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28

약간의 거리를 둔다, 소노 아야코

약간의 거리를 둔다소노 아야코(지음), 김욱(옮김), 책읽는고양이(도서출판 리수) 우연히 알게 된 이 책, 소노 아야코의 는 매우 산뜻한 울림을 가졌다. 어느 면에선 냉소적이며, 어느 순간엔 포기하는 듯 보이고, 때론 그냥 되는 대로 내버려두면서 일상을 사는 듯하기도 하고, 그러면서도 낙관적이며 희망을 잃지 않는, 다소 이율배반적인 면까지 보인다. 이런 점에서 그녀의 종교-카톨릭-가 큰 힘이 되는 듯 싶다. 그래서인지 자주 '운명'이라는 단어가 등장한다. 하지만 이 책은 운명론적이지 않다. 도리어 실용적인 처세술에 대한 격언들, 저자 자신의 생각들이 담겨있다. 짧은 에세이들을 통해 그녀는 매우 현실적인 조언을 하며, 지지치 않기를 강력하게 말한다. 책의 서두에서부터 인내와 운명을 이야기하는 것은 모든 일..

유감이다, 조지수

유감이다조지수(지음), 지혜정원 어쩌면 나도, 이 책도, 이 세상도 유감일지도 모르겠구나. 다행스럽게도 책읽기는, 늘 그렇듯이 지루하지 않고 정신없이 이리저리 밀리는 일상을 견디게 하는 약이 되었다. 하지만 책 읽는 사람들은 줄어들고 나는 이제 책 읽는 사람들을 만날 일 조차 없이 사무실과 집만 오간다. 주말이면 의무적으로 가족나들이를 하고 온전하게 나를 위한 시간 따위는 거의 존재하지 않았다. 어쩌다가 이렇게 되었을까 한참 고민하다가 이젠 그런 고민마저 사치스럽다고 여기게 되는 건 그만큼 미래가 불안하고 현재가 아픈 탓이다. 근대는 "주체적 인간"이라는 이념으로 중세를 벗어났다. 현대는 "가면의 인간"에 의해 근대를 극복한다. 우리의 새로운 삶은 가면에 의해 운명의 노예라는 비극을 극복한다. 가면이 새..

일요일의 인문학, 장석주

일요일의 인문학 장석주(지음), 호미 "책은 소년의 음식이 되고 노년을 즐겁게 하며, 번역과 장식과 위급한 때의 도피처가 되고 위로가 된다. 집에서는 쾌락의 종자가 되며 밖에서도 방해물이 되지 않고, 여행할 때는 야간의 반려가 된다." - 키케로 일종의 독서기이면서 에세이집이다. 서너 페이지 분량의 짧은 글들로 이루어진 이 책은, 시인이면서 문학평론가인 장석주의 서정적인 문장들로 시작해, 다채로운 책들과 저자들을 소개 받으며, 책과 세상에 대해 이런저런 생각에 빠질 수 있게 해준다고 할까. 하지만 어떤 이들에게 이 책은 가벼울 것이고 어떤 이들에겐 다소 무거울 수도 있다. 깊이 있는 글들이라기 보다는 스치듯 책들을 소개하고 여러 글들을 인용하며 짧게 자신의 생각을 덧붙이면서 끝내는 짧은 글들이 대부분이기..

원 맨즈 독, 조지수

원 맨즈 독조지수(지음), 지혜정원 매우 적절했다. 아니 탁월했다는 표현이 좋을까. 산문집을 좋아하지만, 그건 문장이나 표현 때문인 경우가 많다. 실은 그게 전부다. 하지만 진짜 산문집은 그런 게 아니다. 적절한 유머와 위트, 허를 찌르는 반전, 비판적 허무주의, 혹은 시니컬함, 그러면서도 잃어버리지 않는, 세상에 대한 따뜻한 시선, 혹은 의지. 그리고 지적이면서 동시에 풍부한 감성으로 물드는 문장. 은 그런 산문집이다. 읽으면서 일반 독자들에게 다소 어렵게 느껴지지 않을까 싶어, 인터넷 서점의 리뷰들을 보았는데, 온통 찬사 일색이라 무안해졌다. 대자적 상황에 처한다는 것이 인간의 독특한 조건이다. 지성이라고 말해지는 것이 세계와 나를 가른다. 나는 자연에 뿌리 내리지 않는다. 나는 자유롭다. 그러고는 ..

벽 - 건축으로의 여행, 에블린 페레 크리스탱

벽 - 에블린 페레 크리스탱 지음, 김진화 옮김/눌와 벽 - 건축으로의 여행에블린 페레 크리스탱(지음), 김진화(옮김), 눌와 벽에 대한 짧은 에세이다. 건축가인 저자는 건축물로서, 우리가 마주 보며 살아가는 공간으로서의 벽에 대한 여행과 생각을 조용히 들려준다. 그 목소리가 매력적인 이유는 그녀가 '벽'을 사랑하기 때문이다. 좋은 수필의 밑바닥에는 늘 '사랑'이 깔려있다. 신체적 접촉을 통해서 얻게 되는 벽에 대한 지각은 차라리 감각적으로 느끼는 기쁨이라고 할 수 있다. 햇볕으로 따뜻하게 데워진 벽에 어깨를 기대고 있으면 우리를 받쳐주고 있는 벽의 든든함과 온기를 느낄 수 있다. 동시에 곧게 서 있는 벽, 견고하게 자리하고 있는 벽을 지각할 수 있다. 휴식을 취한다는 것이 꼭 침대나 땅 위에 길게 누웠..

발레리 산문선, 폴 발레리

발레리 산문선 폴 발레리 지음, 박은수 옮김, 인폴리오. 솔직히 이 책에 대해 소개하라며 한 시간의 시간을 준다면, 혹은 원고지 30매를 채우라고 요구한다면, 아마 나는 한 시간 내내 책의 일부분을 읽어가거나, 책의 일부분을 그대로 옮겨 적을 것이다. 아마 몇몇 이들에게 이 책은 수다스럽고 장황하며 뜻모를 말만 나열하는 책이겠지만, 몇몇 이들에게는 그야말로 기가 막히고 아름다우며 읽어가는 도중, 아! 아! 라는 감탄사를 연발하게 되는 책들 중의 한 권일 것이기 때문이다. 의 한 구절을 옮긴다. 나르시스를 사모하는 한 님프의 대사다. 가엾게도 ... 내 자매들아, 죽다니? ... 우리는 죽지 않는 여신들, 부질없게도, 부질없게도 죽지도 않고 아름답기만 하니; 우리에게는 사랑도 없고 죽음도 없구나 욕망도 괴..

탁자 위의 세계, 리아 코헨

탁자 위의 세계 (Glass, Paper, Beans) 리아 코헨 지음, 하유진 옮김, 지호 잔뜩 달아오른 아스팔트 거리 위에 한바탕 빗줄기가 밀고 지나간다. 난 그 소리를 들으면서 이 책을 다 읽었다. 책을 처음 손에 들었을 때의 그 상쾌함은 어디론가 사라지고 이거 너무 오랜 시간 동안 잡고 있는 건 아닌가하는 생각에 마지막 부분은 건성으로 책장만 넘기고 말았다. 이 책을 쓴 이에게나 옮긴이에게는 매우 좋지 않은 일이지만. 이 책은 유리, 종이, 커피에 대한 책이며 유리를 만드는 사람, 종이를 만드는 사람, 커피를 만드는 사람에 대한 책이기도 하다. 많은 이야기가 여러 층을 나누어 전개되어 있다. 가령 종이가 생산되는 방식에서부터 종이가 역사적으로 어떤 변천이 겪어왔으며 현재에는 어떻게 소비되고 있는가..

내 생일날의 고독, 에밀 시오랑

(원제 : 태어남의 잘못에 대하여) 에밀 시오랑 지음, 전성자 옮김, 에디터 루마니아에서 태어나 젊은 시절, 루마니아어를 버리고 평생을 미혼으로 남은 채 파리 어느 다락방에서 프랑스어로 글을 썼다는 것만으로도 현대적이면서도 신비한 분위기에 휩싸인 어떤 매력을 풍긴다. 또한 그의 프랑스어는 어느 잡지의 설문 조사에 따르면 지난 세기 프랑스인들에게 가장 아름다운 프랑스 문장들 중 하나로 기억되고 있다. 하지만 이 매력, 그의 문장만으로 그를 좋아할 수는 없다. 문제는 그가 가지는 인생에 대한 태도에 있다. 가령 이런 문장들, “젊은 사람들에게 가르쳐야 할 유일한 사항은 생에 기대할 게 아무 것도 없다는 것이다”, “우리는 죽음을 향해 달려가고 있는 게 아니라 태어났다는 재앙을 피해 달아나고 있다. 그 재앙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