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하련의 우주/Jazz Life 992

곰팡이의 봄

냉장고에서 몇 달 동안 기거하고 있던 식빵을 음식물 수거함에 버리고 올라오는 계단 옆으로 2월 어둠이 살짝 삐져나와 나에게 손을 건네며, 방긋 웃었다. 내 시선, 내 발걸음, 내 마음은 이미 어둠을 향해 열려있으나, 차마 손마저 내밀며 ‘나, 요즘 너무 어두워’하고 싶진 않았다. 방 청소를 하지 않은 지도 한 달이 다 되어간다. 가끔 먼지들에게 떠밀려 하는 경우가 있기도 하지만, 그건 겨울 태양이 너무 아름다워, 내 청춘의 질투심이 달아올랐을 때에만 가능한 일이다. 질투심 같은 건 달아오를 필요가 없는데, 그것이라도 달아오르지 않으면 달아오를 것이라곤 이제 남아있지도 않다. 사랑이라든가 애정이라든가 하는 것이 달아오르리라는 희망은 너무 실현되기엔 너무 늙어버렸고, 미움이라든지 증오라든지 하는 건 계속 가..

이런, 무력감

점심식사를 하고 난 뒤, 갑자기 우울해져버렸다. 이런. 주체할 수 없는 무력감이 뼛 속 깊이 파고든다. 하긴, 이 끝없는 우주의 티끌같은 지구에서, 예측할 수 없는 우연 투성이의 상처와 시련으로 점철된 도시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란, 고작 블로그에 푸념 하는 것이 전부인 걸. 그러니, 무력감은 내가 태어날 때부터 존재했음을 어찌 부정할 수 있으랴. 그런데, 하필이면 지금 이 무력감이 기습한 것일까.

장 뒤뷔페

문득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았다. 흐릿한 검은 빛깔의 어둠으로 물든 하늘은 자신의 존재를 숨기기 위해 갖은 노력을 다했으나, 끝내 실패한 표정으로 허공에 매달려 있었다. 터벅터벅 걸어 덕수궁 미술관으로 들어갔다. 저녁 7시. 고객사 미팅을 위해 오랜만에 입은 정장이 너무 낯선, 서른 중반의 샐러리맨에게 저녁 미술관 관람은 너무 어색했다. 하지만 다행이었다. 장 뒤뷔페는 날 환영해주었고 그 곳에서 나는 그의 빨간 색을 보고 흥분해 고함을 지를 뻔 했다. 그렇게도 많은 이들이 왜 장 뒤뷔페에게 매료당했는지 알 수 있었다. 유아스러운 천진난만함을 가진 듯이 보이나, 그 속에는 이 세계를 구성하고 있는 물질, 그리고 물질 위를 아무 의미 없이 부유하는 사람들, 그 사람들 사이를 흘러가는 사건들, 시간들에 대한 ..

눈빛

묘지같은 바람이 흰 눈에 섞여서 자신의 존재를 가릴 때, 그것의 실체를 포착해내는 영혼이고 싶었다. 그러자 바람은 그 열망을 향해 저주를 퍼붓고 어둠을 내리며 차가운 미소를 지으며 내 곁에 한참을 머무르며 날 주눅들게 했다. 그리고 나는 주눅들었다. 밀면 밀리고 불면 펄럭이고 땡기면 확 무너져버린다. 찬란한 태양이 우리의 젊음을 수놓던 그 여름날 해변의 모래성처럼 시간은 빠르고 청춘은 짧고 사랑은 오간 데 없다. 언제 우리가 젊었고 언제 우리가 사랑을 나누었던가. 추억은 달력이 바뀔 때마다 미련해지고 순수한 열망은 성욕으로, 탐욕으로, 미움으로, 증오로 바뀌어 간다. 내 마음의 성벽은 가시만 남은 시든 장미. 내 사랑의 언어는 오래된 하바나산 시가에 핀 푸른 곰팡이. 어느새 피부가 녹색에서 분홍빛으로 바..

이 겨울을 견디는 능력

비싸게 주고 산, 얇은 메탈 색의 아이와를 주머니에 넣고 작은 이어폰으로 대학 1학년 때 계속 들었던 노래다. 사무실 한 구석에 아무렇게나 틀어져 있는 라디오에서 이 노래가 흘러나왔다. 텅~하니, 가슴을 스치고 겨울 냉기가 지나감을 느낀다. 인생의 힘이란, 이 겨울 냉기를 견디는 능력과 비례하는 것은 아닐까. 빛과 소금 - 제발 내 곁에서 떠나가지 말아요.

일 트로바토레

토요일 아침 늦게 일어나, 세탁기에 밀린 옷들을 집어넣고는 방으로 들어와 며칠 전에 배달되어온 베르디의 '일 트로바토레'를 듣는다. 1956년도 작. 젊은 카라얀과 마리아 칼라스를 느낄 수 있는 음반. 그리고 이 오페라에 대한 설명을 읽는다. 이런 여유, 참 오래된 듯한. 베르디의 '일 트로바토레'에 대한 자세한 설명 http://cafe.naver.com/gosnc/2438

12. 18

투명하게 건조한 겨울 대기를 뚫고 내려앉는 햇살의 무게를 이기지 못해, 내 머리는 아래로 푹 숙인 채로 6호선 상수역과 2호선 합정역 사이에서 움직이고 있었다. 그리고 그 아래로 덜컹덜컹 매달린 몸뚱이, 추위와 쓸쓸함에 이름조차 기억해내지 못하는 조그만 뇌를 가진 채로. 그가 낡은 담배를 내밀었다. 상수역에서 50미터 정도, 합정역 쪽으로 향한 뒤 마주할 수 있는 거친 표정의 편의점 앞에서. 그의 옆에 서 있는 미니스커트 아가씨는 스커트를 벗어 도로 바닥에 쌓인 검은 눈을 담고 있었다. 눈이 나에게 말한다. 그가 건네는 담배를 받지 말아요. 제발 받지 말아요. 나는 눈의 언어를 들을 수만 있을 뿐, 눈에게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눈에 대한 나의 상대적 실어증인가. 그의 옆에 서 있는 긴 머리카락을 가..

도망치듯 겨울 저녁

낮은 눈길, 스러져가는 빛깔, 지친 붉은 입술, 거리의 은행나무들의 푸른 잎사귀들이 노란색으로 물들기 바쁘게 우수수 떨어져 버리는 풍경, 어느 새 2007년의 12월이 와버렸다. 그러고 보니, 이제 내 나이도 서른 다섯이 된다. 이 지리한 싱글 생활도 그만 둘 때가 된 셈이다. 이 지리한 한국에서의 생활도 그만 둘 때가 된 셈이다. 이 우울한 지구에서의 생활도 그만 둘 때가 된 셈이다. 이 처참한 은하계에서의 생활도 그만 둘 때가 된 셈이다. 하지만 내 뜻대로 되는 것들은 너무 희귀하니, 과연 그만 둘 수 있을지. 낡은 일본 파이오니아 턴테이블. 110볼트. 구입가격 100,000원. 오디오테크니카 바늘와 소형 트랜스 30,000원. 현재 판매가격 80,000원 A&B커뮤니케이션 빌딩 꼭대기층을 장식하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