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하련의 우주/Jazz Life 992

강남으로 출근하다보니,

일찍 일어나기 위해서는 일찍 자야된다. 늦게 자면서도 일찍 일어나는 사람을 부러워 했는데, 부러워할 필요가 없다는 사실을 최근에 깨달았다. 하지만 자정이 되기 전에 잠을 청한다는 건 바쁜 현대인에게 꽤 어려운 일이다. 나같이 이것저것 좋아하는 것들이 많은 인간에겐 특히나. 어제부터 삼성동에 있는 사무실에 출근을 시작했다. 작은 Web Service 회사로, 전형적인 IT 기업이면서, Early Adopter와 Early Majority 사이의 캐즘(Chasm)을 넘지 못하고 있다. 캐즘을 넘기 위한 여러 가지 전략이 요구되는데, 그 전략의 일환으로 내가 합류하게 된 것이다. 뭐, 비즈니스의 근본은 다 비슷하고, 불과 4년 전만 하더라도 나는 IT와 전략 컨설팅을 하고 돌아다녔으니. 그리고 미술 시장이 꽁..

동사서독, 혹은 '잊으려고 노력할수록 더욱 선명하게 기억난다'

아직도 '시나리오'를 쓰고 싶다(시나리오보다 소설이 먼저겠지만). 아주 짧게 끊어지는 화면들과 아주 길게 이어지는 화면들로 구성되는, 지루하고 깊고 이해하기 어려운 대화가 오가는, 하지만 너무 슬프고 후회스럽고 아픈 스토리의. 네이버 블로그를 정리하다가(예전에 썼던 글을 티스토리로 옮기는), '동사서독'을 떠올렸다. 몇 번을 보았는지 모르겠다. 한국에 공개된 '동사서독'과 영화제에 출품된 '동사서독'이 다르고, 몇 년이 지난 후 '디렉터컷'이 새로 나왔다는 이야기도 들었다. 나에게 아직 영화에 대한 열정이나 호기심이 남아있는지 잘 모르겠지만, 아마 이야기와 화면(공간구성, 혹은 미장센), 운동과 시간에 대한 열정이나 호기심은 남아있을 듯... 이 영화, 꽤 슬픈 사랑이야기다. 아니, 아주 많이 슬픈. 그..

Dindi

이마트에서도 원두커피를 파는지 몰랐다. 어느새 원두커피도 대중화된 셈이다. 몇 번의 유럽 출장으로, 입에 원두커피가 붙어버렸다. 그 사이 터키에서 물 건너온 차와 스리랑카에서 넘어온 홍차가 그대로 먼지를 먹고 있는 중이다. 어디 찻집에라도 줘야할 판이다(혹시 필요한 곳이 있다면 언제든지). 이마트에서 파는 원두커피의 품질과 맛은 '글쎄'올시다. 딱히 기대한 것도 아니었고 임시방편일 뿐이었다. 그런데 원두커피, 마시면 마실수록 묘하게 빠져드는 것이 여간 재미있는 것이 아니다. 끓려 증기를 올려 뽑아내는 커피를 마시다가, 그 다음에는 커피를 망으로 된 부분에 넣어 뜨거운 우려먹는 방식으로, 요즘은 드랍 커피를 먹고 있다. 이 중에서 드랍커피가 제일 낫다. 필터 종이에 대한 불만, 주전자에 대한 불만이 늘고 ..

먼 미래에 ...

루이 알튀세르의 (저주받은 듯한 느낌의) 자서전, '미래를 오래 지속된다'가 재출간되었다. 내가 가지고 있는 책은 1993년, 돌베개 출판사에서 나온 것이니, 벌써 십수년이 지났다. 이 책, 내가 20대 시절 생각나면 뒤적이던 책이었다. 잔인할 정도로 자신을 파고들며, 자신이 목 졸라 죽인 아내에 대한 기억을 태연하게 하는 죽기 전 알튀세르의 문장들 앞에서, 어쩌지 못하는 과거 앞에서 모든 걸 포기하고 모든 걸 포기하지 않는 어떤 지식인의 슬픈 초상 앞에서, 그나마 내 20대는 낫다고 위안받던 시절이 있었다. 일 때문에 잠시 나간 삼성역 반디앤루니스 서점(아직도 서울문고라고 이야기하는 사람들이 있을까)에서 장 뤽 고다르의 '미치광이 삐에로'와 알랭 레네의 '내 사랑 히로시마'를 샀다. 아, 오랫만에 만나..

눈 내린 골목길 저 끝엔

밤 아홉시를 넘긴 시간에 집 밖으로 나가니, 눈이 내리고 있었다. 그리고 운동을 끝내고 오는 시간에 문득 눈이 곱게 쌓인 골목길을 걸어가는 동영상을 찍기로 했다. 갑자기 규칙적인 생활을 하고 술을 줄였으며 1주일에 3-4회 이상 꼬박꼬박 동네 피트니스 센터에 나가는 것을 이야기하자, 그 이유를 매우 궁금해 한다. 한 여자친구는 곧바로 이젠 소개팅을 시켜줘도 되겠다며, 시간을 잡으려고 했다. 어떤 이는 피트니스 센터에 아리따운 아가씨가 있을 것이라고 추측하기도 했다. 그러고 보면 정말 황당할 정도다. 이제 6주째로 접어든 이 생활은 송년모임 약속이 몰려 있었던 지난 주말을 제외하곤 제대로 지켜지고 있다. 이제 운동에도 어느 정도로 적응을 한 것인지, 운동을 하지 않으면 불편할 정도다. 나는 매우 공상적인 ..

초겨울의 빛깔

내 서재가 있는 곳은 김포공항 근처의 작은 빌라 4층이다. 창 밖으로는 빼곡히 들어차 있는 빌라들의 옥상과 나즈막한 산이 보이는 것이 전부다. 12월말의 햇살이 건조한 색채의 빌라 외벽에 닿아 미세한 소리들을 만들고 있다. 고개를 돌리면 읽은 책, 읽지 않은 책들이 오래된 먼지에 뒤섞여 내 빈곤한 영혼과 내 거친 폐를 위협하고 있었다. 무언가 이야기하고 싶지만, 실은 나는 '아름다운 침묵'을 배우고 싶다. 아무 말을 하지 않아도, 내 순수한 열망이 전달될 수 있었으면 하고 바라지만, 우리가 가진 언어의 한계와 의사소통의 어려움은 백 년 전 소쉬르를 기억해내도 충분할 것이다. 이런 날 멘델스존과 자클린 드 프레는 사소한 위안이 될 수 있으리라. 연말 근사한 공연이라도 한 편 보러갈 생각이었는데, 불행하게도..

늘 그것들은 음악이거나 날씨 탓이다.

I Call Your Name-The Mamas and Papas in Monterey 몇 년 만에 낡은 일제 파이오니아 턴테이블 위에 중고 LP 가게에서 구한 마마스앤파파스 베스트 음반을 올려놓았다. 몇 년 동안의 먼지들이 한꺼번에 날아올라 사각의 방을 채웠다. 오래된 슬픔의 목소리들이다. 십여 년 전 마마스앤파파스는 왕자웨이의 영화 ‘중경산림’ 덕분에 철지난 유명세를 탔다. 나도 그 때 그들을 알았다. 그 때, 나는 한 편의 소설과 한 편의 시나리오만 쓰고 싶었다. 딱 그것만 하고 싶었다. 군대를 끝낸 후였고 복학하기 전이었다. 사랑을 하고 싶었으나, 난 늘 번번이 실패하는 쪽에 속했다(지금도 별반 달라지지 않았다). 창원 중앙동의 작은 비디오 가게에서 오후 3시부터 새벽 2시까지 지냈다. 그 때 유..

쓸쓸함과 나쓰메 소세키

요즘 탐독하고 있는 책에서 '나쓰메 소세키는 예언자와도 같았다'라는 문장이 있었다. 나도 모르게 그럴 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다. 얼마 전 김영태의 시를 다시 읽으면서 많은 생각을 했다. 10년 전 내 모습과 비교해 나는 단지 표현만 하지 않을 뿐, 마음은 그대로라는 걸 알았다. 아니 고등학생 때와 별반 달라지지 않았다는 걸 알았다. 단지 마음을 감싼 껍질만 다소 두꺼워졌을 뿐이라는. 어제 밤부터 오전까지 내내 우울하고 쓸쓸했고 슬펐다. 때론 분노가 올라오기도 했다. 마음 가는 대로 살아, 아무런 갈등도 일어나지 않으면 그 곳이 천국이라는 생각을 했다. 반대로 마음을 움직이지 않으면 내가 천국을 만들 수도 있겠구나 하는 생각도 했다. 글렌 굴드의 손가락을 보면서, 이 사람 하나만을 위해 모든 것을 희생..

Blue Monk

썰물같이 일 년이 지나갔다. 시작할 땐 독일 칼스루헤 나가는 준비로 정신이 없었고 갔다 왔선 KASF 아트페어 때문에 정신이 없었고 그 후엔 프랑스 나갔다 들어와선 다시 선배 작품집 제작 때문에 바빴다. 일은 열심히 했으나, 주머니 사정은 더 악화되었고 내가 부족한 점들은 늘 그냥 그대로 부족한 상태로 남아있었다. 몇 차례의 면접을 보았고 유익하고 가치있는 경험을 했다. 내가 부족한 점을 알고 있는 상태였으므로, 그것에 대한 질문에서는 버벅일 수 밖에 없었다. 그리고 이 때까지 변하지 않은 걸 당장 배우고 익힐 수 있다고 하는 것도 희극적인 일이라, 그냥 담담하게 받아들일 수 밖에 없었다. 하지만 이젠 좀 업그레이드를 해야할 시점에 이르기도 했다. (그리고 그럴 생각이다) 어쨋든 규칙적인 생활 4주째다...

꽃 52

눈발 날리는 날이면 기억 나는 시 한 편이 있다. 늘 생각날 뿐, 외우진 못한다. 이 시를 쓴 시인은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고 그가 사랑하던 춤과 그림, 음악은 그의 글 속에 남아 소리를 내고 있었다. 이젠 서점에서 구할 수도 없을 시집을 서가에서 꺼내 헛기침 한 두 번 한 후, 소리 내어 읽어본다. 그러자 내리던 눈은 그치고 하늘은 어느 새 겨울 태양의 빛으로 가득 찬다. 내 희망은 보잘 것 없고 내 사랑은 늘 부주의하게 걷다, 길가 돌부리에 넘어져 상처를 입는다. 그럴 때 위로가 되는 것이 있다면, 모차르트와 오래된 시가 아닐까. 꽃 52 김영태 (1936~2007) 차의 시동을 걸면 성에 낀 유리가 맑아진다 마음은 반대로 어두워지고 희끗희끗 눈발이 날려 내 마음이 당신에게 가고 있다 못 견디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