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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아란 영혼

책들의 우주/문학 +255

깨어나라고 인어는 노래한다
호시노 도모유키 지음, 김옥희 옮김, 문학과지성사, 2002



전기가 흐르고 있는 듯한 밤이었다. 하늘 높이 매달려 있는 달은 거대한 백열전구가 되어 붉은 흙이 드러나 보이는 고원과 억새 들판을 빙하색으로 비추고 있었다. 개구리를 대신해 울기 시작한 가을 벌레가 지지직 하고 전자파를 보내, 나를 사로잡아 마음대로 조종하려 한다. 군청색의 투명한 대기를 뚫고 서늘한 공기가 섞인 바람이 살랑살랑 불어대 백금색으로 빛나는 억새 이삭을 흔들어, 밀려오는 파도와도 흡사한 소리를 끊임없이 내고 있다.
- 7쪽

미쓰오가 지금 빨고 있는 내 가슴도 오랫동안 냉장고에 넣어둔 과일처럼 생기를 잃어버렸다. 하지만 미쓰오는 눈치채지 못한다. 나는 화가 나, 좀더 나를 물체처럼 다루어달라고 낮은 목소리로 위협하듯이 말했다. 낮의 세계로부터 자취를 감추어버린 당신에 비하면 나 같은 사람은 언젠가는 썩어버릴 하찮은 물체에 지나지 않으니까.
- 10쪽~11쪽


<냉정과 열정사이>라는 이상하고도 낯선, 경박하면서 천박하기 그지없는 소설보다 호시노 도모유키의 소설을 읽으면 어디 덧날까 싶다. 하긴 호시노 도모유키의 소설은 재미없고 스토리의 핵심이 무엇인지 파악하기 힘들며 아름다우며 시적인 문장만 눈 앞에 어른거려 한 페이지를 다시 읽게끔 만드는 소설은, 지하철이나 직장 사무실에서 읽기에는 좀 버거운 소설이긴 하다. 이 소설을 읽으려면 딱 마음을 잡고 집 책상이나 햇빛 잘 드는 카페에 혼자 앉아 읽어야만 읽히는 소설이기 때문이다.

한 번 읽어보면 좋을 소설이다. 그 외 무슨 말이 필요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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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와 나비



아모도 그에게 수심(水深)을 일러 준 일이 없기에
흰나비는 도모지 바다가 무섭지 않다.

청(靑)무우밭인가 해서 나려 갔다가는
어린 날개가 물결에 저러서
공주처럼 지처서 도라온다.

삼월달 바다가 꽃이 피지 않어서 서거푼
나비 허리에 새파란 초생달이 시리다.




김기림 시집이 있었다. 가끔 꺼내 읽었는데, 누군가에게 빌려주고는 돌려받지 못했다. 그리고 빌려준 그 이는 먼 유럽으로 유학을 떠나버렸다. 한 밤 중에 바다와 나비라는 시를 작은 소리로 읽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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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십세>>, 잉게보르크 바하만(지음), 차경아(옮김), 문예출판사


1997년 가을에 이 책을 구입했으니까, 벌써 6년이 지나고 있는 셈이다. 대학 4학년이었으리라. 대학 도서관 구석진 곳에서 문고판으로 나와있는 이 책을 읽었다. 그 문고판 책에는 '오스트리아 어느 도시에서의 청춘'이 첫 번째로 실려 있었는데, 그 때, "쾌청한 10월, 라데츠키 가로부터 오노라면 우리는 시립 극장 옆에서 햇빛을 받고 있는 한 무리의 나무를 보게 된다. 열매를 맺지 않는 저 검붉은 태양의 벚나무 숲을 배경으로 하고 서 있는 첫 번째 나무는 가을과 함께 불타올라, 천사가 떨어뜨리고 간 횃불처럼, 어울리지 않게 금빛 찬란한 얼룩을 이루고 있는 것이다. 바로 지금 나무는 불타고 있다. 그리고 가을 바람도 서리도 나무의 불을 끌 수는 없다."라고 시작되는 문단을 읽고 경악했었다. 그 자리에서 이 짧은 단편을 다 읽었고 며칠 지나지 않아 이 책을 샀던 것으로 기억된다.

그리고 6년이 흐르고 있다. 그 땐 대학원을 들어갈 생각이었고 여기에 대해서 아무런 의심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난 시험에는 그다지 많은 재능을 가지고 있지 못한 듯 하다. 계속 떨어지기만 했으니.

우스개 소리 삼아 '내가 떨어지는 이유는 날 경쟁상대로 보는 대학 교수들 때문이야'라고 말하곤 하지만, 썩 유쾌해지지 못했다. 나로서도 왜 내가 대학원에 들어가지 못하는가에 대해서 의아스러운 지경이니. 그러고 보면 한국에서 대학원이 대학원으로서의 기능을 제대로 수행하고 있는가에 대해선 의심스럽긴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내 처지가 달라지는 건 아니다.

그러고 보니 내 나이도 서른을 넘겼다. 바흐만은 서른 살을 어떻게 보내었을까. 그러고 보니 그녀가 죽은 그 해 가을, 내가 태어났다. 그리고 금방 서른 살이 지나버렸네. 낮에 잠시 책을 읽다 말고 누워, '죽는다는 건 참 좋은 일이야' 라고 중얼거렸다. 그렇다. 이 세상을 살기 싫을 때, 싫증이 날 때, 혹은 다른, 어둔 하늘의 별만큼이나 많은 이유로 삶이 버거워졌을 때 죽을 수 있다는 건 참 좋은 일인 것 같았다. 그렇게 잉게보르그 바흐만도 죽었을까. 오늘밤 자기 전에 그녀의 시집을 읽어야겠다. 아주 오랜만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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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근원수필 (보급판) - 10점
김용준 지음/열화당


새 근원수필(近園隨筆)
(근원 김용준 전집 1권), 열화당



며칠이고 조용히 앉아 길게 읽을 책을 띄엄띄엄 산만하게 읽은 탓일까, 기억나는 것이라곤 오늘 읽은 술 이야기 밖에 없다.


“예술가의 특성이란 대개 애주와 방만함과 세사(世事)에 등한한 것쯤인데, 이러한 애주와 방만함과 세사에 등한한 기질이 없고서는 흔히 그 작품이 또한 자유롭고 대담하게 방일(放逸)한 기개를 갖추기 어려운 것이다.”

“술에 의하여 예술가의 감정이 정화되고, 창작심이 풍부해질 수 있다는 것은 예술가에 있어 한낱 지대(至大)의 기쁨이 아니 될 수 없을 것이다.”
(199쪽)


내가 기억나는 문장이 이렇다 보니, 인상적이었던 단어 또한 매화음(梅花飮)이었다. 뜻은 매화가 핌을 기뻐하여 베푸는 酒宴이라고 하니, 요즘 우리가 얼마나 세파에 찌들었는지를 알 수 있는 듯하다. 술이란 이렇게 자연의 기쁨에 취해 마셔야하는 것인데.

옛날에는 예술가의 가난은 응당 그러한 것이라 괴념치 않았는데, 요즘은 그렇지 못한 듯하여 슬프다. 나 또한 가난이 두려워하여 직장 생활을 하고 있으니.


“나에겐 H란 친구가 있소. H는 긴자 통에서 전차를 잡아타는 어떤 양장 미인의 각선의 아름다움에 홀려서 단번에 쫓아가서 그 여성의 다리에다 키스를 하였다 하오. H는 새로 닦은 구두가 반짝반짝 빛나는 것을 보면 그 매력에 취해서 때때로 핥아 보기 좋아하는 버릇이 있는 친구이지만, 이것 역시 그 신비스런 감각의 미를 느끼고자 함이 아니겠소?(전날 나는 H의 이 사건을 잡지에 발표하였다가 H에게 단단히 욕을 먹은 일이 있으면서도 지금 또 쓰는 것이요마는)
K란 친구는 미술학교 재학시대에 술에 취하여 학교 교실 벽을 뜯어 놓았고, N이란 친구는 카페에서 나체로 춤을 추었으며, R이란 친구는 술에 취하여 긴자 네거리에서 네 활개를 벌리고 춤을 추다가 신문사 카메라에 수용되었고, 나 역시 한때는 술을 먹고 ‘아바레루’(*난폭한 행동을 하다라는 일본어)한 죄로 나으리님 댁 뒷방 신세를 족히 끼친 일도 있고, 흥에 겨우면 길거리에 누워서 오고가는 행인들을 바라보면서 콧노래를 불러 본 적도 있으며, P란 친구는 친구들이 술을 먹으러 가잔다고 너무 좋아서 급히 내려오려는 마음에 이층 꼭대기에서 그대로 내려 뛰다가 전치 2주간을 요하는 중상을 입은 일도 있소”
(142쪽)


그러고 보면 요즘 예술 한다는 친구들은 술을 적게 하는 듯하다. 아니면 내가 겪어본 적이 없어서 그러한 것일까. 또한 돈을 벌기 위해 예술을 하는 이들이 너무 많은 듯하다. 뒤샹의 ‘샘’을 배웠으면서도 돈과 권력에 종속되어가는 이들을 보면 속된 말로 ‘뚜껑이 열린다’

이런 경우에 최북(催北)의 일화는 시사하는 점이 있다.


“최북은 언제든지 유리 안경을 끼고 다닌 애꾸였다. 일찍이 권세 있는 사람이 북에게 그림을 청하였을 때 응하지 아니하니, 그가 세도(勢道)로써 협박하므로 북이 대노하여 “내 몸은 오직 나만이 마음대로 할 수 있다”하고 눈을 찔러 한 편이 멀게 된 까닭이었다.”
(230쪽)


오원 장승업에 대한 글도 있는데 오원은,

“더구나 그림을 그릴 동안은 반드시 술이 옆에 놓여야 하고, 술이 놓였으면 반드시 미인이 그 옆에 있어야 하는 법이었다.”
(243쪽)


라고 하니, 부럽기까지 하다.

내 정신이 천하고 내 자유가 박하여 읽는 내내 즐거웠지만, 읽고 난 다음 슬퍼지는 게 어쩔 수 없는 내 신세를 한탄할 수밖에 없다. 그나저나 어제 술을 마시지 않은 것이 후회가 된다. 일요일 대낮부터 술을 마시고 싶어지니, 난 예술적 재능을 타고 나지 못하고 술을 좋아하는 것만 타고 난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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탁자 위의 세계 (Glass, Paper, Beans)
리아 코헨 지음, 하유진 옮김, 지호





잔뜩 달아오른 아스팔트 거리 위에 한바탕 빗줄기가 밀고 지나간다. 난 그 소리를 들으면서 이 책을 다 읽었다. 책을 처음 손에 들었을 때의 그 상쾌함은 어디론가 사라지고 이거 너무 오랜 시간 동안 잡고 있는 건 아닌가하는 생각에 마지막 부분은 건성으로 책장만 넘기고 말았다. 이 책을 쓴 이에게나 옮긴이에게는 매우 좋지 않은 일이지만.

이 책은 유리, 종이, 커피에 대한 책이며 유리를 만드는 사람, 종이를 만드는 사람, 커피를 만드는 사람에 대한 책이기도 하다. 많은 이야기가 여러 층을 나누어 전개되어 있다. 가령 종이가 생산되는 방식에서부터 종이가 역사적으로 어떤 변천이 겪어왔으며 현재에는 어떻게 소비되고 있는가를 잘 서술하고 있다.

하지만 난 왜 이 책을 이토록 재미없게 읽은 것일까. 짧은 생각이긴 하지만, 번역한 이의 문장 서술에 있는 듯하다. 특별한 오역이나 부적절한 문장이 있었다기 보다는 전체적으로 산만한 문장 진행 때문인 듯하다. 어떤 문장은 너무 짧고 내용을 다 담고 있지 못하다.

결국 원서를 사서 읽어볼 생각을 하게 만들었다. 이건 나의 주관적인 생각이다. 내가 좋아하지 않는 문장들로 이루어진 번역서임에는 분명하다. 다른 이들은 어떤지 몰라도.



탁자 위의 세계 - 10점
리아 헤이거 코헨 지음, 하유진 옮김/지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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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끄러움
아니 에르노, 열림원



‘부끄러움을 느끼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것은 내 부모의 직업, 그들의 궁핍한 생활, 노동자였던 그들의 과거, 우리의 존재 양식에서 비롯된 결과물이었다. 그리고 6월 일요일 사건에서, 부끄러움은 내 삶의 방식이 되었다. 아니, 더 이상 인식하지 조차 못했다. 부끄러움이 몸에 배어버렸기 때문이다.’
- 98쪽


글쎄, 이 소설이 재미있고 감동적이라며 선뜻 누군가에게 권할 수 있을까. 한 여자의 독백으로 시작해 그것으로 끝나는 소설은 소설이라기보다는 수필, 회고담에 더 가깝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 또한 프랑스 어느 작은 지방 도시 이야기는 너무 낯선 것이어서 호기심을 자아내기 보다는 이질적인 느낌만을 더할 뿐이다.

하지만 아니 에르노의 문장은 산뜻하고 사뿐했다. 그러니 글쓰기를 공부하는 이들에게 한 번 들춰 볼만한 책이 될 수도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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폐허의 도시 - 8점
폴 오스터 지음, 윤희기 옮김/열린책들


폐허의 도시
폴 오스터, 열린 책들




이야기는 안나 블룸이라는 여자가 그 도시로 오빠를 찾아들어가면서 시작된다. 하지만 그 도시는 정말 ‘폐허’였다. 그 풍경은 먼 미래, 무시무시한 핵전쟁 이후 무정부상태를 묘사하곤 하는 SF 영화들과 닮아있었다. 하지만 이 소설은 한 개인(안나 블룸)에게만 그 시선을 고정시키고 그녀의 실존적 환경에만 관심을 기울이기 때문에 대부분의 SF 장르 영화의 서사구조와는 틀리다.

그렇다고해서 장르 영화와 얼마나 틀릴 수 있을까. 끝까지 달성 가능한 희망을 명확하게 보여주지 않는다는 점에서? 1) 소설은 안나 블룸이라는 여자가 그 도시에 들어와 여러 우여곡절을 겪으면서 몇 명의 사람들과 함께 그 도시를 빠져나갈 계획을 세우는, 어느 겨울에서 끝난다. 소설의 시작은 그녀가 오빠를 찾겠다는 희망에서 시작하였고 소설의 끝은 오빠를 찾을 수 있으리라는 희망과 이 도시를 빠져나가리라는 희망으로 끝난다. 그러니 거칠게 말하면 희망을 이야기하는 소설이다.

이 소설은 작위적인 느낌이 강하다. 폴 오스터는 인간이 얼마나 희망적인가에 대해서 이해가 부족한 듯하며 이와 비슷하게 인간이 얼마나 잔인해질 수 있는가에 대해서 부족한 듯하다. 실제 이런 도시가 존재한다면, 아마 그 도시 정부에 참여하고 있는 몇 명은 정부를 전복시키기 위한 계획을 세운다거나 몇 개의 레지스탕스 조직들이 활동하며 도시의 여기저기에서 총소리가 들릴 법도 하다. 동시에 인간을 거래하는 조직이나 겨울이면 인간을 먹는 풍경을 보여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 소설은 적당하게 비극적이고 적당하게 슬프고 적당하게 희망적이다.

폴 오스터의 여러 소설들을 읽었지만, 이 소설은 폴 오스터의 한계를 여실히 드러내 보여주는 작품이었다. 이 소설에서 폴 오스터의 문장이나 태도와 소설의 서사가 서로 충돌한다. 다분히 팝(pop)적이다. 읽고 나면 안나 블룸 일행이 그 도시를 나갔을까 생각을 하게 되지만, 그것은 작가의 어설픈 결말에 지나지 않는다. 내가 보기에 폴 오스터가 묘사하는 폐허의 도시는 너무 어정쩡하다. 안나 블룸이 여러 사람을 만나는 과정도 엉성하고 묘사는 사실성이 떨어지며 에피소드들은 너무 가식적이다. 이 책을 읽을 필요는 없을 것 같다. 아마 소설을 많이 읽는 독자들이 잘못된 소설을 배울 가능성이 매우 높아 보인다. 얼핏 보면 재미있고 잘된 소설처럼 보이니 말이다.



1)안나 블룸이 지나온 일들을 돌이켜보자면, 그녀는 매우 운이 좋다. 즉 소설이 끝나고 소설 이후에 전개되었을 그녀의 삶도 그러할 것이라 독자는 생각할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 소설은 폴 오스터답지 않은 해피앤딩인 셈이다. 결과를 보여주지 않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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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양(斜陽)
다자이 오사무 지음, 유숙자 옮김, 소화.



둘이서 소리 내어 웃었지만, 웃고 나서 한없이 쓸쓸해졌다
- 25쪽

책을 읽다 졸음이 왔다. 휴대용 커피 한 봉지를 뜯어 탄 흐릿한 빛깔의 커피 한 잔을 마시자마자 졸음이 밀려왔다. 오래된 독일산 Dual 턴테이블에 척 맨지오니의 레코드판을 걸어두고 다자이 오사무의 소설을 읽으면서 졸음을 느꼈다.

그리고 잠을 잤다.

일요일 오후 몇 주째 엉망인 사각의 방 구석에서 선풍기 바람 속에서 낮잠을 잤다.

몇 시간이 지났을까. 밖으로 블랙 커피 빛깔로 변해 있었고 다시 사양을 펼치면서 지는 해 사이에 서있는 가즈코를 생각했다. 스물 아홉의 가즈코.

지금 일본 열도 어느 구석에선 장차 문학을 하리라 꿈꾸는 짧은 머리의 청년이 배낭을 싸고난 다음 지도를 꺼내 간단하게 다자이 오사무가 스쳐지나간 곳을 표시하고 있을 게다. 그리고 씩씩한 걸음으로 일본 열도의 여름을 가로지를 것이다.

나오지나 가즈코나, 또는 이 둘의 어머니나, 패전 일본의 분위기를 표상하고 있지 않나 싶다. 그러나 이것은 짐작일 뿐, 그런지 그렇지 않은지 나와는 관련없는 것이다. 표상하던, 표상하지 않던, 속물의 남자를 사랑하는 여자와 귀족의 굴레를 끝내 벗지 못하고 죽는 동생이나 귀족적 고고함으로 무장한 채 병들어 죽는 부인이나 ... ...

실제로는 살아야겠다는 욕망과 죽어야겠다는 욕망은 동일한 것일지도 모르겠다. 나오지는 살아야겠다는 욕망에 자살을 택했고 가즈코는 죽어야겠다는 욕망에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한 남자의 아기를 가지게 되었는지도. ... ...

실은 아무 것도 모르겠다. 짧은 소설인데, 여운은 무척 길다. 오래 만에 쓸쓸한 소설 하나를 읽었다. 눈물이 날 것같다. 펑펑 울고 싶다.

나는 장교에게로 달려가 문고본을 내밀고 고맙다는 인사를 하려 했지만, 목이 메어 말없이 장교의 얼굴을 쳐다보다 두 사람의 시선이 마주쳤을 때, 내 눈에서 뚝뚝 눈물이 흘렀다. 그러자 그 장교의 눈에도 글썽, 눈물이 반짝였다. - 5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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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주
방민호 문학산문집, 생각의 나무



문학산문집으로 내 기억에 남아있는 책은 김훈의 <선택과 옹호>, <풍경과 상처>, 기형도의 여행산문집이 전부다. 한 권을 더 붙인다면 김현의 <행복한 책읽기> 정도가 있겠다. 지난 주말, 방민호라는 젊은 문학평론가의 <명주>라는 산문집을 읽었다. 굳이 사서 읽을 만한 책은 못 된다. 책의 장정이 아깝다. 그는 왜 이런 책을 내게 되었을까. 그가 쓴 몇몇 비평문은 근래에 보기 힘든 글들인데, 그의 비평적 눈은 자신의 산문집에 대해선 아무런 제재도 가하지 못했나 보다.

그와 같은 학번, 80년대 중반에 대학 생활을 했던 이에게 이 책은 잠시나마 비릿한 추억으로 이끌고 갈 것이다. 90년대에 대학 생활을 한 나에게도 이 책은 잠시나마 대학 생활을 떠올리게 하였으니까.

내 대학 동기들은 뭘 하면서 지내는지 궁금하기도 하다. 별로 궁금하지 않기도 하다. 아직까지 내가 이런 책 리뷰 글이나 적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그들은 어떤 반응을 보일까. 생각해보니 등단을 해 활발한 문학 활동을 하는 이가 동기들 속에선 한 명도 없다는 것이 신기하기도 하다.

리버사이드 레이블에서 나온 몽크의 는 정말 좋은 앨범이다. 이 글을 적으면서 듣고 있는데, 이런 앨범을 LP로 소장하고 있다는 것에 뿌듯해지기까지 한다. 언제 기회가 닿으면 이 글을 읽는 이들에게도 들려주고 싶다.

그리고 이 책은 몇 달 서가에 꽂아두었다가 이 책을 좋아할 만한 사람에게 선물해야겠다.

****

몽크의 앨범이다. Thelonious Monk, Brilliant Corners. 1956. New York. Riverside RLP-12-226.

요즘 대형 음반가게에 가면 SACD로까지 나온 이 앨범을 구할 수 있다. 그냥 시디는 쉽게 구할 수 있고. LP는 구하기 힘들 것이다. 집에 몽크의 다른 앨범들을 LP로 몇 장 가지고 있는데, 이 앨범이 최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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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land Barthes, Incidents 작은 사건들, 동문선, 2003



검은 피부의 청년, 그가 입은 연두색 바지와 박하 크림색의 셔츠, 오렌지색 양말, 그리고 눈에 띄게 부드러워 보이는 빨간 구두
- 34쪽, 작은 사건들

그가 호모섹슈얼이었다는 사실을 잊고 있었다.

1979년 9월 17일
일요일인 어제, 올리비에 G가 점심을 먹으러 왔다. 나는 그를 기다리고 맞이하는 데 정성을 기울였다. 그런 나의 태도는 내가 사랑에 빠져 있음을 증명해 주는 것이다. 하지만 점심을 먹을 때부터 그의 수줍은 태도, 혹은 거리감이 날 두렵게 만들었다. 우리 관계에는 이제 어떤 행복감도 남아있지 않았다. 나는 그에게 잠시 낮잠을 즐길 동안 내 침대 곁에, 내 옆에 있어 달라고 부탁했다. 상냥스럽게 다가온 그는 침대가에 앉아서 그림이 있는 책을 뒤적거렸다.그의 몸은 아주 멀리 있었다. 팔을 뻗어도 그는 전혀 움직이지 않았고, 아무런 감정도 나타내지 않았다. 게다가 금방 다른 방으로 건너가 버렸다. 절망감 같은 것이 날 휘감았다. 울고 싶었다. 이젠 젊은이들과의 사랑을 포기해야 할 때임을 분명히 알 수 있었다.
- 129쪽

2층 커피숍 창가에 앉아 아래층을 보니, 20대 초반의 연인이 버스를 기다리면서 서로를 껴안고 있다. 남자의 얼굴은 힘이 있어 보이면서 어떤 확신이 있어 보인다. 여자의 얼굴은 보이지 않는다. 남자는 무릎 아래까지 내려오는 헐렁한 청 반바지를 입고 있었고 여자는 검은 색 정장을 입고 있었다. 그 풍경을 보면서 사랑의 단상을 떠올렸다. 롤랑 바르트가 쓴 책. 계속 몇 장 읽다 말곤 하는 책들 중의 하나. 바르트의 호모섹슈얼이 반영되어 있을까.

작은 사건들. 아무런 생각 없이 읽을 수 있는 책이다. 페이지는 쉽게 넘어가고 이국적인 풍경이 펼쳐진다. 상쾌한 수채화 같은 책이다. 매우 가벼운 산문집. 가벼워서 날아갈 것 같은. 어느 지중해 연안, 한적한 지방의 도시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풍경 같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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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의 테라스
파스칼 키냐르 지음, 송의경 옮김, 문학과 지성사



'은밀한 생' 이후 읽는 키냐르의 두 번째 소설이다.

전체가 거의 다 하얗게 보이는 드라이포인트. 빛에 잠식된 난간의 받침살들 뒤로 한 형상이 보인다. 나이 든 남자의 모습이다. 지그시 감은 두 눈, 흰 턱수염, 다리 사이에 들어가 있는 손, 테라스 위, 로마, 황혼녘, 하루 중 제 3의 시간, 저무는 태양의 황금빛 광휘에 휩싸여, 그는 자유로움과 살아있다는 행복에 흠뻑 취해 있다. 포도주의 몽상 사이에.
(78쪽)

기대한 만큼 감동적이지 않고 프랑스 내에서 화제가 되었다는 점이 의아스럽기까지 하다. 역자의 말에 따르면 그가 바로크 시대를 염두에 두고 이 소설을 썼다고 하지만, 그의 소설은 전혀 바로크적이지 않다. 극중 주인공의 판화 속에서 이루어지는 소설이면서, 판화 바깥에서 이루어지는 소설이라는 점에서 기존 액자 소설과는 다른 형태의 액자 소설인 것은 분명해 보인다.

즉 형식적인 측면에서 탁월한 액자 소설이라는 평가는 가능하다. 이러한 형식적인 측면을 무리하게 고수하다보니, 스토리는 허술하고 치밀하지 못하다. 띄엄띄엄 흩어진 사건들은 한 곳으로 모이지 못하고 이리저리 흩어진다.

절망에 빠진 사람들은 구석에서 살아가는 법일세. 사랑에 빠진 사람들도 모두 구석에서 살아가지. 책을 읽는 사람도 구석에서 사는 거네. 절망한 자들은 숨을 죽이고, 누구에게 말을 하거나 누구의 말을 듣지도 않으면서, 마치 벽에 그려진 사람처럼 공간에 달라붙어 살아가는 거야.
(7-8쪽)

그런데 우리 인생은? 우리 인생도 허술하고 치밀하지 못하지 않은가. 우리 인생을 수놓는 사건들도 하나로 모이지 못하고 띄엄띄엄 흩어진 채 여기저기로 흩어지지 않는가. 바로크 양식의 이념은 모든 움직임들이, 사건들이 하나로 모인다는 것이다. 그것은 양식의 형태적인 측면에서나 이념적인 측면에서도 동일했다. 근대 기계론은 이러한 바로크 양식의 철학적 반영이다.

바로크 시대를 배경으로 하는 이 소설은 바로크의 이념을 반영하지 않고 현대의, 모더니즘 이후의 이념을 반영하고 있는 셈이다. 그러므로 이 소설에서 바로크란 별로 중요한 키워드는 아닌 셈이다. 그저 소설의 시대적 배경이 된다는 것뿐. 과거란 가슴 아프지만 부정해야 되는 것이며 우리는 어딘가에서 떠나와 낯선 어딘가에서 죽어갈 것이다. 사랑은 자의에 의해서든 타의에 의해서든 이루어질 수 없는 그 어떤 것이며 예술은 수동적인 의미의 거울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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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의 노벨레
아르투어 슈니틀러, 자유출판사



“내 생각에는 우리가 그 모든 모험에서 무사히 벗어날 수 있게 한 - 실제와 그리고 꿈 속의 모험에서 - 운명에 감사해야 될 것 같아요.”

라고 알베르티네는 말하지만, 그로부터 100여년이 지난 지금, 알베르티네나 프리돌린 같은 인물은 존재하지 않는다. <메트릭스>라는 SF영화를 만들고 있는 워쇼츠키 형제가 키아누 리버스라는 배우에게 장 보드리야르의 <시뮬라시옹>을 읽게 했다는 사실은 이 소설 속의 주인공이 경험하게 되는 모험이나 꿈에 대해 우리가 갖게 되는 태도의 변화를 알 수 있게 해준다.

슈니틀러의 매혹적인 문장 속에서 세기말의 사랑과 성에 대한 이중적 태도는 이 평범한 부부의 삶 속에서 고스란히 드러난다. 알베르티네가 낯선 남자에게서 느끼는 성적인 매혹과 프리돌린이 벌이는 흥미로우며 자극적인 여행은 이들의 부부관계를 위협할 수 있을 정도이지만, 부부라는 관계 속에서 이루어지는 어떤 모험은 알베르티네의 말대로 무사히 벗어날 수 있는, 때로는 힘들게 여겨지긴 하지만, 19세기나 20세기 초만 하더라도 쉽게 봉합되는 종류의 것이었다.

하지만 이러한 봉합은 20세기를 지난 지금에서는 아무런 의미도 없다. 거짓과 위선이라는 가면을 통해 상처난 부위를 감추는 악덕을 불과 100년 전만 하더라도 가지고 있었으며, 이를 아르투어 슈니틀러는 맹렬히 공격하였지만, 이제 우리에겐 봉합할 수 있는 거짓과 위선은 남아있지 않다. 이러한 허위를 벗어나기 위해 노력했지만, 허위를 벗어나는 순간 고독한 방황과 절망만이 남는다는 사실을 깨닫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꿈의 노벨레라는 매혹적인 소설을 읽고 난 다음, 독자는 결말이 왜 이렇게 시시한거야 라고 말할 것임에 분명하다. 자극적이며 육체적인 사랑을 찾아 떠나는 프리돌린의 모습을 보고 싶어할 게다. 그래서 그의 모험이 보다 현대적으로 표현되고 허무하긴 하지만 자극적인 경험이 되길 바란다.

이런 귀결이 아니라고 해서 이 소설의 감동적인 면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한 번 책을 펼치기 시작하면 이 책을 다 읽기 전에 손에서 놓을 수 없을 것이다. 그 감동이 좀 철 지난 종류의 것이긴 하지만, <꿈의 노벨레> 뒤에 실린 <어느 극작가의 편지> 또한 감동적인 짧은 소설이다.

국내에는 자유출판사를 통해 번역된 것과 문학과 지성사를 통해서 번역된 것이 있다. 어느 것이든 상관없을 듯하다. 이번 봄이 가기 전에 한 번쯤 읽어보았으면 좋을 만한 소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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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거벗은 내 마음 - 10점
샤를 보들레르/문학과지성사




<벌거벗은 내 마음>, 샤를 보들레르
이건수 옮김, 문학과 지성사



종종 살아간다는 것에 대한 의미를 구한다. 이럴 때는 우리 인생이 우리 뜻대로 되지 않고 모순으로 가득차있다고 느껴질 때가 대부분이다. 사랑하는 아내의 키스를 받고 나선 사내의 트럭이 얼마 가지 못한 채 갑자기 튀어나온 자동차나 사람과 부딪히거나 몇 년 동안 준비해온 사업이 사소한 법률 조항 하나 때문이거나 어떤 이의 꾐에 의해 모든 걸 날려버리게 될 때 우리는 살아간다는 것에 대한 의미를 구하기 마련이다.

과연 살아간다는 건 무엇일까. 이런 물음에 이 책은 현명한 답을 주지 못한다. 예술은 무엇인가, 문학은 무엇이고 사랑은 무엇인가 따위의 물음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고작 이 책의 저자는, “세상은 오해에 의해서만 굴러간다./-모든 이가 의견 일치를 하는 것은 바로 보편적 오해에 의한 것이다./-왜냐하면 만약 사람들이 서로를 이해한다면 불행하게도 결코 의견 일치를 이룰 수 없기 때문이다.”라고 말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런 책을 읽는 이유는 무엇일까. 왜 사람들은 보들레르를 읽는 것일까. 참혹하고 끔찍하며 슬픔에도 불구하고 왜 보들레르를 이야기하는 것일까. 나로선 이해하기 힘들다. 보들레르를 이해하고 감동받는 이라면 분명 그는 제정신을 가지고 있다고 보기 힘들다.

나는 살아간다는 것, 보들레르를 읽는다는 것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다. 정확히 말해 살아가면서 보들레르를 읽는 것 말이다. 보들레르의 유려한 독설을 읽으면서 사람들은 무슨 생각을 하는 것일까. 하긴 이런 질문보다 먼저 내 생각을 이야기하는 편이 좋겠다. 보들레르의 이 산문집은 재미있는 편에 속한다. 하지만 일반 독자에게는 권하지 않는다. 시를 좋아하는 여대생에게도 권하지 않고 보들레르를 연구하는 이에게도 권하지 않는다. 시를 좋아하는 여대생은 이 책을 읽고 거부감을 표시하거나 아니면 쓰레기같은 동경을 가질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이와 유사하게 보들레르를 연구하는 이들은 보들레르가 한 문장 한 문장을 적어내려갈 때의 고통이나 번민, 세상에 대한 증오를 가슴으로 받아들이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면 이 책은 누가 읽어야하는 것일까. 번번이 실패하는 사랑으로 인해 자살을 마음먹은 사내나 버림받은 여자에게 어울리는 책이다. 즉 세상에서 버림받은 듯한 기분에 휩싸여있는 이들에게 이 책은 무척 유용할 것이다.

자고로 책은 먼저 쓸모가 있어야하는 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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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도 퇴를레스의 혼란
로베르토 무질 지음, 박종대 옮김, 울력.





‘지난 시대의 교육 정책에 대한 역사적 기록물’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는 일련의 소설들, 1891년의 프랑크 베데킨트Frank Wedekind의 <봄의 깨어남 Fruhlings Erwachen>, 에밀 슈트라우스 Emil Strauß의 <친구 하인 Freund Hein>(1902), 그리고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헤르만 헤세의 여러 소설들과 함께 무질의 이 소설 또한 그 시기에 유행했던 소설들 중의 하나이다.(1)

하지만 나이가 너무 든 탓일까. 아니면 그 때의 학교와 지금의 학교가 틀리기 때문일까. 안타깝게도 퇴를레스, 바이네베르크, 라이팅, 바지니, 이렇게 네 명의 소년들이 펼치는 흥미로운 학교 모험담은, 나에게는 무척 낯선 것이었다.

무질은 이 소설을 통해 영혼의 성장을 이야기하고 싶었던 것일까. 쉽게 말해 나이를 어떻게 먹는가를 이야기하고 싶었던 건 아닐까. 그러니까 연약한 친구에게 행사하는 폭력, 비난, 따돌림, 성적 수치 등등을 통해 우리의 퇴를레스는 혼란을 거치기는 했지만, 정신적으로 한 걸음 앞으로 나가게 되었다는.

그런데 그래서 어쨌다는 말이지? 한 편으로는 교양 있는 척, 한 편으로는 모든 걸 다 아는 척 해대는 이 소설은 현대 소설이 보여줄 수 있는 어리석음의 한 쪽 면을 보여주고 있다. 소설 속에서 퇴를레스는 옳은 것처럼 보인다. 정말 옳은 것일까. 우리는 근대 교양주의가 현대 소설에까지 악영향을 미치는 모습을 이 소설을 통해서 확인할 수 있다.

연구의 목적이 아니라면, 이 소설은 읽지 않아도 좋을 법하다. 번역된 무질의 다른 소설, <<세 여인>>(문학과지성사)은 언제나 추천한다. 하지만 이 소설은 젊은 소설가가 자신의 생각이나 경험을 너무 맹신한 나머지, 뜻 모를 단어와 문장으로 설교하려는 태도를 보여주는 지극히 나쁜 소설들 중의 하나이다.

진지하고 슬픈 퇴를레스는 이미 없고 영혼의 성장이라는 테마는 현대에서는 오래된 유물같은 것이다. 우리는 이미 늙은 채로 태어났고 나이가 들어간다는 것은, 더러운 세상에 얼마나 더욱 잘 적응하는가의 다른 말일 뿐이다.



(1) http://hesse-library.mokwon.ac.kr/archiv/HeFo6-03.ht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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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페이드의 여왕
푸슈킨, 문학과지성사




‘도스토예프스키와 톨스토이, 그리고 투르계네프의 문학에 대한 세계의 반향이 아무리 크고 높다 할지라도, 러시아인과 러시아 작가들의 사랑과 숭배에 있어 그들은 결코 푸슈킨을 능가하지 못한다’라는 책 첫머리 <기획의 말>에 적힌 문장만으로도 푸슈킨이 어떤 위치에 있는 작가인가를 알 수 있다. 하지만 푸슈킨은 아직 일반 독자에게는 낯설다.

나의 경우 푸슈킨의 시를 먼저 읽었고 소설은 이번이 처음이다. 꽤 오래 전부터 이 책을 추천받아왔는데, 이제서야 읽게 된 것이다. 읽고 난 다음, 쉽게 푸슈킨의 세계 속으로 빨려 들어가지 못했다. 푸슈킨의 낭만적 세계 속으로.

푸슈킨은 러시아의 위대한 산문 작가임에 분명하다. 그의 정신은 소설과 시가 만나는 낭만주의의 정점에 서있다. 독일 낭만주의나 프랑스 낭만주의와 확연히 구분되는 그의 소설은 러시아 낭만주의가 어떤 것인가를 보여준다. 그의 소설을 읽으면서 생 페테스부르크나 일리야 비친가 그렸던 결투를 떠올리게 되는 것은 추운 대륙에서의 삶은 거칠면서도 경건하고 환상적이며 심오한 것임을 깨닫게 되기 때문이다.

이 소설을 읽으면서 매혹되거나 감동받는 부분은 이 부분이다. 특히 <고 이반 폐트로비치 볠킨의 이야기>는 더욱 그러하다. 푸슈킨은 당대의 고귀하고 열정적인 삶을 그대로 옮겨놓고 있다. 심지어 파탄에 이르는 열망에 대해서까지 환상과 흔들리는 심리를 적절한 단어들로 풀어내고 있을 정도이다.

하지만 푸슈킨의 낭만주의는, 그의 삶이 그랬듯이, 충동적이며 감상적이다. 그렇다고 영혼의 아름다움이나 무한한 공간에 대해 경외도 아니다. 그것은 열정적 삶에 대한 무분별한 예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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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감 - 10점
김화영 엮음/큰나(시와시학사)



흔적 - 10점
김화영 엮음/큰나(시와시학사)


<<시, 눈뜨다 예감>> <<시, 눈뜨다 흔적>>
김화영 엮음, 시와시학사.

시집을 꼬박꼬박 챙겨 읽지 않은 지도 벌써 몇 해가 지났는지 가물가물하다. 대학시절엔 점심을 굶고 그 돈으로 시집 한 권 사면 배는 자연스럽게 부르고 가슴이 따뜻해졌는데. 얼마 전 종로 정독도서관에서 시집을 복사하는 대학생쯤으로 보이는 여학생을 보았다. 그 모습이 대학시절 날 떠올리게 했지만, 그녀가 복사한 시집이, 허수경의 시집들 중 가장 최악인, 최근의 시집이라는 점은 나의 마음을 아프게 했다.

나도 오래 전에 시집을 복사한 적이 있었다. 아주 오래 전에 번역된 이브 본느프와의 시집이었다. 지학사에서 나왔던 책으로 기억되는데, 그 때에도 절판된 지 몇 년이 지난 책이라 복사를 할 수 밖에 없었다. 그렇게 읽다 여러 서점을 기웃거린 탓에 구할 수 있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잃어버리고 말았다. 지금이야 민음사 세계시인선으로 구할 수 있지만.

최근 나에게 시집읽기의 즐거움을 선사하는 책이 있으니, 김화영 교수가 엮은 이 두 권의 시집이다.



수많은 별들 중 하나인 지구
지구 위의 파리
파리의 몽수리 공원에서
겨울 햇살 비치는 어느 아침
너 나에게 입 맞추고
나 너에게 입 맞춘
이 짧은 영원의 순간을
천년 만년이 걸려도
다 말하지 못하리
- 자끄 프레베르, <공원>



‘몽수리 공원’은 참 오랜만에 듣는 말이다. 대학 1학년 때 시창작 수업 때 곧잘 듣던 단어였다. 그 때 시쓰기를 가르쳐주시던 분이 구상 선생이었는데, 학생들에게 ‘몽수리 공원’하면 그 분을 떠올리게 만들었다.

그 때 많은 시인들을 좋아했었다. 시를 쓰고 싶어했었고. 그러고 보니, 시창작수업에 들어간 날보다 술 마신 날이 많기는 하지만 말이다. 오랜만에 시집을 읽고 싶은 이들에게 이 두 권의 시집을 권한다. 마지막으로 유하의, 참 유쾌한 시 하나를 올린다.



그대 내 농담에 까르르 웃다
그만 차를 엎질렀군요
...... 미안해하지 말아요
지나온 내 인생은 거의 농담에 가까웠지만
여태껏 아무것도 엎지르지 못한 생이었지만
이 순간, 그대 재스민 향기 같은 웃음에
내 마음 온통 그대 쪽으로 엎질러졌으니까요
고백하건대 이건 진실이에요
- 유하, <농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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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집도 절판이다. 오랜만에 보는 두 편의 시는 나를 즐겁게 한다. 그러고 보면, 유하는 참 시를 잘 썼는데.. (2011.2.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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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래의 여자>>, 아베 코보(지음), 김난주(옮김), 민음사 세계문학전집55



그는 소설이 끝나고 그 모래의 세계 속에서 탈출할 수 있었을까. 그 속을 벗어날 수 있었을까. 그런데 벗어나지 못했다면, 그래서 그 속에서 그가 늙어죽고 그녀가 늙어죽고 그들이 살던 집이 모래로 뒤덮이는 것을 아베 코보가 보여주었다면 독자들은 무슨 말을 할까. 혹시 그녀처럼 ‘무슨 상관이에요. 그런, 남의 일이야 어떻게 되든!’라고 말하는 건 아닐까.

그렇게 감동적이지도 않고 그렇게 슬프지도 않다. 그저 쓸쓸할 뿐이다. 모래의 세계 속이나 낮고 높은 건물로 둘러쳐진 도시 속이나 갇혀있기는 마찬가지다. 소설은 육체의 고립을 극대화했을 뿐이지, 소설 밖 우리들의 의식은 이미, 오래 전부터 어딘가에 갇혀있었다. 아베 코보는 갇혀있는 우리들의 한 면을 묘사하고 있을 뿐이다.

아베 코보의 실존주의는 어떤 환경에 고립된 존재, 그 존재가 어떻게 방황하고 고통스러워하는가를 묘사한다. 그러면서 그 의식마저도 고립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희망>이 까마귀의 시선을 끌지 못하고 그의 바램은 뒤로 밀려나간다. 그녀의 육체 위로 미묘하게 흐르는 에로티시즘은 고립된 존재인 그를 더욱 고립시킨다. 잠시 에로티시즘 속에서 의식을 놓아두고 어딘가에 몰두하지만 남는 건 희망을 잃어버리고 있는 자기 자신의 모습이다.

<<모래의 여자>>는 끝없이 ‘실존주의적 에로티시즘’에 몰두한다. 고립된 공간, 하루라도 모래를 퍼내지 않으면 무너져버리는 어떤 공간 속에서 한 남자와 한 여자가 몸을 부대끼며 생을 지탱해나간다. 희망은 조금씩 무너져 내리는 모래 구덩이 속에서 끝없이 밀려나간다. 그 속에서 꽃처럼 에로티시즘이 피어난다. 하지만 에로티시즘은 실존적 상황에 파묻혀버리고. 매일매일 마주하는 남자와 여자 사이에 오가는 건 의미 없는 몸짓뿐이다. 애초부터 그들은 서로를 이해할 수 없었고 에로티시즘은 서로에 대한 애정이나 사랑으로 발전하지 않는다.

<<모래의 여자>>가 보여주는 ‘실존주의적 에로티시즘’은 구원도 없고 사랑도 없는 시대의 소설적 반영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가슴 아파하거나 슬퍼할 이유는 없다. 이제 ‘실존주의적’이라는 수식어가 사라지고 ‘에로티시즘’만 남게 될 테니까.


모래의 여자 - 10점
아베 코보 지음, 김난주 옮김/민음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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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컬처버스 2014.02.11 16:05 신고

    아베 코보의 소설 <모래의 여자>를 원작으로 한 연극이 공연되어 정보 공유합니다. 소설을 읽으신 분들께는 더욱 흥미로운 연극이 될 것 같아 댓글 남겨요.

    공연정보는 한국공연예술센터 홈페이지 (www.hanpac.or.kr)에서 "모래의 여자"를 검색하시면 확인가능합니다.



    연극 <모래의 여자>
    2014.02.18-2014.02.23 대학로예술극장 소극장
    전석 2만원
    예매 바로가기 http://www.hanpac.or.kr/hanpac/program.do?tran=play_info_view&playNo=1401291541212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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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생일날의 고독>> (원제 : 태어남의 잘못에 대하여)
에밀 시오랑 지음, 전성자 옮김, 에디터



루마니아에서 태어나 젊은 시절, 루마니아어를 버리고 평생을 미혼으로 남은 채 파리 어느 다락방에서 프랑스어로 글을 썼다는 것만으로도 현대적이면서도 신비한 분위기에 휩싸인 어떤 매력을 풍긴다. 또한 그의 프랑스어는 어느 잡지의 설문 조사에 따르면 지난 세기 프랑스인들에게 가장 아름다운 프랑스 문장들 중 하나로 기억되고 있다. 하지만 이 매력, 그의 문장만으로 그를 좋아할 수는 없다.

문제는 그가 가지는 인생에 대한 태도에 있다. 가령 이런 문장들, “젊은 사람들에게 가르쳐야 할 유일한 사항은 생에 기대할 게 아무 것도 없다는 것이다”, “우리는 죽음을 향해 달려가고 있는 게 아니라 태어났다는 재앙을 피해 달아나고 있다. 그 재앙에서 살아남은 우리는 미친 듯이 날뛰면서 그 사실을 잊으려 안간힘 쓰고 있다”, “정신적 완성을 위한 필수적인 조건 - 언제나 도박에서 실패했다는 것”

그는 분명 현대가 가져다 준 니힐리즘의 한 극단에 이른다. 하지만 그가 그토록 절망하고 생을 저주했다는 것과 그가 오래 살았다는 사실은 독자에게 묘한 배신감을 들게 만든다. 그는 여기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밤낮 나의 염두를 떠나지 않는 것 중의 하나로 <죽음>이 있다. 또 나는 항상 자살에 대해서 생각한다. 어떤 독일의 저널리스트가 ‘당신은 자주 자살을 논제로 하는 것 같은데, 정말로 자살은 하지 않는군요’하고 나에게 농담을 한 일이 있는데, 자살이라는 관념은 말하자면 나의 <보조자>이며, 이 관념 덕택에 나는 지금까지 살아올 수 있었다.”

그리고 잠시 뒤, ‘죽음이란 생을 낭만화하는 원리이다. 생에 로맨틱(낭만적) 차원을 주는 원리이다’라는 노발리스의 문장을 인용하면서, ‘죽음이 없다면 생은 용서할 수 없는 것이 될 것이다’라고 말한다.

그의 허무주의를 그대로 받아들이기에는 한계가 존재한다. 왜냐면 그의 허무주의는 수사적인 차원에서만 머물고 있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 때문이다. 이런 이유로 인래 때때로 그가 싫어진다. 하지만 그의 글은 대체로 음울하지만 아름답고, 슬프지만, 대신 매우 열정적이다.

나는 그의 글을 좋아한다. 하지만 타인에게 함부로 추천하지는 못한다. 그의 생각은 너무 극단적이기 때문에.

에밀 시오랑의 다른 책들도 몇 권 번역되어있지만, 구할 있는 책은 <<절망의 끝에서>>라는 책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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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화소록 - 10점
강희안 지음, 서윤희 외 옮김, 김태정 사진.감수/눌와



양화소록(養花小錄)
강희안 지음 (서윤희/이경록 옮김, 김태정 사진/감수), 눌와, 1999



작년 여름 붉은 꽃이 피어있는 서양난 하나를 구해 기르게 된 적이 있었다. 처음 꽃을 기르게 되었다는 반가움도 잠시, 얼마 지나지 않아 푸른 빛깔의 잎이 누렇게 변하기 시작하더니 꽃도 떨어지고 채 몇 주 지나지 않아 그대로 죽어버렸다. 다시 꽃을 사서 기르리라 생각 했지만, 바쁜 직장 생활 와중에 그런 생각은 가끔 말라죽어있는 난을 볼 때뿐이었고 그 사이 해가 바뀌어 버렸다.

해가 바뀌는 동안 나는 강희안(姜希顔:1418-1465)의 <양화소록>을 읽게 되었다. 나에게는 <고사관수도(高士觀水圖)>라는 그림으로 알려진 조선 초의 선비 화가로만 알려져 있었는데, 그림에만 뛰어났던 것이 아니라 시와 글씨에도 뛰어났음을 알게 되었다. 이 책은 강희안이 화초를 기르면서 알게 된 여러 것들을 정리해 모은 것이다. 강희안은 책 첫머리에 이렇게 적고 있다.

아! 화초는 식물이다. 지식도 없고 움직이지도 못한다. 그러나 그들을 기르는 이치와 갈무리하는 방법을 모른 채, 습한 데에 맞는 것은 마르게 하고 추위에 맞는 것은 따뜻하게 하여 그 천성을 거스른다면 반드시 시들어 말라죽게 될 것이니, 어찌 다시 싹을 틔우고 꽃을 피워 그 본래의 자태를 드러내겠는가. 식물조차 그러한데 하물며 만물의 영장인 사람이 마음과 몸을 피곤하게 하여 천성을 해쳐서야 되겠는가.
나는 그런 뒤에야 양생(養生)하는 방법을 알게 되었다. 이 방법을 확충한다면 무슨 일을 하든 안 되는 일이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나는 화초의 성품과 기르는 방법을 알게 될 때마다 그것을 기록하였다. 기록이 끝나자 <<청천양화소록(菁川養花小錄)>>이라고 이름을 붙였다. 산림에서 소일하는 밑천으로 삼고, 호사가(好事家)들과 함께 나누고자 한다.
(21쪽)

* * * * * *

내용은 간결하며 옛 문헌들에 실린 각 화초에 대한 설명이나 시, 문장을 언급하고 난 다음 강희안이 그 화초를 기르면서 알게 된 바를 적는 형식으로 이루어져있다. 특히 화초를 기르는 것도 자기 수양의 한 방편으로 삼았음은 글 여기저기에서 알 수 있는데, 책 마지막 부분에서 강희안은 ‘꽃과 나무에서 배울 점’이라는 글에서,

화훼를 재배하는 것은 키우는 사람의 심지(心志)를 굳게 하고 덕성(德性)을 기르기 위함일 뿐이다. 운치와 지조가 없는 것은 절대로 감상해서는 안 되며, 울타리 주위나 담 아래 적당한 곳에 재배하되 가까이 할 필요는 없다. 가까이 한다는 것은, 비유하자면 지조 있는 선비와 비루한 사내가 한 방에 같이 있는 것과 같아서 풍격(風格)이 금방 떨어진다.
(118쪽)

이라고 적고 있다. 특히 연화(연꽃)에 대한 설명은 강희안이 화훼를 재배하는 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가를 잘 드러내주는 구절이 많다. 그가 인용하고 있는 옛 중국 학자의 구절을 살펴보면, ‘나는 연꽃을 유독 좋아한다. 진흙 속에서 피어나면서도 더럽혀지지 않고, 맑은 잔물결에 흔들리면서도 요사스럽지 않다. 줄기 속은 비었고 겉은 곧으며 덩굴로 뻗거나 가지를 치지 않는다. 향기는 멀어질수록 더욱 맑으며 아름답게 깨끗이 자란다. 멀리서 바라볼 수는 있지만 가까이 두고 감상할 수는 없다. 여러 꽃 가운데 연꽃은 군자이다’라고 적혀있다. 그러면서 강희안은 이렇게 말한다.

사람이 한 세상을 살면서 명성과 이익에 골몰하여 고달프게 일하는 것이 죽음에 이르도록 끝이 없다. 과연 무엇을 하는 것인가? 벼슬을 버리고 강호(江湖)를 소요하지는 못한다 하더라도, 공무(公務)의 한가한 틈에 맑은 바람 밝은 달 아래 향기 진한 연꽃과 그림자 뒤척이는 줄이나 부들을 대하거나 작은 물고기가 개구리밥과 수초 사이로 뛰노는 광경을 만날 때마다 옷깃을 풀어헤치고 거닐거나 노래를 읊조리면서 노닌다면, 몸은 명예의 굴레에 묶여 있지만 마음은 세상사에서 벗어나 노닐 것이고 자신의 감정을 마음껏 표현할 수 있을 것이다.
(65쪽에서 66쪽)

이 구절을 보면서 한참을 옛 선비를 생각할 수 밖에 없었다.

실로 오랜만에 조선시대의 선비의 글을 읽었다. 살아보면 좋은 글이 많은데, 여유가 없었던 것일까. 아니면 너무 거리가 먼 것일까. <양화소록>을 손에 들고 다니면서 종로나 테헤란로에서 읽을 때마다 번잡한 거리가 낯설게 느껴졌다. 그 속에서 오래된 책 한 권 들고 있는 젊은 사내를 다른 이들은 또 얼마나 낯설게 받아들였을까. 강희안의 글을 읽었지만, 그와 대화를 나눌 수 없는 나와 현대의 이 세상이 한없이 미워지는 밤이다.



* '양화소록'은 몇 권의 번역본들이 있습니다. 위의 책은 오프라인 서점에서 찾을 수 있으리라 여겨집니다만, 확실치 않습니다. 인터넷 서점에서는 다른 번역본으로 구할 수 있음을 알려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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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멸 - 10점
밀란 쿤데라 지음/청년사


<<불멸 L'Immortalite'>>
밀란 쿤데라, 청년사



오랜만에 뛰어난 현대 문학의 수준을 한 눈에 가늠할 수 있는 소설을 읽게 되었다. 내용에서뿐만 아니라 그 형식에 있어서도 놀랍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이 짧은 글에서 이러한 평가에 대한 정당한 이유와 논증을 다하지 못함을 고려해볼 때, 이러한 평가는 위험한 것이다. 내 생각에 이 소설에 대한 제대로 된 평가를 적는다면 이 소설이 현대 문학의 어떤 흐름에 이어져 있으며 무엇을 반영하고 있는가, 이와 유사한 내용이나 형식의 소설에는 어떤 것이 있는가, 다른 예술에서는 어떤 식으로 표현되고 있는가를 논의하는, 적어도 소논문 정도는 되어야만 할 것이다.

이러한 소논문에 대한 부담을 나는 늘 그렇듯이 내 처지를 내세운다. 다만 나에게 기회가 주어진다면 현대 문학, 특히 소설에서 현대성, 내지 현대예술의 성격이 어떻게 발현되고 어떤 모습으로 변해가는가를 논할 수 있을 것이다. 그 때를 기대해보자.



1. 낭만주의

낭만주의가 우리의 지성에 호소하기보다는 우리의 감성에 호소한다는 측면에서 20세기 초반의 여러 예술들은 고전주의와 가까이 있어 보인다. 그래서 칼 하인츠 보러의 경우 이러한 예술들을 설명하면서 ‘고전적 현대’라고 지칭하기도 한다. 하지만 이러한 ‘고전적 현대’, 다른 말로 현대에 나타난 고전주의는 세계 2차 대전 이후 급격하게 무너지기 시작한다. 20세기 중반부터 등장하기 시작하는 실존주의 문학이나 부조리 연극들은 고전적 현대의 붕괴를 천천히 예고한다. 그리고 미국 추상 표현주의나 그린버그 식의 모더니즘은 고전적 현대의 마지막을 장식한다.

아주 흔한 말이지만, 동시에 너무나도 다양한 의미로 사용되는 용어인 포스트모더니즘은 고전적 현대가 무너지고 난 다음 처음으로 나타난 낭만주의이다. 이 낭만주의는 장르나 형식의 경계를 무너뜨리고 감성에 직접 호소하기보다는 지성의 허점을 노리고 이성의 한계, 이성적 기획들의 실패를 나열하기 시작한다. 이런 측면에서 이 낭만주의는 ‘감성주의’나 ‘예술지상주의’의 경향보다는 ‘반지성주의’의 경향을 띄고 있다. 이 속에서 근대적 자아는 분열되어 춤을 추기 시작한다. 이 분열은 근대적 기획의 실패라는 점에서 슬프고 안타까운 일이지만, 동시에 새로운 시작을 알린다는 점에서 즐겁고 희망찬 일이기도 한 셈이다. 대부분의 조심스럽고 신중한 이들은 전자의 입장을 취하는 반면, 몰역사적이며 성급한 이들은 후자의 입장을 취한다.

<불멸>에서의 낭만적 경향은 근대적 자아의 분열, 시간과 공간의 혼란, 소설 양식의 붕괴, 자의식 과잉 등으로 나타나고 있다. 이러한 낭만적 경향은 현대 소설에서 곧잘 발견되는 특징이기도 하다.



2. 원근법적 세계의 붕괴

연극에서의 ‘원근법’이라고 하면 종종 무대를 떠올리기 쉽다. 왜냐면 르네상스 초기 연극에서 원근법은 무대를 꾸미는데 매우 유용했는데, 이는 그 당시의 회화나 회화이론에서 영향 받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연극에서의 원근법이라고 하면 무대에 대한 것이 아니라 연극 속에 있다. 이는 한 명의 주인공(소실점)을 둘러싸고 이루어지는 여러 인물들과 사건, 배경들이 기하학적으로 구축되어 있는 경우에 사용한다. 다시 부연하자면 프로타고니스트(제1배우, 주인공)와 안타고니스트(제2배우) 간의 대립과 반목, 갈등을 통해 사건이 진행되고 언제나 그 중심에는 프로타고니스트가 있음을 보여줄 때, 그리고 그 영웅이, 그 영웅이 있는 하나의 세계, 그 영웅이 가슴에 품고 있는 신념이나 확신이 승리하거나 실패하게 될 때, 이러한 서사 양식을 원근법적이라고 말할 수 있으며 우리가 알고 있는 대부분의 고전주의 연극은 이러한 원근법적 양식을 보여준다. 연극에서의 이러한 원근법은 동일한 서사 양식인 소설에서도 그대로 적용된다. 대부분의 근대 소설들은 이러한 원근법적 구조를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우리는 이러한 원근법적 구조의 소실점 자리에 있는 한 인물, 서사의 주인공을 ‘근대적 자아’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파우스트, 마담 보바리, 고리오 영감, 줄리앙 소렐 등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 많은 인물들이 이러한 근대적 자아의 예인 셈이다.

하지만 이러한 근대적 자아는 붕괴되기 시작하는데, 이러한 붕괴가 본격적으로 모습을 드러낸 것은 19세기 인상주의 화가들에 의해서이다. 모네, 피사로 등이 보여준, 감각적이며 평면적인 회화는 우리의 세계가 하나의 소실점으로 파악할 수 없는 세계이며 우리가 믿어왔던 그 세계를 거짓이었고 기만이었음을 폭로하게 된다. 여기에서부터 모더니즘 예술들은 근대적 자아가 아닌 진짜 자아, 순수한 자아를 본격적으로 찾아나가기 시작한다. 프루스트나 제임스 조이스, 버지니아 울프, 로베르토 무질은 이러한 모더니즘의 모험을 그대로 소설로 옮겨놓는다.

그러나 이러한 모험으로 인해 우리가 인정하게 되는 것은 ‘넌 날 이해할 수 없어’라든가 ‘우린 서로를 이해할 수 없어’라고 말하는, 라이프니츠에서 시작되어 그 골이 깊어진 독아론적 태도이다. 즉 인상주의자들이 감각적이며 평면적인 회화 양식을 보여주었을 때, 그것은 순수하고 새로운 가치의 발견도 있었지만, 동시에 무수히 많은 가치들의 발견이기도 하였다. 다시 말해서 인상주의자들은 자신의 감각에 집중함으로서 자기 자신에게 진실한 그 어떤 것의 발견이기도 하지만, 그것은 자신에게만 해당된다는 점에서 타인의 그 어떤 것을 인정하지 않으면 안되는 계기를 마련하게 되는 셈이다. 그런 측면에서 인상주의 회화가 보여주는 평면성은 하나의 원근법적 가치를 부정하고 무수히 많은 가치들로 쪼개어지고, 그 가치들이 균등한 무게를 지니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러한 평면성은 현대 소설에서는 한 명의 주인공에서 무수한 주인공으로 늘어나게 되고 종종 여러 인물의 시점을 번갈아 사용하게 된다.

<불멸>의 경우에도 이러한 다중 시점이 등장한다. 이러한 다중 시점을 사용하는 경우 소설은 사건 중심적이기보다는 인물 중심적이며 인물의 내면에 집중하는 경향을 띄게 된다. 그래서 <불멸>은 각 인물들의 내면에 집중하며 그들의 내면 모습을 그대로 보여주기 위해 노력하며 한 개인의 내면은 다른 개인의 내면과 비교된다.

이 경우 소설을 읽고 있는 독자는 각 개인들의 내면을 알 수 있지만, 그 속의 개인들은 스스로의 내면이나 심리 상태를 드러내기 위해선 어떤 행동을 통해서일 뿐이다. 이러한 정신적이고 심리적인 교류에 대한 제약은 근대 개인주의의 비극성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다. 많은 인물들이 등장하지만 이들 사이의 상호교감적인 형태의 정신적인 교류란 없다. 언제나 서로 반대 방향으로 움직이거나 엇갈린다. 이러한 단절은 현대 소설에서 ‘다중 시점’을 사용하게 되는 계기를 마련하게 되는 계기를 마련하게 되며 이 소설에서 특히 강조되는 ‘몸짓’이라는 단어는 서로를 이해하고 받아들이기 위한 과정으로 이해될 수 있다. 고작 ‘몸짓’으로 연결되고 있는 셈이다.



3. 메타픽션(metafiction), 또는 자의식 과잉

일반적으로 메타픽션은 소설가 소설, 내지 소설에 대한 소설로 이해된다. ‘메타meta’라는 접두어가 의미하듯이 소설 속에서 소설에 대한 평가나 의미 부여, 비평이 이루어지는 경우에 이를 메타픽션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러한 소설 양식들은 사태나 인물을 정확하게 전달하려는 작가의 의도가 지나쳐 소설 속에 갑자기 작가가 등장해 사건이나 인물을 설명하는 방식을 취하게 되거나, 비평문이나 인물 스스로 자기 자신에 대한 분석이나 평가가 이루어지게 된다.

이러한 메타픽션의 성격은 <불멸>에서는 매우 노골적이다. 자의식 과잉인 작가는, 소설의 창조주이면서 소설 인물들의 주인인 그는, 인물들의 행동이나 스토리의 방향을 보다 정교하게 교정하기 위해 소설 속 등장인물이 되는 것에 대해 이제 더 이상 주저하지 않는다. 밀란 쿤데라는 소설 속에서 여러 인물들과 만나고 아베나리우스 교수와의 대화를 통해 소설과 인물에 대해서 떠든다.

현대문학이론에서 종종 등장하는 ‘자의식 과잉’이라는 표현은 이러한 메타픽션적 경향을 뜻하며 ‘자기반영성’이라는 단어도 부분적으로 이러한 메타픽션적 경향을 뜻하기도 한다.

그런데 이러한 메타픽션은 전혀 다른 결과를 불러오는데, 근대 소설이 원근법적 태도를 견지하고 있는 작가나 주인공에 의해 시작된 근대적 자아의 모험이라면, 현대 소설에서는 이러한 모험이 근대적 자아의 붕괴로 인해 말하는 나와 그런 나를 바라보고 평가하는 나로 이루어지는 주체의 분열을 야기하거나 소설 바깥에서 소설을 진행하는 작가가 고전적인 작가의 지위를 버리고 스스로 소설 속 인물이 되어 소설 속 다른 인물들을 실재하는 인물로 격상시키면서(작가는 소설 속 인물로 격하되고), 소설 속 세계에 힘을 실어주게 된다.

<불멸>에서 이러한 메타픽션의 경향은 소설 전반을 물들이고 있는데, 소설 속에서 이루어지는 가상의 인물과 실제의 인물이 이야기를 나눈다던가 한 공간 속에 머무르게 되는 것도 이러한 경향이 심화된 경우라고 할 수 있다. 어느 것이 허구이고 어느 것이 진짜인지 분간하지 못하게 함으로써 그것이 진짜라고 믿게 만드는 것이다.



4. 사랑, 몸짓, 그리고 불멸

아녜스는 현대의 슬픈 사랑을 표상한다. 아녜스는 끊임없이 스스로에게 주문을 걸고 스스로를 분석하며 지극히 정신적이다. 이와 반대로 로라는 현대의 행복하고 이기적인 사랑을 표상한다. 이 두 사랑은 서로를 인정하지 못한다. 그래서 아녜스는 그녀의 아버지는 인정하지만 로라는 그것을 인정하지 못한다.

로라에게 육체란 애초부터, 선험적으로, 전일적이고 항구적으로, 본질적으로 성적인 것이었다. 그녀로서는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것은 곧 이런 의미였다 : 즉 그에게 자신의 육체를 가져가 그의 앞에 그 육신을 내려다놓는 것. 내면 외면 할 것 없이 송두리째 있는 그대로의 육체를, 부드럽게 천천히 그것을 망가뜨리는 시간과 함께 말이다.
아녜스로서는 육체란 성적인 게 아니었다. 아주 희귀한 순간들에만, 즉 흥분이 육체 위에 어떤 인공의 비현실적인 광채를 투사하고 그 빛이 육체를 아름다운 하나의 욕구의 대상으로 만들어 줄 때만이 육체는 성적인 것이 되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설마라고 할런지는 모르겠으나, 아녜스가 줄곧 육체적인 사랑에 사로잡혀 있었던 것은 바로 그런 까닭이었다.
(129쪽에서 130쪽)

이러한 단절은 필연적인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루벤스에게도 이어진다. 그의 류스티스는 그의 세계 속에서 존재한다. 독자는 아녜스 = 류스티스라는 등식을 이해하지만 루벤스는 그것을 이해하지 못한다.

가득 부풀어 올랐던 그 사랑의 감정이 덧없이 사라지자, 그는 믿기지 않을 만큼 그 사랑의 감정이 덧없이 사라지자, 그는 믿기지 않을 만큼 아프지도 비극적이지도 않은 그것의 소멸을 어떤 충격적인 계시로 체험했다 : 그는 결정적으로 사랑 저 너머에 있게 된 것이다.
(362쪽)

사랑 저 너머에서 루벤스는 류스티스에 대한 사랑을 통해서 사랑에 대한 결론을 내리고 있는 셈이다. ‘그때 그는 얼마간 여자 관계를 끊는 것이 자기에게 나쁘지 않으리라고 속으로 중얼거렸다. 흔히 하는 말로 새로운 질서가 도래할 때까지 말이다. 하지만 한 주 한 주, 그 휴지는 연장되기만 했다. 그러던 어느 날 마침내 그는 이제 더 이상 <새로운 질서>는 없음을 알아’차리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새로운 질서>가 등장하지 않는 와중에도 몸짓을 통해 각 개인들은 서로 연결된다. 소설 속에서, 혹은 소설 바깥 세상에서 개인주의의 한 극을 향해 달려가고 있다 하더라도, 아무리 ‘고통이야말로 자기중심주의의 위대한 학교’라고 하더라도 말이다. 이런 측면에서 보자면 <불멸>에서 강조하고 있는 ‘몸짓’은 가느다랗게 이어져있는 사랑과 이해, 포옹의 표상인 셈이다.

‘호모 센티멘털리스’란 단어는 이 소설 속에서 이성적 사유가 아닌 다른 어떤 것을 지향하기 사용된다. 사람은 많으나 몸짓은 별로 없다. 소설 속의 어떤 몸짓은 계속 누군가에게 전달되고 마지막으로 폴이 그 몸짓을 하게 된다. 몸짓을 통해 각 인물들의 감정이, 정신이, 영혼이 연결되는 것일까.

불멸은 사랑의 불멸이 아니라 몸짓의 불멸인 셈이다. 몸짓의 불멸을 통해 다른 것들까지도 구원받을 수 있는 여지를 남겨놓는 셈이다. 쿤데라는 원근법적 세계가 무너지고 존재하는 것은 자신의 마음뿐이며, 사랑은 믿지 못할 것이 되어버렸고 생각 많은 어떤 이가 ‘물망초에 미친 여자’로 불리게 될 지도 모르는, 서로서로 단절되어있는 근대의 비극을 말하면서도 ‘몸짓’을 통해 어떤 희망의 가능성을 이야기하고 있는 셈이다. 더 이상 <새로운 질서>는 없고 오직 몸짓으로만 연결되는 세계. 그나마 몸짓이 남아 서로를 연결해주는 세계 말이다. 내가 보기엔 더 비극적이긴 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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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쿤데라의 책에 대해 검색하다가 만족할 만한 글을 찾지 못하고 있었는데 이렇게 찾아 들어와 읽게 되어 기쁩니다. 좋은 글 잘 읽었어요.

    • 감사합니다. 이 소설을 읽은 지도 벌써 10년이 된 것같네요. 무척 좋은 소설인데, 최근에 이 소설을 읽는 이를 보지 못했는데, 반갑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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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담 보바리 Madame Bovary
Gustave Flaubert, (박동혁 옮김, 하서. 1990)
* 1856년, 플로베르가 35세 되던 해 나옴.




그러나 뭐라 해도 그녀는 행복하지 않았다. 지금까지 한 번도 행복한 적이 없었다. 인생에 대한 이 불만은 도대체 어디서 오는 걸까? 의지했던 모든 것들이 차례로 무너지는 건 무슨 까닭일까? 하지만 만일 어딘가에 아름다운 사람이 있다면, 열정적이고 품위 있는 성격, 천사와 같은 시인의 마음, 하늘의 마음, 하늘을 향해 애조띤 축혼가를 부르는 청동 하프 같은 마음, 이런 것들을 지닌 사람이 있다면, 그러나 그런 사람이 있다면 왜 만나지 못했겠는가? 아! 모든 것은 다 틀렸다! 일부러 애쓰며 찾아야 할 가치가 있는 것은 하나도 없다. 모두 거짓이다! 어떤 미소에도 권태의 하품이 숨겨져 있다. 어떤 환희에도 저주가, 어떤 쾌락에도 혐오가 숨겨져 있다. 황홀한 키스에조차 충족되지 못한 더 큰 쾌락의 욕망이 입술에 남는 법이다.
- 278쪽

에마가 죽고 샤를이 죽고 그들의 어린 딸이 방직 공장에 가게 되었다는 짤막한 상황 설명으로 소설이 끝나게 되었을 때, 어떤 독자는 이렇게 물을 수 있을 것이다. 과연 에마는 몇 번의 밀애 속에서 사랑을 경험한 것일까? 그러한 에마에게 사랑이란 무엇이었을까?

하지만 에마는 백 오십여 년이 지난 오늘날, 무심코 길을 걷다가, 혹은 누군가와 이야기를 나누다가도 종종 목격되기도 한다. 고급 승용차를 몰고 나온 사내에게 몸을 맡기고 근사한 말투와 매너로 유혹하는 사내에게 입술을 허락하며 깊은 눈빛과 재력을 겸비한 사내에게 마음을 빼앗겨 버리는 그녀들.

근대의 사실주의란, 초창기 사진처럼 세상을 그대로 옮기는 것이 아니라 눈에 보이는 풍경의 이면 속에 숨겨져 있는 그 무언가를 폭로하는 양식이다. 그래서 그러한 양식의 소설을 읽다보면 자기도 모르게 가슴을 치기도 하며 주인공의 방황에 격렬하게 저항하기도 하고 그/그녀가 그 모험을 무사히 끝마치기를 바라거나 아예 그런 헛된 모험을 하지 않기를 바라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그 모험이라는 것은,

결혼하기 전까지 그녀는 자기가 그를 사랑하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 사랑에서 당연히 와야 할 행복이 없었기 때문에 자기 생각이 틀렸었나 하고 생각하기 시작했다. 무한한 행복이라든가 정열, 도취 등 책에서 읽은 그토록 아름답다고 생각했던 말들이 과연 세상에선 정확하게 어떤 것일까 에마는 그것을 알려고 애썼다.
- 44쪽에서 45쪽

소설 초반에 읽게 되는 이 문장 앞에서 진지하고 사려 깊은 독자라면, 우리의 에마가 어떤 모험을 하게 될 것이고 그녀의 운명이 어떤 식으로 전개될 것인가를 예감할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게오르그 루카치가 그의 초창기 저작인 <소설의 이론> 첫 머리에서 언급하는 그리스 문화의 구조와는 정반대로 펼쳐지는 근대의 비극적인 구조를 떠올릴 수 있기 때문이다.

별이 빛나는 창공을 보고, 갈 수가 있고 또 가야만 하는 길의 지도를 읽을 수 있던 시대는 얼마나 행복했던가? 그리고 별빛이 그 길을 훤히 밝혀 주던 시대는 얼마나 행복했던가? 이런 시대에 있어서 모든 것은 새로우면서도 친숙하며, 또 모험으로 가득 차 있으면서도 결국은 자신의 소유로 되는 것이다. 그리고 세계는 무한히 광대하지만 마치 자기 집에 있는 것처럼 아늑한데, 왜냐하면 영혼 속에서 타오르는 불꽃은 별들이 발하고 있는 빛과 본질적으로 동일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세계와 자아, 천공의 불빛과 내면의 불꽃은 서로 뚜렷이 구분되지만 서로에 대해 결코 낯설어지는 법이 없다.
- 루카치, <소설의 이론>(반성완 역, 심설당), 29쪽

근대의 풍습이란,

“저기 탄 사람들은 내일이면 파리에 닿을 텐데.”
그리고 그녀의 상상은 그들의 뒤를 따라 언덕을 오르내리고 마음을 가로질러 밤하늘의 별이 총총한 국도를 달려갔다. 그러나 어느 거리까지 가면 반드시 그녀의 꿈은 자신도 알 수 없는 흐릿한 장소에 부딪혔다.
그녀는 파리의 지도를 하나 샀다. 손가락 끝으로 지도 위를 더듬으며 그 안을 온통 헤매 다녔다.
- 64쪽

우리의 에마처럼 새로운 것을 탐구하는 것. 그것을 찾기 위해 대도시로, 외국으로 여행을 떠나는 것. 자신을 구원해줄 수 있으리라 기대되는 사랑의 모험에 미련 없이 육체와 영혼을 내맡기는 것.

에마는 자기가 그를 사랑하고 있는지 어떤지는 생각해 보지도 않았다. 연애란 뇌성이나 번개처럼 별안간에 나타나는 것 - 하늘에서 큰 바람이 불어와 생활을 뒤엎고 인간의 의지를 나뭇잎처럼 뿌리째 뽑아버리고 사람의 마음을 깊은 못 속으로 끌고 들어가는 것이라고 믿고 있었다. 그녀는 지붕의 낙수 홈통이 꽉 막혀 있을 때는 빗물이 집의 발코니 위에도 호수를 만든다는 것을 모르고 있었다. 그래서 그녀는 이렇게 편안한 마음으로 있을 수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때 갑자기 에마는 벽에 틈이 생긴 것을 발견할 수 있었다.
- 102쪽

그러나 그녀의 마음은 욕망과 고통과 증오로 가득 차 있었던 것이다. 주름이 똑바로 잡힌 옷은 동요하는 마음을 감추고, 정숙해 보이는 입술은 미칠 것 같은 마음의 괴로움을 털어놓지 않았다. 그녀는 레옹을 사랑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마음껏 그의 모습을 혼자서 남모르게 그려보기 위해서 고독이 필요했던 것이다. 그의 모습을 보면 이렇게 혼자 생각하는 기쁨이 충만 되었다. 에마는 그의 발소리만 들어도 가슴이 설레었다. 그러나 막상 그의 앞에 있으면 그 감정은 사라지고 그저 멍한 기분만이 남아서 드디어는 슬픔으로 변해버렸다.
- 109쪽

시골 의사인 샤를 보바리, 그리고 그의 부인 에마 보바리. 그리고 에마 보바리가 사랑하고 있는 남자. 레옹. 얼마 뒤 레옹은 마을을 떠나고 로돌프가 그 자리를 대신하게 된다. 하지만 로돌프에게 연애란 하나의 취미, 취미의 대상으로서의 에마 보바리.

아. 너무 가슴아픈 이 부분을 언급하지 말기로 하자. 우리는 사랑이 어떤 것인지 모른다. 참으로 보기 드문 문학에 대한 확고한 신념을 가진 마르셀 라이히-라니츠키의 사랑에 대한 정의를 떠올려보자. “호감은 열정으로, 열정을 종속으로 변화시키는 극단적인 감정을 우리는 사랑이라고 부른다. 이는 한 개인을 도취상태로 몰입시키면서 일시적으로 당사자, 즉 사랑에 빠진 자의 책임 능력을 제한한다; 사랑은 아픔을 낳는 행복이며 인간을 행복하게 하는 아픔이다.”(* <사로잡힌 영혼> 중에서 )

이렇게 순수하고도 순진한 문학 평론가가 어디에 있을까. 샤를이 이 말을 들었다면 어떤 표정을 지었을까. 바람난 에마를 너무 사랑했던 샤를. 끝내 패배하게 되는 모험으로 가득찬 시대에 샤를은 에마를 사랑하는 모험을 감행했던 것일까. 아니면 그는 모험을 하지 않았는데, 모험을 감행하는 사람 옆에 있었다는 이유만으로 그도 모험의 회오리 속에 말려든 것일까.

근대란 사랑이라는 행복하게 하는 아픔마저도 절망으로, 끝없는 혐오로 만드는 시대다. 우리의 에마는 끝없이 사랑을 노래하였지만, 그녀에게 남은 건 감당할 수 없는 빚과 쓰라린 사랑의 아픔, 살아갈 수 있는 생명력의 상실뿐이었다. 사랑의 대가란 바로 그러한 것이었다. 죽어가는 그녀 옆에 앉아 있는 샤를에게

“네, 네... ... 그 말씀대로예요. 당신은 참 좋은 분이에요.”
이렇게 말하면서 에마는 샤를의 머리를 천천히 쓰다듬었다. 이 기분 좋은 감촉이 샤를의 슬픔을 한층 더하게 했다. 여태까지 없었던 애정을 이토록 나타내 주는 아내를 지금 잃게 되었다고 생각하자, 절망으로 자신의 모든 존재가 허물어져 버릴 것 같았다. 그러면서도 무엇 하나 해주어야 할 일이 생각나지 않았다. 그리고 도대체 어찌된 영문인지 알 수가 없었다. 당장 처치를 해야 할 긴급한 상황에 몰려서 완전히 정신을 잃고 만 것이다.
- 312쪽

과연 에마에게 사랑이 존재했던 것일까. 그러한 에마를 사랑하는 샤를. 에마가 경멸하고 무시했던 샤를, 왜 샤를은 에마를 사랑해야 했던 것일까. 하지만 이런 헛된 질문을 하지는 말자. 모든 사랑은 모험이며 불륜이다. 근대의 사랑이란 끝없는 절벽을 향해 가는 자기 파멸과도 같은 것이다. 그러니 사랑이 존재했던 것일까, 사랑을 왜 하는 것일까 따위의 어리석은 질문을 하지 말고 사랑이 아름답다니 행복하다니 하는 10세기쯤에나 나올만한 말로 순진한 대부분의 독자들을 현혹하지도 말자.

그러나 이러한 환멸은 곧 새로운 희망으로 바뀌어 에마는 전보다 더 강한 정염에 불타고, 전보다 더 레옹을 탐하며 그를 찾아갔다. 그녀는 옷을 거칠게 벗어던지고 코르셋 끈을 마구 잡아당겼다. 끈은 미끄러져 나가는 독사처럼 그녀의 허리께에서 소리를 냈다. 맨발의 발끝으로 문이 잘 잠겨졌는가를 다시 한 번 확인하고 돌아올 때는 입은 옷을 몽땅 한꺼번에 벗어던졌다. 그리고 창백한 얼굴로 입을 굳게 다문 채 심각한 표정으로 몸을 부들부들 떨며 상대의 가슴에 몸을 던졌다.
그러나 식은땀에 젖은 그 이마, 그리고 잘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중얼거리는 그 입술, 겁에 질린 듯한 눈동자, 필사적으로 껴안은 그 팔에는 뭔가 막연하지만 심상치 않은 어두운 그림자가 있었다.
- 277쪽

우리는 언제나 희망을 찾아, 사랑을 찾아 모험을 떠난다. 하지만 이미 모험을 떠났던 이들은 가슴에 절망과 파멸, 또는 허무를 안고 돌아와 우리 곁에서 잠든다. 20세기 후반 이후를 물들이는 건 이들이 남기고 간 ‘심상치 않은 어두운 그림자’이다. 그 그림자의 존재를 아는 몇몇의 진지한 이들은 그 그림자를 벗어나기 위해선 몇 백 년 전부터 시작된 그 모험의 존재를 규명하기 시작한다. 그건 한때 위대하다고 칭송받았던 모험의 유산들을 하나둘씩 끄집어내어 ‘이것 때문이야. 이것 때문에 우리가 그림자 속에서 살아가게 된 거야’ 하고 불평하고 욕을 하는 행위들인 것이다. 꼭 샤를이 죽은 에마가 숨겨왔던 사랑의 유산들을 보고 절망하고 끝내 그건 운명이라고 말하게 되는 것처럼, 오늘의 몇몇 진지한 이들도 근대의 유산들을 다시 꺼내보면서 끝없이 절망하게 된다. 그렇다. 샤를이 끝내 에마를 버리지 못하는 것처럼, 우리도 우리들을 너무 사랑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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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별 연습 - 10점
로랑 모비니에 지음, 이재룡 옮김/현대문학


Apprendre 'a finir 이별연습
로랑 모비니에 지음, 이재룡 옮김, 현대문학


오늘, 광활한 대륙에서 밀어닥친 차갑고 건조한 바람들이 검은 아스팔트 위를 낮게 깔려 지나가는 순간, 지친 표정들로 고개를 숙인 채 걷는 사람들 사이에서 그녀를 보았다. 순간 나도 모르게, ‘난 당신을 알아요’라고 큰 소리로 부를 뻔했다. 다행히도 난 황급하게 손으로 입을 막았고 그녀는 날 보지 않고 오던 길처럼 나머지 길도 그렇게 걸어갔다.

우리는 때때로, 아무도 나의 말을 들어주지 않는다는 것을 알면서도 이야기하는, 이야기해야만 하는 경우가 있다. 한때 그것은 ‘아무도 듣지 않는다’에 대한 강력한 부정, 또는 누군가가 내 말을 듣게 만들겠다는 의지의 표현이라고 여겨졌다. 하지만 이제 우리에게 ‘아무도 듣지 않는다’는 사실을 바꿀 힘이 없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이러한 인식은 ‘아무도 들어주지 않는 상황 속에서의 이야기하기’라는 행위가 다름 아닌 아무도 듣지 않는다고 믿고 있는 자기 자신에 대한 부정으로 이어지게 되었다.

현대 소설에서 종종 볼 수 있는 지나친 자기 고백 투의 문장이나 표현, 독백의 형식, 1인칭 시점의 남발 내지는 1인칭의 상실은 외부 세계에 대한 절망의 인정이 자아에 대한 끊임없는 공격과 폭로로 이어지게 되었고 현대 소설가들은 그러한 양식을 찾게 된다.

하지만 아무도 나의 말을 들어주지 않고 내 사랑의 단어들이 내 작은 입술에서 나오자마자 얼어 뚝뚝 떨어진다면, 그래서 내 바램이나 내 희망, 사랑 따위가 아무런 힘도 발휘하지 못하고 무너져 내릴 때, 어떻게 외부 세계에 대한 묘사나 표현이 가능하단 말인가. 어떻게 그런 일이 가능한 것인가.

오늘 차고 건조한 거리에서 보았던 그녀도 그러했다. 그녀.

이제 언제라도 기둥에 페인트를 칠해줄 사람이 생겼다. 터진 구멍을 메우고 금 간 벽을 새로 발라줄 남자. 쥐똥나무가 담 밖으로 넘어가거나 측백나무가 질식할 것 같으면 무거운 전지가위를 번쩍 들 수 있는 튼튼한 손과 정확한 눈대중을 지닌 사람이 생겼으니 이제 걱정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이제 누군가가 생긴 것이다. 그 사람이 언젠가는 회복되리란 것을 나는 알고 있다. 내일. 그 사람이 바로 내일 돌아올 거라는 소식을 들었다.
- p.7

그가 돌아온다는 소식에 흥분하는 그녀. 하지만 그는 바람난 남편. 그 남편이 돌아오는 것임을 우리는 한참 지난 후에야 알게 된다. 그녀는 그 사실을 숨기고 싶었던 게다. 그녀.

내가 그를 사랑한 적이 없었다는 말을 그 누구라도, 심지어 그 사람이라도 그런 말을 내뱉는다면 결코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 아, 그래요? 내가 당신을 사랑하지 않았다니? 라고 맞받아쳤을 것이다. 오로지 당신을 가까이에서 볼 수 있는 권리만을 위해 모든 것을 잊은 여자에게 내가 당신을 사랑하지 않는다는 말을 할 수 있나요. 자존심을 죽이고 당신만 바라보고 있는 여자에게. 당신이 다른 여자를 사랑하는 이유가 오로지 그 여자만이 당신을 제대로 볼 수 있고 나는 당신 앞에서 그저 눈을 내리까는 수밖에 없다는 당신의 생각까지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여자에게, 그래요, 맹세컨대, 그토록 애쓰는 여자에게, 그래요, 맞아요, 당신의 선택, 당신의 취향, 당신의 삶 앞에서 눈을 내리까는 여자, 아니, 눈을 감고 당신의 분노의 숨결을 자기 입안에 담아두는 여자에게 그런 말이 나오나요.
- pp.123-4

하지만 그런 일은 생기지 않는다. 하나로 견고하게 구축된 이 소설은 그녀 자신을 향한 그녀의 독백에서 시작해 그녀의 독백으로 끝난다. 군데군데 타인의 목소리가 들어오긴 하지만, 그녀의 독백에 휩싸여 그녀의 독백을 보충할 뿐이다. 소설은 절대로 그녀의 영혼 바깥으로 나가지 않는다.

이 세상은 털끝만치도 변하거나 움직이지 않을 것이고 심지어 미동도 하지 않겠지만 우리, 바로 우리만이 자칫하면 언제라도 쓰러지고 흔들리고 말 것이며, 우리의 살갗, 미소, 분칠을 한 우리의 얼굴, 심지어 우리의 머릿속에 있는 우리 삶의 역사까지도 아차 하는 순간, 한줄기 바람만 불어도 몽땅 휩쓸려 날아가 버릴 것이다.
- p.103

아차 하는 순간에 결정 나버리는 우리 인생하며, 우리 사랑하며, 아차 하는 순간 날아가 버리는 우리를 둘러싼 모든 것들, 우리 삶의 의미들. 우리에게 사랑은 얼마나 멀리 있는가. 멀어져 가는 우리들의 사랑을 잡기 위해, 길게 뻗은 손가락 끄트머리에 그 사랑의 자취라도 묻히기 위해 끊임없이 우리 스스로에 질문하고 위로하며 화를 내고 절망한다. 아직 희망은 있다고. 아니 희망이 있다고 믿는 건 나의 부질없는 믿음일 뿐이니, 여기서 그만 포기하라고, 아니, 그것은 거짓말이라고, ... ... 뫼비우스의 띠처럼 그렇게 돌고 돌면서 사랑을 잃어버린 그녀의 독백은 이어진다. 그 위로 사랑과 이미 멀리 있는 우리들의 독백이 겹친다.

그는 나의 이름을 부르지 않을 것이다. 젊은 시절에는 이름을 우습게 여기고 그저 ‘우리’라고 부르면 족했고 그 우리가 모든 기적을 일으켰지만 이제는 더 이상 ‘우리’라고 부를 일도 없을 것이다.
- 소설 서두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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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바이야트 - 10점
에드워드 피츠제럴드 지음/민음사





The Rubaiyat of Omar Khayyam
E. Pitzgerald.
이상옥 옮김, 민음사 세계시인선 12







오, 지옥의 위협이여, 천국의 기약이여!
한 가지는 확실하오, 인생은 덧없는 것
이 한 가지 분명하고, 나머지는 거짓일세
제 아무리 고운 꽃도 지고 나면 그만이니
- 63편




19세기에 번역된 11세기, 또는 12세기 아랍의 시집. 그러고 보면 거의 천 년 가까운 세월이 흘렀지만, 그 옛날, 같은 하늘이라고 생각되지 않을 법한 곳의 시인의 시집이 후에 유럽에서 번역되어 나왔을 때, 사람들이 보였을 감동이나 열광을 생각을 해보면, 이 세계가 아무리 많이 변했다고들 하나, 이 인생들의 본질적인 영역의 변화는 없었다는 것이 확실해진다. 그러므로 우리가 가진 것들이 옛 것과 비교해 가치 있다거나 우월하다고 생각하는 건 참으로 어리석은 짓이다.

현대인들의 대부분이 지옥도 천국도 없다고 믿는 이유는, 적어도 학교에서 있다고 가르치지 않는 이유는 고작 몇 백년 밖에 되지 않은 서양 근대의 산물이며 그렇게 생각해야만 명석 판명한 지식을 쌓을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지, 지옥이나 천국이 없다고 합리적으로 논증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단지 논증불가능하기 때문에 잠시 고개를 돌리고 있을 뿐. 어찌 알겠는가. 지옥이 있고 천국이 있을지.

하지만 지옥이 있든 천국이 있든, 11세기 아랍 사람이나 21세기 동아시아사람이나 한결같이 인생은 덧없다고 생각하고 있으니.


슬프다, 장미꽃 시들면 이 봄도 사라지고
젊음의 향내 짙은 책장도 덮어야지!
나뭇가지 속에서 고이 울던 나이팅게일
어디서 날아와서 어디로 갔나
- 96편 



인생은 참 덧없다. 청춘은 한순간이고 시간이 지나고 얼굴의 주름이 늘어날수록 세상은 공포스러운 것으로 변하고 데카르트의 방법론적 회의는 생각하는 나 속으로 무너져 내린다. 슬프다. 대학 시절 서로의 꿈을 이야기하던 이들은 이 도시 어느 구석진 곳에서 세상의 먼지를 잔뜩 뒤집어쓴 채 나타나 도시의 욕망을 이야기한다. 젊음의 향내는 책 속에서 잠들어있고 해마다 겨울은 어김없이 찾아온다.

허무주의란 그렇게 특별난 것이 아니다. 단지 그것에 어떻게 저항할 것인가가 문제일 뿐. 세상이야 원래 허무했던 것이고 인생사가 다 그렇고 그런 것이었고 생의 가치라든가 인생의 의미라든가 하는 것도 다 말장난에 불과하다는 것을 현대인들은 나면서부터 알고 있는 듯하다.

영원한 건 없고 사랑은 언제나 덧없이 왔다가 덧없이 사라진다. 아마 많은 이들이 이 시집을 두고 연구논문이나 책들을 펴내었을 것이다. 도대체 그들은 무엇을 배운 것일까. 이 시집을 읽고서.


생사의 갈림이야 수학으로 풀어보고
인간의 영고성쇠(영고성쇠) 논리로써 따지거니
헤아려 보고자 한 모든 것 중에서도
깊은 이치 터득한 건 술의 묘미뿐이로다
- 56편 



이제 남은 건 술뿐이구나. 내일은 오지 않을 것이고 가슴 아팠던 어제는 이미 지나갔으니, 오늘은 맘을 놓고 즐겨야겠구나. 아, 텅 빈 주머니가 초라하게 하지만, 그런들 어떠리오.


죽음의 술잔 든 저승의 천사
강가에 앉아 있는 그대 찾아와
그대의 영혼에게 잔을 권하면
사양 말고 들이키오, 그 한잔 술을
- 43편 



삶과 죽음을 가로지르는 것. 그리고 그것을 극복하는 방법들 중의 하나. 몇몇 위대한 예술가들이 가르쳐주는 방법. 생의 허무를 긍정하고 그것을 위해 한 잔 술을 들이키는 것. 희망이니 가치니 의미니 하는, 이런 쓰레기 같은 것들은 잠시 손 끝에서 놓고 그 빈 손으로 술잔을 쥐고 춤을 추며... ...


천국이 별것인가, 욕망 충족의 환영이요
지옥이 별것인가, 어둠 속에 던져진
불붙은 영혼의 그림자일 뿐, 우리 모두
그 어둠에서 나와 다시 거기로 돌아갈 몸
- 67편 



덧없이 흘러가는 사랑을 잡으며 흘러갈 사랑을 노래하자.


남몰래 속삭이며 대답하는 술잔이여
그대 또한 한때는 살아서 마셨으리
고분고분 입맞춤을 받아주는 입술이여
얼마나 많은 입맞춤 주고 또한 받았는가.
- 36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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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로잡힌 영혼 - 8점
마르셀 라이히-라니츠키 지음, 서유정 외 옮김/도서출판빗살무늬




마르셀 라이히-라니츠키, <사로잡힌 영혼>, 빗살무늬



재미있게 읽었지만, 마음에 걸리는 부분이 많다. 그것은 라니츠카가 생각하는 문학이나 예술과 내가 생각하는 그것들과 많은 부분에서 틀리기 때문이다. 또한 그는 작가들을 자기애에 가득찬 인물로 매우 공격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그러나 자기중심적이거나 자기애에 대한 판단이나 간략한 상황 설명만 있을 뿐, 깊은 분석은 없다. 분명 수긍할 만한 구석이 있기는 하지만 그냥 자기 생각나는 대로 서술했을 뿐이다. 자기 느낌대로.

라니츠기의 문학에 대한 사랑은 무척 감동적인 구석이 있기는 하다. 하지만 현대 작가나 예술가들이 고민하고 방황하는 것에 대한 아무런 통찰도 없어 보인다. 그는 삶과 유리된, 세계와 유리된, 그렇게 자족적으로 구성된 문학의 세계를 읊고 싶은 것이지, 문학이 반영하고 있는 하나의 삶이나 그 삶이 처해있는 현실 세계에 대해선 아무런 관심도 없어 보인다.

그는 교묘하게 자신의 권위를 내세우면서 자신의 평가를 누군가에게 알리는 데 있어 탁월한 재능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간결하면서 정곡을 찌르는 말. 라니츠키를 돋보이게 하는 부분이다. 이 책에서 그러한 그의 능력은 유감없이 발휘되고 있다. 하지만 라니츠키에게 문학은 구원이었겠지만, 현대의 예술은 ‘예술은 그 누구도 구원할 수 없다’는 것이 주요한 테마들 중 하나이다. 고작 자기변명이나 자기 합리화에 불과하다고. 그리고 그것마저도 폭로해버리고 있는데.

분명 이 책은 쉽게 읽히고 그러면서 저자는 글의 중심을 잃지 않는다는데 큰 미덕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그가 생각하는 문학이나 비평은 나에게 있어 아주 오래된 고전 문학을 읽는 듯한 느낌을 가져다주었을 뿐이다. (이것만으로도 이 책은 읽을 만한 가치가 충분하다. 이 정도로 열성적이며 대중적인 비평가를 우리 문학은 가지고 있지 못하니. 그것이 안타까울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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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중 곡예사 - 10점
폴 오스터 지음, 황보석 옮김/열린책들



폴 오스터, Mr.Vertigo, 열린책들.




'공중곡예사'라는 번역 제목은 썩 성공적이지 못하다. 차라리 '미스터 버티고'나 '현기증씨'가 낫지 않을까.(그만큼 이 소설 속에서 '현기증'이라는 소재는 매우 중요하다. 소설 속에 아주 짧게 언급되지만, 주인공 인생에 있어 한 계기를 마련하기 때문이다.)

살아가면서 중요한 것들이 여러 개가 있는데, 그 중 하나가 '거리감'이다. 가령 고등학교 때 친구가 건네준 빨간 포장의 말보루를 가슴 깊숙이 삼키고 난 다음 펼쳐지는 거리 풍경과 팽창하는 동공과의 거리 변화 따위나 대학 때 옆에 사모하는 여자를 앉히고는 연거푸 데킬라 스트레이트 잔을 여러 잔 마시고 손을 뻗쳐 그 여자의 얼굴 위로 갖다댈 때, 손가락 끄트머리와 그 여자의 볼 사이의 거리, 그 거리가 지니고 있는 어떤 푸른 빛깔의 팽팽한 긴장감 따위가 그러한 거리감의 예가 될 수 있을 것이다.

'내가 물위를 처음 걸었던 것은 열두 살 때였다'라고 시작하는 이 소설은 허공으로 몸을 띄우게 되는 한 남자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그런데 여기에서 몸을 띄운다는 건 어떤 특별한 의미를 지니고 있는 것은 아니다. '내가 모든 수학 문제를 다 풀 수 있었던 건 열두 살 때였다'라든가 '내가 컴퓨터 바이러스를 만들어내었던 건 열두 살 때였다'라든가 하는 문장으로 시작해도 별로 달라질 것은 없다는 말이다. 단지 현실적인 가능성이 희박한, 어떤 우의적인 사건을 통해 소설의 여러 사건들을 끌고 가게 만드는 폴 오스터 특유의 장난이다.

이 소설 전체가 이러한 장난으로 구성되어 있다. 삶을 그대로 관통하지 못하고 어떤 기만적인 태도, 즉 인생과, 혹은 이 세상과 어떤 거리를 두고 그 사이를 장난으로 채워버리는 폴 오스터 특유의 태도가 이 소설에서도 고스란히 드러난다. 실제로 이러한 태도로 인해 폴 오스터를 싫어하는 독자들이 있기도 하다.

내가 폴 오스터를 선호하는 이유는 바로 이러한 기만적인 태도에 있다. 이 기만적인 태도를 이해하는 것은 폴 오스터 뿐만 아니라 현대 소설을 이해하는 데 무척 중요한 길잡이를 한다. 꼭 로베르토 무질의 <<세 여자>>에서 어렴풋이 보았던 외부세계에 대한 태도가 폴 오스터에게 와서 그대로 재연되고 있는 셈이다.

그러고 보면 이 소설은 어떤 교훈적인 것도, 인생에 있어 어떤 통찰도 말하지 않는 듯이 보인다. 아니 어떤 통찰을 말하는 것 같지만(월트의 입에서 나오는 이상한 말들, 가령 '그러면 당신 몸 속의 공허함이 당신 주위의 공기보다 더 가벼워진다'따위의 말), 다 우스개소리다. 몸을 허공에 띄울 수 없다는 건 누구나 알고 있는 것이고 이 소설은 몸을 허공에 띄우기를 강요하는 소설이다. 이 어긋남은 읽는 이로 하여금 약간의 우울함 따위를 선사하는데, 그 이유는 몸을 허공에 띄우든 띄우지 못하든, 우리 인생은 이미 조각나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하기 때문이다. 이미 우리 인생은 우리 인생이 아니고, 우리를 인도해줄 어떤 사람도 없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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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터 한트케, "어두운 밤 나는 적막한 집을 나섰다", 문학동네.



힘들게 읽은 작품. 몇몇 뛰어난 문장들이 눈에 보임. 그러나 전체적으로 어떤 내용인지, 그냥 일반적인 소설 읽듯이 읽어선 접근하기 어려움.

구성의 치밀함이 있는 듯 하나, 그것을 알기에는 지하철은 무척 안 좋은 공간이었음. 힘든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는 현대인들에게 가장 적당한 텍스트는 헐리웃 영화인 듯함.

이 소설, 무척 재미없음. 예술이 대중과 멀어지는 이유는 그 어떤 것도 이 세상에 대한 해답을 가지고 있지 못하기 때문인데, 페터 한트케의 작품도 여기에 포함됨.

최근 라이프니츠의 '모나드'를 다시 떠올리게 되었는데, 그 이유는 예술이 스스로의 담을 쌓고 그 속에서 완결된, 무척 행복한 자기 변명의 구조를 만들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임. 그런데 이것은 천천히 현대인의 삶을 구축해 내가고 있음.

전형적인 여행 소설임. 여행이라는 측면에서 보자면, 무척 훌륭함. 자기 완결적 구조를 가지고 있음. 떠남과 돌아옴의 순환 구조. 영혼의 성장을 테마로 함. (그러나 이것은 작가의 의도된 거짓말일 수 있음. 때때로 위대한 서사시의 저자들이 행하였듯이 어떤 '환상'에 충실하게 봉사한 것일 수 있음)

나중에 다시 기회가 된다면, 읽어보겠지만, 다시 읽는다 하더라도 재미없을 듯함.

(* 페터 한트케는 전후 독일 문학에 있어서 무척 중요한 작가이다. 그러므로 내가 한트케의 세계를 낯설게 받아들이는 경우일 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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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벌레, 클라스 후이징, 문학동네



책벌레를 읽었다. 정독 요하는 책이다. 하지만 건성으로 읽었다. 문장이 좋지 않았고 스토리를 끌고 나가는 스타일도 흥미진진하지 않았다. 그 이유는 하나의 스토리가 전개되는 것이 아니라 두 개의 스토리와 하나의 말많은 양탄자로 구성되었기 때문이다.

무척 치밀한 구성이었지만, 나는 한 권의 소설을 원했지, 자신의 주장을 담은 논문을 원했던 건 아니다. 하지만 이 책이 우리에게 던지는 질문: "책은 과연 무엇인가?"

책을 읽으면서 책이 무엇인가에 대해 고민해보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왜 우리는 책을 읽는 것일까. 한동안 이 고민을 해야할 것이다. 에코의 <장미의 이름>이 한 권의 책에 대한 것이듯, 진시황제가 모든 책을 불 태웠듯이, ... 책은 무척 중요한 것인데, ...

2002년 9월 : 다시 떠올려보아도 이 소설은 극적 긴장감이나 감동이라고 하는 측면에서 떨어진다. 주제가 너무 분명한 경우 그것을 담는 스토리가 어떻게 전개되어야하는가에 대해서 이 소설가는 아직 잘 모르고 있는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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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만 아는 정원이 있다 - 10점
이경림 지음/이룸


파란 하늘이 위로, 약 이십킬로미터 정도 끝없는 우주 쪽으로 올라갔다. 그랬더니 조금 넓어진, 또는 매우 넓어진 하늘을 메우기 위해 공기들이 이리저리 재빨리 움직이며 바람을 만들기 시작했다. 해마다 삼월 초면 이런 일이 생기곤 했다. 하늘이 먼저 움직이고 뒤따라 공기들이 움직였다. 옷깃 사이로 공기들이 밀려들어왔다 밀려나갔다. 꼭 파도 같았다.

방 구석 오래된 책장 속에서 '정원'을 페이지 속에 숨긴 책 한 권을 꺼내들었다. 숨긴 정원의 크기를 가늠할 방법은 없었지만 내가 책을 들고 흔들자, 우수수 작은 나무며, 푸른 잔디며, 둥글고 맨들맨들한 돌맹이들이 떨어져내렸다. 꼭 한겨울 함박눈처럼 내려 금새 방을 가득채웠고 열린 창을 넘어 골목길을 채우기 시작했다.

정원에 익숙하지 못한 도시의 주민들이 문을 열고 나와 정원을 숨긴 책 한 권을 들고 있는 나에게 삿대질을 하기 시작했다. 오늘 종일 플라스틱으로 만든 작은 쓰레받기로 떨어져있는 나무며, 잔디며, 돌맹이들을 책 속으로 집어넣어야만 했다. 몇 시간을 했는지 모르겠다. 그러다 돌맹이 하나가 바람에 밀려 하늘로 올라갔다.

바람이 조금 더 세게 부니까, 나무며, 잔디들도 따라 하늘로 올라갔다. 하늘로 올라가 싱그러운 향기를 뿌려댔다. 무척 좋은 향기다. 삿대질을 하던 주민들도 나와 그 향기를 맡으려고 했다. 그건 좋은 글에서만 맡을 수 있는 향기였다.

오랫만에 무척 좋은 향기를 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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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스칼 키냐르, '은밀한 생', 문학과 지성사



나는, 내가 읽으면서 몽상할 수 있는 그런 책을 쓰려고 한다.
나는 몽테뉴, 루소, 바타유가 시도했던 것에 완전히 감탄했다. 그들은 사유, 삶, 허구, 지식을, 마치 그것들이 하나의 몸인 듯 뒤섞었다.
한 손의 다섯 손가락들이 무엇인가를 붙잡고 있다.
- 제 32장, 292쪽.


소설 1 : 이제 소설은 몽상과 개인의 독백만을 중얼거리기 시작한다. 소설에 있어 Reality란 실제의 세계(real world)를 반영할 때 사용되는 것이 아니라, 한 개인에게 있어 진실한 것, 하나의 고백(confession)일 경우에 Reality라는 단어가 사용된다. 인과란 무시해야하는 것이며 이리저리 방황하는 우리들의 영혼을 위해 달콤하고 지적인 사랑의 단어들은 전통적인 소설이 가져다주지 못한 그 무엇을 가져다준다.

포스트모던적 인생 : 앤디 워홀의 욕망. 이미지들로 자신을 채우기. 현대의 적극적이고 대중적인 예술가들의 전략. 끊임없는 자기 노출과 대담한 행위와 인터뷰. 대중의 욕망 위로 겹쳐진 예술가의 모습. 그 뒤로 사라져버리는 실제 예술가. 하지만 포스트모던적 인생이 격하기 그지없는 허무한 날개짓이라면, 은밀한 생은 ... ...

은밀한 생 1 : 아름다운 대중 혐오증. 아무도 자신을 이해해주지 못한다고 믿는 현대의 어떤 병에 대한 작은 치료법.

은밀한 생 2 : 사랑에 대한 독백. 사랑하고 있다는 고백. 사랑했던 자들에 대한 회상. 사랑에 대한 독서. 사랑에 대한 낙서. 하지만 사랑은 책 속에만 있고, 사랑은 독서에만 있고, 사랑은 몽상 속에만 있고, ... 사랑은 ... ...

소설 2 : 뛰어난 작가들이 숨어사는 작은 성. 하지만 시간이 흘러가고 그 성의 모습도 바뀌는 법. 이제 시간도 공간도 아무 의미를 가지지 못한 채, 오직 우리 영혼 속에서만 가치있는 것... ... 추상의 세계, 몽상의 세계 속으로 여행. 그 여행의 이름. 은밀한 생. 또다른 이름의 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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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 클레지오, 우연, 앙골라 말라, 문학동네





인생에는 여러 가지 종류가 있다. 그리고 그것을 보여주는 여러 가지 방식이 있다. 르 클레지오는 그러한 그것이 가지고 있는 어떤 신비, 어떤 매혹을 보여주고자 한다. 그리고 그 신비와 매혹이 현대 문명에 의해 무너지는 모습까지도 시적인 풍경으로 묘사한다.

무척 아름다운 소설이지만, 르 클레지오의 화법이나 문장에 익숙치 않은 사람은 꽤나 지루해할 만한 소설이다. 지극히 현대적인 소설이긴 하지만, 그것을 쉽게 드러내지 않는다.

한국에서도 이국적인 분위기를 자아내는 소설이고 프랑스에서도 무척 이국적인 분위기를 자아내는 소설일 것이다. 다음 기회에 르 클레지오의 문학 세계를 다룬 글을 올릴까 한다. 따지고 보면 르 클레지오의 문학 세계는 이해하기 힘든 구석이 많다.

아마 이삼년 전에 이 소설을 읽었다면, 난 무척 재미없어 했을 것이다. 어떤 이가 나이에 따라 읽히는 소설이 틀리다고 했는데, 그런가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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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책 읽기의 기억 1. 책 읽는 병든, 그러나 고귀한 우리들 책을 읽는 여인(안지오의 소녀) 이탈리아 안지오Anzio에서 나온 그리스 조각 복제본(대리석)으로 기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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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들레르의 수첩 샤를 보들레르(지음), 이건수(옮김), 문학과지성사, 2011년 1846년 산문과 1863년 산문이 함께 실려있고 죽은 후 나온 수첩까지 실린 이 책은 기억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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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경을 바꿔야 할 시기가 지났다. 나를, 우리를 번거롭게 하는 모든 것들은 우리의 예상보다 빨리 도착해 신경쓰이게 한다. 글자가 흐릿해지는 만큼 새 책이 쌓이고 잠이 줄어드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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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듯이 누워 밑에서 올라오는 열기와 얇게 흔들리는 콘크리트 건물의 건조함에 묻혀 아주 짧게 내 삶을 되새기며 슬퍼한다. 이름 모를 바람이 들어와 잠시 내 몸 위에 살짝 앉았다.....

촘스키, 끝없는 도전, 로버트 바스키

촘스키, 끝없는 도전 로버트 바스키(지음), 장영준(옮김), 그린비 노엄 촘스키를 모르는 이는 없을 것이지만, 그의 언어학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할 것이다. 대체로 우리에게 .....

헤밍웨이의 말, 헤밍웨이

헤밍웨이의 말 헤밍웨이(지음), 권진아(옮김), 마음산책 헤밍웨이가 너무 유명했던 탓에, 내가 그를 읽은 건 고등학생 때였다. 이것이 세계문학전집의 폐해다. 헤밍웨이의 소설들.....

데이비드 밴 David Vann 인터뷰 중에서 (Axt 2017. 11/12)
행복한 그림자의 춤, 앨리스 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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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충일 국립묘지 방문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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