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체 글 2663

집착, 장식, 그리고 내 안의 우주

1. 사랑하는 이가 어느 순간 결별을 선언한다고 생각해보자. 그러면 어떻게 될까. 가령 그 사랑이 자신에게 있어 어떤 절대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고 했을 때, 그래서 그 사랑을 하루라도 보지 않으면 자신의 육체에, 자신의 영혼에 어떤 상처를 입는다고 했을 때, 그런 경우에 그 사랑이 어디론가 사라진다고 말할 때, 우리는 그저 두 손에 얼굴을 파묻고 울기만 할까? 아마 많은 청춘남녀들이 떠나가는 사랑을 향해 돌아오라고 안쓰러운 손짓을 하고 절규하고 몸부림칠 것임에 분명하다. 적어도 위와 같은 경우라면 말이다. 그리고 그녀, 혹은 그가 귀가하는 무렵 길모퉁이에 기대고 사랑하는 이에게 한 번이라도 더, 무슨 일이 생기기 전까지 계속 매달릴 것이 분명하다. 그리고 이때, 떠나간 이가 우리에게 하는 말. "넌 ..

육체의 악마, 레이몽 라디게

육체의 악마 - 레이몽 라디게 지음, 김예령 옮김/문학과지성사 육체의 악마, 레이몽 라디게(지음), 문학과 지성사 1. Passion 불같이 활활 타오르던 사랑이 식지 못한 채 여러 차례의 깊은 계곡을 통과한 다음, 끔찍한 파국을 맞이하게 되는 것은 그 사랑의 정념이 사악하기 때문일까? 혹은 불륜을 지속시키기 위해, 부도덕을 도덕으로 위장하기 위해, 그 순수한 사랑은 그 사랑을 타인들에게 숨겼다는, 그것만으로도 자신들의 사랑이 허약하다는 충분한 이유가 될 수 있다는 사실 때문에 스스로 상처 입은 것일까? 2. 불륜 나에게, 혹은 이 소설을 읽고 잔인한 쾌감, 아마 아리스토텔레스라면 자신만만하게 '카타르시스'라고 말했을 그런 쾌감을 느끼는 사람들 모두 도덕과는 거리가 먼 사람들일까? 그러나 불행하게도 '도..

근대성의 구조, 이마무라 히토시

근대성의 구조 - 이마무라 히토시 지음, 이수정 옮김/민음사 근대성의 구조, 이마무라 히토시(지음), 민음사, 1999. 1. 인과율 이 세상에 '당연한' 것은 없다. 모든 현상에는 인과율 (causality)이라고 하는, 라는 이름의 족쇄에 묶여 있다. 그리고 현재의 고통이나 불합리는 이것을 둘러싼 이러한 인과 관계를 이해할 때에만 벗어나거나 고칠 수 있는 방법을 찾 아낼 수 있을 것이다. 적어도 근대인(Moderni)라면 그렇게 생각 할 것이 분명하다. 따지고 보면 우리 인간이 속해 있는 우주에 비한다면 '근대(Modern)'란 그렇게 특별한 시대는 아니다. 단지 이 세계와 우주, 그 속에서 진행되는 인간들의 삶을 이러한 인과 관계와 이성의 눈을 통해 보다 치밀하고 정확하게 파악하기 위해 노력한 시대..

현대 미술에 대한 단상

21세기의 예술은 어떤 모습으로 펼쳐질 것인가하는 질문을 종종 받는다. 그리고 대부분 나의 입에서 정보화시대에 걸맞게 '새로운 테크놀러지에 의한 색다른 예술양식이 되지 않을까요'하는 대답을 기대하지만,기대에 어긋나게도 테크놀러지는 언제나 예술의 일부를 이루어왔을 뿐이다. 많은 사람들이 오해하는 사진과 인상주의 미술과의 관계에서도 사진때문에 인상주의가 등장했다는 말은 거짓말이다. 언제부터 우리에게 '테크놀러지'에 대한 기대가 생겼는지 모르겠지만, 그리스 고전 시대에 디오니소스 극장에서 소포클레스의 '오이디푸스'가 자신의 운명(moria)을 저주하며 스스로 눈을 버릴 때의 그 고통이 사라진 것이 아니며, '안티고네'가 공동체와 개인의 자유에 대해서 깊은 성찰을 보여주었을 때의 그 성찰은 아직도 유효한 것이다..

풍경화에 대하여

* 이 글은 1998년 예술사 수업 과제물로 제출한 리포트이다. 참고용으로 활용하기 바라며, 인용 시 출처를 밝혀야만 할 것이다. 1. 지금 당장 밖에 나가 눈앞에 펼쳐진 광경을 그린다면 그것도 하나의 풍경화(landscape painting)가 될 수 있을까? 가령 건조한 표정으로 서있는 건물들이나 건물 앞 둔탁하게 생긴 구조물과 초췌한 빛깔의 나무들, 혹은 건물들 사이로 보이는 하늘을 그린다면 말이다. 그렇게 해서 풀밭이나 산이나 강을 그린 화가에게 깊은 겨울의 우울함으로 물들어있는 도시의 풍경을 그린 그림을 들이밀면서 '이 얼마나 아름다운 풍경화인가요'라고 말할 수 있을까? 그러나 먼저 우리가 여기에 대해 말하기 위해선 우리가 '풍경화'라고 할 때의 그 '풍경'과 철학이나 미학에서 말하는 '자연'-..

우아하고 감상적인 일본야구, 다카하시 겐이치로

우아하고 감상적인 일본야구 - 다카하시 겐이치로 지음, 박혜성 옮김/웅진지식하우스(웅진닷컴) , 다카하시 겐이치로 지음, 박혜성 옮김, 웅진출판, 1995 (* 시리즈의 열번째 권). 1. 이 소설에 대한 감상문으로 적당한 문장은 이러하다. “다카하시 겐이치로라는 일본의 변태적 허구를 즐기는 작가가 쓴 소설을 읽었는데 말이야, 도통 무슨 말인지 모르겠어. 그런데 녀석 소설 하나를 잘 쓰더군. 뭐, 무슨 말인지도 모르는 소설을 읽고 잘 쓴다라는 따위의 말을 하는 것이 이상하긴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 다카하시 겐이치로라는 녀석이 ‘변태’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사라지는 건 아니야.” 하지만 이런 문장은 이 소설을 소개하는 글의 문장으론 적당하지 않다. 2. 소설 뒤에 붙은 박유하 교수의 해설은 이 소설의 ..

1963년, 1982년의 이파네마 아가씨

사라 본Sarah Vaughan의 낡은 테잎을 선배가 하는 까페에 주고 난 다음, 난 그녀의 목소리를 듣지 못하고 있었다. 오늘 그녀의 앨범을 샀다. 영화 때문에 나온 '2 for 1' 모 음집. 예전부터 들어왔던 음악이 영화나 광고 때문에 유명해지 면 기분이 나빠지기 일쑤다. 누군가에게 음악을 추천하면 대체 로 무시해버린다. 그리고 그들은 똑같은 음악이 영화나 광고에 서 유명해지면 내가 권했다는 사실을 잊고선 그 음반을 사선, 이 음악 좋지 않냐고 내게 말한다. 이건 소설이나 책 따위도 마찬가지다. 내가 말하면 잘 듣지도 않다가 교수나 유명한 작 가가 이 책 좋으니 읽어보라고 하면 바로 산다. * * '1963년에 이파네마 아가씨는 이런 식으로 바다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고 지금 1982년의 이파네마..

L'e'criture ou la mort

몇 개의 문장들: * 그렇다고 수용소가 이제 폐쇄되었다고 해서 계급사회가 끝 난 것은 아니었다. 도서관 사서인 안톤이 내게 그것을 상기시켜 주었다. * 죽음은 삶의 사건의 아니다. 인간은 죽음을 체험하지 못한 다.(Der Tod ist Kein Ereign des Lebens. Den Tod erlebt man nicht ......)(-비트겐슈타인) * 결국, 내게는 죽음 이외의 아무 것도 없다 나의 삶을 표현하기 위해 ... ... (- 세자르 발레조. 페루 시인. 1893-1938) * 글쓰기란 어떤 방식으로든 삶을 거부하는 것이다. * 카프카는 마르크스가 죽은 1883년에 태어나, 레닌이 죽은 1924년에 죽었다. * * 일요일 오전 내내 블라디밀 아쉬케나지가 연주하는 라흐마니 노프를 들으며, 죠..

바타이유와 영국현대미술전

공작은 그녀를 따라갔다. 그는 그녀가 걷는 것을 바라보았 다. 그녀는 왼쪽으로 한 발짝, 오른쪽으로 한 발짝 걷더니, 고 개를 숙였다. 손을 바들바들 떨었다. 불안했던 것일까? 공자그 는 고개를 숙이고, 탐욕스럽게 빙긋이 웃었다. 그는 그녀를 꿈 꾸었다. 거인만이 그것을 알지 못했다. 그는 딸의 눈 속에 이 유를 알 수 없는 공포가, 욕망과 기다림이 숨어 있다는 것을 알지 못했다. - 『시간의 지배자』중에서, 크리스토프 바타이유. * * 작년에 나온 몇 개의 뛰어난 소설들 중의 하나. 매혹적인 이름, 크리스토프 바타이유. 그와 술을 마신 선배의 평에 의하 면, "아직 어린 친구다"였다. 내 기억에 의하면 그는 나보다 어리거나, 같은 나이일 것이다. 오늘 국립현대미술관에 갔다 왔다. 눈물이 나도록 아름다운..

기면발작증, 그리고 시인 박서원

기면 발작증. My Own Private Idaho 첫 몇 쇼트에 나오는 단어. 그리고 시인 박서원이 앓고 있는 병. 영화를 보고 난 다음 꽤나 멋있게 보였던 병(* 수전 손탁이 말한 병의 은유?). 하버드 대학 법대에 다니는 애인과 헤어지 고, 119 구급 대원과 결혼한 여자. 그리고 그 결혼의 실패. 문학 잡지에 실린 그녀의 시를 읽고, 손톱 만한 그녀의 사 진을 보고 난 다음 풍부한 언어를 구사할 줄 안다라는 감상과 함께 실제로 만나면 꽤나 매력적이겠다라는 생각을 했다. 그러 나, 열음사에서 나온 그녀의 첫번째 시집은 그다지 좋지 못했 고, 그것이 끝이었다. 가끔 잡지에서 그녀의 시를 읽었고, 최 근에 나온, 문학평론가들에 의해 주목받았던 시집들을 보긴 했 지만 사서 읽진 않았다. 오늘 신문 기사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