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하련의 우주/Jazz Life 992

아담이 눈뜰 때

- 창원 고향 집 근처 어느 거리의 오후 창을 열면 들판이 보이고 멀지 않은 곳에 나무와 풀들로 가득한 숲이 있으리라는 상상을 해본다. 만약 그것이 이루어진다면, 그러면 내 상상력은 좀더 풍성해지고 내 우울함도 가라앉으리라. 내 영혼은 부드러우면서도 단단해지고 내 언어는 진실하면서 감동적으로 변하리라. 시간이 흘러 서울로 올라온 지 벌써 12년이 되었다. 그 사이 내 나이는 서른을 넘겼고 부모님은 그만큼 늙으셨다. 고향집 내 작은 방은 가끔 집에 들르는 여동생 내외가 자다가 가는 방, 내가 명절 때 잠시 지내는 방으로 변해버렸다. 그 사이 부모님과 할머니와의 사이는 더욱 나빠져 아흔을 향해 가시는 할머니는 늙은이들이 사는 집의 외딴 섬같이 변해 버렸다. 이런 생각을 하다보면 꼭 ‘베로니카의 이중생활’ 마..

눈이 내리고 있다. 어두움을 가르며 빛나는 움직임으로 허공을 가르고 있다. 그 사이를 사뿐한 영혼으로 날았다. 군데군데 세찬 바람들이 뭉쳐 그를 가로막았지만, 도리어 바람에 밀려 그는 더 멀리 올라갈 수 있었다. 지구는 멀고 우주는 가까워졌을 때 눈은 사라지고 찬란한 어둠으로만 그 영혼 가를 둘러샀다. 고요가 영겁의 시간으로 밀려들고 시작과 끝이 그 의미를 상실해버릴 때, 지구는 멀어지고 우주는 가까워지고 있었다. 눈이 내리고 있었다. 그 사이를 미끄러지듯 청춘이 지나고 있다. 사뿐한 청춘이 하얀 이빨로 영혼의 허기를 물고 가슴 속으론 잃어버린 사랑을 품으며 찬란한 어둠 속을 지나치고 있다.

2003년에 대하여

개인적으로 무척 힘든 한 해였다. 처음으로 내 인생이 그렇게 평탄한 인생이 아니라는 생각을 하기 시작했다. 날 아프게 했던 이들만큼 나도 누군가를 아프게 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으며, 그 순간 무디어진 내 얼굴을 떠올렸다. 먼 허공을 보면서 무덤덤한 표정을 짓는 것. 그것은 눈 앞에 있는 어떤 것도 응시하지 않으려는 의지의 표현이면서 회피이며 외면이다. 그것은 모르기 때문이 아니라 알기 때문이며 알면서 이미 절망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용기의 반복, 혹은 행동의 반복이 끊임없는 절망의 반복으로 이어진다는 생각 때문이다. 실크로드를 따라가다 보면 사막 한 가운데 폐허가 되어버린 오래된 성을 보게 된다. 사람들은 그 성에 살던 사람들이 사막으로 변해가는 지역을 버리고 딴 곳으로 갔으리라 추측하겠지만, 아마..

큐피드

Cupid PARMIGIANINO, 1523-24 Oil on wood, 135 x 65,3 cm Kunsthistorisches Museum, Vienna (비엔나 미술사 박물관) 날개 너무 작은가. 하긴 날면 되는 거지. 몸에 비해 날개가 작은 것처럼 보여도, 난 잘 날 거든. 활을 좀 다듬고 있어. 요즘같이 사랑이 희박한 시기엔 내 활이 무리를 하기 마련이야. 그래도 어쩌겠어. 나의 운명인 걸. 하지만 내 운명도 그렇게 오래 가지 못할 것같아. 천사에게만 희귀하게 걸리는 날개가 짧아지는 병에 걸렸거든. 실은 내가 사랑을 받지 못한 탓이라더군. 하긴 날 사랑하는 이는 없으니 말이야. 나도 사랑을 하고 싶은데 말이야. 인간들의 사랑을 위해 내 화살을 사용하지 않고 내 사랑을 위해 내 화살이 날아가는 모..

며칠 동안

며칠 동안 미술사 책만 봤다. 4-5 년 전 공부 한참 할 때, 정리해놓았던 노트를 새로 꺼내어 보는데, 역시 예술사는 어렵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최근에 그리스 예술을 정리했는데, 그리스 예술을 이해하기 위해선 고전주의와 낭만주의에 대한 개념을 먼저 파악해야 한다. 그러나 그리스 고전주의를 이해하려면 그것 뿐만 아니라 파르메니데스와 피타고라스를 알아야하고 헤라클레이토스와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를 알고 있어야 한다. 그리고 서사 문학의 대표작들도 읽어봐야되고 기초적인 건축 지식도 있어야 한다. 그리고 무수히 등장하는 예술가들이 어떤 양식을 보여주었는가에 대해서 이해하고 있어야 하며 그것이 후대에 어떤 식으로 반영되는가에 대해서도 알아야 한다. 그리고 그리스 역사에 대해서 알아야 한다. 하지만 이런 식으로..

크리스마스 이브

몇 달 전 턴테이블이 두 개 있을 때의 지저분한 내 방의 일부 어제 방 청소를 했다. 방청소라고 해 봤자 특별한 것도 없다. 이리저리 널린 책과 음반을 한 곳으로 모아놓고 방바닥을 한 번 쓸고 한 번 닦는 것이 전부다. 하지만 이것도 두 시간이 걸리니, 방 위에 놓인 게 책과 음반뿐만 아니라 몇 달 동안 쌓인 잡동사니까지 있기 때문이다. 이번 주가 크리스마스가 있다는 사실을 며칠 전 TV 뉴스를 보고 알았다. 시간 감각이 없어진 탓이다. 하긴 크리스마스야, 아이들 세상이니 아주 어정쩡하게 끼인 나이에 크리스마스에 대한 감흥 따위를 기대한다면 그건 무리다. 방에 앉아 척 멘지오니의 산체스의 아이들과 케니 드류의 피아노, 벨앤세바스티안의 초기 앨범을 오가며 듣다가, 아예 작정을 하고 꺼낸 것이 베트벤 교향곡..

예술의 끝 - 라이너 쿤체

예술의 끝 넌 그럼 안 돼, 라고 부엉이가 뇌조한테 말했다. 넌 태양을 노래하면 안 돼. 태양은 중요하지 않아. 뇌조는 태양을 자신의 詩에서 빼어버렸다. 넌 이제야 예술가로구나 라고 부엉이는 뇌조에게 말했다. 그러자 아름답게 캄캄해졌다. * 라이너 쿤체(Reiner Kunze) (* 전영애 옮김, 열음사, 1989) ‘아름답게 캄캄해졌다’는 표현은 참 좋다. 독일어로는 ‘Und es war schon finster’이다. 지금은 구할 수도 없는 이 번역시집은 내가 대학 가기도 전에 출판되어, 내가 이 시집을 알게 되었던 90년대 중반 무렵에 벌써 희귀시집이 되어버린 상태였다. 가끔 지방의 도시에 내려갈 일이 있으면 그 곳의 작은 서점에 들려 오래된 책 찾는 게 정해진 일처럼 되어버렸다. 위 시를 어떻게 ..

월요일 오전

자기 전에 적었던 글을 올리고 필요한 자료들을 인터넷으로 검색해 프린트하다 보니 오전이 다 갔다. 10시가 되기 전에 일어났으나, 금방 세 시간이 흘러가버렸으니, 할 말이 없다. 갑자기 우울해진다. 늘 우울한 인생이라, 우울해진다고 해서 달라질 건 없으니. 꽤 괜찮은 노래를 들었다. 집에 있는 어느 시디에서 옮긴다. 종종 이런 일이 있다. 사놓고 한 번 들었으나 무심결에 들어 기억 조차 못하는. Loves, Secrets Lies, Peter Cincotti.

근황

요즘은 주로 클래식 음악만 듣는다. 베르디의 오페라는 너무 좋다. 요즘은 보라매 공원에 있는, 낡은 건물의 도서관에 간다. 요즘은 저금통에서 동전들을 잔뜩 꺼내어 소비한다. 도서관 출입비 삼백원. 자판기 커피값 이백오십원. 동전으로 인생을 가리고 이틀이나 사흘에 한 번씩 면도를 한다. 면도할 때마다 인생 모양으로 턱 수염이 난 것에 경악한다. 요즘은 책만 읽는다. 허먼 멀빌의 모비딕을 읽고 뽈 발레리의 산문을 읽는다. 요즘은 그림책을 많이 본다. 요즘은 인터넷을 통해 영어로 된 글을 읽는다. 요즘은 핸드폰을 잘 받지 않을 뿐더러 아예 꺼놓기까지 한다. 요즘은 하늘 볼 일도 땅 볼 일도 없이 뿌옇게 변해가는 거리만 본다. 거리 속에서 추악한 모습들을 한 영혼들을 피해다닌다. 요즘은 가슴이 텅 비었다는 생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