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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에게

참 오랫만이군요. 언제였던가요. 제가 K씨에게 편지를 보낸 것이, 꽤 오래 전 제가 환기미술관 근처에서 살 때였지요. 그 때 컴퓨터로 쓰고 그 편지를 프린트해서 빨간 수성펜으로 수정하고 다시 쓰고, 그걸 PC 통신 게시판에 올렸습니다. 그런데 그 사이 무슨 일이 생긴 것일까요. 글을 써서 그걸 프린트해 수정하는 일은 거의 없어졌습니다. 일 년에 몇 번 일이 되어버렸습니다. 그런 일은 종종 사무실에서 벌어지죠. 잔뜩 작성해놓은 프리젠테이션 문서를 프린트해서 수정하는. 어느 새 밤은 내리고 거리는 불빛과 허무로 가득찹니다. 창 건너편으로 라마다르네상스 호텔이 보이고 그 새 제 나이는 서른 하나가 되었군요. 환기미술관 근처에 가지 않은 것도 벌써 이 년이 지났습니다. 그 사이 미술관에 간 것이라곤 5번도 채 ..

이상한 과일

김진묵이 쓴 재즈 에세이 제목이다. 아직 사지 않았지만, 난 그의 글을 좋아한다. 중앙대 음대를 나왔으니, 학교 선배이기도 하다. 그는 경기도 어디 외딴 곳에서 혼자 산다. 결혼을 했는지 하지 않았는지는 모르겠다. 그런데 외딴 곳에서 산다는 것만으로도 낭만적이다. 사무실에 늦게 남아 일을 하고 있다. 올해 초 누군가가 나에게 점쟁이를 만나보는 것이 어떻겠냐고 했을 때, 올해 내 운세가 가히 좋지는 않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 예상대로 좋지 않은 듯하다. 이런 삶이 되리라곤 생각치 못했다. 최근 한 달은 지옥이었다. 그 사이 즐거운 추억도 있긴 했지만, 그 추억으로 빠져들기엔 내 인생은 너무 슬픈 빛깔로 채색되어 있었다. 오래 전부터 오디오에 대한 관심은 있었지만, 쉽게 빠져들지는 못했다. 그런데 요..

오디오에 미쳐가는 나

요즘 msn 닉으로 사용하고 있는 단어. "오디오에 미쳐 가는 나". ************** 사무실에 나와보니, 썰렁하다. 토요 휴무라 많은 사람들이 나오지 않았다. 지하철 객차 안에서 "상징주의"라는 책을 읽었다. "예술이 인생을 모방하는 것이 아니라 인생이 예술을 모방한다." "나는 타고난 천재성을 삶 속에 전부 쏟아부었고, 작품에는 단순한 재주만 부렸을 뿐이다." 오후에 서점에 들려 오스카 와일드(* 한길 로로로)를 사야겠다. 19세기의 극단적인 탐미주의적 세계 속으로. ************** 어제 신천 거리를 걷다 우연히 들어간 레코드 샵에서 몇 개의 시디를 구했다. Candid 레이블에서 나온 재즈 시리즈인데, 어떻게 된 건지, 국내에선 리스트에 올라와있지도 않는 레이블이다. 첨부한 사진..

무더운 봄날의 연속

그동안 사용하던 Technics SL-D3 Turntable을 팔려고 실용오디오(www.enjoyaudio.co.kr)의 장터에 내놓았으나, 반응이 없다. 구입은 20만원 넘게 주고 산 판돌이인데, 12만원으로 팔리지 않는다. 가격을 다시 내려야할 것같다. 어젠 납땜 인두를 구입했다. 사용하고 있는 Dual 턴테이블의 접지가 떨어져 납땜을 하기 위해. 그러나 처음 해보는 납땜은 왜 이렇게 어려운 건지. 내 인생을 붙이는 기분이 들었다. 몇 주동안 정신적으로는 아노미 상태에, 사무실에선 일로, 육체적으론 .. 견딜 수 없는 피로로. 미쳐가고 있다. 어느 순간 보니, 올해 안으로 결혼을 해야하는 상황이 되어버렸다. 한동안 부모님의 성화를 이겨내는 것쯤이야 생각했지만, 그러지 못하는 나를 발견했다. 그게 얼마..

로마의 테라스, 파스칼 키냐르

로마의 테라스 파스칼 키냐르 지음, 송의경 옮김, 문학과 지성사 '은밀한 생' 이후 읽는 키냐르의 두 번째 소설이다. 전체가 거의 다 하얗게 보이는 드라이포인트. 빛에 잠식된 난간의 받침살들 뒤로 한 형상이 보인다. 나이 든 남자의 모습이다. 지그시 감은 두 눈, 흰 턱수염, 다리 사이에 들어가 있는 손, 테라스 위, 로마, 황혼녘, 하루 중 제 3의 시간, 저무는 태양의 황금빛 광휘에 휩싸여, 그는 자유로움과 살아있다는 행복에 흠뻑 취해 있다. 포도주의 몽상 사이에. (78쪽) 기대한 만큼 감동적이지 않고 프랑스 내에서 화제가 되었다는 점이 의아스럽기까지 하다. 역자의 말에 따르면 그가 바로크 시대를 염두에 두고 이 소설을 썼다고 하지만, 그의 소설은 전혀 바로크적이지 않다. 극중 주인공의 판화 속에서..

꿈의 노벨레, 아르투어 슈니틀러

꿈의 노벨레 아르투어 슈니틀러, 자유출판사 “내 생각에는 우리가 그 모든 모험에서 무사히 벗어날 수 있게 한 - 실제와 그리고 꿈 속의 모험에서 - 운명에 감사해야 될 것 같아요.” 라고 알베르티네는 말하지만, 그로부터 100여년이 지난 지금, 알베르티네나 프리돌린 같은 인물은 존재하지 않는다. 라는 SF영화를 만들고 있는 워쇼츠키 형제가 키아누 리버스라는 배우에게 장 보드리야르의 을 읽게 했다는 사실은 이 소설 속의 주인공이 경험하게 되는 모험이나 꿈에 대해 우리가 갖게 되는 태도의 변화를 알 수 있게 해준다. 슈니틀러의 매혹적인 문장 속에서 세기말의 사랑과 성에 대한 이중적 태도는 이 평범한 부부의 삶 속에서 고스란히 드러난다. 알베르티네가 낯선 남자에게서 느끼는 성적인 매혹과 프리돌린이 벌이는 흥미..

상징주의와 아르누보

상징주의와 아르누보 창해 ABC북 ‘상징주의 미학은 이상주의를 맹렬하게 주장하면서 구체적으로 나타났다. 따라서 현실세계를 초월하기 위해 암시, 모호함, 신비, 내성(內省) 등을 중시하는 표현 양식을 추구하였다.’ 우리는 이 한 단락만으로 이들 예술 양식이 가진 비극적 세계를 알아차릴 수 있다. 이들 양식 속에서 염세주의는 필연적으로 수반되고 비극적 사랑에 대한 추구는 뽈 베르렌느와 랭보에게서 그 한 예를 찾아볼 수 있다. 페르난트 크노프의 어둡고 우울한 색조의 작품들이나 말라르메의 모호하고 암시적이며 함축적인 언어들은 여기에서 실망한 이의 저기를 향한 염원을 담고 있다. “상징주의 시대가 도래하기 전까지 결코 사랑은 격한 감정이나 쓰라림, 혼란, 회한 등과 결합되지 않았다”(* 에르네스 레노, 1864~..

추억으로만 사네

후배가 먼 타지에서 추억으로만 산다고 한다. 추억에 자신을 의지하기 시작할수록 삶은 견디기 힘든 어떤 무엇이 된다. 중년의 여자가 남편과 아이들을 보내고 아파트 베란다에 나와 여고 시절이나 대학 시절의 추억을 떠올리기 시작하는 순간, 무섭고 슬프지만 조금은 감미로운 우울증의 베일이 그녀의 온 몸을 감싸기 시작한다. 하지만 어느새 나도 추억에 의지하기 시작했다. 때때로 갑자기 내가 의식하지 못하는 순간, 내 몸 속에 있던 추억이 날을 세우고 일어나 내 속에서 내 밖으로 일제히 밀려나온다. 그러나 피부의 안쪽 면에 부딪혀 튕겨져 다시 내 몸 속으로 들어가는 추억들. 멍하게 사무실 구석에 앉아 기형도의, 오래된 시를 꺼낸다. 추억에 대한 경멸 기형도 손님이 돌아가자 그는 마침내 혼자가 되었다. 어슴푸레한 겨울..

서기 1000년과 서기 2000년 그 두려움의 흔적들, 조르주 뒤비

, 조르주 뒤비(지음), 양영란(옮김), 동문선 “눈으로 확인할 수 없는 세계도 확실히 존재할 뿐 아니라, 눈에 보이는 세계와 동등한 힘을 지녔다고 믿었던 사회의 맥을 짚어보려는 것이다. 눈에 보이지 않는 세계에 대한 믿음이야말로 현대와 중세의 가장 큰 차이점이다.” 현대인들 중 일부는 아직도 눈에 보이지 않는 세계에 대한 중세적 믿음을 고수하고 있기도 하다. 이러한 믿음을 고수하고 있는 이유는 중세인들과 비슷한 연유에서 기인한다. 즉 세상이 뜻대로 되지 않을 때, 언제나 곡식은 부족하고 전염병이 돌고 생활 환경이 극히 나쁠 때, 혹은 어떤 정신적인 이유로 인해 세상에 대한 공포와 두려움으로 뒤덮여 있을 때, 사람들은 눈에 보이지 않는 세계에 대한 확고한 믿음을 고수한다. 조르주 뒤비의 이 책은 간단하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