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스트모더니즘 33

셰익스피어의 기억 - 보르헤스 전집 5

셰익스피어의 기억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지음), 황병하(옮김), 민음사 나이가 든다는 것, 그건 보이지 않는 것, 가려진 것, 지금 없지만 다가오는 공포에 신경쓰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이 지상에서의 시간을 쌓아갈수록 갑작스레 부는 바람에서 계절의 수상함을 알고, 사랑하는 여인의 뜬금 없는 키스의 따스함 속에 깃든 슬픈 이별의 메세지를 읽으며, 길을 지나는 이름없는 행인의 무표정한 얼굴 아래로 차마 말할 수 없는 인생의 고단함을 느끼게 된다. 그렇게 나도 나이를 먹고 있었다. 민음사에서 나온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전집 중 마지막 권인 을 읽었다. (1975)과 (1983)을 묶어 번역한 이 책은 짧지만 보르헤스의 세계를 충분히 느낄 수 있는 소설집이다. 나에게 보르헤스는, 내가 그를 알고 지낸 지난..

기다림 망각, 모리스 블랑쇼

기다림 망각 - 모리스 블랑쇼 지음, 박준상 옮김/그린비 기다림 망각 L'attente L'oubli 모리스 블랑쇼(지음), 박준상(옮김), 그린비 장르가 불분명한 이 책은 모리스 블랑쇼의 일종의 에세이다. 일종의 연애담으로 읽어도 될 것이며, 문학론으로 읽어도 되고, 인생에 대한 태도로 읽어도 무방하다. 어차피 모리스 블랑쇼 연구자가 될 턱 만무하고 어려운 철학 용어나 문예 이론을 들이민다고 해서 이해될 리도 없다. 이 책 속의 그도 그녀를 향해 끊임없이 이야기하지만, 그녀는 그의 바람대로 움직여주지 않는다. 모든 것은 죽고 사라져야만 비로소 의미가 드러나는 법이다. 망각. 그리고 그 드러나는 의미를 기다리는 것. 그것이 언어이거나 문학이거나 예술이 될 것이다. 이 책은 그와 그녀를 통해, 모리스 블랑..

현대예술 - 형이상학적 해명, 조중걸

현대예술 : 형이상학적 해명 - 조중걸 지음/지혜정원 현대예술 : 형이상학적 해명 조중걸(지음), 지혜정원 읽고 난 다음 서평을 쓰지 못하는 책들이 있다. 쓰지 못하는 이유는 간단하다. 책에 대한 소개 대신 무조건 '읽어라'라고 하는 편이 낫고, 몇 문장의 인용은 도리어 책에 대한 누(累)가 되어 인용하지 않는 것보다 못하기 때문이다. 그러니 이 서평은 애초부터 불가능한 것에 대한 시도이다. 그러니 내가 할 수 있는 글이란 서문 일부의 인용 정도가 되지 않을까? 언어학, 인류학, 기호학 등의 연구에 매달렸던 많은 사람들이 나름의 통찰에 준해 현대의 형성에 공헌했다. 그러나 이것들이 현대라는 전적으로 새로운 세계를 형이상학적으로 설명하지는 못한다. 그것들 역시도 현대의 한 현상일 따름이다. 이 책은 이러한..

라우셴버그의 '지워진 드 쿠닝의 그림'

1959년, 무명의 젊은 미술가 로버트 라우셴버그Robert Rauschenberg는 윌렘 데 쿠닝Willem de Kooning에게 어떤 미술 프로젝트에 참여해달라고 요청했다. 당시 데 쿠닝은 라우셴버그보다 나이가 많고 훨씬 유명했을 뿐 아니라 작품값도 상당히 비쌌지만 그 프로젝트에 기꺼이 동참했다. 그는 이를 위해 자신이 중요하게 여겼던 그림 한 점을 라우셴버그에게 주었다. 크레용과 유성연필, 잉크, 흑연 등으로 그려진 그림이었다. 라우셴버그는 그 그림을 가지고 한 달을 씨름했다. 그림을 완전히 지운 것이다. 이어서 그는 그 지운 그림을 금박 액자에 끼우고, “지워진 데 쿠닝의 그림, 1953년(Erased de Kooning Drawing, 1953)“이라고 제목과 날짜를 직접 써 넣었다. 라우셴버..

신디 셔먼

오늘 아침 메트로폴리탄미술관 페이스북에 신디 셔먼의 사진 한 장이 올라왔다. 아련했다. 1954년생의 이 여성 아티스트는 팝 아트 이후 최고의 명성을 얻는 여성 미술가들 중의 한 명이다. 그녀는 대중 문화 속에 자신을 드러내면서 끊임없이 후기산업사회의 자기 정체성(Self-Identity)을 묻는 것으로 유명하다. 한국의 미술 잡지에서도 자주 등장했고 현대 미술 관련 글에 어김없이 등장했던 그녀가 이젠 좀 뜸하다는 느낌이랄까. 벌써 '원로' 대접을 받는 건 아닌지 모르겠다. 하긴 요즘 세계 미술 트렌드에서 약간 비켜서 있는 느낌이 들기도 하지만. 두 장의 사진 작업을 올린다. 1978년의 연작 시리즈 중 일부다. 신디 셔먼(Cindy Sherman), Untitled Film Still 4, 1978 신..

칼스텐 해리스Karsten Harries 교수와의 인터뷰

며칠 전에 올린 칼스텐 해리스의 글에 이어, 다시 한 편 더 올린다. 전문 잡지에 오래 전에 실린 글은 구하기 어렵다. 좋은 글들이 많지만, 누군가 꺼집어 내지 않는 이상 누구도 찾아보지 않게 된다. 블로그에 누군가의 글을 그대로 옮기는 일이 드문데, 자주 그래야 겠다는 생각이 드는 건, 어찌 된 일인지 좋은 글 보기가 시간이 갈수록 어려워진다는 느낌 때문이다. (내 게으름이 한 몫 하는 것인지 모르겠다.) 아래 글은 월간미술 2002년 2월호에 실린 글이다. 현대미술에 대한 적절한 시각과 평가를 가진 칼스턴 해리스의 인터뷰이다. 지금 읽어도 놀라운 설득력을 가진다는 점에서 필독을 권한다. - 2002년 2월 월간미술 게재. 독일 철학, 미술사, 건축 이론, 그리고 현대 과학의 역사에 걸친 광범위한 지식..

컨트롤된 카오스 - 휴머니즘에서 뉴미디어의 세계로

컨트롤된 카오스 - 노르베르트 볼츠 지음, 윤종석 옮김/문예출판사 Das Kontrollierte Chaos Norbert Bolz 1995. (번역본은 2000년) 전선 속에 결박당한 번갯불, 즉 붙잡혀 있는 전기는 이교도들과 더불어 창궐하는 하나의 문화를 창조하고 있다. 전기가 가져오는 것은 무엇일까? 자연의 폭력들은 더 이상 인간 형질적 또는 생물형질적 접촉 속에서 관찰되지 않고, 버튼 하나로 인간에게 복종하는 무한한 파동으로 관찰된다. 그러한 파동들을 매개로 기계 시대의 문화는 신화에서 성장한 자연 과학이 힘들게 쟁취했던 것 ? 즉 사고의 공간으로 변용되었던 경건한 안식처 ? 을 파괴했다. 모던의 프로메테우스와 모던의 이카루스, 프랭클린과 라이트형제는 지구를 또 다시 카오스 상태로 몰고 가려고 위..

후기 마르크스주의

후기 마르크스주의 - 프레드릭 제임슨 지음, 김유동 옮김/한길사 후기마르크스주의 Late Marxism 프레드릭 제임슨 지음, 김유동 옮김, 한길그레이트북스 몇 달 전에 이 책을 다 읽었지만, 서평을 쓰지 못했다. 딱딱하고 압축적이며 추상적인 단어들로 이루어진 이론서를 읽기에는, 내 독서 태도가 성실하지 못했다. 어떻게 겨우겨우 완독하기는 했지만, 막상 글을 쓰려고 보니, 아도르노에 대한 편애로 가득 찬 프레드릭 제임슨의 태도를 받아들이기 쉽지 않았다. 프랑크푸르트학파에 속하지만, 아도르노는 자신의 독특한 색깔을 가지고 있다. 그것은 부분적으로 벤야민에게서 영향 받았겠지만, 실은 벤야민의 독특함 이상이다. 벤야민에 대한 이상한 선호(대중적 인기)로 인해, 아도르노는 종종 무시당하기도 하지만, 그는 (프레..

폴 드 만과 탈구성적 텍스트

폴 드 만과 탈구성적 텍스트 - 마틴 맥퀄런 지음, 이창남 옮김/앨피 뭔가 있어 보이는 단어가 있다. 뭔가 있어 보이는 문장도 있다. 아예 책 전체가 뭔가 있어 보이기까지 한다. 그런데 다 읽고 난 다음 주체할 수 없는 허탈함이 밀려온다. 저자도 이 사실을 알기 때문에 마치 암호처럼 단어와 문장을 나열해, 끝까지 뭔가 있어 보이게 만든다. 몇몇 독자는 ‘비트겐슈타인’을 떠올릴 지도 모르겠다. 짧은 문장들로만 병렬적으로 이루어진 비트겐슈타인의 책들은 (독자에 대한) 불친절함으로 악명을 떨치니 말이다. 아도르노도 이에 못지 않다. 아도르노는 ‘글쓰기’를 자신의 사상에 대한 실천으로 여겼다. 불문학을 전공한 프레드릭 제임슨이 독일어로 글을 쓴 아도르노에 빠진 것도 독특하기 그지 없는 아도르노식 글쓰기 탓은 아..

세계화의 폭력성, 장 보드리야르

시뮬라시옹 장 보드리야르, 프랑스의 사회학자. '시뮬라시옹'으로 국제적인 명성을 얻었으며, 이후 포스트모더니즘 논쟁의 중심에 서있었던 학자이다. 나는 장 보드리야르의 암울한 사회 분석을 싫어했으며, 그것이 진실로 드러났을 때의 끔찍함을 무시하면서 장 보드리야르를 전파하는 일군의 학자들을 경멸했다. 그들 대부분이 의지하는 책이나 이론은 오직 시뮬레이션 이론이었으며,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다. 장 보드리야르는 극단적인 반-플라톤주의자이면서, (우호적으로 평가하자면) 마키아벨리와 같은 전도된 이상주의자였을 지도 모른다.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이 20세기 후반 이후의 매스미디어에 의해 희석되고, 우리가 바라보는 현실은 사라지고 미디어들에 의해 새롭게 조작된 것들이 진실의 자리를 차지하게 된다는 하이퍼-리얼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