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하련의 우주/Jazz Life 992

주말

한 두 달 전, 삼성동 인터알리아에서 요시토모 나라의 판화를 보면서, '이 사람 참 감각적이다'라는 생각을 했다. 일요일 아침, 아트저널 2009년 신년호를 보면서 또 그런 생각을 했다. 마치 피부 세포 하나 하나가 낮은 하늘을 가진 어느 날, 대기 속의 물방울에 젖어, 까끌까끌하게 날이 선 듯한 느낌이 들었다. 아트저널에 실린 어느 갤러리의 요시토모 나라 전시 광고 페이지. 오래, 혼자 살다보니, 이것저것 다 해보게 되는데, 그 중 하나가 금붕어 돌보기와 화분들이다. 이 방 저 방 한 두개씩 있던 화분들을 현관 입구에다 모아놓았더니, 제법 보기 좋았다. 아무도 없는 낮에는 꽤 쓸쓸하고 답답하겠지만, 퇴근 후 나는 이들을 위해 온 집의 창문이란 창문은 다 열어둔다. 일요일 낮에는 몇 명의 사람들을 만나,..

내가 은퇴하는 이유 열 가지 - 소렌스탐

서재 방바닥을 정리하다가 찢어놓은, 오래된 신문 조각에서 소렌스탐의 은퇴 기사를 읽는다. 그녀는 작년 5월에 은퇴했다. 은퇴하면서 데이빗 레터먼 쇼에 출연하면서, 내가 은퇴하는 이유 열 가지를 밝혔다. 그 중 일부는 아래와 같다. "타이거 우즈가 자꾸 내 퍼터를 훔쳐 가는 게 지긋지긋해서" "그린을 겨냥하는 게 점점 재미없어지고 대신 관중을 겨냥해 샷을 날리는 것에 관심이 많아져서" "스트레스가 심한 경기에서 티를 땅콩처럼 씹어 먹을 때" "(캐디가 아니라) 캐디백과 이야기하기 시작했을 때" "기나긴 (미국) 대선 캠페인 때문에 인생이 지겨워져서" 이런 이유들 중에서 1위는 "요즘 내가 신경 쓰는 것은 오직 내 약혼자의 퍼트뿐"이라는 것이다. 작년 이 기사를 읽으면서 나도 은퇴할 때, 이런 은퇴 이유를 ..

오래되었다는 건

오래되었다는 건 견딜 수 있다는 것에 대한 반영이다. 누군가가 1979년 화신백화점에서 구입한 낡은 LP를 턴테이블에 올려놓고 음악에 몸을 실었다. 그리고 견딘다는 것, 견디면서 앞으로 나가는 것에 대해 잠시 생각했다. 종일 파란 하늘이 부러웠다. 정오가 다 될 때까지 잠을 잤고 오후 내내 운동을 했다. 고통을 느낀다는 건 살아있다는 것에 대한 반영이다. 그래서 우리는 살아있다는 걸 느끼기 위해서 적절한 고통이 필요한 것일까. 저녁이 되면 바람은 낮아지고 사람들은 집 구석으로 몰려들어 수다를 떤다. 새들도 제 집으로 들어가고 거리를 지나는 차들은 경쟁하듯 불빛을 키우고, 나는 외출을 서두른다. 일상의 거의 모든 것들이 비즈니스가 되어버린 지금, 내게 필요한 것은 과연 무엇일까. 라흐마니노프 피아노협주곡 ..

모짜르트...

요즘 너무 바쁘다. 이번 주 금요일까지 책 두 권 읽고 리포트를 하나 써야 하고, 모짜르트의 대관미사(KV 317)을 무려 10번은 듣고 가야 한다. 외워오라고 시키지 않은 것만 다행이라고 여기고 있을 정도니. 내일까진 여름에 있는 아트페어를 위한 몇 개의 원고를 써야 하고, 회사에서 PM을 맡은 다른 프로젝트에 몇 개의 다른 업무가 추가될 듯 하다. 하나라도 빠뜨리지 않으려고 노력하다 보니, 개인적 일엔 무관심해져 버렸다. 그러다가 이렇게 비가 오는 날이면, 요즘 내 사는 모습이 딱히 좋아보이지 않아 보인다. 쓸데없는 자기 반성이랄까. 근처에 사는 친구라도 있으면 소주라도 한 잔 하면 딱 좋은 밤이다. 사무실 근처에서 사온, 브랜딩된 원두 커피 향이 좋다. 오디오에 모짜르트의 대관 미사 CD를 올려놓고..

대학 시절

지난 주에 얼마나 스트레스를 받았는지, 가만히 있어도 목 둘레와 어깨가 아프다. 해야 일은 많고 내 마음은 나를 도와주지 않는다. 80년대 후반, 성음레코드에서 나온 팻 매쓰니의 레코드를 낡은 파이오니아 턴테이블에 올려놓고 작고 네모난 창으로 밀려드는 6월의 축축하고 선선한 바람이 내 피부에 와 닿는 느낌에 아파한다. 잠시 감기에 걸릴 지도 모른다는 공포를 느꼈다. 혼자 있으면서 아픈 것 만큼 무서운 것도 없다. 아주 가끔, 이 방 안에서 내가 죽으면, 나는 분명 며칠이 지난 후에 발견될 것이다. 그래서 더 무서운 것일까. 르 끌레지오의 젊은 날에 발표한 소설 '침묵'은 자신이 죽은 후의 독백으로 이루어져 있다. 김현의 번역을 좋아했는데, 복사해놓은 종이는 잃어버렸고 김화영의 번역본은 어디에 있는지 서재..

몽크Monk를 듣는 일요일 오전

Thelonious Monk: Blue Monk (Oslo, April 1966) Um clipe do video "Monk in Oslo". Thelonious Monk - piano. Charlie Rouse - tenor. Larry Gales - bass. Ben Riley - drums. 지난 주 내내 스트레스를 받는 일들의 연속이었다. 그리고 결국 목이 빳빳하게 굳어버렸다. 하루 이틀 지나도 풀리지 않으면 한의원에라도 가야할 것같다. 하긴 과도한 스트레스는 종종 담배와 음주로 이어지기 마련이고, 나는 여기에 충실했다. 결국 내가 자초한 일인가. 아침에 일어나 산타나의 Moon Flower와 몽크의 Brilliant Corner를 들었다. 음악만이 내 위안이 되어줄 것인가. 아니면 시인가. 폴 ..

아슬아슬한 봄날은 지나가고

몇 달 전, 과천에서의 하루. 사쿠라를 찍었다. 작은 배낭 하나 메고 일본 여행 가고 싶은데, 시간이 나질 않는다. 과천에 같이 갔던 이와는 현재 연락이 되지 않고. 골목길 어느 집 정원 담벼락에 흘러넘쳐 나온 장미꽃의 농염함. 나에게도 이런 농염함이 있었다면, 얼마나 좋을까. 안드로메다 은하까지 다가가는 짙은 향기와 시선을 한 눈에 사로잡는 자극적인 색채까지. 이룰 수 없는 꿈이라면, 아예 꿈을 꾸지도 말아야 하는 걸까. 마치 나에게 사랑처럼. 마을 버스를 타고 나가던 길. 혼자 나오는 길은 늘 일상처럼 펼쳐지지만, 언제나 익숙해지지 않는다. 하긴 이 세상 전체가 낯선 곳이니. 독일의 미술사학자 보링거의 견해처럼, 나는 추상주의자일 지도 모르겠다.

우리가 꿈꾸는 여유

(갤러리 아트링크의 정원) 일요일 낮에 안국동, 사간동 갤러리들을 돌아다녔다. 청바지에 가방을 매고, 가방 속엔 아직도 미련을 버리지 못한, 철부지 같은 공부의 열정을 증명하듯 몇 권의 책과 노트, 그리고 철 지난 니콘 D70 카메라가 있었다. 수요일 오전, 지난 일요일의 한가로움이 쓸쓸하게 그립다. 회사 건물 1층에 나가, 몇 주만에, 극소량의 나프틸아민, 니켈, 벤젠, 비닐 크롤라이드, 비소, 카드뮴을 먹었다. 그러면서 내 일상을 탓했다. 고상한 척 하지만, 고상하지 않고, 강한 척 하지만 절대로 강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아주 가끔, 사람들이 서로의 마음을 있는 그대로 100%, 한 톨도 남김없이 다 볼 수 있다면, 이 세상은 정말 비극적이고 슬픈 곳으로 변할 것이라는 생각을 하곤 한다. 하지만 아..

슬픈 노란색

짙은 갈색의 원두커피의 깊고 거친 맛이 입 안 가득했다. 때이른 더위에 사무실 에어콘은 긴 소음을 내며 운전하고, 5월말 어느 오후는 나른하기만 했다. 하지만 나른한 몸과 마음은 남쪽 마을의 어느 새 이름을 딴 바위로 향했다. 일상의 바쁜 일들이 끝나면, 부산, 김해, 진해, 광주, 해남을 거쳐가는 여행이나 떠나야 겠다. 그 때쯤 되면 세상은 조용해져 있겠지. 아마 그 때쯤 되면, 오늘 일은 조금은 잊혀져 있을 것이고 정부와 언론들은 연신 '북핵'과 '경제'만을 외쳐되고 있겠지. 아마 알튀세르의 말처럼, 이데올로기적 국가기구에 의해 '호명'당한 대다수의 국민들은 자신들이 주류라고 믿게 될 지도 모를 일이다. 실은 이미 오래 전부터 비주류였음에도 불구하고. 그래서 비주류임을 자각하고 있는 비주류의 정치적 ..

生의 스산함을 지나

고등학교 때, 나는 일요일마다 경남도립도서관에 갔다. 창원 공단이 즐비하게 늘어선 거리를 지나 아파트 단지들이 시작되는 곳 어딘가에 위치해 있었다. 그 곳에서 탐독했던 책은 헤르만 헤세이거나 오래된 세계문학전집, 혹은 근사한 제목을 가진 수필이었다. 종종 이쁜 소녀가 도서관에 오길 손꼽아 기다리기도 했지만, 기다린다는 것 자체가 철부지 같은 공상이었다. (하긴 아직 그 공상에서 멀리 벗어나 있는 것같지도 않지만) 주말에도 찾는 사람이 없었던 그 도서관의 복도는 어둡고 스산했던 것으로 기억된다. (아마 지금은 다른 곳으로 이전하지 않았을까 싶다) 사람들이 찾지 않는 책들 속에선 많은 사람들이 죽었고, 그 힘으로 많은 사람들이 살아남고 있었다. 어제 집으로 가는 버스 안에서, 얼마 전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