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픔 22

애도 일기, 롤랑 바르트

애도 일기 Journal de deuil 롤랑 바르트(지음), 김진영(옮김), 이순 이 책은 바르트의 어머니인 앙리에트 벵제(Henriette Binger)가 죽은 다음부터 씌여진 메모 묶음이다. 그의 어머니가 1977년 10월 25일 사망하고, 그 다음날 10월 26일 이 메모들은 씌어져 1979년 9월 15일에 끝난다. 그리고 1980년 2월 25일 작은 트럭에 부딪히는 사고를 당한 롤랑 바르트는 한 달 뒤인 3월 26일 사망한다. 그리고 그 해 쇠이유 출판사를 통해 이 책이 나온다. 롤랑 바르트 팬에게 권할 만한 이 책은 두서 없는 단상들의 모음이다. 어머니를 잃은 슬픔으로 씌어지는 이 책은 짧고 인상적이다. 롤랑 바르트 특유의 문장들을 만날 수 있고 그의 슬픔에 대한 인상, 분석, 인용들을 읽을 ..

<슬픔이 없는 십오초>를 꿈꾸며, 삭히며... - 심보선의 시집

나이가 들자, 철이 들자, 결혼 생각을 하기 시작한 순간부터 시집은 내 일상에서 멀리 떨어져 나가, 먼 바다로 흘러들었다. 한동안 육지 생활만 했다. 거친 흙바람 사이로, 붕붕 거리는 검은 자동차들 사이로, 수직성의 공학적 규율로 세워진 빌딩들 사이로, 거대한 거짓말로 세워진 정치적 일상 속에서 시는 없었고 시집은 죽은 것으로 취급되었다. 여름이 왔다, 갔다. 외로움이 낙엽이 되고 흙이 되고, 몇 해의 시간이 지나자 사랑이 되어 꽃이 피고 나무가 자랐다. 먼 바다로 나갔던 시집은 지친 기색도 없이 이름 모를 바다 해변가로 밀려들었고 그제서야 나는 육지 생활에서 한 숨 돌릴 수 있는 무모함을 가지게 되었다. 시집을 샀다, 놓았다, 펼쳤다. 심보선은 2011년의 대세다. 몇 년이 지난 그의 시집을 서가에서 ..

어느 일요일의 이야기

1. 쓸쓸한 하늘 가까이 말라 휘어진 잔 가지들이 재치기를 하였다. 죽음 가까이 버티고 서서 안간힘을 다해 푸른 빛을 받아내었다. 아무도 보지 않는 허공 가운데, 내 마음이 나부꼈다. 2. 익숙한 여행길의 낯선 파란 색이 건조한 물기에 젖어 떠올랐다 검은 빛깔의 지친 아스팔트가 습기로 물들었고 하늘거리는 원피스를 입은 소녀의 실룩거리는 엉덩이 위로 한 다발 꽃들이 피어나 꽃가루를 뿌렸다 붉은 색에 멈춰선 도로 위의 자동차 속에서 사내들이 내려 소녀를 둘러싸기 시작했다. 소녀의 입가에 미소가 퍼졌고 아직 어린 나는 공포에 떨며 주저앉아 울기 시작했다. 그렇게 울기 시작해 내 눈물은 강이 되어 내 육신을 싣고 아무도 없는 바다를 향해 떠났다. 3. 나에게 혼자냐고 물었다. 그녀가. 나는 그렇지 않다고 했다...

눈물을 흘리는 여인(Weeping Woman), 피카소, 1937년 작

Weeping Woman (눈물을 흘리는 여인) Pable Picasso. 1937년도 작. 그 유명한 '게르니카'도 1937년도 작품이고 이 작품은 '게르니카' 이후의 작품으로 알려져 있다. 이 그림의 주인공은 도라 마르(Dora Maar)로, 1930년대 중반부터 2차 세계 대전이 끝날 때까지 피카소의 연인이었던 초현실주의 사진작가이다. 이 그림은 '눈물 흘리는 성모 마리아(Mater Dolorosa)' 도상의 현대적 변용이라고 할 수 있다. 죽은 예수를 보면서 눈물을 흘리는 성모 마리아. 한 여인이 게르니카에서 일었던 참극에 대한 소식을 듣고, 혹은 그 참극을 보면서 오열하고 있는 모습을 그린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런데 저 오열 자체도 일종의 참극처럼 보이는 건 무슨 까닭일까. 슬픔을 참지 못..

서울에서의 일상

공항에서 집으로 오는 택시 안에서, 시속 백 킬로미터에서 백이십 킬로미터 사이를 오가는 속도 속에서, 나는 땀을 흘리고 있었다. 시월 말의 아침 하늘은 신비롭고 고요했다. 서해 갯벌 사이로 나있는 도로는 꽤 절망적인 근대성(modernity)을 가지고 있었다. 서유럽 나라를 가면 늘 깨닫게 되는 것이지만, 아직 한참 먼 한국의 정신적, 문화적 성숙도와 시스템을 선명하게 보게 된다. 종일 잠을 잤다. 잠을 자지 않을 때는 청소한다는 핑계로 시간을 아무렇게나 쓰며 방 안을 배회했다. 무려 이천 발자국 이상을 걸었다. 다행히 금붕어는 살아있었고 시든 화분들이 마음을 아프게 했으나, 아직 남아있는 초록빛 생기는 나로 하여금 끈질긴 생명력을 가지라고 주문하는 듯 보여 다소 간의 위안이 되었다. 몇 주 만에 짬뽕을..

내 인생 최대의 적

뜨거운 차가 부담스러워지는 계절이 온 것일까. 아니면 내 마음의 뜨거움이 어색해지고 낯설어지는 나이가 된 것일까. 아니면 엉망으로 살아온 시절들에 대해 육체가 그 특유의 반응을 쏟아내는 것일까. 천칭자리 태생은 늘 어떤 선택의 상황으로 자신을 몰아넣고 그 선택을 끊임없이 뒤로 미루는 습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사실일까. 세 여신을 앞에 두고 망설이는 파리스처럼. 전 세계 사람들이 망쳐놓은 계절은 실성한 듯한 더위를 우리에게 선사하고 극지방의 얼음이 녹고 깊은 바다 물고기들이 길을 잃고 얇은 바람은 삽시간 두텁고 무거운 부피로 우리의 도시를 강타하게 될 지도 모를 일이다. 그런데 모른다는 건 얼마나 좋고 행복한 일인가. 모르기 때문에 그저 두려움에만 떨고 신에게만 의지할 수 있다. 그러나 그토록 갈구하던 ..

꿈은 현실의 기억이 되고

어떤 꿈은 너무 선명하게 기억에 남아, 몇 년이라는 시간이 흐른 후, 그것은 실제 기억과 융합되면서 자연스럽게 현실의 기억이 된다. 아마 다수의 사람들에게 일어났을 것으로 짐작되는 이 일은 사소하지만, 사람들에겐 견딜 수 없는 정도로 깊이 패인 정신의 상처가 될 가능성이 있다. 눈을 뜨고 살아가지만, 우리가 가지게 되는 기억의 일부는 아주 오래전 선명하게 남겨진 꿈에게서 연유한 것. 종종 우리가 눈 앞의 현실에게서 고개를 돌리려고 할 때, 특히 젊은 날의 열정과 꿈이 흐린 눈가나 입가의 주름 사이로 숨어버리는 삼십대 후반이나 사십대 초반의 남자에게 더욱더 위험한 이 사건. 이 무렵의 남자들이란 대개 길거리에서, 직장에서 마주 하게 되는 젊음들에 대한 공포, 사랑하지만 사랑한다고 힘주어 고백할 수 없는 관..

조승희 씨 누나의 사과문 전문

KBS 민경욱 미 위싱톤 특파원의 메일링(mailing)를 받고 있다. 가끔 업데이트되지만, 저널에 소개되지 않는 소식이 담겨 있어, 내가 받아보는 그 많은 메일링 중에서도 추천해주고 싶은 메일링 중 하나이다. 얼마 전에 온 메일인데, 여기를 방문하는 이들도 같이 읽었으면 하는 바람이 있어 여기 그대로 옮긴다. 버지니아공대 사건에 대한 것이다. 다시는 이런 일이 생기지 않았으면 기원을 해본다. 민경욱 특파원의 위싱톤 리포트 http://news.kbs.co.kr/reporter_column/minkw/ 원문의 주소는 아래와 같다. http://news.kbs.co.kr/bbs/exec/ps00404.php?bid=134&id=824&sec= 버지니아 공대에 다녀왔습니다. 단지 워싱턴 지국에서 비교적 가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