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 37

어느 토요일 새벽

새벽 세 시에 일어나 빈둥거리고 있다. 일찍 자긴 했다, 아니 깊은 잠을 자지 않았다. 가령 이런 식이다. 해답은 알고 있다. 하지만 그 방식대로 한다면, 다소 출혈이 발생한다. 그 출혈에 대해서 어떻게 할 것인가. 내가 책임질 것인가, 아닌가. 적고 보니, 전형적인 천칭자리의 접근법이다. 늘 그렇듯이 해답은 알고 있다. 딱 내 수준이긴 하지만. 찍어놓은 사진들은 많은데, 한결같이 정리가 되지 않는다. 아래 사진들은 제작년 가을 경주 여행에서 찍은 것이다.

춘천으로 떠난 가을 여행

여행을 좋아할 것같지만, 여행지에 가서도 책을 읽는 터라, 실은 여행을 거의 가지 않는다. 가끔 가게 되는 여행에서도, 낯선 풍경이 주는 즐거움도 있지만, 풍경은 늘 빙빙 돌아 내 마음 한군데를 가르키고, 결국 내 마음만 들여다보다 오는 경우가 많았다. 결국 여행보다 집에 박혀 책을 읽고 음악 듣는 게 더 즐거운 일이 된 나에게 ... 이번 여행은 내 의지라기 보다는 가족의 의지로 가게 된 것이었고, 한 줄의 글도 읽지 못한 최초의 여행이 되었다. 이 특이한 경험 위로 즐겁게 웃는 아내와 아들의 모습이 겹쳐지니, 즐겁고 가치 있는 여행이 되었던 셈이다. 2박3일 동안 남이섬, 소양강 댐, 청평사를 둘러보는 여행이었고, 숙박은 춘천 세종호텔이었다. 사진을 꽤 찍었다고 생각했는데, 서울로 돌아와서 살펴보니 ..

'여름-절망'에서 '가을-희망'으로

피로가 머리 끝까지 올라갔다. 집에 오니, 밤 12시가 가까이 되었고 나는 아직 일을 끝내지 못한 상태다. 하긴 내가 무리하게 욕심을 부려서 그런 것이기도 하지만. 딱딱한 걸 먹으면 안 되는데, 맥주 몇 잔에 딱딱하다 못해 씹혀지지도 않는 오징어 뒷다리를 안주 삼았다. 나이가 들수록 여유가 사라지는 것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일상 속에 내 온 몸이 들어가 있다는 느낌이 든다. 가끔은 한 발 뒤로 물러나 스스로를 돌아봐야 하는데, ... 올해 그런 여유가 생길 지 모르겠다. 여름, 뜨거운 절망을 뒤로 하고, 가을, 내년을 위한 희망을 꿈꾸어도 좋을 시기다. 몇 번의 주말 오후, 핸드폰으로 늦은 오후 석양 아래의 서울을 찍었다. 내가 가진 니콘 카메라로 찍은 사진도 있지만, 지금 PC에 옮기기가 귀찮다...

어느 주말의 침묵

갑작스런 추위를 지나자, 다시 날씨는 봄날처럼 따뜻해졌다. 하지만 이건 이상 기후. 탈정치화, 탈역사화를 떠들던 학자들이 물러나자, 정치적 삶, 정치적 일상을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것도 유행. 모든 것은 유행이고, 유행을 타는 타이밍은 모든 이들에게 중요해졌다. 진짜 중요한 것은 뒤로 숨어버리고 ... 가산디지털역 인근 커피숍에서 잠시 머리를 식히고 있다. 몇 개의 전시, 몇 개의 작품을 떠올려 보지만, 역시 예술은 우리 일상과는 너무 멀리 떨어져 있다. 우리 삶 속에서 예술은 마치 금방이라도 사라질, 공허한 대기의 무지개같다. 아무런 영향도 행사하지 못하는, 때도는 대단한 통찰을 수놓지만, 그건 마치 미네르바의 올빼미와도 같아서 그걸을 깨달은 때는 이미 시간이 한참 흘러 되돌릴 수 없을 때, ..

2011년의 어느 가을

거추장스러운 퇴근.길. 먼 길을 돌아 강남 교보문고에 들려, 노트를 사려고 했다. 몇 권의 빈 노트를 뒤적이다가 그냥 나왔다. 노트 한 권의 부담을 익히 아는 탓에, 또 다시 나를 궁지로 몰고 싶진 않았다. 토요일에는 비가 내렸고 일요일은 맑았다. 지난 주 세 번의 술자리가 있었고, 오랜만의 술자리는 내 육체를 바닥나게 했다. 늘 그렇듯이 회사에서의 내 일상은 스트레스와 갈등 한 복판에 서서 중재자로서의 역할을 수행해야만 했고, 내가 느끼는 부담이나 스트레스를 누군가에게 알리고 싶지만, 그럴 형편도 되지 못했다. (다만 지금 내 경험이 시간 흐른 후에 내 능력의 일부로 남길 바랄 뿐) 모든 이야기는 결국 나에게로 되돌아온다. 텍스트는 없고 컨텍스트만 있을 뿐이라고들 하지만, 결국엔 텍스트만 있고 컨텍스트..

10월 하늘, 닫힌 마음

(가지고 있는 폰으로 오늘 하늘을 찍은 사진임) 이 색깔은 ... 도시마다 다를까? 계절마다 다를까? 바람에 따라 달라지고, 보는 사람의 마음에 따라 달라질까? 그래서 이 색깔은 계속 달라져 형체도 없이 사라질까? 문득 올려다본 하늘은 내가 알지 못하는, 내가 닿지 못하는, 끝내 나를 향해 열어주지 않을 색으로 둘러쳐진 채, 말없이 흔들거렸다, 내 몸이. 하루에 버스가 두 번 들어오던 1970년대 후반의 창원 어딘가에서 가을 바람과 대화하는 법을 잃어버린 나는 스산한 가을 바람이 불 때면, 까닭없이 그립고 안타깝다. 어느 새 나도 닫히는 법만 배웠다, 거대하고 거친 도시에서. 닫힌 사람들 속에서 스스로를 닫는 법만 배우는 우리는 이제 문을 여는 법, 마음을 여는 법, 대화를 여는 법을 잃어버렸고, 21세..

가을 어느 날, 커피의 사소한 위안

가을 햇살이 비스듬하게 바람 따라 나풀나풀거렸다. 커피 향이 거리 위로 뭉게뭉게 피어올랐다. 그리고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서로 대비되는 빛깔끼리 대화하는 법이 없는 도시에는 외로움만 흘렀다. 투덜되는 쓸쓸함 앞에서 커피는 사소한 위안이 되었을 뿐, 결국엔 둥근 테이블 위에 오래 머물지 않고 푸른 하늘 위로 떠나버렸다. 가을이 왔다. 그리고 가을이 갈 것이다. 해마다 그랬듯이.

17-8세기 동양화 속 가을 풍경

화요일 아침 출근길의 빼곡한 지하철 속, 스마트폰을 꺼내 페이스북을 하다가 뉴욕 메트로폴리탄 페이지에 업로드된 가을 작품 하나. 그 작품을 보니, 나는 '가을이구나' 하는 생각보다 '가을이어서 술 생각 난다'거나, '찬 바람이 부니 왠지 쓸쓸해지는 느낌이다'라는... 가을 자체가 아니라 가을이 불러오는 것에 정신이 팔려있었다는 후회가 들었다. 그리고 문득 가을이라는 계절을 생각하게 된다. Tosa Mitsuoki(Japan, 1617 - 1691) Quail under Autumn Flowers ink and color on silk, 97.8 x 41.6cm, Met Museum 출처: http://www.kurl.kr/ZLyOq1 가을은 어떤 모습으로 우리에게 다가오는 것일까. Tosa Mitsuok..

멀리 돌아온 커피 한 잔과 함께

보이지 않았고 느껴지지도 않았다. 밖으로 나가자, 먼저 만난 이는 도시를 흐르는 대기의 흐름이었다. 가을 아침 바람. 강남구청역 1번 출구. 내가 아침마다 지하에서 지상으로 나오는 곳. 이리저리 흔들리는 공기 틈새로 비가 내렸다. 하지만 보이지도 느껴지지도 않았다. 굳어버린 중년의 감각 세포들. 거리는 어수선한 지난 밤 속을 헤매는 듯 보였고, 상기된 표정의 행인들은 가져온 우산을 힘없게 펼쳤다. 그 때 마침 문을 연 커피숍에선 아무런 향기도 나지 않았다. 한 잔의 커피를 마시기 위해 참 멀리 걸었다. 걸으면서 낡은 영화, 로스트 하이웨이, 데이비드 린치, 스매싱 펌킨스의 EYE를 떠올렸다. 기억은 출구가 보이지 않는 터널 속으로 향해 달려가고 ... 내 몸도 따라 휘말려 들었다. 여기는 어디지? 어디까..

늦은 가을과 이른 겨울 사이

지난 주말, 회사 워크샵을 강화군 석모도로 다녀왔다. 이 회사에 다닌 지도 벌써 2년이 꽉 채우고 있다. 그 동안 많은 도전과 실패, 혹은 작고 어정쩡한 성공을 경험하면서, 그 경험이 작은 회사에서 어떤 역할을 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에 다니기 시작한 곳이었다. 그런데 아직까지 답보다는 물음표가 더 많다는 건, 경험이 많아지고 나이가 든다고 해서 모든 사람들에게 완벽한 사람이 되기 어렵다는 것을 역설적으로 알려주었다. 하지만 그러기엔 나는 너무 욕심이 많은 것일까. 늦가을 햇살이 갯벌을 숨긴 바다 물결 위로 부서졌다. 사소하게 눈이 부셨다. 차를 싣고 짧은 거리의 바다를 건너는 배 뒤로 갈매기들이 쫓았다. 사람들이 던져주는 과자에 입맛이 길들여진 갈매기는 이미 야생의 생명이 아니었다. 석모도에 도착한 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