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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비

하나비를 보다 잠이 들었다. 바다가 참 많이 나오는 영화다. 수평선이 보이는 바다 위로 총성이 두 번 울릴 때, 난 눈을 감고 코까지 골고 있었다. 다음날 아침에 일어나 네모난 브라운관 속에 갇힌 파란 수평선을 바라보았다. 수평선으로 두 번의 총성이 날아오르고 있었다. 총성 끄트머리에서 피어오르는 불꽃. 생(生)에의 열망. 머리가 아프고 손마디는 떨리고 가슴은 터질 것 같다. 어디 멀리 도망쳐야지. 도망쳐선 소문으로만 존재해야지.

misc.

헨델의 사라반데를 듣고 있다. 무척 격정적인 음악이다. 실은 오늘 일을 봐주고 있는 친구의 사무실에서 영업직원 한 명을 짤랐다. 슬픈 일이다. 그런데 웃음만 나왔다. 몇 년 사이, 너무 많이 변한 내가 서있었다. 허무의 끄트머리에 서서 삶을 조롱하고 있는 내가, 자본주의 사회에서 살아가고 있는 날 바라보고 있었다. 요즘 클래식 음악만 듣는다. 무척 좋다.

봄비에 잠긴 이태원

요즘 있는 사무실 창을 내다 보면 역삼동 라마다르네상스호텔이 한 눈에 들어온다. 호텔 앞 사거리가 다 보이고. 비가 내린다. 잔뜩 슬픈 물기 먹은 표정을 짓고는, 이건 봄비야, 라고 하얀 벽을 향해 지껄여댄다. 어젠 장충동 소피텔 엠버서더 호텔 1층에 있는 그랑-아라는 바에서 술을 마셨다. 아시는 분의 단골 술집인데, 혼자 와서 술을 마시기에 적당한 곳이다. 여기에도 필리핀 밴드가 와서 노래를 부른다. 남자 세 명과 여자 두 명. 키가 작은 여자 두 명 중 한 명은 앙큼하게 생겼고 한 명은 순하게 생겼다. 순하게 생긴 아이가 춤도 잘 추고 노래도 잘 부르고 앙큼하게 생긴 아이보다 몸매도 낫다. 필리핀에 가면 일본이나 한국으로 노래부르러, 춤을 추러, 몸을 팔러 나올려는 여자아이들이 순서를 기다리고 있다...

밀레, 아라키

. 어제 밀레를 보았다. 하지만 광고와는 달리 세잔, 고흐, 피사로 등의 작품은 한 점씩 밖에 없었다. 밀레에게 영향을 주었거나 영향을 받은 미술가의 작품을 가지고 온 것이다. 그 중에서 무리요의 작품은 바로크의 이념이 어떤 것인가를 극적으로 보여주고 있었다. 이번 밀레 전시에서 주목해야할 지점은 2층과 3층으로 나누어진 전시 공간의 차이이다. 즉 바르비종 이전과 이후 사이의 밀레가 얼마나, 확연하게 틀려지는가. 그리고 이렇게 틀려지는 동안 밀레가 삶이나 세계 속에서 발견한 것은 무엇인가. 부서지는 대기 속에서 밀레가 응시하게 되는 것은 무엇인가. 일요일이라 사람들은 너무 많고 밀레의 작품을 보고 아무런 것도 느끼지 못할 어린아이들까지 있었다는 점에서, 과연 미술 작품 감상은 어떻게 이루어져야하는가를 고..

글, 키취, 부시

1. 글쓰기 레지스 드브레의 말처럼 '테니스선수가 테니스를 연습하듯이 글도 그렇게 매일 꾸준히 쓰야' 하는데, 돈벌이는 종종 이것을 불가능하게 만든다. 또한 의욕 넘치는 상사와 동료를 가지고 있을 경우 이는 더욱 힘들다(* 이 경우는 의욕이 없고 불성실한 상사와 동료를 가진 것보다는 훨씬 낫다). 직장생활을 하면서 글을 쓴다는 건 참으로 힘든 일이다. (* 요즘 한 달간 계약직으로 프로젝트 하나를 수행 중이다. ㅡㅡ) 그런데 술을 마시다가 키취(Kitsch)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고 이 단어에 대해 글을 쓴다고 했으니, 게으른 자에게 이런 약속보다 무서운 것도 없다. 더구나 혼란스럽기 그지 없는 단어에 대해서 글을 쓴다고 했으니. 학생으로서 글을 쓸 땐 요약 정리만 잘 하면 된다. 요약정리한 걸 보면서 나..

왜 모든 것은 아래로 떨어지는 것일까.

왜 모든 것은 아래도 떨어지는 것일까? 10층 옥상에서 떨어지는 24살의 청년, 다리 난간을 부수고 떨어지는 스쿠프, 아니면 기력이 다한 봄 나무의 꽃잎. 과연 그것은 만유인력의 법칙 때문일까? 그렇다면 이것을 벗어나는 방법은 오직 떨어지는 운동에너지보다 더 큰 에너지로 밀어올리는 방법 밖에 없는 것일까? 다르게 생각해보자. 혹시 10층 옥상에서 떨어지는 24살의 청년은 땅에 부딪히는 순간, 그의 영혼은 하늘로 올라가는 것은 아닐까? 발없는 새의 이야기. 그 새는 평생동안 땅에 닿지 못한다. 발이 없기 때문에. 그래서 언제나 하늘에서 자고 하늘에서 먹고 하늘에서 산다. 그러나, 그러던 발없는 새도 생에 딱 한 번 땅에 내려앉는다. 그리고 영원히 하늘로 올라가지 못한다. 죽음. 발없는 새와 반대로 우리는 ..

스페이드의 여왕, 푸슈킨

스페이드의 여왕 푸슈킨, 문학과지성사 ‘도스토예프스키와 톨스토이, 그리고 투르계네프의 문학에 대한 세계의 반향이 아무리 크고 높다 할지라도, 러시아인과 러시아 작가들의 사랑과 숭배에 있어 그들은 결코 푸슈킨을 능가하지 못한다’라는 책 첫머리 에 적힌 문장만으로도 푸슈킨이 어떤 위치에 있는 작가인가를 알 수 있다. 하지만 푸슈킨은 아직 일반 독자에게는 낯설다. 나의 경우 푸슈킨의 시를 먼저 읽었고 소설은 이번이 처음이다. 꽤 오래 전부터 이 책을 추천받아왔는데, 이제서야 읽게 된 것이다. 읽고 난 다음, 쉽게 푸슈킨의 세계 속으로 빨려 들어가지 못했다. 푸슈킨의 낭만적 세계 속으로. 푸슈킨은 러시아의 위대한 산문 작가임에 분명하다. 그의 정신은 소설과 시가 만나는 낭만주의의 정점에 서있다. 독일 낭만주의나..

카드를 둘러싼...

핸드폰으로 오케이캐쉬백에서 전화가 왔다. 엔크린카드와 삼성카드랑 제휴해서 뭔가 만들었으니 사용해달라는 것이다. 그런데, 아뿔싸, 3만원권 주유권을 매달 우송해준다는 것이 아닌가. ㅡㅡ. 그리곤 그냥 신청했다. 하지만 현재 백수인 나로선, 이런저런 자격에 맞지 않을 가능성이 보였다. 운전면허증도 없는데, ㅡㅡ. 괜히 신청했나. 그냥 하지 말 걸 그랬나. 이런 소심한 태도를... 빨리 운전면허을 획득해야겠다. 현재 역삼동에 나와 한국관광공사의 모 서비스의 유료화 전략 컨설팅을 하고 있다. 역시 일은 힘들다. 어젠 10시에 불이 켜진 채로 잠에 들고 말았다. 종일 긴장해있던 탓이다. 매일 풀어진 상태로 있다가 갑자기 바뀐 환경이 나에게 많은 스트레스를 주었나 보다. 아침에 티브이에서 설렁탕을 전문적으로 해주는..

아라키 노부요시 개인전

아라키 노부요시 개인전 - 소설 서울, 이야기 도쿄 Novel Seoul, Story Tokyo 20021115-20030223, 일민미술관 사랑이 없는 시대에 사랑을 노래하는 것만큼 고통스럽고 슬픈 일도 없다. 사라져 가는 시대에 사라져 가는 것들을 붙잡는 시도만큼 처절한 것도 없다. 에로티시즘이란 생에 대한 열망이다. 그것은 생명이라는 관점에서 고귀한 것이지만, 이성적이고 체계적이길 원하는 문명의 관점에서는 되도록 숨기고 있는 원시의 유산이다. 아라키 노부요시의 작업은 전적으로 사랑에 국한되어 있다. 하지만 그 사랑은 한 곳으로 쏠려있거나 파헤쳐져 있다. 새디즘이나 매저키즘도 우리의 문명이 만들어놓고 어떤 구획선을 제거해버릴 경우에 사랑의 감정, 또는 형태라고 말할 수 있다. 아라키 노부요시의 사진들..

예감, 흔적

예감 - 김화영 엮음/큰나(시와시학사) 흔적 - 김화영 엮음/큰나(시와시학사) 김화영 엮음, 시와시학사. 시집을 꼬박꼬박 챙겨 읽지 않은 지도 벌써 몇 해가 지났는지 가물가물하다. 대학시절엔 점심을 굶고 그 돈으로 시집 한 권 사면 배는 자연스럽게 부르고 가슴이 따뜻해졌는데. 얼마 전 종로 정독도서관에서 시집을 복사하는 대학생쯤으로 보이는 여학생을 보았다. 그 모습이 대학시절 날 떠올리게 했지만, 그녀가 복사한 시집이, 허수경의 시집들 중 가장 최악인, 최근의 시집이라는 점은 나의 마음을 아프게 했다. 나도 오래 전에 시집을 복사한 적이 있었다. 아주 오래 전에 번역된 이브 본느프와의 시집이었다. 지학사에서 나왔던 책으로 기억되는데, 그 때에도 절판된 지 몇 년이 지난 책이라 복사를 할 수 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