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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아란 영혼

프랑스 +22





지도와 영토(La Carte Et Le Territoire)

미셸 우엘벡(지음), 장소미(옮김), 문학동네 





매우 선명하다. 이 소설을 읽은 지 네다섯달이 지났지만, 소설 속의 인물들도 선명하고 사건도, 내용도 구체적으로 기억하고 있다,는 사실에 나는 놀란다. 소설을 읽으면서, 현대미술에 대해 이렇게 박식할 수 있다니, 감탄을 했다. 소설을 쓸려면 이 정도는 되어야지,하며 책장을 넘겼지만, 문장, 인물, 사건의 선명함을 너머 어떤 감동이 파도처럼 밀려오진 않았다. 도리어 씁쓸하기만 할 뿐. 



친구들도 이미 모두 죽고 어떤 의미로는 이미 과거에 속하게 된, 실질적으로 삶이 끝나버린 노인의 감정을, 형제나 친구처럼, 곧 태어난 곳으로 돌아가리라는 약속처럼 죽음을 대하는 노인의 음산하고 담담한 감정을 프란츠 리스트가 말년에 작곡한 실내악 소품들보다 더 잘 표현한 음악은 아마 없으리라. <수호천사에게 올리는 기도>가 흘러나오는 가운데 자슬랭은 젊은 시절을, 학생 시절을 떠올리기 시작했다. 

- 351쪽 



지금 독자는 그 자신과 어떤 연관도 없는 이야기를 읽는다. 고작 책값, 조금의 시간, 그리고 감정의 동요나 사소한 몰입 정도만 가지고. 그런데 미셸 우엘벡도 그렇게 소설을 적는 듯하다. 너무 차갑다고 할까. 마치 얼음처럼. 아무런 가치 평가도 없다. 심지어 주장마저도 없다. 제드나 우엘벡, 혹은 자슬랭의 입을 통해 나오는 이야기, 그 속에서 작가는 어떤 주장이나 가치판단을 내리는 듯 싶지만, 이마저도 차갑기만 하여 호소력을 지닌 주장이라기 보다는 무미건조한 기사처럼 읽힌다. 


결국 건조하고 차가운 대기와도 같은 문장과 서술로 인해 소설은 선명하고 직선들로만 연결되는 구조물을 만들어내지만, 그 그림자는 없다. 모든 등장인물은 정해진 방향으로 움직이거나 이미 움직인 후라, 그 어떤 후회나 반성도 하지 않는 듯 보인다. 최대한 감정이 억제된 인물들로만, 아니 미셸 우엘벡은 의도적으로 즉물적인 서술을 하고 있다. 그리고 무의미한 스틸사진들이 병렬적으로 구성되다가 하나로 합쳐지지만, 그건 제드의 죽음이다. 그것도 담담하게 서술될 뿐이다. 


어떤 이는 현대 미술의 뒷모습을 드러내는 것이라고 평할 지 모르겠으나, 과연 그럴까.  '노인의 음산하고 담담한 감정', 아마 이 소설 <<지도와 영토>>를 지배하는 감정일 게다. 



  



그리고 그 감정이 어떤 것인지 알게 되는 순간, 펑펑 울게 될 지도 모를 일이다. 



* * 


서평을 다 적고 다시 업데이트를 하다 보니, 문득 '파트리크 쥐스킨트'가 떠오른다. 묘한 동질감이 있다고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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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저자라면... '복종'이란 책을 썼던 저자 아닌가요... 이슬람 문화를 무조건 나쁜 것으로 폄하해서 소설에 기술해서 논란이 되었던...

    • 말 많은 작가예요. "우엘벡이 누구인가? 1958년생, 보수적 정치성향에 극단주의자, 쓰는 글마다 센세이션을 몰고 다니는 도발적 싸움꾼. 프랑스 태생이지만 테러위협 때문에 현재 아일랜드에 거주 중."(http://www.snunews.com/news/articleView.html?idxno=11139) 시인 이장욱은 이렇게 적고 있네요. ~ 하지만 논란만큼 매우 중요한 소설가이기도 합니다. ~



내 베개. 몽테뉴. 그를 베고 누울 때면 계몽주의의 슬픈 결말이, 현대의 지나친 오해가, 한 번 실현된 적 없는 계몽적 이성의 기획이 떠오른다. 아무도 몽테뉴를 읽지 않은 반도의 여름 속에서, 그 누구도 찾지 않는 마음의 감옥 속에서, 몽테뉴를 베고 가끔 노래를 부른다. 잊혀진 계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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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의 파도로 지은 성城 

김화영(지음), 문학동네 






여행은 나의 삶이 남의 삶이나 공간을 만나는 감촉이며 공명(共鳴)이다. - 7쪽 




'예술기행'이라는 부제를 읽곤 프랑스의 여러 예술 작품에 대한 감상이라고 여길 수 있지만, 대부분 프랑스 문학 작품과 연관된 기행 산문집이다. 예술이라는 단어에 현혹되어 미술이나 조각, 음악에 대한 다채로운 내용이 나올 것이라 기대하면 안 된다. 하지만 나는 그런 기대를 했다. 


김화영, 그는 1974년에 이미 카뮈 연구로 엑상프로방스 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카뮈에 있어선 국내 최고의 권위자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작년 그는 어느 형편없는 출판사의 노이즈 마케팅에 휘말렸다. 그 때 나온 기사들이나 광고를 거의 읽지 않았고 관심도 없었다. 


번역 문제는 늘 있어왔던 것이고 해석의 차이는 존재할 수 있다. 불어를 한글로 옮긴다는 건 쉬운 일이 아니며, 김화영 교수의 번역에 대해 뭐라 이야기할 수 있는 자유는 있기에. 하지만 내가 그 기사들이나 광고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던 것은, 예의 없고 버릇 없어 보였기 때문이다. 성실한 프랑스 문학 연구자이며 한국 독자들에게 프랑스 문학을 소개해왔으며 카뮈 전집을 한국에서 읽을 수 있게 한 老교수에 대해 '엉터리 번역'이라는 단어까지 써가며 마케팅을 했고, 오래 전부터 자신들의 형편없음을 여러 기사들을 통해 증명하고 있던 여러 일간지의 기자들마저도 앵무새처럼 '엉터리 번역'이라고 옮겼기 때문이다. 그리고 더 절망적이었던 것은 이런 상황에 독자들은 자신들의 무지몽맹함을 뽐내며, '엉터리 번역'에 동조하며 흥분하고 있었다. 실은 지금도 인터넷 서점 리뷰들을 보면 그 때 올라간 많은 리뷰들을 읽을 수 있다. 


결국 새움출판사의 <<이방인>>은 영어 번역본을 한글로 번역했고 이를 프랑스어 원문과 대조했음이 드러났다. (관련 사항은 엔하위키 미러 - 이방인 항목 참조) 더구나 이마저도 정확하지 않다. (indifference님 블로그 참조) 하지만 그래서? 일은 이미 벌어졌고 새움출판사는 자랑스레 이 책을 팔았고 지금도 팔고 있다. 세상은 이렇다. 상처는 아물지 않고 상처를 낸 사람은 잘 살아갈 것이다. 


<<시간의 파도로 지은 성>> 서두에 나오는 여러 성들의 모습에서도 이와 같은 모습을 느낄 수 있다. 지금은 성만 남거나 그 성을 가지고 있던 귀족은 없고 그 후손도 없고 관리인만 남아있거나 ... ... 그런데 성마다 남모를 사연들이 있어서 하나하나 놓칠 수 없다. 아마 지금 프랑스에 가서 그 성들을 보는 것과 이 산문집에서 표현된 성들과는 벌써 거의 40년이라는 세월이 흘렀다. 


이 책은 젊은 불문학자의 글에서부터 노년에 이른 불문학자의 글이 한 곳에 담긴 것이다. 첫 장 '예술의 성'은 이미 1980년에 열화당을 통해 문고판으로 나온 바 있었지만, 책 후반부의 여행 산문들은 1990년대 이후의 흔적들이다. 


나에게 이 책은 여러 성들의 모습과 이야기가 좋았다. 서양미술사에서 언급되는 성들은 그리 많지 않고 조형적 혁신을 이룬 대표적인 작품 위주이지, 그 성에 담긴 사연 위주가 아니기 때문이다. 또한 몇 명의 작가들, 특히 샤토브리앙을 알게 된 것은!! 이미 샤토브리앙에 대해선 포스팅했다. 


프랑스 문학을 좋아하거나 기행 산문집을 좋아하는 이들에게 추천한다. 하지만 우리가 요즘 흔히 접하는 그런 기행 산문집 - 글을 거의 없고 사진들로만 가득찬 - 이 아니다. 보기 좋은 사진들 대신 프랑스 소설가나 시인의, 기억하고 노트해 둘만한 글들이 인용된다. 그러니 이 책의 독자들은 정해져 있는 셈이다. 


이 글의 서두에서 <<이방인>> 번역을 언급한 것은 그 상황이 너무 안타까웠기 때문이다. 몇몇 이들의 헌신적인 노력으로 사태가 바로 잡히긴 했지만, 우리가 아는 바 기자나 학자가 아니라 이름 없는 블로거가 실질적인 대응을 했기 때문에 더 안타까웠다. 


프랑스 문학을 좋아하는 이들이 자주 접하게 되는 역자들이 있다. 이휘영, 김현, 민희식, 김화영, 이재룡 ... 그들의 노고를 잊지 말자. 




시간의 파도로 지은 성 (城) - 8점
김화영 지음/문학동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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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내가 이루어진 것도, 내 일생동안 이끌고 다녀온 이 권태에 처음으로 전염된 것도, 나의 고통이요 나의 쾌락인 이 슬픔에 물든 것도 콩부르의 숲에서였다. 그 곳에서 나는 내 가슴의 소리를 들을 줄 아는 다른 가슴을 찾아헤맸다. 그 그곳에서 나는 내 가족이 모이고 흩어지는 것을 보았다. 아버지는 그 곳에 그의 이름이 복권되고 집안의 재산이 쌓이기를 바랐다. 시간과 혁명이 씻어간 또 하나의 악몽. 여섯 형제 중 남은 사람은 셋. 형과 쥘리와 뤼실은 이제 없고, 어머니는 고통으로 돌아가셨고 아버지의 재는 무덤 속에서 파헤쳐졌다."


"혹 나의 작품들이 내 죽은 뒤에 남게 되고 내가 이름을 남기게 된다면 어느 날 <회고록>의 인도를 받아 어떤 여행자는 내가 그린 장소들을 찾아오리라. 그는 성(城)을 알아볼 수 있으리라. 그러나 그 거대한 숲은 찾아도 없을 것이다. 내 꿈의 요람은 사라져버렸다. 바위 위에 홀로 서 있는 성탑만이 그 종탑과 사귀고 폭풍으로부터 그를 보호하던 옛 친구들인 거대한 참나무 숲의 죽음을 울고 있으리라. 그 성탑처럼 홀로 남은 나는 나의 어린 시절을 아름답게 해주고 나를 보호해주던 내 가문이 내 곁에서 쓰러지는 것을 보았다. 다행스럽게도 나의 인생은, 내가 젊은 시절을 보낸 성탑들처럼 견고하게 땅 위에 지어지지 않았다. 인간은 그의 손으로 세운 성만큼 폭풍에 견디지 못한다." 

- 샤토브리앙(Francois-Rene de Chateaubriand) 


* * 


김화영의 <시간의 파도로 지은 城>에서 인용된 샤토브리앙의 글이다. 프랑스 문학사에서는 대단한 위치를 점하고 있는 샤토브리앙이지만, 다른 나라로의 소개는 그다지 활발하지 않은 듯 싶다. 그의 대표작인 <아탈라>, <르네>는 번역되었으나, 현재는 품절이고. 




아딸라 - 르네
샤또브리앙 저/신곽균 역

영역본을 찾아보았으나, 3권 정도 검색되었다.



 

- 샤토브리앙, <Atala / Rene>



- 샤토브리앙, <무덤 너머로의 회상Memoirs from Beyond the Tomb>



읽고 싶은 건 역시, <무덤 너머로의 회상>이다. 학생 시절이었다면 어떻게든 불어로 읽으려고 했을 텐데, 돌이켜보니, 영어라도 제대로 해놓고 불어공부를 할 걸 하는 후회가 앞선다. 지금 나이가 되어서야 비로소 영역본을 찾아보고 있으니. 


프랑소와 르네 드 샤토브리앙. <무덤 너머로의 회상>은 30년 걸쳐 씌여진 회고록이다. 소설가이자 외교관이었으며 1786년에 태어나 1848년에 죽었다. 18세기 후반부터 19세기 초반까지. 프랑스 귀족의 몰락, 프랑스 대혁명, 왕정복고, 나폴레옹 ... 격변기를 보냈고, 그 이야기들이 <무덤 너머로의 회상>에 담긴 것이다. 이후 많은 작가들에게 영향을 끼쳤지만, 지금 샤토브리앙을 읽는 독자들은 많지 않다. 


위에서 소개한 책들 말고 국내 번역된 책들이 있으나, 발췌번역이거나 요약본이라 다소 부족해 보인다. 


* *


얼마 전 웹서핑을 하다 보게 된 정보 하나, 언어 사용인구로 따져, 한국어가 13위였는데, 순위에 민감한 사람들이 한국어의 위상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걸 읽었는데, 실은 그게 중요하지 않다. 정작 중요한 것은 한국어로 된 양질의 정보가 얼마나 많고 이 정보들에의 접근이 얼마나 쉽고 편리한가다. 따져보면 한국어로 구할 수 있는 양질의 정보는 많지 않다(영어와 비교하는 건 어불성설이긴 하나, 비교는 늘 최고와 할 때만 의미를 가진다). 이런 생각을 하다보니, 중년의 나이가 되도록 이 사회에 조금이나 기여한 게 있다면, 한국어로 된 정보에 이 블로그가 조금의 도움이 되었다는 것밖에 없는 듯해 좀 씁쓸해졌다. 


정부 차원에서 한글 번역 - 여기에는 외국 서적에 대한 번역 뿐만 아니라 한문으로 된 국문학 서적에 대한 번역도 포함되어야 한다 - 에 대한 다양한 공적 사업이 진행되어야 하고, 이에 대한 일반의 관심이 늘어나야 한다,고 적어보지만, 그게 가능할까 싶다. 기업은 돈 되는 일에 매진하고 정부는 지금 당장 돈이 되지 않고 나중에도 돈이 되지 않으나, 나라를 튼튼하게 하는 기초 사업에 힘을 써야 한다,고 적어보지만, 이 나라 정부 관료나 정치인이 이런 이야기 한 적을 본 적도, 읽은 적도 없다. 


쓸데없이 글이 길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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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남 Une Rencontre 
밀란 쿤데라(지음),한용택(옮김), 민음사 



1. 
에밀 시오랑(치오란), 아나톨 프랑스, 프란시스 베이컨,  셀린, 필립 로스, 구드베르구르 베르그손, .... 밀란 쿤데라가 만난 이들에 대한 이야기로 채워진 이 산문집은 편파적이다. 하지만 좋아하는 것을 좋아한다고 말했을 때, 그것이 얼마나 낯선가는 경험해본 이만이 알 수 있으리라. 좋아한다는 그 고백이 다른 이들과 나를 구별짓게 만들고 나를 일반적이지 않은, 평범하지 않은, 결국 기괴한 사람으로 만드는가를.  
 

그리고 치오란은 어떤가! 내가 그를 알게 된 시절부터 그가 한 것이라고는 인생의 황혼기에 블랙리스트에 자리 잡기 위해 이 리스트에서 저 리스트로 돌아다니는 일 뿐이었다. 게다가 내가 프랑스에 도착한 지 얼마 되징낳아 그의 앞에서 아나톨 프랑스를 언급했을 때, 그는 내 귀에 대고 짖궂게 웃으면서 속삭였다. "여기서는 절대로 그 이름을 큰 소리로 말하지 마세요. 사람들이 당신을 놀릴 거예요!"라고 말이다. - 71쪽 

  
에밀 시오랑과 아나톨 프랑스를 알고 읽어본 이만이, 그리고 밀란 쿤데라를 알고 있는 이만이 위 문장을 온전히 이해할 수 있다. 이 책의 독자는 한정되어 있고, 시간이 흐를수록 독자의 수는 줄어들 테지. 


  

- 이 책에서 언급되는 프란시스 베이컨의 인터뷰는 이 책에서 나온 것이다. 데이비드 실베스터와의 인터뷰인데, 얼마 전 번역되어 출판되었다. 



       

- 에밀 시오랑의 책은 3권이나 번역되었다. 허무주의적 아포리즘으로 유명한 에밀 시오랑은 젊은 시절 프랑스 파리로 온 이후 루마니아로 돌아가지 않고 프랑스어로 작품을 활동하다가 죽는다. 20세기 프랑스 문필가들 중에서 가장 아름다운 프랑스어를 구사한 몇 되지 않는 이로 손꼽히지만, 번역된 책에서는 이를 온전히 느낄 수 없고 다만 그의 도저한 허무주의만 알 수 있을 뿐이다. 



2. 
"한 쪽에는 그 어떤 열정도 생기를 불어넣을 수 없는 무관심한 사람들, 소심한 사람들, 이성적으로 사고 하는 사람들이 있었고, 다른 한 쪽에는 감정 내키는 대로 행동하고, 논증은 거의 이해할 수 없어 보이며, 감성으로 판단을 내리는 사람들이 있었다. 후자들은 늘 유죄를 선고하곤 했다."
- 아나톨 프랑스, <신들은 목마르다> 중에서 

아나톨 프랑스의 장례식이 프랑스 국장(國葬)으로 치러지고 난 다음, 얼마 지나지 않아 아나톨 프랑스에 대한 기묘한 침묵에 대해, 심지어 아나톨 프랑스에 대해 이야기하는 건 시대에 뒤쳐지고 취향이 이상한 사람처럼 비춰지는 것에 대해 밀란 쿤데라는 아나톨 프랑스를 인용하며, 프랑스 지식인들의 감정적인 비판을 꼬집는다. 

하지만 비단 프랑스 지식인만 그럴까. 위 문장을 읽으면서 나는 한국의 진보적이라는 지식인들을 떠올렸다(실은 전혀 진보적이지 않은!). 마치 이성적으로 사고하고 논증하는 듯 싶지만(왜냐면 현란한 이론가를 인용하거나 뭔가 그럴싸한 주의, 주장으로 언어를 구사하기에), 결국엔 감정 내키는 대로 행동하고 판단내리니까. (그리고 한국의 보수적이라는 지식인은 존재하지 않는다. 아니, 한국엔 보수란 없다. 보수적 지식인이라고 하는 이들 대부분 한국에선 진보적이라고 봐야할 수준이다) 


3.
구드베르구르 베르그손은 위대한 유럽 소설가이다. 그의 예술에 첫 번째로 영감을 준 것은 사회적 또는 역사적 호기심이 아니고, 지리적 호기심은 더더욱 아니다. 그것은 실존적 추구이며 진정한 실존적 치열함이고, 이 덕분에 그의 소설은 (내 생각으로는) 소설의 현대성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의 정중앙에 자리를 잡는다. 

바로 인간은 자신의 나이 속에서만 존재하고, 모든 것은 나이와 함께 변한다는 점이다. 타인을 이해한다는 것은 그가 지금 먹어가는 나이를 이해한다는 것이다. 나이의 수수께기, 오직 소설만이 밝힐 수 있는 주제들 가운데 하나다. - 49쪽 


구드베르구르 베르그손(Gudbergur Bergsson)은 처음 듣는 이름이다. 밀란 쿤데라는 자신이 좋아하는 것에 대해, 싫어하는 것에 대해 말한다. 그리고 그의 글에서 내가 좋아하는 이름들을 발견했을 때의 기쁨이란! 가령 크세나키스! 


    

- 베르그손이 표지로 나온 책. 그리고 그의 소설, <백조 The Swan>의 영역본 표지. 




4. 
이 책은 밀란 쿤데라의 산문집이다. 프란시스 베이컨에 대한 글에서 시작해, 그가 아끼는 몇 권의 소설과 소설가들, 아나톨 프랑스가 프랑스 지식인들의 작가 리스트에서 기묘하게 사라지게 된 것에 대한 조소, 지금은 사라진 체코, 프라하의 봄, 망명한 체코 지식인들에 대한 이야기, 크세나키스, 야나체크와 쇤베르크의 음악, 말라 파르테의 소설에 대해 쓴 글들로 이루어져 있다. 하지만 이 책이 즐거운 이유는 바로 아래같은 이유다. 바르트를 좋아하냐는 프랑스 젊은이의 물음에 대해 밀란 쿤데라는 이렇게 말한다.

"물론 좋아하죠. 어떻게 좋아하지 않을 수 있어요! 카를 바르트를 말씀하시는 거잖아요! 부정신학의 창시자 말예요! 천재예요! 바르트가 없었다면 카프카의 작품은 상상할 수도 없었을 걸요!" - 69쪽 

밀란 쿤데라는 그 젊은이가 롤랑 바르트(Roland Barthes)에 대해 묻고 있음을 알지만, 카를 바르트(Karl Barth)를 이야기한다. 카를 바르트를 모를 그 젊은이를 위해 카프카를 살짝 언급하면서 '너랑 더 이상 이야기하기 싫어'라며 속내를 비친다. 이 얼마나 현란한 거부인가! 


5. 
고백하건대, 내가 현재 가장 좋아하는 작가는 밀란 쿤데라다. 내가 얼마나 그를 좋아하는지, 이 짧은 산문집을 읽으면서 다시 알게 되었다. 내가 좋아하는 소설가들, 김승옥, 르 클레지오, 뒤라스, 주제 사라마구, 이탈로 칼비노를 지나, 밀란 쿤데라. 

이 글을 쓰면서, 문득 밀란 쿤데라는 프랑스 사람이 아니라 지금은 사라진 체코 사람이라는 걸 깨달았다. 그가 아무리 불어로 글을 쓴다고 하더라도 말이다. 에밀 시오랑이 루마니아 사람이듯. 그래서 번번히 후보로만 언급될 뿐 노벨 문학상을 받지 못하는 건 아닐까. 그보다 한참 문학성이 떨어지는 모디아노가 받는 그 문학상을 말이다. 일본의 하루키가 받게 된다면, 아, 밀란 쿤데라는 어쩌란 말인가. (내가 알기로 모국어가 아닌 언어로 글을 써서 노벨문학상을 받은 이는 사무엘 베케트가 유일한 듯 싶다)  하긴 20세기 후반 가장 위대한 소설가인 블라디미르 나보코프, 이탈로 칼비노(Italo Calvino)도 받지 못했으니. 좀 우습긴 하다. 

 




만남 - 10점
밀란 쿤데라 지음, 한용택 옮김/민음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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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ee Ufan Versilles 2014. 6. 17 - 11. 20 

이우환, 베르사이유 전




"작가에게 만족이란 게 있겠는가만, 이번에 나는 베르사이유에서 하고 싶은 작품을 70%는 한 것 같다. 전시 이후에 작품은 어떻게 되는가 묻는 사람들이 많다. 작품이란 결국은 잠깐 모였다 흩어지고 사라진다. 하이데거는 <<예술 작품의 기원>>에서 이렇게 썼다. '인간은 대지를 일으켜 세우려 하고, 자연은 인간이 만들어 놓은 것을 자연으로 되돌리려고 한다.' 그런데 예술가란 세우고 사그라지는 그 양쪽 모두를 보는 사람이다. 그 양쪽으로 열려 있음은 무한의 세계다." 

- 이우환(아트인컬쳐, 2014년 7월호에서 재인용) 

 





이우환이 프랑스 베르사이유에 신작 10점을 선보였다. 그냥 전시가 아니라, 베르사이유를 위해 새로 작품을 만들었다. 


"나는 원래부터 장소와 대화하며 작품의 발상을 얻는다. 공간의 장소성을 훼손하거나 합리화하지 않는다. 베르사이유 정원은 대단히 완벽한 공간이다. 단순히 식물이 놓여 있는 정원이라기보다는 건축 공간 개념에 더 가깝다. 이 완벽한 공간에 내 작품이 어떻게 개입할 것인가? 이 완벽한 정원의 조형을 어떻게 넘어설 것인가? 그 해답은 바로 무한 개념의 도입에 있다. 인간의 콘셉트인 완벽, 그 완벽 너머 장소와의 대화에서 새롭게 발생하는 무한, 그것이 내 작품의 개념이다." 

- 이우환(아트인컬쳐, 2014년 7월호에서 재인용)  




Relatum - Dialogue Z, 2014 

Lee Ufan

Courtesy the artist ; kamel mennour, Paris and Pace, New York (c) Tadzio 

(출처: http://en.chateauversailles.fr/news-/events/exhibitions/lee-ufan-versailles) 




Lee Ufan, The Arch de Versailles (2014).

Photo: AFP Photo/Fred Dufour.

(출처: artnet.com) 




L'arche de Versailles, de Lee Ufan. ®TADZIO_COURTESY

(출처: http://www.20minutes.fr/culture/1402786-lee-ufan-et-versailles-ca-match)




Relatum - Earth of the Bridge, 2014 

Lee Ufan 

Courtesy the artist ; kamel mennour, Paris and Pace, New York (c) Tadzio 

(출처: http://en.chateauversailles.fr/news-/events/exhibitions/lee-ufan-versailles) 



Lee Ufan, Relatum Dialog X (2014).

Photo: (c) TADZIO/ADAGP 2014.

(출처: artnet.com) 



Lee Ufan, The Shadow of the Stars II (2014).

Photo: (c) TADZIO/ADAGP 2014.

(출처: artnet.com)  



"돌과 금속으로 된 그의 작품은 장소 위에 군림하거나 정복하지 않는다. 대신 풍경에 삽입되면서 기존에 잘 알려진 장소에 대한 사람들의 생각에 새로움을 던져준다. 이번 전시는 베르사유에서 보기 힘든 가장 모험적이고 시적인 영감을 창조하는 전시의 상징으로 기억될 것이다."

- 르몽드 리뷰 기사 중에서 (아트인컬쳐에서 재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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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자유주의에서 벗어날 것인가

알랭 투렌(지음), 고원(옮김), 당대 








다소 급하게 읽은 것일까. 투렌이 이야기하는 ‘2와 2분의 1 정치’를 제대로 이해한 것일까. 미심쩍긴 하다. 실은 이런 고민할 시간이 없다. 내일은 월요일, 출근을 해야 하며, 나를 기다리는 몇 개의 회의가 있고, 내가 채워야 문서들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다. 


나도 월급쟁이인 형편에 회사의 입장을 대변하는 이상한 위치에 서 있으며, 똑똑하고 성실하게 일하지 않는 자를 매우 싫어하는 전형적인 관리자의 모습을 닮아가고 있다. 아마존의 제프 베조스처럼 고객 제일주의를 표방하며 고객에게 욕을 들어가면서 꿋꿋하게 자리를 리더의 모습을 지키려고 애쓴다.  


이런 내가 알랭 투렌의 10년도 더 지난 책을 읽는다고 해서 내 삶이 변하거나 내가 갑자기 행복해지거나 여유가 생기게 되진 않을 테다. 나는 그 사실을 알면서 이 책을 왜 읽은 것일까(솔직히 읽지 않은 책이 서가에 꽂혀 있으니 읽은 것일테지만).


알랭 투렌은 에필로그에서 ‘이 책은 하나의 팸플릿이 아니다’라고 적는다. 그러면서 이 책은 중립적이라고 강변한다. 



중요한 것은 비판적 시각이다. 비판적 시각은 겉으로 보기에 무질서하기만 한 것에서 하나의 계획을 찾아내도록 자극하는 [행위자들과의] 교감에 의해 주어져야 하며, 동시에 사건 속에서 뒤섞여 있는 의미들을 구분해내기 위해 스스로 갖추어야 하는 것이다. 이러한 작업이 즉각적인 동의를 얻거나 인기를 모으기는 힘들다. 

- 225쪽 



책은 지극히 1999년의 프랑스적 상황 아래에서 쓰였고 그렇게 읽힌다. 공공부문 파업이 극에 달했고 좌파, 우파 정부 상관없이 신자유주의 노선을 표방하던 1999년의 프랑스 파리. 하지만 1999년 프랑스에서 출간된 이 책이 2014년 한국에서 설득력을 가진다면, 그건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 파업이나 정치적 시위 등의 활동은 현저히 위축되었으며, 연이은 보수 정권에 의해 공중파를 비롯한 주류 미디어까지 편향된 보도 행태를 보이는 지금, 우리가 이 책에 기대어야 하는 것은 무엇일까? 



우리 사회는 아직도 자신의 이념과 갈등, 희망들을 가로지르면서 그 자신을 변화시킬 능력을 가지고 있는가? 곳곳에서 사람들은 이 질문에 대한 답이 부정적이라고 우리를 설득하려 한다. 

- 21쪽 



나는 다음 세 가지 이념을 옹호할 것이다. 

첫째, 경제의 세계화가 우리의 정치적 행동능력을 앗아가 버리는 것은 아니다.

둘째, 절대적 소외계층들은 지배에 대항하는 봉기를 통해서 뿐만이 아니라 권리의 요구 - 특히 문화적 권리의 요구 - 와 사회에 대한 비판적이고도 혁신적인 개념화를 통해 행동한다.

셋째, 제도적 질서가 평등과 연대에 대한 요구들에 의해 뒷받침되지 않는다면 그것은 비효율적이며 심지어 억압적이기까지 하다.

- 23쪽 



그는 전 지구화(Globalization)은 이데올로기적 공갈이라고 단언한다. 그리고는 프랑스의 극좌파들은 이 이데올로기적 공갈을 더 확산시키는 데 기여했다고 말한다. 극좌파는 현실적인 대안 없이 공격적인 문제 제기와 투쟁을 위해 전 지구화 담론과 대항해 자신들을 위치지운다고 본다. 


그리고 알렝 투렌은 전 지구화를 통해 세계가 하나로 통합되는 것이 아니라 더 파편화되고 있다고 지적하며, 새로운 사회 운동의 필요성을 역설한다.(이 책에서 ‘파편화’에 대한 심도 깊은 언급은 없다. 그래서 그의 다른 책을 찾아보았으나, 투렌의 책은 딱 2권만 번역되었고 그 마저도 절판이었다. 그만큼 인기가 없다는 건가. 프랑스 최고의 사회학자 중 한 명인데)





이 책에 영감을 불어넣어 준 세 번째 비판 방식은 긍정적인 행동들의 가능성을 부정하는 모든 표상과 싸우고 있다. 여기서는 새로운 행위자들이 나타나고 있으며 권리와 정체성을 요구하고 있다고 단언한다. 그리고 또 오늘날 새로운 행위자들의 부상을 가능하게 하는 것은 문화적 권리에 대한 요구라고 본다. 저항과 반대 세력들은 이미 낡아버린 경제적 모델 - 오래 전부터 환경에 적응하지 못하고 있을 뿐 아니라 좋지 않은 결과들이 그 자체의 성장을 막아버린 모델 - 의 옹호에 몰두하기 때문에, 20여 년 전부터 약화되어 온 행동능력을 재건하는 것은 오직 이 같은 문화적 권리를 요구함으로써만이 가능하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이와 같은 방식들 속에서 비로소 우리는 상황을 분석하고 존재 가능한 행위자들을 정의하고 나아가 새로운 사회 정책의 단초를 제시할 수 있다. 

- 28쪽 



새로운 운동은 새로운 행위자들에 의한 권리와 정체성, 문화적 권리에 대한 요구라고 말한다. 그리고 그는 우리 스스로가 새로운 행위자가 될 수 있다고 말한다. 



전지구화는 지배세력의 보다 고효율의 의사소통 체계를 위한 이데올로기이며 모든 주체성과 사회적 보호와 집단 기억과 사적인 계획을 파괴하는 이데올로기이기 때문에, 이 이데올로기로부터의 구원은 지배당하는 이들과 그들의 지지 속에서 나와야 한다. 

주인과 노예의 관계를 이해하고 그것을 변화시킬 수 있는 것은 주인이 아니라 오직 노예 그 자신일 뿐이라는 생각은 헤겔의 시대와 마찬가지로 오늘날에도 역시 사실이다. 지금 필요한 것은 정치개혁을 이룰 수 있는 새로운 사회운동이 형성되는 것이다. 또한 지배당하는 이들은 스스로 지켜야 할 자신들의 정체성을 가지고 있어야 하며 동시에 바로 이들이 사회 전체의 이름으로 이야기해야 하고 평등과 노동 권리의 수호자가 되어야 하며 또 스스로를 그렇게 바라보는 것이 필요하다. 

- 80쪽 



결국 투쟁은 단지 지배질서에 대한 대항으로써만이 아니라 사회 전체가 중요하다고 간주하는 가치들의 이름으로 이끌어지는 것이 필요하다. 산업사회와 진보의 이름으로 노동자들은 고용주에 반대했다. 자유의 이름으로 사람들은 식민지배에 투쟁했다. 성적 억압으로부터의 행방과 신체의 해방이라는 이름으로 여성운동은 사회전체의 공감대를 얻어낼 수 있었다.

- 110쪽 



알랭 투렌. 1925년생인 그는 아직도 왕성한 활동하고 있다.



책은 짧지만, 나는 쉽게 읽을 수 없었다. 다소 어렵게 느껴지기도 했고(이런 책들도 계속 읽어야 쉽게 읽을 수 있는 듯), 결국 이론을 지나 실천의 필요성을 역설하였기에 나로선 더 힘들었다. 최근 들어 나의 변화 - 현실적이며 물질적인 고려에 하염없이 끌려 다니며, 끌려 다닐 수밖에 없는 상황 속에서, 비상식적인 이 사회에 대한 고민이나 현 경제 상황이나 정치 상황에 대해서는 그저 지나가는 생각에 머물 뿐이었으며, 누군가와 여기에 대해 진지하게 이야기해본 적조차 없다. 이런 변화가 솔직히 나로선 황당하지만(나는 이런 시절이 오리라곤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아마 한국의 40대 대부분이 이런 상황일 것이다. 


현실 정치의 문제는 우리 일상과 매우 밀접한 관련을 가지나, 현실 정치의 문제를 제대로 보기 위해선 개인들은 참으로 많은 시간 투자와 제대로 된 공부를 해야 한다. 어쩌면 첨예화된 기업 활동들은 개인으로 하여금 정치적 무관심을 의도적으로 강요함으로서 바람직인 정치의 부재를 통한 자본 이익의 극대화를 꿈꾸는 건 아닐까 하는 의구심까지 든다. 


알랭 투렌은 이 책에서 ‘비판적 시각’의 중요성을 이야기하고 결국 지배당하는 이들에 의해서 이 세계는 변화될 수 있다고 말하지만, 우리는 이미 시간은 빼앗겼으며, 우리 스스로 행위자임을 깨닫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지 알지 못하는 상황에 내몰리고 있는 셈이다. 어쩌면 나도 투렌이 거부하는 비관주의 속에 빠져 들어가 있는 지도 모르겠지만. (부언하자면, 책의 주요 논지는 기존 좌파적 활동으로는 현재의 문제를 해결하기 어렵고, 우파나 전 지구화와 같은 이데올로기 앞에서는 새로운 사회 운동이 필요하다는 것이지만, 그걸 위해서우리는 투자를 해야 한다.) 


‘힐링’ 따위로 청년 실업 문제가 해결되지 않고, ‘창업’ 열풍으로 우리의 물질적 빈곤이나 실업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 하나는 불순한 이데올로기 이며, 하나는 개인에게 모든 것을 뒤집어 씌우면서 정부와 유관 기관들의 지원 정책으로 본질적인 문제를 회피하고자 한다. 그리고 정권이 바뀐다고 해결될 기미도 보이지 않는다. 


알랭 투렌의 이 책은 어쩌면 우리가 택할 수 있는 어떤 실천의 어렴풋한 방향을 제시해주고 있는 건 아닐까.



프란츠 파농이 생각했던 것처럼, 민족해방운동을 이끈 주역 역시 식민지지배에서 가장 멀리 떨어진 식민지인들, 다른 문화에 이미 확고하게 적응한 사람들이 아니었다. 다름 아니라 교육을 받은 사람들, 자신들의 권리에 대해 자각하고 있는 사람들이었다. 

- 82쪽 





어떻게자유주의에서벗어날것인가

알랭투렌저 | 고원역 | 당대 | 2000.11.06

출처 : 반디앤루니스 http://www.bandinluni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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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느와르의 초기 작품들은 정말 매력적이다. 그가 배워왔던 페인팅과 앞으로 나아갈 페인팅이 서로 섞이고, 작품을 통해 성취하고 하는 젊은 열망들이 색채로 뿜어져 나온다고 할까. 한 때 '젊음'에 대한 평문을 쓰고 싶었는데, ... 지금이라면 가능할까. 오랜만에 르느와르 작품들을 찾아 봐야겠다. 





-- 

2003년 11월 28일에 쓴 글. 






Young Boy with a Cat

1868-69

Oil on canvas

43 3/4 x 26 1/4 in (124 x 67 cm)

Musee d'Orsay, Paris 



이 그림을 보면서 하루키의 <해변의 카프카>를 떠올린 이유는 뭘까. 약간 신비스러워 보이는 이 작품은 르누와르의 초기 작품으로 고양이를 스다듬는 소년의 뒷모습을 담고 있다. 앞의 꽃무늬 천이나 고양이의 처리는 무척 마음에 든다. 그리고 소년의 누드는 무척 이국적이면서 애로틱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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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아름답네요..카프카라니,.. 공감입니다. 뭔가호밀밭의파수꾼이 되기전모습이랄까요?^^

    • 그 때 하루키의 <해변의 카프카>를 읽고 있었을 겁니다. 그리고 잡지에 글 하나를 썼고요. 그 이후로 하루키를 손에 든 적은 없네요. ㅋ. ~ 호밀밭의 파수꾼은 ... 뭔가 사고 치는 이미지가 떠올라요. 파수꾼 되기 전이라면 ... ㅎㅎ 그럴지도 모르겠네요.




기다리는 것, 즉 기다림을 하나의 중성적 행위로 만드는 것에 주의하는 것, 자기에게 감겨서, 가장 내부의 것과 가장 외부의 것이 일치하는 그러한 원들 사이에 끼여서, 예기치 않은 것으로 다시 향하는, 기다림 속에서의 부주의한 주의, 어떠한 것도 기다리기를 거부하는 기다림, 발걸음마다 펼쳐지는 고요의 자리

- 모리스 블랑쇼, '기다림 망각(L'attente L'oubli)'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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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래는 오래 지속된다 - 10점
루이 알튀세르 지음, 권은미 옮김/이매진




그가 죽고 난 다음, 르몽드에서 한 면을 통째로 특집으로 꾸몄다. 20세기 후반기 마르크스주의는 사람들의 무관심 속에 내팽개쳐져 있을 무렵, 어느 마르크스주의자의 인생과 학문 세계가 유력 일간지 특집으로 나온 것이다. 


루이 알튀세르. 현대적 마르크스주의를 만든, 거의 독보적인 인물. 구조주의와 정신분석학을 마르크스주의에 도입한 철학자. 


하지만 그는 레지스탕스 동료이기도 했던 아내를 목졸라 죽이고 침묵의 세월 보내며 죽는다. 그리고 죽기 전에 발표한 자서전, '미래는 오래 지속된다'는, 사랑하는 아내에 대한 추억을 끄집어 내며, 자신의 세계를 정신분석학적으로 도려내어 분석한다. 


문장 문장 하나가 잔인하고 고통스러우며, 추억은 쪼개지며, 사랑은 냉정하게 분석되며, 민감한 영혼은 자리잡지 못한 채 허공으로 사라져버린다. 희망으로 대변되는 미래를 이야기하기엔 이 책은 철저하게 자기 분석적이다. 


나는 20대 후반 이 책을 두 세번 읽었다. 그 이후 나는 학문의 세계를 떠나 직장인이 되었고 사랑과 술에 대한 개인적 역사를 만들며 사십대가 되었다. 그 사이 루이 알튀세르의 자리엔 다른 학자들이 자리잡았고, 알튀세르는 한참 유행에 뒤진 학자가 되었지만, ... 그의 자서전은 현대적 자서전- 지극히 비극적이고 철저하게 외로웠던 20세기 포스트모더니즘적 세계 속에서 - 의 규범으로 자리잡게 될 것이다. 


결국 나는 이 책을 다시 읽게 될 것고, 끊임없이 되새기게 될 것이다. 진정한 독서란 한 번 읽는 것이 아니라 반복해 읽는 것이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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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냇물에 책이 있다.
안치운(지음), 마음산책



시냇물에 책이 있다 - 8점
안치운 지음/마음산책



언제부터 프랑스를 좋아하게 되었을까. 고등학교 때 배웠던 불어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소설가... 파트릭 모디아노나 르 끌레지오? 하지만 그 때 내가 열심히 읽었던 소설가는 헤르만 헤세였는데. … 아니면 먼 훗날의 필립 솔레르스, 로베르 데스노스, … 기억은 꼬리를 물고 빙빙 돌아, 몇 해 전 갔던 파리 하늘 아래로 모여든다.

지하철을 오가며 안치운의 산문집을 읽었다. 웬만한 문학 비평가들보다, 웬만한 소설가보다 뛰어난 산문을 가진 그는 연극평론가이다. 중앙대에서 연극을 공부하고(그는 예술대 선배다), 파리에서 유학 생활을 하였다(뜬금없이 고백하건대, 마음 깊이 모교 교수를 하였으면 했던 이가 두 명 있었는데, 한 명이 안치운이었고, 나머지 한 명이 남진우였다).

생각은 계속 진전되어, 프랑스 쪽에서 공부를 한 이들이 대체로 감수성이 예민하고 문장이 서정적이라는 생각에까지 이르게 된 것이다. 불문학 전공자들 중 뛰어난 문학 평론가들이 많고 작가도 많고 .... (다른 문학 전공자들보다. 아니면 내가 너무 친-프랑스적이여서 그런 걸까)


책은 쉽고 편안하게 읽혔다. 하지만 예전만한 감동이나 몰입을 일어나지 않았다. 안치운의 글은 부드러웠고 적당히 쓸쓸했으며, 어디에서 읽어도 그 공간의 소란스러움을 잠재우는 매력을 가지고 있었지만, 내 독서는 예전만 못했다. 어느새 내 독서 행위의 표면 위로 굳은 살이 덮인 것일 게다. 그렇게 세상의 먼지가 내 영혼의 세포 사이 사이로 밀려들어 자리를 잡아가고 있음은 이런 책을 읽을 때 알 수 있다.

침묵, 그것은 낯선 길이라는 타인과 친해지는 내밀한 상태이며, 귀 기울이는 일이며, 자신의 몸을 낮추는 일이며, 그 길에 발을 들여놓는 일이다. 그리하여 배우는 일이다. - 118쪽



하지만 이 산문집은 누구에게나 추천해도 좋다. 적당히 쓸쓸한 현대적 삶, 혹은 얇게 쌓인 눈이 한밤의 추위로 얼어 붙은 인도 위의 행인에게 이 책은 적절한 여유를 줄 것이고, 가령 키에로프스키를 좋아한다든지, 아니면 슈베르트, 파스칼 키냐르, 혹은 파트릭 모디아노를 기억하고 있다면 이 책은 근사한 선물이 될 것이다.

Les objets parlent plus que les mot
사물은 낱말보다 더 많은 것을 말한다.
- 키에로프스키, ‘베로니카의 이중 생활’



이 책 속에서 연극을 이야기할 때의 안치운은 행복하나, 어딘가 쓸쓸해 보이고, 종종 힘겨워 보이는 것은 실제 세상-계량적 가치와 돈으로만 움직이는-과 너무 멀리 떨어진 탓이리라. 그리고 그런 쓸쓸함은 파리 풍경 속으로 사라지고 …

몇 해 전 파리, 생 제르맹 거리가 눈 앞에 선하니, 나는 다시 언제 파리로 갈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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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읽기와 글 쓰기에 예전만큼 많은 시간을 할애하지 못하고 있다. 심지어 밀린 원고마저 있다. 회사 업무로 읽어야 하는 리포트와 아티클도 쌓여있다. 지난 번 읽은 '슬픈 열대'(http://intempus.tistory.com/1353)의 역자 서문에서 기억해둘 만한 내용을 노트해두었다. 이를 되새길 겸하여 블로그에 옮긴다.

'슬픈 열대'라는 책이 레비-스트로스의 명성을 크게 알린 책이나, 그의 주저라고 보기엔 한계가 있다. 그의 학문 체계를 알기 위해서는 다른 책을 읽어야 한다. 그래서 '슬픈 열대'의 역자는 다른 책들에 대해서도 소개하고 있는데, 레비-스트로스의 박사학위논문에서 나온 '친족의 기본구조''야생의 사고'였다. 특히 후자는 인문학 전공자라면 필독서에 해당된다.


'친족의 기본구조'
- 미개인이 생물학적 충동으로 단순히 반응하는 '자연'으로부터 미개인이 그의 사회집단을 기능화하는 '문화'로의 이행과정에서 나타나는 몇 가지 특징을 탐구한 것이다.
- 자연적 환경이 제공하는 것을 논리적이고 체계적으로 조직화한다는 사실.
- 모든 기존의 사회 집단에 의해서 동등하게 실천되고 있는 근친금혼(incest taboo)
 : 이 제도는 문명 사회나 미개 사회를 막론하고 인간 사회에서는 어느 곳에서든지 보편적으로 나타나는 현상일 뿐만 아니라, 인간을 동물로부터 구별시켜주는 경계선.
- 근친금혼에 대해서는 인류학자들마다 다른 의견을 피력하고 있음.
  : 모건(John Pierpont Morgan)의 생물학적 해석 - 유전학적 악화를 방지하기 위해
  : 웨스트마크(Edward A. Westmarck)의 도덕적/심리학적 해석 - 친족 질서의 위계질서를 유지하기 위해
  : 레비-스트로스 - 근친금혼이 사회적, 경제적 이익을 얻을 수 있음.


야생의 사고 - 10점
레비 스트로스 지음/한길사

'야생의 사고' La Pensee Sauvage
- 원시적 사고란 동식물의 세계를 민감하게 이해하고, 우주적 조화를 구축하려는 감각 속에서 균형과 연속성을 추구하는 우리들의 과학적 태도와 다른, 어떤 지식 획득의 방식일 뿐이라고 생각.
- 원시인이 사용하는 논리는 하나의 구체적이고 감지적이며 심미적인 논법인 것. 레비-스트로스는 야생의 사고의 특징을 '무시간성'에서 발견한다. 왜냐하면 야생의 사고의 목적은 세계를 하나의 통시적, 공시적 전체로 파악하려 하기 때문이다.

위 노트는 박옥줄 교수(불문학)의 '문명과 야만의 이분법적 사유에 대한 비판'에서 옮긴 것임.



레비-스트로스의 말들.

“나는 태생적인 구조주의자입니다. 내 어머니는 내게 이런 이야기를 해주었어요. 내가 제대로 걷지도 못할 때, 글을 읽기 한참 전인 시절, 하루는 내가 유모차에서 ‘부세(boucher, 정육점)’와 ‘블랑제(boulanger, 제과점)’ 간판의 첫 세 알파벳이 ‘bou’인 것 같다고 소리쳤다는 거예요. 그 두 단어의 앞 철자들이 동일했으니까요. 그 나이에 이미 난 불변자(不變者)들을 찾고 있었던 것이지요!” 
(아래 '가까이 그리고 멀리서'라는 회고록에서 실린 대화의 일부다)

가까이 그리고 멀리서 - 10점
디디에 에리봉 지음, 송태현 옮김/강


“구조(structure)는 체계(systeme)로 환원되지 않습니다. 체계는 요소들과 그 요소들을 결합시키는 관계들로 구성된 총체를 말하지요. 구조라는 말을 할 수 있으려면 요소들과 여러 집합들의 관계들 사이에 불변하는 유사점이 드러나야 합니다. 한 집합이 변형을 통해 다른 집합으로 이행해 갈 수 있도록 말이에요.” 

위 인용은 서동욱 교수의 글에서 옮김.
http://navercast.naver.com/contents.nhn?contents_id=47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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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탄의 태양 아래 - 10점
조르주 베르나노스 지음, 윤진 옮김/문학과지성사




사탄의 태양 아래 Sous le soleil de Satan
조르주 베르나노스 지음, 윤진 옮김, 문학과지성사


폴 장 툴레가 좋아하던 저녁 시간이다. 이맘때면 지평선이 흐릿해진다. 상아색의 구름 한 떼가 지는 해를 감싸면서 하늘 꼭대기에서 땅 밑까지 노을이 가득 차고, 거대한 고독이 이미 식어버린 채 퍼져나가는 시간이다. 액체성의 침묵으로 가득 찬 지평선 … … 시인이 마음 속에서 삶을 증류하여 은밀한 비밀, 향기롭지만 독을 간직한 비밀을 추출해내던 시간이다.
어느새 수많은 사람들이, 수없이 많은 팔과 입을 가진 사람들이 어렴풋한 어둠 속에서 무리 지어 움직이고 있다. 큰 길가에는 사람들이 몰려들고, 여기저기 불빛이 비친다. 시인은 대리석 탁자에 팔꿈치를 괸 채 이 밤이, 마치 한 송이 백합처럼, 조금씩 올라오는 것을 바라보곤 했다.
- 11쪽




솔직히 이 소설을 추천할 생각은 없다. 하지만 자신의 인생과 자신을 둘러싼 외부 세계에 대해 진지한 사람이라면, 베르나노스는 한 번쯤 읽어야 할 소설가 중의 한 사람이다. 그의 소설은 깊고 우아하며, 그러면서 처절하고 고통스럽다. 이 소설도 그 고통 속에서 시작한다. 시간은 느리게 흐르고 서사는 사라지고 보이는 것은 보이지 않는 생의 굴레, 신의 존재, 자신의 믿음에 대한 끊임없는 도전과 갈등, 그로 인한 환각과 맹목, 죽어가는 시간과 자신의 영혼뿐이다.

그리고 소설은 지평선이 흐릿해진 저녁 시간에서 시작해 아침을 기다리는 것으로 끝이난다(어쩌면 아침이 오지 않을 수도 있다).이야기는 내내 사방을 분간하기 어려운 어둠 속에 있는 것이다(마치 우리들의 현대적 삶처럼).


“아! 아! … …” 울 수도 없고 기도할 수도 없었다. 그는 그저 이 말을 되풀이했다. 죽어가는 사람을 지켜볼 때처럼, 매 순간이 돌이킬 수 없이 어둠 속으로 사라져갔다. 아무리 짧은 밤이라 해도, 아침은 언제나 너무 늦게 찾아온다. 셀러멘은 어느새 입술 연지를 발랐고, 주정뱅이들은 술에서 깨어났다. 밤의 향연을 마치고 돌아가는 마녀는 뜨겁게 달아오른 몸이 아직 식지 않은 채 하얀 시트 속으로 숨어든다. … … 아침은 언제나 너무 늦게 온다. … … 하지만 이 세상 모든 곳에 유일한 정의(正義)가 불현듯 찾아올 것이다.
(* 셀러멘: 몰리에르의 극에 등장하는 여인으로, 많은 남성들의 연모의 대상이다. 남자들의 환심을 사려는 여자를 말한다: 옮긴이)
- 274쪽




프랑스와 모리악은 베르나노스에 비하면 너무 밋밋하고 평면적이다. 하지만 베르나노스는 단순한 표면 밑의 복잡하고 다층적이며 끊임없이 갈등하는 인간의 심리를 보여주며, 그 고뇌하는 정신을 끝까지 밀어붙인다. 그래서 맞이하게 되는 것이 어떤 죽임일지라도 말이다.

죽음을 각오한 신앙, 혹은 믿음.


그러나 종교적 열정이나 신앙마저도 인스턴트 음식이거나 자신의 건강을 지속시켜주는 영양제처럼 변해버린 요즘, 조르주 베르나노스의 이 소설은 너무 낯설고 정신적이다. 마치 중세의 어느 시대를 거쳐가는 것처럼, 어둡고 축축하며 고통스러운 종교적 환각과 환청으로 채워져 있다. 그리고 베르나노스의 인물들은 그 속을 꼿꼿하게 선 채 지나가며 울부짖는다. 휴즈의 말대로 ‘인간의 위대성에 대한 그의 생각은 고통스럽고 중세적이며 기사도적이었다.’(H.S.휴즈, 현대프랑스지성사, 문학과지성사, 135쪽)

베르나노스의 주인공들이 주로 신부이지만, 엄밀히 말해 그의 소설은 종교 소설이 아니다. 그의 소설이 가치있는 것은 모더니즘과 포스트모더니즘 사이에서, 인간의 영혼이 현대의 물신주의 속에서 소외당하고 버림받으며, 심지어 분열되어 자신의 흔적조차 남기지 않으려고 할 때, 분명한 목소리로 세계를 향해 나는 살아있고 고통받지만 앞으로 나갈 것이고 그것이 죽음일지라도 내 삶, 내 신념, 내 확신, 내 믿음의 존재가 어디에서 시작해서 어디에서 끝나는지 묻고 그것을 실행하는 데에 있다. 마치 현대라는 강물이 바다를 향해 시류에 휩쓸려 바다로 흘러갈 때, 그의 인물들은 반대로 거슬러 올라가며 고통스러워하며 절규한다. 심지어 그의 편에 서 있을 것으로 예상되는 고귀한 신마저도 그의 옆에 없음을 직감했을 때조차도.




모리스 삐알라 감독이 연출한 '사탄의 태양 아래'(1987) 트레일러. (* 한국에서도 비디오로 출시되었으나, 오래전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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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르주 루오 - 신성과 세속

2009. 12. 15 ~ 2010.3. 28 
예술의 전당, 한가람 미술관 3F 



 

비가 내릴 듯한 색채의 대기 - 흐린 날씨. 북쪽 대륙으로부터 밀려든 짙은 구름들. 거친 아스팔트 도로 옆의 커피숍. 일요일 오전은 그렇게 지나가고 있었다. 전시를 보는 것이 이젠 특별하게 변해버린 어느 직장인의 일요일 오전. 조르주 루오를 그 때 만났다.

전시장 입구는 인파로 빽빽했다. 놀라운 광경이었다. 조르주 루오를 만나러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오다니! 하지만 아니었다. 1층에 인상주의 전시가 있었기 때문이다. 일요일 아침, 미술관 앞 길게 늘어선 줄은 서울이 마치 대단한 예술의 도시처럼 느껴지게 했다. 이 열기가 다른 전시들에도 이어졌으면 하는 바람을 가지게 되었다. (하지만..)

조르주 루오는 우리에게 야수파로 알려진 화가다. 앙리 마티스와 더불어. 이번 서울 전시는 그의 신앙을, 근현대 예술이 신앙을 이야기할 때, 어떤 식으로 표현하는가를 알 수 있는 보기 드문 전시였다. 그리고 스테인드 글라스 작품은 매혹적이었다. (앙리 마티스도 말년에 교회의 스테인드 글라스 작업에 매달렸다)

 

이는 언제나 순례자를 기르는 주제가 아니며, 또한 주제가 강조하는 톤, , 은총, 감동적인 언행이다. 이것이 신성적이라고 주장하는 몇몇 예술이 세속적일 수 있는 이유이다. 그리고 그림을 그리기 전에 이런 기도를 하고, 미천한 작품을 만든다. (1944, 루오)



종교가 성행하지만, 종교 시설이 늘어나지만, 진정한 신앙인은 만나기 드물어진 요즘, 루오의 작품들은 많은 것을 느끼게 해주기 충분했을 것이다. (내가 종교를 가진 것은 아니지만)

많은 이들이 노력한 듯한 전시에 찬사를 보낸다.



굵은 터치의 누드는 루오의 타고난 형태 감각이나 조형미를 알 수 있게 해준다. 루오는 강렬한 색채와 굵은 터치의 질감과 조형미로 보는 이를 사로잡고 있었다.


루오의 스테인드 글라스 작품이다.
기둥에 묶인 그리스도 Christ a la colonne, 1939년도 작품
- 루오는 중세 시대를 좋아했다. 그는 위대한 걸작은 노동조합에 속한, 서명을 남기지 않은 성당의 노동자들에게서 나왔다고 여겼으며, 스태인드 글라스는 그의 동반자였다. '그렇게 솔직한 유리에 나는 자주 손을 베곤했다. 그리고 복원해야 할 몇몇 옛 작품 앞에서, 아직 아이였던 나는 그렇게 훌륭한 동반자와 있는 것 같이 느껴야 하는 것에 겁이 났다'(1943년)



 





* 도판의 일부를 사진으로 찍어 올립니다. 생각보다 도판이 깨끗했고 해설도 매우 충실했습니다. 
* 이미지에 대한 저작권은 득하지 않았으며, 조르주 루오가 한국에도 많이 알려졌으면 하는 바람에서 
사진을 찍어 올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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쓸쓸하고 우울한 따뜻함으로 채워진 대기가 건조한 빛깔의 벽과 푸른 하늘의 흰 구름을 둔탁하고 어두운 표정으로 반사하는 유리로 지어진 빌딩 사이로 내려앉고 있었다. 봄이라고 하기엔 아직 이른 날씨지만, 이름 없는 행인들의 표정은 잔뜩 상기되어 있었다. 마치 불확실한 미래에 대한 딱딱한 염려가 섭씨 10도를 넘나드는 대기의 온도로 녹아 사라질 거라 믿는 듯 보였다. 신도림에서 미팅을 끝내고 구로디지털단지로 왔다.

 

노트와 펜을 샀다. 이동 중에, 아무렇게나 들른 가게에서 노트와 펜을 살 때면, 어김없이 여행을 떠나기 전의 기형도가 떠오른다. 이젠 시간이 많이 흘러, ‘세월이라는 표현이 적당할 법한 과거의 인물이 되어버렸고, 기형도가 파고다 극장에서 그의 조용한 생을 마감할 때보다 더 나이가 든 나에게, 세상은, 아직도 모르는 곳이다.

 

커피의 온기가 사라지는 동안, 나는 마르셀 프루스트를 읽었다. 그리고 언제나 프루스트는 저 멀리 있는 어떤 이다. 이젠 너무 익숙한 거리감이다.  

 

 

그는 아저씨의 회색 두 눈동자를, 블론드의 코밑 수염을 그리고 무릎, 깊고 포근한 재롱의 장소, 더 어렸을 때는 은둔처였던 장소. 그 당시는 성채(城砦)와 같이 가까이 할 수 없게 여겨지고 목마처럼 즐거움에 넘치고 또 사원(寺院)처럼 침해하기 어려웠던 그 무릎을 그는 사랑했다.

 

 

잠시 그는 그녀를 응시했다. 그는 그녀의 창백함에 매우 감동되었다. 또 그녀의 창백한 이마나 애수를 띤 눈길이지만, 십자가 뒤에 걸린 고뇌처럼 또는 열렬히 사랑하는 사람의 보상할 수 없는 상실 뒤에 오는 통곡과 같은, 가슴이 미어지는 듯한 피곤한 두 눈동자가 나타내는 무한한 절망에 감동되었다.

 

 

- 사랑의 기쁨, 민희식 역, 정암사, 19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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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인 정치학 - 8점
타일러 콜만 지음, 김종돈 옮김/책으로보는세상(책보세)


와인 애호가로서 나는 좋은 품질의 와인을 저렴하게 마시고 싶다는, 소박한 바람을 가지고 있을 뿐이다. 하지만 이 책을 읽고 난 다음, 그 바람이 단기간에 쉽게 이루어지지 않을 것임을 확실하게 알게 되었다. 하긴 와인도 하나의 비즈니스이지 않은가. 우리는 종종 예술가처럼 혼신의 힘과 열정을 다해 포도를 수확하고, 정성스럽게 와인을 만들고, 이렇게 생산된 와인에 대해 마치 예술작품인 것처럼 현란한 수사로 포장된 현학적 평가나 평론에 너무 익숙해져 있었던 것은 아닐까.

저자는 서문에서 이렇게 이야기한다.

와인 정치학은 종종 사람들의 관심으로부터 벗어나 있다. 유명한 와인 제조업자는 와인을 만드는 데 있어 모든 노하우를 쏟아 붓겠지만 그들 역시 정치세력들에게 희생되는 존재다. 이 책은 유통업자, 정치집단, 환경론자, 협잡꾼, 논평가 등이 오늘 우리가 마시는 와인의 생산과 판매, 그리고 와인을 마시는 행위까지도 어떻게 지배해왔는지에 대한 이야기를 담고 있다.
- 5쪽



이 책은 와인 라벨의 숨겨진 함의, 프랑스/미국 와인의 역사, 와인 등급 제도의 비밀, 와인 품질, 미국 와인의 정치적 환경, 미국 와인 시장, 유기농 와인, 와인 생산에 대한 다양한 실험 등에 대해 다루고 있다. 폭넓은 내용들을 담고 있으면서도 저자의 관점이 흩어지지 않는다는 점에, 이 책은 한 번 읽어볼 만하다. 특히 프랑스 와인에서 미국 와인으로 넘어가는 과정, 그리고 미국에서 와인을 생산하기 위해 기울였던 여러 노력들, 현재 전 세계 와인 시장의 구도 등에 대해 알고 싶다면, 이 책은 실망스럽지 않을 것이다.

내가 이 책을 추천하는 사람들이 있다면, 단연코 농산물 시장 관계자들이다. 이 책은 포도 농장에서 만들어진 와인이 어떻게 주류 시장에서 살아남고 성정해갔는가에 대한 역동적인 과정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현재 프랑스나 미국에서 와인은 ‘주류’로 평가되면서 많은 제한을 받고 있지만, 와인은 주류로 평가되기 전에 먼저 문화이며 생활의 한 양식이다. 이런 이유로 와인을 마시기 위한 여러 예절이 요구되며, 한 잔의 와인을 테스팅하는 방법, 잔을 들고 마시는 법이 있으며, 와인 마다 그 와인에 맞는 잔이 구분되어 있다. (실은 와인을 마실 때 이런 것들을 지켜가면서 마시는 경우는 거의 없지만) 무수한 와인 가이드북이 있으며, 와인을 배우기 위한 아카데미가 있다. 우리 나라에서는 술은 어른한테 배워야 된다고 말하지만, 와인을 배우기 위해선 학교(아카데미)에 가야 된다.

그런데 한국의 소주나 막걸리를 이렇게 만든다면 어떨까? 등급제를 도입하고 제법 고급스러운 문화로 만든다면? 아마 웃긴 소리라고 하겠지만, 어떤 상품의 부가가치를 높기 위해서, 원가경쟁력보다 더 중요한 것은 브랜드 파워이고, 브랜드 파워를 높이기 위해선 이를 문화화시키는 것이 필요하다. 그 점에서 와인을 성공한 농산물 상품이다. 그리고 이를 지키기 위한 와인 생산자들의 노력은 눈물겹다.

와인 애호가로서 이 책은 나에게 와인의 신비스러움을 벗겨낸다는 점에서, 굳이 알려고 하지 않았던(대강은 짐작하고 있었던) 시장 매커니즘을 확실하게 알게 되었다는 점에서, 다소 슬픈 책이라 할 수 있다. 뭐, 그렇다고 해서 와인을 그만 마시거나 하는 따위의 짓을 하진 않겠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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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에게 엄청난 돈이 있어(세계 탑 100위 정도의 갑부 수준으로) 미술 작품을 구입할 수 있게 된다고 하더라도, 절대로 제프 쿤스의 작품을 살 생각은 없다. 하지만 다른 측면으로 접근한다면 구입할 의향도 있다. 미술에 대해서 조금 떠벌려야 하는 비즈니스가 있다면, 대단한 사람들을 초대해 뭔가 과시해야될 필요가 있다면, 한 점 정도는 구입해볼 생각을 가질 지도 모르겠다(그리고 결국 알만한 다른 작가의 작품을 구입하겠지만). 


나는 제프 쿤스가 현대미술이 요구하는 바의 '재능'이 없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도리어 정반대다. 그는 주체하지 못하는 재능으로 현대미술을 망쳐놓고 있는 몇 되지 않는 예술가라고 표현하는 편이 더 타당할 지도 모른다. '움직이는 약국' 데미안 허스트가 '삶과 죽음'이라는 일관된 주제의식을 가지고 있는 것과는 반대로 제프 쿤스는 매우 표피적이고 말초적이며 현대적 가벼움이란 어떤 것인지 극명하게 드러낸다(데미안 허스트도 다른 의미에서 현대미술을 망쳐놓고 있는 예술가들 중의 한 명이라고 할 수 있지만). 

 
표피적이고 말초적이며 현대적 가벼움이라는 측면에서 보자면, 현대 자본주의가 현대 문화나 예술에 대해서 요구하는 바도 동일하다. 현대 자본주의가 미국에서 고도화되었듯이, 현대적 의미의 스타가 미국에서 태어나고 자랐고, 스타 예술가도 미국이 고향이다. 그러니 현대 자본주의 사회에서 제대로 살아가려면, 심각한 주제 의식 따위는 집어던지자. 어떻게 하면 현재, 지금은 좀 유쾌하고 즐겁게 보낼 것인가에만 집중하자. 한없이 가벼워지고 표피적이 되며 말초적으로 변할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해서 아주 짧게만 고민하자. 그리고 즐기자.
(위의 강아지, 꽤 관능적이지 않은가!) 


제프 쿤스는 즐기는 법을 알고 있는 듯 보인다. 그는 극단적으로 표면을 강조함으로써 시각적 즐거움과 동시에 유쾌하고 자극적인 관능성까지 포착해낸다.  심지어 저 블룬 강아지의 터질 듯한 볼륨감은 에로틱하다. 꼭 여인의 가슴처럼 만지고 싶지 않은가! 그리고 더구나 살아있는 미국 예술가 중에서 최고의 스타로 각광받고 있는 제프 쿤스의 작품이  아닌가.

이런 작품이 집 거실에 하나 있다고 상상해보자. 그리고 모든 사람들이 제프 쿤스라는 것을 안다. 제프 쿤스, 그는 누구인가. 심심치 않게 대중 매체에 등장하며, 미국의 생존 작가들 중에서 가장 작품 가격이 비싼 이들 중의 한 명이며, 미국 현대 미술 최고의 스타 예술가이지 않은가. 상황이 이 정도 되면, 집에 방문한 사람들은 한 마디씩 꼭 한다. '이야, 제프 쿤스도 소장하고 있군요. 정말 너무 좋네요'

(실은 이런 상황은 한국에서도 마찬가지다. 이름만 대면 알만한 작가의 작품을 집 거실 벽에다 걸어두는 것과 비슷하다.) 
 




하지만 솔직히 제프 쿤스의 작품이 나를 감동시키지는 않는다. 도리어 정반대다. 제프 쿤스는 끊임없이 '(미술이 주는) 감동이란 게 도대체 뭐야?'라고 묻고 있는 듯 하다. 그리고 제프 쿤스 나름대로 현대 미술이 대중에게 줄 수 있는 그 무엇을 만들고 있다. 즉 현대 미술의 의미를 다시 묻고, 미술이 주는 감동이라는 것이 성적인 자극이나 관능성과 어떻게 다른가를 고민하게 만든다.

이런 측면에서 보자면, (비평적인 관점에서) 제프 쿤스가 제시하는 질문은 늘 흥미진진하며, 유쾌하고, 심지어 철학적이기까지 하다.


그런데, 도대체 이런 작품을 미술 작품이라고 말한다면, 누가 믿을까? 그것도 수십억, 수백억 한다면.

그리고 더 큰 문제는 일반 대중들은 몇 십만원 정도 하는 판화 작품이나 몇 백만원 하는 소박한 유화 작품이 주는 진지하고 사려깊은 감동에 대해선 별로 관심없다는 것이다. 도리어 제프 쿤스같은 이가 절대적 관심의 대상이다.  절대로 구입하지도 못할 작품, 도대체 이게 미술 작품이야 하는 의문을 들게 만드는 작품, '나도 하겠다'라고 말하게 만드는 작품, 그래서 절대로 작품이 제기하는 바의 현대적인 질문들을 이해하지도, 이해할 수도 없는 어떤 작품들에 대해서만 관심을 기울인다. 상황이 이렇게 되니, 상황을 빨리 깨달은 몇몇의 예술가들은 이 상황을 적극적으로 자신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이끈다.

확실히 비즈니스 감각이 있는 예술가들이 있다. 제프 쿤스는 예술가이지만, 동시에 능수능란한 비즈니스맨이기도 한 셈이다.


하지만 난생 처음 간 베르사이유 궁전에서 제프 쿤스의 작품은 좀 당혹스러웠다. 솔직히 내가 프랑스에서 나고 자랐다면, 제프 쿤스의 작품을 베르사이유에 전시하는 것을 반대했을 것이다. 외국인인 내가 보기에도, 이건 좀 아닌 것같다는 생각이 들었으니.


이런 식으로 베르사이유 궁전 방마다 작품 한 점씩 전시되고 있었다. 이렇게 어울리지 않는 전시 컨셉이라니.


제프 쿤스의 작품을 두고 심각한 이야기를 하자면, 끝도 없을 것이다. 그의 작품에 대한 비평적 지지가 대단하고 그만큼 그의 작품은 흥미진진한 면을 가지고 있지만, 베르사이유 궁 밖의 푸른 하늘 만큼 감동적이진 않다.

실은 제프 쿤스의 작품을 두고 뭔가 근사한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 이런 식으로 쌓아두고 있는 작품 사진들이 산더미같고 밀린 전시 리뷰도 엄청 많다는 것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겠지만. 결국 이런 식으로, 아무렇게 적고 말았지만.



지난 10월의 어느 일요일에 베르사이유를 갔는데, 파리 사람들도 근처에 갈만한 곳이 없어서 주말이면 베르사이유로 가는 모양이었다. 가는 길도 막히고 파리로 들어오는 길도 막혔다. 이런 푸른 하늘을 볼 수 있는, 올해의 거의 마지막 일요일일 지도 모르니까. (알만한 사람들은 다 아는 것이지만, 유럽의 겨울은 최악이다. 우울증에 걸릴 수 밖에 없는 날씨가 거의 다섯 달 동안 계속된다고 한다.)
 
그리고 나는 베르사이유에서 제프 쿤스를 만났다. 의도했던 것은 아니었지만,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제프 쿤스의 작품을 보았다. 어둡고 낡은 가구들과 복제화들로 가득한  베르사이유 궁전 안의 방들보다 제프 쿤스가 더 재미있었던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베르사이유 정원을 보면서 달라졌다. 제프 쿤스의 작품 이상의 흥미로움을 가진 정원이라고 할까. 그리고 베르사이유의 정원을 보면서, '역시 데카르트의 나라구나'하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똑같이 바로크 철학이고 바로크식 정원이기도 했다). 반듯반듯한 정원은 데카르트의 철학 세계를 보는 듯 했다. 확실히 합리론의 철학을 대변하는 정원이 프랑스식 정원이라면, 경험론의 철학을 대변하는 것이 영국식 정원이라고 해야 할 수 있다. '픽쳐레스트picturesque'라는 단어도 지극히 영국적인 단어다. 프랑스식 정원은 어딘가 기계(론)적인 모습을 지울 수 없다.
(여기에 대해서는 바로크 예술 http://intempus.tistory.com/186 을 참조하면 좋겠다. 이 글을 쓴 지도 벌써 4-5년이 된 것같지만. 근대 기계론에 대해서는 이 리뷰 http://intempus.tistory.com/5 가 약간의 도움이 될 것이다. 이 글은 더 오래되었구만.)

로로코 양식의 베르사이유 궁전 안, 바로크 양식의 베르사이유 정원과 건물, 그리고 포스트모더니즘의 제프 쿤스. 로로코와 바로크는 종종 동일한 양식의 다른 측면으로 이해되기도 한다. 하지만 제프 쿤스는 약간 뜬금없다. 루이 왕가가 미국의 독립을 지지했다고 하고, 사르코지가 프랑스 대통령이 된 이후 프랑스와 미국 간의 관계 개선도 도모되고 있는 상황 속에서 제프 쿤스의 전시가 추진된 것일까?


종종 프랑스 사람들은 루이 왕가가 사라진 것에 대해서 안타까워 한다. 프랑스 대혁명의 전통이 새로운 프랑스를 만들었으나, 찬란했던 태양왕의 시대에 대한 그리움도 동시에 있다는 셈이다.

그런데 이런 궁전에, 얼마 되지도 않는 역사의 나라에서, 작품가격으로 따지자면 최고라는, 하지만
보수적이고 고전적인 사람들의 눈에는 종종 작품의 수준이 의심스럽고  엄격한 도덕주의자의 눈에는 자극적이고 심지어 손가락질 당하기까지 작가의 작품이 전시된다는 점에서 프랑스 사회 내에서도 논란이 될 수 밖에 없었던 전시였다.

이건 과거와 현대의 만남도 아니고 프랑스와 미국의 만남도 아니었다. 좀 기형적이라는 측면에서 재미있긴 했지만, 관람객의 입장에서 베르사이유를 제대로 본 것도, 제프 쿤스를 제대로 본 것도 아닌 셈이 되었다고 해야 하나. 뭔가 다른 사연이 있는 듯 보이는 전시였다. 말 많은 전시를 보았다는 점에서는 최고의 선택이라고 할 수도 있을 듯 싶다.



* 제프 쿤스 전시에 대한 한글 기사로는 http://blog.naver.com/sanstitre/20057198839 가 적당합니다.
* 제프 쿤스의 홈페이지는 http://www.jeffkoons.com/ 입니다.
* 위 사진들은 직접 베르사이유에서 찍은 사진임을 알려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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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자기가 알고 있는 편협한 상식으로 예술을 보려고 한다면 예술을 보고 느끼고 감상하는데 아주 큰 장애가 올 것이다. 역사의 흐름을 제대로 이해한 사람이라면 , 제프쿤스작품들이 베르사이유궁전에서 열린것이 아주 당연하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그 어느누구가 바로크양식이 프랑스가 만들어낸 양식이라고 할 수 있는 바보가 있겠는가? 독일의 바로크미술이 베르사유의 고전주의적 건축에 도입되었던 을 보더라도 그 당시 베르사이유가 외국문화(바로크)에 언제나 흥미롭게 관심을 두고 있었다는것을 알 수 있다. 베르사이유 궁전은 언제나 새로운 문화의 장이었고 루이 14세의 과감하고 항상 도전적 취향에 항상 실험적인 문화예술의 도가니였다고 보면 될 것 이다. 그런데 이 점을 인식하지 못하고 프랑스의 일부 사람들은 과거의 이미지속에 베르사이유를 일종의 '문화유산' 이라는 개념에 묶어두고 '흐르는 역사'가 아닌 '고여있는 문화'에 집착하여 제프 쿤스의 전시에 못 마땅했던 것이다. 여기에 못 지 않게 일부 외국관광객들마저도 제프쿤스의 전시를 황당하게 보는 모습들이었다. 이것은 예술의 역사를 잘못 해석하고있는 즉 변화와 새로운것을 두려워하고 있는것이라고 보면 될 것 이다. 에펠탑이나 루브르박물관의 피라미드가 세워지려고 했을때도 이런 보수파들이 늘 있었다는것을 잊지 말았음한다.
    이번 전시는 로랑 르 봉Laurent Le Bon 같은 시대를 파악하고 앞서나가는 생각을 가지고 있는사람이 아니었더라면 베르사이유궁은 관광객들에게만 사랑받는 고적지가 되었을것이다. 이 전시는 정말 새로운 숨을 불어넣었던 큰 역할을 했다고 보면된다. 이것은 정치적인 뒷 배경도 아닌 예술의 진취적인 정신을 이 베르사이유궁에 힘껏 불어넣어주게 된 것으로 본다.
    예술은 끊임없이 환타즘의 가능성이 이루워지는 자리이기도 하고 관객의 입맛에 맞는 뻔한 당연성을 제공하지는 않는다. 눈에 익혀진것을 보여주는것이 아니라는것이다. 루이 14세가 베르사유궁전에서 많은 스펙타클을 크게 즐겼는데 만일 그가 Split-Rocker를 보았다면 분명 감탄했을것임에 틀림없다.그런 차원에서라도 이번 제프쿤스의 전시는 크게 성공했다고 본다. 그리고 Split-Rocker가 그 어느 도시의 현대미술관앞에 설치 된 것 보다 바로 베르사이유궁전의 정원에 설치된것이 얼마나 조화로왔는지 확인할 수 있었을 것이다.

    • 제프 쿤스의 예술적 재능과 감각은 정말 대단하다고 생각합니다. 정말 기가 막힐 정도죠. 도대체 내가 왜 제프 쿤스를 진지하게 바라보게 되는가하고 스스로 반문할 정도이니깐요. 하지만 베르사이유와 제프 쿤스 조합은 다소 의아스러웠어요.
      실은 베르사이유와 제프 쿤스는 (역사적으로나 미적으로나) 아무런 관계도 없습니다. 정치적인 인간관계들을 제외한다면. 또한 제프 쿤스의 작품들을 베르사이유가 아닌 다른 곳에서 보았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는 생각도 했습니다.
      최초의 바로크 양식은 이탈리아에서 시작하여(보로미니의 '산 카를로 알레 콰트로 폰타네'에서) 프랑스와 네덜란드에서 꽃 피우게 됩니다. 독일의 바로크 미술이 프랑스에 영향을 주었다는 것은 다소 의외입니다.

      긴 댓글 감사합니다. ^^. 이 전시는 저에게 '제프 쿤스의 대단함'을 느끼게 한 전시였습니다. 확실히 그는 대단한 예술가임에 분명합니다.

  • 깨비 2014.03.20 19:51 신고

    뉴스에서 제프쿤스라는 이름을 듣고 어떤 사람인지 검색하러 왔다가 잘 보고 갑니다. 잡지같은 데 내놔도 손색이 없는 글이네요

    • 감사합니다. ^^ 제프 쿤스는 언제나 논란의 중심에 있는 작가입니다. 또한 선호가 갈리기도 하죠. ~.. 그만큼 재미있고 흥미진진하기도 합니다.

  • 뉴욕에서였나?? 제일 처음 제프 쿤즈의 저 거대풍선푸들을 보고 제가 느꼈던 감정을 글로 참 잘 쓰셨네요.

    정말로 만지고 싶었습니다 ㅋㅋㅋ

    반짝이고 누가 한번도 손대지않았을거같이 반질한 저 표면은 정말 대단했습니다.

    비쌀거같다. 재료값이 만만치않았겠다. 이런 생각도 들었습니다.

    저 풍선 꼭지마저도 쇠라는 어려운 소재로 그 고무 꼬인 느낌을 참 섬세하게도 표현했더라고요. 현대적인 관점과 감각으로 보았을 때 품질이 명품이다!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만지고싶다... 라는 그 감각을 가만히 생각해보니 정말 관능과 밀접한 연관이 있네요.

    저는 작품을 봤을 당시 좀 어렸던걸로 기억하는데. 나이때문인지 만지고싶다라는 생각과 관능을 연관시키지는 못했었습니다.
    다만 역시 돈을 많이 벌면 저런 작품을 사고싶다라는 전형적인 자본주의적 사고를 했었던 기억이 납니다.


    저는 저 작품을 뉴욕이라는 참 제프 쿤즈와 너무도 어울리는 동네에서 구경을 했었기때문인지 제프 쿤즈가 부자연스럽다는 느낌이 없었습니다. 제가 만약 베르사유에서 제프 쿤즈의 작품을 처음 봤었다면 제 견해도 조금은 달라졌을지 궁금합니다.


    아무튼 꽤 시간이 흐른 제 기억을 이렇게 꺼내주시는 글을 써주신 점 감사드립니다.

    • 제프 쿤스가 그동안 해왔던 작품들을 보면, 참 똑똑한 사람임을 알 수 있습니다. 또한 비즈니스 매너도 참 좋아서 '고집스러운 예술가'스럽지 않습니다. 이 또한 배워야 할 점이겠지요. 하지만 작품에 대해선 선호가 갈립니다만, 이 또한 전략인 것같아요. ㅎㅎ


화창한 일요일, 베르사이유 궁전에 갔다 왔다. 동양에서는 매우 익숙한 '중앙집권'이 서양에서는 매우 낯선 것이라는 사실을 아는 이는 별로 없다. 전성기 로마를 제외하곤 서양에서 중앙 집권 국가는 근대에 들어서야 가능한 일이었다. 그리고 그 중심에 태양왕 루이 14세가 있다.

하지만 이러한 권력과 무관하게 그의 일상은 참 피곤한 것이었다. 그의 식사는 많은 사람들의 구경거리였으며, 그에게 비밀스러운 일이란 거의 없었다. 그리고 그의 자식들은 오래 살지 못했고 그의 가문은 프랑스 대혁명 이후 사라졌다.

프랑스의 일부 사람들은 루이 왕가가 사라진 것을 안타까워 하기도 한다. 하긴 조선 왕조 복권을 꿈꾸고 있는 일부의 사람들이 한국에 있는 것과 비슷하지 않을까.

화려하면서도 절제와 규율을 지키는 바로크 고전주의 양식으로 지어진 궁 건물과 화려한 로코코 장식들로 채워진 궁 내부는 현대인들이 보고 감탄하는 화려함 혹은 우아함보다는, 그 당시 사람들의 일상을 떠올렸을때, 다소 쓸쓸하고 외로우며 슬프게 느껴질 것이다. 특히나 하루도 빠지지 않고 비가 내리는 11월부터 3-4월까지 두꺼운 커튼을 열어도 어두운 실내의 답답함이 가시질 않았을 것이다.

로코코의 화려함은 이런 일상을 우울함을 떨쳐내기 위한 과장한 몸짓일 지도 모른다. 베르사이유를 보면서 나는 이런 슬픔 같은 걸 느꼈다.

일요일을 맞아 많은 파리 사람들이 베르사이유엘 왔다.

프랑스식 정원. 프랑스 사람들 특유의 고전적 풍모를 느낄 수 있는 정원이다.

베르사이유 궁에 기거했던 여왕(?)의 방. 자신의 내면을 드러내지 않기 위해 노력한 실내 공간처럼 느껴졌다.



그런데 베르사이유 안에 제프 쿤스가 있었다. 미국인들이 베르사이유 관광을 많이 하기를 바라는 프랑스 정부의 의도가 깔렸다는 평도 있지만, 이방인인 내가 보기에도 베르사이유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았다. 이런 결정을 내린 사람들의 베르사이유와 현대 미술에 대한 이해가 사뭇 궁금해지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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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skynsea 2008.10.23 15:57 신고

    그렇다고 미국인들이 많이 오지는 않을 것 같은데.. 미국인들 의외로 여행 안합니다.. 올 사람들은 오고... 그나저나 베류사유도 보시고.. 프랑스는 가볼만 하죠..

    • 베르사이유는 기대했던 것보다 즐겁진 않았습니다. 하지만 베르사이유 궁에 붙은 정원은 환상이더군요. 궁 뒤쪽 먼 정원은 무료 개방이기 때문에 많은 파리 사람들이 나들이를 왔더군요.


르네상스 - 10점
월터 페이터 지음, 이시영 옮김/학고재


르네상스 Renaissance

월터 페이터 지음, 이시영 옮김, 학고재






모든 시대는 동등하다. 그러나 천재는 항상 그의 시대를 초월한다
- 월리엄 브레이크(William Blake)



월터 페이터의 르네상스는 르네상스 개론서라기 보다는 그의 관심을 끌었던 르네상스적 인물들에 대한 에세이집이다. 그러므로 르네상스의 배경이나 특징, 주요 사건들이나 인물 등과 같은 르네상스에 대한 전반적인 이해를 구하기 위해 이 책을 읽는 것은 좋지 않다.

하지만 19세기 말의 뛰어난 비평가였던 페이터의 심미안이나 그의 비평언어에 대해선 찬사를 금하지 않을 수 없다. 특히 이 책의 서문은, 혹시 있을지도 모를 비평가 지망생들에게는 꼭 읽으라고 하고 싶은 구절이 있다.

"따라서 중요한 것은 비평가가 지적인 만족을 위하여 미의 엄밀하고 이론적인 정의를 확보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어떤 기질적 소질, 즉 아름다운 사물에 깊이 감동 받는 힘을 갖추는 것이다."(9쪽)

요즘 대부분의 문학작품이나 미술/음악 작품에 대한 비평문들-나이든 이의 것이나 젊은이의 것이나-을 보면 단번에 글쓴이가 이 작품에 감동 받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심지어 어떤 경우에는 이론을 위해 뛰어나지도 않은 작품들을 인용하고 분석하기도 한다.

쉽게 이런 생각을 해보자. 바로 앞에 아름다운 여자가 있다. 그 아름다움을 바라보는 이의 시선을 고정시키며 영혼을 요동치게 만들고 시간을 정지시켜버린다고 치자. 그 속에서 그 아름다운 여자 앞에 선 이는 무슨 말을 할까.

아마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고 그저 바라만 볼 것이다. 그리고 그 순간이 지나고 영혼의 표면이 잠잠해질 때 한 마디 하게 될 지도 모른다. 뛰어난 비평이란 이럴 때 시작된다. 그러므로 정기적으로 저널에 문학 단평이나 리뷰를 쓰게 되는 이의 글이 '악평'이 될 가능성이 높다. 깊이 감동 받기란 드문 경우이고 감동 받기를 기대하면서 작품을 읽거나 보거나 듣게 되는데, 그 기대를 채우지 못할 경우에는 '어쩔 수 없이' 잘못된 점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정기적으로 저널에 문학 단평이나 전시/공연 리뷰를 쓰는 일은 대체로 한국에서의 사적/공적 관계를 해칠 가능성이 매우 높다. '주례사비평'이란 이런 걸 두고 하는 말일 것이다. 잘못된 점을 지적하는데 사적/공적 관계까지 해치게 되니 어떻게 '악평'을 올릴 수 있겠는가. 하물며 제대로 감상하는 법도 모르는 비평가들이 태반인데.

이런 측면에서 보자면 월터 페이터는 너무 르네상스에 경도된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마저 들게 만든다. 그는 '르네상스는 프랑스에서 시작해서 프랑스에서 끝난다'라고 말한다. (* 이도 월터 페이터가 프랑스에 너무 빠져 있다고 판단할 수 있겠다) 그는 고딕 시기의 프랑스 이야기 두편에서 시작해 피코 델라 미란돌라, 산드로 보티첼리, 루카 델라 로비아, 미켈란젤로의 시, 레오나르도 다 빈치, 조르조네 유파, 조아생 뒤 벨레, 빙켈만에 대해 이야기한다. 빙켈만의 경우 르네상스의 인물이라기보다는 시기적으로는 바로크 후기에 속한다. 하지만 그리스 고전 문화의 발굴이라는 점에서 르네상스적이다.

중세가 종교 중심적이라면 고딕은 종교와 세속의 대립이 나타나게 되는 시기이며 르네상스는 세속의 승리가 최초로 나타난 현상이라고 할 수 있다. 다른 말로 하자면 '위대한 이교도들(무신론자들)의 시대'가 시작된 셈이다. 여기에 대한 월터 페이터의 찬사는 이 책 내내 반복해서 드러난다. 즉 경건한 신앙과 대비해서 현세에 대한 의욕적인 태도와 세속적 의식이 무르익기 시작하는 시기가 바로 르네상스인 셈이다.

"이탈리아의 르네상스 신화는 바로 그러한 기이한 꽃과 같아서, 그것은 성스러움과 속됨의 두 가지 전통, 두 가지의 감성이 혼합되어 피어난 것이었다."(49쪽)



* 참고로 르네상스에 전반적인 개론서로는 폴 존슨, <<르네상스>>(을유문화사)가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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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 프랑스 지성사
(부제 : 차단된 통로 : 절마의 시대에 있어서의 사회사상)
H.S.휴즈 지음, 김병익 옮김
문학과 지성사



로베르 브레송의 영화 <어느 시골 사제의 일기>는 알아도, 이 영화의 원작자인 조르주 베르나노스에 대해선 잘 알지 못한다. 실은 브레송보다 더 유명하고 더 많은 팬을 가지고 있는 한 소설가에 대해선. 이런 편식은 비단 문학에만 해당되는 것도 아니다. 1960년대 구조주의의 열풍, 또는 그 이후에 대해서만 알고 있을 뿐 이 구조주의 학자들이 젊은 시절에 누구를 만났는가에 대해서 무관심하다 못해 무식하기 이를 데가 없다. 그 학자들에게 사르트르가, 말로가, 생 떽쥐베리가 어떤 영향을 끼쳤는가에 대해선 알지 못한다.

조르주 베르나노스는 ‘프랑소와 모리악과 더불어 양차 대전 중간기에 가장 영향력 큰 두 카톨릭 소설가 중 하나가 되는 탁월한 인물이었다. 그리고 소설 이외에도 그는 일련의 장편 에세이들 - 국민들에게 보내는 호소장 형식으로 엮어진 -을 썼는데 그것들은 이 시대가 생산한 영웅적 이상의 가장 박력있는 표현이 된다.’ 하지만 그는 우파였다. 그는 기사도적 이상, 영웅주의, 애국심으로 가득 차 있는 인물이었다. 그리고 그 시대 우파들 중 가장 고귀하고 아름다운 프랑스어를 구사하였다.

H.S,휴즈의 이 책은 베르나노스를 비롯하여 자끄 마리탱, 가브리엘 마르셀, 뒤 가르, 샤르댕 등 우리에겐 잘 알려져 있지 않지만, 프랑스 지성사에서 매우 중요한 인물들에 대한 이해를 높일 수 있는 책이다. 또한 알 듯 모를 듯 어려운 단어들로 채워져 있는 구조주의자들의 책을 읽는 것보다 이 책을 읽는 것이 현대 사회를 이해하는데 보다 많은 도움이 될 것이다.

* 이 책이 새로 재출간되었다. 개마고원에서. 궁금한 이들은 사서 읽어보는 것도 좋으리라.

막다른 길
스튜어트 휴즈 지음, 김병익 옮김/개마고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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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거벗은 내 마음 - 10점
샤를 보들레르/문학과지성사




<벌거벗은 내 마음>, 샤를 보들레르
이건수 옮김, 문학과 지성사



종종 살아간다는 것에 대한 의미를 구한다. 이럴 때는 우리 인생이 우리 뜻대로 되지 않고 모순으로 가득차있다고 느껴질 때가 대부분이다. 사랑하는 아내의 키스를 받고 나선 사내의 트럭이 얼마 가지 못한 채 갑자기 튀어나온 자동차나 사람과 부딪히거나 몇 년 동안 준비해온 사업이 사소한 법률 조항 하나 때문이거나 어떤 이의 꾐에 의해 모든 걸 날려버리게 될 때 우리는 살아간다는 것에 대한 의미를 구하기 마련이다.

과연 살아간다는 건 무엇일까. 이런 물음에 이 책은 현명한 답을 주지 못한다. 예술은 무엇인가, 문학은 무엇이고 사랑은 무엇인가 따위의 물음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고작 이 책의 저자는, “세상은 오해에 의해서만 굴러간다./-모든 이가 의견 일치를 하는 것은 바로 보편적 오해에 의한 것이다./-왜냐하면 만약 사람들이 서로를 이해한다면 불행하게도 결코 의견 일치를 이룰 수 없기 때문이다.”라고 말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런 책을 읽는 이유는 무엇일까. 왜 사람들은 보들레르를 읽는 것일까. 참혹하고 끔찍하며 슬픔에도 불구하고 왜 보들레르를 이야기하는 것일까. 나로선 이해하기 힘들다. 보들레르를 이해하고 감동받는 이라면 분명 그는 제정신을 가지고 있다고 보기 힘들다.

나는 살아간다는 것, 보들레르를 읽는다는 것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다. 정확히 말해 살아가면서 보들레르를 읽는 것 말이다. 보들레르의 유려한 독설을 읽으면서 사람들은 무슨 생각을 하는 것일까. 하긴 이런 질문보다 먼저 내 생각을 이야기하는 편이 좋겠다. 보들레르의 이 산문집은 재미있는 편에 속한다. 하지만 일반 독자에게는 권하지 않는다. 시를 좋아하는 여대생에게도 권하지 않고 보들레르를 연구하는 이에게도 권하지 않는다. 시를 좋아하는 여대생은 이 책을 읽고 거부감을 표시하거나 아니면 쓰레기같은 동경을 가질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이와 유사하게 보들레르를 연구하는 이들은 보들레르가 한 문장 한 문장을 적어내려갈 때의 고통이나 번민, 세상에 대한 증오를 가슴으로 받아들이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면 이 책은 누가 읽어야하는 것일까. 번번이 실패하는 사랑으로 인해 자살을 마음먹은 사내나 버림받은 여자에게 어울리는 책이다. 즉 세상에서 버림받은 듯한 기분에 휩싸여있는 이들에게 이 책은 무척 유용할 것이다.

자고로 책은 먼저 쓸모가 있어야하는 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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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독한 산책자의 몽상
장 자크 루소 지음, 김중현 옮김, 한길사




이 세상에 나 혼자만 있다고 느낄 때, 진정으로 그러하다고 느낄 때, 그 때 우리가 취할 수 있는 행동이란 몇 가지 밖에 없다. 그 첫 번째가 죽음이며, 그 두 번째는 죽음이 무서워 벌벌 떨며 고통스러워하는 것이다. 이 두 가지 정도. 그 외에도 있겠으나 내가 아는 바는 이 두 가지뿐이다.

그러니 그-루소-가 정말 '고독'했는지는 두고볼 일이다. 이 책 '고독한 산책자의 몽상'은 루소의 두 가지 심정을 대변해주고 있다. 하나는 그 나쁜 놈들, 자신을 미워하고 모함했던 자들에 대한 증오이며 나머지 하나는 그 증오를 다스리는 방법에 대한 것이다.

'산책'이란 삶의 거친 풍랑 속에서 살아남은 자가 취할 수 있는 가장 매력적인 행위들 중의 하나이다. 루소의 산책은 그러한 매력이 그저 산책이라는 행위로 기인된 것이 아니라 이성과 감성, 논리와 감정, 합리와 모순 사이에서 갈등하며 스스로의 길을 가려고 노력하는 정신에서 나온다는 것을 우리에게 가르쳐주고 있다.


"이제 나는 이 지상에 혼자다. 오직 나 자신뿐, 형제도 이웃도 친구도 없다. 세상에서 가장 친절하고 애정이 넘치는 한 사람이 이렇게 그들에게서 만장일치로 추방되었다."


"행복이란 이승의 인간을 위해 만들어진 것 같지 않은 어떤 항구불변의 상태다. 지상의 모든 것은 끊임없는 흐름 속에서 아무 것도 불변의 형태를 갖지 못한다. 우리 주위의 모든 것은 변화한다. 우리 자신도 변한다. 그러므로 아무도 그가 오늘 사랑하는 것을 내일도 사랑할 것이라고 확신할 수 없다. 그처럼 인생을 위한 우리의 모든 지복의 계획들은 망상일 뿐이다."


아무렇게나 인용한 두 단락 속에서 루소가 바라보는 세계관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이 세계관과 대치되는 곳에 '산책의 세계관'이 위치한다. '자연관'이라고 해야 더 옳을 듯한 루소의 그 세계는, 솔직히 나에겐 별 호소력 없는 세계다. 그건 늙은이의 세계다.

이렇게 말해도 옳다면 실존의 세계에서 방황하다 존재의 세계로 들어가기 위한 몸부림 속에서 나온 세계관이라 칭하고 싶다. 난 끔찍하기 그지없는 실존의 세계 속에 있기 때문에, 그 속에서 싸우고 있기 때문에, 루소의 '산책의 세계관'은 감동적이지 않다. 차라리 그의 증오가, 그의 미움이 더 매력적이다.





고독한산책자의몽상-개정

장자크루소 저 | 김중현 역 | 한길사 | 2011.01.07

출처 : 반디앤루니스 http://www.bandinluni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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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산책'이란 삶의 거친 풍랑 속에서 살아남은 자가 취할 수 있는 가장 매력적인 행위들 중의 하나이다." 멋진 문장입니다. 지하련 님의 글을 보고 있자니, 어쩔 수 없이 이 책이 보고 싶어지네요.^^

    - 현선 드림

    • 읽어볼 만합니다. 루소가 워낙 매력적인 인물이기도 해요. ^^~. 이 책을 읽은 지도 꽤 되었네요. 올핸 루소의 다른 저서 한 권 정도 읽어야겠군요. 그리고 너무 과찬이세요. ^^ 이 책을 쓸 당시 루소의 처지가 그랬고, 그걸 문장으로 적어본 것에 불과합니다. ㅎㅎ

  • 2014.01.24 18:41

    비밀댓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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