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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아란 영혼

책들의 우주/문학 +253


빠스꾸알 두아르떼의 가정

카밀로 호세 셀라(Camilo Jose Cela) 지음, 
김충식 옮김, 예지각, 1989년 초판.




어떤 일이 뜻대로 되지 않을 때, 아무리 최선을 다해도 나만 유독 되지 않는다는 기분이, 그런 경험이 계속 쌓여져갈 때, 그래서 나 자신에 대한 실망과 세상에 대한 불만과 증오가 쌓여져갈 때, 그것을 ‘운명’ 탓으로, ‘팔자’ 탓으로 돌릴 수 있다면 그건 얼마나 축복받을 일인가. 이제 ‘운명’대로, ‘팔자’대로 살면 그 뿐이다. 헛된 희망을 꾸지 말고 그저 원래 나는 불행하게 태어났으며 되는 일이란 없으니, 그저 그렇게 살면 그 뿐이다. 그리고 저 멀리서 ‘운명’와 ‘팔자’를 다스리고 있다는 초월적 실체에 대한 경배를 시작하면 된다. 점쟁이 집에 자주 가고 부적 붙이고 굿도 하고 안 다니던 절에도 나가고 교회도 나가면 된다.


그런데 그렇게 했는데, 그런 주어진 대로 살고자 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런 불행이 일어난다면, 유독 나에게만 안 좋은 일이 연거푸 생긴다면, 도대체 어떻게 해야만 할까. 카밀로 호세 셀라의 ‘빠스꾸알’은 자신의 어머니를 난도질해버린다.

선생님, 저는 결코 나쁜 사람이 아닙니다. 어떤 피치 못할 사정에 의해 나쁜 사람이 되었을 뿐입니다.
- 8쪽


소설의 시작은 밋밋하고 도대체 왜 이 사내는 이런 말을 소설의 처음부터 하고 있는 걸까 하고 의아해하지만, 소설을 다 읽고 난 다음 이 짧은 시작은 그 무수한 현대 소설들 중 가장 멋진 시작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이 짧은 문장 속에서 빠스꾸알이라는 이 사내의 가슴 속에 응어리진 분노, 사랑, 증오를 느끼게 되는 것이다.


세상에 대한 이야기를 하기 시작하면 끝이 없다. 열 살도 채 되지 않은 요즘의 꼬마 아이들마저도 세상은 불공평하고 비합리적이며 되먹지 못한 곳이라는 걸 알기 때문에. 이제 ‘세상탓’은 누구나 할 수 있는 것이 되었다. 이제 세상에 ‘변화’란 존재하지 않는다. 오직 세상의 순리대로 살아갈 뿐이다. 나의 태생, 배경, 학력 등으로 내 인생은 정해져 버렸으며 그냥 여기에 만족하고 살아가면 그 뿐이다.

하지만 빠스꾸알은 사랑에 빠졌다. 그는 용감하게도 그의 아버지와 어머니와는 전적으로 다른 인간이 되고 싶었다. 하지만 그에게 어울리지 않았던 행복은 아주 짧은 순간 뿐이었고 연거푸 불행이 이어진다. 더구나 그 불행에 대한 해결책이 그에겐 없었다. 그저 묵묵히 받아들여야만 할 뿐. 태어날 아이가 죽어 나오고 겨우 태어난 아이는 얼마 지나지 않아 죽어버리고 사랑하는 아내는 다른 남자의, 자신의 여동생과 살고 있는 남자의 아이를 가지게 되고. 빠스꾸알에게는 평범한 삶의 기회조차 주어지지 않는다.

다른 남자의 아이를 천연덕스럽게 잉태하곤 그 아이를 죽게 내버려둔 그의 어머니나 술만 마시면 몽둥이질을 해대는 그의 아버지와는 다른 삶을 살고 싶었던 빠스꾸알. 하지만 그는 끝내 그의 어머니를 살해한다. 그의 아버지는 이미 죽은 지 오래.

세상에 진리가 있느니, 신의 밝은 빛이 지상에 당도한다느니, 선한 신이 있다느니 하는, 너무 듣기 좋아, 너무 아름다워 눈물이 다 날 지경인 그런 말들은, 불행하게도 빠스꾸알에게는 해당되지 않는다. 정말 다행스런 일은 그런 말을 지껄이는 이들에게 빠스꾸알에게서 일어났던 일들이 일어나지 않았다는 것이다.


인간은 태어날 때 누구나 똑같은 가죽을 뒤집어쓰고 어머니 뱃속에서 나옵니다. 그러나 운명은 인간들이 마치 밀랍으로 만들어진 것처럼 우리들을 다양한 모습으로 변화시켜, 죽음이라는 같은 목표를 향해 여러 갈래의 길로 가는 것을 보고 즐거워합니다. 고운 꽃과 풀들로 가득한 아름다운 꽃길을 걷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엉겅퀴와 선인장이 무성한 험난한 길을 걷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꽃길을 걷는 이는 평화롭게 세상을 바라보는 기쁨을 맛보면서 천진난만한 얼굴로 행복에 겨워 미소 짓습니다.
그러나 엉겅퀴와 가시밭길을 걷는 자들은 광야의 폭염으로 괴로워하며 자신을 지키기 위해 험상궂은 우거지상을 합니다. 몸에 화장품을 바르고 향수를 뿌리는 것과 지울 수 없는 문신을 넣는 것은 차이가 큽니다.
- 8쪽에서 9쪽.


26살의 카밀로 호세 셀라가 1942년에 발표한 이 데뷔소설은 20세기 이후 모든 사람들이 부딪히게 되는 어떤 실존적 물음을 던지고 있다. 그리고 빠스꾸알이라는 인물을 통해 역설적인 메시지를 던지고 있다. 운명은 무엇이고 인간은 어떻게 살아야 되는 것이냐며.


'작가에 대하여'

 카밀로 호세 셀라(1916~2002) 

2권의 소설이 번역되었으나, 이젠 어디에서도 구할 수 없는 책이 되었다. 그러나 우리 인생의 비극성을 가장 적절히 표현하며, 실존적 삶에 물음표를 던지는 20세기 후반 최고의 소설가들 중의 한 명이다.  

'빠스쿠알 두아르떼의 가족', 그리고 '벌집'이 번역되어있으니, 헌책방 어딘가에서 구할 수 있을 것이다. 1989년도에 노벨문학상을 받았으며, 스페인 마드리드에는 그의 이름을 딴 거리가 있을 정도다.


민음사에서 새로 번역되어 나왔습니다.

파스쿠알 두아르테 가족 - 10점
카밀로 호세 셀라 지음, 정동섭 옮김/민음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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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난설헌 - 6점
김성남 지음/동문선




많은 기대를 하고 펼친 책이지만, 안타깝게도 이 책의 완성도는 너무 떨어졌다. 여기저기 쓴 논문들을 수정없이 모은 듯 보이는 이 책은 똑같은 내용이 책에 앞에 등장하기도 하고 뒤에 다시 등장하기도 한다. 결국엔 책의 내용까지 의구심이 들게 한다. 처음에는 규방시인이 아니었다고 하다가, 뒤에는 규방시인 허난설헌이라고 표현하기도 한다.

그렇다고 해서 허난설헌의 천재성이나 독창성을 무시할 생각은 전혀 없다. 그녀, 허균의 누이면서 조선 시대 최고의 여류 시인이면서, 유선시(遊仙詩)의 대가였다. 그녀는 시간와 공간을 잘못 타고 태어났으며, 그래서 그녀는 시간과 공간을 벗어난 신선의 세계를 그리워했다.
박복한 운명의 주인공이었으며, 서른이 되기 전에 생을 마친 비운의 여인이었다.

오동나무 한 그루가 역양에서 자라나,
차가운 음지에서 몇 년을 견디었던가.
다행히 귀한 장인을 만나,
베어져 거문고로 만들어졌다오.
거문고로 만들어져 한 곡조를 타보았지만,
세상에 알아듣는 사람이 없어,
그래서 광릉산의 노래가,
끝내 전해지지 못하였는가 보오.
(34쪽)


조선시대 내내 허난설헌의 시에 대한 평가도 낮아서 표절이라는 의견이 팽배했으며 의도적으로 무시되었다. 도리어 중국에서 높은 평가를 받아, 중국에서 나온 허난설헌 시집이 조선으로 들어올 지경이었다. 하지만 세월은 흘렀고 현재에 이르러 재평가되고 있는 셈이다.


<난초를 보며>
그득히 피어난 창가의 난초,
가지의 잎 그리도 향기롭더니.
가을바람이 한 번 스쳐 지나가니,
슬프게도 가을서리에 다 시들었구나.
뛰어난 그 모습 생기를 잃어버려도,
맑은 그 향기는 결코 죽지 않으니.
그 모습 보면서 내 마음이 아파져,
눈물이 흘러 옷소매를 적시운다.
(88쪽)



이 책을 권할 생각은 없으나, 안타깝게도 허난설헌에 대한 책이 그리 많지 않다. 다른 책을 읽어본 바 없으니, 다른 책을 추천할 수도 없다. 허난설헌 시집이 몇 권 나와있는 것으로 알고 있으나, 상태가 어떤지 모른다. 하지만 허난설헌은 기억해두어야 할 조선 시대의 시인이며, 앞으로도 계속 읽혀져야 할 것이다.

Comment +2

  • *** 2009.06.29 12:14 신고

    난초를 보며라는 시를 보니 당신께 전해드린 꽃이 생각나 즐겁고 또한 슬퍼집니다.

    • 어느 덧 삼십후반의 나이가 되다 보니, 즐거운 기억보단 안타깝고 후회스런 기억들 밖엔 남지 않았네요. 건조한 사무실에서 바쁘게 일을 하다가, 문득 들린 블로그의, 짧은 리플을 보며, 한참 우울한 상념에 잠기고 말았습니다.

      꽃을 받은 적이 몇 번 되지도 않았다는 생각에, 그리고 그렇게 받은 꽃의 의미를 제대로 알지 못했다는 생각에, 마음은 무거워지고, 슬퍼지는군요. 지난 날에 대한 미안함을 떨쳐버릴 수 없는 오후입니다.


고도를 기다리며 - 10점
사무엘 베케트 지음, 오증자 옮김/민음사





직장 생활을 하면서 공부를 한다는 건 꽤 큰 도전이다. 지금 그 도전을 하고 있다. 지난 주 내내 사무엘 베케트의 '고도를 기다리며'를 읽었다. 이번 읽는 것이 몇 번째인지 모르겠다. 매번 읽을 때마다 시선이 가는 문장이 다르고 연극을 다르게 해석한다. 다음에 읽을 땐, 또 어떤 느낌일까. 

과제물로 제출한 간단한 페이퍼를 올린다.  조금 형편없이 쓴 글이긴 하지만.

****

1막의 뽀조와 2막의 뽀조는 서로 대비되면서 마치 눈을 가린 현자, 혹은 운명의 여신처럼 보인다. 명령을 내리듯 말하고 모든 걸 아는 듯 단언적이다. 럭키는 이런 뽀조 옆에서 혼자서는 아무런 행동도 하지 못하고, 뽀조의 명령 체계 속에서 정해진 대로 움직일 뿐이다.

뽀조와 럭키가 대변하는 인물은 너무 분명하고도 명확하다. 뽀조가 이 세상에 마치 진리가 있는 듯, 그리고 그 진리를 알고 있다고 떠벌리고 돌아다니며, 남에게 명령을 내리고 자신, 또는 자신의 생각과 언어가 마치 이 세상의 도덕이며 가치 기준이라고 믿는 종교인이나 사상가, 권력가를 상징한다. 그리고 럭키는 대다수의 무능력하며 다수의 뽀조들이 만들어 놓은 어떤 세계에 대해 아무런 의문도 품지 않은 채 다람쥐 쳇바퀴 돌 듯 일상을 살아가는 현대인을 상징한다.

뽀조와 럭키와 만나 이야기를 나누는 블라디미르와 에스트라공이 기다리는 고도란 무엇일까. 그 전에 먼저 기다린다는 행위를 무얼까. 그것은 어떤 바람이나 소망을 상정하는 행위이며, 언제나 고통스럽거나 결핍된 현재와 대비되어 나타나는 미래의 출현을 뜻한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고 아무도 오지 않으며 아무도 떠나지 않는 정말 지긋지긋한' 공간 속에서의 '고도'라는 미래의 출현은 과연 의미 있는 것일까?

실은 극이 끝나기 전에 고도가 무대에 등장한다고 변하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이 희곡이 놀랍고 천재적인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 무대에 등장한 고도가 블라디미르와 에스트라공이 기다리던 그 고도임을 증명할 수 있는 건 아무 것도 없다는 것. 그래서 방점이 찍혀야 하는 건 고도가 아니라 기다린다는 행위일 것이다. 

디디와 고고는 고도를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기다린다는 행위를 선택한 것이다. 애초에 고도란 없고 임의로 만들어낸 가상의 존재일 뿐이다. 이 두 주인공은 기다림이라는 행위, 끝없이 뒤로 유예되며, 결론나지 않을 어떤 행위를 선택함으로써 자신의 건조하고 무의미한 일상을 지탱하고 있을 뿐이다.

무대는 부조리하다. 디디와 고고는 고도를 기다리지만, 그들은 동시에 고도가 오지 않는다는 사실도 알고 있다. 그저 기다릴 뿐이다. 자기 방어적이며 자기 기만적이다. 동시에 그들은 이 세상에 널려 있는 뽀조들이 될 수도 없고 럭키들이 될 수도 없다. 디디와 고고는 어떤 행위를 선택했지만, 그 행위의 귀결이 무엇인지 알지 못한다. 그리고 그들은 그 선택에 대해 따져묻지도 않고 그저 선택을 했음을 반복적으로 보여줄 뿐이다.

이 희곡이 부조리하면서 암울하고 슬픈 이유는 디디와 고고가 아무 것도 묻지 않는 데에 있다. 그들이 한 번이라고 자신들의 상황을 따져묻는다면, 조금은 더 슬플 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들은 묻지 않을 것이고 고도를 기다릴 뿐이다. 그들 앞에 고도가 나타난다고 하더라도 그들은 그 고도를 부정할 것이고, 다시 또 다른 고도를 기다릴 것이다. 끊임없이 새로운 고도를 기다림으로서 그들의 삶은 뒤로 밀려날 것이다.

마치 우리의 삶이 부조리하듯, 그들은 그 부조리를 뒤로 끊임없이 유예시킬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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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딸기 2009.06.28 14:13 신고

    사 놓고 못 읽고 있는 책 중의 하나... 이상하게 손이 안 가요.
    정확하게 말하면, 어쩐지 읽을 엄두가 안 나고 좀 무섭달까요.
    경험적으로 봤을 때, 유명한 책은 읽으면 항상 왜 유명한지 이유를 알 수 있게 해주는,
    독자를 압도하는 그 무엇이 있었고, 이 책도 그럴 것 같긴 한데...
    어쩌면 '부조리'를 대면하고 싶지 않은 건지도 모르겠어요. :)

    • 그냥 심정적으로 익히 알고 있는(알고 있었던 것같은) 어떤 것을 확인하게 된다고 할까요. 하긴 저도 이십대 후반에 이 희곡 읽고 꽤 고생했던 기억이 나긴 하네요. 크~. 삼심대 후반인 지금, 밥벌이로 고생스러운 관계로, 그런 감정 같은 건 잠시 옆에 치워두고 살긴 하지만, ... 부조리를 재차 확인할 때마다 기분이 좋진 않아요. 우울해지기도 하고. T_T



햄릿
윌리엄 셰익스피어(지음), 김재남(옮김), 하서



시청률의 노예가 되고 하나의 광고라도 더 받아야 하는, 처량한 TV 드라마의 시대에, 몇 세기가 지난 영국 작가의 희곡을 읽는 건, 참으로 터무니없어 보인다. 우리의 일상은 셰익스피어를 읽을 만큼, 고상하지도 않고 더구나 여유롭거나 한가롭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셰익스피어를 읽어야 한다면, 그건 무슨 이유 때문일까.

끝까지 살아남아 이 비극의 전말을 후세에 남기게 될 호레이쇼에 대해 햄릿은 이렇게 이야기한다.


햄릿
여보게 호레이쇼, 나는 스스로 영혼 속에 분별력이 생겨서 인간의 선과 악을 가릴 줄 알게 된 때부터 자네를 영혼의 벗으로 꼭 정해놓고 있네.
자네만은 인생의 갖은 고생을 겪으면서도 흔들리지 않을 뿐더러, 운명의 신의 상과 벌을 똑같이 감사한 마음으로 맞아들이는 사람이었네.
감정과 이성이 잘 조화되어 운명의 손가락이 노는 대로 소리를 내는 퉁소가 되지 않는 사람, 그런 사람은 참으로 행복한 사람이지.
정열의 노예가 되지 않는 사람, 그런 사람이 있다면 나는 내 마음 속 깊은 곳에 간직하고 다니려네.
자네가 바로 그런 사람이네.
- 93쪽


아마 자신의 운명을 저주하는 햄릿의 바람이지 않았을까. 극은 긴박하게 돌아간다. 몇 시간 안에 무대 위에서 모든 것들을 보여주어야 하는 희곡은 스토리를 질질 끌지 않으며, 사건과 인물을 압축적으로 형상화하면서 갈등의 끄트머리에서 이 이야기의 전말을 보여주며 끝난다.

인물들은 자신의 감정, 깊은 밑바닥을 드러내며 몰락해가며 희곡은 끝나지만, 우리는 이 이야기의 여운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스토리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도리어 이어지는 비극적인 사건들 속에서 인물의 행동과 감정을 드러내며 사건을 종결시키는가, 정해진 시간 속에 인물들의 갈등을 어떻게 첨예화시키며, 주요 인물의 도덕성과 고결함을 드러내는가, 그것을 위해 어떻게 언어를 조탁하는가에 대해서 알아야 한다.

우리가 이 책을 읽으면서 알아야 하는 것은, 햄릿 일가의 비극적인 상황도, 햄릿과 오필리어의 사랑도 아니다. 쓰레기같은 스토리, 구차한 감정들로 이루어지는 갈등, 인생의 고결함이라곤 전혀 없는 TV 드라마의 시대에(* 드라마라는 단어를 쓰고 있는 것조차 부끄럽기 그지 없는), 원래 드라마란 이런 것임을 알기 위해 이 책을 읽어야 하는 것이다.  

***

19세기 빅토리아 시대의 영국, 라파엘 전파의 한 사람인 밀레이는 죽은 오필리어를 그린다. 낭만주의 말기, 슬픈 사랑의 주인공인 오필리어는 많은 예술가들을 사로잡았음에 분명해 보인다.


왕비
시냇물가에 하얀 잎사귀를 거울 같은 수면에 비치며 비스듬히 서 있는 버드나무가 있는데, 그애는 그 가지에다 미나리아재비니, 쐐기풀이니, 실국화니, 자란 등을 잘라서 괴상한 화한을 만들지 않았게니.
이 자란을 무식한 목동들은 상스러운 이름으로 부르지만, 얌전한 아가씨들은 사인지라고들 하더구나.
아무튼 그 화환을 늘어진 버드나무가지에 걸려고 올라가던 참에, 심술궂은 은빛 가지가 부러져 화환과 함께 사람은 시냇물 속에 떨어지고 말았지. 그러자 옷자락이 활짝 펼쳐지고, 그애는 마치 인어처럼 물에 둥실둥실 떠서 옛날의 찬송가를 토막토막 부르는데, 절박한 불행도 아랑곳없이 마치 물에서 자라 물에서 사는 생물 같았지.
그러나 그게 오래 갈 리는 없고, 옷에 물이 배어 무거워지자 그 가엾은 것은 물 속으로 끌려들어가 아름다운 노랫소리도 끊어지고 말았지.
- 159쪽 ~ 160쪽




John Everett Millais,  Ophelia






Comment +2

  • 오필리어 그림이 참 이쁘네요. 햄릿을 읽은지 얼마 안되서 읽으니 더욱 그런것 같아요.
    리뷰 잘 읽고 갑니다 :)

    • 존 에버렛 밀레이의 작품들은 정말 이쁘죠. ^^ 문제는 너무 이쁘기만 하다는 데에 있어서, 미술사적인 평가는 그리 높지 못해요. 크~. 이번에 햄릿은 두 번째 읽는 건데, 다시 읽어도 좋네요. ^^


강철군화 - 8점
잭 런던 지음, 곽영미 옮김/궁리


세계는 앞으로 가는 것일까? 아니면 정지해 있는 것일까? 혹은 뒤로 가는 것일까? 아마 사람들은 앞으로 간다고 믿고 싶겠지만, 실은 '앞으로 간다'라는 진보(혹은 진화)의 개념이 우리의 사고 속에 명확하게 떠오른 것은 18세기 이후부터였다. 그리고 그것이 확실하게 자리잡게 되는 것은 찰스 다윈의 '진화론' 이후였다. 이 점에서 소설 '강철군화'는 미래를 향해 나아가는 일군의 사람들에 대해 적고 있다. 

언젠가 평화로운 시위대를 폭도로 만드는, 아주 단순한 방법을 누군가에게 이야기한 적이 있었다. 그 방법인 즉슨, 시위대 속의, 눈에 잘 띄는 젊은 여자(이쁘고 연약하게 보이면 보일수록 좋다)에게 아주 짧은 시간, 집중적으로 폭력을 가하면 된다. 그러면 그 젊은 여자를 보호하기 위해 시위대 속 남자들이 일어날 것이고 나쁜 소문이 삽시간에 퍼질 것이다. 방송이나 신문에서는 최초의 폭력에 대해서는 다루지 않으며, 폭도로 변한 시위대만 찍어 다음날 뉴스에 보도하면 된다. 

실은 현실 세계에서 이런 종류의 일은 비일비재하다. 선량한 척 이야기하지만, 속으로는 음흉한 욕망을 감춘 사람들이 득세하는 곳이 바로 이 세상이다. 

소설은 짧고 굵으며 강렬하다. 오직 한 방향을 향해서만 가는 이 소설은 다소 억지스러운 면까지 소유한 프로퍼갠다다. 그래서 소설은 희망을 이야기할 수 있고 진실을 이야기할 수 있다. 이런 소설들에서는 왕왕 문학적 완성도나 미학적 구조는 무시된다. 무시된다기 보다는 소설 구성의 요소들 중에서 전통적으로 중요시되던 요소들이 뒤로 밀리고, 정치적 메시지가 우선시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소설은 우리 세계의 일부만 반영할 뿐이다. 아직까지 이 소설이 호소력을 갖는다면, 여전히 빈부격차가 존재하고 밑바닥 인생의 참혹함을 우리는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딱 거기까지만이다. 소설에서처럼 혁명이 일어날 가능성은 거의 제로이며, 실제 현실 세계는 누가 노동자인지, 지배계급인지 알지 못하는 회색 시대로 접어들었다. 

이 소설은 순진한(직접적 폭력의) 자본주의 시대에 씌여진 순수한 소설이라면, 현재의 자본주의는 보이지 않는 폭력의 안개 낀 대기와도 같아서, 누가 동지이고 누가 적인지 알 수 없을 정도로 변해버렸다. 20세기 초반에는 잭 런던의 '강철군화'가 있었다면, 21세기 초반에는 과연 어떤 소설이 있을 수 있을까? 

소설을 읽어나가는 내내 불편했던 것은 프로퍼갠다 문학이 아직까지 읽혀져야 하는 당위성이 우리 시대에도 남아있기 때문이었다. 


 



Comment +7

  • 저랑 비슷하게 이 책에서 '순진함'을 엿보셨네요~
    처음엔 그 '순진함'을 걱정스러운 눈길로 읽었지만, 곧 그 '순진함'이 그립더라구요. 그것이 '프로퍼갠더 문학이 아직도 읽혀져야 하는 당위성' 때문일까요? ^^
    글 잘 읽고 갑니다. 부끄러운 제 글도 엮고 갑니다.

    • 순진했기 때문에 앞만 향해갈 열정, 신념이 있었던 건 아닐까 싶어요. : ) 동시에 우리 시대에 어울릴 만한 순진함(이 표현이 적당한지 잘 모르겠지만)을 찾아서 잃어버리고 있는 열정이나 신념을 찾아야한다고 생각해요. 그게 뭔지는 잘 모르겠지만요. ^^;

  • 2009.05.07 13:43

    비밀댓글입니다

  • 2009.05.07 14:07

    비밀댓글입니다

  • 2009.05.07 14:15

    비밀댓글입니다

  • 그러네요..아직도 해결되지 않은 현안들이 산재해 있는데..순수한 시각으로 바로보았던 그의 저서에..완전히 공감하기엔 뭔가 부족했던것 같네요

    • 그만큼 이해하기 어려운 현실 세계가 크게 다가왔을 것 같아요. 그리고 그 때 바라보던 세상과 지금 바라보는 세상에는 큰 차이가 있으니깐요. 하지만 '강철군화'에서 나오는 에피소드들이 지금 세상에서 사라진 것도 아니니... 결국엔 참 아픈 소설이었다는...


서가에서 오래된 시집 한 권을 꺼내 소리내어 읽는다.

박꽃


신대철


박꽃이 하얗게 필 동안
밤은 세 걸음 이상 물러나지 않는다

벌떼 같은 사람은 잠들고
침을 감춘 채
뜬소문도 잠들고
담비들은 제 집으로 돌아와 있다

박꽃이 핀다

물소리가 물소리로 들린다



소리 내는 사이사이로 생의 거친 바람과 서늘한 도시 풍경이 밀려온다. 일주일 내내 목 염증으로 고생하고 있다. 이젠 두통까지 생기는 느낌이다. 몸은 너무 피곤하고 음악 소리는 귀 안으로 들어오지 않는다.

햇살은 부드럽지만, 늘 그렇듯, 자신의 속내를 드러내지 않는다. 늘 따로따로 움직일 뿐, 서로를 간섭하지 않는다. 대학시절, 신대철의 시를 끼고 살았다. 딱 한 권만 나와있던 그의 시집. 몇 년 전에 새로 시집이 나왔으나, 읽히진 않았다. 첫 시집 내고 두 번째 시집 내는 기간이 무려 20년 가까이 되었으니.

휴식을 취해야할 일요일, 완전 요양 모드여야 하지만, 딱히 그럴 여유도 없다. 누군가 내 일상을 공유했으면 하는 바람을 가졌지만, 그것마저도 이제 그만둘 예정이다.

하지만 시가 있으니... 위안 삼아야겠다.


무인도를 위하여 - 10점
신대철 지음/문학과지성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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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 콜드 블러드 - 10점
트루먼 카포티 지음, 박현주 옮김/시공사





1.
주기적으로, 떠올리기조차 싫은 끔찍한 살인사건들이 있었다. 그리고 방송과 신문들은 그 사건을 연일 다룬다. 사람들의 궁금함을 풀어주기 위함이지만, 실은 자신들의 수익모델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을 뿐이다. 각 분야의 전문가들이 나와, 자신들의 전문적인 시각에서 바라본 그 사건의 의미와 해석을 쏟아낸다. 실은 사건의 직접적인 당사자와 피해자, 혹은 그들의 가족에는 아무런 위로도 되지 못하며, 아무런 예방 효과도 가지지 못하는 이야기만 떠들어댈 뿐이다.

먼 훗날, 사람들은 그런 사건들을 기억할까? 아마 정신이 나간 몇몇 보수주의자들은, 전쟁 땐 더 많은 사람들이 죽어나간다며, 애써 그런 사건들의 의미를 축소시킬 지도 모른다. 그런데 이런 통계학이 아니다. 삶과 죽음에 대한 본질적인 질문이며, 우리들 중 누군가에게 닥칠 지도 모르는 공포의 일부다. 하지만 우리는 (불행하게도) 그것을 우연의 일부로 받아들일 수 밖에 없다.

슬픈 일이다. 결국 우리는 우리 자신들에게 해줄 것이라곤 아무 것도 없다. 너무나도 현실적인 우리들은 먼 미래의, 우연의 일부로 여겨질 어떤 공포에 대해 무방비로 살아갈 것이 뻔하다. 돈벌이가 기본적인 삶의 방식인 영화는 이런 사건들을 교묘하게 응용할 것이고, 이는 전적으로 허구의 세계에 속한 어떤 것으로 만들 것이다. 장 보드리야르의 의견대로 모든 현실은 가상이 될 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 선두에 현대의 미디어들이 앞설 것이다.

2.
‘강호순 사건’을 보면서, 그것의 사회학적 의미와 파장에 대해 생각하면서, 문학의 자리를 생각했다. 과연 문학은 무엇을 할 수 있을 것인가? 한국 문학은 무엇을 할 수 있을까?

3.
트루먼 카포티의 ‘인 콜드 블러드’는 실제 일어났던 살인 사건을 다루고 있는 논픽션 소설이다. 1959년 캔자스 주의 작은 마을 홀컴에서 일어난 일가족 살인 사건을 기록한 소설로, 트루먼 카포티의 집요하고 냉정한 서술은 이 책을 읽는 독자의 마음을 서늘하게 만든다. 절대로 그런 종류의 사건에 휘말려들 가능성이라곤 전혀 없는 어떤 선량한 사람들이, 두 명의 살인자에 의해 무참히 살해당하는 사건은 이성적으로는 전혀 납득 가지 않는다.

카포티는 자신의 견해를 최대한 억제하면서 잔인할 정도로 느리게 사건의 전후, 피해자 가족과 살인자 가족을 이야기한다. 그리고 그 살인자들의 재판 과정을 상세하게 기록하며, 사법 제도의 기능에 대해서도 묻는다.

‘왜 그 두 명은 살인자가 되었을까’에 대한 아무런 논리적 해답도 없다. 그래서 소설은 더 공포스럽고 끔찍하며 아프다. 소설의 마지막 부분, 살인자들 중의 한 명인 딕이 자신의 판결 결과에 대해 불복하기 위해, 법률 서적을 뒤지며, 여기저기 인권 변호사들에게 편지를 보내, 사형이 부당함을 강변하는 모습을 읽을 땐, 우리의 모든 것들을 다시 생각하게 된다. 과연 살인자들에게도 용서의 기회가 필요한 것일까, 그리고 용서하고 난 다음은 무엇일까, 사법 제도는 이런 사건을 미연에 방지하는 기능을 가지며, 동시에 합리적인 판단을 내릴 수 있는가 따위의 질문들이 끊임없이 떠오른다.

4.
죽은 자들은 아무런 말이 없고 살아남은 자들은 끔찍한 상처는 껴안아야 한다. 그리고 용서도 그들의 몫이다. 우리들의 종교에서는 그 살인자를 용서하라고 가르치지만, 결코 그렇게 되지 못한다. 강호순 사건에서 보다시피, 몇몇 언론에서는 아예 살인자의 얼굴을 공개해버렸다. 그들은 살인자에게도 인권이 필요한가라고 물으며, 자신들은 독자들에게 진실한 정보를 보여줄 필요가 있다고 말하지만, 나에겐 상업주의와 정치적 고려가 맞아 떨어진 결과로 밖에 보이지 않는다.

실은 용서 따윈 아무런 고려의 대상이 되지 못한다. 도리어 냉정하고 합리적인 시장의 질서는 많은 시장 참가자들에게 여러 가지 좋은 기회들을 제공한다. 많은 이들이 전문가로 나서면서 자신의 이름을 알릴 기회로 활용하며, 방송과 신문들은 연일 머리기사로 다루며, 서로 빠른 정보와 정확성을 내세우며 선정성을 교묘하게 가린다.  그리고 발 빠른 콘텐츠 제작사들(영화나 방송, 출판 등)에서는 이미 콘텐츠 기획안을 통과시키고 제작과 출시 일정을 조정하고 있을 터였다.

아마 많은 사람들은 우연에 가까운 어떤 사건을 그냥 나에게만 안 일어나면 되거나, 통계적으로 나에게 일어날 확률은 거의 제로에 가깝다고 여기고 지나쳐갈 것이다. 실은 그 사건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할 여유도 없고 생각할 수 있는 정신적 깊이도 가지고 있지 못하다. 하지만 누군가는 남아 천천히 정리하고 기록하며, 밥벌이에 바쁘고 여유 없으며, 무언가를 기억하기 보다는 잊어버리기에만 익숙한 사람들을 불러모아서 이야기해주어야만 한다.

진지한 문학이 가지는 가치는 바로 여기에 있다. 트루먼 카포티의 이 소설이 대단하다는 평가를 받는 것도 여기에 있다. 소설을 읽어나가면서, 겉으로는 평온해 보이는 이 세상의 끔찍한 뒷모습에 경악하고 몸서리 치면서도, 느리고 진지하게 살아남은 우리들이 마주해야만 하는 진실이 어떤 것인가를 말하고 있는 것이다.

5.
한국 문학에 트루먼 카포티 같은 작가도 없고, 이 소설과 같은 작품이 없다는 것은 참 큰 불행이다. 고작 도토리 키 재기를 하면서 대단한 작가인 양 짐짓 포즈 취하는 모습을 보면서, 한국 문학이 우리가 살아가는 이 세계 속에서 기여하는 바는 과연 무엇일까 다시 한 번 생각해보게 된다. 트루먼 카포티의 ‘인 콜드 블러드’를 다 읽고 난 뒤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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흡혈귀의 비상 - 10점
미셸 투르니에 지음, 이은주 옮김/현대문학


흡혈귀의 비상, 미셸 투르니에(지음), 이은주(옮김), 현대문학



'독서노트'라는 부제가 붙은 이 책이 한국적 상황 속에서 온전한 의미의 '독서노트'로 읽혔으면 좋겠지만, 사정은 그렇지 못하다. 한국의 문학평론가들이 써대고 있는 비평문들이 미셸 투르니에의 독서노트 수준이라도 되었으면 하고 바라지만, 최근 내 기억에 그런 평론은 없었다. 도리어 난삽하고 정의되지 않는 개념어들의 나열이고 시덥잖은 작가의 작품을 띄워주기 위한 정치적 의도가 다분했다.
(젊은 평론가일 수록 이런 경향 더 심해지니 어찌할 노릇인지.)


이 책을 읽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특히 한국 독자에겐 이 책은 어렵고 지루하며 도통 모르는 작가들과 작품들로만 채워져 있다. 그러니 읽지 말아야 된다. 아니면 가령 이런 식의 노력이 필요하다.
(미셸 투르니에의 '흡혈귀의 비상'을 읽기 전에 읽어야 할 책들 http://blog.aladdin.co.kr/misshide/1155195)

그럼에도 불구하고 읽었던 이유는, 미셸 투르니에의 문학적 안목과 식견, 그리고 그가 좋아하는 작가들과 작품들에 대한 호기심 때문이었다.

미셸 투르니에의 경우, 이미 한국에 여러 권의 산문집이 번역되어 나와있다. 그 중에서 몇 권은 매우 뛰어나다. 산문집이라면, 미셸 투르니에 정도는 되어야 하지만, (정말 안타깝고 불행하게도) 한국 작가들이 낸 산문집 대부분은 여기저기 쓴 기고문들이나 일기 쪼가리들의 짜집기들이다.
(표현이 과격한 이유는 미셸 투르니에의 산문집과 비교해 상대적으로 평가했을 때임을 이해해 주기 바란다. 미셸 투르니에의 산문집과 비교하지 않았을 경우에는 나름 괜찮은 산문집들도 있을 수 있다.)

따라서 미셸 투르니의 이 책이 읽고 싶다면, 도리어 미셸 투르니에의 다른 산문집을 낫다.이 책은 불문학을 전공한, 성실한 학생에게조차 버거울 정도로, 비평적 통찰과 듣지도 못한 작가들이 툭툭 튀어나기도 때문이다.


픽션과 논픽션 사이에는 시간의 방향에서 비롯되는 차이가 있다. '문헌적인' 진실이 언제나 회고적이라면, 이에 반하여 '픽션의' 진실은 언제나 미래를 향한다. (15쪽)


소설의 주인공과 그 환경 - 사회적 환경뿐 아니라 또한 물리적 환경 - 과의 이 근본적인 대립은 소설의 어떤 범주를 잘 정의해주는데, 그것은 성장소설과 짝을 이루면서 그것과는 반대되는 논리를 따르는 소설인 '대결의 소설'이다. 스탕달이 바로 "적과 흑" 안에서 말하는 유명한 정의는 이 대립을 아주 잘 설명한다 : 하나의 소설은 "대로 위를 움직이는 하나의 거울"이다. 이선 이 표현의 비인격적인 성격을 강조하는 것이 좋겠다. 거울은 혼자서 움직이며, 그 뒤에서 거울을 붙들고 동시에 그것을 들여다보는 소설가는 없다. 그런데 거울에는 아무것도 담기지 않는다. 거울이 반영하는 것은 아주 작은 흔적조차 남기지 않고 지워진다. 이것이 자기 자신을 조금도 변화시키지 않으면서 수많은 모험들과 실패를 겪어내는 스탕달의 주인공을 대단히 잘 특징짓는다. (160쪽)


책을 읽으면서 기억에 남는 글은 '클라이스트 혹은 시인의 죽음, 자료들', '질식한 신비주의자: "마담 보바리"', '앙드레 지드를 위한 다섯 개의 열쇠', '헤르만 헤세와 "유리알 유희"', "귄터 그라스와 그의 양철북", "에밀 아자르 혹은 자기 뒤의 생" 등이다. 특히 '클라이스트 혹은 시인의 죽음, 자료들'은 매우 흥미로웠다.

클라이스트는 독일의 시인이다. 아마 독일문학사를 공부를 해야만 읽을 수 있는 이 시인은, 불과 서른 네 살에 권총으로 자살한다. 그는 이미 동갑네기인 헨리에테 포켈 부인을 먼저 권총으로 쏘아 죽인 후였다.


문학기행 애호가가 서(西)베를린에 간다면, 고속전철을 타고 종착역 바로 전 역인 반제역에 갈 수 있다. 오른쪽으로 대(大) 반제를 두고 다리를 건너면 소(小)반체의 가장자리에 이르게 된다. 나무들 밑을 조금 찾으면, 클라이스트의 무덤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헨리에테 포겔이 그의 곁에 묻혀 있음을 말해주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녀는 아마도 거기에 함께 있을 테지만, 1811년 말에 온 유럽을 떠들썩하게 했던 그 스캔들이 필경 그녀의 무덤에 이름이 없는 이유를 설명한다. 1811년 11월 22일 그날, 한 건의 살인과 한 건의 자살이 철 이른 겨울 선잠에 빠져있던 슈티밍 여관의 사람들을 뒤흔들었던 것이다.(117쪽)

미셸 투르니에는 이 사건을 경찰 조사 기록, 진술 조서들, 압류된 편지들과 같은 자료들로만 재구성해낸다. 그리고 클라이스트(빈번한 연애 실패로 점철된 시인, 더구나 동성애로 의심까지 받았던)와 헨리에테 포겔(자궁암에 걸려 시한부 삶을 살고 있었던 유부녀)의 사랑을 믿을만한 것이었음을 증명한다. 더구나 연애 편지가 사라진 디지털 시대에 클라이스트와 헨리에테 포겔의 편지를 읽는 건 참 이상하고 야릇하고 가슴 아픈 경험이다. 가령 이런 편지가 우리 시대에 다시 씌여질 수 있을까. 아니면 내가 이런 편지를 쓸 수 있을까.


헨리에테 포겔이 하인리히 폰 클라이스트에게

베를린, 1811년 11월

나의 앙리, 나의 아름다운 이, 나의 히아신스 꽃밭, 나의 오로라, 나의 석양, 나의 평화로운 태양, 나의 공기의 하프, 나의 이슬, 나의 무지개, 내 무릎 위의 갓난아기, 내 소중한 사람, 고통 속의 나의 기쁨, 나의 재생, 나의 자유, 나의 노예, 나의 안식일, 나의 황금 성배, 나의 대기, 나의 열기, 나의 생각, 내가 기다리던 내세와 현세, 나의 사랑하는 죄, 내 두 눈의 위안, 나의 가장 소중한 근심, 나의 가장 아름다운 미덕, 나의 자부, 나의 보호자, 나의 양심, 나의 숲, 나의 영광, 나의 투구 나의 칼, 나의 용기, 나의 오른손, 나의 크리스탈, 나의 생명의 원천, 나의 수양버들, 나의 주인 영주님, 나의 희망, 그리고 나의 굳은 결심, 나의 사랑하는 성좌, 나의 어린 아양꾼, 나의 흔들리지 않는 성채, 나의 행복, 나의 죽음, 나의 도깨불, 나의 고독, 나의 아름다운 배, 나의 골짜기, 나의 보상, 나의 베르테르, 나의 레테, 나의 요람, 나의 향 그리고 나의 몰약, 나의 목소리, 나의 판관, 나의 다정한 몽상가, 나의 노스텔지어, 나의 영혼, 나의 황금거울, 나의 루비, 나의 목신의 피리, 나의 가시관 , 나의 수많은 골짜기들, 나의 스승, 나의 제자, 내 생각 속에 있는 이 모든 것 이상으로 당신을 사랑해요, 나의 영혼은 당신의 것입니다.

헨리에테

추신 - 나의 정오의 그늘, 나의 사막의 오아시스, 나의 사랑하는 어머니, 나의 종교, 나의 내면의 음악, 나의 가엾은 병든 앙리, 나의 부드럽고 하얀 유월절의 어린 양, 나의 천국의 문.



이 독서노트가 가치있는 것은 이러한 풍부하고 사려깊은 자료집의 역할도 충실히 한다는 점도 빠질 수 없다.


추천하는 미셸 투르니에의 산문집.

짧은 글 긴 침묵 - 10점
미셸 투르니에 지음, 김화영 옮김/현대문학


예찬 - 8점
미셸 투르니에 지음, 김화영 옮김/현대문학


생각의 거울 - 8점
미셸 투르니에 지음, 김정란 옮김/북라인
('소크라테스와 헤르만 헤세의 점심'의 개정판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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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윤민연우맘 2009.01.09 16:31 신고

    저는 김정란 여사 번역의 소크라테스와 헤르만 헤세의 점심이라는 괴상한 제목의 산문집을 가장 좋아합니당. 이 낯뜨거운 제목으로는 아마 절판됐을 텐데 요즘은 뭔 제목으로 출판되고 있는지 몰겠네용. 짧은 글 긴 침묵도 재밌게 읽었어용.



아르네가 남긴 것 - 8점
지크프리트 렌츠 지음, 박종대 옮김/사계절출판사
 

아르네가 남긴 것
지크프리트 렌츠(지음), 박종대(옮김), 사계절



아래 인용이 이 소설과 관련될 수 있을까. 아마 격렬한 찬반양론을 불러일으킬 인용이 되지 않을까. '아르네'라는 유약하고 비범한 재능을 가진 소년을 등장시켰을 뿐이지, 이 소설은 '왕따'에 대한 내용이며, '무책임한 아이들'에 대한 초상화이다.


어린이의 육체적 정신적 나약함은 도덕적 천함을 나타내줄 뿐이다. 보쉬에는 단호하다: "어린이는 짐승의 삶이다." 베륄은 가능한 더 멀리 간다. : "어린이의 상태는 죽음 다음으로 인간 본성의 가장 상스럽고 천한 상태이다." 파스칼로 말하자면, 그는 추론에 의하여 - 섬세한 정신인가 기하학적 정신인가? - 어린이의 상태의 끔찍함을 정당화한다. "신의 정의에서 볼 때, 죄를 짓지 않은 사람에게 벌을 내리고 고통을 견디게 하는 것은 죄인들을 전혀 벌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로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어린아이들은 매일 고통을 겪고 있으므로, 그들은 필연적으로 어떤 죄를 지었어야만 하며, 그것은 타고난 죄일 수밖에 없다. 아이들이 현세에서 받는 벌은 원죄의 벌이다."
- 미셸 투르니에, '흡혈귀의 비상', 이은주(옮김), 현대문학, 49쪽~50쪽


미셸 투르니에가 인용한 저 사람들이 생각하는 아동의 시기가 아르네, 그리고 아르네 주변 아이들이 포함된다고 확실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다만 어른들이 바라보는 세계와 다른 세계 속에서 살고 생각하며 움직이는 어린 시절은 지금의 내가 돌이켜 생각해보아도, 불가해하면서도 슬픈 시절이었다. 그래서 앙시앙 레짐 이전의 프랑스 지식인들은 어린이 시절을 그렇게 여겼는지도 모른다.(다른 사회학적 요인들이 더 많긴 했지만) 

내가 아르네라면, 도리어 침묵과 고독을 택했을 것이다. 적어도 그 편이 고통스럽긴 하지만, 자유로웠을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르네는 비프케와 어울리고 싶었고 그것이 비극의 시작이었다.

사라진 자는 아무런 말이 없고 남겨진 자들의 미래가 궁금할 뿐이다. 하지만 남겨진 아이들은 아무런 후회도 하지 않을 것이고 오직 아르네 탓으로만 여길 것이다. 실은 그 아이들은 아르네의 입장을 전혀 이해하지 못한다. 그러고 보면, 우리 성장의 과정이란 남과 어떻게 어울리고 더불어 살아갈 수 있는가가 전부라고 해도 지나치지 않다.

세상은 각자의 몫이고 각자가 헤쳐나가야 할 곳이다. 그 점에서 아르네는 너무 유약했으며 그것을 다른 아이들은 낯설어하고 이해하지 못했다. 예외적인 아르네가 속할 곳은 그 곳이 아니었다.

지크프리트 렌츠의 이 흥미로운 소설은 현대적 성장소설의 유형을 그대로 보여준다. 담담히 인물과 사건들을 보여줄 뿐이고 아르네가 속하지 않았던 곳에 아르네를 위치시킴으로 소기의 목적을 달성한다. 조금은 잔인해 보이는 방식이다. 하지만 세상이 그렇게 생겨먹은 것을 어쩌겠는가. 작가는 그냥 있는 그대로 보여주려고 노력할 뿐이다(소설을 다 읽고 난 뒤, 위 인용문이 계속 생각하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인 듯 싶다).


아, 아르네! 나는 네가 사무실에서 나와 바로 집으로 오던 모습을 절대 잊지 못할 거야. 너는 창문에 서 있던 내 모습을 보았고, 내 손짓을 틀림없이 이해했어. 너는 내게 올 작정이었지. 그때 갑자기 폐선 처리장 가장자리에 라르스와 비프케가 나타났어. 순간 너는 방향을 바꾸어 그 애들에게 갔어. 그 애들과 몇 발짝 사이를 두고 멈춰 섰지만, 그 애들은 너를 본체만체 지나쳤어. 마치 기둥이나 돛대를 피해 가듯 그렇게 무관심하게 양쪽으로 갈라져서 너를 지나쳐갔어. 너는 땅에 뿌리박힌 듯 서서 그 애들의 뒷모습을 지켜보았어. 도저이 믿을 수 없다는 듯한 눈빛이었다. 그 애들의 냉정한 태도와 거부하는 못짓을 스스로 받아들일 수 없는 듯했더. (22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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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스타샤 - 10점
조지수 지음/베아르피


나스타샤, 조지수(지음), 베아르피, 2008


철부지 같은 생각이겠지만, 나는 매순간 최선을 다한다고 여겼다. 그리고 과거의 어느 순간이 다시 오더라도 지금의 내가 그렇게 했을 가능성이 99% 이상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니 나는 ‘후회한다’ 따위의 표현은 절대로 쓰지 않는다. 철부지 같은 생각이겠지만, 나는 내 깊고 처참한 후회의 심정을 그 표현을 쓰지 않는다는 각오(혹은 행위)로, 후회하지 않음을 증명하고 싶었던 것일 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얼마 전 텅 빈 심야의 카페에 혼자 앉아, 몇 병의 맥주에 취해, 문득 내 삶이 후회스럽다는 것을 자인할 수밖에 없었다. 그것이 취기 탓인지, 끊임없이 반복되는 구애의 실패 탓인지, 아니면 늘 최선을 다해 온 일상이 어떤 성공을 향해 연결되지 못한 채 뚝뚝 끊어진 채 내 발 밑에 쌓여있어서 인지 알지 못했다. 단지 내 삶을 내 스스로 후회하고 있음을 불현듯 깨달은 것이다. 그러자 눈물이 흘러나왔다.

마주 앉은 카페 주인과 이야기 중이었으나, 그도 딱히 나를 위로하진 못했다. 서른 후반의 사내와 마흔 초반의 사내가, 결혼도 하지 않은 채, 심야의 새벽까지 술 잔을 기울이는 풍경화는 아름답지 못했다. 지나간 사랑에 대해 이야기에 이미 식어버린 열정이 안타까웠고 몇 번의 실패로 시도하지 않음으로써 가지는 충만한 여유를 더 좋아하게 되었다. 실은 보호 본능에 가까움에도 불구하고.
 

나의 인생은 실패였고 계속해서 실패해가고 있다. 행복할 줄 모르고 사랑할 줄 모르는 사람은 나였다. 살기보다는 관찰하려 했고, 느끼기보다는 느낌을 이해하려 했을 뿐이다. 사람들에게 진실과 겸허와 소박함을 촉구했지만 먼저 나 자신에게 그것을 촉구했어야 했다. 어디에서부터 문제가 생겼을까? 왜 나는 이런 이상한 사람이 되고 말았을까? 그러고 보면 나에게 진심으로 행복했던 순간이 없었다. 행복과 기쁨조차도 두려워했다. (219쪽)


소설 속 조지처럼 된 것인지도 모른다. 소설책은 두껍고 무거우며 600페이지에 이르지만, 활자는 크고 표현은 간결하며, 스토리는 경쾌한 소리를 내며 흐르는 개울물처럼 독자의 눈을 즐겁게 하며 흘러간다. 종종 작중 화자 조지의 사색이 길어지기도 하지만, 그것과 스토리는 서로 충돌하지 않으며 도리어 스토리의 어떤 방향을 암시까지 하면서 소설을 풍부하고 여유롭게 만든다.


사랑과 동정은 어떻게 다른 것일까? 이 두 개는 서로 교차한다. 사랑은 종종 동정으로 변한다. 연인을 향한 동정은 사랑의 한 변용이다. 살아간다는 고통을 같이 겪은 연인을 향한 동정은. 공감과 측은지심이 같은 인간 조건에 묶인 연인을 향한다. 지친 채로 나이 들어가는 그는 내가 사랑했던 사람이 아니라면 눈조차 마주치지 않으며 지나쳐 갈 사람이다. 젊었던 시절의 나의 사랑이 아니었더라면. 그러나 동정은 사랑의 결과이고 파편이다. 동정이 사랑은 아니다. 사랑에는 그것 이상의 어떤 것이 있다. 질투가 사랑이 아니듯이 동정도 사랑은 아니다. (223쪽)


사랑에 대한, 일종의 연애소설처럼 읽히는 이 소설은 일상의 사람들이 추구하는 어떤 행복이나 가족, 혹은 연인의 사랑에 대해서라기 보다는 어쩔 수 없는 방황과 사랑을 위한 자유를 향해 우울한 표정을 한 채 달아나버린다. 사랑에 대한 표현은 많지만, 감미로운 키스나 열정적인 섹스, 혹은 피부와 피부의 맞닿음, 혀와 혀의 교차에 대한 것이기 보다는 사랑에 대한 사색이거나 나스타샤에 대한 관찰일 뿐이다.
 

나스타샤는 길을 건너기 시작했다. 곱슬거리는 단발머리를 바람에 찰랑거리며. 스커트를 입었다고 해도 어딘가 나이 어린 소년 같은 분위기이다. 봄의 전령으로는 그녀가 헤르메스보다 어울린다. 가볍고 가뜬하게 걷고 있다. 땅 대신 공기를 딛는 것처럼. 커피숍의 대리석 기둥에 무엇인가 반사되더니 그리스의 여신이 창에 나타난다. 흰색의 투피스를 입은, 아름답고 풍부한 갈색머리와 따뜻하고 깊은 눈을 가진 품위 있는 여신이. 가뜬한 발걸음으로 걷고 있는 그리스 여신이.
신은 아름답고 연약한 피조물을 창조했다. 저 귀하고 아름다운 것도 소멸할까? 그럴 것이다. 먼지가 모두의 결론이다. 자연은 무심하다. 안타까움을 느끼는 것은 영혼뿐이다.(306쪽)


우리는 종종 어렴풋하게 차가운 이성이 원하는 바의 어떤 삶의 방향을 깨닫기도 한다. 특히 사랑에 있어서 그런 경우가 많다.

사랑 앞에서 우리는 한없이 무력해지며 비이성적으로 변하고 생각과는 무관하게 뛰는 심장 고동소리라든가, 길거리의 소음 속에서 들리는 어떤 착각이나 환청 같은 것들을 경험하게 된다. 그러한 경험이 누군가와의 사랑을 이어주는 매개물이라고 생각하지만, 우리가 지나쳐 온 현실 속에서는 그 경험은 쓸쓸하고 허무한 내 감정의 방황이거나 그냥 호르몬의 잘못된 분비일 경우가 많다. 쌓여가는 사랑의 경험 속에서 우리는 쓸모없는 엉터리 감정을 믿기 보다는 차갑고 건전한 이성을 신뢰하게 되는 셈이다.  

어쩌면 조지도 이렇게 생각했는지 모른다. 그래서 차가운 이성을 뒤에 숨기고 감정마저도 제어하려는, 아니 도리어 엉터리 감정으로 실패하기 쉬운 사랑을 지키기 위해 보이지 않는 노력이 시작되는 것이다. 하지만 찬란한 사랑의 감정은 모든 것을 마비시킨다.

나스타샤와 나는 둘만의 세계 속에 잠겨있는 듯하다. 모든 것이 정지해있다. 움직임도 시간도. 침묵과 고요함 속에 나스타샤와 나만 세계의 전부가 된다. 사람들 모두가 각자 하나씩의 세계를 가진 채로 우리와는 격리된다. 꿈과 환각 속에 잠겨든다.
“조지, 나는 무엇도 견딜 수 있어. 조지, 나를 사랑해줘. 사랑만 있으면 나는 어떤 것도 두려워하지 않을 거야. 사랑해.”
나는 꿈에 잠겨 있고 나스타샤는 꿈 속에서 말하고 있다. 조금 취한 듯하다. (309쪽)


동구권 공산주의 몰락을  배경으로 펼쳐지는 나스타샤와 조지의 사랑은 광대한 캐나다의 자연 속에서 그 빛을 더해간다. 미술사 교수인 조지는 지적이고 냉정하지만, 사랑 앞에선 무력하고 나스타샤는 언제나 솔직하고 투명하게 자신의 사랑을 이해하고 그것을 어떻게 지키고 가꾸어 가야 하는지 알았다. 둘 사이의 사랑에 어떤 제약이나 갈등이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많은 사람들이 사랑은 소유가 아니라고 하지만, 실은 사랑은 소유다. 그것도 강력하고 파괴적이며 폭력적인 형태의 소유이며, 많은 사람들이 그것을 원한다. 끊임없는 문자질과 전화질이 아니라 눈빛의 마주침만으로도 서로가 서로를 소유하고 있다는 느낌이 가지게 만드는 것이 바로 사랑인 셈이다. 여기에는 그 어떤 예외도 없다. 하지만 눈빛의 마주침만으로 이런 감정을 가지기엔 우리들의 사랑은 너무 길고 길거리 도처에 이쁜 여인의 미소 섞인 시선이나 멋지게 차려입은 사내의 근사한 손길과 같은 위험 요소가 흘러넘친다. 우리들의 사랑이라는 것은 그 시작만 안전했을 뿐, 늘 위험한 상태에 놓여있는 것이다.

그런데 나스타샤는 혼자가 아니었고 이미 결혼한 남편과 아이가 있었다. 현재의 조지 옆에는 언제나 과거의 남편과 아이가 있었다.

맹목적이고 이기적인 사랑과 사려깊고 배려심이 많은 사랑 중 당신은 어느 것을 택할 것인가. 감정적이고 격정적인 사랑과 이성적이고 차가운 사랑 중 어느 것을 택할 것인가. 아니면 실제의 현실의 사랑은 이 두 가지 종류의 사랑을 섞어놓은 것일까.

하지만 조지는 자신의 맹목적이고 이기적인 사랑을 잠시 접어두고 사려 깊고 배려심 많은 사랑을 선택한 듯 보인다. 나스타샤의 과거는 변하지 않고 과거의 어떤 것으로 인해 현재와 미래가 위태롭다는 것을 조지는 알고 있었다. 실은 조지는 자신의 이기적인 사랑과 배려심 많은 사랑 사이에서 보이지 않는 갈등을 했는지도 모를 일이다. 그러나 나스타샤는 아니었다.


나스타샤가 그날 고백한 사랑은 그러나 초연하고 의연한 것이었다. 나스타샤는 이를테면 자연의 딸이었다. 언제나 솔직하고 투명했다. 나스타샤는 자기의 현재 입장과 자기의 사랑을 순간적으로 분리했다. 그 사랑은 사랑 그 자체 외에 다른 것은 아니었다. 나스타샤는 어떤 불안이나 두려움 없이 자기를 내게 의탁한 것이다. 헌신과 신뢰와 자기 포기의 사랑. 그러나 이 사랑에 의해 족쇄가 채워지는 사람은 그녀가 아니다. 본래 운명이 그녀의 지배자였다. 스스로 할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족쇄는 오히려 그러한 사랑을 받는 사람에게 새롭게 채워진다. 그 사랑은 무조건적 사랑이므로. (253쪽)


소설 후반부로 갈수록, 러시아에 있는 남편 보리스와 아동보호시설에 내맡겨진 아니카를 자유의 땅 캐나다로 데리고 오기 위한 조지의 노력이 이어진다. 하지만 조지의 이러한 노력이 어떤 파국 - 새로운 갈등이나 사건의 시작이 아니라 - 을 향해 간다는 사실을 알기까지는 그리 어렵지 않다. 사랑은 논리적이지도 지적이지도 않다. 도리어 시시때때로 변하고 비일상적이며 우연의 소산이다.


나스타샤는 온타리오 호수에 투신했다. 우리가 같이 앉아서 사진 찍었던 벤치에서 몸을 던졌다. 나는, 나스타샤가 보리스의 병이 낫고 아니카가 자랐을 때 자기에겐 모든 것을 할 수 있는 자유가 있다고 말한 것을 기억한다. 나는 그 말의 의미를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 나스타샤는 죽을 자유가 있다는 것을 암시한 것이었다. (608쪽)


조지가 의도했던, 의도하지 않았던 나스타샤는 죽음을 택한다. 어쩌면 나스타샤는 자신의 죽음으로서 자신의 사랑을 이야기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불가해한 사랑 앞에서 소설이 뒷걸음질 치는 부분이다.


사랑은 이성과 논리로 상대를 파악하지 않는다. 사랑은 분석하지 않는다. 그것은 공감과 일치이다. 나스타샤의 마음이 내 마음을 파고들어서 내 마음에 공감의 반향을 일으킨다. 이때 둘 사이의 거리는 존재하지 않게 되고, 마음의 벽은 일거에 허물어진다. 언어는 마음을 드러내기에는 부적절한 도구이다. 언어가 끝나는데서 사랑이 시작된다. 사랑은 보여지는 것이지 말해지는 것이 아니다. (419쪽)


소설은 끝나고 조지와 아니카의 새로운 인연이 시작되지만, 사랑에 대한 것이 아니다. 소설은 아슬아슬한 곡예를 보여주듯 삶과 사랑에 대해 이야기하지만, 불가해한 사랑에 대한 명쾌한 해답을 주지 못한다. 조지 같은 남자가 있었고 나스타샤 같은 여자가 있었을 뿐, 이 둘의 사랑마저도 종국에는 의심스러워진다. 그리고 결국 '내가 바라는 사랑은 저런 사랑이 아니야'라고 되뇌이지만, 실은 우리에게 사랑을 할 용기나 그것을 감내할 정신력이 이미 사라진 지 오래다.

소설을 다 읽고 난 뒤, 우리는 도리어 쓸모없고 엉터리같은 감정에 우리의 육체와 영혼을 싣는 편이 더 나을 수 있음을 느낀다. 그리고 그것이 소설 '나스타샤'와는 또다른 어떤 파국이나 절망적인 실패를 향해 있다고 하더라도 말이다. 하지만 조지의 사랑이 거짓이고 나스타샤의 사랑이 허위라고 말하지 못하는 것처럼, 우리 내부에서는 사랑을 지키기 위한 보이지 않는 분투가 이어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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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목탄 - 10점
나카가미 겐지 지음, 허호 옮김/문학동네


고목탄(枯木灘)
나카가미 겐지(지음), 허호(옮김), 문학동네



그가 어떻게 되었는지 나는 모른다. 이복동생 히데오를 돌로 내리쳐 죽이고 감옥에서 살다가 나온 아키유키가 어떻게 되었는지 나카가미 겐지는 알고 있을까? 하긴 알든 모르든 내 삶과는 아무런 관련도 없다. 이런 류의 소설은 좋지 않다. 누군가의 비밀스럽고 슬프고 고통스런 삶을 엿보는 듯한 기분이 들게 만드는 이런 소설은, 일본의 신화에서 기인한 스토리라는 평자의 의견을 무색하게 만들며, 결국 뒤죽박죽인 가계도에서 벌어지기 마련인 갑작스런 파국을 소설의 말미에 배치함으로써 희망이란 피묻은 현실을 극복해야 하는 것임을 우리에게 강요하듯 말하기 때문이다.

나는 이 소설에 나온 모든 사람들이 싫다. 그들은 엉망인 가계(家系)도 속에서 성실하게 살아간다. 서로의 비밀을 숨겨주며, 내일을 향해 살아간다. 종종 부딪히기도 하지만, 그러는 사이 몇 명이 죽기도 하지만, 내일 해는 떠오를 것이며, 그들은 그 해 아래에서 땀을 흘리며 일을 하고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아 기를 것이기 때문이다.

삶이란 우리가 개척해 가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주어진 것이며, 그것을 받아들이느냐, 그렇지 않느냐의 문제가 되어버린다. 그러나 세상 속의 인생은 심술궂은 파멸의 여신이 되어 종종 우리 앞을 가로막기도 하고 우리의 걸음을 방해하기도 한다. 사람들 사이의 소문이 되기도 하고 진실한 사랑의 훼방꾼이 되기도 한다. 하지만 그 여신은 우리 자신의 삶을 책임지지 않는다.

그래서 우리는 언제나 피해자가 된 채 서 있을 뿐이다. 언제부터 피해자가 되었는지, 언제까지 이렇게 살아가야 하는지 알지도 못한 채, 내일의 해를 기다릴 뿐이다.

나카가미 겐지가 강요하는 것은 그것을 받아들이고 자연의 일부로 그냥 살아가라는 것이다. 이 소설이 잔인하면서도 슬픈 이유는 여기에 있다. 아무도 책임지지 않으면서 결국은 모든 이가 공범인 세상임을 우회적으로 드러내고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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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스트 - 8점
알베르 카뮈 지음, 김화영 옮김/책세상


페스트
알베르 카뮈(지음), 김화영(옮김), 책세상



<<이방인>>이 주었던 그 강렬한 충격을 나는 잊지 못한다. 그리고 카뮈의 <<페스트>>를 읽었다. 벌써 몇 달이 지났다. 주제 사라마구의 <<눈 먼 자들의 도시>>를 읽고 난 후였다. 도시에서 일어난 어떤 질병에 대한 인간의 반응을 다루었다는 점에서 이 두 소설은 흥미롭게 교차되었다. 주제 사라마구의 <<눈 먼 자들의 도시>>가 의사 아내의 눈을 통해 묘사되듯, 카뮈의 <<페스트>>에서는 의사인 리유를 통해 보여지고 있었다.

하지만 <<페스트>>는 <<눈 먼 자들의 도시>>와 비교해, 극적 긴장감이 떨어지고 사변적이라는 인상을 받는다. 질병으로 인해 폐쇄된 도시의 풍경을 묘사하지만, 그 속에는 극적인 사건보다는 질병과 죽음이 일상이 되어가는, 우울한 도시 풍경 뿐이다. 젊은 카뮈에게 '어떤 절망적 위기 앞에서 인간은 어떤 행동을 취해야 하는가'라는 질문에 답하기 위해 꽤 긴 성찰과 반성이 요구되었는지도 모르겠다. 이 점에서 주제 사라마구는 분명하다. '우리는 쉽게 자살하지 못한다'라는 것이다. 어쩌면 <<페스트>> 이후의 주제 사라마구이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일 지도 모른다.

<<페스트>>와 <<눈 먼 자들의 도시>> 사이에 우리 인류는 어떤 일들을 겪었던 것일까. <<페스트>>의 리유에게는 생각할 힘과 행동할 힘을 주어졌으나, <<눈 먼 자들의 도시>>의 의사 아내에게는 생각할 힘도, 행동할 힘도 주어지지 못했다. 그래서 <<페스트>>에서는 희망을 발견하고자 하는 인간 지성의 힘을 읽지만, <<눈 먼 자들의 도시>>에서는 희망이란, 아주 우연스럽고 갑작스럽게 다가올 뿐, 인간 지성은 아무 쓸모도 없는 거추장스러운 것에 지나지 않으며, 결국 우리는 죽지 못해 살아갈 뿐이라는 사실을 극명하게 드러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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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noi 2008.05.05 08:48 신고

    고전을 읽으시는군요.. 고등학생 때 좀 읽다가 이후로는 큰 맘 먹지 않으면 손에 잡기가 참 힘들던데..-_-;;; 언젠가 몇 권 제대로 다시 읽어보고 싶습니다. 30대에 읽는 느낌이 전이랑은 분명 다르리라는 생각이 들어요.

    • 나이가 들어 읽어야 제 맛이 나는 문학들이 있어요. 미술이나 음악도 마찬가지일 거라는 생각이 들어요. 정말이지, 고전은 나이 들어서 읽어야 좋은 것이 아닐까 하는. ; )
      (* 그러고 보면 헤르만 헤세는 정말 대단한다는... 음. 헤르만 헤세를 다시 읽어야 겠어요. 고등학교 때 열심히 읽었는데)

  • 저도 '이른바' 고전문학을 다시 찾아봐야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런데 그러기 위해서는 제 안의 이 게으름부터 극복해야할 것 같아요. 잠도 전보다 많이 자고... ㅡ.ㅡ

    • 참 신기하게도 경험의 양과 예술 작품을 이해하고 향유하는 수준과 비례하는 경우가 많다는 겁니다. 문학도 비슷해서 나이가 들어, 학생 시절 그렇게 지루했던 소설들이 재미있게 읽히는 경우가 종종 생깁니다. ^^. 아마 대부분은 계속 지루할 가능성이 높지만요.. : )

  • 술안마시는Brightness 2008.11.23 12:41 신고

    내 블로그에 놀러와~ 를 이제 본 B입니다 ㅎㅎ

    어제 비가 온 후로 갑자기 완전 겨울이 되었어요

    저도 불어를 배우면 Etranger 를 꼭 읽어야지 하고
    신입생 때 다짐했었는데, 감동 받아서가 아니라
    이해 못한 부분들을 더 잘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아서.

    월요일엔 책을 사러가야겠어요ㅎㅎㅎ

    좋은 블로그, 즐겨찾기 찜
    ciao

    • 방가. (이제서야 오다니. ㅎㅎㅎ)
      으~. 파리의 겨울, 생각만 해도 음침해. ㅡ_ㅡ;; 잘 견디시길(알콜과 남자가 적절한 위안이 될 텐데.. 흠흠. 화이팅, 연애전선!).
      까뮈는 의외로 말이 많은 듯. 이방인 읽을 땐 잘 몰랐는데, 페스트 읽으면서 확실히 '프랑스적'이라는 생각을 했음. 크~.

생은 다른 곳에 - 10점
밀란 쿤데라 지음, 안정효 옮김/까치글방



生은 다른 곳에
밀란 쿤데라(지음), 안정효(옮김), 까치



이 소설은 ‘봄을 사랑하는 남자’ 뿐 아니라 ‘봄의 사랑을 받는 남자’라는 의미도 되는 야로밀(Jaromil)이라는 이름을 가진 시인에 대한 이야기이다. 하지만 이것은 소설의 표면에 드러나는 것일 뿐. 이 소설은 젊음과 그 젊음이 염원하고 갈구하는 혁명에 대한 알레고리이며 모호한 관찰이며, 작가와 허구적 목소리의 뒤섞임이다.


‘생은 다른 곳에’. 프랑스 학생들이 소르본느의 벽에다 이렇게 낙서를 했다. (… …) 그 까닭은 참된 삶이 다른 곳에 존재하기 때문이다. 학생들이 길바닥에 깐 돌들을 뜯어내고, 자동차들을 뒤집어엎고, 바리케이드를 일으켜 세우며, 그들이 세상에 등장하는 방법은 시끄럽고 화려하고, 불꽃의 조명을 받고 최루탄의 폭발에서 영광을 찾는다. 빠리의 바리케이드는 상상만 할 뿐이고 샤를레스빌을 아예 떠날 수 없었던 랭보에게는 삶이 훨씬 더 어려웠다. 그러나 1968년에는 수천 명의 랭보가 그들 자신의 바리케이드를 소유하고 있다. 그 바리케이드 뒤에 서서 그들은 현재 세상을 소유하고 있는 자들과 어떠한 타협도 거부한다. 인간의 해방은 철저해야 하고, 아니면 전혀 해방이 아니다.
- 193쪽


작가의 목소리는 1968년 파리의 불타는 젊음들 뒤에 서서 비아냥거리고 있다. 그리고 그는 결국 자신의 의견을 피력한다.


그렇지만 모든 인간은 다른 삶들도 살아볼 수가 없기 때문에 후회한다. 그대 또한 그대가 실현해보지 못한 모든 잠재성들을, 그대의 모든 가능한 삶을 다 살아보고 싶은 것이다. (안타깝도다. 자비에르의 삶을 실현시킬 수가 없다니!) 우리들의 얘기는 그대와 마찬가지다. 이 얘기도 역시 그것이 이룩할 수 있을 만한 다른 모든 소설이 되기를 갈망한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들은 다른 전망대를 세우려는 꿈을 끊임없이 꾸고 있다. (… …) 우리들은 어리석은 야로밀보다 별로 더 아는 것이 없으며, 야로밀은 어느 누구에 대해서도 정말로 조금 밖에 모른다. (… …) 인간은 그의 삶에서 뛰쳐나올 수야 없지만, 어쩌면 소설은 훨씬 자유로운지도 모른다. 혹시, 우리들이 남몰래 서둘러서 전망대를 허물고는 적어도 당분간이나마 그것을 다른 곳에다 옮겨 세웠다고 상상해보라. 어쩌면 우리들은 그것을 아주 아주 멀리, 야로밀이 죽은 한참 후로 가져갈 수도 있으리라! 어쩌면 (그의 어머니까지도 몇 년 전에 죽었기 때문에) 아직도 야로밀을 기억하는 사람이 거의 없는 이곳으로, 현재로 그것을 옮겨올 수 도 있으리라.
- 296쪽 ~ 297쪽
(‘자비에르’는 소설 주인공인 야로밀이 쓰고 있던 이야기의 주인공 이름이다.)



‘생은 다른 곳에’는 애초부터 불가능한 꿈이다. 1968년 파리에 대해 많은 지식인들이 이야기하지만(‘파리 혁명’이라고까지 하면서), 밀란 쿤데라의 눈에 비친 68년 파리는 마치 공산혁명이 진행되던 1940년대 후반의 체코 프라하와 비슷해 보였을 것이다. 그는 야로밀이라는 어리석지만 순수하고 어머니의 치맛바람 속에서 자라났지만, 어머니의 영향 속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순백의 사랑과 그 사랑이 불러일으키는 욕정에 대해서 종종 무방비 상태가 되는 시인을 통해 혁명 시대가 어떻게 오고 어떻게 가는지를 이야기한다. 이 소설의 원제가 ‘서정시대’였지만, 실은 ‘서정시와는 아무런 관련없는 혁명 시대’가 그 속뜻은 아니었을까(밀란 쿤데라 또한 18세의 나이로 공산당에 가입하고 젊은 시절 시인으로 활동했다).

위대한 문학이 현실에서 할 수 있는 일이란 아무 것도 없다는 자괴감이 이 소설 밑바닥에 깔려있는 작가의 자의식이라면, 소설은 끊임없이 어리석은 젊음에 대해서 꾸짖고 비아냥거리며 인생을 제대로 살아갈 용기가 없기 때문에 무모해지는 꿈과 그 꿈에 의해 발동되는 행동들에 대해 조소한다. 그래서 소설을 다 읽고 나면, 한 때 운동권의 잘 나가는 투사가 정치 권력의 중심을 향해 돌진해 가는 국회의원이 되거나 자본주의 사회에서 꿋꿋하게 수익 창출에 골몰하는 비즈니스맨이 된 모습을 씁쓰레하게 떠올리게 되거나 세상에, 세상 사람들에 대해, 그리고 인생에 대해 아는 것이라곤 아무 것도 알지 못했던 상태에서 혁명을 노래했던 우리들의 젊은 시절을 회상하게 된다.

이 소설은 매우 실험적이고 위트와 유머가 넘치지만, 이마저도 밀란 쿤데라의 자괴감이 만들어내는 소설의 기형화(畸形化)가 아닐까 하는 생각에까지 미쳐 슬펐다. 소설책을 덮고 나는 바진(巴金, 1904~2005)의 글을 떠올렸다. 20세기 중국의 모든 것을 경험한 그가 떠올리는 문화대혁명의 모습이 기억났다.
 

“내가 어찌 기억하지 못하겠습니까?” 나는 말했다. “그날 저녁 몇몇 중학생들이 담을 넘어 들어왔지요. 앞장선 한 사람은 열네댓 살에 불과한, 베이징에서 온 간부 자제였는데, 그는 동두(銅頭)채찍으로 샤오산(바진의 아내)의 눈을 때려 다치게 했습니다. 그들은 몇 시간 소동을 피웠고, 마지막엔 나와 샤오산, 두 여동생, 그리고 스물한 살 난 딸을 전부 화장실에 가두었어요. 그들은 마음대로 물건들을 가져가더군요. 화장실의 문을 잠그지는 않았지만 그들이 떠난 후 30여 분이 지나서도 우리는 감히 문을 열고 나오지 못했습니다. 이튿날 새벽 샤오산은 기관에 보고하였지만 별 소용이 없었습니다. 학생들은 여느 때처럼 우리 집에 들어서자마자 함부로 뒤엎고 제멋대로 물건을 가져갔습니다. 다만 옷장과 책꽂이에는 기관에서 봉한 딱지가 붙어 있어서 그것을 건드리는 사람은 없더군요. 대략 일년여 시간이 지나자 기관이 우리 전 가족을 아래층으로 옮기게 했고 윗층의 방을 모두 폐쇄시켜버렸습니다. 계속해서 대학생들이 들어와 다시 우리 집을 차지했습니다. 그들이 처음 들어왔을 때, 우리 ‘소’들은 모두 불려나와 심문을 받고 대청에 무릎을 꿇었으며, 어떤 사람은 맞아서 이가 빠졌습니다. 이 곳에는 당시 작가협회 분회(分會)가 있었는데, 바로 그곳에서 작가들이 ‘소’로 취급되어 온갖 수난을 당했으니 정말 엄청난 풍자 아닙니까! 이것은 대략 1968년 1월 하순의 일인데, 그날 신문이 끝나자 조반파 우두머리가 우리를 풀밭에 불러놓고 훈화를 하더군요. 우리는 모욕을 당한 후 다시 욕설을 들었지만 감히 한 마디 대꾸도 하지 못했습니다.
- 바진, <<매의 노래>>(황소자리), 119쪽 ~ 120쪽
(설명: 문화대혁명 당시 사상이 불순하다고 평가된 사람들을 ‘소’로 취급하였고 외양간 생활을 오랫동안 하기도 했다. 바진 역시 그 외양간에서 살기도 했다. 그리고 문화대혁명 때 동원된 중고등학생, 대학생을 ‘홍위병’이라 하며, 직장에서 문화대혁명을 지지하여 들고 일어났던 직원이나 노동자를 ‘조반파’라 한다. 흥미로운 것은 이 ‘홍위병’들이 이제 사오십대가 되어 중국을 움직이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중국에서는 아직 ‘문화대혁명’에서 함부로 이야기할 수 없는 주제이기도 하다. 살아있을 때 바진은 문혁 박물관을 건립하여 문화대혁명으로 인해 희생된 많은 이들을 위로하고 기념하고 싶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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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화술사들 - 10점
김철 지음/문학과지성사




복화술사들 - 소설로 읽는 식민지 조선
김철(지음), 문학과지성사



‘애국가’의 작사자로 알려진 좌옹 윤치호(佐翁 尹致昊, 1865~1945)는 그의 나이 18세가 되던 1883년부터 1943년까지 무려 60년 동안 거의 하루도 빠짐없이 일기를 썼다.’(132쪽) 그의 일기는 순한문 문장으로 시작되었다. 그러다가 사 년 후 순한글, ‘국문’으로 일기를 쓴다. 하지만 ‘순한글 문체로 사 년 남짓 일기를 쓴 후에, “Corean”은 어휘가 풍부하지 않아서 말하고 싶은 것을 충분히 표현하기 어렵다는 결론에 도달하는 윤치호’(135쪽)는 영어로 일기를 쓴다. 그가 ‘처한 언어적 환경은, 근대 국민 국가의 수립 과정에서 이른바 ‘국어national language’, 혹은 ‘공용어 official language’가 어떻게 결정되고 만들어지는가에 대한 의미심장한 생각거리를 제공한다.’(135쪽)


언어는 의식의 방향을 결정한다. 현대의 정신분석학에서 ‘언어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것은 여기에 있다. 우리의 무의식은 ‘언어처럼 구조화되어 있다라고 라캉은 강조하지만, 실은 무의식 뿐만 아닐 것이다. 김동인은 이렇게 회상한다.


소설을 쓰는 데 가장 먼저 봉착하여 - 따라서 가장 먼저 고심하는 것이 ‘용어’였다. 구상은 일본말로 하니 문제 안 되지만, 쓰기는 조선글로 쓰자니, (… …) 거기에 맞는 조선말을 얻기 위하여서 많은 시간을 소비하고 있었다.
- 김동인, ‘문단 30년의 자취’, <김동인 전집8>, 홍자출판사, 1968, pp. 395~96 (18쪽에서 재인용)


이 책은 식민지 시대의 소설을 통해 한국어가 어떻게 형태를 잡아나가게 되었는지, 그 당시 사람들은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었는지, 일본어와 한국어, 영어와 한국어, 일본인과 조선인 사이의 관계에 대해서 흥미로운 이야기를 들려준다. 위 문단에서처럼, 한국어는 19세기말까지 풍부한 단어나 쓰임새를 가지고 있지 못했다. 이 때 이광수의 <무정>은 한국어의 관점에서 보자면, 가히 혁명적인 소설이 된다.

그러나 국어의 시작은 순결하지 않았다. 생각은 일본어로 하고 있었으니, 한국어의 단어 하나하나는 일본어 단어와 연결되고 있었다. 이후 식민지 시대 소설가들의 역할이 얼마나 대단한 것이었는가를 굳이 설명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이 책의 시각은 분명하다. 국어란 순결한 언어가 아니고 이종교배를 통해 어렵게, 어렵게 탄생한 것이라는 것. 격동의 세월 속에서 국문학은 일본어, 영어와 서로 몸을 섞어가며 현재에 이르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다양한 관점에서 새롭게 국문학을 연구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한다.

이광수가 나쓰메 소세키의 독자였다는 사실을 이 책을 통해 처음 알게 되었다. 그런데 나쓰메 소세키의 소설은 매우 모던한데, 이광수의 소설은 그렇지 않은 것일까?

식민지 시대의 작가들과 지식인들에 대한 연구가 활발해지기를 기대해 본다. 우리들의 진짜 과거는 조선 시대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이 식민지 시대에 있는 것은 아닐까. 본격적으로 우리의 사고가 근대화되고 서구의 문물에 젖기 시작한 시기가 바로 이 때이니까. 또한 한문, 일본어, 한국어 사이의 관계(언어학적, 정신분석학적, 철학적인)에 대한 연구서를 읽어보았으면 좋겠다.

이 책, 짧지만, 재미있고 매우 시사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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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책 제목부터 흥미로운 책이네요. 책 소개 감사합니다 ^^

    • 김철 교수의 책 한 권을 더 주문해서 읽어볼까 하고 있어요.
      문지스펙트럼 시리즈를 좋아하는데, 종종 (예상치 못한) 뛰어난 책들이 소개되고 있어요. 가령, 송상일의 <<국가와 황홀>>은 매우 독특하고 감동적인 문학이론서죠. 잘 알려져 있지 않지만.

  • noi 2008.04.08 14:56 신고

    이책 며칠 전에 읽었습니다. 짤막하고도 재미있어서 단숨에 읽히더군요. 저자의 글솜씨도 괜찮고.. 일본에 살아서 그런지 읽는 느낌이 특별했습니다. 추천해주셔서 고마와요^^

  • 지하련님, 안녕하세요. 반디앤루니스 컨텐츠팀 현선입니다.

    다름이 아니라, 이번에 지하련님의 리뷰가 4월 1주 <반디 & View 어워드> 에 선정되었음을 알려드리며, 어워드 관련 적립금은 이전에 보내주셨던 지하련님의 반디 아이디로 일주일 이내에 지급해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축하드립니다!

    그리고 매주 <반디 & View 어워드> 선정작은 반디앤루니스 책과 사람 페이지(http://www.bandinlunis.com/front/bookPeople/awardReview.do) 와 다음 파트너 view 베스트 페이지(http://v.daum.net/news/award/weekly) 에서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그럼, 좋은 책과 함께 하는 즐거운 주말 되시길 바랍니다~

    -반디앤루니스 컨텐츠팀 현선 드림

캐비닛 - 6점
김언수 지음/문학동네


<<캐비닛>>, 김언수(지음), 문학동네, 2006


쉽게, 아주 짧은 시간에, 힘을 거의 들이지 않고 다 읽을 수 있었다. 전반적으로 잘 읽히고 종종 흥미 있는 이야기가 호기심을 자극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 뿐이었다. 신기하고 낯선 스토리였지만, 누구나 생각할 수 있는 수준의 스토리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다. 단지 이러한 스토리로 소설을 쓸 생각을 하느냐, 하지 않느냐의 차이일 뿐이다. 확실히 나라면, 이런 소설을 쓰지도, 쓸 생각을 하지 않을 것이다.

책 뒤에 실린 심사평의 일부는 동의할 수 있었고 일부는 동의할 수 없었다. 하지만 몇몇 이들의 높은 평가과 찬사는 이해하기 어려웠다. 솔직히 나로서는 받아들이기 어려운 평가들이 많았고, (심각하게)스스로 내가 이상한 독자나 평자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다.


소설은 특별하거나 흥미진진한 인과구조를 가지고 있지 않다. 그저 병렬적으로 낯설고 신기한 이야기를 보여줄 뿐이다. 하지만 이 이야기라는 것이, 카프카의 여러 소설에서처럼 현대 세계의 불길하고 암울한 슬픈 모습의 반영이나 은유라기 보다는 그저 신기한 이야기 수준에서 멈추어 있었다. 한 번 진지하게 따져보자. 일요일 오전 MBC에서 방영하는 '신비한 TV 서프라이즈'라는 프로그램과 무엇이 다른 것일까? 신기함의 수준에서? 정보 전달 방식의 차이에서?

나의 평가를 너무 야박하게 여길 지 모르겠다. 하지만 소설을 다 읽은 다음, <<캐비닛>>은 속이 텅 빈 채로, 낯선 별나라에서 수입된 과자 포장지 같다는 생각을 했다. 지구에 사는 그 누구도 가보지 못한 별나라에서 수입되었다는 이유로 주목은 받았지만, 포장지를 벗겨내면 속에는 아무 것도 없는.

소설을 다 읽은 독자는 무슨 생각을 할까? 분명 재미있는 소설을 읽었다라고 생각을 할 것이다. 나도 이것을 부정할 생각은 없다. 하지만 소설은 거기에서 멈추고 만다. 안타깝게도 이 소설은 독자의 마음에는 아무런 감정적 여운도, 감정적 흔들림도 남기지 않는다. 진지한 세계나 질문은 거세되어 있으며, 현실 세계에 대한 해석을 하지 않는다.  

결국 나는 너무 보수적이고 심각한 독자이다. 나는 현대 소설이야 말로, 위대한 서사시의 전통을 이어받고 있으며, 이 세계에 대해서 진지하고 가치있는 발언을 계속 해야 된다고 믿는 골치 아픈 독자에 지나지 않는다. 이 소설을 읽고 찬사를 거듭한 평자들의 눈에 나같은 독자는 당장 과거의, 시대착오적인 테마들로 가득 찬 도서관 서가 구석으로 사라져야 할 대상으로 치부될 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나는 이 사실이 너무 안타깝고 슬프다. 왜, 어떤 이유로, 소설의 진정한 가치를 이야기하고 소설이 가진 힘에 대해서 논하는 소설가나 평론가들이 사라져 가는 것일까? 무엇이 포스트모던 사상가로 분류되는 가라타니 고진으로 하여금, 이미 오래 전에 죽은 사르트르의 낡은 <<문학이란 무엇인가>>를 꺼내들게 만드는 것일까?

소설을 읽는다는 것, 그 독서 행위는 이제 멀티플렉스 극장에서 헐리우드의 액션 영화나 한국의 조폭 코메디 영화를 보는 것과 동일한 선상에서 이해되고 받아들여지며, 이를 거부하지도 않는다. 그리고 한국의 젊은 소설가들은 이런 영화들과 경쟁하기 위해서, 영화(또는 TV 드라마)와의 거친 싸움에서 승리하기 위해 소설을 쓴다. 그리고 그 옆에서 평론가들은 입에 침도 바르지 않은 채, ‘문학의 죽음’을 이야기하느라 정신 없다.

꼭 'PC방 Vs. 비디오대여점'을 보는 것 같다. PC방의 성공으로, 비디오 대여점이 사라지듯이, 영화나 TV 드라마로 인해 소설을 읽는 독자들이 사라진다는 위기감을 가지고 있는 듯 싶다. 그래서 소설은 영화나 TV 드라마보다 나아야 된다는 생각을 하는 것이다. 소설과 관계된 모든 사람들이 나서서 소설의 가치와 위상을 절하시키고 있는 것이다. 소설은 영화, 또는 TV 드라마와는 전적으로 다른 장르이며, 매체다. 소설가라면, 절대로 영화화, TV 드라마화, 심지어는 희곡으로도 만들 수 없는 소설을 쓰기 위해서 노력해야 하지 않을까. 그래서 소설의 진정한 모습을 찾기 위해서 끊임없이 도전해야 되지 않을까.

결국 나는 너무 보수적이거나 심각한 독자이거나, 또는 시대착오적인 생각으로 똘똘 뭉친 무명의 평자일 것이다. 나는 시대를 잘못 타고 태어난 불행한 개인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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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ink-lotus 2008.02.12 13:52 신고

    책에 대한 소개보다는 요즘 글에 관한 글에 깊이 공감하고 갑니다.
    맛있는 글읽기가 사라지는 건 정말 불만이예요.
    영화나 드라마가 보고 싶다고 시나리오를 읽지는 않는데 말입니다.

  • 소설을 쓰는 것을 수입의 원천으로 삶고자 하는 모든 소설가들에게 불행한 시대가 아닌가 합니다. '진지함' 자체가 사라져가는 사회니까요. 소설만으로 표현될 수 있는 소설을 써야한다는 말씀에 깊이 동감하고 갑니다.

  • 미 섭 2008.08.04 17:34 신고

    (어쩌다 다시 이 공간에 들어왓군요..
    파아란 영혼이란 문구가 어쩐지 낯익다 하면서도 무의식적으로 [기대 되어]
    그만 실수를 ...)

    '여러 의미에서 나보다 아래에 속한' 사람이니 선의의 호의를 드립니다
    인터넷 공간의 글쓰기는
    골방에서( 자기자신만의 물리적 공간성) 자판치는 것의 부작용은
    사실 크게 해롭지 않습니다
    진정한 의미에서 경계해야 하는 것은
    얼굴 마주보지 않는 물리적 공간으로의 골방의 익명성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읽고

    쓰는

    주체적 본질체의 열린 마음입니다

    인간은 자기 자신을 넘어서는 세계를 다 이해할 수 없습니다
    다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상대방 혹은 내가 아직 모르는 다른 진실의 다양한 가능성에 대한
    스스로 존중의 마음을 품고 있느냐의 여부 입니다

    파아란 영혼...
    열린/ 드러난/ 실체성으로의 우주적 색체에 대한 개인적 뉘앙스이기에.

    물론
    우주는 드러난 실체성 이외의
    그 드러난 실체성이 유지(드러날 수 있도록)될 수 있도록, 가능하도록 하는
    드러나지 않은 존재성을 갖고 잇을 것이고
    결국 우리 관용의 범주라는 것조차도
    미비하고 지엽적이고 편협한 것에 불과하지만 말입니다 ...

프랑스적인 삶 - 10점
장폴 뒤부아 지음, 함유선 옮김/밝은세상



프랑스적인 삶 Une Vie Francaise
장 폴 뒤부아(Jean-Paul Dubois) 지음, 함유선 옮김, 밝은 세상


1.
한 치 앞 미래를 보이지 못한다. 그저 예측할 뿐이다. 과거시제 형 소설이 가지는 매력은 여기에 있다. 과거를 돌아보면서 미래에 대한 두려움을 보여준다. 그러한 소설은 미래에 대한 숨겨진 공포를, 아찔함을, 내일을 향해 발을 내밀기가 무섭다고 독자를 향해 중얼거리는 양식이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내일의 삶을, 고통스럽고 미련한 희망을 이야기하는 양식이다.

90년대 이후, 한국의 과거 시제 형 문학(후일담 소설/시)은 과거의 파란만장한 열정과 시행 착오에 대해서 끊임없이 합리화하려는 방식으로 이야기를 전개하면서, 그것에 묶여 옴짝달싹 못하는 현재를 보여주는 것으로 끝을 낸다. 그래서 이런 류의 문학을 접한 독자들 대부분 그들의 과거도 받아들이지 못하고 현재도 받아들이지 못한다. 몇몇 독자들은 자신의 모습과 닮아있다고 느끼면서 감정적 공감을 형성할 지도 모르겠지만, 결국 미래에 대해선 아무 것도 가지지 못한다. 결국 씁쓰레한 현실만 남게 된다. 독자는 그저, 작가의 철없는(그것이 진실이든 아니든 상관없이) 과거를 들었을 뿐이다.

문학이 그 자신의 존재 의미를 밝히는 방식은 아주 단순하다. 이 세상, 우리들의 삶을 형성하는 변하지 않는 본질을 드러내든가, 아니면 우리들이 살아가야 할 미래 가치를 드러내어 주면 된다. 과거에 어떠했다는 따위는 아무런 상관없다. 그 속에서 어떻게 우리 삶의 본질을, 우리 삶의 미래를 보여줄 것인가에 천착해야 된다. 하지만 내가 읽은 한국의 후일담 문학 모두 과거에 묶여 있었고 미래에 대한 한 마디로 하지 못했다. 오직 미래에 대한 두려움, 과거와 같은 실수의 반복으로의 미래가 전개되지 않을까 하는 공포, 과거에 대한 회한 만을 드러내었다.

2.
장 폴 뒤부아의 이 소설도 과거 시제 형 소설이다. 어린 시절, 형의 죽음으로부터 시작해 아내의 죽음과 정신병에 걸린 딸의 이야기로 끝나는 이 소설도 미래에 대해서 한 마디도 하지 않는다. 도리어 ‘허무의 끝’(393쪽)이라는 단어를 사용하기까지 한다.

하지만 한국의 후일담 소설과 본질적으로 다른 것은 한 번도 자신에 대한 합리화를 시도하지 않는다. 자기 자신에게 매몰되지도 않는다. 그저 바라만 볼 뿐이다. 심지어 어떻게 자기 자신의 삶에 대해서조차 이렇게 이야기할 수 있을까 할 지경이다. 그리고 미래 속으로 아무런 거리낌 없이 발을 내딛는다. 미래에 대해서조차도 시니컬한 것일까. 그러나 이는 포기도 아니고 무모한 도전도 아니다.

‘시니컬함’(냉소주의)에도 급수가 있다. <<해변의 카프카>>가 결국은 환상 속 이야기로 빨려 들어가는 것은 현실 세계에 대한 공포와 두려움 때문이었다. 시니컬하게 세상을 살아간다고 해서 그 세상을 변하지는 않는다는 사실을 나이 든 하루키는 깨닫게 되지만, 소설을 변화시킬 힘도, 세상을 변화시킬 마음도 없이 그저 환상 속으로 숨겨버리는 방식을 택한다. 이 점에서 폴 오스터는 더 시니컬하다. 적어도 환상 따위는 만들지 않으니까. 하지만 그는 거대한 현실을 긍정하고 타협하는 방식을 택한다. 그 속에서 최소한 자기 자리만 만들고 싶어할 뿐이다. 타인에게 피해를 끼치지 않고 자신을 훼손하지도 않고, 원래 시작했던 그 자리로 돌아온다.

장 폴 뒤부아는 어떤가. 이 소설의 등장 인물은 자신이 살아가고 살아갈 현실 속에서 한 번도 발을 빼거나 뒷걸음질 치지 않는다. 때로는 무책임할 정도로 자기 자신을 추구하지만, 그렇다고 가족에 대한 사랑이나 애정이 사라진 것도 아니다. 하지만 이 소설의 폴 블릭은 끊임없이 시니컬하다. 현대 프랑스 정치와 일상 세계에 대한 환멸 때문일까. 아니면 소설가의 작법 때문일까. 과거 시제 형 소설이 가지기 쉬운 자질구레한 감정적 표현들을 최대한 억제함으로써 과거를 온전하게 과거로 받아들이기 하기 위한 장치일까.

시니컬하다고 해서, 폴 블릭은 도망치지도 하고, 현실과 타협하지도 않는다. 그는 그 자신을 외부 세계와 단절시키지도 않고 현실적인 삶을 포기하지도 않는다. 이 소설이 독자를 안타깝게 하는 지점은 바로 여기다. 우리는 결국 현실적 삶 속에서 적극적인 관계를 맺지 못하고 끊임없이 소극적 관계를 맺을 수 밖에 없다는 것. 우리는 한 번도 자신의 인생에 있어서 주인공이 되지 못한다는 점을 폴 블릭을 통해 우리에게 환기시킨다.


3.
 

인생은 우리를 다른 사람과 묶어놓고서 우리가 중요하다고 생각한 존재의 시간에, 우리가 아무 것도 아니라기보다는 차라리 단지 그 무엇이라는 것을 믿게 하는 보일 듯 말 듯한 가는 줄에 지나지 않으니까. (393쪽)


그래서 폴 블릭은 이런 고백을 할 수 있다.
 

나는 그날 저녁 파티가 어떠했는지, 거기 있던 사람이나 거기서 연주했던 음악이 무엇이었는지 대해 아무런 기억도 없다. 내 기억 속에 남아 있는 유일한 것은 붉은 립스틱이 지워진 완벽한 계란형인 안나의 얼굴이다. 즉 찬찬히 들여다보면 세상의 운명을 끊임없이 무시할 것 같은 어두운 그림자를 가진 유성遊星, 사슴 같은 눈을 가진 얼굴이다. 목은 또한 그녀의 몸의 모든 관절이 다 그렇듯이 가늘고 섬세해서, 전체적으로 마치 중력의 제 1 법칙과 일반 규칙을 벗어난 듯한 느낌이었다. (139쪽)



그의 아내 안나는 다른 남자와 몇 년 동안 숨겨진 연애를 하다가 헬리콥터 사고로 죽는다. 그 사고의 여파로, 딸 마리는 정신병에 걸린다. 폴 블릭은 책 인세로 모아두었던 모든 돈을 아내가 남기고 간 빚을 갚는데 다 써버리고, 어머니가 죽고 아들은 일본으로 가고, 딸은 정신병원으로 들어간다. 한 번도 주인공이었던 적이 없었던 폴 블릭은 소설이 끝날 때조차도 자신이 주인공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아내를 미워하지도 않고 정신병에 걸린 딸을 보며 울부짖거나 고통스러워하는 모습을 보이지 않는다. 어쩌면 그는 삶에 대한 열정이나 애정을 애초부터 거세한 인물은 아닐까.

4.
하지만 이 소설은 우리에게 한 없는 슬픔을 안겨준다. 장 폴 뒤부아의 문장은 서정적이고 위트가 넘치며, 시공간의 운동과는 무관한 인상을 풍긴다. 결국은 아무도 책임 지지 않는 세계, 모든 사람들이 책임을 져야 하는 세계를 보여준다.

살아간다는 것에는 아무런 정답이 없듯이, 소설은 과거에 대해서 변명하지도, 후회하지도 않는다. 한 번의 결정으로 모든 것은 이미 결론 난 상태였다. 그것이 행복한 결말이든, 절망적인 파국이든, 폴 블릭의 삶이 산산조각 났다고 해서 그가 죽음을 끊고 자살을 택하거나 딸 마리를 버리거나 하는 짓 따위를 하지 않을 것임을 독자는 안다. 과거의 신념을 버리지도 않고, 현실을 긍정하지도 않는다. 그저 묵묵히 살아갈 뿐이다. 그래서 이 소설은 슬프다.

우리 대부분도 이러한 삶의 방식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끝까지 시니컬함을 버리지 않는 이 소설은 삶에 대한 거창한 교훈을, 미래에 대한 격정적인 희망을 이야기하지 않고 끝난다. 그렇다고 해서 미래를 버리지 않는다. 과거와 똑같이 그렇게 살아갈 것임을 우리는 알고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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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르시아 마르케스 - 8점
송병선 엮어 옮김/문학과지성사


<라틴아메리카의 고독>,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

( <가르시아 마르케스>, 문학과 지성사, p.187)

(이 글은 수 년 전에 작성한 글이다. 외출하기 전에 다시 다듬어 올린다.)

최근 영국의 저명한 역사학자인 에릭 홉스봄은 어느 인터뷰에서

“민주주의와 시장 사이의 모순이 현대의 가장 근본적인 문제이며 시장은 인간을 사적인 고객으로 취급하지만 민주주의는 공동체의 문제에 책임을 질 줄 아는 공적 시민을 필요로 하기 때문에 시장의 전면적 지배는 곧 민주주의의 붕괴를 초래할 것”

이라고 지적했다.

또한 헌팅턴의 “문명충돌론”이 새로운 시대의 세계의 정치적 상황을 예리하게 지적해낸 이론으로 새삼스럽게 주목받고 있다.

특히 이슬람문화권과 기독교문화권의 갈등은 이미 여러 전쟁을 통해 확인되었고, 지금도 확인되고 있다. 냉전체제가 끝났기 때문에, 그리고 후쿠야마식으로 자본주의가 승리했기 때문에, 그래서 우리는 더욱더 역사의 암울한 미궁 속으로 빨려들어가고 있는 것이다.

핵의 위협은 심해졌고(강대국에서가 아니라 제 3세계에서) 빈부의 격차는 더욱더 벌어지고 있다. 최근 뉴라운드협상에서 보여준 세계시민단체의 시위는 2000년대의 자본주의가 어떤 상황에 와있는가를 여실히 보여주는 예일 것이다.

그렇다면 이럴 때 한가하게 앉아 소설 나부랭이, 혹은 시 나부랭이를 읽는 것은 정말이지 한심한 짓처럼 보일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한심한 짓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기 위해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가 1982년 노벨문학상을 받으면서 행한 수상연설문을 읽는 것도 나쁘지 않을 듯 보인다.
(물리적 실체를 가지지 못하는 독서 행위는 장기적이고 거대한 변화를 이끌어내기에 매우 충분한 행위일 수 있다. 그런데 이 사실을 한국의 현대 작가들은 잘 모르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우려를 나는 요즘 가지고 되었다.)

그는 지구 반대편에 있는 우리에게, 혹은 유럽인들에게 낯설고 신기롭고 상상력으로 가득차, ‘마술적 리얼리즘’으로 불리는 소설들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그는 그것이 어떤 배경을 뒤에 두고 있는가를 말하며 그리고 우리들의 편견에서 눈을 뜨라고 강조하고 있다. 그리고 문학이 어디에서 나오며 그것이 어떤 일을 하고 있는가를 말한다(아래는 좀 길게 인용하였다. 아홉 페이지의 짧은 글이므로 한 번쯤 읽어두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이다).
 


“멕시코에서 세 번에 걸쳐 독재를 자행했던 안토니오 로페스 데 산타나 장군은 ‘파스텔 전쟁’이라고 불리는 전투에서 잃어버렸던 자기의 오른쪽 다리를 화려하고 멋진 장례를 치르며 매장했습니다. 가브리엘 가르시아 모레노 장군은 16년간 절대 군주로서 에콰도르를 통치했으며 그의 시체는 대통령 의자에 앉혀진 채 정복과 훈장을 달고서 치러졌습니다. 30,000명의 농민을 잔인하게 학살했던 엘살바도르의 견신론자이자 폭군인 막시밀리아노 에르난데스 마르티네스 장군은 자기 음식에 독이 들었는지 확인해보기 위해 특수한 추를 고안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모든 관공서의 전등에 빨간 종이를 붙여서 성홍열 전염병과 싸우도록 했습니다. 테구시갈파의 중앙 광장에 우뚝 서 있는 프란시스코 모라산 장군의 기념비는 사실은 파리의 중고 조각품 창고에서 구입한 네이 제독의 동상입니다.

(중략)

다시 말하면, 라틴 아메리카 대륙은 정신나간 남자들과 역사적인 여자들이 즐비한 거대한 왕국이며, 그들의 한없는 완고함은 전설과 혼동된다고 다룬 것입니다. 우리는 한 순간도 마음 편히 있은 적이 없습니다. 불길에 휩싸인 대통령궁에 피신했던 프로메테우스 같은 어느 대통령은 혼자서 군대 전체와 싸우며 숨을 거두었고 수상하기 짝이 없지만 아직까지 그 원인이 분명하게 밝혀지지 않은 두 번의 비행기 사고는 인자하기 그지없었던 또 다른 지도자의 목숨과 민중의 명예를 복구했던 민주적인 군인의 목숨을 빼앗았습니다. 5번의 전쟁과 17번의 쿠데타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하느님의 이름을 빈 악마 같은 독재자도 출현했으며, 그는 우리가 사는 시대에서 라틴아메리카 민족을 말살하려고 했던 첫 독재자였습니다. 그러는 동안 2천만명의 라틴아메리카 어린이들은 채 두 살이 되기도 전에 죽었고, 이 숫자는 1970년 이후 유럽에서 태어난 모든 아이들의 수를 상회하는 엄청난 숫자입니다. 정치 탄압으로 실종된 사람들은 거의 12만 명에 이르고 있으며, 이것은 마치 스웨덴의 웁살라 시의 모든 주민이 어디에 있는지 모른 채 실종된 것과 같습니다. 임신한 채 체포된 수많은 여인들이 아르헨티나의 감옥에서 아기를 낳았고 아직도 자기 아이들이 비밀리에 입양되었는지 아니면 군사 정권에 의해 고아원에 수용되었는지조차도 모릅니다. 모든 것이 이런 식으로 되지 않게 하려는 소망으로 거의 20만 명에 가까운 남녀가 라틴 아메리카 대륙에서 죽었습니다. 그리고 10만 명 이상이 중미의 니카라과, 엘살바도르, 과테말라의 조그만 세 나라에서 숨을 거두었습니다. 만일 이런 일이 미국에서 일어났다고 가정해본다면, 임시로 추정해본 숫자는 4년 간 백만여 명이 폭력에 의해 희생된 것입니다.

마음씨가 극진하고 돈독한 전통의 나라였던 칠레에서는 인구의 10퍼센트에 해당하는 백만 명이 조국을 떠나야 했습니다. 인구는 2백 50만의 작은 나라이지만 라틴아메리카에서 가장 문명국으로 여겨졌던 우루과이는 인구 5명당 한 명 꼴로 망명을 떠나야만 했습니다. 엘살바도르의 내전은 1979년 이후 거의 20분에 한 명 꼴로 피난을 가게 만들었습니다. 따라서 라틴아메리카에서 강제로 이주했거나 혹은 망명한 사람들을 수용할 수 있는 나라는 노르웨이보다도 더 많은 인구를 가질 것입니다.

(중략)

우리 현실을 타인의 방식으로 해석하는 행위는 갈수록 우리를 이해하지 못하고, 갈수록 우리를 덜 자유스럽게 하며, 갈수록 고독하게 만드는 데 이바지할 뿐입니다. 아마도 존경받는 유럽이 자신의 과거에 비추어 우리를 본다면 지각 있는 행동을 하게 될 것입니다. 런던이 첫 성벽을 건설하는 데 300년이라는 세월이 걸렸으며 주교를 갖는 데 또 다른 300년이 걸렸고, 로마는 에트루리아 왕이 인류의 역사 속에 이식할 때까지 20세기 동안이나 불확실한 어둠 속에서 몸부림쳤습니다. 심지어 부드러운 치즈와 무감각한 시계로 우리를 즐겁게 하는 오늘날의 평화의 민족인 스위스인들도 16세기까지만 해도 돈을 위해서라면 목숨까지도 버리지 않는 용병들로 유럽을 피로 물들였습니다. 심지어는 르네상스가 절정에 달했을 때에도 제국 군대의 돈을 받고 고용된 12,000명의 독일 용병들이 로마를 약탈하고 유린했으며, 8천명의 로마 주민들을 칼로 쓰러뜨렸습니다.

(중략)

인류의 전역사를 통해 단순히 유토피아처럼 보였던 이런 가공할 만한 현실 앞에서, 모든 것을 믿는 우화의 창조자들인 우리는 아직도 그것과 반대인 유토피아를 창조하는 작업을 실행하기에 늦지 않았다고 믿을 권리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삶의 새롭고 활짝 개인 유토피아이며, 그곳은 아무도 타인을 위해 심지어는 어떻게 죽어야 한다고까지 결정을 내릴 수 없는 곳이며, 정말로 사랑이 확실하고 행복이 가능한 곳이고, 백년 동안의 고독을 선고받은 가족들이 마침내 그리고 영원히 이 지구상에 새로운 기회를 가질 수 있는 곳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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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전거 여행

김훈, 생각의 나무, 2000


김 훈의 문장은 그 서정성의 깊이로, 그리고 그 문장의 우아함으로 언제나 여러 평자들의 호평을 받는다. 하지만 이번 <자전거 여행> 뒷 표지에 실린 정끝별의 글은, 속된 말로 표현하자면 '오버'다. 늘 소설이나 시집, 혹은 산문집 뒤에 실린 평론가들의 평은 작가들의 영혼을 비켜나가선 스타카토 풍의, 뚝뚝 끊어지는 문장의 공허함만을 선사한다. 이번도 틀리지 않아서 '가히 엄결하고 섬세한 인문주의의 정수'라든 가 '그의 사유와 언어는 생태학과 지리학과 역사학과 인류학 과 종교학을 종(縱)하고 횡(橫)한다'라는 문장은 <자전거 여행>을 아무리 다시 읽어도 이해가 불가능하다. 왜냐면 이 책은 제목 그대로 글쓴이가 자전거로 여행하면서 적은 기행문이기 때문이다. 가끔 몇 권의 책을 언급하지만 그건 잠시 지나가는 말일 뿐, 어떤 인문학적 성찰이나 학문에 대한 진지한 연구 따위는 없다.

김 훈의 새로운 산문집 <자전거 여행>은 불행하게도 그가 이전에 보여주었던, <선택과 옹호>의 놀라운 문학적 통찰이나 <풍경과 상처>의 풍경 속을 파고 드는 문장의 밀도는 사라지고 세파에 시달리는 직장인 김 훈이 자전거를 타고 가면서 잠시 세파를 잊는 정도에서 멈추고 있다. 그러나 서점에 진열되어 있는 많은 책들 중에서 아무런 고민도 하지 않고 집을 수 있는 책이라는 점은 부정할 수 없다.

'살아서 아름다운 것은 나의 기갈에 물 한 모금 주지 않았다. 그것들은 세계의 불가해한 운명처럼 나를 배반했다. 그러므로 나는 가장 빈곤한 한 줌의 언어로 그 운명에 맞선다. 나는 백전백패할 것이다'

김 훈은 내가 사랑하는 몇 되지 않는 작가들 중의 한 명이고 언제나 그의 책을 기다린다. 요즘 작가들은 너무 자신들을 소모시키고 스스로 천박한 자본주의의 상품으로 진열되기를 원한다. 이것을 그들은 거리낌없이 '대중주의'라고 말한다. 김 훈은 그 곳에서 약간 비켜 서있으며 언제나 정직하게 세상을 바라보고자 한다. 우리 시대의 작가나 예술가에게 필요한 것은 '대중과의 호흡'이 아니라 '자기자신에 대한, 예술에 대한, 그리고 세상에 대한 정직한 성찰'이다.

 - 2000년 8월 14일


7년이 지나는 사이, 김훈은 글 잘 쓰는 신문 기자에서 한국에서 몇 되지 않는 베스트셀러 소설가로 변해버렸다. 그리고 그가 썼던 책들, 대부분 잘 팔리지 않았던 몇 권이 다시 출판되기도 했다. 재미있는 풍경이다. 얼마 전에 읽은 기사가 떠오른다. 서울 시내 길거리에서 루이 뷔통 가방을 3분마다 하나씩 볼 수 있다는 것에 대해 패션 전문가들은 '패션의 수준이 미성숙해서'라고 지적했다. (
http://news.media.daum.net/culture/others/200801/04/hankooki/v19495312.html) 이와 비슷하게 김훈 문학에 대한 대중의 인기도 그런 것이 아닐까 싶다. 오래된 표현 중의 하나로 '문화는 심심함을 먹고 자란다'라는 것이 있는데, '문화는 모험으로 성숙된다'도 포함되지 않을까. 문화 체험은 적당한 양의 모험이 요구된다. 익숙치 않는 책이나 음반을 한 번 경험해보는 것, 그렇게 함으로써 성숙해질 수 있다. (좀 과격한 방법인가)
아마 2000년 이전에 김훈을 좋아했고 그의 글을 탐독했던 이들 중 일부는 지금의 김훈 인기를 낯설게 바라볼 것이 분명하다. 참 낯설다.

- 2008년 1월 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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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먼 자들의 도시>>, 주제 사라마구Jose Saramago(지음), 영목(지음), 해냄

 

 

 

소설을 읽다 끔찍한 기분이 들어, 읽기를 멈춘 적이 번이 아니었다. 그리고 소설을 읽은 지금도, 끔찍한 기분이 사라진 것이 아니다.

 

놀라운 소설 앞에서, 나는 다시 위대한 서사가 어떻게 우리 인간의 삶과 영혼, 밑바닥에 숨겨진 고통스러운 존엄성에 대해 상기시켜 주는가를 목격하게 된다.

 

내가 동안 읽었던 어느 소설보다 위대했고, 고통스러웠으며, 인간이란, 인간으로 살아간다는 것이 어떤 것인가를 생각하게 만들었다. 누구든지, 소설은 반드시 읽어야 소설들 중의 하나다.

 

 

눈먼 자들의 도시 - 10점
주제 사라마구 지음, 정영목 옮김/해냄(네오북)



* 아래는 주제 사라마구의 단편 소설이다. 일독을 권한다.

2007/04/15 - [지하련의 우주/Jazz Life] - 무인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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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기와 천재>>, 명섭(지음), 인물과사상사

 

 

 

책을 구입한 이유는 매우 단순하다. 알라딘 서평 대회(?) 서평 하나 내어 도서 구입비라도 받아볼 생각이었다. 동시에 한겨레신문사에서 고종석 기자 이후로 필력을 자랑한다는 고명섭 기자의 문장을 보고 싶은 것도 있었다. 하지만 서평을 내야 하는 기간 중에 책을 읽지도 못했으니, 그냥 값만 날린 꼴이 되었고, 대신 위안이라고 만한 것이, 고명섭 기자의 머리말 <‘불행한 의식 모험과 투쟁> 근래에 읽어본 글들 중에서 수위를 차지할 정도로 매혹적이었다.

 

하지만 책은 전반적으로 재미있고 쉽게 읽히나, 저자가 읽었던 책들의 다이제스트 판으로 밖에는 읽히지 않는다. 책에 등장하는 아돌프 히틀러, 세르게이 네차예프, 조제프 푸셰, -자크 루소, 나쓰메 소세키, 프란츠 카프카,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 마르틴 하이데거, 미셸 푸코의 대략적인 삶만을 읽을 있을 , 저자 나름대로의 독창적인 시각이 담겨져 있다거나 인물들에 대한 새로운 정보를 알게 된다거나 혹은 인물들이 가졌던 사상, 문학, 철학 등의 세계에 대한 깊이 있는 앎을 얻게 되는 것이 아니다.

 

점은 책의 단점이자, 장점이다. 같은 독자에게 책은 흔하게 있는 책들 중의 하나일 뿐이고, 일반 독자들에게 책은 무척 재미있고 흥미로운 종류의 책이 수도 있을 것이다.

 

아마 알라딘 서평 대회에 썼다면 이런 서평이 나오지 않았을 것이라 생각된다. 조금 길고 장점을 조금 언급했으리라 기대된다. 하지만 읽고 뒤의 불쾌함은 어쩌지 못하겠다. 왜냐면 한결같이 문제적 인물들이고 현대사에 깊은 영향을 끼쳤음에도 불구하고 너무 쉽고 단순하게 언급되는 것에 그쳤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이런 생각을 해보게 된다. ‘저자가 기자였기 때문일까?’

 


광기와 천재 - 6점
고명섭 지음/인물과사상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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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매의 노래>>, 바진(지음), 홍석표, 길정행, 이경하(옮김), 황소자리

 

 

 

책을 읽으면서 현대 중국 사회에 있어서 문화혁명’(1966 ~ 1976) 얼마나 깊은 상처를 남겼고, 아직도 아물지 못하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이에 노(老) 작가 바진은 끊임없이 개인의 삶과 문학의 존재 의미를 물으며, 고통스럽고 수치스러운 과거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가를 고민하고 있었다. 그는 아직도 문화혁명의 상처에서 자유롭지 못했고 끊임없이 문화혁명 시기의 자기 자신과 그의 가족, 그의 동료들에 대해 회상하면서 후회했다. ‘바진 타계 일주년 추모 수상록 선집이라는 부제를 달고 나온 책에서 독자는 시간 앞에서 끝없이 진실해야 된다는 작가의 목소리를 듣게 된다.

 

자신이 가장 절실하게 느끼는 일을 없단 말인가? 문혁이라는 기름 솥에서 10년을 뒹굴었는데, 몸과 마음을 졸였던 재난에 대해서 쓰면 된단 말인가? 누군가 나에게 서독 청년이 나치가 폴란드에서 종족 말살용 살인공장을 지었던 일을 믿지 못하고 일이 일부 사람들의 환상 불과하다고 생각하더라는 일화를 들려주었다. 이런 일이 있을 있다니! 겨우 40년의 세월인데, 사람들은 나치당원이 인성을 저버리고 행한 극악무도한 죄행을 잊어버린 것이다. 나는 아우슈비치의 나치 전범 박물관에 적이 있다. 학살수용소의 유적은 아직도 그곳에 보존되어 있었다. 독가스실과 시체를 태우던 용광로가 몸서리쳐지게도 눈앞에 보였는데, 벌써 존재들에 대해 부정하는 사람이 생겼단 말인가!
(30
– 31)

 

과거란 부정할 없는 사실로서 존재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문화혁명은 이미 잊혀진 과거가 되고 있었다. 그래서 문화혁명에 대해 이야기하고 그것을 상기시키면서 비이성적인 시기 동안 사라져간 동료들과 고통 받은 사람들에 대해 이야기하는 바진을 도리어 공격하기에 이른 것이다. 지금은 극좌파적 오류라는 중국 공산당 공식 평가를 받은 문화혁명. 책에 실린 글들이 1980년대에 쓰여졌다는 점에서, 2000년대의 중국 작가들은 이것을 어떻게 회상하고 있을까 궁금해졌다. 그리고 문화혁명 시기, 중국 신문학의 대표적인 작가 중의 사람인 바진을 비난하고 공격했던 10대의 아이들은, 40, 50대가 지금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을까? 그들은 과연 아직도 문화혁명을 기억하고 있을까? 그래서 바진은 문혁박물관 세워야 한다고 끊임없이 주장하고 있다.

 

독일이나 일본이나 중국이나 한국이나 … … 일부 사람들에게는 과거란 날조된 상상의 부산물이고, 일부 사람들에게는 아직도 아물지 않은 상처이고, 나머지 대부분의 사람들에게는 있으나 마나 어떤 종류의 것이 되어버렸다. 그리고 수잔 모스의 <<발터 벤야민과 아케이드 프로젝트>> 마지막 부분의 짤막한 이야기는 묘하게 바진의 책을 떠오르게 만들었다. 과거는 끊임없이 우리 곁을 돌며, 우리의 현재에 영향을 주고 있다.

 

1982년에 (1926년에 벤야민의 교수 지원을 퇴짜놓은) 프랑크푸르트 대학에서 열린 국제학회에서는 <<파사젠베르크(아케이드 프로젝트)>> 벤야민 <<전집>> 5권으로 출판된 사건에 주목했다. 공식 발제가 끝난 다음날 아침에 학생들과의 자유 토론에서, 벤야민 학자들은 각자 대립하는 학파에 맞서 자기만의벤야민을 옹호했다. 이들 논쟁은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는다. 너무 많이 들었던 논쟁이기 때문이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날 아침에 통찰력 있는 발언을 것은 우리가 아니라 독일 학생이었다. 갑자기 그는 학회장에 독일계 유대인이 없다, 자기 세대 학생 중에 그들이 없다고 말했다. 그는 그들의 부재가 느껴진다고, 그들이 없어서 슬프다고 말했다. 학회장은 갑자기 유령들로 가득 찼다. 우리는 오한을 느꼈다.
(<<
벤야민과 아케이드 프로젝트>>(수잔 모스 지음, 문학동네), 427
)





매의 노래 - 8점
바진 지음, 홍석표.길정행.이경하 옮김/황소자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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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토끼야 들어와 편히 쉬어라, 김서령(지음), 실천문학사


제법 탄탄하고 사람의 시선을 잡아끄는 표현력을 가진 김서령의 첫 소설집 읽기의 시작은 매우 유쾌했다. 하지만 다 읽은 지금, 요즘 작가들은 왜 여기에서 멈추어 버리는 것일까 하는 생각에 불쾌해졌다. 도리어 뒤에 찬사에 가까운 평문을 쓴 방민호(문학평론가)나 소설가 이혜경, 문학평론가 서영인의 생각이 궁금해졌다.

이 소설집에 실린 여러 단편 속 인물들은 한결같이 가난하거나 불행하거나, 그리고 주변의 누군가가 죽는다. 이 얼마나 손쉬운 작법인가. 이렇게 무책임할 수가 있을까. 아무리 소설가는 소설 속 인물들에 대해 신과 같은 권능을 부여받는다고는 하지만, 이 젊은 소설가의 세계 속에서 곧잘 사람들이 죽고, 그 옆의 주인공들은 슬퍼하다가 지쳐 도망가거나 잠시 잊기 위해 잠이 들거나 그건 나와는 무관한 일이야 식으로 끝나버린다. 꼭 작정이라도 한 듯이 인물들을 비극 속으로 몰아넣고는, 심지어 그 인물들에게 한 줌의 희망, 아니 헤어날 수 없는 절망 속에 빠질 기회마저도 박탈해버리는 것처럼 느껴지기까지 한다.

과연 우리들의 삶이란 게 정말 그런 것일까. 다시 한 번 질문하지 않을 수 없다. 과연 삶이란 무엇일까.

그런데, 어쩌면 그럴 지도 모르겠다. 이제 우리에겐 헤어날 수 없는 절망 속에 빠질 기회마저도 없을 지도 모르겠다. 절망에 빠질 기미가 보일 때면, 케이블 TV를 보고, 컴퓨터 게임을 하면 되면 그 뿐이니까. 아니면 술이나 마약을 해도 된다. 그렇게 절망에 빠질 시간마저도 이제 뒤로 미룰 수 있게 된 것이다. 아니면 절망에 익숙해져 버린 탓에, 너무 무감각해졌는지도 모르겠다.

한 때 위대한 비극의 시대가 있었다. 그 당시로서는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비극의 소용돌이 속에서 우리의 주인공은 그 소용돌이를 힘겹게 이겨내며, 후대의 우리에게 휴머니즘이란 어떤 것인가를 보여주기도 했다. 하지만 이제 그런 비극은 없다. 그런 비극적 상황은 너무 많은데, 그 옛날의 그런 주인공은 이제 어디에도 없다. 그리고 그 누구도 그런 주인공 역할을 하고 싶어 하지도 않는다.

김서령의 젊은 주인공들은 비극적 상황 속에서 ‘나는 주인공이 아니야’라고 중얼거리는 미성년에 가까웠다. 하긴 우리 시대는 조로의 시대이면서, 동시에 미성년의 시대일지도.


작은 토끼야 들어와 편히 쉬어라 - 8점
김서령 지음/실천문학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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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물들 Les Choses, 조르주 페렉(지음), 허경은(옮김), 세계사


에밀 졸라의 실험소설론은 정해진 환경(콘텍스트) 속에서 인물(텍스트)가 어떻게 망가지는가에 초점을 맞춘다. 그 속에서 이 세계가 얼마나 잘못되어 있는가를 밝히는데 주안점을 둔다. 이는 사회주의적 리얼리즘 소설과는 전적으로 다른 방식과 태도를 가지고 있다. 사회주의적 리얼리즘 소설은 전형적인 환경과 전형적인 인물을 내세운다. 그리고 이 둘 사이의 갈등과 화해를 바탕으로 이 세계가 왜 변해야 하는지에 대해 주력한다. 이렇게 보면, 조르주 페렉의 소설 작법은 에밀 졸라와 닮아있다. 지극히 유희(놀이)적이라는 점. 실험도 일종의 놀이나 게임으로 이해할 수 있다. 단, 결말을 알 수 없는.

조르주 페렉의 <<사물들>>을 읽으면서 그가 등장시킨 인물이나 그의 인물이 살아가는 방식이나 생각, 또는 사건이나 갈등에 대해선 아무런 감흥도 느끼지 못했다. 이 점에서 그는 첨단의 소설가인 셈이다. 하지만 그가 소설 작법에 관심을 가지는 동안, 그의 인물들은 버려졌고, 열정적이며 도전적인, 거친 삶의 주인공으로서가 아니라 이렇게 살아도 되고 저렇게 살아도 되는 수동적이며 아무 생각도 하지 못하는 인물들로 변해가고 있었다.

어쩌면 그것을 그가 노렸는지도 모른다. 소설 바깥의 소설가는 그의 인물들을 유기하고, 그의 인물들은 소설 속 세계에서 소설 바깥을 보며, 나는 피조물이야, 나는 저 소설가 친구가 쓰는 대로 그렇게 그려질 뿐이야, 라고 피식거리듯이, 현실의 우리들은 이 거대한 자본주의 사회 속에서 유기되어, 끝내 내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곤 아무 것도 없어, 나는 버림당했고 앞으로도 버림당할 것이며, 영원히 구원받지 못할 거야, 그러니 숨이 붙어있는 것만으로도 다행스러워 해야 해, 라고 하는 것처럼 말이다.

이렇게 보자면, 페렉의 소설 작법은 극단적인 니힐리즘을 소설 속 세계가 아니라 소설 속 세계를 이루는 어떤 구조에 반영한 셈이 된다. 그런데, 그래서? 에밀 졸라의 소설이 결국 우리에게 위대한 감흥을 주지 못하는 것처럼, 페렉의 이 소설도 재미없는 씁쓸함만 안겨줄 뿐이다. 그런데, 그래서? 우리는 아직 죽지 않았고 저 세계는 아직도 무자비한 모습으로 우리를 감시하고 있는데 말이다.


사물들 - 8점
조르주 페렉 지음/세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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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잔의 산을 찾아서 - 불멸의 산 생트빅투아르 기행
페터 한트케(지음), 이중수(옮김), 아트북스



세잔을 좋아하는 나. 전후 독일문학의 가장 실험적인 소설가 중의 한 명은 페터 한트케가 세잔에 대해서 적었다? 바로 사서 읽어야 하는 책이다. 하지만 사 둔 지 몇 달만 읽었다. 책은 그리 두껍지 않다. 책의 내용도 평이하다. 그러나 내가 기대했던 바의 내용이 아니었다. 나는 세잔에 대한 현대 작가의 독특한 시각이 농후하게 묻어나오길 기대했다. 그런데 이 책은 세잔에 대한 책이라기보다는 자신의 글(쓰기)에 대한 생각을 정리한 산문집에 가깝다. 한 쪽에서는 세잔에 대한 이야기가 흘러가고 한 쪽에서는 자기 자신에 대한 이야기가 흘러가는 산문집이다.

이는 나쁜 시도가 아니다. 세잔의 세계에 대한 깊이 있는 통찰이 담긴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페트 한트케에 대해선 확실히 알 수 있으니 말이다. 더구나 그의 세밀한 관찰력은 글 여기저기에서 빛난다. 하지만 번역이 매우 나쁘며, 페트 한트케의 유려한 문장의 힘이 살아나지 못하는 듯 하여 다소 아쉽다(아래 댓글을 참조하세요). 세잔에 대해 궁금한 독자들보다는 글쓰기, 또는 산문의 힘, 현대 문학과 예술에 대한 어떤 시각에 관심이 있는 이에게 추천할 만한 책이다.


초기 철학자들 가운데 어떤 이는 시인들이 거짓말을 한다고 썼다. 이는 시인들이야말로 모두가 현실과는 다른 허구에 가득 찬 이야기를 늘어놓고 있음을 단적으로 증명하는 예에 지나지 않는다. 왜냐하면 우리의 현실은 그만큼 불행한 삶의 조건과 불길한 징조들로 가득차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예술은 현실 그대로 재현해놓는 것과는 거리가 멀다. 예술은 다소 우스워지기도 하는 불행한 삶의 조건과 비관을 예시함으로써 진정한 현실 해석의 길로 나아가기 때문이다.




세잔의 산을 찾아서
페터 한트케 지음, 이중수 옮김/아트북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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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지나가는 이 2008.11.07 15:26 신고

    이 책 사실 번역이 엉망입니다. 2/3는 틀린 번역이라고 봐도 잘못이 아닐 겁니다. 꼭 번역기로 돌려서 한국말만 맞춘 것 같아요. 원문과 반대의 뜻으로 번역한 구절들도 많이 눈에 보입니다. 번역자를 만나서 따지고 싶은 기분입니다. 뭘 보고 어떻게 번역한 거냐고...저 위에 인용하신 부분도 완전히 틀렸어요. 원문은 이렇습니다.
    "최초의 철학자 중 한 사람은 시인들이 거짓말을 한다고 했다. 이미 그 때부터 현실이란 나쁜 상태와 좋지 못한 사건들을 가리키는 것이라는 생각이 지배적인 것 같다. [그 생각에 따르면] 예술의 주된 대상과 모티브가 악한 것일 때, 또는 현실에 대한 다소간 우스꽝스러운 절망일 때 비로소 예술이 현실에 충실하다는 것이다."('Die Lehre der Sainte-Victoire'(Suhrkamp, 1984) 17-18페이지)

    • 헉. 그렇군요. 감사합니다. 원문 번역과 책에 나온 글을 읽으니, 매우 다르군요. ㅡ_ㅡ; 쩝. 영어 번역본라도 구해서 새로 읽어야겠어요. 댓글의 문장은 간결하고 힘이 있는데, 책의 번역은 쭉쭉 늘어지고(마치 책 페이지 수를 고려한 듯한..) 구구절절 부연적이며 결국에는 엉망이 되는 것같아요. 편집자의 의도가 심하게 들어간 느낌도 드는..
      번역에 대한 지적 감사합니다. : ) 제 글에 오류가 있었음을 심하게 느끼고 있습니다. T_T;

  • 행인 2010.02.17 15:46 신고

    전 이책을 독어로 읽다가 포기하고 한국어로 읽었습니다.
    음.. 님의 말씀만큼 번역이 나쁘진 않았는데... 제가 인상적이었던것은
    그 한국의 번역가님께서도 직접 이 산을 방문하고 번역했다는것입니다.
    저는 거기에서 깊은 인상을 받았습니다. 한드케의 문장가 많이 다르다는것은 눈치 챘습니다. 하지만 의미상으로 매우 다르다고 하기도 힘들거 같습니다. 번역할때 완전히 다른 언어를 그 의미의 변화없이 유려하게 옮기는 가정은 매우 복잡합니다. 불가능한 표현이 너무 많습니다. 그에비해
    저는 그냥 이 번역에 만족했습니다. 독일인 조차도 사실 읽기 힘든 책이 한드케의 이 책입니다. 자신들도 읽고는 잘 이해가 가지 않는다고 하니까요.
    매우 섬세하고 깊은 명상을 요하는 책이죠. 그냥 슥 읽고 무언가를 얻기 바라는 책이 아닌것은 확실합니다. 저는 오히려 이책을 읽고 세잔을 좋아하게 되었습니다.

    • 한트케에 대한 어느 정도의 기대가 있었으나, 번역본이 완벽하게 충족시켜주지 못한 느낌이 들었는데, 님의 댓글을 읽으니 어느 정도 이해가 되네요. 참, 번역이란 어려운 일인 것같습니다. ㅡ_ㅡ;;; 그런 점에서 한국은 그 힘든 번역에 대한 대우가 바뀌어야 할 텐데 말이죠.
      님의 댓글을 읽으니, 다시 한 번 읽어봐야 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 감사합니다.

音, 꿈의 전람회
김영태(지음), 돋을새김




여름날의 거친 숨소리가 세월의 변덕을 닮아가던 날들이 지나고, 새벽의 찬 바람과 매미 울음소리, 화단의 나무소리, 도시의 시멘트 소리가 내 청춘의 아침을 가득 채운다. 어제 반 년 만에 간 강서도서관에서 책 몇 권을 빌려왔다. 그 중 한 권인 < 音, 꿈의 전람회>.

김영태
문학과지성사에서 나온 시집을 갖고 있는 이라면, 시인들의 초상을 그린 화가로 알고 있을 테고, 시를 좋아한다면 그를 시인으로 여길 터이고(문학과 지성사에서도 그의 시집이 여러 권 나왔다), 무용가이거나 무용애호가라면 그를 무용평론가로 기억할 것이다. 어제 도서관에서 잠시 들춘 <객석> 8월호에서 나는 김영태 선생이 우리 곁을 떠났음을 알게 되었다. 지난 7월에. 이제 이 책은 사자(死者)의 책(書)이 된 건가.

音, 꿈의 전람회
이 책은 김영태 선생이 음악에 대해 쓴 글들을 모아 펴낸 책이다. 짤막한 단상, 제법 긴 글, 저널에 실린 듯이 보이는 단평(短評), 일기로 구성되어 있다. 무용과 음악(특히 현대음악)에 박학다식한 그의 면모를, 그리고 풍부한 시정으로 사려 깊은 문장들은 그가 뛰어난 산문가임을 느끼게 해주는 책이다.

네 시간의 독서
아침에 일어나 이 책을 펼쳐 읽기 시작해, 오후 1시에 다 읽었다. 그 사이, 에릭 사티를 만났고 아르보 페르트를 들었으며, 많은 음악가, 무용가, 작가들이 열린 내 방 창문으로 들어와 오래된 JBL 스피커로 사라졌다. 이 산문집에는 사심(私心)이 없고 그저 보이는 대로, 그저 들리는 대로, 그저 느끼는 대로, 때론 초고인 듯 보이는 풋풋함이 숨어있다. 그래서 글쓴이의 사사롭고 엉뚱한 시선을 피하고 깊이 있고 뚜렷한 성찰의 결과를 원하는 독자에게 무시당하는 여지도 생기는 법이다. 그러나 이는 취향의 차이일 뿐. 그러한 차이 속에서도 이 책은 참 재미있고 즐거운 산문집이다.


音. 꿈의 전람회
김영태 지음/돋을새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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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려라, 아비
김애란 소설집, 창비


쉽게 읽히는 문장, 가끔 보이는 재치 있고 재미있는 표현, 하지만 그 정도? 나라도 혹평하지 않으면 안 되겠다 싶을 정도로 이 젊은 소설가에 대한 평가는 찬사와 열광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런데, 이건 좀 심하지 않은가.

김애란의 소설들을 관통하고 지나가는 것은 무덤덤한 관찰의 시선이다. 무덤덤하게, 나(주인공)와는 아무런 상관도 없다는 식으로, 적극적 행위의 주체로 나서지도 않고, 극적인 심리적 갈등을 가진 인물이 등장하지도 않는다. 더구나 정치경제학적 환경마저도 벗어나, 이 세상, 이 사회에 대한 아무런 불만도 표출하지 않은 채, 그저 특정한 위치에 서서 바라보기만을 계속할 뿐이다. 심지어는 추억도 없다. 미래도 없다. 과거가 있는 것 같지만, 그것은 상상이거나 공상, 또는 지어낸 이야기로 둔갑하며 미래에 대한 기대가 없기 때문에, 꿈도, 희망도 없다(세상에, 이렇게 슬픈 세계가 존재할 수 있을까).

무관심하다는 점에서 이 세상(이 존재하는 방식)에 대해 비판적이라고 말할 수 있을 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 뿐이다. 조각난 세계를 바라보는 것. 그저 바라만 보고 있는 것. 바라보는 것에 대해서만 적극적으로 꾸미고 변화를 주는 것. 하지만 세계는 그 자리에 그대로 있는 것. 그래서 김애란의 소설 속에서의 자아란 사랑하지도 않고, 싸우지도 않고, 끔찍한 절망에 휩싸여 있거나 주체할 수 없는 열정을 가지고 있지도 않다. 그저 무덤덤하게 바라만 본다.

그런데 왜 독자들과 비평가들은 열광하는 것일까.

잘 만들어진 소설이며, 심각한 주제나 소재가 등장하지도 않고 어떤 인물, 어떤 사건의 본질적인 측면을 부각할 생각도, 그런 시도도 하지 않은 채, 표피적인 상황들만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깔끔하고 상쾌한 느낌을 주는 이 소설을 독자들은 좋아하겠지만, 비평가들은 왜 열광하는 것일까. 뛰어난 소설가가 이제 더 이상 나오지 않듯이, 비평가들도 나오지 않는 모양이다. 적어도 김애란의 소설 세계가 가진 문제점을 드러내며 현대 사회가 가진 병리적 현상을 통찰력 있게 드러낼만한 이가 없다는 점은 현 한국 문단이 가진 비극적 단면이다.

달려라, 아비
김애란 지음/창비(창작과비평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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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서 읽든, 도서관에서 빌려서 읽든, 한 번쯤 읽기를 권할 만한 한국 소설임에는 분명하다. 하지만 열광적인 찬사로 도배될 만한 소설은 아니라는 것이며, 도리어 이 소설이 가진 한계를 면밀하게 분석해 이러한 태도를 가진 현대 문학을 극복해야 되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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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의 모든 것에 관한 거의 아무것도 아닌 이야기
(Presque Rien Sur Presque Tout)
장 도르메송Jean D'Ormesson 지음, 유정희 옮김, 문학세계사, 1997


Story는 시간 위에서 인과적 관계를 이루며 진행된다. 드라마가, 영화가, 그리고 위대한 소설이 여기에 속한다. 하지만 ‘소설’이라고 이름 붙여진 이 책에선 Story가 사라진 독백으로 가득하다. 소설에 대한 새로운 정의를 내리고 싶었던 걸까. 그래서 소설이라고 이름 붙인 것일까. 황당하기 짝이 없는 이 책은 소설이 아니다.

그렇다면 뭘까. 내가 보기엔 좀 있어 보이는 문장들로 구성된, 난해한 수필집이라고 하는 편이 전통적인 시각에서의 정의내리기에 가깝다. 그런데 수필집으로 정의내리더라도 이 책은 독서의 재미에서는 한참이나 떨어져 있다. 불어 원문으로 읽는다면, 분명 현란한 언어 구사를 볼 수 있으리라 기대되지만, 이와 유사한 형식의 책인 파스칼 키냐르의 ‘은밀한 생’의 번역본에서 느낄 수 있는 그런 재미마저 없다는 점이 이 책의 완독을 더욱 어렵게 만들었다.

결국 나는 이 책을 다 읽지 못했다.

혹시 난해한 수필집, 아니면 정말 기상천외한 소설 형식(과연 소설이라고 부를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에 관심이 있다면 이 책은 숨겨진 보물일 지도 모르겠다.


 

거의 모든 것에 관한 거의 아무 것도 아닌 이야기
장 도르메송/문학세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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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지
위스망스 단편선, 손경애 옮김, 문학과 지성사


현대의 압도적인 자본주의 물결 속에서 반-자본주의 예술 활동이 일어나지 않는 까닭은 무엇일까? 많은 이들이 자본주의를 성토하며, 안정적 삶을 희구함에도 불구하고 자본주의를 본격적으로 공격하지 않는 이유는 어디에 있는 것일까? 그렇다면 자본주의가 그 진정한 모습을 드러내던 19세기에 반-자본주의 사상과 예술 활동이 성행했던 것일까? 그리고 현재와 19세기를 비교해보는 것은 과연 의미 있는 일일까? 나는 조리스 칼 위스망스Joris-Karl Huysmans의 세 단편소설을 읽으면서 이런 의문들을 품었다.

자연주의 양식에 속하는 위스망스의 세 단편, ‘등짐’, ‘부그랑 씨의 퇴직’, ‘궁지’는 주어진 환경 속에서 끝내 몰락하고 마는 개인들을 등장시키고 있다. ‘등짐’의 경우에는 전쟁이라는 특수한 상황 속에서, 그 곳으로부터 도피하려는 한 개인을 등장시키고(반-국가적인 성향을 드러내며), ‘부그랑 씨의 퇴직’에서는 직장 생활의 노예가 되어버린 한 중년 신사의 강박적 경향을, ‘궁지’에서는 19세기 부르주아지의 돈에 대한 탐욕스럽고 부도덕적인 욕망을 표현하고 있다.

‘등짐’을 제외한 두 단편 - ‘부그랑 씨의 퇴직’과 ‘궁지’ - 는 현대 자본주의 속에서도 공공연히 일어날 수 있는 어떤 사건이라는 점에서 위스망스가 보았던 과거 어떤 세계의 문제가 아직도 치유되지 못한 채 남아있다는 절망감에 휩싸이게 된다. 더구나 19세기만 하더라도 이런 문제의식 속에서 치열하게 창작활동을 하던 예술가들이 있었으나, 현대에는 그러한 창작활동에 매진해야 할 예술가들마저 거대한 자본주의 체제 속에 휩쓸려 들어가 버렸다는 안타까움을 들게 만든다.

현대 독자가 빠져들 만큼의 소설적 재미는 없지만, 19세기 후반의 소설이 가지는 문제의식을 알기에는 매우 유용한 소설이 될 수 있다.

부연 설명

1. 안타까움에 대하여 - 현대 소설의 양식과 19세기 자연주의 소설 양식과의 차이로 인해, 눈에 보일 정도의 선명한 주제의식과 공격을 19세기 자연주의 소설이 가지고 있다면, 현대 소설에서는 눈에 보이지 않는 모호성과 알레고리, 상징들로 그 공격을 대신하려는 경향이 뚜렷해진다. 따라서 자본주의 체제 속에서 고통스러워하는 현대의 자아는 그 고통의 실체를 정면 응시를 하기 보다는 비켜보려고 하거나 고개를 돌려 다른 것을 봄으로써 그 고통을 방기하는 전략을 택한다. 현대 소설들이 가지는 반역사성은 이러한 도피적 성향의 반영이라고 해석할 수 있으며, 이 점에서 안타까움을 가질 수밖에 없다.

2. 19세기 자연주의에 대하여 - 에밀 졸라의 ‘실험 소설론’은 19세기 자연주의가 가지는 한계를 분명하게 드러낸다. 실험실에서 가상의 실험 조건을 만들고 어떤 인과 관계를 생성시키는 것처럼, 자연주의 소설 또한 등장인물과 소설 속 환경 속의 어떤 인과 관계를 도출시키고자 한다. ‘궁지’에서는 이러한 성격이 잘 드러나 있다. 확실히 소설적 재미는 없으나, 어떤 시대, 어떤 체제에 대한 공격 방식으로는 매우 탁월한 양식이다.



궁지
조리스-칼 위스망스 지음, 손경애 옮김/문학과지성사

Comment +3

  • dean 2008.12.31 22:28 신고

    우연히 들렀는데 좋은 글이 너무 많습니다.
    위의 안타까움에 대하여 부분은 읽는데 소름이 돋네요.

    • 감사합니다. ^^;; 벌써 읽은 지 1년 반이나 지났네요. 위스망스의 다른 소설 한 권도 번역되어 있습니다. 의외로 오래된 소설이 재미있습니다. : )

  • 2009.01.02 20:43

    비밀댓글입니다


적, 사랑 이야기 Enemies, A Love Story
아이작 B. 싱어(지음), 박석기(옮김), 문학사상사, 1986년(초판)

(현재 절판되었음. 현재에는 아래 범우사에서 나온 것을 구할 수 있음)



세상일은 아무도 모른다는 점에서, 만인은 평등하다. 홀로코스트를 만들었던 나치들과 유태인들은 평등하다. 신의 방관 속에서 이루어진 유태인 학살. 그래도 아이작 B. 싱어는 ‘신은 있다’(He is behind everything)고 말한다.


‘적, 사랑 이야기’는 1978년 노벨문학상 수상작이면서 아이작 B. 싱어의 대표작이다. 한 남자와 세 여자 사이에서 벌어지는 러브 스토리를 표면에 내세우고 있지만, 정말 사랑하고 있는가에 대해선 사랑을 나누고 있는 등장인물들조차 혼란스럽다. 그리고 사랑에 대한 아름다운 표현이 나오는 것도 아니고 뜨거운 사랑의 장면이 등장하지도, 남녀간의 애정이 직접적으로 드러나지도 않는다. 그저 서로를 찾고 더듬을 뿐이다. 결국 이 소설에 등장하는 한 남자와 세 여자를 서로 이어주는 것은 지난날의 상처(홀로코스트)와 주위에 아무도 없다는 외로움뿐이다.


결국 한 여자는 자살하고, 한 남자는 사라지고, 두 여자가 남아 한 아이를 키우는 것으로 끝나는 이 소설이 우리에게 말하고자 하는 것은 무엇일까. 나도 허먼(소설의 남자 주인공)처럼 혼란스럽기만 하다. 상처 입은 이들은 그 상처에서 헤어나기 위해서 발부둥칠 뿐, 그들에게서 이성적인 판단이나 행동을 기대해서는 안 된다? 이런 것일까. 부도덕한 한 유태인 남자 허먼과 유태인이 되고자 하는 한 야드비가, 홀로코스트에서 극적으로 살아남은 전 부인 타미라, 그리고 격정적인 표현과 행동으로 남자를 끌어당기는 마샤. 이들 네 명으로 서로 부딪히며 만들어가는 이 소설을 읽고 난 뒤, 기억나는 것이라곤 그들이 겪었을 지난 날의 상처뿐이었다. 



적들, 어느 사랑이야기
아이작 B. 싱어 지음, 김회진 옮김/범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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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버리고 거리로 나가자
데라야마 슈지(지음), 김성기(옮김), 이마고



내가 창녀가 되면
- 오카모토 아미


내가 창녀가 되면
가장 첫 번째 손님은 오카모토에서 온 다로라네
내가 창녀가 되면
이제가지 사모은 책들은 모두 헌책방에 팔아치우고 세상에서 가장 향기로운
비누를 사려네   
내가 창녀가 되면
슬픔을 하나 가득 짊어지고 온 사람에게 날개를 달아주려네
내가 창녀가 되면
다로의 체취가 남은 내 방은 언제나 깨끗이 청소해놓고 미안하지만
아무도 들이지 않으려네
내가 창녀가 되면
태양 아래서 땀을 흘리며 빨래를 하려네   
내가 창녀가 되면
안드로메다로 팔찌를 만들 수 있는 주문을 외우려네
내가 창녀가 되면
누구도 범하지 못하는 소녀가 되려네 
내가 창녀가 되면
슬픔을 견뎌낸 자비로운 마리아가 되려네  
내가 창녀가 되면
흑인에게 오월의 바람을 가르쳐주려네
내가 창녀가 되면
흑인에게 재즈를 배우려네 
외울 때는 침대에 누워 다로의 체취를 느끼고
기쁠 때는 창가에 서서 다음에 일어날 일을 조용히 기다리며
공연히 누군가를 만나고 싶어지면
침대에 들어가 숨을 죽이고
머나먼 별들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려네  


아침에 일어나 자주빛깔 옷을 입은 던힐 한 개비를 꺼내 입에 물고 멍한 눈으로 먼 하늘을 바라보았다. 데라야마 슈지 같은 감수성, 그런 언어를 가진 적이 있었던 것같다. 같다. 같.다. 같다? 글쎄. 그런 시절이 있었을까.


한 소년이 권총을 갖고 싶어했다.
소녀가 물었다. “뭘 쏘려고?”
소년이 대답했다. “태양. 저 녀석만 바라보면 괜히 울화가 치밀어.”


그랬던 적이 있었을까. 스리랑카산 홍차를 마시면서 계속 떠올려보려고 노력했지만, 도통 기억이 나지 않는다. 너무 먼 과거의 일이다. 그 사이 은하계는 두 번의 생과 사를 거듭했고 일 억 만 개의 별이 소리없이 자취를 감추었으며 원 포인트 파이브 리터의 정액이 비닐에 쌓인 채로 버려졌으며 그(녀)들은 딴 여자와 눈을 맞춘 채 아메리카 대륙의, 천사들이 산다는 도시로 떠났다. 무심하게. 실제 과거의 일이 기억나지 않는 관계로, 과거는 조작되고 추억은 새로 만들어진다. 시뮬라크르의 세계. 새로 만들어진다는 건 무척 훌륭한 일이다. 조작되거나 모방되지만, 실제로는 없는, 픽션이다. 시뮬라크르의 세계.


데라야마 슈지의 책은 쉽게 읽을 수 있지만, 꽤 오래 동안 잔상이 남을 것이다. 시종 일관 스물 둘의 언어로 쓰인 이 책은 내가 이미 지나온, 그러나 기억나지 않는 과거의 언어와 닮아있었다. 그 과거에 그(의 언어)를 만났다면 열광하였을 텐데, 지금은 그렇지 못하다. 그 사이 이 세상 음식을 너무 많이 섭취한 탓이다. 되도록이면 정제된 알코올로만 연명하고 절대로 정액을 낭비하는 일 없이 키스만 했어야 했다.


추천할 생각이 없는 책이다. 헌책방에서 이 책을 보게 된다면 구입해도 좋다. 헌책방에 어울리는 책이다. 누군가의 손때가 묻은 데라야마 슈지는 매력적이지만, 아무런 상처 없이 바로 넘어온 슈지는 아무 짝에도 쓸모가 없다.



책을 버리고 거리로 나가자
데라야마 슈지 지음, 김성기 옮김/이마고

 

Comment +4

  • 오래 전에 가슴 설레며 읽은 책을 다시 꺼내어 읽으며 책 속에 담긴 고통들이 왠지 시큰둥해진 적이 있어요. 그때는 단어들이 금방이라도 터질 것 같은 붉은 종기 같게 느껴졌는데 말이죠. 그나저나 잠깐 생각해보니, 창녀가 된다면, 이란 가정도 스물둘의 나이가 할 수 있는 말 같은데요. --;

    • 어떤 사람들은 죽을 때까지 스물 둘의 감수성을 가진 채 살다가 죽기도 합니다. 하지만 어떤 사람들은 스무살 때 마흔의 감수성을 가진 채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이다가 마흔에 꽃피기도 하죠.
      그런데 스물 둘의 감수성은 언제나 매력적인 것같아요. 스물 둘의 사랑이 마흔의 사랑보다 좀 매혹적이지 않을까 하는... 아.. 전 스물 둘에 사랑은 하지 못하고 술만 퍼 마셨네요. ㅡㅡ;;

  • 이 시대 스물둘의 감수성을 보면서, 나라면 과연 지금의 스물둘 감수성으로 살아갈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을 한 적이 있어요. 물론 개인적 차이라는 변수도 있고 아예 다르다 할 수도 없지만, 전반적 시대 풍조의 '스물둘'이라면 슬쩍 자신이 없어지더군요. 전 스물둘에 사랑도 하지 못하고 술도 퍼마시지 않았군요. 대신 전 스물둘에 '나이'의 무게가 가장 무겁게 느껴진 순간이 찾아왔어요. 지금 생각하면 왜 그날 그 순간이었을까 싶지만. 그런데 마흔의 사랑을 스물둘의 감수성으로, 그런 건 어떨까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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