읽게 되었다. 내용에서뿐만 아니라 그 형식에 있어서도 놀랍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이 짧은 글에서 이러한 평가에 대한 정당한 이유와 논증을 다하지 못함을 고려해볼 때, 이러한 평가는 위험한 것이다. 내 생각에 이 소설에 대한 제대로 된 평가를 적는다면 이 소설이 현대 문학의 어떤 흐름에 이어져 있으며 무엇을 반영하고 있는가, 이와 유사한 내용이나 형식의 소설에는 어떤 것이 있는가, 다른 예술에서는 어떤 식으로 표현되고 있는가를 논의하는, 적어도 소논문 정도는 되어야만 할 것이다. 이러한 소논문에 대한 부담을 나는 늘 그렇듯이 내 처지를 내세운다. 다만 나에게 기회가 주어진다면 현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