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스트모더니즘 33

현대 미술에 대한 단상

21세기의 예술은 어떤 모습으로 펼쳐질 것인가하는 질문을 종종 받는다. 그리고 대부분 나의 입에서 정보화시대에 걸맞게 '새로운 테크놀러지에 의한 색다른 예술양식이 되지 않을까요'하는 대답을 기대하지만,기대에 어긋나게도 테크놀러지는 언제나 예술의 일부를 이루어왔을 뿐이다. 많은 사람들이 오해하는 사진과 인상주의 미술과의 관계에서도 사진때문에 인상주의가 등장했다는 말은 거짓말이다. 언제부터 우리에게 '테크놀러지'에 대한 기대가 생겼는지 모르겠지만, 그리스 고전 시대에 디오니소스 극장에서 소포클레스의 '오이디푸스'가 자신의 운명(moria)을 저주하며 스스로 눈을 버릴 때의 그 고통이 사라진 것이 아니며, '안티고네'가 공동체와 개인의 자유에 대해서 깊은 성찰을 보여주었을 때의 그 성찰은 아직도 유효한 것이다..

우아하고 감상적인 일본야구, 다카하시 겐이치로

우아하고 감상적인 일본야구 - 다카하시 겐이치로 지음, 박혜성 옮김/웅진지식하우스(웅진닷컴) , 다카하시 겐이치로 지음, 박혜성 옮김, 웅진출판, 1995 (* 시리즈의 열번째 권). 1. 이 소설에 대한 감상문으로 적당한 문장은 이러하다. “다카하시 겐이치로라는 일본의 변태적 허구를 즐기는 작가가 쓴 소설을 읽었는데 말이야, 도통 무슨 말인지 모르겠어. 그런데 녀석 소설 하나를 잘 쓰더군. 뭐, 무슨 말인지도 모르는 소설을 읽고 잘 쓴다라는 따위의 말을 하는 것이 이상하긴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 다카하시 겐이치로라는 녀석이 ‘변태’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사라지는 건 아니야.” 하지만 이런 문장은 이 소설을 소개하는 글의 문장으론 적당하지 않다. 2. 소설 뒤에 붙은 박유하 교수의 해설은 이 소설의 ..

현대사상의 모험, 타케다 세이지

* '나'로부터 세계가 있다. 그리고 난 그 세계를 본다. 그 세계는 그 자체로서 존재하고 있는 것일까? 과연 내가 없어도 세계는 존재하고 있다고 말 할 수 있을 것인가? 그것에 대해서 난 세계가 존재한다거나 존재하지 않는다라고 말할 수 없다. 왜냐면, 이미 지금 난 여기 있으며, 동시에 내가 바라보는 세계가 존재하고 있음으로(동시에 난 내자신이 부재하 는 상황을 인식할 수 없음으로). 그렇다면, 왜 난 세계 속에서 아파하 는 것일까? 나의 고통 때문에, 혹은 타인의 고통때문에. 정말로 타인 의 고통이라는, 보다 넓게 세계의 고통이라는 것은 내 고통이나 아픔 이 될 수 있는가? 그러나, '불행하게도' 경험상 세계의 아픔은 내 아 픔이 되고 있(었)다(* 이것을 소설가 박상륭은 예술가들의 '메시아컴 플렉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