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하련의 우주/Jazz Life 992

2005년 7월 11일

사무실에서 키스 자렛의 퀼른 콘서트를 mp3로 듣고 있다. 이 음악이 나오는 보기 드문 영화가 바로 난니 모레티의 '나의 즐거운 일기'이다. 그런데 이 영화를 본 지 너무 오래되어, 기억이 가물가물거린다. 요즘 진행하고 있는 프로젝트가 너무 힘들다. 오죽하면 메신저 닉을 '자살 직전 모드'라고 해놓았겠는가. ㅡㅡ; 거참. 이렇게 프로젝트 어렵게 하는 것도 처음 있는 일이다. 그만큼 너무 쉽게 생각한 탓이다. 그건 그렇고, 나에게 길고 풍족한 여유가 생기면 시나리오를 쓸 생각이다. 그리고 그 시나리오로 영화 찍을 수 있다면 금상첨화일 것이다. 아마 기괴하고 낯선 영화가 되겠지만 말이다 나의 즐거운 일기는 언제쯤 씌여질 수 있을까. 키스 자렛은 늘 좋다. 내가 좋아하는 ECM 레이블의 컨템플러리 재즈 삼인방..

제목없음

뜻하지 않은 비가 내리고 내 머리칼이 비에 젖고 내 옷이, 내 가방이, 내 다리가, 내 손가락이, 내 눈동자가, 내 입술이 젖어들어갈 때, 그 아파트의 불빛은 아직 켜지지 않은 상태였다. 그 사무실의 불빛도 켜지지 않았고 그 다락방의 초도 켜지지 않은 터였다. 탁탁거리며 지나가는 자동차들 사이로 지나가면서 연신 두리번거리며 비가 내리지 않는 공간을 찾아보았으나, 허사였다. 피하고 싶은 인생들이 있었는데, 내 인생도 그런 종류들 중의 하나였다. 종일 방안에 앉아 요즘 하고 있는 프로젝트 상황 정리하고 책 읽고 친한 선배 개인전을 위한 글 궁리하고 담배는 딱 한 개비만 피고 더위에 지친 화분들을 옥상에 올려놓고 신나는 음악을 조금 틀다가 ... 그렇게 지쳐 쓰러져 오후 늦게 눈을 감았는데, 어느 새 늦은 밤..

나 취했노라

고대의 길과 근대의 길은 다른 모습을 하고 있다. 양재역 사거리에서 강남역 사거리 사이의 길들은 곧지만, 늘 막혀 있다. 느리고 뚝뚝 끊어지는 경적 소리와 숨 넘어 가는 엔진 소리들로 가득 차 있다. 고대의 길은 일 년에 한두 번 정도 익히 아는 사람들로 가득 차지만, 근대의 길엔 늘 모르는 사람들로 가득 차 있다. 곧지만 호흡하기 힘든 분위기로 내 삶을 옥죄는 길을 걸어가고 있었다. 6월 3일 금요일 밤 10시. 무릎엔 아무런 상처도 없지만, 실은 영혼의 무릎에 온통 상처투성이였다. 도망가지도 못하도록 나를 몰아 붙였지만, 실은 늘 도망갈 궁리만 하고 있었다. 이 때까지 나온 시집의 첫 장 중에서 가장 멋지고 우아한, 그러면서도 한없이 슬픈 것은 장정일의 시집이다. 늘 도망 중이라는. 발 한 쪽을 앞으..

하프시코드

틀어놓은 오디오에서 흘러나온 하시프코드 소리가 방안을 가득 메우고 깊이 잠든 도시의 한 모퉁이를 하나둘 천천히 채워나가기 시작한다. 이런 날 새벽은 때로 공포스럽고 때로 두려우며 때로 슬프다. 잠 자는 것이 두렵다. 논리적으로 따져묻기 시작해보면, 삶이란 것도 별 거 아니라는 생각을 하게 되지만... 삶이 아는 것처럼 흘러가지 못하듯... 내 공포도 내가 알지 못하는 어떤 곳에서 시작해 내 주위를 가득 메운다. 한 몇 주일 정도 아무 짓도 하지 않고 살고 싶다. 정말 아무 짓도 하지 않고.

앙드레 말로와 나

공부를 띄엄띄엄한 탓에, 길고 체계적인 글에 약하고 외국어는 그저 읽을 수준 밖에 되지 못한다. 국제 행사 경험은 이번이 처음이고 이런저런 일 탓에 불어 공부를 놓아두고 있었던 터라 간단한 인사조차 가물가물한 지경인데, 이번에 들어오신 선생님들 인사 드리러 가야한다. 몇 시간만 하면 간단한 회화 정도를 될 것같기도 한데, 오늘 밤엔 밀린 일도 하고 불어 공부도 해야한다. 오늘 가자는 걸 내일로 미루었다. 헐. 앙리 고다르는 세계적인 학자인데, 국내에선 인지도 낮다. 브라질에서 오신 에드손 로사 드 실바 선생도 브라질에선 최고의 학자로 인정받는 분이라, 브라질 대사관에서 협회로 연락이 왔을 정도다. 그러고 보면, 우리 나라의 인문학 지식인층은 너무 얕다. 이번 행사를 준비하면서, 세상에나, 앙드레 말로를 ..

여자

내가 사랑했던. 지금도 사랑하는 어떤 여자. 그런데 과연 사랑하는 걸까. 눈만 감으면 생각나고 힘들 때면 생각나고 행복할 때면 생각나고 비가 올 때도 생각나도 언제가 생각나긴 하지만, 그런데 과연 그녀를 사랑하는 걸까. 사랑은 언제나 유리창 같아서 보기엔 투명하고 순수해 보이지만, 얇은 망치 하나로 깨지는 게 사랑인데, .. 과연 난 그녀는 사랑하는 걸까. 현실의 삶은 너무 거칠고 힘들어서, 그냥 손을 놓아버리면, 그냥 놓아버리면 속이 편할 어떤 것이어서, 그 속에서 유리창 같은 사랑을 난 지킬 수 있을까. 내 꿈은 내가 손수 잡은 갤러리에 그녀의 작품을 내 손으로 직접 걸어, 내가 전시 평을 쓰고 잡지 잡아 인터뷰 하고 .. 그런게 꿈이었는데, ... 그게 가능할까. 하긴 가능은 할 꺼야. 대신 그녀가..

봄날. 맥주. 폴리스.

턴테이블에 폴리스(The Police) 레코드 판을 올려놓고 음악을 들었다. 맥주 두 잔을 마시면서 연신 담배를 피워댔다. 파란 하늘을 향해 담배 연기가 날아갔다. 내 몸을 녹색으로 물들이고 싶었다. 그러면 먼저 혀가 사라질 것이고 눈이 ... 코가... 오직 손 끝만 남아 지나치는 바람이며 해와 달의 움직임을 알게 되겠지. 그녀가 시집이라도 가나.. 오늘 그냥 눈물이 나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