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들의 우주/문학 356

흉터와 무늬, 최영미

흉터와 무늬 - 최영미 지음/랜덤하우스코리아 흉터와 무늬, 최영미 지음, 램덤하우스중앙, 2005년 도대체 ‘나’는 무슨 이야기를 하고 싶었던 걸까. 아버지 이야기? 어머니 이야기? 죽은 언니 이야기? 아니면 그걸 뒤죽박죽 섞어놓은 가족 이야기? 굴곡진 한국 현대사 속에서 살아남은 가족 이야기? 그럼 그런 이야기를 해서 무슨 소용이 있는 걸까? 그런 이야기를 독자에게 들려주어 독자들이 무엇을 알아주었으면 좋을까? 그런 가족이 있었다고? “지난 4년은 시인이었던 과거의 나와 소설가가 되려는 내가 서로 투쟁하던 기간이었습니다. 천매가 넘는 분량을 써내기가 정말 힘들었어요.” - 한겨레신문 2005년 5월 11일자 이 소설은 하나의 소실점으로 뭉치지 못하고 흩어진다. 그저 가족이야기라고 하면 되겠지만, 그러기..

창녀, 넬리 아르캉

창녀 Putain 넬리 아르캉(지음), 성귀수(옮김), 문학동네, 2005. 1. 신시아에게. 신시아, 책에서만 보다 실제로 보니,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예뻤어. 나도 너처럼 마른 여자가 좋아. 그러니 네 외모에 대해선 그렇게 많이 이야기할 필요 없어. 그러면 그럴 수록 너는 예쁘지 않으니깐 말이야. 하지만 네 맑은 눈동자는 나에겐 부담스러웠어. 너의 눈동자는 궁지에 처한 17살 소녀가 세상에 대한 분노와 증오를 드러낼 때의 그 빛깔을 가지고 있더군. 그러나 소녀는 한없이 사랑하는 어떤 이가 마음을 열고 다가서기만 하면 금새 풀려버리는 그런 종류야. 신시아. 그러니, 그냥 울어버려. 그게 더 낫지 않을까. 다행이야. 너와 키스만 했다는 게. 아마 너와 관계를 맺었다면 너는 날 공격했을 꺼야. 형편없다면서..

역주 이옥 전집

...... 아침도 아름다웠고 저녁도 아름다웠으며, 맑아도 아름답고 흐려도 아름다웠다. 산도 아름다웠고 물도 아름다웠고, 단풍도 아름다웠고 바위도 아름다웠다. 멀리 보이는 풍경이 아름다웠고 가까운 경치도 아름다웠다. 부처도 아름다웠고 스님들도 아름다웠다. 좋은 안주 비록 없어도 막걸리 또한 아름다웠고 어여쁜 창기 없어도 꼴 베는 노래가 아름다웠다. 요약하면, 그윽하여 아름다운 것이 있었고 상쾌하여 아름다운 것이 있었으며, 훤히 트여 아름다운 것이 있었는가 하면 높이 솟구쳐 아름다운 것도 있었다. 담담하여 아름다운 것이 있었고 화려하여 아름다운 것이 있었으며, 그윽하여 아름다운 것이 있었고 적막하여 아름다운 것이 있었다. 어딜 가도 아름답지 않은 것이 없었으며 누구와 함께 해도 아름답지 않은 이가 없었다...

떠도는 그림자들, 파스칼 키나르

『떠도는 그림자들』, 파스칼 키냐르 지음, 송의경 옮김, 문학과지성사, 2003 책을 읽고 글을 쓰는 자의 운명. 그/그녀는 현대에 속하지 않고 고대에 속한다. 그/그녀는 현존하지 않고 오직 그림자로 왔다가 그림자로 사라진다. 침묵 속에 있으면서 수다스럽게 자신의 육체를 숨긴다. 한 곳에 머물러 있으나, 실은 그/그녀는 끊임없이 여행 중이다. 우아한 몸짓으로 시간 속으로. 오래된 시간 속으로. 소설은 이제 스토리도, 플롯도 지니지 못한 채, 소설의 운명, 책의 운명, 독서의 운명에 대해서 이야기하느라 정신이 없다. 죽음의 문턱에서야 비로소 자신의 운명을 목도하게 된 것이다. 고대에 속하는 것들이 가지는 이 때, 이런 책이 읽힌다는 것은 역설적이다. 실은 이 소설은 거짓말이다. 사라지는 것이다. 먼지가 될..

뉴욕삼부작, 폴 오스터

폴 오스터(지음), 한기찬(옮김), 뉴욕 삼부작 The New York Trilogy, 웅진출판, 1996 초판2쇄. 어둠 속으로 나의 몸과 마음을 밀어 넣고 사람들의 시선을 피하게 되었을 때, 그래서 사람들이 나를 완전히 잊어버렸을 때, 내 실수와 과오, 내 조그마한 상처, 또는 내 고귀했던 사랑마저도 이 세상에서 완전히 사라지게 되었을 때, 그렇게 되었을 때, 왜 누군가가 날 찾는 것일까. 소설은 누군가를 계속 찾아 다니다 그 누군가를 잊어버리는 방식을 택한다. 실은 오래 전부터 그는 사람들 사이에서 사라졌고 그것을 그 스스로 선택했으며 그렇게 남은 생을 보내기로 결심했는데 말이다. 그러니, 이제 날 찾는 따위의 일이 일어나지 않았으면 좋겠다. 오래 전부터 세상은 나의 것이 아닌 타인들의 것임을. 그..

그리고 사진처럼 덧없는 우리들의 얼굴, 내 가슴, 존 버거

존 버거(지음), 김우룡(옮김), , 열화당, 2004년 초판. 신분증을 보여주기 위해 돈을 지불하려고, 혹은 열차 시간표를 확인하느라고 지갑을 열 때마다, 나는 당신 얼굴을 본다. (중략) 가슴속 지갑 안에 들어 있는 꽃 한 송이, 우리로 하여금 산맥보다 더 오래 살게 하는 힘. 그리고 사진처럼 덧없는 우리들의 얼굴, 내 가슴. - 11쪽 저녁이 올 때마다 당신을 향한 내 사랑은 거울 속의 저 라일락 가지처럼 자리한다. - 70쪽 * * 지도와 나침반을 가지지 않고 여행을 떠날 수 있는 자는 과연 몇 명쯤 될까. 매번 마주하게 되는 마을이며 사람들이 낯설더라도 움츠리지 않고 이방인으로서의 자부심을 잃어버리지 않는 이는 몇 명이나 있을까. 존 버거의 은 정해진 방향을 가지지 않는 작은 글 모음이다. 정해..

자기 앞의 생, 에밀 아자르

자기 앞의 생 - 에밀 아자르 지음, 지정숙 옮김/문예출판사 자기 앞의 생 에밀 아자르(지음), 지정숙(옮김), 문예출판사 로맹 가리, 필명인 에밀 아자르로 발표한 짧은 프랑스 소설을 읽었다. 그리고 잠시 눈가를 붉혔다. 오랫만에 소설을 읽었다. '모하메드'라는 이름이 좋아졌다. 그리고 늙는다는 것, 추해진다는 것, 그리고 육체가 썩어가는 것에 대해 생각했다. 그리고 이 소설가는 자살했을 거라는 생각을 했다. 실제로, 로맹 가리는 1980년 권총 자살로 죽는다. 아마 로맹 가리는 모하메드가 되고 싶었을 지도 모른다. 고통 받았지만, 그 고통을 타인에게 전가하지 않는 어떤 사람을 사랑했고 그 사람 때문에 고통스러워했지만, 결국에는 생의 안락함을 구하게 되는 어떤 소년이 되고 싶었을 것이다. 왜냐면 그 소년..

열세가지 이름의 꽃향기, 최윤

열세가지 이름의 꽃향기 최윤(지음), 문학과지성사 '저기 소리없이 한점 꽃잎이 지고'를 대학 시절 읽고 난 이후 최윤은 성실한 한국문학 번역자로만 기억하고 있었다. '하나코는 없다'를 오래 전에 읽은 기억이 있으나, 그들의 하나코처럼, 나에게도 그 짧은 소설은 짙은 안개 속에 숨어 있었다. 힘을 내고 싶지만, 기운을 내고 싶지만, 다시 한 번 날아오르고 싶지만, 나 자신을 속이지 않고 정직하게 말해, 힘을 내어본 적도, 기운을 내어 본 적도, 날아올라본 적도 없다는 걸 ... 하지만 안개 속에선 안전하지. 어떤 이유로 '하나코는 없다'가 이상문학상을 받았던 걸까. 문학상이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는 걸까. 다시 읽고 난 다음, 문학상을 받을 만한가 고개를 가우뚱거렸다. 하긴 사람들은 기억을 잃어가고 있으며..

그로 깔랭 - 내 생의 동반자 이야기, 에밀 아자르

그로 깔랭 - 내 생의 동반자 이야기. 에밀 아자르 지음. 지정숙 옮김. 동문선. 외롭지 않아? 그냥 고백하는 게 어때. 외롭고 쓸쓸하다고. 늘 누군가를 원하고 있다고. 실은 난 뱀을 키우고 있지 않았어. 그로 깔랭, 그건 내 다른 이름이었을 뿐이야. 내 다른 모습. 길고 매끈하지만, 사람들에게 혐오감을 불러일으키는 내 모습이었어. 드레퓌스양을 사랑하고 있지만, 드레퓌스양에겐 말하지 않았어. 말하지 못한 거지. 그렇지만 난 그녀의 눈빛만 봐도 그녀가 날 사랑하고 있다는 걸 느껴. 그래, 그녀와 난 엘리베이터에서만 이야기를 했을 뿐이지. 한 두 마디. 그 뿐이긴 하지만, 난 알 수 있어. 그리고 창녀로 만나긴 했지만, 우리는 서로에 대해 많은 부분을 공유할 수 있었지. 그로 깔랭을 동물원으로 보내긴 했지만..

롤랑 바르트가 쓴 롤랑 바르트

롤랑 바르트가 쓴 롤랑 바르트 롤랑 바르트 지음, 이상빈 옮김, 강 그가 걸어 나오는 걸 천천히 살펴본다. 텍스트로서의 삶. 문체로서의 몸짓. 운율과 절망. 또는 흐린 하늘의 유쾌함. 열정에 떨고 그가 손바닥을 내밀어 하얀 구름을 만들어 땅 속으로 밀어 넣는다. 그러나 금새 구름은 대기 속에서 흩어진다. 이번에 혀를 내밀어 구름을 만든다. 가슴으로. 무릎으로. 그의 육체 구석구석에서 구름들을 만들어 낸다. 그리고 금새, 금새 대기 속으로 흩어진다. 그리고 몇 년 후 그는 죽는다. 그 자리에 흩어졌던 구름들이 모여들어 그를 만든다. 롤랑 바르트가 롤랑 바르트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롤랑 바르트는 롤랑 바르트가 아니다. 동시에 롤랑 바르트이다. 롤랑 바르트는 단수이면서 복수이다. 텍스트이며 육체이며 언어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