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소설 89

공중곡예사, 폴 오스터

공중 곡예사 - 폴 오스터 지음, 황보석 옮김/열린책들 폴 오스터, Mr.Vertigo, 열린책들. '공중곡예사'라는 번역 제목은 썩 성공적이지 못하다. 차라리 '미스터 버티고'나 '현기증씨'가 낫지 않을까.(그만큼 이 소설 속에서 '현기증'이라는 소재는 매우 중요하다. 소설 속에 아주 짧게 언급되지만, 주인공 인생에 있어 한 계기를 마련하기 때문이다.) 살아가면서 중요한 것들이 여러 개가 있는데, 그 중 하나가 '거리감'이다. 가령 고등학교 때 친구가 건네준 빨간 포장의 말보루를 가슴 깊숙이 삼키고 난 다음 펼쳐지는 거리 풍경과 팽창하는 동공과의 거리 변화 따위나 대학 때 옆에 사모하는 여자를 앉히고는 연거푸 데킬라 스트레이트 잔을 여러 잔 마시고 손을 뻗쳐 그 여자의 얼굴 위로 갖다댈 때, 손가락 끄..

아무도 아닌, 동시에 십만 명인 어떤 사람, 루이지 피란델로

아무도 아닌, 동시에 십만 명인 어떤 사람 - 루이지 피란델로 지음, 김효정 옮김/문학과지성사 루이지 피란델로Luigi Pirandello, 1926.(김효정 옮김, 문학과 지성사, 1999) 살아가는 게 버겁다. 소박하고 순수하던 고대의 풍습은 시간의 바람 속에서 먼지가 되고 훗날 그 먼지들을 모아 새로운 성(城)을 쌓지만 그 성은 우리가 지어, 들어가지 못한 채 버림당하는 곳으로 남겨진다. 그럼 이제 우리는 어디로 가야하는 걸까. 선량한 우리, 아벨에게서 왔지만 그가 가졌던 양들은 이제 우리에게 남아있지 않고 그 몇 천년 동안 푸른 언덕이며 깊은 호수며 그 곳을 가득 메우고 있던 새와 물고기들은 몇 미터의 높이로 쌓인 먼지들의 먹이가 되어버렸다. 아, 이제 우리는 어디로 가야하는 것일까. 모스카르다...

칼의 노래, 김훈

칼의 노래 - 김훈 지음/생각의나무 김훈(지음), , 생각의 나무 내 몸 속에, 내 가슴 속에 죽여야 할 것들이 너무 많아, 소설의 짧고 단단한 문장들 틈 속에서 소리죽여 울어야만했다. 하지만 죽여야할 것들은 죽임을 당하기 전에 내 몸 속, 내 가슴 속에서 날 공격했고, 소설 속 화자인 이순신이 죽여간 왜며, 부하며, 조선포로며, 전과를 말해주기 위해 짤려져, 소금에 절여진 머리통 위로 내 얼굴이 떠올랐다. 말은 비에 젖고 청춘은 피로 젖는구나 젊은 왜가 칼에 새겨놓은 저 글귀는 이내 내 영혼을 파고들고, 나를 버려도 내 육체를 버리지못함이 한없이 슬프고 내 몸짓들의 까닭없는 부정들이 날 공포 속으로 밀어붙인다. "사랑이여 아득한 적이여, 너의 모든 생명의 함대는 바람 불고 물결 높은 날 내 마지막 바다..

나의 미카엘, 아모스 오즈

나의 미카엘 - 아모스 오즈 지음, 최창모 옮김/민음사 내가 이 글을 쓰는 것은 내가 사랑하던 사람들이 죽었기 때문이다. 내가 이 글을 쓰는 것은 어렸을 때는 내게 사랑하는 힘이 넘쳤지만 이제는 그 사랑하는 힘이 죽어가고 있기 때문이다. 나는 죽고 싶지 않다. - p.7 하지만 한나는 죽는다. 그녀의 사랑하던 힘이 죽고 그녀의 기억들이 죽고 그녀의 꿈들이 죽는다. 그녀가 간직하고 있었던 모든 사랑과 모든 기억들로부터 떠남으로써 그녀는 나에게, 혹은 우리들에게 그녀의 슬픈 죽음의 날개를 보여준다. 그런데 그 검은 날개가 눈에 익다. 우리들의 눈에 익숙한 그녀의 검은 날개. 때때로 증명할 수 없는 물음들이 우리들을 인생의 고통 속으로 빠뜨리곤 한다. 꼭 ‘넌 날 사랑하니’라는, 그 어떤 대답으로도 채워지지 ..

향수, 파트리크 쥐스킨트

향수 (양장) - 파트리크 쥐스킨트 지음, 강명순 옮김/열린책들 향수 - 어느 살인자의 이야기 파트리크 쥐스킨트 지음. 열린책들 이 소설을 읽은 독자들이 한결같이 열광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내가 읽기엔 너무 끔찍스러운 이 소설은 영웅주의와 유미주의가 뒤섞인 채, 인간에 대한 혐오와 자기 파괴로 일관되어 있다. 그르누이는 이 소설이 시작할 때부터 인간이 아니었다. 그르누이적 세계-냄새로만 자기 정체성이 구성되는 세계 속에서 그르누이는 인간의 냄새를 가지지 못했기 때문에 인간이 아니다. 인간이 아닌 자라는 정체성은 그가 바로 신적인 지위에 있는 존재라는 것은 소설의 시작부터 은근히 암시하고 있는 셈이다. 그러면서 그르누이는 향수 제조인으로서의, 비평적 용어로 말하자면 예술가 소설의 전형적인 주인공에 속한다...

존재하지 않는 기사, 이탈로 칼비노

존재하지 않는 기사 - 이탈로 칼비노 지음, 이현경 옮김/민음사 존재하지 않는 기사, 이탈로 칼비노, 민음사 1. 모든 것들이 '희극'으로 결론 나는 이 소설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행복한 결말'이라고 말하지는 못할 것이다. 왜냐면 '존재하지 않는 자'에 의해 존재하는 자들(우리들)은 '의미'를 가지기 때문이다. 그리고 동시에 존재하지 않는 자로 인해 의미를 가졌기 때문에, 그 의미란 '자기기만'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소설은 우리에게 말하고 있다. 그러나 그것이 '자기기만'이라 하더라도 '사랑'은 그만큼 가치가 있는 것일까? 현대란 보이는 세계의 화려함과 편리함, 또는 현란함 속에서 보이지 않는 세계의 힘에 의해서 아슬아슬하게 지탱되는 시대이다. 그리고 이 아슬아슬한 지탱이 얼마 가지 못할 것임을 알..

육체의 악마, 레이몽 라디게

육체의 악마 - 레이몽 라디게 지음, 김예령 옮김/문학과지성사 육체의 악마, 레이몽 라디게(지음), 문학과 지성사 1. Passion 불같이 활활 타오르던 사랑이 식지 못한 채 여러 차례의 깊은 계곡을 통과한 다음, 끔찍한 파국을 맞이하게 되는 것은 그 사랑의 정념이 사악하기 때문일까? 혹은 불륜을 지속시키기 위해, 부도덕을 도덕으로 위장하기 위해, 그 순수한 사랑은 그 사랑을 타인들에게 숨겼다는, 그것만으로도 자신들의 사랑이 허약하다는 충분한 이유가 될 수 있다는 사실 때문에 스스로 상처 입은 것일까? 2. 불륜 나에게, 혹은 이 소설을 읽고 잔인한 쾌감, 아마 아리스토텔레스라면 자신만만하게 '카타르시스'라고 말했을 그런 쾌감을 느끼는 사람들 모두 도덕과는 거리가 먼 사람들일까? 그러나 불행하게도 '도..

우아하고 감상적인 일본야구, 다카하시 겐이치로

우아하고 감상적인 일본야구 - 다카하시 겐이치로 지음, 박혜성 옮김/웅진지식하우스(웅진닷컴) , 다카하시 겐이치로 지음, 박혜성 옮김, 웅진출판, 1995 (* 시리즈의 열번째 권). 1. 이 소설에 대한 감상문으로 적당한 문장은 이러하다. “다카하시 겐이치로라는 일본의 변태적 허구를 즐기는 작가가 쓴 소설을 읽었는데 말이야, 도통 무슨 말인지 모르겠어. 그런데 녀석 소설 하나를 잘 쓰더군. 뭐, 무슨 말인지도 모르는 소설을 읽고 잘 쓴다라는 따위의 말을 하는 것이 이상하긴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 다카하시 겐이치로라는 녀석이 ‘변태’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사라지는 건 아니야.” 하지만 이런 문장은 이 소설을 소개하는 글의 문장으론 적당하지 않다. 2. 소설 뒤에 붙은 박유하 교수의 해설은 이 소설의 ..

홍수, 르 클레지오

『洪水Le De'luge』, 르 클레지오 지음(* 이휘영 옮김), 동문선. 1988. * 그대들은 죽음을 모르고 있다 * 익명성: 이것은 누구나 혼잡한 거리에서 느낄 수 있는 현대 도시의 비극적 특성들 중의 하나이다. 작품의 주인공인 프랑소와 베송은 이 익명성 속에 자신을 파묻는다. 그래서, 소설은 프랑소와 베송의 뒤를 따라다니며 전개되지만, 프랑소와 베송은 그렇게 두드러지게 나타나지 않고, 도리어 그가 보는 사람들, 거리들, 풍경들만 독자의 눈동자 속 으로 들어온다. 그리고 주인공 대신 독자의 눈동자 속에 들어온 사람 들, 거리들, 풍경들에서 독자는 르 클레지오 특유의 서정적인 분위기 를 제외하곤 아무런 것도 얻을 수 없다. 특별한 사건도, 특별한 줄거 리도, 특별한 인물도 없으며, 아무 것도 특별하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