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 167

도쿄 우에노 스테이션, 유미리

도쿄 우에노 스테이션 유미리(지음), 강방화(옮김), 소미미디어, 2021 이불에서 팔만 꺼내 시계를 얼굴 가까이 대어 보니 5시를 조금 넘긴 시각이었다. 환갑 기념으로 아내 세쓰코와 딸 요코가 센다이에서 사다 준 세이코 손목시계였다. (154쪽) 최근 소설가 유미리의 근작들을 찾아보았다. 그러나 없었다. 마치 사라진 듯, 한국의 서점에서 자취를 감추었다. 헌책으론 구할 수 있지만, 그녀의 존재가 사람들의 기억에서 사라지고 있다는 생각에 다소 안타까웠다. 재일한국인 여류 소설가. 아쿠타가와상 수상 때부터 갖은 논란의 중심에 섰던 소설가. 재일한국인의 문제를 극명하게 드러내며 자신의 중간자적 존재를 무기 삼아 싸우던 소설가. 그녀의 소설들은 어느 순간 번역되지 않았고 그녀도 잊혀져 가고 있었다. 그녀, 어..

봄의 정원, 시바사키 도모카

봄의 정원 시바사키 도모카(지음), 권영주(옮김), 은행나무 베란다와 창문이 질서 정연하게 늘어서 있었다. 형태가 똑같은 창으로 햇빛이 비쳐 들었다. 2층 집은 벽에, 1층 집은 바닥에도, 볕이 드는 곳과 그늘의 경계가 보였다. 변화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소리를 내는 것도 없었다. 해시계처럼 양달과 응달의 경계가 이동할 뿐이다. 도서관에서 그냥 집어들고 읽었다. '아쿠타카와 수상작'이라고 하나, 그냥 작은 소품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동시대 일본을 알 수 있을 듯한 분위기를 풍긴다고 할까. 관음증적이면서도 쓸쓸한 봄날의 풍경화같다는 생각이 드는, 작가도 독자도 심지어 소설 속 인물들 마저도 풍경의 일부가 된다고나 할까. 결코 속마음을 들킬 필요 없이 그저 눈에 보이는 그 때 그 모습만을 묘사할 ..

동정에 대하여, 안토니오 프레테

동정에 대하여 Compassione - 가장 인간적인 감정의 역사 안토니오 프레테(지음), 윤병언(옮김), 책세상 동정compassione이란 ‘함께com’ 나누는 ‘열정passione’을 뜻한다. 하지만 동시에, 함께 나누는 아픔, 고난passione에의 참여를 의미하기도 한다. 동정은 타인과 타인의 고통을 향해 한 걸음 더 가까이 다가서는 움직임을 가리킨다. 하지만 동정은 보기 드문 감정이다. 타인의 고통이 진정한 의미에서 자신의 고통으로 변하는 경험 자체가 진귀하기 때문이다. (9쪽) 문학의 차원과 예술의 차원에서 그려지는 동정의 모습은 곧, 타자의 현존, 타인의 얼굴과 타인의 정체가 지니는 헤아릴 수 없는 깊이에 대한 끊임없는 이야기이다. 이 깊이를 바라보는 시선의 정체를 강화하는 것이 바로 타인..

나의 사적인 도시, 박상미

나의 사적인 도시 박상미(지음), 난다 도서관에서 빌려 읽었다. 상도터널 옆 김영삼도서관. 몇 년 동안 빈 건물로 있었다. 우여곡절 끝에 작년 겨우 개관할 수 있었다. 텅 빈 건물을 보며 안타깝다는 생각을 했는데, 최근에 문을 열고 동네 사람들의 휴식 공간이 되고 있었다. 아직 책이 많지 않고 장서 분류에 따라 몇 층으로 나누어져 있어 계단을 오가는 것이 불편하지만, 그래도 새 책이 많다는 것이 좋다. 인근의 동작도서관가 장서 목록이 묘하게 겹치지 않는 것도 흥미롭다. 한 때 모든 걸 그만 두고 사서가 되면 어떨까 생각했다. 그런데 사서가 된다고 해서 책을 많이 읽을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그냥 책을 가까이 하고 싶다는 사소한 희망이었지만. 대부분의 취미, 혹은 사랑은 늘 마주하는 직업이 되는 순간 그 ..

눈물들, 파스칼 키냐르

눈물들Les Larmes 파스칼 키냐르Pascal Quignard(지음), 송의경(옮김), 문학과지성사 키냐르, 때때로 생각나는 이름. 그러나 한동안 읽지 않았던 작가. 오랜만에 한 권을 읽었다. 아주 오래 전 을 읽은 후, 감동을 받은 후, 그의 소설 몇 권을 더 읽었는데, 만큼의 감동은 없었다. 어쩌면 을 제대로 읽은 것인지도 모르겠다. 각 10여 장으로 구성된 10권의 책이라는 좀 특이한 목차를 지닌 이 작품을 한 마디로 요약하자면 '프랑스어가 태어나는 순간'의 현장 스케치라고 할 수 있다. (247쪽) 역자의 설명대로 이 책은 최초의 니타르Nithard에 대한 소설이다. 다시 말해, 니타르(라틴어로 니타르두스 Nithardus)는 842년 2월 12일 서프랑크 왕국의 국왕 카를 2세와 동프랑크 왕..

잃어버린 낙원, 세스 노터봄

잃어버린 낙원 Lost Paradise 세스 노터봄Cees Nooteboom(지음), 유정화(옮김), 뮤진트리 어쩌면, 나는, 너는, 우리는, 늘, 언제나, 각자만의 천사를 바라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래서 '잃어버림'에 대한 이야기로 설정된 소설은 또 다른 '잃어버림'으로 끝을 맺는다. 알마의 상실감(상처)은 본원적인 것이어서, 애초에 무드Mood같은 것으로 인해 일상을 벗어나 스스로에게 상처 입히는 일로 이 소설, 혹은 여행이 시작된 것은 아니다. 도리어 이 일은 너무 비정상적이어서 일종의 은유적인 형태의, 소설적 장치로 해석하는 것이 더 타당해 보일 정도이며, 이 사건에 대한 서술이나 표현, 또한 직접적이지 않고 마치 꿈처럼 흐릿하게 서술되어 독자는 그 사건의 끔찍함을 미루어 짐작할 뿐이다. 이..

완벽한 날들, 메리 올리버

완벽한 날들메리 올리버(지음), 민승남(옮김), 마음산책 사 놓은 지 한참 만에 이 책을 읽는다. 몇 번 읽으려고 했으나, 그 때마다 잘 읽히지 않았다. 뭐랄까. 자신의 삶에, 일상에, 지금/여기에 대한 만족과 찬사, 행복과 신비에 대한 온화하고 밝고 서정적인 서술들과 표현들로 가득한 이 책이 나와는 어울리지 않는다는 생각을 했던 걸까, 아니면 나는 이런 책 읽기를 두려워하거나 맞지 않다는 선입견을 가지고 있었던 걸까. 결국 읽기는 했으나, 역시 나와는 어울리지 않는다는 생각을 했다. 깊이 이 책에 빨려들지 못했다. 매혹당하지 못했다. 많은 이들의 찬사와 달리, 나에겐 그저 좋은 산문집이었다. 하긴 이 정도만으로도 나쁘진 않으니까. 하지만 나에게 최고의 산문집은 기싱의 이나 보르헤르트의 같은, 세계와 자..

근대의 서사시, 프랑코 모레티

근대의 서사시 Modern Epic프랑코 모레티(지음), 조형준(옮김), 새물결 프랑코 모레티의 이 책, 읽기 쉽지 않다. 그의 말대로 너무 유명하지만, 거의 읽히지 않는(읽기 어려운) 서사 작품들을 두고, '서사시'라는 테마를 통해, 근대가 어떻게 이들 작품 - 세계적 텍스트 속에서 드러나는지, 말 그대로 어떤 특징들을 가지며, 어떤 방식으로 근대사회, 혹은 근대성을 담아내고 있는가를 상당히 방대한 인용과 참고 문헌들, 문학 뿐만 아니라 음악까지 언급하는 탓에 까다로운 독서를 요구한다. , , , , , , , . 이것들은 그저 오래된 책들로 그치는 것이 아니다. 이것들은 역사적 기념물이다. 근대 서구가 자신의 비밀을 찾아 오랫동안 자세히 파고들어온 성스러운 텍스트이다. (18쪽) 하지만 모레티의 의도..

벤자민 버튼의 시간은 거꾸로 흐른다, F.스콧 피츠제럴드

벤자민 버튼의 시간은 거꾸로 흐른다 F. 스콧 피츠제럴드(지음), 박찬원(옮김), 펭귄클래식코리아 두 번째로 읽은 피츠제럴드의 소설이다. 는 그 명성에 비해 내 감상은 다소 실망스러웠고 내 취향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 당시 미국을 잘 알 수 있는 소설이라는 점에서 풍속소설의 최고봉이라고 할 만하달까. 이 책은 단편집이다. 다들 익히 알다시피, 피츠제럴드는 생계를 위해 단편을 엄청 쓴 소설가였다. 하지만 탁월한 문학성을 가진 단편은 몇 편 되지 않고 그의 명성에 비해 단편집에 대한 평가는 높지 않다. 현대의 단편작가들, 가령 레이몬드 카버나 엘리스 먼로 등과 비교해서도 피츠제럴드의 단편들은 뛰어나지 않다. 아마 이 점은 피츠제럴드는 잡지에 실리는 단편이 가져야 하는 흥미로움에 집중된 상상력, 그리고 20세..

자유 또는 사랑!, 로베르 데스노스

자유 또는 사랑! 로베르 데스노스Robert Desnos(지음), 이주환(옮김), 읻다, 2016 미끈한 뱀의 움직임을 흉내 내면서 사랑이 우리 수중에 들어올 때, 우리는 절망하여, 이어질 것도 생각 않고 다음날들을 남겨두었네 멍청하게도, 성당 앞자리에서 훌쩍거리는 교구 재산관리인처럼 아, 픽션이여, 위안을 주는 네 몸을 꼭 껴안을 만한 제 남성적 정력을 의심하며, 역겨움 느껴가며, 편집증적으로, 확신도 없이, 우리는 녹색 마법 물약을 동물적인 행복감에 젖어들 때까지 들이켰네 지나고 보면 슬픔이란 더욱 좋은 강장제 나무에 피는 접시꽃보다도, 따스한 키니네보다도 우리 모두는 벌거벗은 채, 각자의 플라톤적 지옥에 이르렀다네 기묘한 호랑이에게 살해당한 심장까지를 드러낸 채 괴혈병을 이겨내고, 루이 금화를 씹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