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하련의 우주/Jazz Life 992

안 좋은 일

안 좋은 일을 당했다. 당황스러웠고 수습이 되지 않았다. 예상보다 빨리 회사를 그만두어야할 것같다. 내가 수습할 수 없는 일을 내가 하고 있었다는 사실에 놀라고 있다. 감정적으로 슬프고 육체적으로 고단한데, 내 옆에 아무도 없다는 사실을 또다시 실감했다. 울고 싶었는데, 그러지 못했다. 타인들 앞에서 운다는 건 구차스러운 일이다. 그만큼 가치없는 일이기도 하다. 감정은 오래 지속되지 않고 그만큼 인간은 허약하다. 워홀 식의 '가면 가리기'에 익숙해져야 겠다. 상처입지 않기 위해 상처를 주지 않았고 받은 상처를 누구에게도 보여주지 않았다. 때때로 보여주고 싶은 이가 생기긴 하지만, 지극히 계산적이면서 전략적이다. 이번 겨울, 사각의 방에서 갇혀 지내게 될 듯하다. 매일 아침 달리기를 할 생각이고 불어 공부..

노르웨이의 숲

예전에 나는 한 여자를 소유했었지, 아니 그녀가 나를 소유했다고 할 수도 있고, 그녀는 내게 그녀의 방을 구경시켜 줬어. 멋지지 않아? 노르웨이의 숲에서 그녀는 나에게 머물다 가길 권했고 어디 좀 앉으라고 말했어. 그래서 주위를 둘러보았지만 의자 하나 없었지. 양탄자 위에 앉아 시계를 흘끔거리며 와인을 홀짝이며 우리는 밤 두 시까지 이야기했어. 이윽고 그녀가 이러는 거야. "잠잘 시간이잖아." 그녀는 아침이면 흥분한다고 말했어. 그리곤 깔깔거리며 웃기 시작했지. 나는 하지 않겠다고 말하곤 목욕탕으로 기어들어가 잠을 잤어. 눈을 떴을 때 난 혼자였어. 그 새는 날아가 버린 거야. 난 벽난로 불을 지폈어. 멋지지 않아? 노르웨이의 숲에서. 하루키를 읽다 보면 맥주 생각이 나고 혼자 음악 들으며 맥주 마시다 ..

또다시

백수가 될 예정이다. 회사를 그만 둘 생각을 굳혔다. 다른 회사에서 오퍼가 들어왔는데, 고민 중이다. 어느 정도의 시간이 지나자, 난 세상 속에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처지가 되어버렸다. 이상은 저 멀리 날아가고 있으며 인생에는 그 어떤 비밀도 가치도 숨기고 있지 않다고 믿어버리는 순간(* 논리적으로는 이 결말에 다다를 수 밖에 없다. 이것이 현대의 비극이다) 난 생의 강물이 흘러가는 대로 그저 휩쓸려 내려가고 있었다. 하루키에 대한 글을 길게 적을 생각이었나, 아주 짧게 적을 수 밖에 없을 것같다.

초겨울이었다

초겨울이었다. 95년 창원이었다. 그녀의 방에서 양말 하나를 놔두고 나왔다. 침대에서 뒹굴었지만 성공적이진 못했다. 술을 너무 마시고 나타난 그녀를 안고 그녀의 집까지 오는 것만으로도 힘들었다. 술에 취해 침대에서 바로 곯아떨어지리라 생각했던 그녀가 덥석 날 껴안았을 때, 내일 오전까지 그녀와 있어야한다는 걸 알게 되었다. 침대 옆 큰 창으로 새벽빛이 들어왔다. 새벽빛들이 그녀와 내 몸을 감싸고 지나쳤다. 텅빈 도로를 질주하는 자동차 소리가 들렸고 새벽 취객의 소리도 들렸다. 내 몸 위에서 그녀는 가슴을 두 손으로 모으면서 내 가슴 이쁘지 않아. 다들 이쁘대. 하지만 그녀와의 정사는 성공적이지 못했다. 술에 취한 그녀는 금방 지쳐 잠을 자기 시작했고 그녀 옆에서 아침까지 누웠다 앉았다 담배를 피워댔다. ..

네모에 대하여

일렬로 늘어선 아파트들 위로 나즈막하게 몰려든 회색 빛 구름들이, 스스로의 생의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와르르 무너지려는 찰라, 무슨 까닭이었을까. 이름지을 수 없을 정도로 다양하게 생긴 구름 뭉치들이 네모반듯한 벽돌 모양으로 쪼개지더니, 아파트 단지 위로 떨어져 내렸다. 실은 특별한 일은 아니었다. 한 구름의 무게가 늙어가면서 허공을 지탱할 수 없을 정도로 무거워진다는 것쯤은 사랑에 빠지지 않은 이들도 충분히 알 수 있는 일이기 때문이었다. 네모난 손을 가진 피아니스트가 십년동안 클럽 여기저기를 떠돌아다니면서 모은 돈으로 구입한 상아 건반 피아노를 두드리면서 '네모', '네모','네모'라고 중얼거린다. 실은 네모난 건 너무 많다. 빨리 달려야만 지나갈 수 있다는 고속도로의 이정표들도 네모이고 그 곳을 지..

오노 요코

"미술관에 있다 나오면 세상이 다르게 보일 겁니다" 지금은 절판된 곰브리치와의 대담집 한 모퉁이에서 읽은 문장이다. 그 책에 실린 말들 중에 내가 제일 좋아하는 말이기도 하다. 아직 철이 덜 든 게 분명해 보인다. 요코를 만나고 난 다음, 존 케이지, 백남준, 요셉 보이스 등과 같은 이들의 작품를 보고 싶어졌다. 동시에 탈출하고 싶어졌다. 인생으로부터... 멀리, 멀리, 멀리. 날 잡고 있는 것이 무엇일까. 며칠째 심리적으로 무척 고통스럽다. 내 속의 '엘랑 비탈e'lan vitale' 때문일까. 그러므로 내가 살아있다는 증거? 작품 활동을 시작하고 싶다. 하루 종일. 오래동안. ... 그렇게 갈증을 느끼고 있다.

달팽이, 또는 달팽이사내

1. 기사 식당에서 혼자 삼겹살에다 저녁식사를 했다. 그리고 파아란 상추에서 새끼손가락 손톱의 4분의 1 정도 크기의 달팽이를 발견했다. 신기한 녀석이었다. 그래서 저녁을 먹는 동안 물수건 위에다 놓아두었다가 식사를 끝내고 보라매공원까지 걸어가 풀숲에다 녀석을 놓아두었다. 가는 내내 내 왼손, 가운데손가락 위에서 꿈쩍하지 않더니 기다란 풀입 위에 놓아두니, 아래로 내려가기 시작했다. 지나치는 자동차들의 불빛에 놀라지나 않을까 걱정이 되었지만, 정원없는 내 거처를 탓해야만 했다. 그 작은 달팽이가 보라매역 근처 기사 식당까지 오게 된 사연을 생각해보면, 그것을 달팽이의 입장에서 보자면, 거의 기적에 가까운 일이 아닐까. 식당에서 계산을 하는 동안 손가락 하나를 펼쳐놓고 있는 모습을 본 식당 아줌마가 손을 ..

고객사에서의 "렘브란트"

(* 큰 그림보기) 일이 제대로 되지 않을 때, 그래서 스트레스를 받지만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할 때, 사모하는 여자가 다른 남자의 입술 위로 자신을 입술을 포개고 있을 때, 그 때 마침 하늘엔 별들이 가득하고 바람이 불어 내 머리칼을 스칠 때, 그림을 그리던 후배가 어느날 술을 마시자며 와선 그림을 이제 그리지 않겠다고 말할 때, 또는 글을 쓰던 후배가 술에 취해 전화를 걸어 난 글을 저주할꺼야라고 고래고래 고함을 칠 때, 인생이 뜻한 바, 자신의 의지대로 풀려나가지 않을 때, 그래서 의기소침해지고 침울해지고 팔목 위에 굵게 올라온 핏줄을 물끄러미 바라보게 될 때, 렘브란트를 떠올리자.

Tchaikovsky Piano Concerto no.1

블라디미르 아쉬케나지의 피아노. 로린 마젤(Lorin Maazel)의 런던 심포니 오케스트라. 1972년도에 녹음된 것으로 보이는, 낡은 자켓의 LP. 그리고 로린 마젤이 지휘하고 Pilar Lorengar, Dietrich Fischer Dieskau, Giacomo Aragall이 주연한 La Traviata. 오늘 종일 집에서 혼자, 몇 주 전 슈퍼에서 사온 다진 마늘을 잔뜩 집어넣은 라면 하나, 오늘 근처 슈퍼에서 사온 포장 냉면. Decca에서 나온 두 개의 낡은 LP 앨범. 오늘 하루 그냥 지나가버린다. 텅빈 영혼 속으로 밀려드는 한 여름 밤의 낮고 축축한 더위. 내일이 가고. 내일이 가고.

비디오 테잎

겨울 창원. 새벽 3시. 불꺼진 지하 비디오 대여점. 카운터에 앉아 비디오들을 카피했다. 그 때 많은 사연을 만들었다. 어느 지방 도시에서 열린 시네마떼크에 나가기도 했고 새로 생긴 잡지의 모니터 기자도 했고 슬픈 인연을 만들기도 했다. 그 때 새벽이면 단란주점에서 삼촌을 하던 친구와 술을 마셨고 다른 단란주점에 나가던 여자아이와 나이트를 놀러가기도 했다. 그 때 왕가위, 키에롭스키, 데 시카, 장 뤽 고다르, 브레송, 테렌스 멜릭, ... ... 이십대 초반이었으니... 꽤나 심각하던 나이였다. 그 때 처음 재즈를 만났다. 덱스트 고든을 좋아했었다. 그 지하 비디오 대여점에서 복사해놓은 테잎들을 이제서야 정리한다. 돌이켜보니 거의 10년이 다 되어간다. 오늘 무척 피곤했다. 일은 많고 도망칠 수 없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