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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페, 프로젝트 사무실, 쓸쓸한 일요일

1.너무 화창한 일요일, 사무실에 나왔다. 일요일 나가지 않으면 일정대로 일이 되지 않을 것이기에 나갈 수 밖에 없었지만, 애초에 프로젝트 범위나 일정이 잘못된 채 시작되었다. 하긴 대부분의 IT 프로젝트가 이런 식이다. 프로젝트 범위나 일정이 제대로 기획되었더라도 삐걱대기 마련이지. 혼잣말로 투덜거리며, 사무실에 나와 허겁지겁 일을 했다. 오전에 출근해 오후에 나와, 여의도를 걸었다. 집에 들어가긴 아까운 날씨였다. 그렇다고 밖에서 딱히 할 일이 있는 것도 아니다. 전시를 보러 가긴 너무 늦었고 ... 결국 조용한 카페에 들어가 책이나 읽다 들어가자 마음 먹었다. 거리는 한산했다. 5월 햇살은 따스함을 지나 따가웠다. 봄 무늬 사이로 뜨거운 여름 바람이 불었다. 길거리를 지나는 처녀들의 얼굴엔 미소가 ..

어떤 중얼거림.

2주째가 아니라, 3주째다. 인후염에 걸린 지. 선천적으로 목 부위가 약해 가을에서 겨울 넘어갈 쯤, 매해 목감기에 걸렸다. 몇 번은, 그 때마다 다른 여자친구가, 서울 변두리에 살던 나에게 약을 사다 준 적도 있었다. 그런데 그게 십 수년 전이니, 나도 나이가 든 건가. 아니면 그냥 세월이 흐른 건가. 해마다 마음이 건조해지고 아침해가 방 안 깊숙이 들어오지 못할 때, 목 안이 약간이라도 불편하면, 유자차를 마시고 목에 수건을 감고 자곤 한다. 인후염에 걸리기라도 하면, 매우 심하게 앓아눕기 때문이다. 그런데 3주 전부터 목이 아프기 시작해, 매일 아침 저녁으로 유자차를 마시고 물을 하루에 몇 리터를 마시는지 모르겠다. 다행히 아직 앓아눕진 않았지만(필사적으로 앓아눕지 않기 위해 술을 마시면 간경화가 ..

해마다 벚꽃이 핀다.

해마다 벚꽃이 피지만, 벚꽃을 대하는 내 마음은 ... 세월의 바람 따라 변한다. 오늘 아침 늦게 출근하면서 거리의 벚꽃을 찍어 올린다. 여유가 사라지고 마음은 비좁아지고 있다. 고민거리는 늘어나고 글을 쓸 시간은 거의 없다. 지금 읽고 있는 김경주의 '밀어'도 몇 주째 들고 다니기만 하고 있다. 초반의 독서 즐거움은 금세 지루함으로 바뀌고 블랑쇼나 투르니에 수준의 산문을 기대한 내 잘못이긴 하지만, 김경주의 산문은 별같이 반짝이는 몇 부분을 제외하곤 그의 재능을 낭비하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 봄이다. 주말에는 근교 교외로 놀러 나가야 겠다. 봄의 따스한 아름다움이 사라지기 전에 내 육체 속에 그런 따스함을 밀어넣어야 겠다.

봄 하늘 아래 워크샵

일이 많다는 건 좋은 일일까? 지난 주 주간 업무를 리뷰하면서, 팀 업무를 제대로 챙기지 못하고 있구나 하는 반성을 하였다. 즉 일이 많다는 건 좋지 않다. 그만큼 빨리 지치기 마련이고 할 수 있다는 의욕이나 열정과, 실제 할 수 있는 일 사이의 거리는 상당하기 때문이다.그리고 회사 워크샵을 다녀왔다. 이번에는 내 낡은 디지털 카메라를 가지고 가지 않았다. 회사는 그 사이 직원 수가 늘어 이제 관광버스를 타고 움직일 수준이 되었다. 회사의 이런 성장 앞에서 내 모습은 그대로이니, 많은 반성을 하게 된다. 봄 하늘은 너무 좋았다. 그 하늘을 느낄 만한 여유가 없었지만. 이번에 간 곳은 문경 자연휴양림이었다. 꽤 좋았다. 나이가 들수록 사진 찍기가 겁난다. 이제 내 나이도 제법 되었으니, 저 귀에 낀 이어폰..

세 권의 책 - 루이 뒤프레, 아서 C. 단토, 도널드 바셀미

또 세 권의 책을 아마존에서 구입했다. 한글로 된 책도 밀려 쌓여있는데, 영어로 된 책을 세 권이나 주문했으니. 당분간 책을 사지 않고 쌓인 책들만 읽고 밀린 리뷰를 올려야 겠다. 오늘 온 세 권의 책은 아래와 같다. 루이 뒤프레(Louis Dupre), Passage to Modernity 아서 C. 단토(Arthur C. Danto), Andy Warhol 도널드 바셀미(Donald Barthelme), Sixty Stories 집에 와, 루이 뒤프레의 책을 잠시 읽었는데, 어디선가 많이 들었다고 생각했는데, 아주 오래 된 '마르크스주의의 철학적 기초'라는 책으로 국내에 번역 소개된 적이 있었던 학자였다. '모더니티의 길'이라고 번역할 수 있을 법한 이 책은 모더니티를 지성사적으로 고찰한 책이다. 책..

다시 봄이 왔다

노곤한 봄날 오후가 이어졌다. 마음은 적당하게 쓸쓸하고 불안하고 기쁘고 초조했다. 잔뜩 밀린 일들은 저 깊은 업무의 터널 속을 가득 메우고 그 어떤 공기의 흐름도 용납하지 않았다. 피곤함과 스트레스로 사각형의 책상과 사각형의 모니터와 사각형의 문서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을 때, 얇게 열린 창으로 봄바람이 밀려들었다. 다시 봄이 왔다. 다시 봄이 왔다 이성복 비탈진 공터 언덕 위 푸른 풀이 덮이고 그 아래 웅덩이 옆 미루나무 세 그루 갈라진 밑동에도 푸른 싹이 돋았다 때로 늙은 나무도 젊고 싶은가 보다 기다리던 것이 오지 않는다는 것은 누구나 안다 누가 누구를 사랑하고 누가 누구의 목을 껴안듯이 비틀었는가 나도 안다 돼지 목 따는 동네의 더디고 나른한 세월 때로 우리는 묻는다 우리의 굽은 등에 푸른 싹이 돋..

샌드위치 가게의 봄

창 밖으로 공항이 보였고 공항 너머로 지는 붉은 태양을 보았다. 나는 런닝머신 위에서 달리고 있었다. 전화 한 통도 오지 않는 토요일이었다. 누군가에게 전화하기도 다소 무서운 날이었다. 문득문득 세상이, 사람들이 무서워지는 봄이었고 번번이 다치는 마음이 싫은 날이 이어지고 있었다. 2시간 정도 운동을 했고 도어즈의 ‘인디안썸머’를 들으며 이미 어두워진 봄밤과 싸우고 있었다. 1996년이니, 내가 대학교 3학년 때였다. 소설을 쓰지 못하는 마음을 가진 터라, 내가 한 때 글을 썼다는 게 신기하게 여겨질 정도다. 단편영화 소재를 찾는 이가 있어, 블로그에 올린다. 좋아할지 모르겠다. 샌드위치 가게의 봄 늘 반듯하게 포장된 아스팔트 도로 한 켠으로, 어디에선가 날아왔을 법한, 잔 모래가 쌓이는 법이다. 그 모..

봄, Spring

어쩌다 보니, 내 마음은 아무도 찾지 않은, 어두운 해변가로 나와 있었다. 행복했다고 여겨지던 추억은 이미 시든 낙엽이 되어 부서져버렸고 미래를 기약한 새로운 기억은 만들어지지 않은 채, 파도 소리만 요란했다. 텅~ 비워져 있었지만, 채울 것이 없었다. 저 끝없는 우주에는. 죽지 않기 위해 죽은 자의 노래를 듣는다. 오랜만에 소설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누었지만, 결국은 언어를 지나 사랑에 가 닿았다. 쓸쓸한 사랑에. 세상을 살만큼 살았다고 여기고 있지만, 막상 표피가 두꺼워진 것 이외에 달라진 게 없었다. 비워져 가는 술잔, 늘어나는 술병 사이로 언어는 가치없이 뚝뚝 부서져 술집 나무 바닥에 가닿아 사라졌다. 사라지는 모습이 너무 슬펐다. 이 나이가 되어서야 왜 사람들이 낯선 죽음을 택하는지 이해할 수도 ..

내 마음의 이파리

4월의 투명하고 쾌적한 햇살이 푸석푸석하게 말라 거칠어진 내 볼에 부딪쳐 흩어졌다. 하지만 햇살 닿은 곳마다 어둡게 부식되어갔다. 내 마음이. 대기가 밝아지는 만큼, 딱 그 만큼 내 마음의 어둠은 깊어졌다. 봄이 싫은 이유다. 태어나 꽃을 꺾어 본 적이 손가락으로 꼽을 만큼 적지만, 선량한 꽃들은 나를 피하며 저주했다. 어둠은 깊어지며, 눈물을 흘렸고, 달아오른 고통은 고여있는 물기를 발갛게 데우며 온 몸을 축축하게 젖게 만들었다. 변하는 계절이 싫은 이유다. 변하는 마음이 싫고 늙어가는 생이 싫다. 싫어하는 것들이 늘어날수록, 딱 그 만큼 세상은 밝아지고 투명해지며 높아져 간다. 아니 높아져갔다. 이미 죽은 이들의 글을 좋아하는 이유다. 살아있는 이들의 글에서 풍기는 생명력이 가지는 밝음은 마치 끝없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