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체 글 2762

깨어나라고 인어는 노래한다, 호시노 도모유키

깨어나라고 인어는 노래한다 호시노 도모유키 지음, 김옥희 옮김, 문학과지성사, 2002 전기가 흐르고 있는 듯한 밤이었다. 하늘 높이 매달려 있는 달은 거대한 백열전구가 되어 붉은 흙이 드러나 보이는 고원과 억새 들판을 빙하색으로 비추고 있었다. 개구리를 대신해 울기 시작한 가을 벌레가 지지직 하고 전자파를 보내, 나를 사로잡아 마음대로 조종하려 한다. 군청색의 투명한 대기를 뚫고 서늘한 공기가 섞인 바람이 살랑살랑 불어대 백금색으로 빛나는 억새 이삭을 흔들어, 밀려오는 파도와도 흡사한 소리를 끊임없이 내고 있다. - 7쪽 미쓰오가 지금 빨고 있는 내 가슴도 오랫동안 냉장고에 넣어둔 과일처럼 생기를 잃어버렸다. 하지만 미쓰오는 눈치채지 못한다. 나는 화가 나, 좀더 나를 물체처럼 다루어달라고 낮은 목소리..

슬픔의 아테나

BC 455∼450 아테네 출토 아테네 아크로폴리스 미술관 (Acropolis Museum, Athens) Grand Collection of World Art 고전주의, 그러니까 인생에 있어 모든 것을 해명할 수 있고 모든 것이 가능하다고 믿으며 그 모든 것들이 하나의 원리, 원칙에 의해서 움직인다고 믿었던 삶과 예술에 대한 태도는 결국에는 우울함을 띄게 되는 것같다. 그리스 고전기의 작품이지만, 다른 고전주의적 작품들과 달리 이 부조에서는 어떤 우울함이 묻어나온다. 그것은 사랑하는 이를 떠나보냄, 전투에서 벗의 죽음, 시간의 덧없음, 그러니깐 본질적으로 모든 것은 변하고 흔적없이 사라진다는 것을 보여주는 듯하다. 실은 그리스 문화의 이면에는 이런 것이 내재해 있었다. 헤라클레이토스의 세계관이 주류였으..

바다와 나비, 김기림

바다와 나비 아모도 그에게 수심(水深)을 일러 준 일이 없기에 흰나비는 도모지 바다가 무섭지 않다. 청(靑)무우밭인가 해서 나려 갔다가는 어린 날개가 물결에 저러서 공주처럼 지처서 도라온다. 삼월달 바다가 꽃이 피지 않어서 서거푼 나비 허리에 새파란 초생달이 시리다. 김기림 시집이 있었다. 가끔 꺼내 읽었는데, 누군가에게 빌려주고는 돌려받지 못했다. 그리고 빌려준 그 이는 먼 유럽으로 유학을 떠나버렸다. 한 밤 중에 바다와 나비라는 시를 작은 소리로 읽어본다.

민주화 이후의 민주주의, 최장집

민주화 이후의 민주주의 최장집 지음, 후마니타스 주로 읽는 책이 문학, 철학, 예술 중심이라, 이 책은 무척 생소한 종류다. 가끔 읽는 비즈니스 실용서들도 있지만 주로 맥킨지나 부즈앨런해밀턴에서 나오는 리포트들이 많다. 어차피 비즈니스야, 실제 기업의 적용 사례가 중요한 것이니, 원론적인 책 두 세권 읽고 난 다음부터는 case study가 핵심이다. 하지만 정치 서적은 생소하다. 그만큼 정치는 꼴도 보기 싫은 종류의 것이고 술자리에 자주 등장하기는 하지만 싸움의 발단이 되기 십상이다. 그러나 이 책은 일독을 권한다. 꼴 보기 싫다고 해서 투표를 안 할 수도 없는 노릇이고 이 나라를 떠나서 영영 돌아오지 않을 계획도 세우지 않은 바에는 이 책을 읽어 현재 한국 사회에 대한 이해를 갖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

무관심의 절정, 장 보드리야르

무관심의 절정 - 장 보드리야르 지음, 이은민 옮김/동문선 무관심의 절정 장 보드리야르/필리프 프티와의 대담, 이은민 옮김, 동문선 현대신서 80 영화 의 주연 배우인 키아누 리버스는 장 보드리야르의 을 읽고 충격적이었다고 말했다. 이 책의 국내 광고에서 본 것이긴 하지만, 보드리야르가 충격적이라는 것은, 내가 보기엔 그의 사상은 기존 관념이나 세계관을 극복하기 위한 체계적인 사상이라기 보다는 자신의 스타성을 계속 유지하기 위한 과격한 논리로 밀어붙이기 때문이라 생각된다. 문제는 진지함과 성실함이 미덕으로 간주되어야 할 학문의 세계 속에서도 갈수록 말장난만 심해지는 이 사상가에 대한 관심이 줄어들지 않고 있다는 데에 있다. 그의 말장난은 언뜻 보기엔 뭔가 대단해 보이는 사상을 이야기하고 있는 듯 하여 아..

예술의 끝 - 라이너 쿤체

예술의 끝 넌 그럼 안 돼, 라고 부엉이가 뇌조한테 말했다. 넌 태양을 노래하면 안 돼. 태양은 중요하지 않아. 뇌조는 태양을 자신의 詩에서 빼어버렸다. 넌 이제야 예술가로구나 라고 부엉이는 뇌조에게 말했다. 그러자 아름답게 캄캄해졌다. * 라이너 쿤체(Reiner Kunze) (* 전영애 옮김, 열음사, 1989) ‘아름답게 캄캄해졌다’는 표현은 참 좋다. 독일어로는 ‘Und es war schon finster’이다. 지금은 구할 수도 없는 이 번역시집은 내가 대학 가기도 전에 출판되어, 내가 이 시집을 알게 되었던 90년대 중반 무렵에 벌써 희귀시집이 되어버린 상태였다. 가끔 지방의 도시에 내려갈 일이 있으면 그 곳의 작은 서점에 들려 오래된 책 찾는 게 정해진 일처럼 되어버렸다. 위 시를 어떻게 ..

월요일 오전

자기 전에 적었던 글을 올리고 필요한 자료들을 인터넷으로 검색해 프린트하다 보니 오전이 다 갔다. 10시가 되기 전에 일어났으나, 금방 세 시간이 흘러가버렸으니, 할 말이 없다. 갑자기 우울해진다. 늘 우울한 인생이라, 우울해진다고 해서 달라질 건 없으니. 꽤 괜찮은 노래를 들었다. 집에 있는 어느 시디에서 옮긴다. 종종 이런 일이 있다. 사놓고 한 번 들었으나 무심결에 들어 기억 조차 못하는. Loves, Secrets Lies, Peter Cincotti.

중국, 이것이 중국이다, 이인호

中國 - 이인호 지음/아이필드 중국, 이것이 중국이다 이인호 지음, 아이필드 “그만큼 중국인들이 힘들게 살아왔기 때문입니다.” - 530쪽 칠백 페이지가 넘는 이 책을 읽으라고 한다면 다들 고개를 흔들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하지만 가깝지만 일본보다 더 모르는 중국을 이해하기 위해 이런저런 책 몇 권을 읽는 것보다 이 책 한 권 정도면 충분하다. 그만큼 다양한 중국의 모습을 담으려고 노력하였으며 실제 중국에서 공부를 하고 있는 학생의 이야기나 배낭여행기 등 일반인이 쉽게 읽을 수 있도록 배려한 흔적이 역력하다. 이 책을 통해서 본 중국은 지극히 현실적이다. 그러니깐 “착하게 살아서 천당 간다”의 태도가 매우 약하다. 중국의 창조 신화를 보면 확실히 알 수 있는데, 우주의 창조자인 반고가 죽어 그의 육체가..

근황

요즘은 주로 클래식 음악만 듣는다. 베르디의 오페라는 너무 좋다. 요즘은 보라매 공원에 있는, 낡은 건물의 도서관에 간다. 요즘은 저금통에서 동전들을 잔뜩 꺼내어 소비한다. 도서관 출입비 삼백원. 자판기 커피값 이백오십원. 동전으로 인생을 가리고 이틀이나 사흘에 한 번씩 면도를 한다. 면도할 때마다 인생 모양으로 턱 수염이 난 것에 경악한다. 요즘은 책만 읽는다. 허먼 멀빌의 모비딕을 읽고 뽈 발레리의 산문을 읽는다. 요즘은 그림책을 많이 본다. 요즘은 인터넷을 통해 영어로 된 글을 읽는다. 요즘은 핸드폰을 잘 받지 않을 뿐더러 아예 꺼놓기까지 한다. 요즘은 하늘 볼 일도 땅 볼 일도 없이 뿌옇게 변해가는 거리만 본다. 거리 속에서 추악한 모습들을 한 영혼들을 피해다닌다. 요즘은 가슴이 텅 비었다는 생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