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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아란 영혼

책들의 우주/문학 +237
가르시아 마르케스 - 8점
송병선 엮어 옮김/문학과지성사


<라틴아메리카의 고독>,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

( <가르시아 마르케스>, 문학과 지성사, p.187)

(이 글은 수 년 전에 작성한 글이다. 외출하기 전에 다시 다듬어 올린다.)

최근 영국의 저명한 역사학자인 에릭 홉스봄은 어느 인터뷰에서

“민주주의와 시장 사이의 모순이 현대의 가장 근본적인 문제이며 시장은 인간을 사적인 고객으로 취급하지만 민주주의는 공동체의 문제에 책임을 질 줄 아는 공적 시민을 필요로 하기 때문에 시장의 전면적 지배는 곧 민주주의의 붕괴를 초래할 것”

이라고 지적했다.

또한 헌팅턴의 “문명충돌론”이 새로운 시대의 세계의 정치적 상황을 예리하게 지적해낸 이론으로 새삼스럽게 주목받고 있다.

특히 이슬람문화권과 기독교문화권의 갈등은 이미 여러 전쟁을 통해 확인되었고, 지금도 확인되고 있다. 냉전체제가 끝났기 때문에, 그리고 후쿠야마식으로 자본주의가 승리했기 때문에, 그래서 우리는 더욱더 역사의 암울한 미궁 속으로 빨려들어가고 있는 것이다.

핵의 위협은 심해졌고(강대국에서가 아니라 제 3세계에서) 빈부의 격차는 더욱더 벌어지고 있다. 최근 뉴라운드협상에서 보여준 세계시민단체의 시위는 2000년대의 자본주의가 어떤 상황에 와있는가를 여실히 보여주는 예일 것이다.

그렇다면 이럴 때 한가하게 앉아 소설 나부랭이, 혹은 시 나부랭이를 읽는 것은 정말이지 한심한 짓처럼 보일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한심한 짓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기 위해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가 1982년 노벨문학상을 받으면서 행한 수상연설문을 읽는 것도 나쁘지 않을 듯 보인다.
(물리적 실체를 가지지 못하는 독서 행위는 장기적이고 거대한 변화를 이끌어내기에 매우 충분한 행위일 수 있다. 그런데 이 사실을 한국의 현대 작가들은 잘 모르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우려를 나는 요즘 가지고 되었다.)

그는 지구 반대편에 있는 우리에게, 혹은 유럽인들에게 낯설고 신기롭고 상상력으로 가득차, ‘마술적 리얼리즘’으로 불리는 소설들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그는 그것이 어떤 배경을 뒤에 두고 있는가를 말하며 그리고 우리들의 편견에서 눈을 뜨라고 강조하고 있다. 그리고 문학이 어디에서 나오며 그것이 어떤 일을 하고 있는가를 말한다(아래는 좀 길게 인용하였다. 아홉 페이지의 짧은 글이므로 한 번쯤 읽어두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이다).
 


“멕시코에서 세 번에 걸쳐 독재를 자행했던 안토니오 로페스 데 산타나 장군은 ‘파스텔 전쟁’이라고 불리는 전투에서 잃어버렸던 자기의 오른쪽 다리를 화려하고 멋진 장례를 치르며 매장했습니다. 가브리엘 가르시아 모레노 장군은 16년간 절대 군주로서 에콰도르를 통치했으며 그의 시체는 대통령 의자에 앉혀진 채 정복과 훈장을 달고서 치러졌습니다. 30,000명의 농민을 잔인하게 학살했던 엘살바도르의 견신론자이자 폭군인 막시밀리아노 에르난데스 마르티네스 장군은 자기 음식에 독이 들었는지 확인해보기 위해 특수한 추를 고안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모든 관공서의 전등에 빨간 종이를 붙여서 성홍열 전염병과 싸우도록 했습니다. 테구시갈파의 중앙 광장에 우뚝 서 있는 프란시스코 모라산 장군의 기념비는 사실은 파리의 중고 조각품 창고에서 구입한 네이 제독의 동상입니다.

(중략)

다시 말하면, 라틴 아메리카 대륙은 정신나간 남자들과 역사적인 여자들이 즐비한 거대한 왕국이며, 그들의 한없는 완고함은 전설과 혼동된다고 다룬 것입니다. 우리는 한 순간도 마음 편히 있은 적이 없습니다. 불길에 휩싸인 대통령궁에 피신했던 프로메테우스 같은 어느 대통령은 혼자서 군대 전체와 싸우며 숨을 거두었고 수상하기 짝이 없지만 아직까지 그 원인이 분명하게 밝혀지지 않은 두 번의 비행기 사고는 인자하기 그지없었던 또 다른 지도자의 목숨과 민중의 명예를 복구했던 민주적인 군인의 목숨을 빼앗았습니다. 5번의 전쟁과 17번의 쿠데타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하느님의 이름을 빈 악마 같은 독재자도 출현했으며, 그는 우리가 사는 시대에서 라틴아메리카 민족을 말살하려고 했던 첫 독재자였습니다. 그러는 동안 2천만명의 라틴아메리카 어린이들은 채 두 살이 되기도 전에 죽었고, 이 숫자는 1970년 이후 유럽에서 태어난 모든 아이들의 수를 상회하는 엄청난 숫자입니다. 정치 탄압으로 실종된 사람들은 거의 12만 명에 이르고 있으며, 이것은 마치 스웨덴의 웁살라 시의 모든 주민이 어디에 있는지 모른 채 실종된 것과 같습니다. 임신한 채 체포된 수많은 여인들이 아르헨티나의 감옥에서 아기를 낳았고 아직도 자기 아이들이 비밀리에 입양되었는지 아니면 군사 정권에 의해 고아원에 수용되었는지조차도 모릅니다. 모든 것이 이런 식으로 되지 않게 하려는 소망으로 거의 20만 명에 가까운 남녀가 라틴 아메리카 대륙에서 죽었습니다. 그리고 10만 명 이상이 중미의 니카라과, 엘살바도르, 과테말라의 조그만 세 나라에서 숨을 거두었습니다. 만일 이런 일이 미국에서 일어났다고 가정해본다면, 임시로 추정해본 숫자는 4년 간 백만여 명이 폭력에 의해 희생된 것입니다.

마음씨가 극진하고 돈독한 전통의 나라였던 칠레에서는 인구의 10퍼센트에 해당하는 백만 명이 조국을 떠나야 했습니다. 인구는 2백 50만의 작은 나라이지만 라틴아메리카에서 가장 문명국으로 여겨졌던 우루과이는 인구 5명당 한 명 꼴로 망명을 떠나야만 했습니다. 엘살바도르의 내전은 1979년 이후 거의 20분에 한 명 꼴로 피난을 가게 만들었습니다. 따라서 라틴아메리카에서 강제로 이주했거나 혹은 망명한 사람들을 수용할 수 있는 나라는 노르웨이보다도 더 많은 인구를 가질 것입니다.

(중략)

우리 현실을 타인의 방식으로 해석하는 행위는 갈수록 우리를 이해하지 못하고, 갈수록 우리를 덜 자유스럽게 하며, 갈수록 고독하게 만드는 데 이바지할 뿐입니다. 아마도 존경받는 유럽이 자신의 과거에 비추어 우리를 본다면 지각 있는 행동을 하게 될 것입니다. 런던이 첫 성벽을 건설하는 데 300년이라는 세월이 걸렸으며 주교를 갖는 데 또 다른 300년이 걸렸고, 로마는 에트루리아 왕이 인류의 역사 속에 이식할 때까지 20세기 동안이나 불확실한 어둠 속에서 몸부림쳤습니다. 심지어 부드러운 치즈와 무감각한 시계로 우리를 즐겁게 하는 오늘날의 평화의 민족인 스위스인들도 16세기까지만 해도 돈을 위해서라면 목숨까지도 버리지 않는 용병들로 유럽을 피로 물들였습니다. 심지어는 르네상스가 절정에 달했을 때에도 제국 군대의 돈을 받고 고용된 12,000명의 독일 용병들이 로마를 약탈하고 유린했으며, 8천명의 로마 주민들을 칼로 쓰러뜨렸습니다.

(중략)

인류의 전역사를 통해 단순히 유토피아처럼 보였던 이런 가공할 만한 현실 앞에서, 모든 것을 믿는 우화의 창조자들인 우리는 아직도 그것과 반대인 유토피아를 창조하는 작업을 실행하기에 늦지 않았다고 믿을 권리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삶의 새롭고 활짝 개인 유토피아이며, 그곳은 아무도 타인을 위해 심지어는 어떻게 죽어야 한다고까지 결정을 내릴 수 없는 곳이며, 정말로 사랑이 확실하고 행복이 가능한 곳이고, 백년 동안의 고독을 선고받은 가족들이 마침내 그리고 영원히 이 지구상에 새로운 기회를 가질 수 있는 곳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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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전거 여행

김훈, 생각의 나무, 2000


김 훈의 문장은 그 서정성의 깊이로, 그리고 그 문장의 우아함으로 언제나 여러 평자들의 호평을 받는다. 하지만 이번 <자전거 여행> 뒷 표지에 실린 정끝별의 글은, 속된 말로 표현하자면 '오버'다. 늘 소설이나 시집, 혹은 산문집 뒤에 실린 평론가들의 평은 작가들의 영혼을 비켜나가선 스타카토 풍의, 뚝뚝 끊어지는 문장의 공허함만을 선사한다. 이번도 틀리지 않아서 '가히 엄결하고 섬세한 인문주의의 정수'라든 가 '그의 사유와 언어는 생태학과 지리학과 역사학과 인류학 과 종교학을 종(縱)하고 횡(橫)한다'라는 문장은 <자전거 여행>을 아무리 다시 읽어도 이해가 불가능하다. 왜냐면 이 책은 제목 그대로 글쓴이가 자전거로 여행하면서 적은 기행문이기 때문이다. 가끔 몇 권의 책을 언급하지만 그건 잠시 지나가는 말일 뿐, 어떤 인문학적 성찰이나 학문에 대한 진지한 연구 따위는 없다.

김 훈의 새로운 산문집 <자전거 여행>은 불행하게도 그가 이전에 보여주었던, <선택과 옹호>의 놀라운 문학적 통찰이나 <풍경과 상처>의 풍경 속을 파고 드는 문장의 밀도는 사라지고 세파에 시달리는 직장인 김 훈이 자전거를 타고 가면서 잠시 세파를 잊는 정도에서 멈추고 있다. 그러나 서점에 진열되어 있는 많은 책들 중에서 아무런 고민도 하지 않고 집을 수 있는 책이라는 점은 부정할 수 없다.

'살아서 아름다운 것은 나의 기갈에 물 한 모금 주지 않았다. 그것들은 세계의 불가해한 운명처럼 나를 배반했다. 그러므로 나는 가장 빈곤한 한 줌의 언어로 그 운명에 맞선다. 나는 백전백패할 것이다'

김 훈은 내가 사랑하는 몇 되지 않는 작가들 중의 한 명이고 언제나 그의 책을 기다린다. 요즘 작가들은 너무 자신들을 소모시키고 스스로 천박한 자본주의의 상품으로 진열되기를 원한다. 이것을 그들은 거리낌없이 '대중주의'라고 말한다. 김 훈은 그 곳에서 약간 비켜 서있으며 언제나 정직하게 세상을 바라보고자 한다. 우리 시대의 작가나 예술가에게 필요한 것은 '대중과의 호흡'이 아니라 '자기자신에 대한, 예술에 대한, 그리고 세상에 대한 정직한 성찰'이다.

 - 2000년 8월 14일


7년이 지나는 사이, 김훈은 글 잘 쓰는 신문 기자에서 한국에서 몇 되지 않는 베스트셀러 소설가로 변해버렸다. 그리고 그가 썼던 책들, 대부분 잘 팔리지 않았던 몇 권이 다시 출판되기도 했다. 재미있는 풍경이다. 얼마 전에 읽은 기사가 떠오른다. 서울 시내 길거리에서 루이 뷔통 가방을 3분마다 하나씩 볼 수 있다는 것에 대해 패션 전문가들은 '패션의 수준이 미성숙해서'라고 지적했다. (
http://news.media.daum.net/culture/others/200801/04/hankooki/v19495312.html) 이와 비슷하게 김훈 문학에 대한 대중의 인기도 그런 것이 아닐까 싶다. 오래된 표현 중의 하나로 '문화는 심심함을 먹고 자란다'라는 것이 있는데, '문화는 모험으로 성숙된다'도 포함되지 않을까. 문화 체험은 적당한 양의 모험이 요구된다. 익숙치 않는 책이나 음반을 한 번 경험해보는 것, 그렇게 함으로써 성숙해질 수 있다. (좀 과격한 방법인가)
아마 2000년 이전에 김훈을 좋아했고 그의 글을 탐독했던 이들 중 일부는 지금의 김훈 인기를 낯설게 바라볼 것이 분명하다. 참 낯설다.

- 2008년 1월 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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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먼 자들의 도시>>, 주제 사라마구Jose Saramago(지음), 영목(지음), 해냄

 

 

 

소설을 읽다 끔찍한 기분이 들어, 읽기를 멈춘 적이 번이 아니었다. 그리고 소설을 읽은 지금도, 끔찍한 기분이 사라진 것이 아니다.

 

놀라운 소설 앞에서, 나는 다시 위대한 서사가 어떻게 우리 인간의 삶과 영혼, 밑바닥에 숨겨진 고통스러운 존엄성에 대해 상기시켜 주는가를 목격하게 된다.

 

내가 동안 읽었던 어느 소설보다 위대했고, 고통스러웠으며, 인간이란, 인간으로 살아간다는 것이 어떤 것인가를 생각하게 만들었다. 누구든지, 소설은 반드시 읽어야 소설들 중의 하나다.

 

 

눈먼 자들의 도시 - 10점
주제 사라마구 지음, 정영목 옮김/해냄(네오북)



* 아래는 주제 사라마구의 단편 소설이다. 일독을 권한다.

2007/04/15 - [지하련의 우주/Jazz Life] - 무인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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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기와 천재>>, 명섭(지음), 인물과사상사

 

 

 

책을 구입한 이유는 매우 단순하다. 알라딘 서평 대회(?) 서평 하나 내어 도서 구입비라도 받아볼 생각이었다. 동시에 한겨레신문사에서 고종석 기자 이후로 필력을 자랑한다는 고명섭 기자의 문장을 보고 싶은 것도 있었다. 하지만 서평을 내야 하는 기간 중에 책을 읽지도 못했으니, 그냥 값만 날린 꼴이 되었고, 대신 위안이라고 만한 것이, 고명섭 기자의 머리말 <‘불행한 의식 모험과 투쟁> 근래에 읽어본 글들 중에서 수위를 차지할 정도로 매혹적이었다.

 

하지만 책은 전반적으로 재미있고 쉽게 읽히나, 저자가 읽었던 책들의 다이제스트 판으로 밖에는 읽히지 않는다. 책에 등장하는 아돌프 히틀러, 세르게이 네차예프, 조제프 푸셰, -자크 루소, 나쓰메 소세키, 프란츠 카프카,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 마르틴 하이데거, 미셸 푸코의 대략적인 삶만을 읽을 있을 , 저자 나름대로의 독창적인 시각이 담겨져 있다거나 인물들에 대한 새로운 정보를 알게 된다거나 혹은 인물들이 가졌던 사상, 문학, 철학 등의 세계에 대한 깊이 있는 앎을 얻게 되는 것이 아니다.

 

점은 책의 단점이자, 장점이다. 같은 독자에게 책은 흔하게 있는 책들 중의 하나일 뿐이고, 일반 독자들에게 책은 무척 재미있고 흥미로운 종류의 책이 수도 있을 것이다.

 

아마 알라딘 서평 대회에 썼다면 이런 서평이 나오지 않았을 것이라 생각된다. 조금 길고 장점을 조금 언급했으리라 기대된다. 하지만 읽고 뒤의 불쾌함은 어쩌지 못하겠다. 왜냐면 한결같이 문제적 인물들이고 현대사에 깊은 영향을 끼쳤음에도 불구하고 너무 쉽고 단순하게 언급되는 것에 그쳤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이런 생각을 해보게 된다. ‘저자가 기자였기 때문일까?’

 


광기와 천재 - 6점
고명섭 지음/인물과사상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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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매의 노래>>, 바진(지음), 홍석표, 길정행, 이경하(옮김), 황소자리

 

 

 

책을 읽으면서 현대 중국 사회에 있어서 문화혁명’(1966 ~ 1976) 얼마나 깊은 상처를 남겼고, 아직도 아물지 못하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이에 노(老) 작가 바진은 끊임없이 개인의 삶과 문학의 존재 의미를 물으며, 고통스럽고 수치스러운 과거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가를 고민하고 있었다. 그는 아직도 문화혁명의 상처에서 자유롭지 못했고 끊임없이 문화혁명 시기의 자기 자신과 그의 가족, 그의 동료들에 대해 회상하면서 후회했다. ‘바진 타계 일주년 추모 수상록 선집이라는 부제를 달고 나온 책에서 독자는 시간 앞에서 끝없이 진실해야 된다는 작가의 목소리를 듣게 된다.

 

자신이 가장 절실하게 느끼는 일을 없단 말인가? 문혁이라는 기름 솥에서 10년을 뒹굴었는데, 몸과 마음을 졸였던 재난에 대해서 쓰면 된단 말인가? 누군가 나에게 서독 청년이 나치가 폴란드에서 종족 말살용 살인공장을 지었던 일을 믿지 못하고 일이 일부 사람들의 환상 불과하다고 생각하더라는 일화를 들려주었다. 이런 일이 있을 있다니! 겨우 40년의 세월인데, 사람들은 나치당원이 인성을 저버리고 행한 극악무도한 죄행을 잊어버린 것이다. 나는 아우슈비치의 나치 전범 박물관에 적이 있다. 학살수용소의 유적은 아직도 그곳에 보존되어 있었다. 독가스실과 시체를 태우던 용광로가 몸서리쳐지게도 눈앞에 보였는데, 벌써 존재들에 대해 부정하는 사람이 생겼단 말인가!
(30
– 31)

 

과거란 부정할 없는 사실로서 존재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문화혁명은 이미 잊혀진 과거가 되고 있었다. 그래서 문화혁명에 대해 이야기하고 그것을 상기시키면서 비이성적인 시기 동안 사라져간 동료들과 고통 받은 사람들에 대해 이야기하는 바진을 도리어 공격하기에 이른 것이다. 지금은 극좌파적 오류라는 중국 공산당 공식 평가를 받은 문화혁명. 책에 실린 글들이 1980년대에 쓰여졌다는 점에서, 2000년대의 중국 작가들은 이것을 어떻게 회상하고 있을까 궁금해졌다. 그리고 문화혁명 시기, 중국 신문학의 대표적인 작가 중의 사람인 바진을 비난하고 공격했던 10대의 아이들은, 40, 50대가 지금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을까? 그들은 과연 아직도 문화혁명을 기억하고 있을까? 그래서 바진은 문혁박물관 세워야 한다고 끊임없이 주장하고 있다.

 

독일이나 일본이나 중국이나 한국이나 … … 일부 사람들에게는 과거란 날조된 상상의 부산물이고, 일부 사람들에게는 아직도 아물지 않은 상처이고, 나머지 대부분의 사람들에게는 있으나 마나 어떤 종류의 것이 되어버렸다. 그리고 수잔 모스의 <<발터 벤야민과 아케이드 프로젝트>> 마지막 부분의 짤막한 이야기는 묘하게 바진의 책을 떠오르게 만들었다. 과거는 끊임없이 우리 곁을 돌며, 우리의 현재에 영향을 주고 있다.

 

1982년에 (1926년에 벤야민의 교수 지원을 퇴짜놓은) 프랑크푸르트 대학에서 열린 국제학회에서는 <<파사젠베르크(아케이드 프로젝트)>> 벤야민 <<전집>> 5권으로 출판된 사건에 주목했다. 공식 발제가 끝난 다음날 아침에 학생들과의 자유 토론에서, 벤야민 학자들은 각자 대립하는 학파에 맞서 자기만의벤야민을 옹호했다. 이들 논쟁은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는다. 너무 많이 들었던 논쟁이기 때문이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날 아침에 통찰력 있는 발언을 것은 우리가 아니라 독일 학생이었다. 갑자기 그는 학회장에 독일계 유대인이 없다, 자기 세대 학생 중에 그들이 없다고 말했다. 그는 그들의 부재가 느껴진다고, 그들이 없어서 슬프다고 말했다. 학회장은 갑자기 유령들로 가득 찼다. 우리는 오한을 느꼈다.
(<<
벤야민과 아케이드 프로젝트>>(수잔 모스 지음, 문학동네), 427
)





매의 노래 - 8점
바진 지음, 홍석표.길정행.이경하 옮김/황소자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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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토끼야 들어와 편히 쉬어라, 김서령(지음), 실천문학사


제법 탄탄하고 사람의 시선을 잡아끄는 표현력을 가진 김서령의 첫 소설집 읽기의 시작은 매우 유쾌했다. 하지만 다 읽은 지금, 요즘 작가들은 왜 여기에서 멈추어 버리는 것일까 하는 생각에 불쾌해졌다. 도리어 뒤에 찬사에 가까운 평문을 쓴 방민호(문학평론가)나 소설가 이혜경, 문학평론가 서영인의 생각이 궁금해졌다.

이 소설집에 실린 여러 단편 속 인물들은 한결같이 가난하거나 불행하거나, 그리고 주변의 누군가가 죽는다. 이 얼마나 손쉬운 작법인가. 이렇게 무책임할 수가 있을까. 아무리 소설가는 소설 속 인물들에 대해 신과 같은 권능을 부여받는다고는 하지만, 이 젊은 소설가의 세계 속에서 곧잘 사람들이 죽고, 그 옆의 주인공들은 슬퍼하다가 지쳐 도망가거나 잠시 잊기 위해 잠이 들거나 그건 나와는 무관한 일이야 식으로 끝나버린다. 꼭 작정이라도 한 듯이 인물들을 비극 속으로 몰아넣고는, 심지어 그 인물들에게 한 줌의 희망, 아니 헤어날 수 없는 절망 속에 빠질 기회마저도 박탈해버리는 것처럼 느껴지기까지 한다.

과연 우리들의 삶이란 게 정말 그런 것일까. 다시 한 번 질문하지 않을 수 없다. 과연 삶이란 무엇일까.

그런데, 어쩌면 그럴 지도 모르겠다. 이제 우리에겐 헤어날 수 없는 절망 속에 빠질 기회마저도 없을 지도 모르겠다. 절망에 빠질 기미가 보일 때면, 케이블 TV를 보고, 컴퓨터 게임을 하면 되면 그 뿐이니까. 아니면 술이나 마약을 해도 된다. 그렇게 절망에 빠질 시간마저도 이제 뒤로 미룰 수 있게 된 것이다. 아니면 절망에 익숙해져 버린 탓에, 너무 무감각해졌는지도 모르겠다.

한 때 위대한 비극의 시대가 있었다. 그 당시로서는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비극의 소용돌이 속에서 우리의 주인공은 그 소용돌이를 힘겹게 이겨내며, 후대의 우리에게 휴머니즘이란 어떤 것인가를 보여주기도 했다. 하지만 이제 그런 비극은 없다. 그런 비극적 상황은 너무 많은데, 그 옛날의 그런 주인공은 이제 어디에도 없다. 그리고 그 누구도 그런 주인공 역할을 하고 싶어 하지도 않는다.

김서령의 젊은 주인공들은 비극적 상황 속에서 ‘나는 주인공이 아니야’라고 중얼거리는 미성년에 가까웠다. 하긴 우리 시대는 조로의 시대이면서, 동시에 미성년의 시대일지도.


작은 토끼야 들어와 편히 쉬어라 - 8점
김서령 지음/실천문학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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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물들 Les Choses, 조르주 페렉(지음), 허경은(옮김), 세계사


에밀 졸라의 실험소설론은 정해진 환경(콘텍스트) 속에서 인물(텍스트)가 어떻게 망가지는가에 초점을 맞춘다. 그 속에서 이 세계가 얼마나 잘못되어 있는가를 밝히는데 주안점을 둔다. 이는 사회주의적 리얼리즘 소설과는 전적으로 다른 방식과 태도를 가지고 있다. 사회주의적 리얼리즘 소설은 전형적인 환경과 전형적인 인물을 내세운다. 그리고 이 둘 사이의 갈등과 화해를 바탕으로 이 세계가 왜 변해야 하는지에 대해 주력한다. 이렇게 보면, 조르주 페렉의 소설 작법은 에밀 졸라와 닮아있다. 지극히 유희(놀이)적이라는 점. 실험도 일종의 놀이나 게임으로 이해할 수 있다. 단, 결말을 알 수 없는.

조르주 페렉의 <<사물들>>을 읽으면서 그가 등장시킨 인물이나 그의 인물이 살아가는 방식이나 생각, 또는 사건이나 갈등에 대해선 아무런 감흥도 느끼지 못했다. 이 점에서 그는 첨단의 소설가인 셈이다. 하지만 그가 소설 작법에 관심을 가지는 동안, 그의 인물들은 버려졌고, 열정적이며 도전적인, 거친 삶의 주인공으로서가 아니라 이렇게 살아도 되고 저렇게 살아도 되는 수동적이며 아무 생각도 하지 못하는 인물들로 변해가고 있었다.

어쩌면 그것을 그가 노렸는지도 모른다. 소설 바깥의 소설가는 그의 인물들을 유기하고, 그의 인물들은 소설 속 세계에서 소설 바깥을 보며, 나는 피조물이야, 나는 저 소설가 친구가 쓰는 대로 그렇게 그려질 뿐이야, 라고 피식거리듯이, 현실의 우리들은 이 거대한 자본주의 사회 속에서 유기되어, 끝내 내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곤 아무 것도 없어, 나는 버림당했고 앞으로도 버림당할 것이며, 영원히 구원받지 못할 거야, 그러니 숨이 붙어있는 것만으로도 다행스러워 해야 해, 라고 하는 것처럼 말이다.

이렇게 보자면, 페렉의 소설 작법은 극단적인 니힐리즘을 소설 속 세계가 아니라 소설 속 세계를 이루는 어떤 구조에 반영한 셈이 된다. 그런데, 그래서? 에밀 졸라의 소설이 결국 우리에게 위대한 감흥을 주지 못하는 것처럼, 페렉의 이 소설도 재미없는 씁쓸함만 안겨줄 뿐이다. 그런데, 그래서? 우리는 아직 죽지 않았고 저 세계는 아직도 무자비한 모습으로 우리를 감시하고 있는데 말이다.


사물들 - 8점
조르주 페렉 지음/세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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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잔의 산을 찾아서 - 불멸의 산 생트빅투아르 기행
페터 한트케(지음), 이중수(옮김), 아트북스



세잔을 좋아하는 나. 전후 독일문학의 가장 실험적인 소설가 중의 한 명은 페터 한트케가 세잔에 대해서 적었다? 바로 사서 읽어야 하는 책이다. 하지만 사 둔 지 몇 달만 읽었다. 책은 그리 두껍지 않다. 책의 내용도 평이하다. 그러나 내가 기대했던 바의 내용이 아니었다. 나는 세잔에 대한 현대 작가의 독특한 시각이 농후하게 묻어나오길 기대했다. 그런데 이 책은 세잔에 대한 책이라기보다는 자신의 글(쓰기)에 대한 생각을 정리한 산문집에 가깝다. 한 쪽에서는 세잔에 대한 이야기가 흘러가고 한 쪽에서는 자기 자신에 대한 이야기가 흘러가는 산문집이다.

이는 나쁜 시도가 아니다. 세잔의 세계에 대한 깊이 있는 통찰이 담긴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페트 한트케에 대해선 확실히 알 수 있으니 말이다. 더구나 그의 세밀한 관찰력은 글 여기저기에서 빛난다. 하지만 번역이 매우 나쁘며, 페트 한트케의 유려한 문장의 힘이 살아나지 못하는 듯 하여 다소 아쉽다(아래 댓글을 참조하세요). 세잔에 대해 궁금한 독자들보다는 글쓰기, 또는 산문의 힘, 현대 문학과 예술에 대한 어떤 시각에 관심이 있는 이에게 추천할 만한 책이다.


초기 철학자들 가운데 어떤 이는 시인들이 거짓말을 한다고 썼다. 이는 시인들이야말로 모두가 현실과는 다른 허구에 가득 찬 이야기를 늘어놓고 있음을 단적으로 증명하는 예에 지나지 않는다. 왜냐하면 우리의 현실은 그만큼 불행한 삶의 조건과 불길한 징조들로 가득차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예술은 현실 그대로 재현해놓는 것과는 거리가 멀다. 예술은 다소 우스워지기도 하는 불행한 삶의 조건과 비관을 예시함으로써 진정한 현실 해석의 길로 나아가기 때문이다.




세잔의 산을 찾아서
페터 한트케 지음, 이중수 옮김/아트북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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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지나가는 이 2008.11.07 15:26 신고

    이 책 사실 번역이 엉망입니다. 2/3는 틀린 번역이라고 봐도 잘못이 아닐 겁니다. 꼭 번역기로 돌려서 한국말만 맞춘 것 같아요. 원문과 반대의 뜻으로 번역한 구절들도 많이 눈에 보입니다. 번역자를 만나서 따지고 싶은 기분입니다. 뭘 보고 어떻게 번역한 거냐고...저 위에 인용하신 부분도 완전히 틀렸어요. 원문은 이렇습니다.
    "최초의 철학자 중 한 사람은 시인들이 거짓말을 한다고 했다. 이미 그 때부터 현실이란 나쁜 상태와 좋지 못한 사건들을 가리키는 것이라는 생각이 지배적인 것 같다. [그 생각에 따르면] 예술의 주된 대상과 모티브가 악한 것일 때, 또는 현실에 대한 다소간 우스꽝스러운 절망일 때 비로소 예술이 현실에 충실하다는 것이다."('Die Lehre der Sainte-Victoire'(Suhrkamp, 1984) 17-18페이지)

    • 헉. 그렇군요. 감사합니다. 원문 번역과 책에 나온 글을 읽으니, 매우 다르군요. ㅡ_ㅡ; 쩝. 영어 번역본라도 구해서 새로 읽어야겠어요. 댓글의 문장은 간결하고 힘이 있는데, 책의 번역은 쭉쭉 늘어지고(마치 책 페이지 수를 고려한 듯한..) 구구절절 부연적이며 결국에는 엉망이 되는 것같아요. 편집자의 의도가 심하게 들어간 느낌도 드는..
      번역에 대한 지적 감사합니다. : ) 제 글에 오류가 있었음을 심하게 느끼고 있습니다. T_T;

  • 행인 2010.02.17 15:46 신고

    전 이책을 독어로 읽다가 포기하고 한국어로 읽었습니다.
    음.. 님의 말씀만큼 번역이 나쁘진 않았는데... 제가 인상적이었던것은
    그 한국의 번역가님께서도 직접 이 산을 방문하고 번역했다는것입니다.
    저는 거기에서 깊은 인상을 받았습니다. 한드케의 문장가 많이 다르다는것은 눈치 챘습니다. 하지만 의미상으로 매우 다르다고 하기도 힘들거 같습니다. 번역할때 완전히 다른 언어를 그 의미의 변화없이 유려하게 옮기는 가정은 매우 복잡합니다. 불가능한 표현이 너무 많습니다. 그에비해
    저는 그냥 이 번역에 만족했습니다. 독일인 조차도 사실 읽기 힘든 책이 한드케의 이 책입니다. 자신들도 읽고는 잘 이해가 가지 않는다고 하니까요.
    매우 섬세하고 깊은 명상을 요하는 책이죠. 그냥 슥 읽고 무언가를 얻기 바라는 책이 아닌것은 확실합니다. 저는 오히려 이책을 읽고 세잔을 좋아하게 되었습니다.

    • 한트케에 대한 어느 정도의 기대가 있었으나, 번역본이 완벽하게 충족시켜주지 못한 느낌이 들었는데, 님의 댓글을 읽으니 어느 정도 이해가 되네요. 참, 번역이란 어려운 일인 것같습니다. ㅡ_ㅡ;;; 그런 점에서 한국은 그 힘든 번역에 대한 대우가 바뀌어야 할 텐데 말이죠.
      님의 댓글을 읽으니, 다시 한 번 읽어봐야 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 감사합니다.

音, 꿈의 전람회
김영태(지음), 돋을새김




여름날의 거친 숨소리가 세월의 변덕을 닮아가던 날들이 지나고, 새벽의 찬 바람과 매미 울음소리, 화단의 나무소리, 도시의 시멘트 소리가 내 청춘의 아침을 가득 채운다. 어제 반 년 만에 간 강서도서관에서 책 몇 권을 빌려왔다. 그 중 한 권인 < 音, 꿈의 전람회>.

김영태
문학과지성사에서 나온 시집을 갖고 있는 이라면, 시인들의 초상을 그린 화가로 알고 있을 테고, 시를 좋아한다면 그를 시인으로 여길 터이고(문학과 지성사에서도 그의 시집이 여러 권 나왔다), 무용가이거나 무용애호가라면 그를 무용평론가로 기억할 것이다. 어제 도서관에서 잠시 들춘 <객석> 8월호에서 나는 김영태 선생이 우리 곁을 떠났음을 알게 되었다. 지난 7월에. 이제 이 책은 사자(死者)의 책(書)이 된 건가.

音, 꿈의 전람회
이 책은 김영태 선생이 음악에 대해 쓴 글들을 모아 펴낸 책이다. 짤막한 단상, 제법 긴 글, 저널에 실린 듯이 보이는 단평(短評), 일기로 구성되어 있다. 무용과 음악(특히 현대음악)에 박학다식한 그의 면모를, 그리고 풍부한 시정으로 사려 깊은 문장들은 그가 뛰어난 산문가임을 느끼게 해주는 책이다.

네 시간의 독서
아침에 일어나 이 책을 펼쳐 읽기 시작해, 오후 1시에 다 읽었다. 그 사이, 에릭 사티를 만났고 아르보 페르트를 들었으며, 많은 음악가, 무용가, 작가들이 열린 내 방 창문으로 들어와 오래된 JBL 스피커로 사라졌다. 이 산문집에는 사심(私心)이 없고 그저 보이는 대로, 그저 들리는 대로, 그저 느끼는 대로, 때론 초고인 듯 보이는 풋풋함이 숨어있다. 그래서 글쓴이의 사사롭고 엉뚱한 시선을 피하고 깊이 있고 뚜렷한 성찰의 결과를 원하는 독자에게 무시당하는 여지도 생기는 법이다. 그러나 이는 취향의 차이일 뿐. 그러한 차이 속에서도 이 책은 참 재미있고 즐거운 산문집이다.


音. 꿈의 전람회
김영태 지음/돋을새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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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려라, 아비
김애란 소설집, 창비


쉽게 읽히는 문장, 가끔 보이는 재치 있고 재미있는 표현, 하지만 그 정도? 나라도 혹평하지 않으면 안 되겠다 싶을 정도로 이 젊은 소설가에 대한 평가는 찬사와 열광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런데, 이건 좀 심하지 않은가.

김애란의 소설들을 관통하고 지나가는 것은 무덤덤한 관찰의 시선이다. 무덤덤하게, 나(주인공)와는 아무런 상관도 없다는 식으로, 적극적 행위의 주체로 나서지도 않고, 극적인 심리적 갈등을 가진 인물이 등장하지도 않는다. 더구나 정치경제학적 환경마저도 벗어나, 이 세상, 이 사회에 대한 아무런 불만도 표출하지 않은 채, 그저 특정한 위치에 서서 바라보기만을 계속할 뿐이다. 심지어는 추억도 없다. 미래도 없다. 과거가 있는 것 같지만, 그것은 상상이거나 공상, 또는 지어낸 이야기로 둔갑하며 미래에 대한 기대가 없기 때문에, 꿈도, 희망도 없다(세상에, 이렇게 슬픈 세계가 존재할 수 있을까).

무관심하다는 점에서 이 세상(이 존재하는 방식)에 대해 비판적이라고 말할 수 있을 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 뿐이다. 조각난 세계를 바라보는 것. 그저 바라만 보고 있는 것. 바라보는 것에 대해서만 적극적으로 꾸미고 변화를 주는 것. 하지만 세계는 그 자리에 그대로 있는 것. 그래서 김애란의 소설 속에서의 자아란 사랑하지도 않고, 싸우지도 않고, 끔찍한 절망에 휩싸여 있거나 주체할 수 없는 열정을 가지고 있지도 않다. 그저 무덤덤하게 바라만 본다.

그런데 왜 독자들과 비평가들은 열광하는 것일까.

잘 만들어진 소설이며, 심각한 주제나 소재가 등장하지도 않고 어떤 인물, 어떤 사건의 본질적인 측면을 부각할 생각도, 그런 시도도 하지 않은 채, 표피적인 상황들만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깔끔하고 상쾌한 느낌을 주는 이 소설을 독자들은 좋아하겠지만, 비평가들은 왜 열광하는 것일까. 뛰어난 소설가가 이제 더 이상 나오지 않듯이, 비평가들도 나오지 않는 모양이다. 적어도 김애란의 소설 세계가 가진 문제점을 드러내며 현대 사회가 가진 병리적 현상을 통찰력 있게 드러낼만한 이가 없다는 점은 현 한국 문단이 가진 비극적 단면이다.

달려라, 아비
김애란 지음/창비(창작과비평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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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서 읽든, 도서관에서 빌려서 읽든, 한 번쯤 읽기를 권할 만한 한국 소설임에는 분명하다. 하지만 열광적인 찬사로 도배될 만한 소설은 아니라는 것이며, 도리어 이 소설이 가진 한계를 면밀하게 분석해 이러한 태도를 가진 현대 문학을 극복해야 되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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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의 모든 것에 관한 거의 아무것도 아닌 이야기
(Presque Rien Sur Presque Tout)
장 도르메송Jean D'Ormesson 지음, 유정희 옮김, 문학세계사, 1997


Story는 시간 위에서 인과적 관계를 이루며 진행된다. 드라마가, 영화가, 그리고 위대한 소설이 여기에 속한다. 하지만 ‘소설’이라고 이름 붙여진 이 책에선 Story가 사라진 독백으로 가득하다. 소설에 대한 새로운 정의를 내리고 싶었던 걸까. 그래서 소설이라고 이름 붙인 것일까. 황당하기 짝이 없는 이 책은 소설이 아니다.

그렇다면 뭘까. 내가 보기엔 좀 있어 보이는 문장들로 구성된, 난해한 수필집이라고 하는 편이 전통적인 시각에서의 정의내리기에 가깝다. 그런데 수필집으로 정의내리더라도 이 책은 독서의 재미에서는 한참이나 떨어져 있다. 불어 원문으로 읽는다면, 분명 현란한 언어 구사를 볼 수 있으리라 기대되지만, 이와 유사한 형식의 책인 파스칼 키냐르의 ‘은밀한 생’의 번역본에서 느낄 수 있는 그런 재미마저 없다는 점이 이 책의 완독을 더욱 어렵게 만들었다.

결국 나는 이 책을 다 읽지 못했다.

혹시 난해한 수필집, 아니면 정말 기상천외한 소설 형식(과연 소설이라고 부를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에 관심이 있다면 이 책은 숨겨진 보물일 지도 모르겠다.


 

거의 모든 것에 관한 거의 아무 것도 아닌 이야기
장 도르메송/문학세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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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지
위스망스 단편선, 손경애 옮김, 문학과 지성사


현대의 압도적인 자본주의 물결 속에서 반-자본주의 예술 활동이 일어나지 않는 까닭은 무엇일까? 많은 이들이 자본주의를 성토하며, 안정적 삶을 희구함에도 불구하고 자본주의를 본격적으로 공격하지 않는 이유는 어디에 있는 것일까? 그렇다면 자본주의가 그 진정한 모습을 드러내던 19세기에 반-자본주의 사상과 예술 활동이 성행했던 것일까? 그리고 현재와 19세기를 비교해보는 것은 과연 의미 있는 일일까? 나는 조리스 칼 위스망스Joris-Karl Huysmans의 세 단편소설을 읽으면서 이런 의문들을 품었다.

자연주의 양식에 속하는 위스망스의 세 단편, ‘등짐’, ‘부그랑 씨의 퇴직’, ‘궁지’는 주어진 환경 속에서 끝내 몰락하고 마는 개인들을 등장시키고 있다. ‘등짐’의 경우에는 전쟁이라는 특수한 상황 속에서, 그 곳으로부터 도피하려는 한 개인을 등장시키고(반-국가적인 성향을 드러내며), ‘부그랑 씨의 퇴직’에서는 직장 생활의 노예가 되어버린 한 중년 신사의 강박적 경향을, ‘궁지’에서는 19세기 부르주아지의 돈에 대한 탐욕스럽고 부도덕적인 욕망을 표현하고 있다.

‘등짐’을 제외한 두 단편 - ‘부그랑 씨의 퇴직’과 ‘궁지’ - 는 현대 자본주의 속에서도 공공연히 일어날 수 있는 어떤 사건이라는 점에서 위스망스가 보았던 과거 어떤 세계의 문제가 아직도 치유되지 못한 채 남아있다는 절망감에 휩싸이게 된다. 더구나 19세기만 하더라도 이런 문제의식 속에서 치열하게 창작활동을 하던 예술가들이 있었으나, 현대에는 그러한 창작활동에 매진해야 할 예술가들마저 거대한 자본주의 체제 속에 휩쓸려 들어가 버렸다는 안타까움을 들게 만든다.

현대 독자가 빠져들 만큼의 소설적 재미는 없지만, 19세기 후반의 소설이 가지는 문제의식을 알기에는 매우 유용한 소설이 될 수 있다.

부연 설명

1. 안타까움에 대하여 - 현대 소설의 양식과 19세기 자연주의 소설 양식과의 차이로 인해, 눈에 보일 정도의 선명한 주제의식과 공격을 19세기 자연주의 소설이 가지고 있다면, 현대 소설에서는 눈에 보이지 않는 모호성과 알레고리, 상징들로 그 공격을 대신하려는 경향이 뚜렷해진다. 따라서 자본주의 체제 속에서 고통스러워하는 현대의 자아는 그 고통의 실체를 정면 응시를 하기 보다는 비켜보려고 하거나 고개를 돌려 다른 것을 봄으로써 그 고통을 방기하는 전략을 택한다. 현대 소설들이 가지는 반역사성은 이러한 도피적 성향의 반영이라고 해석할 수 있으며, 이 점에서 안타까움을 가질 수밖에 없다.

2. 19세기 자연주의에 대하여 - 에밀 졸라의 ‘실험 소설론’은 19세기 자연주의가 가지는 한계를 분명하게 드러낸다. 실험실에서 가상의 실험 조건을 만들고 어떤 인과 관계를 생성시키는 것처럼, 자연주의 소설 또한 등장인물과 소설 속 환경 속의 어떤 인과 관계를 도출시키고자 한다. ‘궁지’에서는 이러한 성격이 잘 드러나 있다. 확실히 소설적 재미는 없으나, 어떤 시대, 어떤 체제에 대한 공격 방식으로는 매우 탁월한 양식이다.



궁지
조리스-칼 위스망스 지음, 손경애 옮김/문학과지성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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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dean 2008.12.31 22:28 신고

    우연히 들렀는데 좋은 글이 너무 많습니다.
    위의 안타까움에 대하여 부분은 읽는데 소름이 돋네요.

    • 감사합니다. ^^;; 벌써 읽은 지 1년 반이나 지났네요. 위스망스의 다른 소설 한 권도 번역되어 있습니다. 의외로 오래된 소설이 재미있습니다. : )

  • 2009.01.02 20:43

    비밀댓글입니다


적, 사랑 이야기 Enemies, A Love Story
아이작 B. 싱어(지음), 박석기(옮김), 문학사상사, 1986년(초판)

(현재 절판되었음. 현재에는 아래 범우사에서 나온 것을 구할 수 있음)



세상일은 아무도 모른다는 점에서, 만인은 평등하다. 홀로코스트를 만들었던 나치들과 유태인들은 평등하다. 신의 방관 속에서 이루어진 유태인 학살. 그래도 아이작 B. 싱어는 ‘신은 있다’(He is behind everything)고 말한다.


‘적, 사랑 이야기’는 1978년 노벨문학상 수상작이면서 아이작 B. 싱어의 대표작이다. 한 남자와 세 여자 사이에서 벌어지는 러브 스토리를 표면에 내세우고 있지만, 정말 사랑하고 있는가에 대해선 사랑을 나누고 있는 등장인물들조차 혼란스럽다. 그리고 사랑에 대한 아름다운 표현이 나오는 것도 아니고 뜨거운 사랑의 장면이 등장하지도, 남녀간의 애정이 직접적으로 드러나지도 않는다. 그저 서로를 찾고 더듬을 뿐이다. 결국 이 소설에 등장하는 한 남자와 세 여자를 서로 이어주는 것은 지난날의 상처(홀로코스트)와 주위에 아무도 없다는 외로움뿐이다.


결국 한 여자는 자살하고, 한 남자는 사라지고, 두 여자가 남아 한 아이를 키우는 것으로 끝나는 이 소설이 우리에게 말하고자 하는 것은 무엇일까. 나도 허먼(소설의 남자 주인공)처럼 혼란스럽기만 하다. 상처 입은 이들은 그 상처에서 헤어나기 위해서 발부둥칠 뿐, 그들에게서 이성적인 판단이나 행동을 기대해서는 안 된다? 이런 것일까. 부도덕한 한 유태인 남자 허먼과 유태인이 되고자 하는 한 야드비가, 홀로코스트에서 극적으로 살아남은 전 부인 타미라, 그리고 격정적인 표현과 행동으로 남자를 끌어당기는 마샤. 이들 네 명으로 서로 부딪히며 만들어가는 이 소설을 읽고 난 뒤, 기억나는 것이라곤 그들이 겪었을 지난 날의 상처뿐이었다. 



적들, 어느 사랑이야기
아이작 B. 싱어 지음, 김회진 옮김/범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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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버리고 거리로 나가자
데라야마 슈지(지음), 김성기(옮김), 이마고



내가 창녀가 되면
- 오카모토 아미


내가 창녀가 되면
가장 첫 번째 손님은 오카모토에서 온 다로라네
내가 창녀가 되면
이제가지 사모은 책들은 모두 헌책방에 팔아치우고 세상에서 가장 향기로운
비누를 사려네   
내가 창녀가 되면
슬픔을 하나 가득 짊어지고 온 사람에게 날개를 달아주려네
내가 창녀가 되면
다로의 체취가 남은 내 방은 언제나 깨끗이 청소해놓고 미안하지만
아무도 들이지 않으려네
내가 창녀가 되면
태양 아래서 땀을 흘리며 빨래를 하려네   
내가 창녀가 되면
안드로메다로 팔찌를 만들 수 있는 주문을 외우려네
내가 창녀가 되면
누구도 범하지 못하는 소녀가 되려네 
내가 창녀가 되면
슬픔을 견뎌낸 자비로운 마리아가 되려네  
내가 창녀가 되면
흑인에게 오월의 바람을 가르쳐주려네
내가 창녀가 되면
흑인에게 재즈를 배우려네 
외울 때는 침대에 누워 다로의 체취를 느끼고
기쁠 때는 창가에 서서 다음에 일어날 일을 조용히 기다리며
공연히 누군가를 만나고 싶어지면
침대에 들어가 숨을 죽이고
머나먼 별들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려네  


아침에 일어나 자주빛깔 옷을 입은 던힐 한 개비를 꺼내 입에 물고 멍한 눈으로 먼 하늘을 바라보았다. 데라야마 슈지 같은 감수성, 그런 언어를 가진 적이 있었던 것같다. 같다. 같.다. 같다? 글쎄. 그런 시절이 있었을까.


한 소년이 권총을 갖고 싶어했다.
소녀가 물었다. “뭘 쏘려고?”
소년이 대답했다. “태양. 저 녀석만 바라보면 괜히 울화가 치밀어.”


그랬던 적이 있었을까. 스리랑카산 홍차를 마시면서 계속 떠올려보려고 노력했지만, 도통 기억이 나지 않는다. 너무 먼 과거의 일이다. 그 사이 은하계는 두 번의 생과 사를 거듭했고 일 억 만 개의 별이 소리없이 자취를 감추었으며 원 포인트 파이브 리터의 정액이 비닐에 쌓인 채로 버려졌으며 그(녀)들은 딴 여자와 눈을 맞춘 채 아메리카 대륙의, 천사들이 산다는 도시로 떠났다. 무심하게. 실제 과거의 일이 기억나지 않는 관계로, 과거는 조작되고 추억은 새로 만들어진다. 시뮬라크르의 세계. 새로 만들어진다는 건 무척 훌륭한 일이다. 조작되거나 모방되지만, 실제로는 없는, 픽션이다. 시뮬라크르의 세계.


데라야마 슈지의 책은 쉽게 읽을 수 있지만, 꽤 오래 동안 잔상이 남을 것이다. 시종 일관 스물 둘의 언어로 쓰인 이 책은 내가 이미 지나온, 그러나 기억나지 않는 과거의 언어와 닮아있었다. 그 과거에 그(의 언어)를 만났다면 열광하였을 텐데, 지금은 그렇지 못하다. 그 사이 이 세상 음식을 너무 많이 섭취한 탓이다. 되도록이면 정제된 알코올로만 연명하고 절대로 정액을 낭비하는 일 없이 키스만 했어야 했다.


추천할 생각이 없는 책이다. 헌책방에서 이 책을 보게 된다면 구입해도 좋다. 헌책방에 어울리는 책이다. 누군가의 손때가 묻은 데라야마 슈지는 매력적이지만, 아무런 상처 없이 바로 넘어온 슈지는 아무 짝에도 쓸모가 없다.



책을 버리고 거리로 나가자
데라야마 슈지 지음, 김성기 옮김/이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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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오래 전에 가슴 설레며 읽은 책을 다시 꺼내어 읽으며 책 속에 담긴 고통들이 왠지 시큰둥해진 적이 있어요. 그때는 단어들이 금방이라도 터질 것 같은 붉은 종기 같게 느껴졌는데 말이죠. 그나저나 잠깐 생각해보니, 창녀가 된다면, 이란 가정도 스물둘의 나이가 할 수 있는 말 같은데요. --;

    • 어떤 사람들은 죽을 때까지 스물 둘의 감수성을 가진 채 살다가 죽기도 합니다. 하지만 어떤 사람들은 스무살 때 마흔의 감수성을 가진 채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이다가 마흔에 꽃피기도 하죠.
      그런데 스물 둘의 감수성은 언제나 매력적인 것같아요. 스물 둘의 사랑이 마흔의 사랑보다 좀 매혹적이지 않을까 하는... 아.. 전 스물 둘에 사랑은 하지 못하고 술만 퍼 마셨네요. ㅡㅡ;;

  • 이 시대 스물둘의 감수성을 보면서, 나라면 과연 지금의 스물둘 감수성으로 살아갈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을 한 적이 있어요. 물론 개인적 차이라는 변수도 있고 아예 다르다 할 수도 없지만, 전반적 시대 풍조의 '스물둘'이라면 슬쩍 자신이 없어지더군요. 전 스물둘에 사랑도 하지 못하고 술도 퍼마시지 않았군요. 대신 전 스물둘에 '나이'의 무게가 가장 무겁게 느껴진 순간이 찾아왔어요. 지금 생각하면 왜 그날 그 순간이었을까 싶지만. 그런데 마흔의 사랑을 스물둘의 감수성으로, 그런 건 어떨까요? ^^;




대머리여가수,
외젠 이오네스코(지금), 오세곤(옮김), 민음사
(* 대머리여가수 외에 수업, 의자가 수록되어있음)



외젠 이오네스코는 ‘의자’에 대해서 이렇게 말한다.

The subject of the play is not message, nor the failures of life nor the moral disaster of the two old people, but the chairs themselves; that is to say, the absence of people, the absence of the emperor, the absence of God, the absence of matter, the unreality of the world, metaphysical emptiness. The theme of the play is nothingness... the invisible elements must be more and more clearly present more and more real (to give unreality to reality one must give reality to the unreal), until the point is reached inadmissible, unacceptable to the reasoning mind-when the unreal elements speak and move... and nothingness ca be heard, is made concrete.


하지만 실제 연극을 보게 되면, 민감한 몇몇 관객들은 끔찍한 기분에 휩싸이게 될 지도 모르겠다. 의자들만 놓인 무대. 노부부가 기다린 연사는 벙어리. 결국 아무 것도 아닌, 그저 처음부터 잘못된 설정이었으며 노부부는 속은 채 자살한다는, 꽤나 황당한(부조리한) 결말.


‘대머리여가수’, ‘수업’, ‘의자’는 부조리한 우리 삶을 그대로 보여주며 우리를 비참하고 끔찍한 기분에 휩싸이게 한다. 연극을 본다면 꽤 시니컬한 희극을 보는 듯한 느낌이 들지도 모르겠다. 결국 우리의 언어, 우리의 지식과 경험은 우리의 현재를, 미래를 열어 보이지 못한다는 점, 도리어 언어, 지식, 경험은 우리를 더욱 부조리한 상황으로 우리를 내몰고 있음을 보여준다.


‘대머리여가수’와 ‘수업’은 극의 시작과 끝이 연결되어 있다는 점에서 부조리한 상황을 벗어날 수 없음을 극단적으로 표현한다. ‘의자’에서는 부조리한 상황을 끝내는 건 ‘자살’이다. 어떤 해결책도 제시해 주지 않는다는 점에서 갈 데까지 간 현대적 상황을 상징적으로 드러낸다.


그런데 외젠 이오네스코는 이런 연극을 생각해 내었을까? 정말로 그의 인생은 부조리했을까? 왜 이 무렵 많은 수의 작가들이 생의 부조리함에 주목하게 되었을까. 그런데 과연 우리 인생은 부조리한 것일까. 우리는 그것을 정직하게 받아들일 수 있을까. 받아들일 용기가, 받아들이고도 계속 삶을 지탱시킬 인내가 우리에겐 있는 것일까. 우리 인생이, 이 세상이 부조리하다고? 그래서 어떻게 하면 되는 것일까?


쉽게 부조리하다고 말하고, 쉽게 부조리연극이라고 말하고, 신도, 의미도, 목적도 없어졌다고 말하면서, 그렇다면 왜 우리는 이 부조리한 삶을 지속시키고 있는 것일까? 그 이유는 무엇일까?


우리가 마주하게 되는 지점은 바로 여기다. 왜 우리는 이 부조리한 세상의 삶을 지속시키기 위해 악전고투를 하게 되는 것일까. 악전고투를 하고 있는데, 도대체 부조리 연극이 우리에게 무슨 도움을 주는가. 지금 바로 가슴에 손을 얹고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져보라. 정말로 삶이, 이 세상이 부조리한지. 


대머리 여가수 - 세계문학전집 73

외젠 이오네스코저 | 오세곤역 | 민음사 | 2003.03.15

출처 : 반디앤루니스 http://www.bandinluni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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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너나들이 2007.05.07 23:12 신고

    민음사 세계문학전집을 슬슬 읽어 보고 있는데 읽기 목록에 넣어놔야 겠네요.. 좋은 책 소개 감사합니다.. ^^

    • 희곡 읽기는 생각보다 재미없을 수도 있어요.

      읽고 난 뒤, 꼭 연극을 챙겨보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오네스코의 연극은 곧잘 대학로 무대에 올려지니깐, 챙겨서 보세요. 그러면 희곡과 연극의 차이를 알게 되고 희곡 읽을 때 무대를 떠올리면서 읽게 됩니다. : )

  • 음... 이 희곡을 생각해낸 동기는, 이오네스코가 영어 교재를 공부하면서였다고 하더군요. 그러니까, 오래 전에 읽은 책에 있는 내용이라 지금은 정확하게 기억 안 나지만 대략, 영어 교재에 나오는 "천장은 위에 있고, 마루는 아래에 있습니다." 이런 류의 부조리한 문장들 있잖아요. 이오네스코를 워낙 좋아해서, ^^, 우연히 들렀다 인사 남깁니다. 저도 이오네스코의 희곡들을 열심히 읽었지요. 연극도 보았구요. 요즘은 통 보지 못했네요....

    • 아란차님의 말씀을 들으니, 이런 식의 해석도 가능하겠군요.

      우리들이 일상 생활에서 사용하는 언어들의 가장 기본적인 구조는 부조리하다. 기본적인 언어 구조로는 이 세상을 담아내지 못한다. 부조리한 상태의 단순한 언어(단어)들이 모여 세상을 반영하고 우리들의 생각을 전달하지만, 늘 어딘가 핀트가 어긋나 있다. 이는 우리 언어가 본질적으로 부조리하다.

      그런데 이런 해석은 20세기 초반의 언어철학자나 20세기 후반의 포스트모더니스트들의 주장과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에구 적고 보니, 이렇게나 세상을 부조리하게, 부정적으로, 그리고 결국 허무주의로 귀결될 어떤 이야기들을 하는 그들은 어떻게 되었나나 궁금해지는군요. 아, 우울해집니다. 이오네스코 연극 보러가야겠어요.


행인行人
나쓰메 소세키(지음), 유숙자(옮김), 문학과지성사



인생은 쓸쓸한 거다. 사랑한다고 고백하지만, 연인은 떠나가고, 마음 한 켠에 남은 상처는 새벽 네 시에 울리는 전화벨 소리마냥 예기치 못한 순간에 들이닥친다. 이해하려고 노력할수록 더 깊은 미궁 속으로 빠지는 것이 현대식 사랑이다. 그러니 다치지 않기 위해 사랑은 한 켠으로 밀어 놓은 지 오래. 하얀 눈이 보기 드문 겨울이 가고 황사 가득한 봄이 오고 나는 나쓰메 소세키의 ‘행인’과 만나게 된다.


어떤 확신처럼, ‘인생은 쓸쓸한 거다’라고 읊조리지만, 그것을 확인할 때면 가슴 한 쪽이 아려오는 건 어쩌지 못한다. 



     방 안은 촛불로 인해 소용돌이치듯 동요했다. 나도 형수도 눈살을 찌푸리고 타오르는 불꽃 끝을
   응시했다. 그리고 불안한 쓸쓸함이라 형용될 법한 심정을 맛보았다.
    (156쪽)



아무런 사건도 없지만, 아무런 사건도 없다는 사실 때문에 이 소설은 당황스럽고 읽는 이를 당혹스럽게 한다. 쓸쓸함으로 시작해 불안함으로 끝나는 이 소설 앞에서 독자가 쥐게 되는 것은 그저 ‘인생이 그렇지, 뭐’ 정도.


나쓰메 소세키는 여러 상황들과 공간들을 만들어놓고 그 속에 인물들을 가둔 채 그들의 외면을 훑는 것만으로 그들의 심리적 변화를 드러낸다. 문장과 문장 사이에 긴장이 흐르지만, 그 긴장 끝에는 어떤 결말이나 긴장의 해소를 보여주지 않는다. 결국 그것은 독자의 몫이란 건가. 하긴 그에게도 그것을 해결한 힘도, 지혜도 가지지 못했을 것이다. 어떻게 인생이 쓸쓸한 걸 해결할 수 있겠는가.



그래, 인생은 쓸쓸한 거다. 그것을 받아들인 채 늙어갈 수밖에 없다. 하지만 인생이 쓸쓸한 거라는 걸 확인할 때마다 흐르는 눈물은 어떻게 할 수 없다. 어떻게 했으면 좋겠는데 말이다.



 

행인
나쓰메 소세키 지음, 유숙자 옮김/문학과지성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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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이라는 거대한 연극, 살라메아 시장
페드로 칼데론 데 라 바르카Pedro Calderon de la Barca(지음), 김선욱(옮김), 책세상


인생은 꿈, 삶은 한 편의 연극, 우리들은 태어날 때 각자 배역 하나를 맡고 죽을 때까지 성심성의껏 연기한 후 죽는다. 죽은 후 얼마나 잘 연기를 수행했는가에 따라 천당에 가기도 하고 지옥에 떨어지기도 한다. 그러니 우리는 맡은 바 배역을 제대로 연기해야만 할 것이다. 17세기 사람들을 사로잡았던 이 생각은 바로크 특유의 허무적 미학을 만든다. ‘세상이라는 거대한 연극’은 이러한 허무적 미학을 종교적인 메시지로 승화시킨 작품이다. 이러한 연극을 ‘성찬신비극’이라고 한다. 이 연극 형식에 대해 이해하려면 먼저 성찬에 대한 의미부터 알아야 한다.

그리스도는 죽기 전날 밤, 예루살렘에서 열두 제자들과 함께 최후의 만찬을 갖는다. 이 때 그리스도는 빵을 주며 ‘너희는 모두 이것을 받아먹어라. 이는 너희를 위하여 바칠 내 몸이니라’라고 하며, 포도주를 주며 ‘너희는 모두 이것을 받아 마셔라. 이는 새롭고 영원한 계약을 맺는 내 피의 잔이니, 너희와 모든 이의 죄 사함을 위하여 흘린 피니라’, ‘너희는 이 예를 행함으로써 나를 기념하라’라고 말했다고 전한다. 성찬(聖餐, eucharistia)은 이 때의 빵과 포도주를 의미하며 초대교회에서는 이 명령에 따라 빵을 떼어 나누는 의식을 행하였으며, 그 후 이것이 미사성제라는 형태로 발전하여 오늘에 이르렀다. 이러한 의식은 빵과 포도주로 상징되는 그리스도의 몸과 피를 통해 그리스도가 행한 속죄의식 속에 참여한다는 의미를 가진다. 성찬신비극은 성찬식의 의미를 연극으로 표현한 것으로, 하느님의 신비를 알려주고 그것을 경험하고 궁극적으로 속죄를 받을 수 있도록 해줄 수 있도록 하는 종교극이다. 교회 안에서 행해지던 성찬신비극은 교회 밖으로 나오게 되며 대중적 취향의 서정성을 받아들인 극적 감동으로, 이성으로는 절대로 감지되거나 설명할 수 없는 신성한 신학의 문제를 무대로 옮긴다.

‘세상이라는 거대한 연극’은 바로크 특유의 허무적 미학 위에 종교적 가르침을 덧씌워놓은 형태를 취하고 있다. 몇 백 년이 지난 뒤, 발칙한 모더니스트인 내가 읽기에 매혹적인 부분은 종교적 가르침보다는 바로크 특유의 허무적 미학이 흥미롭고 매력적으로 다가왔다. 종교적 가르침은 그 시대의 한계 속에서 작가가 억지로 끼워넣은 듯한 느낌을 떨쳐버릴 수 없다.

‘살라메아 시장’은 코메디아(comedia)극이다. 이 극은 17세기 스페인에 유행했던 양식으로 희극과 비극의 경계가 사라진 장편연극들을 총칭하는 단어였다. 이 연극은 유럽의 근대 사회가 어떻게 형성되는가에 대한, 흥미로운 장면을 볼 수 있다. 국왕, 귀족 또는 군인, 시민으로 대변되는 세 계급이 서로 엎치락뒤치락 하면서, 시민의 명예와 정의가 승리하게 된다는 근대적 가치관을 극적으로 드러내는 것으로 연극은 끝난다.



세상이라는거대한연극살라메아시장

페드로칼데론데라바르카저 | 김선욱역 | 책세상 | 2004.08.30

출처 : 반디앤루니스 http://www.bandinluni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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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설의 팡세>>, 에밀 시오랑(지음), 김정숙(옮김), 문학동네


낯설고 기괴한 아포리즘. 에밀 시오랑, 그는 언제나 타인이며, 외부자요, 끊임없이 독자에게 절망을 강요하며, 저주와 독설로 이 세상을 매도하기에 여념 없다. 평생 독신으로, 끝내 이방인으로밖에 머물 수 없었던 파리에서, 이 루마니아 트란실바니아 출신의 노작가는 쓸쓸하게 죽게 될 1995년까지 그는 펜을 놓지 않으며, 세상을 저주하기에 여념 없다. 그래서 그에게 무엇을 남게 될 것이며, 그를 읽은 독자는 무엇을 얻게 될 것인가.

에밀 시오랑. 그의 책 몇 권이 번역되어 나왔지만, 그를 아는 이를 찾기란 매우 어렵다. 그만큼 그의 세계는 (다행스럽게도) 대중적이지 못하다. 그리고 그는 그의 책이 대중적이지 않다는 사실에 얼마간의 안도감을 가지게 될 것이다. 기껏해야 나 같은 작자에게나 읽히고 있으니, 얼마나 다행스러운 일인가.

하긴 봄 같은 겨울이 지나고 여름 같은 봄이 올 것이며 열대 같은 여름 속에서 모든 이들이 약속이라도 한 듯 그들의 삶을 저주하며, 그들의 사랑을 파탄으로 내몰게 될 지도 모르는, 그런 희망적이고 낙관적인 상태가 올 지도 모르니, 아직 인류에게 미래는 남아있는 것일 지도.

정말로, 진실로, 거짓 없이 불행하다는 것. 절망적이라는 것. 참담하고 비극적이라는 것. 원래부터 그래왔으며 앞으로 개선될 여지가 전혀 없다는 것. 그런 이유로 우리 심장은 태어나는 순간부터 한 시도 쉬지 않고 뛰고 있는 지도 모른다. 생명은 우리의 저주받는 생애 내내 그것으로부터 도망치기 위해 불꽃을 피우고 있는 것이다. 문명은 우리의 진짜 모습을 숨기기 위해 축조된 ‘거짓말’.

에밀 시오랑을 읽기 위해선 적당한 준비 운동이 필요하다. 적당한 알코올과 적절한 패배감과 눈부신 오후의 햇살. 나를 사랑한다고 해놓고선 딴 남자를 만나 덜컥 결혼해버린 여인의 뒷모습. 만일의 사태를 대비하여 준비한 자해, 공갈, 협박의 도구로서의 과도(果刀).

적절한 주위 환경 조성으로 에밀 시오랑은 극적인 엑스타시를 독자에게 선물해줄 것이다. 진정한 독서란 적절한 주위 환경 조성으로부터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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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아노 치는 여자 (반양장) - 10점
엘프리데 옐리네크 지음, 이병애 옮김/문학동네


피아노 치는 여자 Die Klavierspielerin, 엘프리데 옐리네크 Elfriede Jelinek (지음), 이병애(옮김), 문학동네




길을 가다가 그녀를 만났다. 몇 해 전 봄날이었는데, 그가 나에게 먼저 자신의 피아노선생이라며, 그녀를 소개시켜주었다. 에리카 코후트. 그녀의 이름이다. 나르시시즘 연구로 유명한 정신분석학자인 하인츠 코후트와는 어떤 관계냐고 묻고 싶었지만, ‘당신, 혹시 지독한 나르시스트 아닌가요?’라는 질문의 빌미가 되지 않으려는 조심스런 생각에 그건 묻지 않았다.

삼십대 후반의 그녀는 어딘가 낯설고 기묘한 분위기를 풍겼지만, 한때 대단한 예술가적 재능을 인정받다가, 그저 그런 예술 선생, 또는 예술과 관련된 직업으로 내려앉게 되는 이들에게서 종종 풍겨오는 그런 느낌으로 치부해 버렸다. 젊은 공대생인 그는 그녀를 사랑스런 눈길로 쳐다보며 웃고 있었지만, 그 웃음 뒤에 자리 잡은, 그녀를 자신의 성적 소유물로 만들려는 욕망이 도사리고 있음을 눈치 채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가끔 젊은 아가씨보다 삼십대 후반의 여자가 풍부한 성적 매력으로 남성을 유혹하는 경우가 있기도 했으며, 그도 그녀에게 그러한 것을 발견했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하지만 나중에 그녀의 일상, 그리고 그 둘의 관계를 알게 되었을 때, 나는 치료할 수 없는, 치료되기에는 이미 깊이 무너져버린 정신적 상처의 규모에 놀라, 슬퍼하기보다는 도리어 허겁지겁 그녀를 만났다는 사실을 내 기억으로부터 지워버리려고 하고 있었다.

그녀, 에리카는 부재하는 아버지의 대리인이자, 어머니의 팔루스(남근)이었다. 이러한 관계의 고착 속에서 그녀는 정상적인 정신의 성장을 이루지 못한 채, 환상적인 혼동 속에 갇히고 만다. 그녀는 성인이면서 어린 아이이고 어린 아이이면서 성인이고(어머니의 파트너), 여성이면서 남성이고(어머니와 침대를 나눔), 남자이면서 여성인 어떤 존재가 되고 만 것이다.(1) 이러한 비정상적인 배경은 그녀의 주변을 심하게 일그러뜨린다. 그녀의 사연을 소설로 엮어낸 옐리네크 여사의 표현들은 그녀가 갇혀 지내던 그 비정상적 영혼의 공간을 매우 적절하게 담아내고 있었다. 심지어 그녀, 에리카가 이름을 바꾼 채 자신의 이야기를 소설로 만든 것이 아닐까 하는 착각을 할 정도였으니까.

우리들 대부분은 우리들의 정신적 아픔이 어떤 것인지 알지 못한다. 왜냐면, 우리의 정신은 너무 효율적이어서 자신의 망가진 부분들을 그 내부 속에서 치료하고 봉합해버린다. 정신과 의사들의 소견으로는 잘못된 치료이고 봉합이겠지만. 그리고 모나드처럼 그 어떤 출구도, 창도 만들지 않은 채 자신의 내부 깊숙한 곳으로 그 아픔을 숨겨버린다. 우리들의 비극은 여기에서 시작된다. 근사한 사랑에의 모험은 언제나 우리를 가슴 설레게 하지만, 이미 닫혀져 출구마저 온데간데없는 우리의 영혼은 그 설레임으로 심하게 요동치고 흔들리겠지만, 그 뿐이다. 우리의 영혼은 그 누구의 손길도 받아주지 못한 채, 이룰 수 없는 사랑에의 열망만으로 가득 차, 슬퍼하며 혼자 서있는다. 그리고 서로의 영혼을 설레게 했던 이들은 이제 사랑의 열망을 이루지 못했다는 슬픔으로 서로의 열리지 않는, 열 수도 없는, 그 닫힌 마음을 마주보며, 서로를 할퀴고 헐뜯는다.

에리카와 그녀 어머니의 관계 속으로 그가 들어가지 못한 것은 그가 속한 세계와 그녀가 속한 세계가 다르기 때문이었다. 그를 비추는 태양과 에리카를 비추는 태양, 그리고 그녀 어머니를 비추는 태양이 서로 다르기 때문이었다. 이 세상에는 사람 숫자와 똑같은 수의 태양이 존재하고 있다. 이런 이유로 거대한 일반 이론이란, 메마른 사막의 신기루이며 ‘우리는 같은 하늘에 있어’ 따위의 말은 늘 착각에 빠져 사는 바람둥이의 대사이며, 거의 모든 이들이 사랑을 나누기도 전부터 사랑의 파국에 대한 공포와 두려움으로 떨게 되는 것이다.

내가 발터 클레머였더라면, 그녀에게 매혹당하지 않았을 것이며, 그녀를 나의 소유물로 하지 않았을 것이다(그런 허접스러운 모험을 벌리기엔 난 이미 그때 마음의 견고한 성채를 구축하고 있었다). 에리카에게 그는 아무런 역할도 해주지 못했으며(이미 할 수 없는 상태였다), 도리어 그녀의 비극적 상황을 더욱 고착화시켜버렸다. 그녀처럼 우리의 일상은 조금씩 조금씩 비극적인 상황으로 고착화되어 간다. 아무도 우리의 상처 입은 정신을 어루만져 줄 수 없으며, 과거 우리 정신의, 영혼의 깊은 상처를 위안 받고자 한 모든 시도들이 비극적 파국으로 끝났음을 실제로 경험했거나, 이미 여러 사람들로부터 전해들은 후, 우리들은 우리의 상처 입은 영혼의, 정신의 모습을 보여주지 않는, 견고한 사회적 가면을 만드는 능력을 가지게 되었다. 그리고 매일 아침과 잠들기 전 의식되지 않는 무의식의 세계 속에서 우리 자신은 스스로에게 다짐하며 그 가면을 더욱 단단하게 만든다. 이제 그저 이렇게 살아가기만 하면 될 뿐이다. 조용히, 평온하게, 나의 태양을 쐴 수 있는 토요일 오후의 고요처럼. 그렇게 흘러가다 죽었으면 하는 바람뿐이다.


(1)박희경(성균관대)의 논문 ‘독일 현대 여성 소설에 나타난 모녀관계-엘프리데 옐리네크의 소설 ’피아노치는 여자‘를 중심으로’를 참조하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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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의 기술 - 8점
알랭 드 보통 지음, 정영목 옮김/이레


여행의 기술
알랭 드 보통(지음), 정영목(옮김), 이레




첫 페이지는 좋았지만, 채 열 페이지를 읽지 못한 채 덮었다.
초반부를 띄엄띄엄 읽다가 중반 이후 열심히 읽었다.
이 책을 통해 여행에 대한 뭔가 대단한 통찰을 얻는다거나, 대단한 여행 기술이나, 2006년 겨울 서울의 직장인들에게 대단한 위안이 될 수 있으리라 생각하는 건 큰 오산이다.


책을 읽으면서 내내 알랭 드 보통이 쉽게 여행을 떠날 수 있는 어떤 환경이 부러웠으며
여행지에 대한 이런 저런 정보들을 읽어 정리할 시간을 가졌다는 것이 부러웠으며
정처 없이 생각하고 정처 없이 떠돌아다니는 삶을 부러워했다.


나는 여행을 거의 가지 않는다. 누군가와 같이 가지도 않을 뿐더러, 그나마 간 것도 혼자 묵호와 서귀포를 간 게 전부다. 누군가와 여행을 가고 싶지만, 여행지의 명소를 찾기 보다는 푹신한 소파를 가진 호텔 로비나 펜션 거실에 앉아 멀리 보이는 풍경에 시선을 두길 좋아한다. 나에게 여행이란 대체로 육체의 휴식과 영혼의 안식을 위해서이지, 새로운 경험이나 열광적인 향락을 위해서가 아니다. 그 점에서 나는 철저히 게으른 여행자이고 아예 여행을 가지 않는 편이 낫다고 여긴다.

하지만 나이가 든 탓일까. 요즘은 어딘가로 가고 싶고, 그것이 새로운 열광이거나 흥분되는 만남이었으면 싶고, 그 곳에서 새로운 걸 마주하고 싶어진다. 내 속에 숨겨진 어떤 향기들이 계속 내 몸 밖으로 빠져나가는 소리가 들리기 때문이다.

알랭 드 보통의 이 책, 읽을 만하다. 국내 저자가 쓴 이런 여행기 한 권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 본다. 그러면 마냥 부러워하지만은 않을 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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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역시 휴양지 취향이시군요.. 사실 , 휴양지를 누리기에는 참 사치라 ,
    여행하기도 바빠 영혼의 휴식을 취한지가 어언...-_-; 이제는 영혼의 휴식은 어떻게 취해야 하는지도..... 잊어버린듯합니다..ㅠ_ㅠ;
    저도 알라딘에서 행복의 건축을 사면 이녀석을 준다기에 대뜸 샀는데 제 흥미에는 기대를 못 미치더라구요.. ;; 재밌는 책은 아닌거 같았어요... 흠.... 읽으려면 큰일!!!

    • '재미있는 책'에 속하지는 않는 것같아요. 뭐랄까. 좀 애매한. 하지만 '알랭 드 보통'처럼 그렇게 여행 다니는 건 무척 부러워요. 한 번 해보고 싶은 여행이랄까.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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딕테 DICTEE
차학경(지음), 김경년(옮김), 어문각.




차학경(Theresa Hak Kyung Cha)
1951년 부산에서 출생했다. 1961년 가족과 함께 하와이로 이주했으며, 1964년에 샌프란시스코로, 1980년에는 뉴욕으로 이주했다. 버클리 대학에서 비교문학과 미술학사, 석사를 획득했으며, 짧은 생애 동안 제작자, 감독, 연기자, 비디오 영화작가, 공간 설치 예술가, 공연과 출판 문학가로서 많은 작품활동을 하며 주목을 받았다. 1981년 영화에 관한 논문 및 수필을 모은 Apparatus를 편집, 출판 했으며, 1982년 11월 뉴욕에서 31세의 나이로 요절했다.

                       *                           *

실험적인 이 소설은 정치적 환경 속에서의 여성 목소리에 그 초점을 맞추고 있다. 클리오 역사, 칼리오페 서사시, 우라니아 천문학, 멜포메네 비극, 에라토 연애시, 탈리아 희극, 텔프시코레 합창무용, 폴림니아 성시 등으로 나누어지는 소설은 각기 다른 등장인물, 다른 어법, 다른 구성 방식을 선택하고 있다.

이러한 소설의 기법은 실험적이지만 자주 삶이나 세상에 대한 부족한 통찰력을 형식적인 면으로 가리기 위한 젊은 소설가에서 나타나는 것이다. 읽기 어려우며 읽고 난 뒤 삶이나 세상에 대한 분명한 메시지를 던지기 보다는 가을 아침, 시선을 가리는 짙은 안개처럼 파괴적 언어와 구성 속으로 소설에 나왔던 모든 것들을 가려버리고 마는 것이다.

하지만 차학경의 이 소설은 그 소재나 주제에서 분명한 목소리를 가진다. 그것은 제 3세계 여성의 이미지를 끊임없이 환기시키며 강한 신념과 의지를 가졌지만, 늘 상처 입을 수밖에 없는 여성의 목소리를 독자에게 들려준다. 이 점에서 이 소설은 포스트식민주의나 페미니즘의 관점에서, 그리고 그 현대적 기법에서 다양한 시사점을 던져줄 수 있을 지도 모르겠다.

다 읽고 난 뒤의 내 솔직한 느낌은 순수하지만, 매우 거친 소설, 그래서 이십 대 중반에 이 소설을 읽었다면 꽤 흥분하며 읽었을 것이지만, 삼십 대 중반의 나이에 이 소설은 보여지고 읽혀지는 어떤 세계에 대한 자신의 통찰을 담았다기보다는 보여지고 읽혀진 어떤 세계를 제대로 소화시키지 못한 채, 아니 소화시키기에는 너무 슬픈 어떤 것이기에 그것을 우회적으로 양식화해내고 있는 듯이 보였다.
 



딕테 - 6점
차학경 지음, 김경년 옮김/어문각
 

 
  Dictee by Theresa Hak Kyung Cha
 

* 아마존의 평점은 (의외로, 혹은 예상대로) 높다. 어쩌면 번역 탓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다시 해보게 된다. 아마존 Wish list에 올려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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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서광 이야기 - 10점
귀스타브 플로베르 지음, 이민정 옮김/범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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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서광 이야기, 플로베르, 범우문고192





책을 좋아하고, 사랑하며, 책을 사서 모으는 사람들을 우리는 흔히 애서가, 독서가, 수서가, 장서가라고 한다. 그 정도가 심하면 책벌레(書蟲), 서치(書癡), 서광(書狂), 서음(書淫), 서선(書仙)이라고도 한다. 이들 수서가(蒐書家)들에게는 책을 사 모으는 일만큼 즐거운 것은 없다. 그들은 사랑하는 책을 위해서라면 더위와 추위 따위는 상관없다. 무언가 진귀한 책을 손에 넣을 수만 있다면 천리길도 멀다하지 않는다. 이 책에 실린 3편 글 모두 책에 미친 사람(愛書狂)들의 이야기다.
- 이상보, ‘작품해설’, 11쪽



책 읽기를 좋아하는 것과 책 자체를 좋아하는 것 사이에는 분명한 구분이 필요하다. 책을 읽는 행위는 높이 사줄만 하지만, 책 자체를 좋아하는 것은 하나의 수집 행위이며 책 속에 담긴 지식이나 지혜를 탐하는 것과는 무관하다. 책을 읽는 행위, 또한 어떤 책을 읽느냐에 따라 그 평가가 나누어지겠지만, 책을 사서 모은다는 것에 매혹되고 그것이 높이 평가되어선 안 될 것이다. 하지만 구하기 어려운 책이란 있기 마련이고 어렵게 구해서라도 읽고 싶은 책도 있다. 이미 절판되어 시중에선 구할 수 없지만, 그 책을 읽은 이들 사이에서는 그 책의 깊이나 감동이 입에서 입으로 전해져 읽지 못한 이들에게 강렬한 수집의 욕구, 반드시 구해 읽고야 말겠다는 의지를 불태우게 만드는 책들이 있다. 하지만 이 정도론 애서광의 부류에 속하지 않는다. 적어도 ‘유명 저술가들의 원고나 서명본, 초판본과 한정본, 진본, 기서(奇書)와 호화본, 절판본과 금서본(禁書本), 즉 희귀본들을 소장하고 그것들을 끊임없이 탐내며 노리는 책의 사냥꾼’(이광주, ‘안티쿠스’ 9-10월호, 23쪽)이야말로 여기에 속할 수 있다.

작은 문고판 속에 담긴 세 편의 소설을 통해 애서광의 실체를 잘 알 수 있다. 옥타브 유잔느의 ‘시지스몬의 유산’은 애서광을 매우 잘 드러내 주는 소설이다. 구스타브 플로베르의 ‘애서광 이야기’는 15세의 플로베르가 써 더 흥미를 끄는 소설이다. 스테판 츠바이크의 ‘보이지 않는 수집품’은 이 책에 실린 소설 중 가장 완성도가 높은 소설이며 수집의 행위가 가지는 매혹을 고스란히 전해주고 있다. 앞의 두 소설은 그저 애서광이라는 흥미로운 소재를 가졌다는 것뿐이지만, 츠바이크의 소설은 제대로 된 안목과 식견을 갖춘 노(老)수집가의 행복이 무엇인지 독자에게 가르쳐준다.

삼치(三癡)라는 표현이 있다고 한다. 삼치는 남에게 책을 빌려달라고 하는 것은 바보요, 남에게 책을 빌려주는 것도 바보요, 남에게 빌려온 책을 돌려주는 것도 바보라는 말이다. 프랑스 속담에 ‘여자와 책과 말은 빌려 줄 게 못 된다’는 말이 있으며, ‘책에 미치면 사랑하던 첩과도 바꾼다’는 말이 있다. 실제 중국 명나라 때 주대소(侏大韶)라는 사람은 송판으로 된 ‘후한서(後漢書)’를 보고 그 책을 구하기 위해 애첩을 내주었다. 하지만 애첩은 ‘본의 아니게 이 집을 떠나가지만, 그 옛날 애첩을 말과 바꿨다는 얘기보다는 낫겠지. 언젠가 재회하더라도 후회 마시기를. 무심한 봄바람 길가 나뭇가리를 불어대네’라는 시 한 수를 벽에다 써 붙여놓고 떠났으며 이를 본 주대소는 상심 끝에 얼마 못 가 세상을 떠났다고 한다.

그렇다면 도대체 책이란 우리에게 무얼까. 하고 많은 수집벽들 중에서 책에 관한 수집벽이 우리들의 시선을 잡아끄는 이유는 무얼까. 남북조시대의 대 학자 안지추는 자손에게 남긴 ‘안씨가훈(顔氏家訓)’에서 ‘만약 언제나 책 수백 권을 잘 소장한다면 언제까지라도 소인(小人)은 면할 수 있으리라’고 가르쳤다. 그런데 과연 그럴까. 우리는 경험 상 이 세상이 책대로 돌아가지 않는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그런데 우리는 책을 읽어야 한다고 생각하며 책 읽기를 강요하는 걸까. 그리고 장서에 대한 필요까지 이야기하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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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물은 왜 짠가
함민복 산문집, 이레


열어놓은 창으로 차가운 새벽 공기만 들어오는 것이 아니라, 초가을 모기까지 들어와 날 괴롭힌다. 제 철이라 핀 코스모스는 바람의 상쾌한 노래 소리에 몸을 흔들지만, 그걸 곱게 봐 줄 사람 없는 도로 한 복판에 피어 지나는 이의 마음을 아프게 했다. 모기에게 물린 발등의 자국은 어느새 사라졌지만, 모기 소리는 계속 내 귓가를 맴돌며 흘러 다닌다. 이 모든 것들은 가을이 만들어내는 풍경이다. 그것도 오염된 가을이.

오염된 몇 번의 가을을 거치자, 나도 오염되었다. 이제 매우 불순한 상태로 오염된 내가 몇 달 동안 읽은 함민복 산문집. 처음은 좋았으나, 중간은 피곤했으며 끝은 알 턱 없이 슬펐다. 나는 함민복 씨를 만나본 적 없고 그가 어떤 사람인지 알지도 못한다. 그의 첫 번째 시집에 서가 구석에 있기는 하지만, 그의 첫 번째 시집에서 그는 너무 멀리 와 버렸다. 아주 오래 전에 그가 강화도 어느 폐가로 들어가 살기 시작했다는 말을 풍문으로 전해 들었을 때, 시인으로 살기 어려운 시절에, 시인으로 살아가는 드문 사람이 있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하지만 그 뿐이다. 그의 산문은 때로 아름답고 때로 진실했으며 때로 슬펐지만, 그 뿐이다. 내 감성은 악착같이 그의 언어에 동화되길 거부했으며 거부해야만 했다. 어떻게든 이 지긋지긋한 자본주의 사회에서 버젓이 살아남아야만 하는 나로선 그의 언어는 피해야만 하는 것이었다. 그랬다. 이제 조용히 서가로 꽂히게 될 이 책은 그 숨결을 숨기고 잠잠해질 것이다. 기억은 영원하지 않고 그것보다 더 내 삶은 짧을 것이므로. 이 책이 나에게 주는 영향에서 조금은 자유로워질 필요가 있는 것이다. 가면으로 덧씌워진 내 삶의 자유는 언제까지 이어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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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들은 페루에 가서 죽다 - 10점
로맹 가리 지음, 김남주 옮김/문학동네



새들은 페루에 가서 죽다, 로맹 가리(지음), 김남주(옮김), 문학동네, 2001

세상에 이렇게 비극적이며 냉소적인 소설가가 또 어디에 있을까. 그리고 결국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 로맹 가리, 또는 에밀 아자르의 ‘자기 앞의 생’ 또한 세상에 대한 끝없는 냉소로 일관하듯이 이 소설집 또한 그러하다. 군데군데 등장하는 유머러스함마저도 로맹 가리의 냉소적인 시선을 배가시킬 뿐이다.

그의 냉소는 어디에서 시작한 것일까. 하긴 우리는 늘 어딘가에 속고 산다. 어린 시절 읽었던 위인전으로부터, 교과서로부터, 하이틴로맨스로부터 속고 청년 시절 사랑스럽던 그녀‘들’에게서 속고 장년 시절 남편에게서, 아내에게서, 직장 상사에게서, 동료에게서 속임을 당한다. 정치인에게서도 속고 장사꾼에게서도, 심지어는 길거리 행인에게서도 속임을 당하기거나 죽을 고비를 넘기기까지 한다. 도대체 태어났을 때, 이 세상에 드디어 존재하게 되었다는 찬란한 신비와 성스러운 기쁨은 다 어디로 가고 끝없이 속고만 사는 걸까.

이 소설집은 몇 편의 ‘속는 것’에 대한 이야기들이 있다. 그리고 몇 편은 ‘과거를 벗어나지 못하는 노예적 태도’에 대한 것이며 몇 편은 ‘사랑’에 대한 것이다. 그리고 결론은 우리는 그 어느 것에도 기댈 곳이 없다는 것이며 그저 무너지기만 기다릴 뿐이라는 것.

참혹함을 기다린다는 것만큼 참혹한 것이 또 어디 있을까. 1980년 12월 2일, 로맹 가리는 권총 자살을 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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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아직 아이였을 때, 김연수(지음), 문학동네, 2002


손에 잡으면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는 소설 읽기. 하지만 언제나 오랜 시간이 걸리는 소설 읽기. 얼마 만인가. 국내 소설가가 쓴 소설을 읽은 게. 매일 아침, 사무실 앞에 누군가 읽어주길 기다리며, 던져져 있는 중앙일보. 가끔 그 신문 모퉁이에 소설가 김연수의 칼럼이 실리곤 한다. 70년대산 소설가의 칼럼. 그 곳에 칼럼을 싣는 이들 중 가장 가난하리라 예상되는 이의 칼럼. 2006년에 익숙하지 않는 풍경이다. 번역 소설이 인기를 얻고 있는 시절, 젊은 국내 소설가의 작품집은 늘 멀리 있다. 바쁜 일상 속에서 성공이니, 재테크니, 웰빙이니 하는 것들 중에서 젊은 소설가의 작품집은 황당한 것에 가깝다. 내 인생만큼이나.

어깨를 돌려 그의 데뷔작이 실린 계간 <작가세계>를 찾아본다. 그의 데뷔작을 읽었을 때의 느낌이 선한데, 이미 그도 중견소설가가 된 셈인가. 그가 등단하고 중견소설가가 되는 사이, 나는 여러 군데의 직장을 옮겨 다녔고 모아놓은 돈을 다 사업으로 날려버렸으며 결혼하자던 여자들과 잘 되지 못하는 불운마저 겪었다. 여기에는 어떤 사연이 숨어있는 걸까.

소설들은 전체적으로 깔끔하고 군더더기가 없다. 하지만 분명한 주제 의식이 숨어있기 보다는 ‘보여주기’에 주력하고 있었다. 영화적이 아닌 분명 소설적인 양식이었지만, 대체로 모호하였으며 불분명했고, 한편으로는 답답했다. 가끔 인물의 특징이 터무니없이 과장되기도 했으며 스토리는 흡인력을 가질 만큼 뚜렷하지 못했다.

하지만 내 인생도, 내 얼굴도, 내 손바닥도, 내 발가락도, 내 영혼도 그렇지 않은가. 틀린 점이 있다면 이 작품집으로 소설가 김연수는 동인문학상을 받았고 나는 끝나지 않을 듯이 보이는 마이너스 통장을 가지고 있다는 것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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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끔찍하게 민감한 마음>>, 버지니아 울프(지음), 정덕애(옮김), 솔, 1996년


문학비평가들이 쓴 문학에세이들 대부분이 그들이 가진 편협한 이론적 시야에 갇혀 일방적인 해석의 늪 속에서 빠져 나오지 못한 채, 잘못된 방식으로 해석하고 왜곡시키는 경우가 많은 반면, 작가들이 쓰는 에세이는 적어도 작품이나 작가를 진실된 눈으로 바라보고 이해하려고 노력한다는 점에서 때로 더 뛰어난다.

버지니아 울프의 이 산문집 또한 그러하다. 19세기, 20세기 영국 문학에 대해 아는 바가 거의 없어도 그녀의 문장은 독자를 배려하며 독자의 눈길 앞에 순결한 그 하얀 살결을 드러내며 초봄의 햇살 같은 미소를 지어 보인다.


고도로 문명화된 사회에서는 위장(僞裝)이 너무나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고 공손함이 너무나 필수적이기 때문에 전통과 의식을 던져 버리고 마음에 맞는 한두 사람과 ‘가벼운 말’로 대화하는 것은 더운 방의 한 줄기 공기처럼 필수적이다.
- 25쪽


수 차례의 정신병 경력이 있고 빈번한 자살 시도, 그리고 끝내 자신의 생을 자살로 끝냈다는 점이 믿기지 않을 정도로 그녀의 글은 감미롭고 때로 냉정하며 격정적이면서 타인에 대한 배려를 버리지 않는다. 아니면 그녀 스스로 이러한 에세이에 큰 무게를 두지 않았기 때문일까.

그녀의 글을 읽으면서 오래 전에 읽었던 그녀의 소설을 꺼내보아야겠다. 세월. 버지니아 울프. 열린 창으로 봄 바람이 들어와 반대편 베란다 창으로 나간다. 그렇게 봄은 지나가고 아직도 영국의 우즈 강은 이승에서의 버지니아 울프의 마지막 표정을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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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의 어슴푸레 번지는 저녁의 물컹한 검정이 손가락 끝에 닿자, 기다렸다는 듯 온 몸이 검게 물든다. 오래된 잉크를 순식간에 빨아들이는, 허기에 찬 만년필처럼. 34년 살아온 나와 하루하루 일과에 치여 순간순간 변하는 나 사이의 거리는 지구와 안드로메다은하 사이처럼 멀기만 하다. 오랜만에 책상에 앉아 시집을 펼쳐 활자와 활자 사이에 숨어있는 시인의 마음을 잡아낸다. 다행히도 그는 그 자리에 그대로 있으니, 얼마나 기쁜 일인가. 시인이 된다는 것, 얼마나 감사하고 축복받을 일인가. 그러니 웃고 즐거워하고 마냥 행복해야 할 것이 시인의 운명이거늘, 예전의 그나 지금의 그나 그렇질 못하니, 그저 변하지 않았고 변하지 않으려는 것에 만족할 뿐이다.



미소는, 어디로 가시려는가


장석남



저 새로 난 꽃과 잎들 사이
그것들과 나 사이

미소는,
어디로 가시려는가
무슨 길을 걸어서
새파란
새파란
새파란 미소는,
어디만큼 가시려는가
나는 따라갈 수 없는가
새벽 다섯 시의 감포 바다
열 시의 등꽃 그늘
정오의 우물
두세 시의 소나기
미소는,
무덤가도 지나서 저
화엄사 저녁 종 지나
미소는
저토록 새파란 수레 위를 앉아서

나와 그녀 사이 또는
나와 나 사이
미소는,
돌을 만나면 돌에 스며서
과꽃을 만나면 과꽃의 일과로
계절을 만나면 계절을 쪼개서
어디로 가시려는가
미소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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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정희(지음), <<내 마음의 무늬>>, 황금부엉이, 초판3쇄



산문집을 출판한 뒤, 보름 만에 3쇄를 찍은 이 산문집을 보면서 책 읽는 사람이 없다는 게 꼭 거짓말처럼 느껴진다. 도리어 읽을 책이 없는 것은 아닐까. 신뢰할 만한 작가가 없는 것은 아닐까. 이런 저런 생각이 머리를 휙 돌고 나오고 나온다. 일간지에 실린 광고 생각부터 오정희가 가지는 개인브랜드까지.

얼마 전 어느 신문 기사에 한국 문단은 정부가 먹여 살린다는 짤막한 시평이 실렸다. 소설 써서 정부 지원금 받고 재단 지원금 받고 하면 연봉이 한 이 천 만원 정도 된다는 웃지 못할 글이 신문에 실린 것이다. 진짜 밥벌이용 소설인 셈이다. 소설가는 소설을 출판해 독자를 만나는 것이 아니라 지원금 신청에 사용하고 독자는 독자 나름대로 책을 고르기도, 서점에 가서 책을 고를 안목도 없고.

그러니 광고나 대문장만한 리뷰를 보고 책을 살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오정희의 산문집 서평 서두부터 시답잖은 문장으로 시작한 것이 그리 유쾌하진 못하겠지만, 나로선 오정희의 산문집이 나오고 난 뒤, 여기저기에서 들려준 격찬은 다소 어색하고 조금 적응하기 힘든 것이었다.

물론 이 산문집의 시작은 ‘무척’ 좋다. 꼭 미셸 투르니에의 산문집을 읽는 듯한 느낌을 우리에게 선사한다. 하지만 뒤로 갈수록 긴장감은 떨어지고 한 권의 책으로 엮기 위해 억지로 붙인 듯한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 책 마지막 페이지에 적힌 편집자의 몇 마디 글은 ‘나는 오정희의 열성팬이예요’라고 광고하는 듯 했다. 그리고 떠오른 생각. 이렇게 글 쓰는 사람이 없나 하는.

그리고 이 생각은 오늘부터 읽기 시작한 <<기싱의 고백>>(효형출판)을 떠올리면서 더 심해졌다. 무릇 산문집이라면 조지 기싱의 책 정도는 되어야하지 않을까. 아니면 미셸 투르니에나.

오정희의 산문집도 꽤 좋은 책이다. 무리 없이 읽히고 간간히 그녀만이 우리에게 선사해줄 수 있는 문장이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어떻게 보면 평범한 수준의 산문집이며 도리어 오정희라는 이름과 견준다면 다소 실망스러운 산문집이다.

혹시 한국의 전반적인 문화 수준이 하향평준화되고 있는 건 아닐까. 그럴 지도 모르겠다. 그렇다면 그 이유는 무엇일까. 곰곰이 생각해볼 일이다.


내 마음의 무늬 - 6점
오정희 지음/황금부엉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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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타 뮐러(지음), 이용숙(옮김), <<카사노바의 베네치아>>, 열린책들, 2004





베네치아의 모든 사람들은 무대를 가로질러 가듯이 지나간다. (중략). 그러면서 언제나 오로지 그 장면에서만 존재의 의미를 갖는 연극배우들처럼 보인다. 극은 오직 그 곳에서만 이루어지며 그 이전의 현실에 대해서 역시 어떤 원인도 제공하지 못하고, 그 이후의 현실에 대해서 역시 어떤 영향도 미치지 않는다.
(중략)
베네치아는 모험의 이중적인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다. 뽑혀 바다에 떠 있는 꽃처럼 인생에서 뿌리 없이 유영하는 모험 말이다. 베네치아는 모험의 고전이었으며 현재도 그런 존재로 남아 있고, 온갖 모험의 총체가 갖는 최후의 운명을 구체화한 도시다. 이 도시는 결코 우리 영혼의 고향이 될 수 없으며, 다만 하나의 모험으로 존재할 수 있을 뿐이다.
- 게오르그 짐멜의 <베네치아> 중에서


붉은 빛깔의 천으로 싸진 양장 본은 오프라인 서점에서만 그 실체를 확인할 수 있을 뿐이다. 온라인서점에서 책을 사는 것이 대세를 이루고 있는 이 때, 오프라인 서점에서만 그 존재 방식을 확인할 수 있는 이 책은 시대의 흐름을 거스르는 듯한 사철 방식으로 제본하고 붉은 색의 천으로 만들어져 있다. 꼭 18세기의 베네치아가 가면을 쓰고 도시 전체를 무대로 만들며 도시의 꺼져가는 생명을 숨기려고 했던 것처럼, 이 책도 인생의 모험은 되도록 피하고 공무원적인 삶만이 각광 받는 이 때, 사랑의 모험을 즐기고 도박과 여행과 방랑을, 그리고 무명의 바이올리니스트로, 별다른 인정을 받지 못했던 문필가로서 겨우겨우 생계를 유지했던 바람둥이 사내가 살았던 몇 백 년 전 이탈리아의 어느 도시에 대한 내용을 붉은 양장으로 가리려고 했던 것은 아닐까. 하긴 베네치아의 가면도 한 때의 유행이었듯이 붉은 양장도 한 때의 유행이었다.

결국 모험을 주된 내용으로 삼는 책은 이 세상에서 사라질 것이고 사철 방식의 양장도 몇 백 년 동안 서가를 지켜내야만 했던 책들이 존재해야만 했던 시대처럼 사라지게 될 것이다. 결국 이 책은 오늘날엔 아무런 호소력도, 그 어떤 경제적 가치도 지니지 못한 책이다. 아마 이 책을 낸 출판사로선 한 번 모험을 해본 것이요 이 책을 구입한 이는 분명 오늘날에 적응하지 못하고 있는 시대 착오적 감수성의 소유자일 것이다.

베네치아는 중세가 그 어둠을 걷어내기 시작하는 무렵부터 대서양이 세계 무역의 중심이 되어가는 시기까지 유럽 최고의 도시라는 명성을 가지기 시작하고 그 명성을 잃어간다. 카사노바가 살았던 시기의 베네치아는 한때 대단했던 명성이 과거의 영화가 되고 있었고 그것을 유지시키기 위해 연일 축제가 이어지던 가면 무대의 도시였다. 이런 도시 속에서 매일 밤 그 내용이 달라지는 연애 극에 등장하는 단역 배우와 같은 인생을 사는 카사노바는 이 도시의 전형적인 인물은 아니었을까. 자신의 사랑은 믿을 만한 것이 못되며 언젠가는 이 도시처럼 죽을 거란 사실을 담담히 받아들이며 정처 없이 떠돌며 사람들과 어울리고 키스를 나누며 자신의 영혼과 육체를 우아한 애로티시즘 속으로 빠뜨렸던 것은 아닐까.

우리는 펀치를 만들었고 굴을 먹으면서 입 속에 들어 있는 굴을 서로 바꾸어 먹는 놀이를 했다. 내가 내 입 속에 든 굴을 그녀의 입 속으로 밀어 넣을 때 그녀도 자기 입에 들어 있던 굴을 혀 위에 올려놓고 나에게 내밀었다. 두 연인이 벌이는 장난만큼 사람을 흥분시키고 욕정을 불러일으키는 것도 없다. 우스꽝스러울 수도 있지만 그런 우스꽝스러움이 그 매력을 빼앗아 가지는 않는다. 웃음 역시 연인들을 행복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내가 사랑하고 갈망하는 사람의 입 속에서 미끄러져 나온 굴 소스는 얼마나 환성적인 맛인지! 더군다나 그건 그녀의 침이 아닌가! 내가 그런 굴을 깨물고 삼킬 때 사랑할 힘이 더욱 샘솟는 건 당연한 일이다.
- 자코모 카사노바의 <사랑의 유희> 중에서

우리는 18세기의 베네치아, 그리고 그 속의 카사노바를 보면서 그 시기 유럽을 물들였던 로코코의 슬픈 모습을 이해하게 될 지도 모른다. 쉬지 않고 노동을 하고 땅의 논리에 순응하기 보다는 장사와 무역에 주력하는 자신들의 삶은 신성한 것이며 현세에서의 근면 성실함으로 내세에서의 운명을 만들어내겠다는 부르주아지들과 개신교도들의 북부 유럽 도시의 눈에 남부 유럽의 베네치아는 과거 유럽의 영화를 간직한 채, 연일 계속되는 축제와 파티로 자신들의 쌓인 피로를 잊게 해주는 잠시 머물다 가는 여행지로서만 의미를 가지듯이, 카사노바의 인생도 18세기의 개신교 부르주아지의 도덕으로 보자면 더럽고 추잡하며 악하고 입에 언급하는 것조차 금기시되는 유형의 삶이었을 테지만, 그러한 개신교 부르주아지가 결국엔 자신의 신분과 경제력을 유지하기 위해 프롤레타리아의 영혼과 육체를 갉아먹는 것보다야, 가면 축제로만 일년의 반 이상을 보내고 떠들썩한 공연장과 술집으로 즐비한 베네치아나 이미 식어버린 사랑을 결혼이라는 제도로 옭매어 살아가는 거짓된 이들보다 늘 새로운 사랑과 연애로 자신의 영혼과 육체를 던지는 카사노바의 인생이 더 진실된 것은 아닐까.

아무래도 아직까지 개신교 부르주아지의 삶과 태도가 바람직한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일반 독자들에게 이 책이 주는 감동은 거의 없을 것이다. 어쩌면 잠시의 휴식으로 적당한 책이 되지 않을까. 하긴 그 정도만이라도 이 책의 가치는 충분할 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이미 자신의 사랑이 식었고 자신의 노동이 입에 풀칠하는 것 이외에 아무런 호소력도 가지지 못한다는 사실에 절망하고 있는 이들에게 <<카사노바의 베네치아>>는 어떤 모험을 감행할 수 있게 해주는 단초를 제공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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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적인 체험 - 10점
오에 겐자부로 지음, 서은혜 옮김/을유문화사
(고려원에서 오에 겐자부로 전집이 나왔으나, 이제는 헌책방에서조차 구하기 어려운 귀한 전집이 되었다. 일본 문학사에서 보기 드문 문학적 업적을 이룬 오에 겐자부로에 대한 이해가 한국에서도 깊어졌으면 하는 바람을 가진다.)



새로 홈페이지를 단장하면서 이전에 쓴 글을 추스리고 있다.
그리고 눈에 들어오는 한 글.

히미코를 따라 소리내어 있다가 보니, 나도 모르게 울컥인다. 내가 소설을 쓴다면 저런 대화를 만들어 낼 수 있을까. 히미코에겐 내 사랑을 받아달라는 간절한 메시지로 기능하고, 버드에겐 장애를 가진 아이가 소중하다는 메시지로 기능하는, 그래서 세상은 평온 속에서 이어나가고 상처와 방황은 눈물로 스스로 아물어가는.

손가락으로 세어보니, 스물 여섯 쯤이었던 것같다. 오에 겐자부로의 <<개인적 체험>>을 읽은 게. 그 사이 서른 셋이 되었는데, 변한 게 별로 없다.

도리어 그 땐 세상이 무섭지 않았는데, 지금은 세상이 무섭다는 것.

그 땐 세상이 나의 편이 되어줄 거라 믿었는데, 지금은 세상이 적이라는 것.

그 땐 세상이 오에의 믿음대로 개선의 여지가 있다고 믿었는데, 지금은 세상에 개선의 여지란 전혀 없다는 것.

나이가 든다는 건 자신도 모르게 상처 입고 그 상처에 무디어져 스스로 자신의 죽음을 준비하고 있다는 사실을 잊어가는 것이다. 그래서 어느 순간, 자신이 죽어있음을 깨닫곤 몸부림쳐보지만, 죽음의 상태가 너무 오래 지나 있음을 깨닫고 세상이 시키는 대로 그렇게 살아가는 것이다.

희망은 늘 언제나 멀리 있고 진실은 밝혀지지 않기 때문에 진실의 지위를 유지하고 있다. 희망이 가까이있어 잡을 수 있다면, 희망으로서의 존재 가치가 없으며 진실이 밝혀지는 순간, 진실 또한 그 존재 가치를 잃어버리게 될 것이니, 세상이 진정으로 필요로 하는 건 한 없이 멀리 있는 진실과 끝내 밝혀지지 않을 진실'들'일 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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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8년 어느 날 적음.


        "그런데 너나 내가 전혀 다른 존재로서 포함되어 있는,
       여기와는 다른 그 수를 알 수 없는 다른 우주가 있다는 거
       야, 버드. 우리들은 과거의 여러 가지 때에 자신이 죽느냐
       사느냐 하는 가능성이 오십 대 오십인 추억을 가지고 있어.
       예를 들면 나는 어린아이 때에 발진티푸스로 까딱 잘못하면
       죽을 뻔했어. 나는 내가 죽음을 향하여 내려갈지, 아니면
       회복에의 언덕길을 올라갈지 교차로에 선 순간을 확실하게
       기억하고 있어. 그리고 지금, 이렇게 너와 같은 이 우주에
       있는 나는, 살아 남는 쪽을 선택했던 거지. 그런데 그 순간
       에 또 다른 내가 죽음을 선택한거야 그리고 그 빨간 발진투
       성이의 내 어린 시체 주위에는, 죽어 버린 나에 대해 약간
       의 추억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의 우주가 진행되기 시작한
       거야. 있잖아, 버드? 죽음과 생의 분기점에 설 때마다 인간
       은 그들이 죽어버려 그와 관계없는 우주와, 그들이 계속 살
       아 남아 관계를 가지는 우주, 두 우주를 눈 앞에 두는 거
       야. 그리고 옷을 벗을 때처럼 그들은 자신이 사자(死者)로
       서밖에 존재하지 않는 우주를 뒤로 하고 그들이 계속 살아
       갈 쪽의 우주로 오는 거야. 그래서 하나의 인간을 둘러싸
       고, 마치 수목의 줄기로부터 가지나 잎이 갈라지듯이 여러
       가지 우주가 갈라지게 되는 거지. 나는 지금 남편이 죽어
       버린 쪽의 우주에 남아 버렸지만, 남편이 자살을 하지 않고
       계속 살아 남는 저쪽의 우주에는 또 하나의 내가 그와 함께
       살고 있는 거야. 하나의 인간이 젊어서 죽어 뒤에 남기는
       우주와, 그가 죽음을 면하고 계속 살아가는 우주, 하는 식
       으로 우리들을 둘러싼 세계는 항상 증식되어 가는 거야. 내
       가 다원적 우주라고 부르는 것은 그런 의미야. 너도 아기의
       죽음을 너무 슬퍼하지 않는 게 좋아. 아기를 축으로 하여
       분기된 또 하나의 우주에서는 살아 남은 아기를 둘러싼 세
       계가 전개되고 있으니까. 거기에서는 행복에 취한 젊은 아
       버지인 네가 기쁜 소식을 듣고 기분이 좋은 나와 축배를 들
       고 있는 거야. 됐어? 버드."
         - 『개인적 체험』. 85쪽에서 86쪽까지.
        
         히미코는 버드에게 자신이 말한 '다원적 우주'에 대해서
       말한다. 그건 버드에게 희망을 주기 위해서이기도 하지만,
       그녀 자신을 위해서, 그녀는 또박또박 버드에게 말을 했을
       것이다. 하지만, 아기를 죽이지 않고 키우기로 결심한 버드
       의 떠나가는 모습을 보면서 히미코는 와락 울음을 터뜨리고
       만다. 자신의 처녀를 가지고간 첫번째 남자, 남편이 자살하
       고 난 이후 가장 행복한 시간들을 선사해준 남자, 몇 시간
       전까지만 하더라도 자신의 혀와 젖꼭지를 애무하며, 사타구
       니 속에 머리를 파묻고 있던 남자, 아기가 죽고 아내와 이
       혼한 다음 아프리카로 가자던 남자, 그 남자의 뒷모습을 보
       면서 히미코는 울음을 터뜨린다.
        
         『개인적 체험』이라는 오에 겐자부로의 소설은 분명 오
       에 겐자부로의 '개인적 체험'을 바탕으로 쓰여졌고, 그래서
       이전의 글에선 갓 태어난 장애아의 젊은 아버지의 고민을
       이야기했다. 그러나, 아직 미혼의 이십대를 벗어나지 못한
       탓인지를 몰라도, 아기를 다시 키우기 시작한 버드의 용기
       보다 떠나는 버드를 보며 울음을 터뜨리는 히미코의 모습이
       계속 떠오른다. 



        
         히미코의 '다원적 우주'. 그저 검증되지 못하는 가설에
       불과하지만, 가끔 히미코의 '다원적 우주'를 떠올려야 할만
       큼 우린 지치고 있다. 가끔 히미코같은 여자가 그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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