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하련의 우주/Jazz Life 992

일상의 힘

하루. 하루. 하루. 하루. 이 시간-존재'들'이 어떻게 흘려가는 것일까. 아니 무슨 까닭으로 흘러가는 것일까. 이들이 흘러가는 것에는 무슨 이유가 있는 것이 아닐까. 계집같은 하루가 내일을 향해 가는 것에는 하루 뒤에서 나쁜 마음을 품은 사내가 쫓아오는 건 아닐까. 퇴근 후 사무실 근처 까페에 친구와 이야기를 나누며 에스프레소를 마셨다. 따뜻한 에스프레소 더블. 그리고 차가운 에스프레소 더블. 연거푸 마신 두 잔의 커피로 어둠 속에서도 나는 자지 않고 견딜 수 있었다. 하지만 환함 속에서의 졸음을 견디지 못했다. 시가를 얻었다. 쿠바에서 바다 건너 육지 건너 여러 차례 비행기를 탄 끝에 나의 손에까지 당도한 시가. 시가에 불을 붙여 한 모음 빨아땡기자, 담배잎을 말리던 쿠바 사람들의 땀냄새가 나는 듯 ..

禁酒

알코올은 늘 나에게 음란한매혹.보라빛신비.찬란한꿈결.푸른혼란과도 같은 존재였다. 하지만 최근, 예전보다 더 강렬하게 酒을 禁할까 하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가끔 식사를 하면서 Wine 한 두 잔 정도 마시는 것 정도로만 유지하는 것으로. 아무래도 꽤 훌륭한 선택이 될 것같다. 단, 몇 명과의 술 마시기는 영원히 지속될 것이다. 그 몇 명은 비밀. : )

목마와 숙녀

문득 목마와 숙녀가 생각났다. 사춘기 시절, 외우던 몇 편의 시들 중 하나였는데, 지금은 기억나지도 않는다. 시라고 하기엔 그 완성도가 현저히 떨어지지만, 모던한 허무주의는 늘 매력적이다. 금요일, 토요일 술을 마셨고 일요일에는 두 시간 동안 운동을 했다. 토요일에는 예술의 전당 한가람 미술관에서 하는 ‘인상주의’전시를 보았는데, 돈벌기 위한 전시라서 그런지 그 전시 공간에 놓인 작품들이 애처로워 보였고 그 공간 속에서 줄을 서서 길게 보는 사람들이 애처로워 보였다. 한국의 자본주의는 예술과 사람을 애처롭게 만들고 있었다. 애처로운 사람이 되어가고 있다. 목마(木馬)와 숙녀(淑女) 한 잔의 술을 마시고 우리는 버지니아 울프의 생애(生涯)와 목마를 타고 떠난 숙녀의 옷자락을 이야기한다. 목마는 주인을 버리..

화요일 저녁

서점에 갈 때마다 인문서적 코너를 예술서적 코너로 향한다. 그리고 습관처럼 서양미술사 책을 뒤적인다. 하지만 전문 연구 서적을 부족하고 다들 비슷비슷한 작품들을 싣고 있는, 얄팍한 깊이의 대중적인 서적이 대부분이다. 하나의 작품 속에 담긴 내용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깊다. 렘브란트의 자화상 속에서 17세기 대서양을 호령했던 네덜란드 사람들의 자부심, 우주의 끝까지 관통하는 이론을 만들었던 뉴튼의 자신감을 이야기하면 어떨까. 그래서 하나의 작품을 시작으로 17세기 유럽 전체의 상을 이야기할 수 있으며, 18세기의 세계까지 예견하고 있음을 알게 되면, 그 정도 되면 미술사나 예술사라는 학문이 어쩌면 철학보다도 한 단계 위에 있는 것일지도 모를 일이다. 하지만 이런저런 사정으로 공부를 계속하지 못한 ..

生의 찬가

오래 시간이 걸렸구려. 그대 머리 위로 둥근 팬이 돌아가지 않는 새벽이 오기까지. 그렇게 더위는 잠시 우리의, 지친 육체와 영혼을 놓아두는 듯 하군요. 검은 밤 공기와 파란 아침 공기가 부딪히며 싸우는 시간들이 지나고 어두운 거리를 배회하며 주린 배를 채우던 동물들이 제 동굴로 들어갈 무렵, 우리의 일상이 시작되곤 하지요. 몇 주 동안 거의 매일 술을 마셨네요. 가끔 까페 테이블에 엎드려 자기도 하고 까페 바닥에 쓰러져 자기도 하고 깊이를 알 수 없는 동굴 벽에 붙은 박쥐의 날개 빛깔을 닮은 아스팔트 바닥에 손을 짚고 흔들거리는 배 속의 이물질들을 뱉어내곤 했네요. 그대 나이를 잊기 위해 노력해 보지만, 쉬이 잊혀지지 않아요. 그대 기억을 잊기 위해 노력해 보지만, 실패의 여신은 하루 종일, 한 달 내내..

그녀 속의 태.양.

남극 대륙의 눈폭풍같은 더위가 빌라 4층에 잠복해있다가 연봉 몇 천 되지도 않은 서른 넷의 사내를 기습하는 시간은 언제나 새벽 2시다. 그 때 지구가 흔들리고 태양계가 두려움에 떨며 은하계의 모든 행성들이 이 빌라 4층을 주목하며 안드로메다 성운에서도 그 모습에 관심을 기울일 정도이지만, 정작 서울특별시 강서구 방화1동은 고요하기만 하다. 그렇다. 나는 더위와 싸운다. 내가 가진 건 열아홉의 순정. 자위를 하다 멈추게 금욕에 대한 욕구. 길가는 여자를 겁탈하고야 말리라는 빗나간 욕정. 언젠가는 세상에서 가장 높다는 빌딩을 찾아가 수위를 죽이고 옥상 끝에서 날아 땅바닥과 한 몸이 될 거라는, 너무 무모해서 대단한 꿈 밖에 없다. 그러니 승리는 언제나 더위다. 더위가 가진 것은 아름다운 모든 이들을 갈증나게..

추욱, 쭈욱, 쭉

어느 초현실주의 화가의 작품 속처럼 방 안 모든 것들이 추욱추욱 7월 마지막 날을 향해 늘어지기 시작했다. 형광등이 늘어졌고 이부자리가, 빙글빙글 도는 선풍기가, 선풍기에서 나오던 바람도, 내 볼이, 내 손톱이, 내 눈동자가. 모든 것들이 추욱, 쭈욱, 쭉 늘어지기 시작해, 얼마 뒤 원래 모습이 무엇이었는지조차 알 수 없을 정도로 기괴하게 변해있었다. 기괴하게 많은 비가 내린 여름이고 기괴하게 많은 사람들이 외로워하는 여름이다. 졸리다. 잠을 자야겠다. 잠에서 깨면 백 년이나, 이 백년 후이거나 이 세상의 종말이 지나가고 난 다음이었으면 좋겠다. 그랬으면 좋겠다.

밤 11시 합정역 사거리 건널목

지난 봄, 쓸쓸한 서울 거리의 먼지들을 가득 머금은 검은 빛깔의 옷을 입은 그가 조심스럽게 딛는 발자국 흔.적.에서 낮고 기인 향기가 부서져, 수증기같이 뿌연 장마비가 내리는 허공으로 흩날렸다. 그러자 창백한 혀를 내밀려 그에게 당당하게도! 키스를 요구하다 거절.당.한 그녀가 발아간 손을 내밀어 그의 거친 볼을, 그의 울퉁불퉁한 이마를, 그의 흥분한 눈썹을, 아무 말 없는 그의 눈동자를 쓰다듬는 것이었다. 그 때 합정역 사거리, 아주 오래 전부터 지쳐있는 아스팔트를 뚫고 나온 지하철 2호선으로 하얀 빛깔의 건널목 위로 들어왔다. 밤11시. 2호선 합정역 건널목. 그들이 객차 안으로 들어가고 그 곳 풍경과는 어울리지 않았던 맹렬한 소리를 내며 지하철은 당산역을 향해 떠났다. 지하철이 당산역으로 향하는 모습..

제주도 여행

오래된 먼지들을 가득 머금고 있는 때묻은 가방 속에 서른 중반의 사내를 설레게 할 프루스트와 아련한 첫사랑의 기억들로 가득찬 뮈세를 챙기고 김포공항으로 가 제주행 비행기를 탔다. 익숙치 못한 여행 탓에 기내 반입 금지 물건을 버젓이 꺼내놓고 검색대를 지나치며 땀에 미끄러진 안경을 올리며 공항 직원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그래, 나에게 며칠 간의 여유가 생겼다. 어떻게든 도시를 떠난다는 것이 내 목적이었고 어떻게든 바다에 도착한다는 것이 내 목적이었다. 하지만 일행이 있는 여행에도 익숙치 못하고 혼자 가는 여행에도 익숙치 못한 탓에 맥주 마셨다. 제주 공항에서 내려 바로 서귀포로 향했다. 바다 건너 일본이나 태평양이 있는 것이 낫지, 바다 건너 전라도나 경상도가 있는 건 별로라는 단순한 생각 탓이다. 그러..