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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가는 것

힘들다, 힘들다라는 말을 많이 하게 되지만, 요즘만큼 힘든 시기도 드문 것같다. 이유가 뭘까 곰곰히 생각해보게 된다. 나에게 어울리는 일이 있고 어울리지 않는 일이 있는데, 난 지금 나에게 어울리지 않는 일을 하고 있는 것같다. 그래서 그랬던 것일까. 때때로 많은 말보다 침묵이 좋을 때가 있는데. 난 아직 침묵을 배우지 못했나 보다. 힘들더라도 잘 참고 견뎌야지. 그래서 그 긴 터널을 지나가야지

SOMETHIN` ELSE

SOMETHIN` ELSE 캐넌볼 애덜리 팬들은 싫어하는 앨범. 너무 마일즈 데이비스적이라고. 하지만 내가 아끼는 앨범들 중의 하나다. 그리고 Blue Note 레이블 Best 10 안에 들어갈 정도로 유명하고 완성도 높은 재즈 앨범이다. 그리고 날 재즈의 세계로 빠지게 한 음악이 들어있는 앨범이기도 하다. * * 오늘 아침, 눈을 뜰 수가 없었다. 내 방에 가득한 지친 어둠이 내 몸을 무겁게 누르고 있었고 바람은 없었고 싱그럽고 활기찬 아침은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았다. 어제 밤, 머리를 다듬었는데, 그 탓일까. 내 피곤과 열망을 동시에 가지고 있는 머리칼들이 강남 어느 오피스텔 일층에 위치한, 저녁이면 출근길을 서두르는 여자아이들로 북적이는 그 미용실 바닥으로 내려앉았기 때문일까. 사무실에 앉아, 왜 ..

스토리텔링

건너편 창으로 라마다 르네상스 호텔이 보인다. 밤이면 술에 취한 40대 쯤으로 보이는 사내의 팔짱을 끼고 씩씩한 걸음으로 들어가는 젊고 산뜻한 피부를 가진 여자 아이와 만날 수 있다. 그 여자의 이름은 'Feel'이다. 내가 그녀를 'Feel'이라고 부르는 이유는 아주 간단하다. 아마 이 글을 읽는 몇 명은 그 이유를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왜냐면 그녀에게 "필이 꽂혔기" 때문이다. 요즘 난 퇴근도 하지 않고 억지로 야근을 해대며 11시 쯤 사무실을 나가 라마다 르네상스 앞을 서성거린다. 이런 미친 짓을 한 지도 벌써 15일째다. 뭐, 미친 세상이니, 미친 짓을 한다고 해서 악한 행위는 아니다. 차라리 성스러운 행위에 가깝지 않을까. Feel이 꽂혀 나의 정신을 잃어버렸으니. 그리고 20일째 되는 날,..

엥시당, 혹은 Incidents

이베리아 항공사 여직원은 웃지 않았다. 그녀는 단호한 목소리에 진하면서도 무미건조한 화장을 하고 있었으며, 핏빛같이 붉게 칠한 아주 긴 손톱을 갖고 있었다 - 오랜 습관이 되어 버린 강압적인 제스처로 길다란 항공권들을 만지고, 접는 그녀의 손톱들 ... .... - 롤랑 바르트, 오래전 모로코에서. 점심시간, 나가지 않고 남아 모짜르트를 듣고 있다. 어젠 새벽에 집에 들어갔는데, 오늘까지 피로가 풀리지 않는 듯한 느낌이다. 집중력이 떨어지고 삶이 힘에 부치는 오후가 시작되고 있다. 길을 걷거나 차장을 쳐다보거나 어두운 지하 속에 통과할 때나, 롤랑 바르트의 새로 나온 책을 읽는다. 이 사람도 여러 사람들처럼 차에 치여죽었다. 차에 치여죽음. 참 극적이면서도 너무 흔해 빠진 일이라 선뜻 권하고 싶은 죽음의..

Grim

Grim... 독일의 어느 학자 형제의 이름이 아닌가. 아니면 그냥 그림(畵)를 뜻하는 것일까. 찾아보니 그림동화책을 만든 그들의 이름은 Grimm이다. 대학로에 있는 술집이름인데, 이 곳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던 친구가 오랫만에 마음에 드는 여자로 등장했다. 술에 취해 쓰러져가면서 바라보는 풍경은 늘 아름답다고 생각했는데, 그 때 등장하는 인물은 늘 새로웠다. 하지만 이 새로움은 술 기운과 함께 몸 속에서 사라져간다. 어제 다시 그 곳을 들렸는데, 그 친구는 자리에 없었다. 옆에 앉아 있던 L양이 이 곳의 컬렉션은 정말 형편없다며 투덜댄다. 앞에 있는 C양과 C군은 계속 싸운다. 아마 앞으로도 계속 싸울 것이다. 어느 모임 게시판에 올라온 Michel Petrucciani Trio의 음악을 듣고 있는데 무..

벌거벗은 내 마음, 샤를 보들레르

벌거벗은 내 마음 - 샤를 보들레르/문학과지성사 , 샤를 보들레르 이건수 옮김, 문학과 지성사 종종 살아간다는 것에 대한 의미를 구한다. 이럴 때는 우리 인생이 우리 뜻대로 되지 않고 모순으로 가득차있다고 느껴질 때가 대부분이다. 사랑하는 아내의 키스를 받고 나선 사내의 트럭이 얼마 가지 못한 채 갑자기 튀어나온 자동차나 사람과 부딪히거나 몇 년 동안 준비해온 사업이 사소한 법률 조항 하나 때문이거나 어떤 이의 꾐에 의해 모든 걸 날려버리게 될 때 우리는 살아간다는 것에 대한 의미를 구하기 마련이다. 과연 살아간다는 건 무엇일까. 이런 물음에 이 책은 현명한 답을 주지 못한다. 예술은 무엇인가, 문학은 무엇이고 사랑은 무엇인가 따위의 물음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고작 이 책의 저자는, “세상은 오해에 의..

르네상스의 빛과 어둠

왜 굳이 르네상스로 가야하는 거지? 차라리 고딕의 세계가 낫지 않을까. 새로운 사랑을 찾아 모험을 나서, 끝없는 절망과 슬픔 속을 헤매는 것보다 그냥 포기하고 조용히 슬픔을 씹으면서 사는 것이 낫지 않을까. 모든 것들이 뒤죽박죽일 때, 굳이 우리는 그것들을 질서정연한 모습을 만들어야하는 것일까. 이라크의 어린이들이 죽어가는 모습을 보면서 우리에게 이성이 있고 용기가 있는 말은 허위이며 거짓말이라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는 것일까. 아니면 시위 한 번 참가했다면서 그것을 위안하는 것일까. 르네상스는 하나는 이전 세계를 동경하는 이들과 하나는 이전 세계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이들이 공존하던 세계였다. 이탈리아의 몇몇 도시들이 후자에 속했고 유럽 대부분의 지방은 전자에 속했다. 15세기를 풍미했던(이탈리아 르네상스..

아비정전

아비정전을 무척 좋아했고 지금도 좋아한다. 꽤 오래 전에 디자인을 전공하던, 나보다 세 살 많은 여자에게 프로포즈를 한 적이 있었다. 그 때 꿈에서 만나자를 이용했지만, 특별하지 않았나 보다. 따지고 보면 난 그렇게 심각하지 않았다. 그냥 한 번 그런 걸 하고 싶었을 뿐이다. 이집트의 벽화를 보면 얼굴은 옆모습을 그려져 있으면서 몸은 정면을 향하고 있는데, 이를 '정면성의 법칙'이라고 한다. 이러한 정면성의 법칙은 권위에 대한 인정이라는 함축적 의미를 지닌다. 주인공들의 대사는 운문으로 처리되던 근대 초기의 희곡도 정면성의 법칙을 따르고 있는 셈이다. 사랑하는 여자 앞에서 말을 머뭇거리고 등에서 땀을 흘리는 것도 이러한 정면성의 법칙이다. 그 때를 생각해보면 난 정면성의 법칙 속에 있지 않았다.(정면성의..

달의 그리움

오늘 햇살이 좋았다. 근처 공원엔 들뜬 사람들로 가득했다. 피곤한 인생에 여기저기 주름이 잡히고 때가 묻은 양복을 세탁소에 맡기고 오면서 잠시 하늘을 쳐다보았다. 하늘은 파랬다. 내가 아주 오래전 태어났을 때에도 저 빛깔이었을 게다. 내 방에 앉아 그리그(Edvard Grieg)의 페르귄트(Peer Gynt)를 들었고 무소르그스키(Mussorgsky)의 가곡을 들었다. The Nursery, Sunless, Songs and Dances of Death를. 보들레르의 을 읽었다. 이 글을 읽을 사람을 위해 한 구절을 인용해본다. '모든 인간의 내부에는 언제나 두 가지 갈망이 있는데, 하나는 신을 향한 것, 다른 하나는 악마를 향한 것이다. 신 또는 정신적인 것에의 기원은 상승하려는 욕망이요, 악마 또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