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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아란 영혼

책들의 우주/문학 +2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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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도 퇴를레스의 혼란
로베르토 무질 지음, 박종대 옮김, 울력.





‘지난 시대의 교육 정책에 대한 역사적 기록물’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는 일련의 소설들, 1891년의 프랑크 베데킨트Frank Wedekind의 <봄의 깨어남 Fruhlings Erwachen>, 에밀 슈트라우스 Emil Strauß의 <친구 하인 Freund Hein>(1902), 그리고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헤르만 헤세의 여러 소설들과 함께 무질의 이 소설 또한 그 시기에 유행했던 소설들 중의 하나이다.(1)

하지만 나이가 너무 든 탓일까. 아니면 그 때의 학교와 지금의 학교가 틀리기 때문일까. 안타깝게도 퇴를레스, 바이네베르크, 라이팅, 바지니, 이렇게 네 명의 소년들이 펼치는 흥미로운 학교 모험담은, 나에게는 무척 낯선 것이었다.

무질은 이 소설을 통해 영혼의 성장을 이야기하고 싶었던 것일까. 쉽게 말해 나이를 어떻게 먹는가를 이야기하고 싶었던 건 아닐까. 그러니까 연약한 친구에게 행사하는 폭력, 비난, 따돌림, 성적 수치 등등을 통해 우리의 퇴를레스는 혼란을 거치기는 했지만, 정신적으로 한 걸음 앞으로 나가게 되었다는.

그런데 그래서 어쨌다는 말이지? 한 편으로는 교양 있는 척, 한 편으로는 모든 걸 다 아는 척 해대는 이 소설은 현대 소설이 보여줄 수 있는 어리석음의 한 쪽 면을 보여주고 있다. 소설 속에서 퇴를레스는 옳은 것처럼 보인다. 정말 옳은 것일까. 우리는 근대 교양주의가 현대 소설에까지 악영향을 미치는 모습을 이 소설을 통해서 확인할 수 있다.

연구의 목적이 아니라면, 이 소설은 읽지 않아도 좋을 법하다. 번역된 무질의 다른 소설, <<세 여인>>(문학과지성사)은 언제나 추천한다. 하지만 이 소설은 젊은 소설가가 자신의 생각이나 경험을 너무 맹신한 나머지, 뜻 모를 단어와 문장으로 설교하려는 태도를 보여주는 지극히 나쁜 소설들 중의 하나이다.

진지하고 슬픈 퇴를레스는 이미 없고 영혼의 성장이라는 테마는 현대에서는 오래된 유물같은 것이다. 우리는 이미 늙은 채로 태어났고 나이가 들어간다는 것은, 더러운 세상에 얼마나 더욱 잘 적응하는가의 다른 말일 뿐이다.



(1) http://hesse-library.mokwon.ac.kr/archiv/HeFo6-03.ht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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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페이드의 여왕
푸슈킨, 문학과지성사




‘도스토예프스키와 톨스토이, 그리고 투르계네프의 문학에 대한 세계의 반향이 아무리 크고 높다 할지라도, 러시아인과 러시아 작가들의 사랑과 숭배에 있어 그들은 결코 푸슈킨을 능가하지 못한다’라는 책 첫머리 <기획의 말>에 적힌 문장만으로도 푸슈킨이 어떤 위치에 있는 작가인가를 알 수 있다. 하지만 푸슈킨은 아직 일반 독자에게는 낯설다.

나의 경우 푸슈킨의 시를 먼저 읽었고 소설은 이번이 처음이다. 꽤 오래 전부터 이 책을 추천받아왔는데, 이제서야 읽게 된 것이다. 읽고 난 다음, 쉽게 푸슈킨의 세계 속으로 빨려 들어가지 못했다. 푸슈킨의 낭만적 세계 속으로.

푸슈킨은 러시아의 위대한 산문 작가임에 분명하다. 그의 정신은 소설과 시가 만나는 낭만주의의 정점에 서있다. 독일 낭만주의나 프랑스 낭만주의와 확연히 구분되는 그의 소설은 러시아 낭만주의가 어떤 것인가를 보여준다. 그의 소설을 읽으면서 생 페테스부르크나 일리야 비친가 그렸던 결투를 떠올리게 되는 것은 추운 대륙에서의 삶은 거칠면서도 경건하고 환상적이며 심오한 것임을 깨닫게 되기 때문이다.

이 소설을 읽으면서 매혹되거나 감동받는 부분은 이 부분이다. 특히 <고 이반 폐트로비치 볠킨의 이야기>는 더욱 그러하다. 푸슈킨은 당대의 고귀하고 열정적인 삶을 그대로 옮겨놓고 있다. 심지어 파탄에 이르는 열망에 대해서까지 환상과 흔들리는 심리를 적절한 단어들로 풀어내고 있을 정도이다.

하지만 푸슈킨의 낭만주의는, 그의 삶이 그랬듯이, 충동적이며 감상적이다. 그렇다고 영혼의 아름다움이나 무한한 공간에 대해 경외도 아니다. 그것은 열정적 삶에 대한 무분별한 예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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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감 - 10점
김화영 엮음/큰나(시와시학사)



흔적 - 10점
김화영 엮음/큰나(시와시학사)


<<시, 눈뜨다 예감>> <<시, 눈뜨다 흔적>>
김화영 엮음, 시와시학사.

시집을 꼬박꼬박 챙겨 읽지 않은 지도 벌써 몇 해가 지났는지 가물가물하다. 대학시절엔 점심을 굶고 그 돈으로 시집 한 권 사면 배는 자연스럽게 부르고 가슴이 따뜻해졌는데. 얼마 전 종로 정독도서관에서 시집을 복사하는 대학생쯤으로 보이는 여학생을 보았다. 그 모습이 대학시절 날 떠올리게 했지만, 그녀가 복사한 시집이, 허수경의 시집들 중 가장 최악인, 최근의 시집이라는 점은 나의 마음을 아프게 했다.

나도 오래 전에 시집을 복사한 적이 있었다. 아주 오래 전에 번역된 이브 본느프와의 시집이었다. 지학사에서 나왔던 책으로 기억되는데, 그 때에도 절판된 지 몇 년이 지난 책이라 복사를 할 수 밖에 없었다. 그렇게 읽다 여러 서점을 기웃거린 탓에 구할 수 있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잃어버리고 말았다. 지금이야 민음사 세계시인선으로 구할 수 있지만.

최근 나에게 시집읽기의 즐거움을 선사하는 책이 있으니, 김화영 교수가 엮은 이 두 권의 시집이다.



수많은 별들 중 하나인 지구
지구 위의 파리
파리의 몽수리 공원에서
겨울 햇살 비치는 어느 아침
너 나에게 입 맞추고
나 너에게 입 맞춘
이 짧은 영원의 순간을
천년 만년이 걸려도
다 말하지 못하리
- 자끄 프레베르, <공원>



‘몽수리 공원’은 참 오랜만에 듣는 말이다. 대학 1학년 때 시창작 수업 때 곧잘 듣던 단어였다. 그 때 시쓰기를 가르쳐주시던 분이 구상 선생이었는데, 학생들에게 ‘몽수리 공원’하면 그 분을 떠올리게 만들었다.

그 때 많은 시인들을 좋아했었다. 시를 쓰고 싶어했었고. 그러고 보니, 시창작수업에 들어간 날보다 술 마신 날이 많기는 하지만 말이다. 오랜만에 시집을 읽고 싶은 이들에게 이 두 권의 시집을 권한다. 마지막으로 유하의, 참 유쾌한 시 하나를 올린다.



그대 내 농담에 까르르 웃다
그만 차를 엎질렀군요
...... 미안해하지 말아요
지나온 내 인생은 거의 농담에 가까웠지만
여태껏 아무것도 엎지르지 못한 생이었지만
이 순간, 그대 재스민 향기 같은 웃음에
내 마음 온통 그대 쪽으로 엎질러졌으니까요
고백하건대 이건 진실이에요
- 유하, <농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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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집도 절판이다. 오랜만에 보는 두 편의 시는 나를 즐겁게 한다. 그러고 보면, 유하는 참 시를 잘 썼는데.. (2011.2.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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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래의 여자>>, 아베 코보(지음), 김난주(옮김), 민음사 세계문학전집55



그는 소설이 끝나고 그 모래의 세계 속에서 탈출할 수 있었을까. 그 속을 벗어날 수 있었을까. 그런데 벗어나지 못했다면, 그래서 그 속에서 그가 늙어죽고 그녀가 늙어죽고 그들이 살던 집이 모래로 뒤덮이는 것을 아베 코보가 보여주었다면 독자들은 무슨 말을 할까. 혹시 그녀처럼 ‘무슨 상관이에요. 그런, 남의 일이야 어떻게 되든!’라고 말하는 건 아닐까.

그렇게 감동적이지도 않고 그렇게 슬프지도 않다. 그저 쓸쓸할 뿐이다. 모래의 세계 속이나 낮고 높은 건물로 둘러쳐진 도시 속이나 갇혀있기는 마찬가지다. 소설은 육체의 고립을 극대화했을 뿐이지, 소설 밖 우리들의 의식은 이미, 오래 전부터 어딘가에 갇혀있었다. 아베 코보는 갇혀있는 우리들의 한 면을 묘사하고 있을 뿐이다.

아베 코보의 실존주의는 어떤 환경에 고립된 존재, 그 존재가 어떻게 방황하고 고통스러워하는가를 묘사한다. 그러면서 그 의식마저도 고립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희망>이 까마귀의 시선을 끌지 못하고 그의 바램은 뒤로 밀려나간다. 그녀의 육체 위로 미묘하게 흐르는 에로티시즘은 고립된 존재인 그를 더욱 고립시킨다. 잠시 에로티시즘 속에서 의식을 놓아두고 어딘가에 몰두하지만 남는 건 희망을 잃어버리고 있는 자기 자신의 모습이다.

<<모래의 여자>>는 끝없이 ‘실존주의적 에로티시즘’에 몰두한다. 고립된 공간, 하루라도 모래를 퍼내지 않으면 무너져버리는 어떤 공간 속에서 한 남자와 한 여자가 몸을 부대끼며 생을 지탱해나간다. 희망은 조금씩 무너져 내리는 모래 구덩이 속에서 끝없이 밀려나간다. 그 속에서 꽃처럼 에로티시즘이 피어난다. 하지만 에로티시즘은 실존적 상황에 파묻혀버리고. 매일매일 마주하는 남자와 여자 사이에 오가는 건 의미 없는 몸짓뿐이다. 애초부터 그들은 서로를 이해할 수 없었고 에로티시즘은 서로에 대한 애정이나 사랑으로 발전하지 않는다.

<<모래의 여자>>가 보여주는 ‘실존주의적 에로티시즘’은 구원도 없고 사랑도 없는 시대의 소설적 반영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가슴 아파하거나 슬퍼할 이유는 없다. 이제 ‘실존주의적’이라는 수식어가 사라지고 ‘에로티시즘’만 남게 될 테니까.


모래의 여자 - 10점
아베 코보 지음, 김난주 옮김/민음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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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컬처버스 2014.02.11 16:05 신고

    아베 코보의 소설 <모래의 여자>를 원작으로 한 연극이 공연되어 정보 공유합니다. 소설을 읽으신 분들께는 더욱 흥미로운 연극이 될 것 같아 댓글 남겨요.

    공연정보는 한국공연예술센터 홈페이지 (www.hanpac.or.kr)에서 "모래의 여자"를 검색하시면 확인가능합니다.



    연극 <모래의 여자>
    2014.02.18-2014.02.23 대학로예술극장 소극장
    전석 2만원
    예매 바로가기 http://www.hanpac.or.kr/hanpac/program.do?tran=play_info_view&playNo=1401291541212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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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생일날의 고독>> (원제 : 태어남의 잘못에 대하여)
에밀 시오랑 지음, 전성자 옮김, 에디터



루마니아에서 태어나 젊은 시절, 루마니아어를 버리고 평생을 미혼으로 남은 채 파리 어느 다락방에서 프랑스어로 글을 썼다는 것만으로도 현대적이면서도 신비한 분위기에 휩싸인 어떤 매력을 풍긴다. 또한 그의 프랑스어는 어느 잡지의 설문 조사에 따르면 지난 세기 프랑스인들에게 가장 아름다운 프랑스 문장들 중 하나로 기억되고 있다. 하지만 이 매력, 그의 문장만으로 그를 좋아할 수는 없다.

문제는 그가 가지는 인생에 대한 태도에 있다. 가령 이런 문장들, “젊은 사람들에게 가르쳐야 할 유일한 사항은 생에 기대할 게 아무 것도 없다는 것이다”, “우리는 죽음을 향해 달려가고 있는 게 아니라 태어났다는 재앙을 피해 달아나고 있다. 그 재앙에서 살아남은 우리는 미친 듯이 날뛰면서 그 사실을 잊으려 안간힘 쓰고 있다”, “정신적 완성을 위한 필수적인 조건 - 언제나 도박에서 실패했다는 것”

그는 분명 현대가 가져다 준 니힐리즘의 한 극단에 이른다. 하지만 그가 그토록 절망하고 생을 저주했다는 것과 그가 오래 살았다는 사실은 독자에게 묘한 배신감을 들게 만든다. 그는 여기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밤낮 나의 염두를 떠나지 않는 것 중의 하나로 <죽음>이 있다. 또 나는 항상 자살에 대해서 생각한다. 어떤 독일의 저널리스트가 ‘당신은 자주 자살을 논제로 하는 것 같은데, 정말로 자살은 하지 않는군요’하고 나에게 농담을 한 일이 있는데, 자살이라는 관념은 말하자면 나의 <보조자>이며, 이 관념 덕택에 나는 지금까지 살아올 수 있었다.”

그리고 잠시 뒤, ‘죽음이란 생을 낭만화하는 원리이다. 생에 로맨틱(낭만적) 차원을 주는 원리이다’라는 노발리스의 문장을 인용하면서, ‘죽음이 없다면 생은 용서할 수 없는 것이 될 것이다’라고 말한다.

그의 허무주의를 그대로 받아들이기에는 한계가 존재한다. 왜냐면 그의 허무주의는 수사적인 차원에서만 머물고 있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 때문이다. 이런 이유로 인래 때때로 그가 싫어진다. 하지만 그의 글은 대체로 음울하지만 아름답고, 슬프지만, 대신 매우 열정적이다.

나는 그의 글을 좋아한다. 하지만 타인에게 함부로 추천하지는 못한다. 그의 생각은 너무 극단적이기 때문에.

에밀 시오랑의 다른 책들도 몇 권 번역되어있지만, 구할 있는 책은 <<절망의 끝에서>>라는 책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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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화소록 - 10점
강희안 지음, 서윤희 외 옮김, 김태정 사진.감수/눌와



양화소록(養花小錄)
강희안 지음 (서윤희/이경록 옮김, 김태정 사진/감수), 눌와, 1999



작년 여름 붉은 꽃이 피어있는 서양난 하나를 구해 기르게 된 적이 있었다. 처음 꽃을 기르게 되었다는 반가움도 잠시, 얼마 지나지 않아 푸른 빛깔의 잎이 누렇게 변하기 시작하더니 꽃도 떨어지고 채 몇 주 지나지 않아 그대로 죽어버렸다. 다시 꽃을 사서 기르리라 생각 했지만, 바쁜 직장 생활 와중에 그런 생각은 가끔 말라죽어있는 난을 볼 때뿐이었고 그 사이 해가 바뀌어 버렸다.

해가 바뀌는 동안 나는 강희안(姜希顔:1418-1465)의 <양화소록>을 읽게 되었다. 나에게는 <고사관수도(高士觀水圖)>라는 그림으로 알려진 조선 초의 선비 화가로만 알려져 있었는데, 그림에만 뛰어났던 것이 아니라 시와 글씨에도 뛰어났음을 알게 되었다. 이 책은 강희안이 화초를 기르면서 알게 된 여러 것들을 정리해 모은 것이다. 강희안은 책 첫머리에 이렇게 적고 있다.

아! 화초는 식물이다. 지식도 없고 움직이지도 못한다. 그러나 그들을 기르는 이치와 갈무리하는 방법을 모른 채, 습한 데에 맞는 것은 마르게 하고 추위에 맞는 것은 따뜻하게 하여 그 천성을 거스른다면 반드시 시들어 말라죽게 될 것이니, 어찌 다시 싹을 틔우고 꽃을 피워 그 본래의 자태를 드러내겠는가. 식물조차 그러한데 하물며 만물의 영장인 사람이 마음과 몸을 피곤하게 하여 천성을 해쳐서야 되겠는가.
나는 그런 뒤에야 양생(養生)하는 방법을 알게 되었다. 이 방법을 확충한다면 무슨 일을 하든 안 되는 일이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나는 화초의 성품과 기르는 방법을 알게 될 때마다 그것을 기록하였다. 기록이 끝나자 <<청천양화소록(菁川養花小錄)>>이라고 이름을 붙였다. 산림에서 소일하는 밑천으로 삼고, 호사가(好事家)들과 함께 나누고자 한다.
(21쪽)

* * * * * *

내용은 간결하며 옛 문헌들에 실린 각 화초에 대한 설명이나 시, 문장을 언급하고 난 다음 강희안이 그 화초를 기르면서 알게 된 바를 적는 형식으로 이루어져있다. 특히 화초를 기르는 것도 자기 수양의 한 방편으로 삼았음은 글 여기저기에서 알 수 있는데, 책 마지막 부분에서 강희안은 ‘꽃과 나무에서 배울 점’이라는 글에서,

화훼를 재배하는 것은 키우는 사람의 심지(心志)를 굳게 하고 덕성(德性)을 기르기 위함일 뿐이다. 운치와 지조가 없는 것은 절대로 감상해서는 안 되며, 울타리 주위나 담 아래 적당한 곳에 재배하되 가까이 할 필요는 없다. 가까이 한다는 것은, 비유하자면 지조 있는 선비와 비루한 사내가 한 방에 같이 있는 것과 같아서 풍격(風格)이 금방 떨어진다.
(118쪽)

이라고 적고 있다. 특히 연화(연꽃)에 대한 설명은 강희안이 화훼를 재배하는 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가를 잘 드러내주는 구절이 많다. 그가 인용하고 있는 옛 중국 학자의 구절을 살펴보면, ‘나는 연꽃을 유독 좋아한다. 진흙 속에서 피어나면서도 더럽혀지지 않고, 맑은 잔물결에 흔들리면서도 요사스럽지 않다. 줄기 속은 비었고 겉은 곧으며 덩굴로 뻗거나 가지를 치지 않는다. 향기는 멀어질수록 더욱 맑으며 아름답게 깨끗이 자란다. 멀리서 바라볼 수는 있지만 가까이 두고 감상할 수는 없다. 여러 꽃 가운데 연꽃은 군자이다’라고 적혀있다. 그러면서 강희안은 이렇게 말한다.

사람이 한 세상을 살면서 명성과 이익에 골몰하여 고달프게 일하는 것이 죽음에 이르도록 끝이 없다. 과연 무엇을 하는 것인가? 벼슬을 버리고 강호(江湖)를 소요하지는 못한다 하더라도, 공무(公務)의 한가한 틈에 맑은 바람 밝은 달 아래 향기 진한 연꽃과 그림자 뒤척이는 줄이나 부들을 대하거나 작은 물고기가 개구리밥과 수초 사이로 뛰노는 광경을 만날 때마다 옷깃을 풀어헤치고 거닐거나 노래를 읊조리면서 노닌다면, 몸은 명예의 굴레에 묶여 있지만 마음은 세상사에서 벗어나 노닐 것이고 자신의 감정을 마음껏 표현할 수 있을 것이다.
(65쪽에서 66쪽)

이 구절을 보면서 한참을 옛 선비를 생각할 수 밖에 없었다.

실로 오랜만에 조선시대의 선비의 글을 읽었다. 살아보면 좋은 글이 많은데, 여유가 없었던 것일까. 아니면 너무 거리가 먼 것일까. <양화소록>을 손에 들고 다니면서 종로나 테헤란로에서 읽을 때마다 번잡한 거리가 낯설게 느껴졌다. 그 속에서 오래된 책 한 권 들고 있는 젊은 사내를 다른 이들은 또 얼마나 낯설게 받아들였을까. 강희안의 글을 읽었지만, 그와 대화를 나눌 수 없는 나와 현대의 이 세상이 한없이 미워지는 밤이다.



* '양화소록'은 몇 권의 번역본들이 있습니다. 위의 책은 오프라인 서점에서 찾을 수 있으리라 여겨집니다만, 확실치 않습니다. 인터넷 서점에서는 다른 번역본으로 구할 수 있음을 알려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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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멸 - 10점
밀란 쿤데라 지음/청년사


<<불멸 L'Immortalite'>>
밀란 쿤데라, 청년사



오랜만에 뛰어난 현대 문학의 수준을 한 눈에 가늠할 수 있는 소설을 읽게 되었다. 내용에서뿐만 아니라 그 형식에 있어서도 놀랍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이 짧은 글에서 이러한 평가에 대한 정당한 이유와 논증을 다하지 못함을 고려해볼 때, 이러한 평가는 위험한 것이다. 내 생각에 이 소설에 대한 제대로 된 평가를 적는다면 이 소설이 현대 문학의 어떤 흐름에 이어져 있으며 무엇을 반영하고 있는가, 이와 유사한 내용이나 형식의 소설에는 어떤 것이 있는가, 다른 예술에서는 어떤 식으로 표현되고 있는가를 논의하는, 적어도 소논문 정도는 되어야만 할 것이다.

이러한 소논문에 대한 부담을 나는 늘 그렇듯이 내 처지를 내세운다. 다만 나에게 기회가 주어진다면 현대 문학, 특히 소설에서 현대성, 내지 현대예술의 성격이 어떻게 발현되고 어떤 모습으로 변해가는가를 논할 수 있을 것이다. 그 때를 기대해보자.



1. 낭만주의

낭만주의가 우리의 지성에 호소하기보다는 우리의 감성에 호소한다는 측면에서 20세기 초반의 여러 예술들은 고전주의와 가까이 있어 보인다. 그래서 칼 하인츠 보러의 경우 이러한 예술들을 설명하면서 ‘고전적 현대’라고 지칭하기도 한다. 하지만 이러한 ‘고전적 현대’, 다른 말로 현대에 나타난 고전주의는 세계 2차 대전 이후 급격하게 무너지기 시작한다. 20세기 중반부터 등장하기 시작하는 실존주의 문학이나 부조리 연극들은 고전적 현대의 붕괴를 천천히 예고한다. 그리고 미국 추상 표현주의나 그린버그 식의 모더니즘은 고전적 현대의 마지막을 장식한다.

아주 흔한 말이지만, 동시에 너무나도 다양한 의미로 사용되는 용어인 포스트모더니즘은 고전적 현대가 무너지고 난 다음 처음으로 나타난 낭만주의이다. 이 낭만주의는 장르나 형식의 경계를 무너뜨리고 감성에 직접 호소하기보다는 지성의 허점을 노리고 이성의 한계, 이성적 기획들의 실패를 나열하기 시작한다. 이런 측면에서 이 낭만주의는 ‘감성주의’나 ‘예술지상주의’의 경향보다는 ‘반지성주의’의 경향을 띄고 있다. 이 속에서 근대적 자아는 분열되어 춤을 추기 시작한다. 이 분열은 근대적 기획의 실패라는 점에서 슬프고 안타까운 일이지만, 동시에 새로운 시작을 알린다는 점에서 즐겁고 희망찬 일이기도 한 셈이다. 대부분의 조심스럽고 신중한 이들은 전자의 입장을 취하는 반면, 몰역사적이며 성급한 이들은 후자의 입장을 취한다.

<불멸>에서의 낭만적 경향은 근대적 자아의 분열, 시간과 공간의 혼란, 소설 양식의 붕괴, 자의식 과잉 등으로 나타나고 있다. 이러한 낭만적 경향은 현대 소설에서 곧잘 발견되는 특징이기도 하다.



2. 원근법적 세계의 붕괴

연극에서의 ‘원근법’이라고 하면 종종 무대를 떠올리기 쉽다. 왜냐면 르네상스 초기 연극에서 원근법은 무대를 꾸미는데 매우 유용했는데, 이는 그 당시의 회화나 회화이론에서 영향 받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연극에서의 원근법이라고 하면 무대에 대한 것이 아니라 연극 속에 있다. 이는 한 명의 주인공(소실점)을 둘러싸고 이루어지는 여러 인물들과 사건, 배경들이 기하학적으로 구축되어 있는 경우에 사용한다. 다시 부연하자면 프로타고니스트(제1배우, 주인공)와 안타고니스트(제2배우) 간의 대립과 반목, 갈등을 통해 사건이 진행되고 언제나 그 중심에는 프로타고니스트가 있음을 보여줄 때, 그리고 그 영웅이, 그 영웅이 있는 하나의 세계, 그 영웅이 가슴에 품고 있는 신념이나 확신이 승리하거나 실패하게 될 때, 이러한 서사 양식을 원근법적이라고 말할 수 있으며 우리가 알고 있는 대부분의 고전주의 연극은 이러한 원근법적 양식을 보여준다. 연극에서의 이러한 원근법은 동일한 서사 양식인 소설에서도 그대로 적용된다. 대부분의 근대 소설들은 이러한 원근법적 구조를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우리는 이러한 원근법적 구조의 소실점 자리에 있는 한 인물, 서사의 주인공을 ‘근대적 자아’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파우스트, 마담 보바리, 고리오 영감, 줄리앙 소렐 등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 많은 인물들이 이러한 근대적 자아의 예인 셈이다.

하지만 이러한 근대적 자아는 붕괴되기 시작하는데, 이러한 붕괴가 본격적으로 모습을 드러낸 것은 19세기 인상주의 화가들에 의해서이다. 모네, 피사로 등이 보여준, 감각적이며 평면적인 회화는 우리의 세계가 하나의 소실점으로 파악할 수 없는 세계이며 우리가 믿어왔던 그 세계를 거짓이었고 기만이었음을 폭로하게 된다. 여기에서부터 모더니즘 예술들은 근대적 자아가 아닌 진짜 자아, 순수한 자아를 본격적으로 찾아나가기 시작한다. 프루스트나 제임스 조이스, 버지니아 울프, 로베르토 무질은 이러한 모더니즘의 모험을 그대로 소설로 옮겨놓는다.

그러나 이러한 모험으로 인해 우리가 인정하게 되는 것은 ‘넌 날 이해할 수 없어’라든가 ‘우린 서로를 이해할 수 없어’라고 말하는, 라이프니츠에서 시작되어 그 골이 깊어진 독아론적 태도이다. 즉 인상주의자들이 감각적이며 평면적인 회화 양식을 보여주었을 때, 그것은 순수하고 새로운 가치의 발견도 있었지만, 동시에 무수히 많은 가치들의 발견이기도 하였다. 다시 말해서 인상주의자들은 자신의 감각에 집중함으로서 자기 자신에게 진실한 그 어떤 것의 발견이기도 하지만, 그것은 자신에게만 해당된다는 점에서 타인의 그 어떤 것을 인정하지 않으면 안되는 계기를 마련하게 되는 셈이다. 그런 측면에서 인상주의 회화가 보여주는 평면성은 하나의 원근법적 가치를 부정하고 무수히 많은 가치들로 쪼개어지고, 그 가치들이 균등한 무게를 지니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러한 평면성은 현대 소설에서는 한 명의 주인공에서 무수한 주인공으로 늘어나게 되고 종종 여러 인물의 시점을 번갈아 사용하게 된다.

<불멸>의 경우에도 이러한 다중 시점이 등장한다. 이러한 다중 시점을 사용하는 경우 소설은 사건 중심적이기보다는 인물 중심적이며 인물의 내면에 집중하는 경향을 띄게 된다. 그래서 <불멸>은 각 인물들의 내면에 집중하며 그들의 내면 모습을 그대로 보여주기 위해 노력하며 한 개인의 내면은 다른 개인의 내면과 비교된다.

이 경우 소설을 읽고 있는 독자는 각 개인들의 내면을 알 수 있지만, 그 속의 개인들은 스스로의 내면이나 심리 상태를 드러내기 위해선 어떤 행동을 통해서일 뿐이다. 이러한 정신적이고 심리적인 교류에 대한 제약은 근대 개인주의의 비극성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다. 많은 인물들이 등장하지만 이들 사이의 상호교감적인 형태의 정신적인 교류란 없다. 언제나 서로 반대 방향으로 움직이거나 엇갈린다. 이러한 단절은 현대 소설에서 ‘다중 시점’을 사용하게 되는 계기를 마련하게 되는 계기를 마련하게 되며 이 소설에서 특히 강조되는 ‘몸짓’이라는 단어는 서로를 이해하고 받아들이기 위한 과정으로 이해될 수 있다. 고작 ‘몸짓’으로 연결되고 있는 셈이다.



3. 메타픽션(metafiction), 또는 자의식 과잉

일반적으로 메타픽션은 소설가 소설, 내지 소설에 대한 소설로 이해된다. ‘메타meta’라는 접두어가 의미하듯이 소설 속에서 소설에 대한 평가나 의미 부여, 비평이 이루어지는 경우에 이를 메타픽션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러한 소설 양식들은 사태나 인물을 정확하게 전달하려는 작가의 의도가 지나쳐 소설 속에 갑자기 작가가 등장해 사건이나 인물을 설명하는 방식을 취하게 되거나, 비평문이나 인물 스스로 자기 자신에 대한 분석이나 평가가 이루어지게 된다.

이러한 메타픽션의 성격은 <불멸>에서는 매우 노골적이다. 자의식 과잉인 작가는, 소설의 창조주이면서 소설 인물들의 주인인 그는, 인물들의 행동이나 스토리의 방향을 보다 정교하게 교정하기 위해 소설 속 등장인물이 되는 것에 대해 이제 더 이상 주저하지 않는다. 밀란 쿤데라는 소설 속에서 여러 인물들과 만나고 아베나리우스 교수와의 대화를 통해 소설과 인물에 대해서 떠든다.

현대문학이론에서 종종 등장하는 ‘자의식 과잉’이라는 표현은 이러한 메타픽션적 경향을 뜻하며 ‘자기반영성’이라는 단어도 부분적으로 이러한 메타픽션적 경향을 뜻하기도 한다.

그런데 이러한 메타픽션은 전혀 다른 결과를 불러오는데, 근대 소설이 원근법적 태도를 견지하고 있는 작가나 주인공에 의해 시작된 근대적 자아의 모험이라면, 현대 소설에서는 이러한 모험이 근대적 자아의 붕괴로 인해 말하는 나와 그런 나를 바라보고 평가하는 나로 이루어지는 주체의 분열을 야기하거나 소설 바깥에서 소설을 진행하는 작가가 고전적인 작가의 지위를 버리고 스스로 소설 속 인물이 되어 소설 속 다른 인물들을 실재하는 인물로 격상시키면서(작가는 소설 속 인물로 격하되고), 소설 속 세계에 힘을 실어주게 된다.

<불멸>에서 이러한 메타픽션의 경향은 소설 전반을 물들이고 있는데, 소설 속에서 이루어지는 가상의 인물과 실제의 인물이 이야기를 나눈다던가 한 공간 속에 머무르게 되는 것도 이러한 경향이 심화된 경우라고 할 수 있다. 어느 것이 허구이고 어느 것이 진짜인지 분간하지 못하게 함으로써 그것이 진짜라고 믿게 만드는 것이다.



4. 사랑, 몸짓, 그리고 불멸

아녜스는 현대의 슬픈 사랑을 표상한다. 아녜스는 끊임없이 스스로에게 주문을 걸고 스스로를 분석하며 지극히 정신적이다. 이와 반대로 로라는 현대의 행복하고 이기적인 사랑을 표상한다. 이 두 사랑은 서로를 인정하지 못한다. 그래서 아녜스는 그녀의 아버지는 인정하지만 로라는 그것을 인정하지 못한다.

로라에게 육체란 애초부터, 선험적으로, 전일적이고 항구적으로, 본질적으로 성적인 것이었다. 그녀로서는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것은 곧 이런 의미였다 : 즉 그에게 자신의 육체를 가져가 그의 앞에 그 육신을 내려다놓는 것. 내면 외면 할 것 없이 송두리째 있는 그대로의 육체를, 부드럽게 천천히 그것을 망가뜨리는 시간과 함께 말이다.
아녜스로서는 육체란 성적인 게 아니었다. 아주 희귀한 순간들에만, 즉 흥분이 육체 위에 어떤 인공의 비현실적인 광채를 투사하고 그 빛이 육체를 아름다운 하나의 욕구의 대상으로 만들어 줄 때만이 육체는 성적인 것이 되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설마라고 할런지는 모르겠으나, 아녜스가 줄곧 육체적인 사랑에 사로잡혀 있었던 것은 바로 그런 까닭이었다.
(129쪽에서 130쪽)

이러한 단절은 필연적인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루벤스에게도 이어진다. 그의 류스티스는 그의 세계 속에서 존재한다. 독자는 아녜스 = 류스티스라는 등식을 이해하지만 루벤스는 그것을 이해하지 못한다.

가득 부풀어 올랐던 그 사랑의 감정이 덧없이 사라지자, 그는 믿기지 않을 만큼 그 사랑의 감정이 덧없이 사라지자, 그는 믿기지 않을 만큼 아프지도 비극적이지도 않은 그것의 소멸을 어떤 충격적인 계시로 체험했다 : 그는 결정적으로 사랑 저 너머에 있게 된 것이다.
(362쪽)

사랑 저 너머에서 루벤스는 류스티스에 대한 사랑을 통해서 사랑에 대한 결론을 내리고 있는 셈이다. ‘그때 그는 얼마간 여자 관계를 끊는 것이 자기에게 나쁘지 않으리라고 속으로 중얼거렸다. 흔히 하는 말로 새로운 질서가 도래할 때까지 말이다. 하지만 한 주 한 주, 그 휴지는 연장되기만 했다. 그러던 어느 날 마침내 그는 이제 더 이상 <새로운 질서>는 없음을 알아’차리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새로운 질서>가 등장하지 않는 와중에도 몸짓을 통해 각 개인들은 서로 연결된다. 소설 속에서, 혹은 소설 바깥 세상에서 개인주의의 한 극을 향해 달려가고 있다 하더라도, 아무리 ‘고통이야말로 자기중심주의의 위대한 학교’라고 하더라도 말이다. 이런 측면에서 보자면 <불멸>에서 강조하고 있는 ‘몸짓’은 가느다랗게 이어져있는 사랑과 이해, 포옹의 표상인 셈이다.

‘호모 센티멘털리스’란 단어는 이 소설 속에서 이성적 사유가 아닌 다른 어떤 것을 지향하기 사용된다. 사람은 많으나 몸짓은 별로 없다. 소설 속의 어떤 몸짓은 계속 누군가에게 전달되고 마지막으로 폴이 그 몸짓을 하게 된다. 몸짓을 통해 각 인물들의 감정이, 정신이, 영혼이 연결되는 것일까.

불멸은 사랑의 불멸이 아니라 몸짓의 불멸인 셈이다. 몸짓의 불멸을 통해 다른 것들까지도 구원받을 수 있는 여지를 남겨놓는 셈이다. 쿤데라는 원근법적 세계가 무너지고 존재하는 것은 자신의 마음뿐이며, 사랑은 믿지 못할 것이 되어버렸고 생각 많은 어떤 이가 ‘물망초에 미친 여자’로 불리게 될 지도 모르는, 서로서로 단절되어있는 근대의 비극을 말하면서도 ‘몸짓’을 통해 어떤 희망의 가능성을 이야기하고 있는 셈이다. 더 이상 <새로운 질서>는 없고 오직 몸짓으로만 연결되는 세계. 그나마 몸짓이 남아 서로를 연결해주는 세계 말이다. 내가 보기엔 더 비극적이긴 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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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쿤데라의 책에 대해 검색하다가 만족할 만한 글을 찾지 못하고 있었는데 이렇게 찾아 들어와 읽게 되어 기쁩니다. 좋은 글 잘 읽었어요.

    • 감사합니다. 이 소설을 읽은 지도 벌써 10년이 된 것같네요. 무척 좋은 소설인데, 최근에 이 소설을 읽는 이를 보지 못했는데, 반갑습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마담 보바리 Madame Bovary
Gustave Flaubert, (박동혁 옮김, 하서. 1990)
* 1856년, 플로베르가 35세 되던 해 나옴.




그러나 뭐라 해도 그녀는 행복하지 않았다. 지금까지 한 번도 행복한 적이 없었다. 인생에 대한 이 불만은 도대체 어디서 오는 걸까? 의지했던 모든 것들이 차례로 무너지는 건 무슨 까닭일까? 하지만 만일 어딘가에 아름다운 사람이 있다면, 열정적이고 품위 있는 성격, 천사와 같은 시인의 마음, 하늘의 마음, 하늘을 향해 애조띤 축혼가를 부르는 청동 하프 같은 마음, 이런 것들을 지닌 사람이 있다면, 그러나 그런 사람이 있다면 왜 만나지 못했겠는가? 아! 모든 것은 다 틀렸다! 일부러 애쓰며 찾아야 할 가치가 있는 것은 하나도 없다. 모두 거짓이다! 어떤 미소에도 권태의 하품이 숨겨져 있다. 어떤 환희에도 저주가, 어떤 쾌락에도 혐오가 숨겨져 있다. 황홀한 키스에조차 충족되지 못한 더 큰 쾌락의 욕망이 입술에 남는 법이다.
- 278쪽

에마가 죽고 샤를이 죽고 그들의 어린 딸이 방직 공장에 가게 되었다는 짤막한 상황 설명으로 소설이 끝나게 되었을 때, 어떤 독자는 이렇게 물을 수 있을 것이다. 과연 에마는 몇 번의 밀애 속에서 사랑을 경험한 것일까? 그러한 에마에게 사랑이란 무엇이었을까?

하지만 에마는 백 오십여 년이 지난 오늘날, 무심코 길을 걷다가, 혹은 누군가와 이야기를 나누다가도 종종 목격되기도 한다. 고급 승용차를 몰고 나온 사내에게 몸을 맡기고 근사한 말투와 매너로 유혹하는 사내에게 입술을 허락하며 깊은 눈빛과 재력을 겸비한 사내에게 마음을 빼앗겨 버리는 그녀들.

근대의 사실주의란, 초창기 사진처럼 세상을 그대로 옮기는 것이 아니라 눈에 보이는 풍경의 이면 속에 숨겨져 있는 그 무언가를 폭로하는 양식이다. 그래서 그러한 양식의 소설을 읽다보면 자기도 모르게 가슴을 치기도 하며 주인공의 방황에 격렬하게 저항하기도 하고 그/그녀가 그 모험을 무사히 끝마치기를 바라거나 아예 그런 헛된 모험을 하지 않기를 바라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그 모험이라는 것은,

결혼하기 전까지 그녀는 자기가 그를 사랑하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 사랑에서 당연히 와야 할 행복이 없었기 때문에 자기 생각이 틀렸었나 하고 생각하기 시작했다. 무한한 행복이라든가 정열, 도취 등 책에서 읽은 그토록 아름답다고 생각했던 말들이 과연 세상에선 정확하게 어떤 것일까 에마는 그것을 알려고 애썼다.
- 44쪽에서 45쪽

소설 초반에 읽게 되는 이 문장 앞에서 진지하고 사려 깊은 독자라면, 우리의 에마가 어떤 모험을 하게 될 것이고 그녀의 운명이 어떤 식으로 전개될 것인가를 예감할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게오르그 루카치가 그의 초창기 저작인 <소설의 이론> 첫 머리에서 언급하는 그리스 문화의 구조와는 정반대로 펼쳐지는 근대의 비극적인 구조를 떠올릴 수 있기 때문이다.

별이 빛나는 창공을 보고, 갈 수가 있고 또 가야만 하는 길의 지도를 읽을 수 있던 시대는 얼마나 행복했던가? 그리고 별빛이 그 길을 훤히 밝혀 주던 시대는 얼마나 행복했던가? 이런 시대에 있어서 모든 것은 새로우면서도 친숙하며, 또 모험으로 가득 차 있으면서도 결국은 자신의 소유로 되는 것이다. 그리고 세계는 무한히 광대하지만 마치 자기 집에 있는 것처럼 아늑한데, 왜냐하면 영혼 속에서 타오르는 불꽃은 별들이 발하고 있는 빛과 본질적으로 동일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세계와 자아, 천공의 불빛과 내면의 불꽃은 서로 뚜렷이 구분되지만 서로에 대해 결코 낯설어지는 법이 없다.
- 루카치, <소설의 이론>(반성완 역, 심설당), 29쪽

근대의 풍습이란,

“저기 탄 사람들은 내일이면 파리에 닿을 텐데.”
그리고 그녀의 상상은 그들의 뒤를 따라 언덕을 오르내리고 마음을 가로질러 밤하늘의 별이 총총한 국도를 달려갔다. 그러나 어느 거리까지 가면 반드시 그녀의 꿈은 자신도 알 수 없는 흐릿한 장소에 부딪혔다.
그녀는 파리의 지도를 하나 샀다. 손가락 끝으로 지도 위를 더듬으며 그 안을 온통 헤매 다녔다.
- 64쪽

우리의 에마처럼 새로운 것을 탐구하는 것. 그것을 찾기 위해 대도시로, 외국으로 여행을 떠나는 것. 자신을 구원해줄 수 있으리라 기대되는 사랑의 모험에 미련 없이 육체와 영혼을 내맡기는 것.

에마는 자기가 그를 사랑하고 있는지 어떤지는 생각해 보지도 않았다. 연애란 뇌성이나 번개처럼 별안간에 나타나는 것 - 하늘에서 큰 바람이 불어와 생활을 뒤엎고 인간의 의지를 나뭇잎처럼 뿌리째 뽑아버리고 사람의 마음을 깊은 못 속으로 끌고 들어가는 것이라고 믿고 있었다. 그녀는 지붕의 낙수 홈통이 꽉 막혀 있을 때는 빗물이 집의 발코니 위에도 호수를 만든다는 것을 모르고 있었다. 그래서 그녀는 이렇게 편안한 마음으로 있을 수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때 갑자기 에마는 벽에 틈이 생긴 것을 발견할 수 있었다.
- 102쪽

그러나 그녀의 마음은 욕망과 고통과 증오로 가득 차 있었던 것이다. 주름이 똑바로 잡힌 옷은 동요하는 마음을 감추고, 정숙해 보이는 입술은 미칠 것 같은 마음의 괴로움을 털어놓지 않았다. 그녀는 레옹을 사랑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마음껏 그의 모습을 혼자서 남모르게 그려보기 위해서 고독이 필요했던 것이다. 그의 모습을 보면 이렇게 혼자 생각하는 기쁨이 충만 되었다. 에마는 그의 발소리만 들어도 가슴이 설레었다. 그러나 막상 그의 앞에 있으면 그 감정은 사라지고 그저 멍한 기분만이 남아서 드디어는 슬픔으로 변해버렸다.
- 109쪽

시골 의사인 샤를 보바리, 그리고 그의 부인 에마 보바리. 그리고 에마 보바리가 사랑하고 있는 남자. 레옹. 얼마 뒤 레옹은 마을을 떠나고 로돌프가 그 자리를 대신하게 된다. 하지만 로돌프에게 연애란 하나의 취미, 취미의 대상으로서의 에마 보바리.

아. 너무 가슴아픈 이 부분을 언급하지 말기로 하자. 우리는 사랑이 어떤 것인지 모른다. 참으로 보기 드문 문학에 대한 확고한 신념을 가진 마르셀 라이히-라니츠키의 사랑에 대한 정의를 떠올려보자. “호감은 열정으로, 열정을 종속으로 변화시키는 극단적인 감정을 우리는 사랑이라고 부른다. 이는 한 개인을 도취상태로 몰입시키면서 일시적으로 당사자, 즉 사랑에 빠진 자의 책임 능력을 제한한다; 사랑은 아픔을 낳는 행복이며 인간을 행복하게 하는 아픔이다.”(* <사로잡힌 영혼> 중에서 )

이렇게 순수하고도 순진한 문학 평론가가 어디에 있을까. 샤를이 이 말을 들었다면 어떤 표정을 지었을까. 바람난 에마를 너무 사랑했던 샤를. 끝내 패배하게 되는 모험으로 가득찬 시대에 샤를은 에마를 사랑하는 모험을 감행했던 것일까. 아니면 그는 모험을 하지 않았는데, 모험을 감행하는 사람 옆에 있었다는 이유만으로 그도 모험의 회오리 속에 말려든 것일까.

근대란 사랑이라는 행복하게 하는 아픔마저도 절망으로, 끝없는 혐오로 만드는 시대다. 우리의 에마는 끝없이 사랑을 노래하였지만, 그녀에게 남은 건 감당할 수 없는 빚과 쓰라린 사랑의 아픔, 살아갈 수 있는 생명력의 상실뿐이었다. 사랑의 대가란 바로 그러한 것이었다. 죽어가는 그녀 옆에 앉아 있는 샤를에게

“네, 네... ... 그 말씀대로예요. 당신은 참 좋은 분이에요.”
이렇게 말하면서 에마는 샤를의 머리를 천천히 쓰다듬었다. 이 기분 좋은 감촉이 샤를의 슬픔을 한층 더하게 했다. 여태까지 없었던 애정을 이토록 나타내 주는 아내를 지금 잃게 되었다고 생각하자, 절망으로 자신의 모든 존재가 허물어져 버릴 것 같았다. 그러면서도 무엇 하나 해주어야 할 일이 생각나지 않았다. 그리고 도대체 어찌된 영문인지 알 수가 없었다. 당장 처치를 해야 할 긴급한 상황에 몰려서 완전히 정신을 잃고 만 것이다.
- 312쪽

과연 에마에게 사랑이 존재했던 것일까. 그러한 에마를 사랑하는 샤를. 에마가 경멸하고 무시했던 샤를, 왜 샤를은 에마를 사랑해야 했던 것일까. 하지만 이런 헛된 질문을 하지는 말자. 모든 사랑은 모험이며 불륜이다. 근대의 사랑이란 끝없는 절벽을 향해 가는 자기 파멸과도 같은 것이다. 그러니 사랑이 존재했던 것일까, 사랑을 왜 하는 것일까 따위의 어리석은 질문을 하지 말고 사랑이 아름답다니 행복하다니 하는 10세기쯤에나 나올만한 말로 순진한 대부분의 독자들을 현혹하지도 말자.

그러나 이러한 환멸은 곧 새로운 희망으로 바뀌어 에마는 전보다 더 강한 정염에 불타고, 전보다 더 레옹을 탐하며 그를 찾아갔다. 그녀는 옷을 거칠게 벗어던지고 코르셋 끈을 마구 잡아당겼다. 끈은 미끄러져 나가는 독사처럼 그녀의 허리께에서 소리를 냈다. 맨발의 발끝으로 문이 잘 잠겨졌는가를 다시 한 번 확인하고 돌아올 때는 입은 옷을 몽땅 한꺼번에 벗어던졌다. 그리고 창백한 얼굴로 입을 굳게 다문 채 심각한 표정으로 몸을 부들부들 떨며 상대의 가슴에 몸을 던졌다.
그러나 식은땀에 젖은 그 이마, 그리고 잘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중얼거리는 그 입술, 겁에 질린 듯한 눈동자, 필사적으로 껴안은 그 팔에는 뭔가 막연하지만 심상치 않은 어두운 그림자가 있었다.
- 277쪽

우리는 언제나 희망을 찾아, 사랑을 찾아 모험을 떠난다. 하지만 이미 모험을 떠났던 이들은 가슴에 절망과 파멸, 또는 허무를 안고 돌아와 우리 곁에서 잠든다. 20세기 후반 이후를 물들이는 건 이들이 남기고 간 ‘심상치 않은 어두운 그림자’이다. 그 그림자의 존재를 아는 몇몇의 진지한 이들은 그 그림자를 벗어나기 위해선 몇 백 년 전부터 시작된 그 모험의 존재를 규명하기 시작한다. 그건 한때 위대하다고 칭송받았던 모험의 유산들을 하나둘씩 끄집어내어 ‘이것 때문이야. 이것 때문에 우리가 그림자 속에서 살아가게 된 거야’ 하고 불평하고 욕을 하는 행위들인 것이다. 꼭 샤를이 죽은 에마가 숨겨왔던 사랑의 유산들을 보고 절망하고 끝내 그건 운명이라고 말하게 되는 것처럼, 오늘의 몇몇 진지한 이들도 근대의 유산들을 다시 꺼내보면서 끝없이 절망하게 된다. 그렇다. 샤를이 끝내 에마를 버리지 못하는 것처럼, 우리도 우리들을 너무 사랑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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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별 연습 - 10점
로랑 모비니에 지음, 이재룡 옮김/현대문학


Apprendre 'a finir 이별연습
로랑 모비니에 지음, 이재룡 옮김, 현대문학


오늘, 광활한 대륙에서 밀어닥친 차갑고 건조한 바람들이 검은 아스팔트 위를 낮게 깔려 지나가는 순간, 지친 표정들로 고개를 숙인 채 걷는 사람들 사이에서 그녀를 보았다. 순간 나도 모르게, ‘난 당신을 알아요’라고 큰 소리로 부를 뻔했다. 다행히도 난 황급하게 손으로 입을 막았고 그녀는 날 보지 않고 오던 길처럼 나머지 길도 그렇게 걸어갔다.

우리는 때때로, 아무도 나의 말을 들어주지 않는다는 것을 알면서도 이야기하는, 이야기해야만 하는 경우가 있다. 한때 그것은 ‘아무도 듣지 않는다’에 대한 강력한 부정, 또는 누군가가 내 말을 듣게 만들겠다는 의지의 표현이라고 여겨졌다. 하지만 이제 우리에게 ‘아무도 듣지 않는다’는 사실을 바꿀 힘이 없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이러한 인식은 ‘아무도 들어주지 않는 상황 속에서의 이야기하기’라는 행위가 다름 아닌 아무도 듣지 않는다고 믿고 있는 자기 자신에 대한 부정으로 이어지게 되었다.

현대 소설에서 종종 볼 수 있는 지나친 자기 고백 투의 문장이나 표현, 독백의 형식, 1인칭 시점의 남발 내지는 1인칭의 상실은 외부 세계에 대한 절망의 인정이 자아에 대한 끊임없는 공격과 폭로로 이어지게 되었고 현대 소설가들은 그러한 양식을 찾게 된다.

하지만 아무도 나의 말을 들어주지 않고 내 사랑의 단어들이 내 작은 입술에서 나오자마자 얼어 뚝뚝 떨어진다면, 그래서 내 바램이나 내 희망, 사랑 따위가 아무런 힘도 발휘하지 못하고 무너져 내릴 때, 어떻게 외부 세계에 대한 묘사나 표현이 가능하단 말인가. 어떻게 그런 일이 가능한 것인가.

오늘 차고 건조한 거리에서 보았던 그녀도 그러했다. 그녀.

이제 언제라도 기둥에 페인트를 칠해줄 사람이 생겼다. 터진 구멍을 메우고 금 간 벽을 새로 발라줄 남자. 쥐똥나무가 담 밖으로 넘어가거나 측백나무가 질식할 것 같으면 무거운 전지가위를 번쩍 들 수 있는 튼튼한 손과 정확한 눈대중을 지닌 사람이 생겼으니 이제 걱정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이제 누군가가 생긴 것이다. 그 사람이 언젠가는 회복되리란 것을 나는 알고 있다. 내일. 그 사람이 바로 내일 돌아올 거라는 소식을 들었다.
- p.7

그가 돌아온다는 소식에 흥분하는 그녀. 하지만 그는 바람난 남편. 그 남편이 돌아오는 것임을 우리는 한참 지난 후에야 알게 된다. 그녀는 그 사실을 숨기고 싶었던 게다. 그녀.

내가 그를 사랑한 적이 없었다는 말을 그 누구라도, 심지어 그 사람이라도 그런 말을 내뱉는다면 결코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 아, 그래요? 내가 당신을 사랑하지 않았다니? 라고 맞받아쳤을 것이다. 오로지 당신을 가까이에서 볼 수 있는 권리만을 위해 모든 것을 잊은 여자에게 내가 당신을 사랑하지 않는다는 말을 할 수 있나요. 자존심을 죽이고 당신만 바라보고 있는 여자에게. 당신이 다른 여자를 사랑하는 이유가 오로지 그 여자만이 당신을 제대로 볼 수 있고 나는 당신 앞에서 그저 눈을 내리까는 수밖에 없다는 당신의 생각까지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여자에게, 그래요, 맹세컨대, 그토록 애쓰는 여자에게, 그래요, 맞아요, 당신의 선택, 당신의 취향, 당신의 삶 앞에서 눈을 내리까는 여자, 아니, 눈을 감고 당신의 분노의 숨결을 자기 입안에 담아두는 여자에게 그런 말이 나오나요.
- pp.123-4

하지만 그런 일은 생기지 않는다. 하나로 견고하게 구축된 이 소설은 그녀 자신을 향한 그녀의 독백에서 시작해 그녀의 독백으로 끝난다. 군데군데 타인의 목소리가 들어오긴 하지만, 그녀의 독백에 휩싸여 그녀의 독백을 보충할 뿐이다. 소설은 절대로 그녀의 영혼 바깥으로 나가지 않는다.

이 세상은 털끝만치도 변하거나 움직이지 않을 것이고 심지어 미동도 하지 않겠지만 우리, 바로 우리만이 자칫하면 언제라도 쓰러지고 흔들리고 말 것이며, 우리의 살갗, 미소, 분칠을 한 우리의 얼굴, 심지어 우리의 머릿속에 있는 우리 삶의 역사까지도 아차 하는 순간, 한줄기 바람만 불어도 몽땅 휩쓸려 날아가 버릴 것이다.
- p.103

아차 하는 순간에 결정 나버리는 우리 인생하며, 우리 사랑하며, 아차 하는 순간 날아가 버리는 우리를 둘러싼 모든 것들, 우리 삶의 의미들. 우리에게 사랑은 얼마나 멀리 있는가. 멀어져 가는 우리들의 사랑을 잡기 위해, 길게 뻗은 손가락 끄트머리에 그 사랑의 자취라도 묻히기 위해 끊임없이 우리 스스로에 질문하고 위로하며 화를 내고 절망한다. 아직 희망은 있다고. 아니 희망이 있다고 믿는 건 나의 부질없는 믿음일 뿐이니, 여기서 그만 포기하라고, 아니, 그것은 거짓말이라고, ... ... 뫼비우스의 띠처럼 그렇게 돌고 돌면서 사랑을 잃어버린 그녀의 독백은 이어진다. 그 위로 사랑과 이미 멀리 있는 우리들의 독백이 겹친다.

그는 나의 이름을 부르지 않을 것이다. 젊은 시절에는 이름을 우습게 여기고 그저 ‘우리’라고 부르면 족했고 그 우리가 모든 기적을 일으켰지만 이제는 더 이상 ‘우리’라고 부를 일도 없을 것이다.
- 소설 서두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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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바이야트 - 10점
에드워드 피츠제럴드 지음/민음사





The Rubaiyat of Omar Khayyam
E. Pitzgerald.
이상옥 옮김, 민음사 세계시인선 12







오, 지옥의 위협이여, 천국의 기약이여!
한 가지는 확실하오, 인생은 덧없는 것
이 한 가지 분명하고, 나머지는 거짓일세
제 아무리 고운 꽃도 지고 나면 그만이니
- 63편




19세기에 번역된 11세기, 또는 12세기 아랍의 시집. 그러고 보면 거의 천 년 가까운 세월이 흘렀지만, 그 옛날, 같은 하늘이라고 생각되지 않을 법한 곳의 시인의 시집이 후에 유럽에서 번역되어 나왔을 때, 사람들이 보였을 감동이나 열광을 생각을 해보면, 이 세계가 아무리 많이 변했다고들 하나, 이 인생들의 본질적인 영역의 변화는 없었다는 것이 확실해진다. 그러므로 우리가 가진 것들이 옛 것과 비교해 가치 있다거나 우월하다고 생각하는 건 참으로 어리석은 짓이다.

현대인들의 대부분이 지옥도 천국도 없다고 믿는 이유는, 적어도 학교에서 있다고 가르치지 않는 이유는 고작 몇 백년 밖에 되지 않은 서양 근대의 산물이며 그렇게 생각해야만 명석 판명한 지식을 쌓을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지, 지옥이나 천국이 없다고 합리적으로 논증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단지 논증불가능하기 때문에 잠시 고개를 돌리고 있을 뿐. 어찌 알겠는가. 지옥이 있고 천국이 있을지.

하지만 지옥이 있든 천국이 있든, 11세기 아랍 사람이나 21세기 동아시아사람이나 한결같이 인생은 덧없다고 생각하고 있으니.


슬프다, 장미꽃 시들면 이 봄도 사라지고
젊음의 향내 짙은 책장도 덮어야지!
나뭇가지 속에서 고이 울던 나이팅게일
어디서 날아와서 어디로 갔나
- 96편 



인생은 참 덧없다. 청춘은 한순간이고 시간이 지나고 얼굴의 주름이 늘어날수록 세상은 공포스러운 것으로 변하고 데카르트의 방법론적 회의는 생각하는 나 속으로 무너져 내린다. 슬프다. 대학 시절 서로의 꿈을 이야기하던 이들은 이 도시 어느 구석진 곳에서 세상의 먼지를 잔뜩 뒤집어쓴 채 나타나 도시의 욕망을 이야기한다. 젊음의 향내는 책 속에서 잠들어있고 해마다 겨울은 어김없이 찾아온다.

허무주의란 그렇게 특별난 것이 아니다. 단지 그것에 어떻게 저항할 것인가가 문제일 뿐. 세상이야 원래 허무했던 것이고 인생사가 다 그렇고 그런 것이었고 생의 가치라든가 인생의 의미라든가 하는 것도 다 말장난에 불과하다는 것을 현대인들은 나면서부터 알고 있는 듯하다.

영원한 건 없고 사랑은 언제나 덧없이 왔다가 덧없이 사라진다. 아마 많은 이들이 이 시집을 두고 연구논문이나 책들을 펴내었을 것이다. 도대체 그들은 무엇을 배운 것일까. 이 시집을 읽고서.


생사의 갈림이야 수학으로 풀어보고
인간의 영고성쇠(영고성쇠) 논리로써 따지거니
헤아려 보고자 한 모든 것 중에서도
깊은 이치 터득한 건 술의 묘미뿐이로다
- 56편 



이제 남은 건 술뿐이구나. 내일은 오지 않을 것이고 가슴 아팠던 어제는 이미 지나갔으니, 오늘은 맘을 놓고 즐겨야겠구나. 아, 텅 빈 주머니가 초라하게 하지만, 그런들 어떠리오.


죽음의 술잔 든 저승의 천사
강가에 앉아 있는 그대 찾아와
그대의 영혼에게 잔을 권하면
사양 말고 들이키오, 그 한잔 술을
- 43편 



삶과 죽음을 가로지르는 것. 그리고 그것을 극복하는 방법들 중의 하나. 몇몇 위대한 예술가들이 가르쳐주는 방법. 생의 허무를 긍정하고 그것을 위해 한 잔 술을 들이키는 것. 희망이니 가치니 의미니 하는, 이런 쓰레기 같은 것들은 잠시 손 끝에서 놓고 그 빈 손으로 술잔을 쥐고 춤을 추며... ...


천국이 별것인가, 욕망 충족의 환영이요
지옥이 별것인가, 어둠 속에 던져진
불붙은 영혼의 그림자일 뿐, 우리 모두
그 어둠에서 나와 다시 거기로 돌아갈 몸
- 67편 



덧없이 흘러가는 사랑을 잡으며 흘러갈 사랑을 노래하자.


남몰래 속삭이며 대답하는 술잔이여
그대 또한 한때는 살아서 마셨으리
고분고분 입맞춤을 받아주는 입술이여
얼마나 많은 입맞춤 주고 또한 받았는가.
- 36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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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로잡힌 영혼 - 8점
마르셀 라이히-라니츠키 지음, 서유정 외 옮김/도서출판빗살무늬




마르셀 라이히-라니츠키, <사로잡힌 영혼>, 빗살무늬



재미있게 읽었지만, 마음에 걸리는 부분이 많다. 그것은 라니츠카가 생각하는 문학이나 예술과 내가 생각하는 그것들과 많은 부분에서 틀리기 때문이다. 또한 그는 작가들을 자기애에 가득찬 인물로 매우 공격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그러나 자기중심적이거나 자기애에 대한 판단이나 간략한 상황 설명만 있을 뿐, 깊은 분석은 없다. 분명 수긍할 만한 구석이 있기는 하지만 그냥 자기 생각나는 대로 서술했을 뿐이다. 자기 느낌대로.

라니츠기의 문학에 대한 사랑은 무척 감동적인 구석이 있기는 하다. 하지만 현대 작가나 예술가들이 고민하고 방황하는 것에 대한 아무런 통찰도 없어 보인다. 그는 삶과 유리된, 세계와 유리된, 그렇게 자족적으로 구성된 문학의 세계를 읊고 싶은 것이지, 문학이 반영하고 있는 하나의 삶이나 그 삶이 처해있는 현실 세계에 대해선 아무런 관심도 없어 보인다.

그는 교묘하게 자신의 권위를 내세우면서 자신의 평가를 누군가에게 알리는 데 있어 탁월한 재능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간결하면서 정곡을 찌르는 말. 라니츠키를 돋보이게 하는 부분이다. 이 책에서 그러한 그의 능력은 유감없이 발휘되고 있다. 하지만 라니츠키에게 문학은 구원이었겠지만, 현대의 예술은 ‘예술은 그 누구도 구원할 수 없다’는 것이 주요한 테마들 중 하나이다. 고작 자기변명이나 자기 합리화에 불과하다고. 그리고 그것마저도 폭로해버리고 있는데.

분명 이 책은 쉽게 읽히고 그러면서 저자는 글의 중심을 잃지 않는다는데 큰 미덕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그가 생각하는 문학이나 비평은 나에게 있어 아주 오래된 고전 문학을 읽는 듯한 느낌을 가져다주었을 뿐이다. (이것만으로도 이 책은 읽을 만한 가치가 충분하다. 이 정도로 열성적이며 대중적인 비평가를 우리 문학은 가지고 있지 못하니. 그것이 안타까울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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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중 곡예사 - 10점
폴 오스터 지음, 황보석 옮김/열린책들



폴 오스터, Mr.Vertigo, 열린책들.




'공중곡예사'라는 번역 제목은 썩 성공적이지 못하다. 차라리 '미스터 버티고'나 '현기증씨'가 낫지 않을까.(그만큼 이 소설 속에서 '현기증'이라는 소재는 매우 중요하다. 소설 속에 아주 짧게 언급되지만, 주인공 인생에 있어 한 계기를 마련하기 때문이다.)

살아가면서 중요한 것들이 여러 개가 있는데, 그 중 하나가 '거리감'이다. 가령 고등학교 때 친구가 건네준 빨간 포장의 말보루를 가슴 깊숙이 삼키고 난 다음 펼쳐지는 거리 풍경과 팽창하는 동공과의 거리 변화 따위나 대학 때 옆에 사모하는 여자를 앉히고는 연거푸 데킬라 스트레이트 잔을 여러 잔 마시고 손을 뻗쳐 그 여자의 얼굴 위로 갖다댈 때, 손가락 끄트머리와 그 여자의 볼 사이의 거리, 그 거리가 지니고 있는 어떤 푸른 빛깔의 팽팽한 긴장감 따위가 그러한 거리감의 예가 될 수 있을 것이다.

'내가 물위를 처음 걸었던 것은 열두 살 때였다'라고 시작하는 이 소설은 허공으로 몸을 띄우게 되는 한 남자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그런데 여기에서 몸을 띄운다는 건 어떤 특별한 의미를 지니고 있는 것은 아니다. '내가 모든 수학 문제를 다 풀 수 있었던 건 열두 살 때였다'라든가 '내가 컴퓨터 바이러스를 만들어내었던 건 열두 살 때였다'라든가 하는 문장으로 시작해도 별로 달라질 것은 없다는 말이다. 단지 현실적인 가능성이 희박한, 어떤 우의적인 사건을 통해 소설의 여러 사건들을 끌고 가게 만드는 폴 오스터 특유의 장난이다.

이 소설 전체가 이러한 장난으로 구성되어 있다. 삶을 그대로 관통하지 못하고 어떤 기만적인 태도, 즉 인생과, 혹은 이 세상과 어떤 거리를 두고 그 사이를 장난으로 채워버리는 폴 오스터 특유의 태도가 이 소설에서도 고스란히 드러난다. 실제로 이러한 태도로 인해 폴 오스터를 싫어하는 독자들이 있기도 하다.

내가 폴 오스터를 선호하는 이유는 바로 이러한 기만적인 태도에 있다. 이 기만적인 태도를 이해하는 것은 폴 오스터 뿐만 아니라 현대 소설을 이해하는 데 무척 중요한 길잡이를 한다. 꼭 로베르토 무질의 <<세 여자>>에서 어렴풋이 보았던 외부세계에 대한 태도가 폴 오스터에게 와서 그대로 재연되고 있는 셈이다.

그러고 보면 이 소설은 어떤 교훈적인 것도, 인생에 있어 어떤 통찰도 말하지 않는 듯이 보인다. 아니 어떤 통찰을 말하는 것 같지만(월트의 입에서 나오는 이상한 말들, 가령 '그러면 당신 몸 속의 공허함이 당신 주위의 공기보다 더 가벼워진다'따위의 말), 다 우스개소리다. 몸을 허공에 띄울 수 없다는 건 누구나 알고 있는 것이고 이 소설은 몸을 허공에 띄우기를 강요하는 소설이다. 이 어긋남은 읽는 이로 하여금 약간의 우울함 따위를 선사하는데, 그 이유는 몸을 허공에 띄우든 띄우지 못하든, 우리 인생은 이미 조각나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하기 때문이다. 이미 우리 인생은 우리 인생이 아니고, 우리를 인도해줄 어떤 사람도 없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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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터 한트케, "어두운 밤 나는 적막한 집을 나섰다", 문학동네.



힘들게 읽은 작품. 몇몇 뛰어난 문장들이 눈에 보임. 그러나 전체적으로 어떤 내용인지, 그냥 일반적인 소설 읽듯이 읽어선 접근하기 어려움.

구성의 치밀함이 있는 듯 하나, 그것을 알기에는 지하철은 무척 안 좋은 공간이었음. 힘든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는 현대인들에게 가장 적당한 텍스트는 헐리웃 영화인 듯함.

이 소설, 무척 재미없음. 예술이 대중과 멀어지는 이유는 그 어떤 것도 이 세상에 대한 해답을 가지고 있지 못하기 때문인데, 페터 한트케의 작품도 여기에 포함됨.

최근 라이프니츠의 '모나드'를 다시 떠올리게 되었는데, 그 이유는 예술이 스스로의 담을 쌓고 그 속에서 완결된, 무척 행복한 자기 변명의 구조를 만들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임. 그런데 이것은 천천히 현대인의 삶을 구축해 내가고 있음.

전형적인 여행 소설임. 여행이라는 측면에서 보자면, 무척 훌륭함. 자기 완결적 구조를 가지고 있음. 떠남과 돌아옴의 순환 구조. 영혼의 성장을 테마로 함. (그러나 이것은 작가의 의도된 거짓말일 수 있음. 때때로 위대한 서사시의 저자들이 행하였듯이 어떤 '환상'에 충실하게 봉사한 것일 수 있음)

나중에 다시 기회가 된다면, 읽어보겠지만, 다시 읽는다 하더라도 재미없을 듯함.

(* 페터 한트케는 전후 독일 문학에 있어서 무척 중요한 작가이다. 그러므로 내가 한트케의 세계를 낯설게 받아들이는 경우일 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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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벌레, 클라스 후이징, 문학동네



책벌레를 읽었다. 정독 요하는 책이다. 하지만 건성으로 읽었다. 문장이 좋지 않았고 스토리를 끌고 나가는 스타일도 흥미진진하지 않았다. 그 이유는 하나의 스토리가 전개되는 것이 아니라 두 개의 스토리와 하나의 말많은 양탄자로 구성되었기 때문이다.

무척 치밀한 구성이었지만, 나는 한 권의 소설을 원했지, 자신의 주장을 담은 논문을 원했던 건 아니다. 하지만 이 책이 우리에게 던지는 질문: "책은 과연 무엇인가?"

책을 읽으면서 책이 무엇인가에 대해 고민해보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왜 우리는 책을 읽는 것일까. 한동안 이 고민을 해야할 것이다. 에코의 <장미의 이름>이 한 권의 책에 대한 것이듯, 진시황제가 모든 책을 불 태웠듯이, ... 책은 무척 중요한 것인데, ...

2002년 9월 : 다시 떠올려보아도 이 소설은 극적 긴장감이나 감동이라고 하는 측면에서 떨어진다. 주제가 너무 분명한 경우 그것을 담는 스토리가 어떻게 전개되어야하는가에 대해서 이 소설가는 아직 잘 모르고 있는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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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만 아는 정원이 있다 - 10점
이경림 지음/이룸


파란 하늘이 위로, 약 이십킬로미터 정도 끝없는 우주 쪽으로 올라갔다. 그랬더니 조금 넓어진, 또는 매우 넓어진 하늘을 메우기 위해 공기들이 이리저리 재빨리 움직이며 바람을 만들기 시작했다. 해마다 삼월 초면 이런 일이 생기곤 했다. 하늘이 먼저 움직이고 뒤따라 공기들이 움직였다. 옷깃 사이로 공기들이 밀려들어왔다 밀려나갔다. 꼭 파도 같았다.

방 구석 오래된 책장 속에서 '정원'을 페이지 속에 숨긴 책 한 권을 꺼내들었다. 숨긴 정원의 크기를 가늠할 방법은 없었지만 내가 책을 들고 흔들자, 우수수 작은 나무며, 푸른 잔디며, 둥글고 맨들맨들한 돌맹이들이 떨어져내렸다. 꼭 한겨울 함박눈처럼 내려 금새 방을 가득채웠고 열린 창을 넘어 골목길을 채우기 시작했다.

정원에 익숙하지 못한 도시의 주민들이 문을 열고 나와 정원을 숨긴 책 한 권을 들고 있는 나에게 삿대질을 하기 시작했다. 오늘 종일 플라스틱으로 만든 작은 쓰레받기로 떨어져있는 나무며, 잔디며, 돌맹이들을 책 속으로 집어넣어야만 했다. 몇 시간을 했는지 모르겠다. 그러다 돌맹이 하나가 바람에 밀려 하늘로 올라갔다.

바람이 조금 더 세게 부니까, 나무며, 잔디들도 따라 하늘로 올라갔다. 하늘로 올라가 싱그러운 향기를 뿌려댔다. 무척 좋은 향기다. 삿대질을 하던 주민들도 나와 그 향기를 맡으려고 했다. 그건 좋은 글에서만 맡을 수 있는 향기였다.

오랫만에 무척 좋은 향기를 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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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스칼 키냐르, '은밀한 생', 문학과 지성사



나는, 내가 읽으면서 몽상할 수 있는 그런 책을 쓰려고 한다.
나는 몽테뉴, 루소, 바타유가 시도했던 것에 완전히 감탄했다. 그들은 사유, 삶, 허구, 지식을, 마치 그것들이 하나의 몸인 듯 뒤섞었다.
한 손의 다섯 손가락들이 무엇인가를 붙잡고 있다.
- 제 32장, 292쪽.


소설 1 : 이제 소설은 몽상과 개인의 독백만을 중얼거리기 시작한다. 소설에 있어 Reality란 실제의 세계(real world)를 반영할 때 사용되는 것이 아니라, 한 개인에게 있어 진실한 것, 하나의 고백(confession)일 경우에 Reality라는 단어가 사용된다. 인과란 무시해야하는 것이며 이리저리 방황하는 우리들의 영혼을 위해 달콤하고 지적인 사랑의 단어들은 전통적인 소설이 가져다주지 못한 그 무엇을 가져다준다.

포스트모던적 인생 : 앤디 워홀의 욕망. 이미지들로 자신을 채우기. 현대의 적극적이고 대중적인 예술가들의 전략. 끊임없는 자기 노출과 대담한 행위와 인터뷰. 대중의 욕망 위로 겹쳐진 예술가의 모습. 그 뒤로 사라져버리는 실제 예술가. 하지만 포스트모던적 인생이 격하기 그지없는 허무한 날개짓이라면, 은밀한 생은 ... ...

은밀한 생 1 : 아름다운 대중 혐오증. 아무도 자신을 이해해주지 못한다고 믿는 현대의 어떤 병에 대한 작은 치료법.

은밀한 생 2 : 사랑에 대한 독백. 사랑하고 있다는 고백. 사랑했던 자들에 대한 회상. 사랑에 대한 독서. 사랑에 대한 낙서. 하지만 사랑은 책 속에만 있고, 사랑은 독서에만 있고, 사랑은 몽상 속에만 있고, ... 사랑은 ... ...

소설 2 : 뛰어난 작가들이 숨어사는 작은 성. 하지만 시간이 흘러가고 그 성의 모습도 바뀌는 법. 이제 시간도 공간도 아무 의미를 가지지 못한 채, 오직 우리 영혼 속에서만 가치있는 것... ... 추상의 세계, 몽상의 세계 속으로 여행. 그 여행의 이름. 은밀한 생. 또다른 이름의 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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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 클레지오, 우연, 앙골라 말라, 문학동네





인생에는 여러 가지 종류가 있다. 그리고 그것을 보여주는 여러 가지 방식이 있다. 르 클레지오는 그러한 그것이 가지고 있는 어떤 신비, 어떤 매혹을 보여주고자 한다. 그리고 그 신비와 매혹이 현대 문명에 의해 무너지는 모습까지도 시적인 풍경으로 묘사한다.

무척 아름다운 소설이지만, 르 클레지오의 화법이나 문장에 익숙치 않은 사람은 꽤나 지루해할 만한 소설이다. 지극히 현대적인 소설이긴 하지만, 그것을 쉽게 드러내지 않는다.

한국에서도 이국적인 분위기를 자아내는 소설이고 프랑스에서도 무척 이국적인 분위기를 자아내는 소설일 것이다. 다음 기회에 르 클레지오의 문학 세계를 다룬 글을 올릴까 한다. 따지고 보면 르 클레지오의 문학 세계는 이해하기 힘든 구석이 많다.

아마 이삼년 전에 이 소설을 읽었다면, 난 무척 재미없어 했을 것이다. 어떤 이가 나이에 따라 읽히는 소설이 틀리다고 했는데, 그런가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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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도 아닌, 동시에 십만 명인 어떤 사람 - 10점
루이지 피란델로 지음, 김효정 옮김/문학과지성사




<<아무도 아닌, 동시에 십만 명인 어떤 사람Uno, nessuno e centomila>>
루이지 피란델로Luigi Pirandello, 1926.(김효정 옮김, 문학과 지성사, 1999)





살아가는 게 버겁다. 소박하고 순수하던 고대의 풍습은 시간의 바람 속에서 먼지가 되고 훗날 그 먼지들을 모아 새로운 성(城)을 쌓지만 그 성은 우리가 지어, 들어가지 못한 채 버림당하는 곳으로 남겨진다. 그럼 이제 우리는 어디로 가야하는 걸까. 선량한 우리, 아벨에게서 왔지만 그가 가졌던 양들은 이제 우리에게 남아있지 않고 그 몇 천년 동안 푸른 언덕이며 깊은 호수며 그 곳을 가득 메우고 있던 새와 물고기들은 몇 미터의 높이로 쌓인 먼지들의 먹이가 되어버렸다. 아, 이제 우리는 어디로 가야하는 것일까.

모스카르다. 그는 거울을 보면서 그 거울 속에 누군가가 있음을 깨닫게 된다. 그가 아닌, 낯선 이방인. '나를 보여지게 할 수는 있지만 나를 볼 수 없는' 어떤 이방인.

그 순간 책을 읽던 나도 책을 덮고 거울 앞으로 간다. 거울에 비친 나를 본다. 그런데 과연 거울 속의 나는 나일까. 나란 도대체 무얼까? 나, I, Je, 我, ... ...

진지한 학문과 예술은 참된 어떤 것을 찾아가면서 거짓되고 허상인 것들을 폭로하고 비판한다. 그러다가, 아뿔싸! 거짓과 허상의 중심에 '나'가 있다는 사실을 깨닫기까지 현대인에게는 그렇게 오랜 시간을 요구하지 않는다. 

이제 나를 포함한 모든 것들이 거울 속으로 들어가고 나는 없다. 나란 없는 자(nobody).

'아무도 아닌, 동시에 십만 명인 어떤 사람'은 아주 사소한 계기. 어느 날 문득 거울 앞에 서서 나는 누구이고 내 인생은 무엇이고 ... ... 이런 자질구레하고 매우 일상적이지만, 때때로 진지하고 성실한 사람에게 있어 극히 치명적인 질문으로 인해 고통받는 한 인물을 묘사하고 있다.

포스트모더니즘의 중요한 주제인 '주체의 분열'이란 실제로는 모더니즘의 것이다. 그건 현대(Modern)의 학문과 예술이 19세기말부터 의문시해온 어떤 근본적인 반성과 관련되어 있다. 모스카르다의 정신 나간 듯한 말투에서 우리는 우리들의 치명적인 자화상과 마주한다. 나를 찾기 위해서 방황하고 노력하지만 그러면 그럴수록 고립당하는 우리 자신들과.

'주체의 분열'이란 진정한 자아를 찾아가는 모더니즘적 방식이다. 그리고 보다 중요한 것은 '분열 이후'다. 우리는 진정한 나를 찾아가기 위해서 무수한 위험과 고통을 감내해야 하지만 과연 우리는 진정한 나를 찾을 수 있을까? 그것은 가능할까?

"그것은 묘비명, 즉 이름 외에 아무 것도 아니다. 죽은 자들에게 편리한 것이다. 인생은 끝나지 않았다. 그리고 인생은 이름을 모른다. 이 나무는 새로 난 나뭇잎이 흔들릴 때 호흡한다. 나는 나무다. 나무이자 구름이다. 내일은 책이나 바람이 된다. 다시 말해 내가 읽는 책. 내가 마시는 바람이 된다. 그 모든 것이 외부에서 방랑한다."(240쪽)

덧붙임 : 자신의 삶을 후기 구조주의자들에게 의지하기 말기를 바란다. 그들의 뛰어난 재능은 우리에게 어떤 실마리를 가르쳐주기는 하지만, 그들은 실패한 자들임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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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의 노래 - 10점
김훈 지음/생각의나무



김훈(지음), <<칼의 노래>>, 생각의 나무




내 몸 속에, 내 가슴 속에 죽여야 할 것들이 너무 많아, 소설의 짧고 단단한 문장들 틈 속에서 소리죽여 울어야만했다. 하지만 죽여야할 것들은 죽임을 당하기 전에 내 몸 속, 내 가슴 속에서 날 공격했고, 소설 속 화자인 이순신이 죽여간 왜며, 부하며, 조선포로며, 전과를 말해주기 위해 짤려져, 소금에 절여진 머리통 위로 내 얼굴이 떠올랐다.

말은 비에 젖고
청춘은 피로 젖는구나

젊은 왜가 칼에 새겨놓은 저 글귀는 이내 내 영혼을 파고들고, 나를 버려도 내 육체를 버리지못함이 한없이 슬프고 내 몸짓들의 까닭없는 부정들이 날 공포 속으로 밀어붙인다.

"사랑이여 아득한 적이여, 너의 모든 생명의 함대는 바람 불고 물결 높은 날 내 마지막 바다 노량으로 오라, 오라, 내 거기서 한줄기 일자진(一字陣)으로 적을 맞으리."

짧게 소설가 김 훈에 대해서 생각했고 조금 길게 이순신에 대해 생각했고 소설을 읽으면서 내내 피로 물드는 전쟁과 인생의 무의미함과 사랑, 그 아득한 적에 대해서 생각했다. 그리고 늘 그렇듯이 답이란 없었고 내일은 아무도 모르는 것이었다.

말이 길어지면 요점이 흘려지고 인생은 미궁 속으로 빠져 헤매이게 된다. 그러니 말은 짧고 수사는 최대한 억제해야만 한다. 그러면 요점은 분명해지고 인생은 제 갈 길을 가는 것처럼 보인다. 그런데 분명한 요점은 무엇이며 제 갈 길을 가는 인생이란 과연 무얼까.

이 소설 속의 이순신의 독백 사이로 김훈의 목소리가 들리는 것은 이 때문이다. 앞만 쳐다보고 가는 문장들. 그래서 베어지고 억제되고 간결해지면서 스무살 처녀의 몸매처럼 아름답지만 까닭 없이 슬퍼지는 건, 왜 앞으로 가는가에 대해 이순신도 모르고 김훈도 모르기 때문이다.

아주 오랜만에 소설을 읽으면서 울었다. 내 가슴 속 죽여야할 적들을 죽이지 못함을, 이 소설은 함께 울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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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전에 검색을 하던 중... 지하련님이 칼의 노래에 대한 서평을 쓰셨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일부러 읽지 않았습니다. 지하련님의 글에 압도될까봐요 ^^;; 그래서 제 서평을 쓰고 와서 읽었습니다. 먼저 읽지 않길 잘 했습니다 ^^

    저도 소설을 읽으며 이순신 장군과 김훈 작가를 생각했습니다. 저는 오히려 김훈 작가에 대해 더 많이 생각을 한 것 같네요. 일년쯤 지나 다시 한번 읽고 싶은 책입니다.



나의 미카엘 - 10점
아모스 오즈 지음, 최창모 옮김/민음사



내가 이 글을 쓰는 것은 내가 사랑하던 사람들이 죽었기 때문이다. 내가 이 글을 쓰는 것은 어렸을 때는 내게 사랑하는 힘이 넘쳤지만 이제는 그 사랑하는 힘이 죽어가고 있기 때문이다. 나는 죽고 싶지 않다.
- p.7

하지만 한나는 죽는다. 그녀의 사랑하던 힘이 죽고 그녀의 기억들이 죽고 그녀의 꿈들이 죽는다. 그녀가 간직하고 있었던 모든 사랑과 모든 기억들로부터 떠남으로써 그녀는 나에게, 혹은 우리들에게 그녀의 슬픈 죽음의 날개를 보여준다. 그런데 그 검은 날개가 눈에 익다. 우리들의 눈에 익숙한 그녀의 검은 날개.

때때로 증명할 수 없는 물음들이 우리들을 인생의 고통 속으로 빠뜨리곤 한다. 꼭 ‘넌 날 사랑하니’라는, 그 어떤 대답으로도 채워지지 못하는 깊은 정답의 우물을 채우기 위해 지쳐 가는, 그래서 끝내 헤어지고 마는 戀人들처럼.

한나는 언제나 꿈을 꾼다. 꿈 속에서 그녀는 공주이지만, 갑자기 生의 포로가 되어 쫓기기도 한다. 그러나 미카엘, 나의 미카엘은 언제나 침착하고, 합리적이며, 조심스럽다. 그는 언제나 한나를 위해 성실한 몸짓을 보여준다. 그 성실함이 한나는 너무도 싫다. 아니 그것이 부럽다. 아무 것도 증명해 줄 수 없는 이 세상 속에서 그토록 성실하고 합리적일 수 있다는 자체가 부럽다. 그 성실함에 대한 질투가 한나로 하여금 늘 꿈 속으로 도망치게 한다. 하지만 이제 한나는 꿈을 꾸지 않기로 했다. 왜냐면 그토록 자신의 생을 억누르고 있던 사랑의 힘을 포기하기로 했기 때문에.

아모스 오즈가 29살에 쓴 이 소설은 뜨거운 여름 햇살 속에 숨어 있다가 갑자기 視線을 먹어버리는 자외선과도 같다. 그래서 이 소설을 읽기 위해선 ‘난 사랑 따윈 믿지 않아’라는 상표의 선글라스가 필요하다. 이 선글라스를 가지고 이 소설을 읽는 사람이라면 『나의 미카엘』은 너무나도 행복한 소설이다. ‘그것 봐, 사랑은 믿을 수 없는 거야, 한나’라면서 웃을 수 있기 때문에. 그러나 난 이 선글라스는 한 여자의 생일선물로 줘버렸고, 이젠 없다. ‘나도 죽고 싶지 않다’라면서 한나의 목소리에 내 목소리를 싣는다. 나도 사랑을 하고 싶지만, 사랑할 힘이 이젠 남아 있지 않다. 어느 老詩人의 ‘사랑할 시간이 많지 않다’라는 시집제목은 얼마나 행복한 속삭임인가. 하지만 한때 사랑하는 힘이 넘쳤던 사람에게 사랑을 믿지 말라는 소리는 죽음을 뜻한다. 한나의 꺼져가는 목소리는 4월의 흐린 창가에서 부서지는 내 잃어버린 사랑의 소리와 닮아 있다. 그래서 나도 한나와 함께,


나는 지나친 요구를 하지 않는다. 저 유리만 투명했으면, 그것이 전부다.
- p. 1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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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수 (양장) - 10점
파트리크 쥐스킨트 지음, 강명순 옮김/열린책들


향수 - 어느 살인자의 이야기
파트리크 쥐스킨트 지음. 열린책들



이 소설을 읽은 독자들이 한결같이 열광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내가 읽기엔 너무 끔찍스러운 이 소설은 영웅주의와 유미주의가 뒤섞인 채, 인간에 대한 혐오와 자기 파괴로 일관되어 있다. 그르누이는 이 소설이 시작할 때부터 인간이 아니었다. 그르누이적 세계-냄새로만 자기 정체성이 구성되는 세계 속에서 그르누이는 인간의 냄새를 가지지 못했기 때문에 인간이 아니다. 인간이 아닌 자라는 정체성은 그가 바로 신적인 지위에 있는 존재라는 것은 소설의 시작부터 은근히 암시하고 있는 셈이다.

그러면서 그르누이는 향수 제조인으로서의, 비평적 용어로 말하자면 예술가 소설의 전형적인 주인공에 속한다. 자신을 매혹시키는 향기를 소유하기 위해 그가 하는 행동은 극단적 유미주의로서 '아름다움' 이 외에 이 세상의 절대적 규범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준다.

하지만 이 소설은 독자들에게 당신들도 그르누이가 혐오하는 인간들 중의 한 명이며 그래서 그르누이가 당신의 옆으로 지나갈 때, 그르누이가 쳐놓은 향기의 저주 속으로 빨려들어갈 것이며 그르누이의 영혼을 알지 못할 것이라며 끝없는 조롱과 저주를 퍼붓고 있다. 이것은 쥐스킨트가 바로 독자에게 퍼붓는 독설인 셈이다.

너무 우습지 않은가. 이 소설을 읽고 열광하는 독자들의 어리석음이란. 난 이 소설이 끔찍하기 그지없는데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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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홀한 밤Enchanted Night>>, 스티븐 밀하우저 Steven Millhauser, 1999.(윤희기 옮김, 아침나라, 2000)


짧고 서정적인 문장. 하지만 소설의 첫 장이 불러일으키는 감동은 그렇게 오래 가지 않는다. 왜냐면 어느 여름 밤의 풍경을 병렬적으로 나열해놓았을 뿐, 어떤 스토리나 사연을 가지고 있지 못하기 때문이다.

밤의 합창

이 밤은 계시의 밤. 인형들이 깨우는 밤. 다락방 몽상가의 밤.
숲에서 피리 부는 자의 밤.
(11쪽)

문장 하나 하나는 간결하고 깊다. 영어로 된 원작을 읽고 싶어진다. 그러나 소설이 가져야하는 미덕을 이 소설은 갖추지 못했으니 선뜻 누군가에게 추천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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빵굽는 타자기 - 8점
폴 오스터 지음, 김석희 옮김/열린책들


빵굽는 타자기
폴 오스터(지음), 열린책들


우리 시대는 근대 개인주의의 어떤 극점에 와 있다. 그리고 그 개인주의를 기반으로 하고 있는 소설가가 바로 폴 오스터이다. 그는 어떤 인도주의나 어떤 정치적 이데올로기를 대변하지 않고, 아니 그런 것들에 심한 경멸감을 내비치면서 누군가에 대해 이야기하는 작가이다. 그래서 한 순간도 냉정을 잃지 않으며 감정의 쓰잘데기 없는 부분을 보이지 않는다. 그래서 그의 글은 차가우며 어떤 점에선 매우 매력적이고 부럽기까지 하다. 그러나 문제는 여기에서 생긴다. 이것은 과연 미덕인가, 악덕인가.

<빵 굽는 타자기>는 폴 오스터의 자서전 비슷한 것이지만, 꼭 자서전이라고 말하기도 어렵다. 누가 알겠는가. 허구일지. 따지고 보면 진실에 기반한 자서전이란 없는 셈이다. '진실'이란 없는 것일지도 모르기 때문에.

<빵 굽는 타자기> 속의 '나'는 글을 쓰는 사람이다. 그러나 그가 글을 어떻게 쓰고 어떤 고민을 하는가 따위는 나오지 않는다. 문장이나 혹은 세계관 따위, 우리가, 흔히 예상하는 그런 것들은 나오지 않는 것이다. 나오는 것은 작중 화자인 '나'가 겪는 인물들과 사건들에 대한 것이다. 그러나 그 인물들과 사건들은 어떤 극적 요소를 지니고 있는 것은 아니다. 그 전에 나의 시선에 의해 걸러지기 때문에 독자들은 그 인물과 사건들에 대해서 어떤 평가를 내릴 수 없다. 즉 독자는 작가가 던져주는 평가에 만족해야 한다. 매우 권위적인 방식이다. 그러나 그것이 사라진다면 이 책은 아마 쓰레기들 중의 하나가 되었을 것이다. 그러니 이것을 악덕이라고 부를 수도 없다.

문제는 우리 시대가 폴 오스터의 세계를 인정하고 있다는 것이다. 오직 '나'만이 존재하는 시대. 그 끝은 어디일까.

**********

뒤에 나오는 희곡 세 편은 읽지 않았다. <로렐과 하디, 천국에 가다>,<정전>, <숨바꼭질>. 재미있어 보이진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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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일지(지음), <<새>>, 민음사, 1999.





과연 우리들은 우리들의 바램대로 행동하고 말하는가? 오늘날의 우리들은 고작 스스로 결정 내리고 자신의 의지대로 행동하고 있다고 믿고 싶어할 뿐이다. 그리고 이 욕망(믿고 싶어함)은 거대하고 천박하기 그지없는 현대의 문화를 만들어내고 있다. 왜냐면 진실을 숨길 수 있는 건 새로운 거짓말이기 때문에. 거짓된 사랑, 거짓된 행복을 진실이라고 믿음으로서 우리들은 우리들의 욕망을 채우고 있는 것이다. 끊임없이 스스로에게 이것이 진실이라며 최면을 걸면서 하루하루를 살고 있는 것이다. 이로 인해 현대의 키치는 나름대로의 의미를 획득한다. 그 의미가 거짓이며 자기기만이더라도 우리들은 키치 속에 파묻혀 살아가는 것이 적어도 덜 고통스럽고 덜 외롭기 때문이다.

이 소설에서 '새'는 A의 운명을 뜻한다. 그리고 그 운명 이란 소설의 시작부터 정해져 있었던 것. 그래서 이 소설 속의 그 누구도 운명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모두 이미 정해 진 자리에 서있을 뿐, 독자는 정해져 있는 소설을 읽을 뿐 이다. 이 소설에서 가장 흥미진진한 부분이란 A가 몇 몇의 여자들을 정해져 있는 순서대로 만나 몸을 껴앉고 키스를 하는 곳이며, 그 외의 부분이란 아무런 의미도 가지지 못한 다. 왜냐면 그만큼 A의 인생이, 우리들의 삶이 아무런 의미 도 가지지 못하기 때문에.

아마 몇 명의 평론가들은 이 소설이 현실과 가상의 세계가 뒤엉켜있다고 하겠지만(그러면서 자신들의 현학적 취미를 뽐내겠지만), 과연 그 가상의 세계가 현실과 얼마나 멀리 떨어져 있는 곳일까? 불행하게도 이러한 구분은 이 소설에서 아무런 쓸모도 지니지 못한다. 이미 A의 운명을 정해져 있었고 그것을 벗어나는 방법이란 아무 것도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A의 모든 행동들이란 외부의 사건에 대한 반발작용임으로 해서 바깥의 세상은 더욱 철저하게 A를 정해진 게임의 규칙 속으로 밀어 넣을 뿐이다.

결국 우리들은 한 마리의 새들이다. 각각 정해져 있는 길 위에 서서 끊임없이 새와 부딪히며 결국 새가 되었거나 될 것이다. 돌아가야 할 가족이 있다거나 도망치고 싶은 현 실이 있다거나, 현실의 그 어떤 것이 자신의 행동을 규정하 는 순간 우리는 어쩔 수 없이 검은 새가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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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프랑스와 모리악, 『바리사이 여인』, 안응렬 옮김, 삼성출판사, 1988.


우리는 우리의 불같은 정념이 우리의 삶에 어떤 고통을 안길 것임을 안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얼음 같은 이성도 우리의 삶에 그러할 것임을 안다. 그러니 우리의 삶 전체는 어떤 고통의 그림자로 덮여있는 것이다. 하지만 그 그림자를 깨닫기란 얼마나 힘든 일인가.

우리의 믿음이 유한한 인간의 어리석음에 기초하고 있고 우리의 사랑이 자신의 씨를 퍼뜨리기 위한 본능에 기초하고 있다는 사실은 얼마나 끔찍한 불행인가.

타인을 알기 힘든 만큼, 아니 그것보다 자신을 알기란 더 힘든 것이다. 자신의 믿음은 더욱더. 인생의 황혼이 어떤 고독과 고요함 속에 묻히는 이유는 자신의 거짓을 하나하나 깨닫기 때문이다. 하지만 브리지뜨의 강철같은 믿음은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생의 고통 속으로 밀어 넣었는가.

우리의 눈과 입이 어떤 미망(迷妄) 속에 있을 때, 우리는 우리의 죄악마저도 품에 안고 길을 가야만 한다. 악만이 악을 낳는다고 여기지만 우리의 선한 사랑도, 선한 믿음도 죄악을 낳을 수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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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프카의 아포리즘』, 이윤택 엮음, 청하, 1989.


아포리즘을 가지고 뭔가 논리적인 이야기를 한다면 그것은 잘못된 방식이다. 왜냐면 아포리즘으로 문학적 완성도를 논할 수 없으며 단지 작가의 세계에 대한 짤막한 평만을 할 수 있는데, 이것마저도 다른 작품들을 거론함으로서만 가능하다. 그리고 그렇게 할 때 작품이 주가 되고 이 아포리즘은 참조 사항이 되어야 할 것이다. 그러니 이 글은 고작 책에 대한 값어치 없는 짧은 감상에 지나지 않게 될 것이다.

때때로 길을 가다 자신과 똑같은 버릇이나 습관을 지닌 사람을 만난다. 그리고 사랑에 빠진 이들은 서로의 공통적인 버릇이나 습관을 발견하는 순간 어리석은 그물로 그들의 영혼을 둘둘 만다. 공통점을 가진다는 것은 우리가 인간이라는 사실을 한 번 더 말해주며 이 분류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을 다시 한 번 상기시킨다. 그리고 카프카의 아포리즘을 읽는 우리는 그것으로 인해 고통받는다. 카프카의 고독과 우울이 그리 멀지 않은 장소에 서서 나를 바라보고 있는 것을 알아채는 순간 삶은 화려한 봄날의 빛깔을 잃어버리고 뛰어난 작가의 불행한 삶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것이다.

죽는 것보다 살아가는 것이 더 쉽고 절망하기보다는 희망을 가지는 것이 더 쉽다. 이 얼마나 끔찍한 생의 저주인가. 그래서 우리는 죽은 사람들을, 절망한 사람들을, 그 속에서 벌벌 떨며 자신의 고독과 마주한 사람들을 옆에 두기를 바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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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스타프 김의 슬픈 바다> - 문화일보 2000년 신춘문예 소설 당선작
읽고 난 다음 커피를 끓이고 있는 동안, 그 짧은 동안 이 소설에 대한 나의 평가는 달라졌다. 아니 그것보다는 막상 이 소설에 대한 감상이나마 짧게 기록해두기 위해 자리에 앉는 순간 달라졌는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그 이유는 무엇일까? 읽고 난 다음에는 '매우 재미있는 소설'이라는 생각했으나 지금 달라진 이유는 무엇일까?

'소설은 무엇보다도 재미있어야 한다'라고 말했을 때, 그것은 대중소설들의 '표피적 재미'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표피적 재미로 따지자면 엄청난 자본력으로 만들어지는 할리우드 영화가 가장 재미있을 것이며 매일 저녁마다 집집의 티브이 브라운관을 채우는 오락 프로그램들도 표피적 재미에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것이다. 그래서 소설이 이런 뉴의 문화들과 대결하고자 하는 순간 소설의 자신의 자리를 잃고 그간 지켜왔던 문학의 자리를 상실할 것이다. 가끔 소설가들이나 문학평론가들이 모여 대담을 하는 자리에서 ‘대중들에게 보다 더 가까이 다가가는 문학이 나와야 된다’라는 등의 말이 오고 가지만, 정말로 그렇게 해야만 될까? 언제나 대중들이 옳은 것일까? 나는 문학의 엘리트주의를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그들이 약간만 정직하게 우리의 삶이 어디로 흘러가고 있는가를 살펴본다면 그런 류의 말을 하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이 소설은 사건의 결과부터 먼저 제시하면서 시작된다. 그리고 또한 망명한 북의 외교관을 중심으로 이루어지기 때문에 독자의 눈을 쉽게 잡아끈다. 왜냐면 이것은 전형적인 추리소설의 방식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소설에는 사건의 추리는 등장하지 않고 약간 지루해 보이는 작중 화자의 회상이 주를 이룬다. 또한 이 소설의 낭만주의는 서툴고 사소해 보이기까지 않다. 그러나 신춘문예란 말 그대로 신인들의 무대이고 작품의 완성도보다는 이 소설가가 얼마만큼 가능성이 있는가를 알아보는 장이라는 이유로 이 소설은 그 만큼의 가능성은 가지고 있다라고 여겨진다. 무엇보다 낯선 소재를 끌고 나가는 힘을 지니고 있으며 서툰 낭만주의이지만 인물들의 심리를 정직하게 드러내었고 자칫 무거운 분위기로 나갈 수 있는 사건의 무게를 잘 조절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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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재하지 않는 기사 - 10점
이탈로 칼비노 지음, 이현경 옮김/민음사



존재하지 않는 기사, 이탈로 칼비노, 민음사


1.
모든 것들이 '희극'으로 결론 나는 이 소설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행복한 결말'이라고 말하지는 못할 것이다. 왜냐면 '존재하지 않는 자'에 의해 존재하는 자들(우리들)은 '의미'를 가지기 때문이다. 그리고 동시에 존재하지 않는 자로 인해 의미를 가졌기 때문에, 그 의미란 '자기기만'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소설은 우리에게 말하고 있다. 그러나 그것이 '자기기만'이라 하더라도 '사랑'은 그만큼 가치가 있는 것일까?

현대란 보이는 세계의 화려함과 편리함, 또는 현란함 속에서 보이지 않는 세계의 힘에 의해서 아슬아슬하게 지탱되는 시대이다. 그리고 이 아슬아슬한 지탱이 얼마 가지 못할 것임을 알고 있다. 마치 존재하지 않는 기사가 그 존재를 유지해 나가듯이 말이다. 그리고 이럴 경우 우리 인간들이란 그 아슬아슬함과 비례하는 만큼의 허황된 희망을 품는데, '포스트모던 사회'란 바로 그런 허황된 희망으로 축조된 사회이고 포스트모던 사회 속의 우리들은 그 희망이 우리들에게 아무런 것도 던져주지 못할 것임을 알면서도 그러지 않을 경우 더 끔찍한 상황 속으로 내몰리는 까닭에 끊임없이 그 희망을 소비해야만 하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존재하지 않는 기사'란 매우 상징적인 인물로 떠오른다.

존재하지 않는 기사는 자신이 존재하지 않음을 증명하는 방법으로 '존재함'을 택한다. 그러나 이것은 정확하게 말해 불가능한 것이다. 꼭 꿈 속의 소녀를 잊지못해 그 소녀를 그리며 그 소녀가 현실 속으로 걸어나오길 바라는 젊은 화가의 바램만큼이나 불가능한 것이다. 그래서 이 바램이 이루어지는 유일한 방법이란 현실 속의 누군가를 꿈 속의 소녀라고 믿는 것뿐이다. 그러나 그 믿음이란 과연 가능할까? 그래서 존재하지 않는 기사는 계속 자신의 존재를 유지해나갈 수 있을까?

2.
"천만에! 모두 꾸며낸거야. ... ... 그는 존재하지 않아. 그가 하는 행동도 말도 아무 것도, 아무 것도 존재하지 않아. ... ..."라고 말하는 토리스몬도는 그가 말하는 그 순간까지만 정당하고 그 이후로는 그 어떤 정당성도 가지지 못한다. 그가 믿는 성배기사단도, 그가 믿는 어머니도, 그가 믿는 신념도, 그런 의미에서 그는 '근대적 인간'을 표상하고 있는 셈이다. 꼭 존재하지 않는 기사가 존재하듯이 그가 믿는 바도 그와 비슷하게 존재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결국 근대적 인간들로서 우리가 믿고 있는 그 모든 것들이 '존재하지 않는 기사'인 셈이다.

구르둘루는 존재하지 않는 기사와의 대비로 인해 매우 흥미롭다. 하지만 애초부터 실패한 인물이다. 왜냐면 그는 '존재하기는 하지만 자기가 존재한다는 것을 모르는 자'임에도 불구하고 소설의 서사를 위해 그는 아질울프의 명령에 따르며 동시에 그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끊임없이 되새기게 되기 때문이다. 애초부터 사유로서만 존재하는 자와 연장으로만 존재하여 자연의 모든 대상과 자신을 동일시하는 자와의 만남에서 우리는 어쩔 수 없이 사유의 승리를 다시 보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브라다만테는 자신의 이상을 위해 불가능한 사랑을 꿈꾸며 계속 존재하지 않는 기사를 쫓는다. 그리고 프리쉴라는 오직 언어로만 존재하는 자에게 매혹당한 채 "그 사람은 남자야, 진짜 남자야, ... ... 하룻밤 내내 천국이었어......"라고 말하고 만다.

자신의 존재를 알지 못하고 칸트적 의미에서의 즉자(en soi)로서만 구르둘루는 존재하지 않는 기사 앞에선 자신의 존재를 때때로 깨달으며, 브라다만테와 프리쉴라는 존재하지 않는 남자에게 빠지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들도 소설을 읽어나가면 존재하지 않는 기사에게 매혹당하기 시작한다.

하지만 어떤 기사와 싸워도 이길 것처럼 보이던 아질울프는 자신의 존재가 거짓에 기초하고 있다는 사실을 토리스몬도에게서 듣고는 그것이 거짓이 아님을 증명하기 위해 소프로니아를 찾아나서지만 시간은 그의 편이 아니었다. 브라다만테가 사랑하였고 프리쉴라가 매혹당했으며 그 어떤 전투도 그의 하얀 갑옷에 흠집 하나 만들지 못했던 위대한 기사가 한 사람의 잘못된 믿음으로 인해 영혼에 깊은 상처입고 사라지는 것이다.

그리고 람발도는 '투구를 향해, 갑옷을 향해, 떡갈나무를 향해, 하늘을 향해 몸을 돌리며 아질울프를 불렀'지만, "기사님! 갑옷을 입으세요! 프랑스 군대와 귀족 사회에서 기사님의 지위는 분명해졌습니다!"라고, "기사님, 당신은 존재합니다, 이제 어느 누구도 그 사실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라고 외쳤지만, '갑옷은 똑바로 서 있지 못했고 투구는 땅에 굴러떨어'지는 것이다.

3.
존재하지 않는 기사가 남긴 <이 갑옷을 로실리오네의 기사 람발도에게 남기노라.>라는 쪽지는 존재하지 않았지만 존재했던 근대의 신념이 탈근대의 우리들에게 무엇을 요구하고 있는가를 말하고 있다. 그래서 람발도는 그 하얀 갑옷을 입었고 그녀 앞에, 브라다만테 앞에 선다. 그리고 그를 아질울프라고 믿는, "드디어 당신이 저를 찾아 달려오시는군요, 잡히지 않는 기사님!"라고 소리치는 브라다만테는 람발도라는 사실을 알고는 놀라 수녀원으로 들어간다. 그리고 이 순간, 소설 속 이 소설을 써나가는 수녀가 브라다만테라는 사실을 드러나는 순간, 모든 사건들은 허구의 미로 속으로 사라져버린다.

그리고 우리는 이제 람발도가 그 존재하지 않는 기사가 되었다는 사실을 인정해야할 것이다. 그는 달려오는 브라다만테에게 '나 역시 서투르게 행동하는 그런 남자의 하나에 불과하다는 걸 넌 모르겠지? 행동을 할 때마다 욕망이나 불만족이나 불안을 조금도 숨기지 못하는 그런 남자라는 걸 넌 모르겠지? 내가 바라는 것 역시 자신이 원하는 게 뭔지 아는 사람이 되는 거야!'라고, 거짓없이 무언가에 충실하다는 사실만으로 우리들과 똑같이 존재하는 그 기사에게 희망을 걸어야할 것이다. 수녀가 된 브라다만테의, 람발도를 향한 사랑이 거짓으로 드러나더라도, 아마 사랑에 눈먼 어리석은 몸짓으로 람발도가 계속 그의 생을 꾸려나가기를 희망하면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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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체의 악마 - 10점
레이몽 라디게 지음, 김예령 옮김/문학과지성사




육체의 악마
, 레이몽 라디게(지음), 문학과 지성사




1. Passion

불같이 활활 타오르던 사랑이 식지 못한 채 여러 차례의 깊은 계곡을 통과한 다음, 끔찍한 파국을 맞이하게 되는 것은 그 사랑의 정념이 사악하기 때문일까? 혹은 불륜을 지속시키기 위해, 부도덕을 도덕으로 위장하기 위해, 그 순수한 사랑은 그 사랑을 타인들에게 숨겼다는, 그것만으로도 자신들의 사랑이 허약하다는 충분한 이유가 될 수 있다는 사실 때문에 스스로 상처 입은 것일까?

2. 불륜

나에게, 혹은 이 소설을 읽고 잔인한 쾌감, 아마 아리스토텔레스라면 자신만만하게 '카타르시스'라고 말했을 그런 쾌감을 느끼는 사람들 모두 도덕과는 거리가 먼 사람들일까? 그러나 불행하게도 '도덕적인 사랑'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왜냐면 모든 사랑이 모험이며 불륜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것의 반대편에 거짓과 기만으로 가득한 사회를 지속시키고자 하는 '결혼'이라는 제도가 존재한다.

15살의 나는 19살의 마르트와 밤을 보내며 사랑을 찬미한다. 그러는 동안 어두운 밤하늘 아래 별빛들을 엮어, 쓸쓸한 전장(戰場) 위에서 자크는 혼자 신혼의 집에 남겨진 아내의 얼굴을 그릴 것이다. 그리고는 기필코 이 전쟁에서 살아남아 사랑스런 마르트와의 행복한 결혼 생활을 꿈꾸는 것이다.

3. 행복

그녀는 머리를 저었다. "널 알기 전에 난 행복했어. 난 내가 약혼자를 사랑한다고 생각했고 그가 나를 잘 이해하지 못해도 용서했지. 그런데 내가 그 사람을 사랑하지 않는다는 걸 내게 가르쳐준 사람이 바로 너야. 내 의무는 네가 생각하는 그런 게 아냐. 내 의무란 내 남편한테 거짓말하지 않는 게 아니라 너한테 거짓말을 하지 않는 거야. 가. 그리고 내가 못된 사람이라고 생각하지마. 넌 곧 나를 잊을 거야. 네 인생에 불행을 초래하고 싶지 않아. 내가 왜 우는데. 너보다 나이가 많기 때문이야."(p.67)

길거리 위에서 사랑에 빠진 그들은 그들의 사랑과 적대적인 세상을 속이기 위해 남매처럼 행동한다. 하지만 임신한 마르트와 뱃속의 아이의 아버지라고 하기엔 아직 어린 16살의 나. 사랑을 속이지 않기 위해 세상을 속여야만 했고, 세상 속에 남아있기 위해 사랑을 속여야만 하는, 사회적 통념 하에서 허락되지 않고 오직 수다스런 여자들의 호기심 어린 시선의 대상일 뿐인 사랑. 그리고 그 사랑은 사랑한다는 이유만으로 스스로에게 상처 입히면서 파국을 향해 간다. 하지만 마르트는 불안해하는 나를 향해,

"나는, 너랑 있으면서 불행한 편이 그 사람과 있으면서 행복한 편보다 좋아."(p.162)

4. 존재이유(rasion d'^etre)

이 세상엔 사랑이란 없고 사랑에 속아넘어가는 사람들만 있을 뿐이다. 그리고 한껏 우아하고 아름다운 포즈를 연출하기 위해 자신의 영혼을 속이고 그 사랑이 진실이라고 믿고 싶어할 것이다. 마르트가 죽고, 16살의 나는 자신 앞에 놓여진 세상이 그 순간 빛을 잃고 침묵하며 아무 것도 아닌 것(無)으로 내려앉는 것을 바라본다. 그리고 남의 아이를 자기 아이라고 믿는 순진한 자크는 그 아이가 자신의 존재이유라고 말한다. 그렇다. 우리들의 사랑은 죽었고 그 사랑 때문에 우리들은 적이 되며 그 사랑을 죽인 세상은 오늘도 역겨운 사랑을 노래한다. 그리고 우리들 중 몇몇은 우리들이 추구할 것은 '사랑'이 아닌 '사랑의 행위'이고 그 속에서 '사랑'을 발견할 수 있으리라 믿는 것이다. (끝내 발견하지 못할 것임에도 불구하고, 너무나도 희망적인 우리들 중의 일부는 그렇게 믿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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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아하고 감상적인 일본야구 - 10점
다카하시 겐이치로 지음, 박혜성 옮김/웅진지식하우스(웅진닷컴)



<<우아하고 감상적인 일본야구>>, 다카하시 겐이치로 지음, 박혜성 옮김, 웅진출판, 1995
(* <20세기 일문학의 발견> 시리즈의 열번째 권).





1.
이 소설에 대한 감상문으로 적당한 문장은 이러하다. “다카하시 겐이치로라는 일본의 변태적 허구를 즐기는 작가가 쓴 소설을 읽었는데 말이야, 도통 무슨 말인지 모르겠어. 그런데 녀석 소설 하나를 잘 쓰더군. 뭐, 무슨 말인지도 모르는 소설을 읽고 잘 쓴다라는 따위의 말을 하는 것이 이상하긴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 다카하시 겐이치로라는 녀석이 ‘변태’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사라지는 건 아니야.” 하지만 이런 문장은 이 소설을 소개하는 글의 문장으론 적당하지 않다.

2.
소설 뒤에 붙은 박유하 교수의 해설은 이 소설의 이해에 별 도움이 되지 못한다. 그는, 고진의 책 <<일본근대문학의 기원>>을 번역한 사람이라는 것을 강조하기라도 하듯, 해설의 여기저기에 고진의 단어들을 아무런 꺼리낌없이 사용하고 있다. 하지만 과연 그런 단어들이 겐이치로의 소설을 말하는데 적당한가에 대해선 아무런 고민을 하지 않은 듯 보인다.

3.
이 소설을 읽으면서, ‘어떤 미친 놈이 이상한 소설 하나를 썼군’라고 생각하면서 즐겁게 웃었다면 이 소설을 정확하게 이해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즉 일반적으로 소설에게서 기대되어지는 것들-탁월한 문장력과 감동이나 교훈-은 이 소설에는 해당되지 않는다. 그야말로 스스로 쓰레기가 되기를 자처한 소설이다. 하지만 이러한 ‘자발적으로 키취화하려는 태도’로써 정반대의 효과를 이끌어내고 있다. 그래서 과연 오늘날의 야구가 과연 ‘우아하고 감상적’일 수 있는가하는 의문까지 가지게 한다. 그리고 동시에 오늘날의 소설들에 대해서까지도 ‘소설은 어떠해야 하는가’따위의 의문을 품게 만든다.

굳이 이 소설을 분류하자면 ‘메타픽션’쯤에 갖다 놓을 수 있는데, 왜냐면 이 소설은 소설쓰기에 대해서 근본적인 의문을 품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작가는 소설을 의도적으로 엉망으로 만들고 있다. 말도 되지 않는 것이 분명함에도 불구하고 카프카를 야구와 연관시키며, 그리고 소설 속의 모든 인물과 소재들은 야구를 향해 전속력으로 질주한다. 하지만 그 향해한 장소엔 야구는 존재하지 않는데, 소설 속 시점(時點)에서도 야구는 이미 존재하지 않는 것으로 나오며 또한 소설 속 인물들이 추구하는 야구라는 것은 우리가 알고 있는 야구와는 다른 야구이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다카하시 겐이치로가 이 소설을 쓰면서 가장 염두에 두었던 의도가 드러난다. 그걸 한 문장으로 말하자면 ‘적극적으로 말이 되지 않게 하기’이다. 그리고 이것은 소설에 대해서 일반적으로 가지고 있었던 기존의 생각과는 정반대되는 입장이다. 또한 소설은 어떤 유기적인 구조나 통일성을 결하고 있다. 이것은 구체적 형태의 야구의 부재와도 연관된다.

4.
이 소설은 전반적으로 세계에 대한 우리들의 ‘태도’에 대해서 묻고 있다. 소설 속 등장인물들이 야구에 대한 가지고 있는 태도들이 모여 분명 존재하지 않는 야구이지만, 이전과는 다른 새로운 야구(에 대한 태도)를 구성하고 있는 것처럼 그러한 태도의 변화를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소설에 대해서도, 이 세상에 대해서도 말이다. 하지만 궁극적으로 어떤 태도에서 어떤 태도로의 변화를 의미하는지는 분명하게 언급하지는 않지만, 그리고 이것이 이 소설의 약점이 될 수도 있겠지만, 글쓰기가 ‘마스터베이션’에 불과할 수도 있다라는 것을 다카하시 겐이치로는 분명하게 증명해내고 있다. 그러나 마스터베이션을 하고 난 다음 가지게 되는 허무나 자질구레한 감정 따위를 보여주지 않는다는 점에서 이 소설은 무언가를 우리에게 언급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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