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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섯 번째 계절

서양의 기후 학자는 korea의 계절을 다섯 개로 나누고 그 속에 장마(우기)를 집어넣는다. 장마 속에서, 잠시 비를 그친 도시의 도로는 한적하기가 이를 데가 없다. 바람은 낮고 낮은만큼 하늘도 낮고 구름도 낮고 그녀의 시선도 낮았다. 어느 새 점심식사 대용으로 가져다 놓은 머그 잔 속의 까페라떼는 허연 자신의 가슴 바닥을 들어내고 정오의 고요 속으로 몸을 묻는다. 어느 검색 사이트에서 다운로드 받은 에릭 사티의 짐노패디를 들으면서 그간 슬프게 살아왔다는 생각을 한다. 그래, 너무 슬프게 살아왔었다. 두 달 정도 충격 속에 빠져 지내왔다. 부모님의 결혼에 대한 강요는 견디기 힘든 종류의 것이었다. 사랑은 없지만 결혼은 엄연히 존재하고 있었다. 사회의 시스템이 바뀌면 결혼도 바뀌는데, 시스템 속에 있는 이..

오스카 와일드, 페터 풍케

오스카 와일드 Oscar wilde 페터 풍케 지음, 한미희 옮김, 한길사 도덕적인 책이라든가 부도덕한 책이라든가 하는 따위는 존재하지 않는다. ... ... 잘 썼거나 잘못 쓴 책이 있을 뿐이다. 그뿐이다. 삶은 예술의 가장 뛰어난 제자인 동시에 유일한 제자이다. 예술이 삶을 모방하기보다는 삶이 예술을 훨씬 더 많이 모방한다. 자연이 그토록 불완전한 것은 우리에게 참으로 다행한 일이다. 그러지 않았다면 우리는 예술을 가질 수 없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내 인생의 비극의 원인이 어디에 있는지 알고 싶습니까? 나는 나의 천재를 인생에 사용했으며, 작품에는 재능만을 사용했답니다. ***** 오스카 와일드가 여기저기 남긴 몇 마디의 문장은 심미주의(유미주의)의 분명한 정의를 우리에게 가르쳐준다. 그것은 로코코의..

앤디 워홀

머리가 무척 아프고 몸이 무겁다. 낮게 깔린 하늘 탓인가. 아니면 지쳐가는 세상 탓인가. 오늘 오후 혼자 이리저리 방황할 가능성이 매우 높아졌다. 어제 밤 늦게라도 맥주를 마실 걸 그랬나. 그런데 오늘은 어디 가서 혼자 노나. 책이라곤 하이엔드오디오컴플릿가이드만 들고 왔는데 말이다. 갑자기 허공을 감싸고 있는 공기의 무게가 느껴진다. 공기의 무게가. 날 짖누르는 공기 알갱이들의 무게가. Andy Warhol (1930-1987) Self-Portrait 1979 Instant Color Print 20" x 24" Metropolitan Museum of Art, New York 출처: http://www.zootpatrol.com/index.php/2009/12/andy-warhol-polaroids-..

명주, 방민호

명주 방민호 문학산문집, 생각의 나무 문학산문집으로 내 기억에 남아있는 책은 김훈의 , , 기형도의 여행산문집이 전부다. 한 권을 더 붙인다면 김현의 정도가 있겠다. 지난 주말, 방민호라는 젊은 문학평론가의 라는 산문집을 읽었다. 굳이 사서 읽을 만한 책은 못 된다. 책의 장정이 아깝다. 그는 왜 이런 책을 내게 되었을까. 그가 쓴 몇몇 비평문은 근래에 보기 힘든 글들인데, 그의 비평적 눈은 자신의 산문집에 대해선 아무런 제재도 가하지 못했나 보다. 그와 같은 학번, 80년대 중반에 대학 생활을 했던 이에게 이 책은 잠시나마 비릿한 추억으로 이끌고 갈 것이다. 90년대에 대학 생활을 한 나에게도 이 책은 잠시나마 대학 생활을 떠올리게 하였으니까. 내 대학 동기들은 뭘 하면서 지내는지 궁금하기도 하다. 별..

문학동네

오후에 잠시 머문 영풍문고에서 머리를 길게 늘어뜨린 사람이 등단한 것을 계간 문학동네에서 발견했다. 시모임에서 잠시 얼굴을 익혔을 뿐, 친분이라곤 전혀 없는 선배가 30중반의 나이에 등단한 것을 보았다. 거참. 직업이 무얼까 하는 생각이 얼른 스친다. 잠시 사소한 희망을 품어본다. 사무실에 나가 노트북에 일할 것들을 챙겨 집으로 와서 오늘 구한 캔우드 리시버에 스피커 물리고 시디피를 물려 음악을 듣는다. 빈티지라 라디오 하난 기막히게 나온다. 크기도 적당하고 돌리면서 전파를 잡는 게 느낌이 참 좋다. 피아노소리가 들린다. 오늘 잠 자긴 틀렸다. 들어와서 일을 할 작정이었는데, 이것저것 하면서 빈둥대다 보니, 벌써 한 시다. 이제 일을 해볼까나.

텔레만

영풍문고 지하에서 3장에 만원하는 클래식 시디를 사왔다. 녹음의 질은 조금 떨어지긴 하지만, 꽤나 유명한 앨범들도 여럿 있는 레이블이다. 내 기억으로는 국내 수입음반사에서 라이센스로 수입한 지 얼마 안 되어 IMF가 터진 것으로 기억된다. 아마 그 쯤이었을 거다. 텔레만은 처음 듣는데, 무척 좋다.(* 왜 난 좋을 때, '무척 좋다'라는 표현 밖에 쓰지 못하는 것일까) 일요일 오전, 이 음악... 상쾌해진다. 텔레만의 다른 음반도 사야겠다. 뭘 사지.

현대 프랑스 지성사, H.S.휴즈

현대 프랑스 지성사 (부제 : 차단된 통로 : 절마의 시대에 있어서의 사회사상) H.S.휴즈 지음, 김병익 옮김 문학과 지성사 로베르 브레송의 영화 는 알아도, 이 영화의 원작자인 조르주 베르나노스에 대해선 잘 알지 못한다. 실은 브레송보다 더 유명하고 더 많은 팬을 가지고 있는 한 소설가에 대해선. 이런 편식은 비단 문학에만 해당되는 것도 아니다. 1960년대 구조주의의 열풍, 또는 그 이후에 대해서만 알고 있을 뿐 이 구조주의 학자들이 젊은 시절에 누구를 만났는가에 대해서 무관심하다 못해 무식하기 이를 데가 없다. 그 학자들에게 사르트르가, 말로가, 생 떽쥐베리가 어떤 영향을 끼쳤는가에 대해선 알지 못한다. 조르주 베르나노스는 ‘프랑소와 모리악과 더불어 양차 대전 중간기에 가장 영향력 큰 두 카톨릭 ..

음악 듣기

삼만원 주고 산 캔우드 리시버에 청계천표 묻지마스피커를 연결하고 포터블 시디피에 연결해서 들어보고 워크맨에다 연결해서 들어보고 심지어 DVD 롬이 달려있는 노트북에다 연결해서 들어보는 짓을 했다. 캔우드 리시버에 Loudness 단자가 있어서 이걸 선택해놓고 들으니 재즈가 매우 부드럽게 들린다. 영국 사운드는 맑다면 일본은 부드럽다.(* 들어본 기기는 몇 개 되지 않지만) 자기 전에 아이정전도 보고 U2의 래틀앤흠을 보고 브에나비스타쇼셜클럽도 봤다. 띄엄띄엄. 방은 시디와 LP, 뒹구는 스피커와 앰프로 뒤죽박죽이 되어있다. 그러나 무척 좋았다. 시 한 편 쓰면 딱 좋을 방 모습이다. 글쎄, 살아간다는 게 뭘까. 살아간다는 건, 죽을 때까지 지쳐간다는 건 아닐까. 그리고 확실히 지쳤을 때 죽는다는 거. 햇..

나의 서양미술순례, 서경식

나의 서양미술순례 서경식 지음, 박이엽 옮김, 창작과비평사 대학원 시험을 번번히 떨어지고 학업을 하기엔 좀 지난 나이인 서른하나가 되었지만, 이미 책읽기와 그림보기는 생활의 일부가 되어버려 어쩌지 못하고 있다. 이 책은 원래 창작과비평사의 문고판으로 나온 책이었다. 그러다가 작년 초에 도판도 칼라로 싣고 하드커버로 장정하여 깔끔하게 새롭게 출판되었다. 1. 화제를 바꾸려는 듯이 사내가 물었다. "일본 사람이오?" 언제나처럼 나는 대답했다. "아니, 한국인이오." 그러자 사내는 다시 수다스러워져서 지껄이는 것이었다. "오, 한국인이요? 요새 야단인가 보던데? 학생들이 매일같이 소란을 피운다던데, 어때요?" - 94쪽 그는 재일한국인이다. 한국말보다 일본말이 더 익숙한 사람이다. 미술책을 읽으면서 정체성에 ..

작은 사건들, 롤랑 바르트

Roland Barthes, Incidents 작은 사건들, 동문선, 2003 검은 피부의 청년, 그가 입은 연두색 바지와 박하 크림색의 셔츠, 오렌지색 양말, 그리고 눈에 띄게 부드러워 보이는 빨간 구두 - 34쪽, 작은 사건들 그가 호모섹슈얼이었다는 사실을 잊고 있었다. 1979년 9월 17일 일요일인 어제, 올리비에 G가 점심을 먹으러 왔다. 나는 그를 기다리고 맞이하는 데 정성을 기울였다. 그런 나의 태도는 내가 사랑에 빠져 있음을 증명해 주는 것이다. 하지만 점심을 먹을 때부터 그의 수줍은 태도, 혹은 거리감이 날 두렵게 만들었다. 우리 관계에는 이제 어떤 행복감도 남아있지 않았다. 나는 그에게 잠시 낮잠을 즐길 동안 내 침대 곁에, 내 옆에 있어 달라고 부탁했다. 상냥스럽게 다가온 그는 침대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