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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년에 대하여

개인적으로 무척 힘든 한 해였다. 처음으로 내 인생이 그렇게 평탄한 인생이 아니라는 생각을 하기 시작했다. 날 아프게 했던 이들만큼 나도 누군가를 아프게 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으며, 그 순간 무디어진 내 얼굴을 떠올렸다. 먼 허공을 보면서 무덤덤한 표정을 짓는 것. 그것은 눈 앞에 있는 어떤 것도 응시하지 않으려는 의지의 표현이면서 회피이며 외면이다. 그것은 모르기 때문이 아니라 알기 때문이며 알면서 이미 절망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용기의 반복, 혹은 행동의 반복이 끊임없는 절망의 반복으로 이어진다는 생각 때문이다. 실크로드를 따라가다 보면 사막 한 가운데 폐허가 되어버린 오래된 성을 보게 된다. 사람들은 그 성에 살던 사람들이 사막으로 변해가는 지역을 버리고 딴 곳으로 갔으리라 추측하겠지만, 아마..

그리스 아르카익 미술

Bell-krater (bowl for mixing wine and water) ,ca. 440 B.C.; Red-figure Attributed to the Persephone Painter Greek, Attic Terracotta; H. 16 1/8 in. (41 cm) Fletcher Fund, 1928 (28.57.23) (위 도판은 크라테르로 암포라와는 다른 것입니다. 이에 본 포스팅을 다시 업데이트해서 수정하겠습니다. ) 대체로 그리스 고전주의 시대를 기원전 5~4 세기 정도로 본다. 하지만 이는 대체로 그 정도라는 것일 뿐, 이 시기에 만들어진 모든 작품들이 그리스 고전주의로 포함되는 것은 아니다. 위의 토기를 적생상 암포라라고 한다. 확실히 섬세해졌지만, 암포라는 아르카익(고졸 시대)에 ..

큐피드

Cupid PARMIGIANINO, 1523-24 Oil on wood, 135 x 65,3 cm Kunsthistorisches Museum, Vienna (비엔나 미술사 박물관) 날개 너무 작은가. 하긴 날면 되는 거지. 몸에 비해 날개가 작은 것처럼 보여도, 난 잘 날 거든. 활을 좀 다듬고 있어. 요즘같이 사랑이 희박한 시기엔 내 활이 무리를 하기 마련이야. 그래도 어쩌겠어. 나의 운명인 걸. 하지만 내 운명도 그렇게 오래 가지 못할 것같아. 천사에게만 희귀하게 걸리는 날개가 짧아지는 병에 걸렸거든. 실은 내가 사랑을 받지 못한 탓이라더군. 하긴 날 사랑하는 이는 없으니 말이야. 나도 사랑을 하고 싶은데 말이야. 인간들의 사랑을 위해 내 화살을 사용하지 않고 내 사랑을 위해 내 화살이 날아가는 모..

며칠 동안

며칠 동안 미술사 책만 봤다. 4-5 년 전 공부 한참 할 때, 정리해놓았던 노트를 새로 꺼내어 보는데, 역시 예술사는 어렵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최근에 그리스 예술을 정리했는데, 그리스 예술을 이해하기 위해선 고전주의와 낭만주의에 대한 개념을 먼저 파악해야 한다. 그러나 그리스 고전주의를 이해하려면 그것 뿐만 아니라 파르메니데스와 피타고라스를 알아야하고 헤라클레이토스와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를 알고 있어야 한다. 그리고 서사 문학의 대표작들도 읽어봐야되고 기초적인 건축 지식도 있어야 한다. 그리고 무수히 등장하는 예술가들이 어떤 양식을 보여주었는가에 대해서 이해하고 있어야 하며 그것이 후대에 어떤 식으로 반영되는가에 대해서도 알아야 한다. 그리고 그리스 역사에 대해서 알아야 한다. 하지만 이런 식으로..

로마 예술

Philippus Arabus c244-249 AD (Vatican Museums) 어딘가를 응시하고 있는 듯한 저 두 눈에 가득담긴 두려움의 흔적을 발견하기란 그렇게 어렵지 않다. 거친 턱에서 보여지는 그 동안의 삶의 고통은 아직 사라지지 않았고 ... 실제 작품은 이 그림자진 이미지보다 약간은 동정심을 불러일으키며 약간은 슬퍼보인다. 이 때 로마는 변방에 온 군인 황제들이 몇 년간 통치하다가 암살당하던 시기였다. 천천히 이민족의 침입이 늘어나고 있었고. 종종 역사학자들은 현대와 로마를 비교하곤 한다. 국가의 행정 시스템이 우수하였으며 사회 기반 시설은 그 당시에서 세계 최고였지만 말이다. 하지만 이미 시민의 삶 속에서는 허무주의가 깊숙하게 물들고 있었다. 폼페이의 어느 집 벽에 그려진 그림이다. 매너..

크리스마스 이브

몇 달 전 턴테이블이 두 개 있을 때의 지저분한 내 방의 일부 어제 방 청소를 했다. 방청소라고 해 봤자 특별한 것도 없다. 이리저리 널린 책과 음반을 한 곳으로 모아놓고 방바닥을 한 번 쓸고 한 번 닦는 것이 전부다. 하지만 이것도 두 시간이 걸리니, 방 위에 놓인 게 책과 음반뿐만 아니라 몇 달 동안 쌓인 잡동사니까지 있기 때문이다. 이번 주가 크리스마스가 있다는 사실을 며칠 전 TV 뉴스를 보고 알았다. 시간 감각이 없어진 탓이다. 하긴 크리스마스야, 아이들 세상이니 아주 어정쩡하게 끼인 나이에 크리스마스에 대한 감흥 따위를 기대한다면 그건 무리다. 방에 앉아 척 멘지오니의 산체스의 아이들과 케니 드류의 피아노, 벨앤세바스티안의 초기 앨범을 오가며 듣다가, 아예 작정을 하고 꺼낸 것이 베트벤 교향곡..

그리스 조각에 대하여

-프락시텔레스, (기원전 4세기 경) 그리스의 남겨진 유적들을 보면 사람, 특히 벗은 육체를 표현한 작품들이 많습니다. 여기에 대해서 의문을 가질 것입니다. 그렇다면 과연 그 이유는 무엇일까요. 여기에 대해 그리스 고전주의에 대한 최초의, 그리고 아직까지도 그 서술의 힘이 퇴색되지 않고 있는 요한 요하임 빈켈만의 설명을 들어보세요. 그러면 이해하기 쉬울 것입니다. 아마 우리들 가운데 가장 아름다운 육체를 가진 사람이라 할지라도 가장 아름다운 그리스인의 육체와 비교해보면 아마도 이피클레스가 그의 이복형 헤라클레스를 닮은 것만큼도 닮지 않았을 것이다. 온화하고 청명한 기후는 그리스인의 최초의 인간 형성에 좋은 영향을 미쳤음에 틀림없다. 그러나 유년 시절부터 행하는 육체적 단련이 이 형성에 기품 있는 형태를 ..

발레리 산문선, 폴 발레리

발레리 산문선 폴 발레리 지음, 박은수 옮김, 인폴리오. 솔직히 이 책에 대해 소개하라며 한 시간의 시간을 준다면, 혹은 원고지 30매를 채우라고 요구한다면, 아마 나는 한 시간 내내 책의 일부분을 읽어가거나, 책의 일부분을 그대로 옮겨 적을 것이다. 아마 몇몇 이들에게 이 책은 수다스럽고 장황하며 뜻모를 말만 나열하는 책이겠지만, 몇몇 이들에게는 그야말로 기가 막히고 아름다우며 읽어가는 도중, 아! 아! 라는 감탄사를 연발하게 되는 책들 중의 한 권일 것이기 때문이다. 의 한 구절을 옮긴다. 나르시스를 사모하는 한 님프의 대사다. 가엾게도 ... 내 자매들아, 죽다니? ... 우리는 죽지 않는 여신들, 부질없게도, 부질없게도 죽지도 않고 아름답기만 하니; 우리에게는 사랑도 없고 죽음도 없구나 욕망도 괴..

Young Woman in a White Hat, 그뢰즈

Young Woman in a White Hat about 1780 Oil on canvas 22 3/8 x 18 1/4 in. (46.8 x 46.5 cm) 전형적인 로코코 양식의 작품이다. 화사하고 부드러운 색채와 저 여인의 양볼을 감싸고 도는 붉은 빛은 로코코 시대가 가졌던 풍요로움과 우울함을 동시에 드러내는 듯 하다. 매력적이다. ------ 그뢰즈의 작품이다. 그뢰즈는 18세기 계몽주의를 대변하는 화가들 중의 한 명이다. 하지만 그도 로코코의 그늘을 벗어난 것은 아니다. 18세기의 시대는 로코코(몰락해가는 귀족들의 세계가 중심인), 계몽주의(상승하는 부르조아지와 지식들의 사상, 그리고 중상주의(자본주의))로 이루어져 있으며, 그뢰즈는 보기 드물게 이 둘을 동시에 가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