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하련의 우주/Jazz Life 992

연말

트레이시 에민.. 어둠 속에서 빛나는 네온.. 선명하게 보이는 love라는 단어. 하지만 단어는 눈에 닿기 전에 미끄러져 대기 속으로 사라진다. 전시장의 어수선한 분위기 속에서 트레이시 에민의 사진이 흰 모니터 속에서 나타났다 사라졌다. 연말이 되자, 일이 끝없이 밀려들고 연일 술 약속이다. 12월엔 거의 책을 읽지 못했다. 좀 여유를 부리고 정신을 차려야겠다. 2009년도 한 번 되돌아보고 2010년 계획도 세워보아야 하는데. 프랑크푸르트에 가서 맥주 마시고 싶어지는 화요일이다.

어수선한 마음의 일요일 아침의 말러Mahler

어제 밤에 전 직장에서 사용하던 HP 노트북의 OS를 새로 깔았다. 무려 세 시간이 넘게 걸렸다. 그 사이 아무 짓도 못했다. 스트레스가 의외로 심했다. 그 탓일까. 일요일 아침 쉬이 기분이 펴지지 않는다. 나쓰메 소세키의 '그후'에 대해 글을 써보려고 했으나, 되지 않았고 얼마 전에 끝난 조안 미첼의 전시를 떠올리며 뉴욕타임즈 웹사이트에서 구한 그녀 작품에 대한 몇몇 기사를 읽었다. 그 중에서 기억하는 문구. an orgiastic battlefield, 주신제의 전쟁터, 술 마시며 난리를 피우는 전투장, ... 어쩌면 미 추상표현주의가 orgiastic battlefield가 아닐까. .. 어쩌면 모든 예술 작품이, 우리 마음이, 우리 사랑이. 낡은 파이오니아 턴테이블에 카라얀의 베를린 필이 연주한 ..

소레카라, 그 후엔, And Then~

"왜 저를 버렸지요?" 라고 말하고는 다시 손수건을 얼굴에 갖다 대고 또 울었다. - 나쓰메 소세키, '그후', 민음사, 286쪽 일요일 심야의 퇴근길 지하철 9호선에서 나쓰메 소세키의 '그 후'를 다 읽었다. 왜. 저를. 버렸지.요.?... 소설은 아무런 사건 없이 이어지다가, 마치 거친 골짜기를 며칠 째 헤매다가 무지개 낀 폭포를 만나는 듯한 느낌을 읽는 이에게 선사한다. 하지만 그건 슬픈 비극일 뿐이다. 나쓰메 소세키는 19세기말의 시선으로 현대인의 비극을 드러내고 있었다. 사랑을 늦게 깨닫는 것 만큼 어리석은 일도 없다. 그런데 다이스케는 어리석었다. 며칠 전에 만난 그녀는 '그 후'를 '소레카라'로 읽는다는 걸 알려주었다. 프랑스 남편과 두 아이가 있는 동경으로 갔지만, 일본은 그녀의 나라가 아..

11월 29일 토요일

다이스케는 잠시 이야기를 멈추고 우메코의 어깨 너머 커튼 사이로 맑은 하늘을 기웃거리며 보고 있었다. 멀리 커다란 나무 한 그루가 시야에 들어왔다. 옅은 갈색의 새 잎이 돋아나고 부드러운 나뭇가지 끝이 하늘과 맞닿은 곳은 이슬비에 젖은 것처럼 뿌옇게 흐려 있었다. - 나쓰메 소세키의 ‘그 후’(민음사), 48쪽~49쪽  그는 지난 주 내내 전날의 피로의 채 가시지 않은 직장인들이 빼곡히 들어찬 출근길 지하철 객차 안에서 서서 읽은 나쓰메 소세키의 소설 한 문단을 떠올렸다. 한 때 문장을 지어 사람들에게 읽히는 것이 꿈이었으나, 누군가의 삶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적는다는 것이 주제넘은 일이라는 생각에 그만 두었다. 하지만 형편없는 글을 소설이라고 발표해대는 요즘 작가들의 글을 읽곤 암담해지는 기분은 어쩌질..

가평으로 떠난 워크샵

나도 모르게 나이가 든 것을 느낀다. 그 사이 어떤 사정을 거쳤는지, 뭘 해야 될 지, 무슨 말이 필요한 지,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는다. 화도 거의 내지 않고, 단지 술을 마시면 금세 취하고 금세 골아떨어질 뿐이다. 빠듯한 일정의 워크샵이었다. 회사의 비전에 대한 공유와 함께 팀별 성과 목표 및 목표 달성을 위한 KPI 도출에 대한 간단한 시간을 가졌다. 실은 KPI 도출을 빙자한, '속마음 털어놓기'에 가깝다. 작은 조직에서도 커뮤니케이션 손실을 고려하는데, 큰 조직이라면 어떨까. 오-메독 와인 한 병을 들고 갔으나, 와인을 즐기는 이가 없었던 터라, 나 혼자만 흥분하며 감탄사를 연발했다. 역시 2005년도 산 오-메독 와인은 최고였다. 주말 내내 워크샵의 여독이 풀리지 않았고 월요일, 화요일,..

어느 가을 일요일

Stanley Jordan, Autumn Leaves 최근 술을 마시면 중간에 멈추는 법이 없이, 끝까지 마시는 경우가 잦아졌다. 올해 초만 하더라도 알콜에 대한 자제력이 있었고, 무사히 봄과 여름을 보낼 수 있었다. 하지만 최근의 자제력 상실은 꽤 나를 당황스럽게 하고 있었다. (아마 내게 뭔가 견디기 힘든 어떤 일이 마음 깊은 곳에서 일어나고 있으며, 이를 억누르는 과정의 반작용가 아닐까 의심해보기도 하지만, 늙은 육체의 어린 마음은 언제나 흐릿한 흰 빛의 안개로 쌓여 모호할 뿐이다.) 어제는 몇 주만에 운동을 했다. 몸이 뜨거워지고 얼굴은 땀으로 버벅이 되었다. 예전엔 마음이 움직일 때마다 살아있음을 느꼈는데, 요즘엔 운동을 하고 온 몸이 땀으로 뒤덮일 때 살아있다는 걸 깨닫는다. 내년 초에 행사가..

어느 목요일 밤...

목요일 저녁 7시, 도시의 가을, 차가운 바람 사이로 익숙한 어둠이 밀려들었다. 그 어둠 사이로 보이지도 않는 자그마한 동굴을 파고 숨어 들어간 내 마음을 찾을 길 없어, 잠시 거리를 걸었다. 삼성동에서 논현동까지. 마음이 지치기도 전에 육체가 먼저 지쳐버리는 10월의 나날들이 이어지고 있다. 나이 탓이라고 변명해보지만, 그러기엔 난 아직 너무 어린 마음을 가지고 있다. 너무 어린 마음이 늙은 육체를 가졌을 때의 그 비릿한 인생의 냄새를 가지고 있다. 그 냄새를 숨기기 위해 하루하루 노력하고 있었다. 하지만 요즘 어떻게 된 일인지, 어린 마음이 지치기도 전에 육체가 먼저 지쳐버렸다. 이 세상이 익숙해진 육체에겐 그다지 어려운 일도 아닐 텐데. 요 며칠 하늘은 정말 푸르고 높았지만, 그건 고개 돌린 외면의..

어느날 갑자기

어느날 갑자기 보니, 내 자리가 이상했다. 내가 서 있는 자리가. 돌이키고 싶었지만, 어쩔 수 없이 시간은 흘러가고 난 뒤였다. 사람들은 떠나, 없었고, 늦가을 마지막 잎새처럼 상처가 나풀거렸다. 마음 가는 대로 사는 사람이 되고 싶었으나, 그런 사람이 되지도 못하고 될 수도 없다는 사실을 최근에서야 깨달았다. 뒤늦게 철이 든 것이다. 어느 새 가을이다. 가을이 왔다는 이야기를 대기로부터 전해 듣지 못한 탓에, 혼자 반팔 차림으로 돌아다니고 있었다. 아무도 나에게 말을 걸지 않고, 시간은 무서운 속도로 전진한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아직 구름이 있다는 것. 그래서 구름 뒤에 숨을 가능성이 0.1% 이하이겠지만, 그래도 있다는 것.

고백

김윤정, Untitled http://intempus.tistory.com/879 어제부터 내가 폐허같은 마음을 가지게 되었는지 모르겠다. 어쩌면 이 세상의 본질이 폐허라는 생각을 가졌는지도 모른다. 마치 발터 벤야민처럼. 그는 슬프게도 그의 역사철학을 파국과 폐허 위에 구축하려고 한다. 그가 냉철한 사상가로 이해되기 보다는 뛰어난 작가로 받아들여지는 이유도 여기에 있지 않을까. 문득 아무렇게 살고 있진 않은가 하는 회의가 밀려들었다. 결국엔 무너지고 말 것임을 알면서, 무너지지 않으려 노력했던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흔들리는 마음을 누군가가 잡아주길 바랬는데, 내 스스로 잡지 못하면 그 어떤 것도 되지 못한다는 걸 알았다. 요즘 그림이 눈에 들어오지 않고 글이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그런 날들..

misc.. 0909

정운찬 총리 카드는 역시 정치판은 흥미진진하다는 사실을 유감없이 보여주었다(어느 나라나 마찬가지겠지만). 다만 이 흥미진진함의 주인공이 현직 대학 교수이라는 점이 안타까울 뿐이다. 그가 2학기 때 담당하기로 예정되었던 과목들은 줄줄이 폐강되었고 학생들의 푸념은 들리지 않는다. 정권이 바뀌자, 불과 몇 년 사이에 이 나라는 놀랄 만큼 달라졌다. 더 웃긴 것은 '잃어버린 10년'을 만들었던 두 전직 대통령은 이제 이 세상 사람이 아니며, 세상 사람들은 그것에 대해 그 어떤 불평불만도 제기하지 않는 듯 보인다. 도리어 불평불만을 제기하려고 하면, 나에게 '조심해라'고 충고한다. 달라졌다는 것이 나쁘다는 의미는 아니다. 하지만 그것이 권력에 대해 비판하는 사람을 궁지로 몰고 소통을 방해하고 반대하는 의견에 대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