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33

미래는 오래 지속된다, 루이 알튀세르

미래는 오래 지속된다 - 루이 알튀세르 지음, 권은미 옮김/이매진 그가 죽고 난 다음, 르몽드에서 한 면을 통째로 특집으로 꾸몄다. 20세기 후반기 마르크스주의는 사람들의 무관심 속에 내팽개쳐져 있을 무렵, 어느 마르크스주의자의 인생과 학문 세계가 유력 일간지 특집으로 나온 것이다. 루이 알튀세르. 현대적 마르크스주의를 만든, 거의 독보적인 인물. 구조주의와 정신분석학을 마르크스주의에 도입한 철학자. 하지만 그는 레지스탕스 동료이기도 했던 아내를 목졸라 죽이고 침묵의 세월 보내며 죽는다. 그리고 죽기 전에 발표한 자서전, '미래는 오래 지속된다'는, 사랑하는 아내에 대한 추억을 끄집어 내며, 자신의 세계를 정신분석학적으로 도려내어 분석한다. 문장 문장 하나가 잔인하고 고통스러우며, 추억은 쪼개지며, 사랑..

시냇물에 책이 있다, 안치운

시냇물에 책이 있다. 안치운(지음), 마음산책 시냇물에 책이 있다 - 안치운 지음/마음산책 언제부터 프랑스를 좋아하게 되었을까. 고등학교 때 배웠던 불어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소설가... 파트릭 모디아노나 르 끌레지오? 하지만 그 때 내가 열심히 읽었던 소설가는 헤르만 헤세였는데. … 아니면 먼 훗날의 필립 솔레르스, 로베르 데스노스, … 기억은 꼬리를 물고 빙빙 돌아, 몇 해 전 갔던 파리 하늘 아래로 모여든다. 지하철을 오가며 안치운의 산문집을 읽었다. 웬만한 문학 비평가들보다, 웬만한 소설가보다 뛰어난 산문을 가진 그는 연극평론가이다. 중앙대에서 연극을 공부하고(그는 예술대 선배다), 파리에서 유학 생활을 하였다(뜬금없이 고백하건대, 마음 깊이 모교 교수를 하였으면 했던 이가 두 명 있었는데, 한 ..

레비-스트로스의 세계

책 읽기와 글 쓰기에 예전만큼 많은 시간을 할애하지 못하고 있다. 심지어 밀린 원고마저 있다. 회사 업무로 읽어야 하는 리포트와 아티클도 쌓여있다. 지난 번 읽은 '슬픈 열대'(http://intempus.tistory.com/1353)의 역자 서문에서 기억해둘 만한 내용을 노트해두었다. 이를 되새길 겸하여 블로그에 옮긴다. '슬픈 열대'라는 책이 레비-스트로스의 명성을 크게 알린 책이나, 그의 주저라고 보기엔 한계가 있다. 그의 학문 체계를 알기 위해서는 다른 책을 읽어야 한다. 그래서 '슬픈 열대'의 역자는 다른 책들에 대해서도 소개하고 있는데, 레비-스트로스의 박사학위논문에서 나온 '친족의 기본구조'와 '야생의 사고'였다. 특히 후자는 인문학 전공자라면 필독서에 해당된다. '친족의 기본구조' - 미..

사탄의 태양 아래, 조르주 베르나노스

사탄의 태양 아래 - 조르주 베르나노스 지음, 윤진 옮김/문학과지성사 사탄의 태양 아래 Sous le soleil de Satan 조르주 베르나노스 지음, 윤진 옮김, 문학과지성사 폴 장 툴레가 좋아하던 저녁 시간이다. 이맘때면 지평선이 흐릿해진다. 상아색의 구름 한 떼가 지는 해를 감싸면서 하늘 꼭대기에서 땅 밑까지 노을이 가득 차고, 거대한 고독이 이미 식어버린 채 퍼져나가는 시간이다. 액체성의 침묵으로 가득 찬 지평선 … … 시인이 마음 속에서 삶을 증류하여 은밀한 비밀, 향기롭지만 독을 간직한 비밀을 추출해내던 시간이다. 어느새 수많은 사람들이, 수없이 많은 팔과 입을 가진 사람들이 어렴풋한 어둠 속에서 무리 지어 움직이고 있다. 큰 길가에는 사람들이 몰려들고, 여기저기 불빛이 비친다. 시인은 대..

조르주 루오 - 신성과 세속

조르주 루오 - 신성과 세속 2009. 12. 15 ~ 2010.3. 28 예술의 전당, 한가람 미술관 3F 비가 내릴 듯한 색채의 대기 - 흐린 날씨. 북쪽 대륙으로부터 밀려든 짙은 구름들. 거친 아스팔트 도로 옆의 커피숍. 일요일 오전은 그렇게 지나가고 있었다. 전시를 보는 것이 이젠 특별하게 변해버린 어느 직장인의 일요일 오전. 조르주 루오를 그 때 만났다. 전시장 입구는 인파로 빽빽했다. 놀라운 광경이었다. 조르주 루오를 만나러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오다니! 하지만 아니었다. 1층에 인상주의 전시가 있었기 때문이다. 일요일 아침, 미술관 앞 길게 늘어선 줄은 서울이 마치 대단한 예술의 도시처럼 느껴지게 했다. 이 열기가 다른 전시들에도 이어졌으면 하는 바람을 가지게 되었다. (하지만..) 조르주 ..

2월 26일: 구로디지털단지, 어느 스타벅스 안에서.

쓸쓸하고 우울한 따뜻함으로 채워진 대기가 건조한 빛깔의 벽과 푸른 하늘의 흰 구름을 둔탁하고 어두운 표정으로 반사하는 유리로 지어진 빌딩 사이로 내려앉고 있었다. 봄이라고 하기엔 아직 이른 날씨지만, 이름 없는 행인들의 표정은 잔뜩 상기되어 있었다. 마치 불확실한 미래에 대한 딱딱한 염려가 섭씨 10도를 넘나드는 대기의 온도로 녹아 사라질 거라 믿는 듯 보였다. 신도림에서 미팅을 끝내고 구로디지털단지로 왔다. 노트와 펜을 샀다. 이동 중에, 아무렇게나 들른 가게에서 노트와 펜을 살 때면, 어김없이 여행을 떠나기 전의 기형도가 떠오른다. 이젠 시간이 많이 흘러, ‘세월’이라는 표현이 적당할 법한 과거의 인물이 되어버렸고, 기형도가 파고다 극장에서 그의 조용한 생을 마감할 때보다 더 나이가 든 나에게, 세상..

와인 정치학, 타일러 콜만

와인 정치학 - 타일러 콜만 지음, 김종돈 옮김/책으로보는세상(책보세) 와인 애호가로서 나는 좋은 품질의 와인을 저렴하게 마시고 싶다는, 소박한 바람을 가지고 있을 뿐이다. 하지만 이 책을 읽고 난 다음, 그 바람이 단기간에 쉽게 이루어지지 않을 것임을 확실하게 알게 되었다. 하긴 와인도 하나의 비즈니스이지 않은가. 우리는 종종 예술가처럼 혼신의 힘과 열정을 다해 포도를 수확하고, 정성스럽게 와인을 만들고, 이렇게 생산된 와인에 대해 마치 예술작품인 것처럼 현란한 수사로 포장된 현학적 평가나 평론에 너무 익숙해져 있었던 것은 아닐까. 저자는 서문에서 이렇게 이야기한다. 와인 정치학은 종종 사람들의 관심으로부터 벗어나 있다. 유명한 와인 제조업자는 와인을 만드는 데 있어 모든 노하우를 쏟아 붓겠지만 그들 ..

제프 쿤스와 베르사이유

나에게 엄청난 돈이 있어(세계 탑 100위 정도의 갑부 수준으로) 미술 작품을 구입할 수 있게 된다고 하더라도, 절대로 제프 쿤스의 작품을 살 생각은 없다. 하지만 다른 측면으로 접근한다면 구입할 의향도 있다. 미술에 대해서 조금 떠벌려야 하는 비즈니스가 있다면, 대단한 사람들을 초대해 뭔가 과시해야될 필요가 있다면, 한 점 정도는 구입해볼 생각을 가질 지도 모르겠다(그리고 결국 알만한 다른 작가의 작품을 구입하겠지만). 나는 제프 쿤스가 현대미술이 요구하는 바의 '재능'이 없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도리어 정반대다. 그는 주체하지 못하는 재능으로 현대미술을 망쳐놓고 있는 몇 되지 않는 예술가라고 표현하는 편이 더 타당할 지도 모른다. '움직이는 약국' 데미안 허스트가 '삶과 죽음'이라는 일관된 주제의식을..

베르사이유와 제프 쿤스

화창한 일요일, 베르사이유 궁전에 갔다 왔다. 동양에서는 매우 익숙한 '중앙집권'이 서양에서는 매우 낯선 것이라는 사실을 아는 이는 별로 없다. 전성기 로마를 제외하곤 서양에서 중앙 집권 국가는 근대에 들어서야 가능한 일이었다. 그리고 그 중심에 태양왕 루이 14세가 있다. 하지만 이러한 권력과 무관하게 그의 일상은 참 피곤한 것이었다. 그의 식사는 많은 사람들의 구경거리였으며, 그에게 비밀스러운 일이란 거의 없었다. 그리고 그의 자식들은 오래 살지 못했고 그의 가문은 프랑스 대혁명 이후 사라졌다. 프랑스의 일부 사람들은 루이 왕가가 사라진 것을 안타까워 하기도 한다. 하긴 조선 왕조 복권을 꿈꾸고 있는 일부의 사람들이 한국에 있는 것과 비슷하지 않을까. 화려하면서도 절제와 규율을 지키는 바로크 고전주의..

예술의 우주 2008.10.20

르네상스, 월터 페이터

르네상스 - 월터 페이터 지음, 이시영 옮김/학고재 르네상스 Renaissance 월터 페이터 지음, 이시영 옮김, 학고재 모든 시대는 동등하다. 그러나 천재는 항상 그의 시대를 초월한다 - 월리엄 브레이크(William Blake) 월터 페이터의 르네상스는 르네상스 개론서라기 보다는 그의 관심을 끌었던 르네상스적 인물들에 대한 에세이집이다. 그러므로 르네상스의 배경이나 특징, 주요 사건들이나 인물 등과 같은 르네상스에 대한 전반적인 이해를 구하기 위해 이 책을 읽는 것은 좋지 않다. 하지만 19세기 말의 뛰어난 비평가였던 페이터의 심미안이나 그의 비평언어에 대해선 찬사를 금하지 않을 수 없다. 특히 이 책의 서문은, 혹시 있을지도 모를 비평가 지망생들에게는 꼭 읽으라고 하고 싶은 구절이 있다. "따라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