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하련의 우주/Jazz Life 992

Hope

낡았지만, 오래된 세월만큼 무거운 JBL 스피커를 겨우 들어, 금빛 스파이크를 밑에 받쳤다. 겨우겨우 일어나 일요일 오전 내내 청소를 했다. 두 시간이 걸렸다. 가장 엉망인 서재를 차마 엄두가 나지 않아, 그냥 책들을 한 곳에 밀쳐두는 것만으로 만족해야 했다. 턴테이블에 17년 전 노량진 빽판 가게에서 산 LP를 올렸다. 이 정도 세월이 지나면, LP가 천 장쯤 모을 것이라 예상했는데, 몇 백 장 되려나. 이젠 시디보다 더 비싼 LP는 ... ... 학교 근처 단칸 자취방에서 청계천표 스피커와 골드스타 인티 앰프, 은빛 인켈 턴테이블로 들었던 클라투다. 지나간 세월이 새록새록 떠오르는 일요일 한낮이다. 나이 들면, 이런 싸구려 감상 따위에 젖지 않을 듯 싶었는데, 마음 속 나이는 먹지 않고 육체만 죽음을..

낚시, 혹은 시간을 그냥 보내는 놀이

지난 주말, 충북 음성의 큰골낚시터에 갔다 왔다. 바닷가 앞에 살았지만, 낚시와는 전혀 인연이 없었다. 대여섯번 낚시를 갔지만, 고기를 잡은 적은 없었다. 이번 낚시에서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하지만 멍하게 낚시를 하는 내 모습을 보면서, 가끔 이렇게 시간을 보내는 것도 꽤 매력적임을 알게 되었다. 아무 짓도 하지 않고 그냥 찌만 바라보면서 보내는 것. 흥미로웠다. '백수 놀이'에 가까웠다. 저녁 노을이 부서지면서 물의 표면에 닿았다. 오랜만에 유쾌한 경험이었다. 대신 며칠 잠으로 고생하긴 했지만.

비 그친 8월말의 오후

건조한 사무실, 드립커피를 내리는 서른 후반의 남자, 흐트러진 머리칼을 걷어올리며, 은빛 주전자에게 온 신경을 집중했다. 하지마 사무실에서 그에게 신경을 쓰는 이는 한 명도 없다. 비 그친 8월말의 어느 오후. 그는 조심스럽게 커피를 마셨다. 낯선 음악에 마음을 맡기자, 와르르 그냥, 주책없이 그의 마음은 무너져 내리기만 했다. 먼 바다에서 밀려오는 바람이 그리웠다. 아베 코보, 루이지 피란델로, 이탈로 칼비노가 떠오르는 여름날의 연속이다. 보이지 않는 사람이 되어가고 있는 중이다.

레퀴엠을 듣는 일요일

햇볕정책을 지지하면서, 서민들을 위한 정책을 추진하려다가 번번히 좌절했던, 배경없는 집안의, 야당 출신의, 상고 졸업의 전직 대통령은 자살하고, 젊은 시절 정치적 탄압이라는 탄압들을 다 받던 사형수 출신으로, 한국사람들이 떼로 수여하면 안 된다고 하던 노벨평화상을 받았던, IMF 구제금융 시기 극적으로 대통령에 당선되었던 전직 대통령이 죽고, ... 그러는 동안 남북 대화는 수익을 최우선 목표로 한다는 기업체의 총수가 넘어가 마치 정부 관계자가 된 양 이야기하고, 전직 대통령의 장례가 좋은 기회가 되어 북의 사람들이 서울로 오고, 그러는 동안 현 정부는 아무 일도 하지 않은 채 뒷짐만 지고, ... '잃어버린 10년'을 이끌었던 두 명의 대통령이 저 세상으로 가버리고, '잃어버린 10년'에 동의했던 사람..

김포공항을 날아오르는 베토벤

커다란 유리창, 여름의 열기와 도시의 먼지가 덕지덕지 붙은 흐릿함 너머로 김포공항이 한 눈에 들어왔다. 수 년 전 국제선이 사라지면서 김포공항은 예전의 땅을 상당수 잃어버렸다. 실은 하늘에서 내려앉는 비행기 속에서 바라보는 김포공항은 초라할 정도로 너무 작다. 수심 얕은 바다 옆에 바로 붙은 인천공항과 비교한다면, 김포공항은 집들로 둘러싸인 고립된 섬과 같다. 창 너머로 김포공항에서 이륙하는 비행기들이 보였다. 하나, 두울, 세엣... ... 1분, 2분, 3분, ... 13분, 14분, 15분, ... ... 가벼운 옷감의 운동복이 다 젖도록 나는 달렸다. 맨 처음 런닝 머신 위를 달렸을 땐, 꽤 적응하기 어려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두 세 번만에 적응했다. 나는 의외로 적응력이 좋다. 공중으로 자신..

침묵

"내가 죽으면 나를 알고 있었던 이 대상들은 더이상 나를 증오하지 않게 되겠지. 나의 내부에 있는 내 생명이 꺼져버릴 때, 내게 주어졌던 이 통일성을 내가 마침내 흩어버리게 될 때, 소용돌이는 중심을 바꿀 것이며 세계는 그 자체의 존재 방식으로 되돌아갈 것이다. 긍정과 부정의 대결, 소란, 빠른 움직임, 압박들이 이제는 더이상 허용되지 않을 것이다. 시선의 차디차고 불타는 흐름이 멈추게 될 때, 긍정하면서 동시에 부정하던 저 숨은 목소리가 말하기를 그치게 될 때, 흉물스럽고 고통스러운 이 모든 소란이 잠잠해질 때, 세계는 간단하게 이 상처를 되아무릴 것이며, 부드럽고 한가한 세상의 층을 넓혀갈 것이다. 더이상 과거의 잠재적 나를 초월하여 가기 위한 무슨 상처자국도 추억도 그 무엇도 남지 않게 될 것이다...

The Bad Plus

오래된 친구들과 익숙한 술집에 앉아, 서로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을 정도로 크게 들어놓은 90년대 초중반의 락 뮤직 속에서, 맥주 마시는, 그런 행복한 기회가 있었지만, 아트페어 준비 회의가 새벽 0시 40분에 끝나는 바람에 가지질 못했다. T_T 늘 그렇듯, 막판까지 힘들게 하는 것은 부스와 공간 설치/디스플레이, 오프닝 일정이다. 그리고 새벽에 들어온 집. 학.학. 거친 여름날의 쓸쓸한 열기로 가득하기만 하다. 대신 흥미로운 음악을 발견했다. 이 음악을 블로그 메인에다 걸어두신 실비아님께 감사를. (CD 사야겠다.) ... 이 얼마나 오랜만에 들어보는, 낯선 너바나인가.

토요일 아침의 단상

미디어법이 통과되는 모습을 보면서, 너무 황당했고, 이 나라에 살고 있다는 것이 부끄러워졌다. 그래서 그 기분을 떨쳐버리고자, 글 하나를 썼는데, 차마 블로그에 공개할 수 없더라. 그냥 이런 생각이 들었다. '그 국민에 그 국회의원' 정치판이 개선되길 바란다면, 먼저 스스로의 언행부터 되돌아보아야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과외로 대학 가는 시대를 끝낼 것'라는 표현은 너무 형편없지 않은가. 정말 끝낼 수 있을까? 다시 이렇게 물어야 할 것이다. 대학 가는 시대에 과외가 없었던 적이 있었던가? 일선 학교에서의 보충수업도 일종의 과외가 아닌가. 여튼 기분 전환이 필요한 시기다. 선생님께서 책을 내셨다. 다음 주에 책이 일선 서점에 깔릴 예정이다. 내가 서평을 올린다는 건 부끄러운 일이다. 올린다면 몇..

부끄러운 이 나라

최근 '미디어법 통과'는 여러모로 여당에게 유리한 정치적 포석이다. 그들은 이른바 보수언론이라 일컬어지는 '조중동'의 바람을 들어주었으며, 앞으로도 그들의 입을 빌어 자신들의 정치 행보나 정책 입안에 대한 대 국민 홍보 매체를 가지게 된 것이다. 법적 해석을 통해 이번 통과가 무효가 되더라도(이것이 가능한지 모르겠지만), 그들은 보수언론을 향해, 우리는 할 만큼 했다고 이야기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들은 정치적 목적을 위해선 여론이나 합리적 추론이나 사고, 정치적 신념의 일관성 따윈 헌 신짝 버리듯 버릴 수 있음을 몸으로 보여주는, 마치 '정치판'라 불리는 비옥한 평원에서 살아가는 원시적 감각으로 번뜩이는 야생 동물처럼 보였다. 이에 비해, 야당은, 뭐랄까, 마치 야생의 감각을 잃어버렸다고 해야 할까...

안경

어렸을 때, 안경을 끼고 있던 친구들이 부러웠다. 공부를 너무 열심히 해, 눈이 나빠졌다는 듯이, 그들 대부분은 반장이거나 부반장이었다. 안경과 은밀한 비례 관계가 있지 않을까 하고 생각했던 것이다. 뭔가 있어보인다고 해야할까. 그래서 억지로 눈을 나쁘게 만들기로 했다. 내 최초의, 자기 파괴적인 경향의 나쁜 마음이었다. 초등학교 때였다. 하지만 그 시도는 (다행스럽게도) 오래 가지 못했다. 그러나 사오년이 지난 후, 나는 결국 안경을 쓰게 되었다. 깨알 같은 글자의 소설책들(세로쓰기로 된 책들까지)과 음란한 영상을 보여주는 심야의 유선 방송 탓이였다. 안경, 내 몸의 연장 늘 몸에 붙어있지만, 의식하지 못하는 상태로 익숙해져버린 낯선 물체. 내 두 눈이 외부 세계를 향해 열려 있는 동안엔 언제나 눈 앞..