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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아란 영혼

책들의 우주/문학 +232
사로잡힌 영혼 - 8점
마르셀 라이히-라니츠키 지음, 서유정 외 옮김/도서출판빗살무늬




마르셀 라이히-라니츠키, <사로잡힌 영혼>, 빗살무늬



재미있게 읽었지만, 마음에 걸리는 부분이 많다. 그것은 라니츠카가 생각하는 문학이나 예술과 내가 생각하는 그것들과 많은 부분에서 틀리기 때문이다. 또한 그는 작가들을 자기애에 가득찬 인물로 매우 공격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그러나 자기중심적이거나 자기애에 대한 판단이나 간략한 상황 설명만 있을 뿐, 깊은 분석은 없다. 분명 수긍할 만한 구석이 있기는 하지만 그냥 자기 생각나는 대로 서술했을 뿐이다. 자기 느낌대로.

라니츠기의 문학에 대한 사랑은 무척 감동적인 구석이 있기는 하다. 하지만 현대 작가나 예술가들이 고민하고 방황하는 것에 대한 아무런 통찰도 없어 보인다. 그는 삶과 유리된, 세계와 유리된, 그렇게 자족적으로 구성된 문학의 세계를 읊고 싶은 것이지, 문학이 반영하고 있는 하나의 삶이나 그 삶이 처해있는 현실 세계에 대해선 아무런 관심도 없어 보인다.

그는 교묘하게 자신의 권위를 내세우면서 자신의 평가를 누군가에게 알리는 데 있어 탁월한 재능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간결하면서 정곡을 찌르는 말. 라니츠키를 돋보이게 하는 부분이다. 이 책에서 그러한 그의 능력은 유감없이 발휘되고 있다. 하지만 라니츠키에게 문학은 구원이었겠지만, 현대의 예술은 ‘예술은 그 누구도 구원할 수 없다’는 것이 주요한 테마들 중 하나이다. 고작 자기변명이나 자기 합리화에 불과하다고. 그리고 그것마저도 폭로해버리고 있는데.

분명 이 책은 쉽게 읽히고 그러면서 저자는 글의 중심을 잃지 않는다는데 큰 미덕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그가 생각하는 문학이나 비평은 나에게 있어 아주 오래된 고전 문학을 읽는 듯한 느낌을 가져다주었을 뿐이다. (이것만으로도 이 책은 읽을 만한 가치가 충분하다. 이 정도로 열성적이며 대중적인 비평가를 우리 문학은 가지고 있지 못하니. 그것이 안타까울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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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중 곡예사 - 10점
폴 오스터 지음, 황보석 옮김/열린책들



폴 오스터, Mr.Vertigo, 열린책들.




'공중곡예사'라는 번역 제목은 썩 성공적이지 못하다. 차라리 '미스터 버티고'나 '현기증씨'가 낫지 않을까.(그만큼 이 소설 속에서 '현기증'이라는 소재는 매우 중요하다. 소설 속에 아주 짧게 언급되지만, 주인공 인생에 있어 한 계기를 마련하기 때문이다.)

살아가면서 중요한 것들이 여러 개가 있는데, 그 중 하나가 '거리감'이다. 가령 고등학교 때 친구가 건네준 빨간 포장의 말보루를 가슴 깊숙이 삼키고 난 다음 펼쳐지는 거리 풍경과 팽창하는 동공과의 거리 변화 따위나 대학 때 옆에 사모하는 여자를 앉히고는 연거푸 데킬라 스트레이트 잔을 여러 잔 마시고 손을 뻗쳐 그 여자의 얼굴 위로 갖다댈 때, 손가락 끄트머리와 그 여자의 볼 사이의 거리, 그 거리가 지니고 있는 어떤 푸른 빛깔의 팽팽한 긴장감 따위가 그러한 거리감의 예가 될 수 있을 것이다.

'내가 물위를 처음 걸었던 것은 열두 살 때였다'라고 시작하는 이 소설은 허공으로 몸을 띄우게 되는 한 남자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그런데 여기에서 몸을 띄운다는 건 어떤 특별한 의미를 지니고 있는 것은 아니다. '내가 모든 수학 문제를 다 풀 수 있었던 건 열두 살 때였다'라든가 '내가 컴퓨터 바이러스를 만들어내었던 건 열두 살 때였다'라든가 하는 문장으로 시작해도 별로 달라질 것은 없다는 말이다. 단지 현실적인 가능성이 희박한, 어떤 우의적인 사건을 통해 소설의 여러 사건들을 끌고 가게 만드는 폴 오스터 특유의 장난이다.

이 소설 전체가 이러한 장난으로 구성되어 있다. 삶을 그대로 관통하지 못하고 어떤 기만적인 태도, 즉 인생과, 혹은 이 세상과 어떤 거리를 두고 그 사이를 장난으로 채워버리는 폴 오스터 특유의 태도가 이 소설에서도 고스란히 드러난다. 실제로 이러한 태도로 인해 폴 오스터를 싫어하는 독자들이 있기도 하다.

내가 폴 오스터를 선호하는 이유는 바로 이러한 기만적인 태도에 있다. 이 기만적인 태도를 이해하는 것은 폴 오스터 뿐만 아니라 현대 소설을 이해하는 데 무척 중요한 길잡이를 한다. 꼭 로베르토 무질의 <<세 여자>>에서 어렴풋이 보았던 외부세계에 대한 태도가 폴 오스터에게 와서 그대로 재연되고 있는 셈이다.

그러고 보면 이 소설은 어떤 교훈적인 것도, 인생에 있어 어떤 통찰도 말하지 않는 듯이 보인다. 아니 어떤 통찰을 말하는 것 같지만(월트의 입에서 나오는 이상한 말들, 가령 '그러면 당신 몸 속의 공허함이 당신 주위의 공기보다 더 가벼워진다'따위의 말), 다 우스개소리다. 몸을 허공에 띄울 수 없다는 건 누구나 알고 있는 것이고 이 소설은 몸을 허공에 띄우기를 강요하는 소설이다. 이 어긋남은 읽는 이로 하여금 약간의 우울함 따위를 선사하는데, 그 이유는 몸을 허공에 띄우든 띄우지 못하든, 우리 인생은 이미 조각나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하기 때문이다. 이미 우리 인생은 우리 인생이 아니고, 우리를 인도해줄 어떤 사람도 없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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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터 한트케, "어두운 밤 나는 적막한 집을 나섰다", 문학동네.



힘들게 읽은 작품. 몇몇 뛰어난 문장들이 눈에 보임. 그러나 전체적으로 어떤 내용인지, 그냥 일반적인 소설 읽듯이 읽어선 접근하기 어려움.

구성의 치밀함이 있는 듯 하나, 그것을 알기에는 지하철은 무척 안 좋은 공간이었음. 힘든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는 현대인들에게 가장 적당한 텍스트는 헐리웃 영화인 듯함.

이 소설, 무척 재미없음. 예술이 대중과 멀어지는 이유는 그 어떤 것도 이 세상에 대한 해답을 가지고 있지 못하기 때문인데, 페터 한트케의 작품도 여기에 포함됨.

최근 라이프니츠의 '모나드'를 다시 떠올리게 되었는데, 그 이유는 예술이 스스로의 담을 쌓고 그 속에서 완결된, 무척 행복한 자기 변명의 구조를 만들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임. 그런데 이것은 천천히 현대인의 삶을 구축해 내가고 있음.

전형적인 여행 소설임. 여행이라는 측면에서 보자면, 무척 훌륭함. 자기 완결적 구조를 가지고 있음. 떠남과 돌아옴의 순환 구조. 영혼의 성장을 테마로 함. (그러나 이것은 작가의 의도된 거짓말일 수 있음. 때때로 위대한 서사시의 저자들이 행하였듯이 어떤 '환상'에 충실하게 봉사한 것일 수 있음)

나중에 다시 기회가 된다면, 읽어보겠지만, 다시 읽는다 하더라도 재미없을 듯함.

(* 페터 한트케는 전후 독일 문학에 있어서 무척 중요한 작가이다. 그러므로 내가 한트케의 세계를 낯설게 받아들이는 경우일 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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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벌레, 클라스 후이징, 문학동네



책벌레를 읽었다. 정독 요하는 책이다. 하지만 건성으로 읽었다. 문장이 좋지 않았고 스토리를 끌고 나가는 스타일도 흥미진진하지 않았다. 그 이유는 하나의 스토리가 전개되는 것이 아니라 두 개의 스토리와 하나의 말많은 양탄자로 구성되었기 때문이다.

무척 치밀한 구성이었지만, 나는 한 권의 소설을 원했지, 자신의 주장을 담은 논문을 원했던 건 아니다. 하지만 이 책이 우리에게 던지는 질문: "책은 과연 무엇인가?"

책을 읽으면서 책이 무엇인가에 대해 고민해보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왜 우리는 책을 읽는 것일까. 한동안 이 고민을 해야할 것이다. 에코의 <장미의 이름>이 한 권의 책에 대한 것이듯, 진시황제가 모든 책을 불 태웠듯이, ... 책은 무척 중요한 것인데, ...

2002년 9월 : 다시 떠올려보아도 이 소설은 극적 긴장감이나 감동이라고 하는 측면에서 떨어진다. 주제가 너무 분명한 경우 그것을 담는 스토리가 어떻게 전개되어야하는가에 대해서 이 소설가는 아직 잘 모르고 있는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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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만 아는 정원이 있다 - 10점
이경림 지음/이룸


파란 하늘이 위로, 약 이십킬로미터 정도 끝없는 우주 쪽으로 올라갔다. 그랬더니 조금 넓어진, 또는 매우 넓어진 하늘을 메우기 위해 공기들이 이리저리 재빨리 움직이며 바람을 만들기 시작했다. 해마다 삼월 초면 이런 일이 생기곤 했다. 하늘이 먼저 움직이고 뒤따라 공기들이 움직였다. 옷깃 사이로 공기들이 밀려들어왔다 밀려나갔다. 꼭 파도 같았다.

방 구석 오래된 책장 속에서 '정원'을 페이지 속에 숨긴 책 한 권을 꺼내들었다. 숨긴 정원의 크기를 가늠할 방법은 없었지만 내가 책을 들고 흔들자, 우수수 작은 나무며, 푸른 잔디며, 둥글고 맨들맨들한 돌맹이들이 떨어져내렸다. 꼭 한겨울 함박눈처럼 내려 금새 방을 가득채웠고 열린 창을 넘어 골목길을 채우기 시작했다.

정원에 익숙하지 못한 도시의 주민들이 문을 열고 나와 정원을 숨긴 책 한 권을 들고 있는 나에게 삿대질을 하기 시작했다. 오늘 종일 플라스틱으로 만든 작은 쓰레받기로 떨어져있는 나무며, 잔디며, 돌맹이들을 책 속으로 집어넣어야만 했다. 몇 시간을 했는지 모르겠다. 그러다 돌맹이 하나가 바람에 밀려 하늘로 올라갔다.

바람이 조금 더 세게 부니까, 나무며, 잔디들도 따라 하늘로 올라갔다. 하늘로 올라가 싱그러운 향기를 뿌려댔다. 무척 좋은 향기다. 삿대질을 하던 주민들도 나와 그 향기를 맡으려고 했다. 그건 좋은 글에서만 맡을 수 있는 향기였다.

오랫만에 무척 좋은 향기를 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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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스칼 키냐르, '은밀한 생', 문학과 지성사



나는, 내가 읽으면서 몽상할 수 있는 그런 책을 쓰려고 한다.
나는 몽테뉴, 루소, 바타유가 시도했던 것에 완전히 감탄했다. 그들은 사유, 삶, 허구, 지식을, 마치 그것들이 하나의 몸인 듯 뒤섞었다.
한 손의 다섯 손가락들이 무엇인가를 붙잡고 있다.
- 제 32장, 292쪽.


소설 1 : 이제 소설은 몽상과 개인의 독백만을 중얼거리기 시작한다. 소설에 있어 Reality란 실제의 세계(real world)를 반영할 때 사용되는 것이 아니라, 한 개인에게 있어 진실한 것, 하나의 고백(confession)일 경우에 Reality라는 단어가 사용된다. 인과란 무시해야하는 것이며 이리저리 방황하는 우리들의 영혼을 위해 달콤하고 지적인 사랑의 단어들은 전통적인 소설이 가져다주지 못한 그 무엇을 가져다준다.

포스트모던적 인생 : 앤디 워홀의 욕망. 이미지들로 자신을 채우기. 현대의 적극적이고 대중적인 예술가들의 전략. 끊임없는 자기 노출과 대담한 행위와 인터뷰. 대중의 욕망 위로 겹쳐진 예술가의 모습. 그 뒤로 사라져버리는 실제 예술가. 하지만 포스트모던적 인생이 격하기 그지없는 허무한 날개짓이라면, 은밀한 생은 ... ...

은밀한 생 1 : 아름다운 대중 혐오증. 아무도 자신을 이해해주지 못한다고 믿는 현대의 어떤 병에 대한 작은 치료법.

은밀한 생 2 : 사랑에 대한 독백. 사랑하고 있다는 고백. 사랑했던 자들에 대한 회상. 사랑에 대한 독서. 사랑에 대한 낙서. 하지만 사랑은 책 속에만 있고, 사랑은 독서에만 있고, 사랑은 몽상 속에만 있고, ... 사랑은 ... ...

소설 2 : 뛰어난 작가들이 숨어사는 작은 성. 하지만 시간이 흘러가고 그 성의 모습도 바뀌는 법. 이제 시간도 공간도 아무 의미를 가지지 못한 채, 오직 우리 영혼 속에서만 가치있는 것... ... 추상의 세계, 몽상의 세계 속으로 여행. 그 여행의 이름. 은밀한 생. 또다른 이름의 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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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 클레지오, 우연, 앙골라 말라, 문학동네





인생에는 여러 가지 종류가 있다. 그리고 그것을 보여주는 여러 가지 방식이 있다. 르 클레지오는 그러한 그것이 가지고 있는 어떤 신비, 어떤 매혹을 보여주고자 한다. 그리고 그 신비와 매혹이 현대 문명에 의해 무너지는 모습까지도 시적인 풍경으로 묘사한다.

무척 아름다운 소설이지만, 르 클레지오의 화법이나 문장에 익숙치 않은 사람은 꽤나 지루해할 만한 소설이다. 지극히 현대적인 소설이긴 하지만, 그것을 쉽게 드러내지 않는다.

한국에서도 이국적인 분위기를 자아내는 소설이고 프랑스에서도 무척 이국적인 분위기를 자아내는 소설일 것이다. 다음 기회에 르 클레지오의 문학 세계를 다룬 글을 올릴까 한다. 따지고 보면 르 클레지오의 문학 세계는 이해하기 힘든 구석이 많다.

아마 이삼년 전에 이 소설을 읽었다면, 난 무척 재미없어 했을 것이다. 어떤 이가 나이에 따라 읽히는 소설이 틀리다고 했는데, 그런가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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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도 아닌, 동시에 십만 명인 어떤 사람 - 10점
루이지 피란델로 지음, 김효정 옮김/문학과지성사




<<아무도 아닌, 동시에 십만 명인 어떤 사람Uno, nessuno e centomila>>
루이지 피란델로Luigi Pirandello, 1926.(김효정 옮김, 문학과 지성사, 1999)





살아가는 게 버겁다. 소박하고 순수하던 고대의 풍습은 시간의 바람 속에서 먼지가 되고 훗날 그 먼지들을 모아 새로운 성(城)을 쌓지만 그 성은 우리가 지어, 들어가지 못한 채 버림당하는 곳으로 남겨진다. 그럼 이제 우리는 어디로 가야하는 걸까. 선량한 우리, 아벨에게서 왔지만 그가 가졌던 양들은 이제 우리에게 남아있지 않고 그 몇 천년 동안 푸른 언덕이며 깊은 호수며 그 곳을 가득 메우고 있던 새와 물고기들은 몇 미터의 높이로 쌓인 먼지들의 먹이가 되어버렸다. 아, 이제 우리는 어디로 가야하는 것일까.

모스카르다. 그는 거울을 보면서 그 거울 속에 누군가가 있음을 깨닫게 된다. 그가 아닌, 낯선 이방인. '나를 보여지게 할 수는 있지만 나를 볼 수 없는' 어떤 이방인.

그 순간 책을 읽던 나도 책을 덮고 거울 앞으로 간다. 거울에 비친 나를 본다. 그런데 과연 거울 속의 나는 나일까. 나란 도대체 무얼까? 나, I, Je, 我, ... ...

진지한 학문과 예술은 참된 어떤 것을 찾아가면서 거짓되고 허상인 것들을 폭로하고 비판한다. 그러다가, 아뿔싸! 거짓과 허상의 중심에 '나'가 있다는 사실을 깨닫기까지 현대인에게는 그렇게 오랜 시간을 요구하지 않는다. 

이제 나를 포함한 모든 것들이 거울 속으로 들어가고 나는 없다. 나란 없는 자(nobody).

'아무도 아닌, 동시에 십만 명인 어떤 사람'은 아주 사소한 계기. 어느 날 문득 거울 앞에 서서 나는 누구이고 내 인생은 무엇이고 ... ... 이런 자질구레하고 매우 일상적이지만, 때때로 진지하고 성실한 사람에게 있어 극히 치명적인 질문으로 인해 고통받는 한 인물을 묘사하고 있다.

포스트모더니즘의 중요한 주제인 '주체의 분열'이란 실제로는 모더니즘의 것이다. 그건 현대(Modern)의 학문과 예술이 19세기말부터 의문시해온 어떤 근본적인 반성과 관련되어 있다. 모스카르다의 정신 나간 듯한 말투에서 우리는 우리들의 치명적인 자화상과 마주한다. 나를 찾기 위해서 방황하고 노력하지만 그러면 그럴수록 고립당하는 우리 자신들과.

'주체의 분열'이란 진정한 자아를 찾아가는 모더니즘적 방식이다. 그리고 보다 중요한 것은 '분열 이후'다. 우리는 진정한 나를 찾아가기 위해서 무수한 위험과 고통을 감내해야 하지만 과연 우리는 진정한 나를 찾을 수 있을까? 그것은 가능할까?

"그것은 묘비명, 즉 이름 외에 아무 것도 아니다. 죽은 자들에게 편리한 것이다. 인생은 끝나지 않았다. 그리고 인생은 이름을 모른다. 이 나무는 새로 난 나뭇잎이 흔들릴 때 호흡한다. 나는 나무다. 나무이자 구름이다. 내일은 책이나 바람이 된다. 다시 말해 내가 읽는 책. 내가 마시는 바람이 된다. 그 모든 것이 외부에서 방랑한다."(240쪽)

덧붙임 : 자신의 삶을 후기 구조주의자들에게 의지하기 말기를 바란다. 그들의 뛰어난 재능은 우리에게 어떤 실마리를 가르쳐주기는 하지만, 그들은 실패한 자들임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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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의 노래 - 10점
김훈 지음/생각의나무



김훈(지음), <<칼의 노래>>, 생각의 나무




내 몸 속에, 내 가슴 속에 죽여야 할 것들이 너무 많아, 소설의 짧고 단단한 문장들 틈 속에서 소리죽여 울어야만했다. 하지만 죽여야할 것들은 죽임을 당하기 전에 내 몸 속, 내 가슴 속에서 날 공격했고, 소설 속 화자인 이순신이 죽여간 왜며, 부하며, 조선포로며, 전과를 말해주기 위해 짤려져, 소금에 절여진 머리통 위로 내 얼굴이 떠올랐다.

말은 비에 젖고
청춘은 피로 젖는구나

젊은 왜가 칼에 새겨놓은 저 글귀는 이내 내 영혼을 파고들고, 나를 버려도 내 육체를 버리지못함이 한없이 슬프고 내 몸짓들의 까닭없는 부정들이 날 공포 속으로 밀어붙인다.

"사랑이여 아득한 적이여, 너의 모든 생명의 함대는 바람 불고 물결 높은 날 내 마지막 바다 노량으로 오라, 오라, 내 거기서 한줄기 일자진(一字陣)으로 적을 맞으리."

짧게 소설가 김 훈에 대해서 생각했고 조금 길게 이순신에 대해 생각했고 소설을 읽으면서 내내 피로 물드는 전쟁과 인생의 무의미함과 사랑, 그 아득한 적에 대해서 생각했다. 그리고 늘 그렇듯이 답이란 없었고 내일은 아무도 모르는 것이었다.

말이 길어지면 요점이 흘려지고 인생은 미궁 속으로 빠져 헤매이게 된다. 그러니 말은 짧고 수사는 최대한 억제해야만 한다. 그러면 요점은 분명해지고 인생은 제 갈 길을 가는 것처럼 보인다. 그런데 분명한 요점은 무엇이며 제 갈 길을 가는 인생이란 과연 무얼까.

이 소설 속의 이순신의 독백 사이로 김훈의 목소리가 들리는 것은 이 때문이다. 앞만 쳐다보고 가는 문장들. 그래서 베어지고 억제되고 간결해지면서 스무살 처녀의 몸매처럼 아름답지만 까닭 없이 슬퍼지는 건, 왜 앞으로 가는가에 대해 이순신도 모르고 김훈도 모르기 때문이다.

아주 오랜만에 소설을 읽으면서 울었다. 내 가슴 속 죽여야할 적들을 죽이지 못함을, 이 소설은 함께 울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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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전에 검색을 하던 중... 지하련님이 칼의 노래에 대한 서평을 쓰셨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일부러 읽지 않았습니다. 지하련님의 글에 압도될까봐요 ^^;; 그래서 제 서평을 쓰고 와서 읽었습니다. 먼저 읽지 않길 잘 했습니다 ^^

    저도 소설을 읽으며 이순신 장군과 김훈 작가를 생각했습니다. 저는 오히려 김훈 작가에 대해 더 많이 생각을 한 것 같네요. 일년쯤 지나 다시 한번 읽고 싶은 책입니다.



나의 미카엘 - 10점
아모스 오즈 지음, 최창모 옮김/민음사



내가 이 글을 쓰는 것은 내가 사랑하던 사람들이 죽었기 때문이다. 내가 이 글을 쓰는 것은 어렸을 때는 내게 사랑하는 힘이 넘쳤지만 이제는 그 사랑하는 힘이 죽어가고 있기 때문이다. 나는 죽고 싶지 않다.
- p.7

하지만 한나는 죽는다. 그녀의 사랑하던 힘이 죽고 그녀의 기억들이 죽고 그녀의 꿈들이 죽는다. 그녀가 간직하고 있었던 모든 사랑과 모든 기억들로부터 떠남으로써 그녀는 나에게, 혹은 우리들에게 그녀의 슬픈 죽음의 날개를 보여준다. 그런데 그 검은 날개가 눈에 익다. 우리들의 눈에 익숙한 그녀의 검은 날개.

때때로 증명할 수 없는 물음들이 우리들을 인생의 고통 속으로 빠뜨리곤 한다. 꼭 ‘넌 날 사랑하니’라는, 그 어떤 대답으로도 채워지지 못하는 깊은 정답의 우물을 채우기 위해 지쳐 가는, 그래서 끝내 헤어지고 마는 戀人들처럼.

한나는 언제나 꿈을 꾼다. 꿈 속에서 그녀는 공주이지만, 갑자기 生의 포로가 되어 쫓기기도 한다. 그러나 미카엘, 나의 미카엘은 언제나 침착하고, 합리적이며, 조심스럽다. 그는 언제나 한나를 위해 성실한 몸짓을 보여준다. 그 성실함이 한나는 너무도 싫다. 아니 그것이 부럽다. 아무 것도 증명해 줄 수 없는 이 세상 속에서 그토록 성실하고 합리적일 수 있다는 자체가 부럽다. 그 성실함에 대한 질투가 한나로 하여금 늘 꿈 속으로 도망치게 한다. 하지만 이제 한나는 꿈을 꾸지 않기로 했다. 왜냐면 그토록 자신의 생을 억누르고 있던 사랑의 힘을 포기하기로 했기 때문에.

아모스 오즈가 29살에 쓴 이 소설은 뜨거운 여름 햇살 속에 숨어 있다가 갑자기 視線을 먹어버리는 자외선과도 같다. 그래서 이 소설을 읽기 위해선 ‘난 사랑 따윈 믿지 않아’라는 상표의 선글라스가 필요하다. 이 선글라스를 가지고 이 소설을 읽는 사람이라면 『나의 미카엘』은 너무나도 행복한 소설이다. ‘그것 봐, 사랑은 믿을 수 없는 거야, 한나’라면서 웃을 수 있기 때문에. 그러나 난 이 선글라스는 한 여자의 생일선물로 줘버렸고, 이젠 없다. ‘나도 죽고 싶지 않다’라면서 한나의 목소리에 내 목소리를 싣는다. 나도 사랑을 하고 싶지만, 사랑할 힘이 이젠 남아 있지 않다. 어느 老詩人의 ‘사랑할 시간이 많지 않다’라는 시집제목은 얼마나 행복한 속삭임인가. 하지만 한때 사랑하는 힘이 넘쳤던 사람에게 사랑을 믿지 말라는 소리는 죽음을 뜻한다. 한나의 꺼져가는 목소리는 4월의 흐린 창가에서 부서지는 내 잃어버린 사랑의 소리와 닮아 있다. 그래서 나도 한나와 함께,


나는 지나친 요구를 하지 않는다. 저 유리만 투명했으면, 그것이 전부다.
- p. 1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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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수 (양장) - 10점
파트리크 쥐스킨트 지음, 강명순 옮김/열린책들


향수 - 어느 살인자의 이야기
파트리크 쥐스킨트 지음. 열린책들



이 소설을 읽은 독자들이 한결같이 열광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내가 읽기엔 너무 끔찍스러운 이 소설은 영웅주의와 유미주의가 뒤섞인 채, 인간에 대한 혐오와 자기 파괴로 일관되어 있다. 그르누이는 이 소설이 시작할 때부터 인간이 아니었다. 그르누이적 세계-냄새로만 자기 정체성이 구성되는 세계 속에서 그르누이는 인간의 냄새를 가지지 못했기 때문에 인간이 아니다. 인간이 아닌 자라는 정체성은 그가 바로 신적인 지위에 있는 존재라는 것은 소설의 시작부터 은근히 암시하고 있는 셈이다.

그러면서 그르누이는 향수 제조인으로서의, 비평적 용어로 말하자면 예술가 소설의 전형적인 주인공에 속한다. 자신을 매혹시키는 향기를 소유하기 위해 그가 하는 행동은 극단적 유미주의로서 '아름다움' 이 외에 이 세상의 절대적 규범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준다.

하지만 이 소설은 독자들에게 당신들도 그르누이가 혐오하는 인간들 중의 한 명이며 그래서 그르누이가 당신의 옆으로 지나갈 때, 그르누이가 쳐놓은 향기의 저주 속으로 빨려들어갈 것이며 그르누이의 영혼을 알지 못할 것이라며 끝없는 조롱과 저주를 퍼붓고 있다. 이것은 쥐스킨트가 바로 독자에게 퍼붓는 독설인 셈이다.

너무 우습지 않은가. 이 소설을 읽고 열광하는 독자들의 어리석음이란. 난 이 소설이 끔찍하기 그지없는데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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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홀한 밤Enchanted Night>>, 스티븐 밀하우저 Steven Millhauser, 1999.(윤희기 옮김, 아침나라, 2000)


짧고 서정적인 문장. 하지만 소설의 첫 장이 불러일으키는 감동은 그렇게 오래 가지 않는다. 왜냐면 어느 여름 밤의 풍경을 병렬적으로 나열해놓았을 뿐, 어떤 스토리나 사연을 가지고 있지 못하기 때문이다.

밤의 합창

이 밤은 계시의 밤. 인형들이 깨우는 밤. 다락방 몽상가의 밤.
숲에서 피리 부는 자의 밤.
(11쪽)

문장 하나 하나는 간결하고 깊다. 영어로 된 원작을 읽고 싶어진다. 그러나 소설이 가져야하는 미덕을 이 소설은 갖추지 못했으니 선뜻 누군가에게 추천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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빵굽는 타자기 - 8점
폴 오스터 지음, 김석희 옮김/열린책들


빵굽는 타자기
폴 오스터(지음), 열린책들


우리 시대는 근대 개인주의의 어떤 극점에 와 있다. 그리고 그 개인주의를 기반으로 하고 있는 소설가가 바로 폴 오스터이다. 그는 어떤 인도주의나 어떤 정치적 이데올로기를 대변하지 않고, 아니 그런 것들에 심한 경멸감을 내비치면서 누군가에 대해 이야기하는 작가이다. 그래서 한 순간도 냉정을 잃지 않으며 감정의 쓰잘데기 없는 부분을 보이지 않는다. 그래서 그의 글은 차가우며 어떤 점에선 매우 매력적이고 부럽기까지 하다. 그러나 문제는 여기에서 생긴다. 이것은 과연 미덕인가, 악덕인가.

<빵 굽는 타자기>는 폴 오스터의 자서전 비슷한 것이지만, 꼭 자서전이라고 말하기도 어렵다. 누가 알겠는가. 허구일지. 따지고 보면 진실에 기반한 자서전이란 없는 셈이다. '진실'이란 없는 것일지도 모르기 때문에.

<빵 굽는 타자기> 속의 '나'는 글을 쓰는 사람이다. 그러나 그가 글을 어떻게 쓰고 어떤 고민을 하는가 따위는 나오지 않는다. 문장이나 혹은 세계관 따위, 우리가, 흔히 예상하는 그런 것들은 나오지 않는 것이다. 나오는 것은 작중 화자인 '나'가 겪는 인물들과 사건들에 대한 것이다. 그러나 그 인물들과 사건들은 어떤 극적 요소를 지니고 있는 것은 아니다. 그 전에 나의 시선에 의해 걸러지기 때문에 독자들은 그 인물과 사건들에 대해서 어떤 평가를 내릴 수 없다. 즉 독자는 작가가 던져주는 평가에 만족해야 한다. 매우 권위적인 방식이다. 그러나 그것이 사라진다면 이 책은 아마 쓰레기들 중의 하나가 되었을 것이다. 그러니 이것을 악덕이라고 부를 수도 없다.

문제는 우리 시대가 폴 오스터의 세계를 인정하고 있다는 것이다. 오직 '나'만이 존재하는 시대. 그 끝은 어디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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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에 나오는 희곡 세 편은 읽지 않았다. <로렐과 하디, 천국에 가다>,<정전>, <숨바꼭질>. 재미있어 보이진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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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일지(지음), <<새>>, 민음사, 1999.





과연 우리들은 우리들의 바램대로 행동하고 말하는가? 오늘날의 우리들은 고작 스스로 결정 내리고 자신의 의지대로 행동하고 있다고 믿고 싶어할 뿐이다. 그리고 이 욕망(믿고 싶어함)은 거대하고 천박하기 그지없는 현대의 문화를 만들어내고 있다. 왜냐면 진실을 숨길 수 있는 건 새로운 거짓말이기 때문에. 거짓된 사랑, 거짓된 행복을 진실이라고 믿음으로서 우리들은 우리들의 욕망을 채우고 있는 것이다. 끊임없이 스스로에게 이것이 진실이라며 최면을 걸면서 하루하루를 살고 있는 것이다. 이로 인해 현대의 키치는 나름대로의 의미를 획득한다. 그 의미가 거짓이며 자기기만이더라도 우리들은 키치 속에 파묻혀 살아가는 것이 적어도 덜 고통스럽고 덜 외롭기 때문이다.

이 소설에서 '새'는 A의 운명을 뜻한다. 그리고 그 운명 이란 소설의 시작부터 정해져 있었던 것. 그래서 이 소설 속의 그 누구도 운명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모두 이미 정해 진 자리에 서있을 뿐, 독자는 정해져 있는 소설을 읽을 뿐 이다. 이 소설에서 가장 흥미진진한 부분이란 A가 몇 몇의 여자들을 정해져 있는 순서대로 만나 몸을 껴앉고 키스를 하는 곳이며, 그 외의 부분이란 아무런 의미도 가지지 못한 다. 왜냐면 그만큼 A의 인생이, 우리들의 삶이 아무런 의미 도 가지지 못하기 때문에.

아마 몇 명의 평론가들은 이 소설이 현실과 가상의 세계가 뒤엉켜있다고 하겠지만(그러면서 자신들의 현학적 취미를 뽐내겠지만), 과연 그 가상의 세계가 현실과 얼마나 멀리 떨어져 있는 곳일까? 불행하게도 이러한 구분은 이 소설에서 아무런 쓸모도 지니지 못한다. 이미 A의 운명을 정해져 있었고 그것을 벗어나는 방법이란 아무 것도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A의 모든 행동들이란 외부의 사건에 대한 반발작용임으로 해서 바깥의 세상은 더욱 철저하게 A를 정해진 게임의 규칙 속으로 밀어 넣을 뿐이다.

결국 우리들은 한 마리의 새들이다. 각각 정해져 있는 길 위에 서서 끊임없이 새와 부딪히며 결국 새가 되었거나 될 것이다. 돌아가야 할 가족이 있다거나 도망치고 싶은 현 실이 있다거나, 현실의 그 어떤 것이 자신의 행동을 규정하 는 순간 우리는 어쩔 수 없이 검은 새가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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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프랑스와 모리악, 『바리사이 여인』, 안응렬 옮김, 삼성출판사, 1988.


우리는 우리의 불같은 정념이 우리의 삶에 어떤 고통을 안길 것임을 안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얼음 같은 이성도 우리의 삶에 그러할 것임을 안다. 그러니 우리의 삶 전체는 어떤 고통의 그림자로 덮여있는 것이다. 하지만 그 그림자를 깨닫기란 얼마나 힘든 일인가.

우리의 믿음이 유한한 인간의 어리석음에 기초하고 있고 우리의 사랑이 자신의 씨를 퍼뜨리기 위한 본능에 기초하고 있다는 사실은 얼마나 끔찍한 불행인가.

타인을 알기 힘든 만큼, 아니 그것보다 자신을 알기란 더 힘든 것이다. 자신의 믿음은 더욱더. 인생의 황혼이 어떤 고독과 고요함 속에 묻히는 이유는 자신의 거짓을 하나하나 깨닫기 때문이다. 하지만 브리지뜨의 강철같은 믿음은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생의 고통 속으로 밀어 넣었는가.

우리의 눈과 입이 어떤 미망(迷妄) 속에 있을 때, 우리는 우리의 죄악마저도 품에 안고 길을 가야만 한다. 악만이 악을 낳는다고 여기지만 우리의 선한 사랑도, 선한 믿음도 죄악을 낳을 수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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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프카의 아포리즘』, 이윤택 엮음, 청하, 1989.


아포리즘을 가지고 뭔가 논리적인 이야기를 한다면 그것은 잘못된 방식이다. 왜냐면 아포리즘으로 문학적 완성도를 논할 수 없으며 단지 작가의 세계에 대한 짤막한 평만을 할 수 있는데, 이것마저도 다른 작품들을 거론함으로서만 가능하다. 그리고 그렇게 할 때 작품이 주가 되고 이 아포리즘은 참조 사항이 되어야 할 것이다. 그러니 이 글은 고작 책에 대한 값어치 없는 짧은 감상에 지나지 않게 될 것이다.

때때로 길을 가다 자신과 똑같은 버릇이나 습관을 지닌 사람을 만난다. 그리고 사랑에 빠진 이들은 서로의 공통적인 버릇이나 습관을 발견하는 순간 어리석은 그물로 그들의 영혼을 둘둘 만다. 공통점을 가진다는 것은 우리가 인간이라는 사실을 한 번 더 말해주며 이 분류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을 다시 한 번 상기시킨다. 그리고 카프카의 아포리즘을 읽는 우리는 그것으로 인해 고통받는다. 카프카의 고독과 우울이 그리 멀지 않은 장소에 서서 나를 바라보고 있는 것을 알아채는 순간 삶은 화려한 봄날의 빛깔을 잃어버리고 뛰어난 작가의 불행한 삶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것이다.

죽는 것보다 살아가는 것이 더 쉽고 절망하기보다는 희망을 가지는 것이 더 쉽다. 이 얼마나 끔찍한 생의 저주인가. 그래서 우리는 죽은 사람들을, 절망한 사람들을, 그 속에서 벌벌 떨며 자신의 고독과 마주한 사람들을 옆에 두기를 바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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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스타프 김의 슬픈 바다> - 문화일보 2000년 신춘문예 소설 당선작
읽고 난 다음 커피를 끓이고 있는 동안, 그 짧은 동안 이 소설에 대한 나의 평가는 달라졌다. 아니 그것보다는 막상 이 소설에 대한 감상이나마 짧게 기록해두기 위해 자리에 앉는 순간 달라졌는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그 이유는 무엇일까? 읽고 난 다음에는 '매우 재미있는 소설'이라는 생각했으나 지금 달라진 이유는 무엇일까?

'소설은 무엇보다도 재미있어야 한다'라고 말했을 때, 그것은 대중소설들의 '표피적 재미'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표피적 재미로 따지자면 엄청난 자본력으로 만들어지는 할리우드 영화가 가장 재미있을 것이며 매일 저녁마다 집집의 티브이 브라운관을 채우는 오락 프로그램들도 표피적 재미에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것이다. 그래서 소설이 이런 뉴의 문화들과 대결하고자 하는 순간 소설의 자신의 자리를 잃고 그간 지켜왔던 문학의 자리를 상실할 것이다. 가끔 소설가들이나 문학평론가들이 모여 대담을 하는 자리에서 ‘대중들에게 보다 더 가까이 다가가는 문학이 나와야 된다’라는 등의 말이 오고 가지만, 정말로 그렇게 해야만 될까? 언제나 대중들이 옳은 것일까? 나는 문학의 엘리트주의를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그들이 약간만 정직하게 우리의 삶이 어디로 흘러가고 있는가를 살펴본다면 그런 류의 말을 하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이 소설은 사건의 결과부터 먼저 제시하면서 시작된다. 그리고 또한 망명한 북의 외교관을 중심으로 이루어지기 때문에 독자의 눈을 쉽게 잡아끈다. 왜냐면 이것은 전형적인 추리소설의 방식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소설에는 사건의 추리는 등장하지 않고 약간 지루해 보이는 작중 화자의 회상이 주를 이룬다. 또한 이 소설의 낭만주의는 서툴고 사소해 보이기까지 않다. 그러나 신춘문예란 말 그대로 신인들의 무대이고 작품의 완성도보다는 이 소설가가 얼마만큼 가능성이 있는가를 알아보는 장이라는 이유로 이 소설은 그 만큼의 가능성은 가지고 있다라고 여겨진다. 무엇보다 낯선 소재를 끌고 나가는 힘을 지니고 있으며 서툰 낭만주의이지만 인물들의 심리를 정직하게 드러내었고 자칫 무거운 분위기로 나갈 수 있는 사건의 무게를 잘 조절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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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재하지 않는 기사 - 10점
이탈로 칼비노 지음, 이현경 옮김/민음사



존재하지 않는 기사, 이탈로 칼비노, 민음사


1.
모든 것들이 '희극'으로 결론 나는 이 소설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행복한 결말'이라고 말하지는 못할 것이다. 왜냐면 '존재하지 않는 자'에 의해 존재하는 자들(우리들)은 '의미'를 가지기 때문이다. 그리고 동시에 존재하지 않는 자로 인해 의미를 가졌기 때문에, 그 의미란 '자기기만'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소설은 우리에게 말하고 있다. 그러나 그것이 '자기기만'이라 하더라도 '사랑'은 그만큼 가치가 있는 것일까?

현대란 보이는 세계의 화려함과 편리함, 또는 현란함 속에서 보이지 않는 세계의 힘에 의해서 아슬아슬하게 지탱되는 시대이다. 그리고 이 아슬아슬한 지탱이 얼마 가지 못할 것임을 알고 있다. 마치 존재하지 않는 기사가 그 존재를 유지해 나가듯이 말이다. 그리고 이럴 경우 우리 인간들이란 그 아슬아슬함과 비례하는 만큼의 허황된 희망을 품는데, '포스트모던 사회'란 바로 그런 허황된 희망으로 축조된 사회이고 포스트모던 사회 속의 우리들은 그 희망이 우리들에게 아무런 것도 던져주지 못할 것임을 알면서도 그러지 않을 경우 더 끔찍한 상황 속으로 내몰리는 까닭에 끊임없이 그 희망을 소비해야만 하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존재하지 않는 기사'란 매우 상징적인 인물로 떠오른다.

존재하지 않는 기사는 자신이 존재하지 않음을 증명하는 방법으로 '존재함'을 택한다. 그러나 이것은 정확하게 말해 불가능한 것이다. 꼭 꿈 속의 소녀를 잊지못해 그 소녀를 그리며 그 소녀가 현실 속으로 걸어나오길 바라는 젊은 화가의 바램만큼이나 불가능한 것이다. 그래서 이 바램이 이루어지는 유일한 방법이란 현실 속의 누군가를 꿈 속의 소녀라고 믿는 것뿐이다. 그러나 그 믿음이란 과연 가능할까? 그래서 존재하지 않는 기사는 계속 자신의 존재를 유지해나갈 수 있을까?

2.
"천만에! 모두 꾸며낸거야. ... ... 그는 존재하지 않아. 그가 하는 행동도 말도 아무 것도, 아무 것도 존재하지 않아. ... ..."라고 말하는 토리스몬도는 그가 말하는 그 순간까지만 정당하고 그 이후로는 그 어떤 정당성도 가지지 못한다. 그가 믿는 성배기사단도, 그가 믿는 어머니도, 그가 믿는 신념도, 그런 의미에서 그는 '근대적 인간'을 표상하고 있는 셈이다. 꼭 존재하지 않는 기사가 존재하듯이 그가 믿는 바도 그와 비슷하게 존재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결국 근대적 인간들로서 우리가 믿고 있는 그 모든 것들이 '존재하지 않는 기사'인 셈이다.

구르둘루는 존재하지 않는 기사와의 대비로 인해 매우 흥미롭다. 하지만 애초부터 실패한 인물이다. 왜냐면 그는 '존재하기는 하지만 자기가 존재한다는 것을 모르는 자'임에도 불구하고 소설의 서사를 위해 그는 아질울프의 명령에 따르며 동시에 그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끊임없이 되새기게 되기 때문이다. 애초부터 사유로서만 존재하는 자와 연장으로만 존재하여 자연의 모든 대상과 자신을 동일시하는 자와의 만남에서 우리는 어쩔 수 없이 사유의 승리를 다시 보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브라다만테는 자신의 이상을 위해 불가능한 사랑을 꿈꾸며 계속 존재하지 않는 기사를 쫓는다. 그리고 프리쉴라는 오직 언어로만 존재하는 자에게 매혹당한 채 "그 사람은 남자야, 진짜 남자야, ... ... 하룻밤 내내 천국이었어......"라고 말하고 만다.

자신의 존재를 알지 못하고 칸트적 의미에서의 즉자(en soi)로서만 구르둘루는 존재하지 않는 기사 앞에선 자신의 존재를 때때로 깨달으며, 브라다만테와 프리쉴라는 존재하지 않는 남자에게 빠지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들도 소설을 읽어나가면 존재하지 않는 기사에게 매혹당하기 시작한다.

하지만 어떤 기사와 싸워도 이길 것처럼 보이던 아질울프는 자신의 존재가 거짓에 기초하고 있다는 사실을 토리스몬도에게서 듣고는 그것이 거짓이 아님을 증명하기 위해 소프로니아를 찾아나서지만 시간은 그의 편이 아니었다. 브라다만테가 사랑하였고 프리쉴라가 매혹당했으며 그 어떤 전투도 그의 하얀 갑옷에 흠집 하나 만들지 못했던 위대한 기사가 한 사람의 잘못된 믿음으로 인해 영혼에 깊은 상처입고 사라지는 것이다.

그리고 람발도는 '투구를 향해, 갑옷을 향해, 떡갈나무를 향해, 하늘을 향해 몸을 돌리며 아질울프를 불렀'지만, "기사님! 갑옷을 입으세요! 프랑스 군대와 귀족 사회에서 기사님의 지위는 분명해졌습니다!"라고, "기사님, 당신은 존재합니다, 이제 어느 누구도 그 사실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라고 외쳤지만, '갑옷은 똑바로 서 있지 못했고 투구는 땅에 굴러떨어'지는 것이다.

3.
존재하지 않는 기사가 남긴 <이 갑옷을 로실리오네의 기사 람발도에게 남기노라.>라는 쪽지는 존재하지 않았지만 존재했던 근대의 신념이 탈근대의 우리들에게 무엇을 요구하고 있는가를 말하고 있다. 그래서 람발도는 그 하얀 갑옷을 입었고 그녀 앞에, 브라다만테 앞에 선다. 그리고 그를 아질울프라고 믿는, "드디어 당신이 저를 찾아 달려오시는군요, 잡히지 않는 기사님!"라고 소리치는 브라다만테는 람발도라는 사실을 알고는 놀라 수녀원으로 들어간다. 그리고 이 순간, 소설 속 이 소설을 써나가는 수녀가 브라다만테라는 사실을 드러나는 순간, 모든 사건들은 허구의 미로 속으로 사라져버린다.

그리고 우리는 이제 람발도가 그 존재하지 않는 기사가 되었다는 사실을 인정해야할 것이다. 그는 달려오는 브라다만테에게 '나 역시 서투르게 행동하는 그런 남자의 하나에 불과하다는 걸 넌 모르겠지? 행동을 할 때마다 욕망이나 불만족이나 불안을 조금도 숨기지 못하는 그런 남자라는 걸 넌 모르겠지? 내가 바라는 것 역시 자신이 원하는 게 뭔지 아는 사람이 되는 거야!'라고, 거짓없이 무언가에 충실하다는 사실만으로 우리들과 똑같이 존재하는 그 기사에게 희망을 걸어야할 것이다. 수녀가 된 브라다만테의, 람발도를 향한 사랑이 거짓으로 드러나더라도, 아마 사랑에 눈먼 어리석은 몸짓으로 람발도가 계속 그의 생을 꾸려나가기를 희망하면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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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체의 악마 - 10점
레이몽 라디게 지음, 김예령 옮김/문학과지성사




육체의 악마
, 레이몽 라디게(지음), 문학과 지성사




1. Passion

불같이 활활 타오르던 사랑이 식지 못한 채 여러 차례의 깊은 계곡을 통과한 다음, 끔찍한 파국을 맞이하게 되는 것은 그 사랑의 정념이 사악하기 때문일까? 혹은 불륜을 지속시키기 위해, 부도덕을 도덕으로 위장하기 위해, 그 순수한 사랑은 그 사랑을 타인들에게 숨겼다는, 그것만으로도 자신들의 사랑이 허약하다는 충분한 이유가 될 수 있다는 사실 때문에 스스로 상처 입은 것일까?

2. 불륜

나에게, 혹은 이 소설을 읽고 잔인한 쾌감, 아마 아리스토텔레스라면 자신만만하게 '카타르시스'라고 말했을 그런 쾌감을 느끼는 사람들 모두 도덕과는 거리가 먼 사람들일까? 그러나 불행하게도 '도덕적인 사랑'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왜냐면 모든 사랑이 모험이며 불륜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것의 반대편에 거짓과 기만으로 가득한 사회를 지속시키고자 하는 '결혼'이라는 제도가 존재한다.

15살의 나는 19살의 마르트와 밤을 보내며 사랑을 찬미한다. 그러는 동안 어두운 밤하늘 아래 별빛들을 엮어, 쓸쓸한 전장(戰場) 위에서 자크는 혼자 신혼의 집에 남겨진 아내의 얼굴을 그릴 것이다. 그리고는 기필코 이 전쟁에서 살아남아 사랑스런 마르트와의 행복한 결혼 생활을 꿈꾸는 것이다.

3. 행복

그녀는 머리를 저었다. "널 알기 전에 난 행복했어. 난 내가 약혼자를 사랑한다고 생각했고 그가 나를 잘 이해하지 못해도 용서했지. 그런데 내가 그 사람을 사랑하지 않는다는 걸 내게 가르쳐준 사람이 바로 너야. 내 의무는 네가 생각하는 그런 게 아냐. 내 의무란 내 남편한테 거짓말하지 않는 게 아니라 너한테 거짓말을 하지 않는 거야. 가. 그리고 내가 못된 사람이라고 생각하지마. 넌 곧 나를 잊을 거야. 네 인생에 불행을 초래하고 싶지 않아. 내가 왜 우는데. 너보다 나이가 많기 때문이야."(p.67)

길거리 위에서 사랑에 빠진 그들은 그들의 사랑과 적대적인 세상을 속이기 위해 남매처럼 행동한다. 하지만 임신한 마르트와 뱃속의 아이의 아버지라고 하기엔 아직 어린 16살의 나. 사랑을 속이지 않기 위해 세상을 속여야만 했고, 세상 속에 남아있기 위해 사랑을 속여야만 하는, 사회적 통념 하에서 허락되지 않고 오직 수다스런 여자들의 호기심 어린 시선의 대상일 뿐인 사랑. 그리고 그 사랑은 사랑한다는 이유만으로 스스로에게 상처 입히면서 파국을 향해 간다. 하지만 마르트는 불안해하는 나를 향해,

"나는, 너랑 있으면서 불행한 편이 그 사람과 있으면서 행복한 편보다 좋아."(p.162)

4. 존재이유(rasion d'^etre)

이 세상엔 사랑이란 없고 사랑에 속아넘어가는 사람들만 있을 뿐이다. 그리고 한껏 우아하고 아름다운 포즈를 연출하기 위해 자신의 영혼을 속이고 그 사랑이 진실이라고 믿고 싶어할 것이다. 마르트가 죽고, 16살의 나는 자신 앞에 놓여진 세상이 그 순간 빛을 잃고 침묵하며 아무 것도 아닌 것(無)으로 내려앉는 것을 바라본다. 그리고 남의 아이를 자기 아이라고 믿는 순진한 자크는 그 아이가 자신의 존재이유라고 말한다. 그렇다. 우리들의 사랑은 죽었고 그 사랑 때문에 우리들은 적이 되며 그 사랑을 죽인 세상은 오늘도 역겨운 사랑을 노래한다. 그리고 우리들 중 몇몇은 우리들이 추구할 것은 '사랑'이 아닌 '사랑의 행위'이고 그 속에서 '사랑'을 발견할 수 있으리라 믿는 것이다. (끝내 발견하지 못할 것임에도 불구하고, 너무나도 희망적인 우리들 중의 일부는 그렇게 믿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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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아하고 감상적인 일본야구 - 10점
다카하시 겐이치로 지음, 박혜성 옮김/웅진지식하우스(웅진닷컴)



<<우아하고 감상적인 일본야구>>, 다카하시 겐이치로 지음, 박혜성 옮김, 웅진출판, 1995
(* <20세기 일문학의 발견> 시리즈의 열번째 권).





1.
이 소설에 대한 감상문으로 적당한 문장은 이러하다. “다카하시 겐이치로라는 일본의 변태적 허구를 즐기는 작가가 쓴 소설을 읽었는데 말이야, 도통 무슨 말인지 모르겠어. 그런데 녀석 소설 하나를 잘 쓰더군. 뭐, 무슨 말인지도 모르는 소설을 읽고 잘 쓴다라는 따위의 말을 하는 것이 이상하긴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 다카하시 겐이치로라는 녀석이 ‘변태’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사라지는 건 아니야.” 하지만 이런 문장은 이 소설을 소개하는 글의 문장으론 적당하지 않다.

2.
소설 뒤에 붙은 박유하 교수의 해설은 이 소설의 이해에 별 도움이 되지 못한다. 그는, 고진의 책 <<일본근대문학의 기원>>을 번역한 사람이라는 것을 강조하기라도 하듯, 해설의 여기저기에 고진의 단어들을 아무런 꺼리낌없이 사용하고 있다. 하지만 과연 그런 단어들이 겐이치로의 소설을 말하는데 적당한가에 대해선 아무런 고민을 하지 않은 듯 보인다.

3.
이 소설을 읽으면서, ‘어떤 미친 놈이 이상한 소설 하나를 썼군’라고 생각하면서 즐겁게 웃었다면 이 소설을 정확하게 이해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즉 일반적으로 소설에게서 기대되어지는 것들-탁월한 문장력과 감동이나 교훈-은 이 소설에는 해당되지 않는다. 그야말로 스스로 쓰레기가 되기를 자처한 소설이다. 하지만 이러한 ‘자발적으로 키취화하려는 태도’로써 정반대의 효과를 이끌어내고 있다. 그래서 과연 오늘날의 야구가 과연 ‘우아하고 감상적’일 수 있는가하는 의문까지 가지게 한다. 그리고 동시에 오늘날의 소설들에 대해서까지도 ‘소설은 어떠해야 하는가’따위의 의문을 품게 만든다.

굳이 이 소설을 분류하자면 ‘메타픽션’쯤에 갖다 놓을 수 있는데, 왜냐면 이 소설은 소설쓰기에 대해서 근본적인 의문을 품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작가는 소설을 의도적으로 엉망으로 만들고 있다. 말도 되지 않는 것이 분명함에도 불구하고 카프카를 야구와 연관시키며, 그리고 소설 속의 모든 인물과 소재들은 야구를 향해 전속력으로 질주한다. 하지만 그 향해한 장소엔 야구는 존재하지 않는데, 소설 속 시점(時點)에서도 야구는 이미 존재하지 않는 것으로 나오며 또한 소설 속 인물들이 추구하는 야구라는 것은 우리가 알고 있는 야구와는 다른 야구이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다카하시 겐이치로가 이 소설을 쓰면서 가장 염두에 두었던 의도가 드러난다. 그걸 한 문장으로 말하자면 ‘적극적으로 말이 되지 않게 하기’이다. 그리고 이것은 소설에 대해서 일반적으로 가지고 있었던 기존의 생각과는 정반대되는 입장이다. 또한 소설은 어떤 유기적인 구조나 통일성을 결하고 있다. 이것은 구체적 형태의 야구의 부재와도 연관된다.

4.
이 소설은 전반적으로 세계에 대한 우리들의 ‘태도’에 대해서 묻고 있다. 소설 속 등장인물들이 야구에 대한 가지고 있는 태도들이 모여 분명 존재하지 않는 야구이지만, 이전과는 다른 새로운 야구(에 대한 태도)를 구성하고 있는 것처럼 그러한 태도의 변화를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소설에 대해서도, 이 세상에 대해서도 말이다. 하지만 궁극적으로 어떤 태도에서 어떤 태도로의 변화를 의미하는지는 분명하게 언급하지는 않지만, 그리고 이것이 이 소설의 약점이 될 수도 있겠지만, 글쓰기가 ‘마스터베이션’에 불과할 수도 있다라는 것을 다카하시 겐이치로는 분명하게 증명해내고 있다. 그러나 마스터베이션을 하고 난 다음 가지게 되는 허무나 자질구레한 감정 따위를 보여주지 않는다는 점에서 이 소설은 무언가를 우리에게 언급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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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洪水Le De'luge』, 르 클레지오 지음(* 이휘영  옮김), 동문선.
     1988.

           

        * 그대들은 죽음을 모르고 있다 *


        익명성: 이것은 누구나 혼잡한 거리에서 느낄 수 있는 현대 도시의
     비극적 특성들 중의 하나이다.  작품의 주인공인 프랑소와 베송은  이
     익명성 속에 자신을 파묻는다. 그래서, 소설은 프랑소와  베송의 뒤를
     따라다니며 전개되지만, 프랑소와 베송은 그렇게 두드러지게 나타나지
     않고, 도리어 그가 보는 사람들, 거리들, 풍경들만 독자의  눈동자 속
     으로 들어온다. 그리고 주인공 대신 독자의 눈동자 속에  들어온 사람
     들, 거리들, 풍경들에서 독자는 르 클레지오 특유의  서정적인 분위기
     를 제외하곤 아무런 것도 얻을 수 없다. 특별한 사건도,  특별한 줄거
     리도, 특별한 인물도 없으며, 아무 것도 특별하지 않은 공간 속을, 특
     별하지 않은 것들을 휩쓸고 지나가는 '홍수'뿐. '홍수' 속에선 그대도
     나도 어디있는지 알 수 없다. 나무조각이라도 잡아야  하건만, 물살이
     너무나 세차기 때문에 난 이미 지쳤고, 오직 죽음만을  기다리고 있을
     뿐이다. 프랑소와 베송은 그런 나이다. 오, 저주스런 오늘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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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투 - 10점
알랭 로브그리예 지음, 박이문·박희원 옮김/민음사


질투la jalousie
. 알랭 로브-그리예. (현대의  세계문학 9권. 범한출판사. 1988)
        
        
          * Pour Le Vide *
        
       
        01: 사라진 인물을 위하여
       
        그가 사라졌다. 그가 '소설  속에서' 사라졌다. 그는 소설  속에서
     주인공이었으며, 화자이며, 사건들의 중심에 있었지만, 지금  그는 소
     설 속에서 사라졌다. 그가 사라진 지점에서  <<질투>>라고 이름붙여진
     이 소설의 모든 비평적인 글들은 시작된다. 그러나, 그가 사라진 마당
     에, 비평적인 글들은 과연 소용있는 것일까?
       
        02: '질투'의 화신인 '그'
       
        그는 '질투'한다. 그의 아내에 대해. A는 그의 아내이다. 아니, 아
     내라고 추측할 뿐이다. 그가 소설 속에서 사라졌음으로, 그는  A에 대
     해 한 마디로 독자에게 하지 않음으로, 단지 그가 보고  있는 세계(표
     피表皮로서의 세계)를 그저 독자에게 보여주고 있을 뿐. A는  그의 정
     부일 수도 있다. 혹은 약혼녀일 수도 있다. 아니면, 그저 좋아하는 사
     람일 수도 있다. 그러나 이 가능성, 혹은 추측은 이  소설을 이해하는
     데 별로 도움되는 이야기는 아니다. 그가 사라진 마당에 이 소설을 이
     해한다는 것이 과연 독자에게 무엇을 던져 줄 수 있겠는가.
       
        03: '지네', 혹은 질투의 고조高潮
       
        '지네'의 등장과 지네를 둘러싼 서술의 변화는 그의 질투와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다. 
       
        (1)부엌문은 닫혀 있다. 그 문과 복도의 활짝 열린 입구 사이에 지
     네가 있다. 커다란 지네로서, 이 지방에서 볼 수 있는 가장 큰놈 중의
     하나이다. 촉각을 뻗치고 거대한 다리를  쫙 펴면, 보통 크기의  접시
     표면을 거의 가릴 정도로 크다.
        (중략)
        지네는 이미 위험을 눈치챈 모양이다. 마치 무언가를  기다리고 있
     는 것처럼, 가만히 움직이지 않는다. 다만 촉각만  완만하고 연속적으
     로 올렸다 내렸다 하는 동작을 반복한다.
        (중략)
        (2)그 소리는 긴 머리칼  빗질하는 소리다. 비늘형의 빗살은  짙은
     갈색으로 반사하는 검고 숱이  많은 머리칼을 위아래로  오르내리면서
     머리 끝에 전기를 일으킴과 동시에, (중략).
        (3)두 개의 긴 촉각은 교대로 민첩하게 운동을 하고  있다. (중략)
     침묵 속에서 이따금 특징있는 소리가 들린다. 틀림없이 입의 부속기관
     에서 나오는 소리일 것이다.
        (4)프랑크는 묵묵히 일어나서 타월을 집어든다. 그것을  둘둘 말아
     서 살금살금 다가가더니 지네를 벽에다 눌러죽인다. 그리고 침실 바닥
     에서 그것을 발끝으로 비벼버린다.
        (중략)
        파란색으로 칠해진 박스형 자동차는 침엽수의 밑동에 충돌한다. 나
     무는 심한 쇼크에도 불구하고 거의 흔들리지 않는다.
        (5)즉시 화염에 솟는다. 자체  전부가 환하게 드러나고 탁탁  튀는
     소리와 함께 불이 번진다. 그것은 지네가 내는 소리다. 지네는 또다시
     벽 위 널빤지 가운데에서 가만히 움직이지 않는다.
        (6)조용히 귀를 기울이면 그 소리에는 탁탁 하는 소리와 함께 슈우
     슈우하는 소리도 섞여 있다. 빗은 지금 잘 빗겨진  머리칼을 미끄러져
     내려오고 있다.
        - 72쪽에서 74쪽(*번호는 필자가 붙인 것임).
       
        (1)지네의 등장과 그것의 소리는 (2)A가 빗질하는  소리이다. 그러
     나 다시 (3)지네가 내는 소리이다. 하지만, (4)프랭크는  지네를 죽인
     다. 그리고, 몇 개의 단락을 거쳐 프랭크의 차가 침엽수의  밑동에 충
     돌한다. 나무와 차가 부딪히는 소리. 불타는 소리.  (5)그러나 그것은
     지네가 움직이는 소리이다. (이미  죽은, 아니면 새로  등장한)지네의
     소리이다. (6)아니다. 그것은 A가 빗질하는 소리이다.
        그는 '질투'한다. 그의 질투에는 끝이 없다. 소설 속의  세계는 그
     가 바라보는 세계이지만, 그의 질투로 인해 그 세계는  일상적 서술의
     세계가 아니다.
       
        04: 다큐멘터리적 자아/비-다큐멘터리적 자아
       
        소설 속의 모든 인물들이 죽어 있다. 이 죽어 있음의  상태는 이전
     소설들-누보로망 이전의-과의 차이에 대한 표현이다. A는 그녀 스스로
     생각한 것을 서술하지 못한다. A는 그의 시선 속의 질투의 대상으로서
     의 한 객체일 뿐이다. 그것은 프랭크도 마찬가지다. 그는 지금 '질투'
     에 대한 일종의 다큐멘터리를 찍고 있다. 그의  시선은 '카메라'이다.
     하지만, 그 카메라는 지금 '질투'에 불타고 있다. 불타는 카메라는 다
     큐멘터리를 다큐멘터리 아닌 것으로 만들고 있다. 그래서,  소설 속의
     세계는 죽어 있는 세계이지만, 질투로 인하여  과거/현재가 뒤섞이고,
     객관적 사실/주관적 상상이 한데 어우러진다. 그것은  '질투에 불타는
     카메라'때문이다.
       
        05: 그가 사라졌다.
       
        그는 이 소설의 화자이며, 질투의 화신이다. 그는 이  소설의 숨겨
     진 작가이다. 하지만, 그 또한 소설 속 죽어 있는 세계 속의 일부분임
     으로 해서 죽어 있으며, 동시에 부재不在한다. 부재하는  인물을 통해
     이야기가 전개되는 이 소설은 '죽은' 소설이다. 그 어떤  극적인 면도
     없으며, 그 어떤 감동도 없다. 감동을 느끼려 한다면, 이 소설과 이전
     소설과의 차이라는, 소설사적인 이해뿐이다. 하지만, 이  이해는 얼마
     나 감동적인가! 그러나, 이것은 비평가적 입장-사치스럽고 부르조아적
     인-일 뿐이다. 보통의 독자에게는 이 소설은 수면제이거나, 그 비슷한
     것일 뿐이다.
       
        06: '죽어 있음'(不在)
       
        '죽음'이 이 세계 속에서 부재함을 뜻한다. 그것은 이 세계 속에서
     그 어떤 발언도 하지 못함을  뜻한다. 그러나, '죽어 있는  상태'로서
     이 세계에 참여(;발언)한다. 즉, 죽음은 이 세계 속에서  부재함을 뜻
     하지만, '죽음'이라는 두 글자로서 이 세계에 현존한다.  이것은 인식
     론적 세계와 존재론적 세계의  갈등을 의미한다. 그는 세계를  인식한
     다. 그러나, 그가 세계를 인식하는 방식은 전적으로 그의 두  눈과 두
     귀일 뿐이다(다큐멘터리적 인식). 그래서, 그는 A의  생각이나 프랭크
     의 생각을 읽어낼 수 없다. 단지, 그 읽어냄은 표피로서의  세계을 바
     라본 결과일 뿐, 이것은 그가 읽어낸 세계가 거짓일 수 있음을 의미한
     다. 하지만, 그의 존재는 A와  프랭크와의 삼각형의 한 지점에  있다.
     이 질투의 삼각형 속에서 그는  세계를 읽어낸다. 그래서, 그는  그가
     인식한 세계를 그가 존재하는 저점을  통해서 변형시킨다(비-다큐멘터
     리적).
       
        07: '사랑'에 대한 절망
       
        그는 그가 있는 세계 속에서 소외된 지점에 있다. 그것은 A가 그를
     사랑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절망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소설 속에서
     사라졌다. 하지만, 그는 A를 사랑한다.  이 사랑은 그의 질투를  낳고
     그 질투의 눈으로 그는 A와 프랭크를 바라본다.
       
        08: '버림받은 자'들을 위하여.
       
        그는 A에게 버림받았다고 생각한다(생각하는 모양이다). 동시에 이
     세계는 신에게서 버림받았다. 이 두 버림받음은 이 소설의  위치를 정
     해 준다. 그러나, 신은 이미 죽었고, A는 죽지 않았다.
        그는 사라졌다. 그는 소설 속에서 사라졌는데, 그 이유는 A가 그를
     사랑하지 않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 때문이다. 하지만, 그녀는 죽지 않
     았다. 그는 지금  잘못된 길로 가고  있다. 알랭 로브-그리예의  소설
     <<질투>>는 잘못된 소설이다. 질투하지  않기 위해, 그는 A와  프랭크
     사이로 들어가야 한다. 그리고 A의 사랑을 획득해야 한다. 하지만, 그
     는 그렇게 하지 못한다. 이 소설의 세계관은 '니힐리즘'이다. pour le
     vide. 그러나, A는 죽지 않았다. 언제나 그녀는 그의 앞에 서있다.



* 아주 오래 전에 쓴 글이다. 하긴 로브-그리예의 이 소설도 읽은 지 꽤 되었다. 하지만 그 때의 그 충격을 아직도 잊지 못한다. 20세기 후반 가장 위대한 소설들 중의 한 권으로 자리매김될 이 소설을 제대로 이해하는 이가 드물다는 점에서 이 리뷰를 다시 올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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