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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날. 맥주. 폴리스.

턴테이블에 폴리스(The Police) 레코드 판을 올려놓고 음악을 들었다. 맥주 두 잔을 마시면서 연신 담배를 피워댔다. 파란 하늘을 향해 담배 연기가 날아갔다. 내 몸을 녹색으로 물들이고 싶었다. 그러면 먼저 혀가 사라질 것이고 눈이 ... 코가... 오직 손 끝만 남아 지나치는 바람이며 해와 달의 움직임을 알게 되겠지. 그녀가 시집이라도 가나.. 오늘 그냥 눈물이 나온다.

역주 이옥 전집

...... 아침도 아름다웠고 저녁도 아름다웠으며, 맑아도 아름답고 흐려도 아름다웠다. 산도 아름다웠고 물도 아름다웠고, 단풍도 아름다웠고 바위도 아름다웠다. 멀리 보이는 풍경이 아름다웠고 가까운 경치도 아름다웠다. 부처도 아름다웠고 스님들도 아름다웠다. 좋은 안주 비록 없어도 막걸리 또한 아름다웠고 어여쁜 창기 없어도 꼴 베는 노래가 아름다웠다. 요약하면, 그윽하여 아름다운 것이 있었고 상쾌하여 아름다운 것이 있었으며, 훤히 트여 아름다운 것이 있었는가 하면 높이 솟구쳐 아름다운 것도 있었다. 담담하여 아름다운 것이 있었고 화려하여 아름다운 것이 있었으며, 그윽하여 아름다운 것이 있었고 적막하여 아름다운 것이 있었다. 어딜 가도 아름답지 않은 것이 없었으며 누구와 함께 해도 아름답지 않은 이가 없었다...

떠도는 그림자들, 파스칼 키나르

『떠도는 그림자들』, 파스칼 키냐르 지음, 송의경 옮김, 문학과지성사, 2003 책을 읽고 글을 쓰는 자의 운명. 그/그녀는 현대에 속하지 않고 고대에 속한다. 그/그녀는 현존하지 않고 오직 그림자로 왔다가 그림자로 사라진다. 침묵 속에 있으면서 수다스럽게 자신의 육체를 숨긴다. 한 곳에 머물러 있으나, 실은 그/그녀는 끊임없이 여행 중이다. 우아한 몸짓으로 시간 속으로. 오래된 시간 속으로. 소설은 이제 스토리도, 플롯도 지니지 못한 채, 소설의 운명, 책의 운명, 독서의 운명에 대해서 이야기하느라 정신이 없다. 죽음의 문턱에서야 비로소 자신의 운명을 목도하게 된 것이다. 고대에 속하는 것들이 가지는 이 때, 이런 책이 읽힌다는 것은 역설적이다. 실은 이 소설은 거짓말이다. 사라지는 것이다. 먼지가 될..

카라바지오의 'David'

David 1600 Oil on canvas, 110 x 91 cm Museo del Prado, Madrid 프라도 미술관에 있는 작품이다. 미술사에 보기 드문 일자무식에 난봉꾼이었던 카라바지오는 살아있는 동안 정당한 평가를 받지 못했다. 그도 그럴 것이 그가 보는 세계는 시대를 너무 앞서서 정직했기 때문이다. 교과서에선 '정직한 삶'이 당연하다고 가르친다. 과연 그럴까? 내가 초등학교 선생들을 싫어하는 이유는 무수하게 많지만, 그들은 거짓말로 가득찬 교과서를 그대로 읽어줄 뿐이라는 데에 있다. 더구나 그들도 정직하게 살아가지 않으면서 아이들에게 그렇게 가르치며 무슨 생각을 하는 걸까. 잠시 딴 소리를 했는데, '정직'의 기준도 시대마다 다르다고 말하는 편이 살아가는 데에 문제를 좀 덜 일으키고 편할 ..

사쿠라가 지다 젊음이 지다

"제 2차 세계 대전의 막바지에 전쟁터로 내보내진 특공대원의 지적 세계에 대해서 말하자면, 그들의 세계관은 중국의 지적 전통, 그리스-로마의 고전, 기독교, 마르크스주의 그리고 낭만주의와의 교류에 의해 형성된 것이었다. 다시 말하면 내셔널리즘과 애국심이라는 것은 대외적 교류가 없는 배타적인 국민에 의해 산출된 것이라는 이미지와는 전혀 반대로, 세계와 지역의 활기에 넘치는 교류의 산물, 코스모폴리터니즘인 것이다."(16쪽) 최근 책을 사지 않다가 날 강력하게 끓어당긴 책이 오오누키 에미코의 이다. 그는 미적 상징(사쿠라꽃)과 일본의 군국주의에 대해서 탐구한다. 내가 좋아하는 주제다. 사람들은 미 의식과 정치를 무관하게 생각하려고 하지만, 정치의 입장에서 보자면 '미 의식'만큼 흥미로운 수단도 없다. 미적인..

글쎄. 가끔은,

글쎄. 가끔은, 글쎄, 하루에 한 번 정도는 그녀 생각을 하는 거 같애. 글쎄, 하루에 두 번 이상이 될 때도 있고, 글쎄, 술에 취하면 계속 그녀만 생각하기도 하는 것같애. 글쎄, 가끔은. 글쎄. 가끔은, 글쎄, 과연 그게 옳은 걸까, 아니 그게 좋은 걸까, 아니, 글쎄, 그녀는 내 생각을 할까, 하는 그런 생각을 하곤 해, 글쎄, 가끔은, ... 내 삶이 내 뜻 대로 다 이루어졌다면, 글쎄, 가끔은, 그랬다면 어땠을까 하고는 해보지만, 글쎄, 그래서 술 마시는 걸까, 글쎄, 가끔은..

열정의 시대

나는 내 죽음과 마주 서서 고독했다. 말할 수 없이 고독했다. 그리고 이 죽음은 생명의 상실 외에 아무 것도 아니었다. 눈으로 볼 수 있는 세상이 무서운 속도로, 그리고 음울하기는 커녕 오히려 눈부실 정도로 빛나는 환영의 혼란 속으로 내게서 빠져나가는 것같았다. 그럴 수가 있단 말인가? 그러면 나는 이 세상을 이다지도 사랑했더란 말인가? 하고 나는 생각했다. 이 아침, 그 저녁, 저 길들을? 변화무쌍하고 신비로운 저 길들을, 사람의 발자취가 가득히 새겨진 저 길들을, 도대체 나는 길들을, 우리 길들을, 세상을 기들을 이다지도 사랑했더란 말인가? - 조르주 베르나노스, 중에서. 베르나노스의 소설을 뒤진다. 뒤적. 뒤적. 오후에 집에 기어들어와 밥을 먹고 뒹굴거렸다. 잠시 일을 하기도 했지만, 오래 가지 못..

과학의 사회적 사용, 부르디외

과학의 사회적 사용 - 피에르 부르디외 지음, 조흥식 옮김/창비(창작과비평사) 삐(피)에르 부르디외(지음), 조홍식(옮김), , 창작과비평사, 2002 부르디외의 다소 이해하기 어려웠던 단어 ‘장’(場, champ)에 대해 이해를 도와준 책이다. 역자도 언급하듯이 ‘이 책의 가장 커다란 장점은 체계적이지만 복잡하고, 논리적이지만 동시에 무척이나 개념적인 부르디외의 이론들을 비교적 쉽게 이해할 수 있게 해준다는 점이다.’ 20세기 후반 가장 중요한 사회학자들 중 한 명으로 평가받고 있는 부르디외는 한국에서도 이미 익숙한 학자다. 많은 책이 번역되어 나왔고 데리다나 들뢰즈와는 다른 매우 실천적인 학자로 알려져 있기도 하다. 더구나 데리다의, 문학적이긴 하나 아리송한 단어들이나 들뢰즈의 이해하기 힘든 개념어들..

일요일 오후

혼자 뒹굴뒹굴거리는 것에 익숙해지는 것은 시간과는 무관한 모양이다. 세월이 지나면 익숙해질 줄 알았더니, 그렇지 못한 것이... 이런 일요일 오후엔 도대체 뭘 하면 좋을까. 새벽까지 책을 읽는 바람에 정오가 다 되어서야 일어났다. 오랫만에 요리를 해서 먹을 생각에 근처 시장에 가 봄나물과 김치찌게를 위해 두부와 버섯을 사왔다. 가는 내내 봄 햇살인지 늦겨울 햇살인지 구분되지 않는 빛 알갱이들이 퍼석퍼석 썩어가는 내 얼굴에 와닿아 부서졌다. 잠시 바람이 불었지만, 내가 아는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시장 안을 걸어가는 젊은 여자의 엉덩이를 한참 쳐다보았다. 엉덩이만 보면 아줌마인지 처녀인지 구분할 수 있다던데, 도통 모르겠다. 집에 들어와 이름 모를 봄나물을 간장과 고추가루가 주축이 된 양념장에 버물려 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